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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머니 ◈
◇ (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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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상
나도향
1
어머니 (9)
 
 
2
춘우는 자기 집으로 향하여 간다. 새로 한 시가 넘어서 서대문 밖 넓은 길로 향하여 갈 때 그의 가슴은 말할 수 없는 비애로 가득 찼었다. 하늘을 쳐다보면 심심한 듯 말없이 번쩍거리는 별들이 스러지어 가는 촛불처럼 힘없이 번뜩거리고 땅에는 두 줄기 전차 궤도가 엉금엉금 기어가는 듯이 깔리어있다. 길거리에 켜 있는 전등불은 꼭꼭 닫힌 빈지를 비추고 저쪽에서는 술 먹을 사람이 비척거리며 이곳으로 온다.
 
3
컴컴한 정동(貞洞) 길을 지나 놓고, 옛적 서대문 마루턱에 올라섰을 때 그는 다시금 어디로 가는지 모르는 발길을 떼어 놓는 것을 알게 되었다. 집에는 적적한 전기등 켠 한 간 방이 자기를 기다릴 것을 생각할 때 그의 가슴에는 찬바람이 지나가는 듯한 공허(空虛)를 깨달았다. 그리고 다시 그 공허를 채우기 위하여, 자기 기억(記憶) 속에 감추어 두었던 영숙의 환상을 끌어내어 자기 눈앞에 갖다 놓은 후, 자기 마음대로 끝없는 공상으로 그 빈것을 채우고, 또 취하여 보았다. 두 달 동안 지내던 즐겁던 과거를 생각하고, 또는 장래의 행복을 그리어 보았다. 그의 눈앞에는 주 마등(走馬燈) 과같이 달아나는 모든 환상이 파노라마와 같이 나타났다가 사라졌다. 그러나, 그가 다시 현실(現實)로 돌아와 길 위에 서서 걸어가는 자기를 찾아내었을 때, 자기의 손에는 무서운 듯이 끌려오는 단장이 땅 위 모래에 곡선을 그리고 있을 뿐이었다. 여태까지 자기와 이야기하고, 서로 웃고 즐기는 듯 하던 영숙은 멀리멀리 공중 위로 달아나, 자기의 힘으로 끌어낼 수 없는 철수의 품 안에 안기어 고단한 꿈나라로 돌아갔을 것이다.
 
4
이것을 생각하는 춘우의 마음은 이 세상의 주인이 과연 어느 곳에 따로 이 존재 하였다 하면 그의 몸을 붙잡고 몸부림이라도 하고 싶을 만큼 무정하였다. 자기의 가슴을 이렇게 쓸쓸하게 하고, 자기의 행복을 빼앗아가는 듯 한 것은 영숙 자신의 사랑이 박약함도 아니요, 당당히 그렇게 할 권리를 가진 영숙의 남편도 아니라, 그것은 알 수 없는 수단을 부리는 이 세상의 주인 이었다.
 
5
사랑을 독차지하고 싶은 것은 사람의 통성이다. 영숙이가 비록 마음을 다 하여 자기를 사랑한다 하더라도 지금에 영숙은 자기 게 아니다. 앉고 서고, 오고 가고, 웃고 우는 것이 모두 다 자기의 것이 되지 않고는 참으로 영숙이 자기 것이 아니다.
 
6
그러나, 지금은 영숙이 나를 보고 웃던 얼굴로 철수를 보고 웃으며, 나의 가슴에 안겨 울던 눈물을 철수의 가슴에서도 울을 터이지, 내 손을 잡았던 손으로 철수의 손을 쥐었을 것이며 모든 애정을 다하여 말하던 그 붉은 입술이 철수의 얼굴을 쳐다보고 방싯거리어질 터이지, 할 때 춘우는 캄캄한 밤중 넓은 길 가운데 발을 딱 멈추고 서 있었다. 그의 가슴은 시기와 분함과 더러움으로 찼었다. 그러다가, 다시 그 부드러운 영숙의 몸이 철수의 팔에 안기었고 또는 철수가 하고 싶은 대로 자기의 욕망을 채우렸다, 할 때그는 목구멍에 납을 끓여 붓는 듯하였다. 그러고는 혼잣말로,
 
7
「가려거든 영원히 가 버려라. 나의 기억에서 영숙이란 두 글자를 빼어 가거라」
 
8
하고는 한참이나 서서 공중을 쳐다볼 때 그는 영숙을 영영 잃어버린 듯 하여 섭섭한 눈물이 저절로 흘렀다. 그러고는, 자기 혼자 속타는 것을 알아 주는 사람이 없는 것이 야속하였다.
 
9
한참이나 서 있다가 춘우는 굳은 결심을 한 것처럼 발길을 내놓으며,
 
10
『아니다. 가서 자자. 세상을 잊어버리고, 가서 자는 것이 상책이다』
 
11
하고는, 서대문 우편국을 돌아섰다. 길 옆에는 구루마가 느런히 놓여 있고 옆의 선술집에는 술꾼 두서넛이 젓가락을 들고서 빙빙 돈다. 침침한 감옥 출장소를 지나올 때, 그는 문득 옛날 생각이 났다. 자기가 어렸을 때 붉은 옷 입고 쇠사슬 차고 똥통 구루마를 끌고 가는 전중이가 저희들끼리 이야기를 하며, 무슨 기쁜 일이 있는 것처럼 빙글빙글 웃는 것을 보고, 그때 춘우는 해결할 수 없는 문제를 당한 듯이 며칠을 궁리하다가 흐지부지한 일이 있었다.
 
12
「전중이가 웃는다.」
 
13
「전중이가 무슨 즐거움이 있어 웃으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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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애 때에는 참으로 알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지금에 자기가 이 자리에서 울고 모든 것이 비애이지마는, 이따가 웃을는지 알 수 없는 것이다. 어머니의 사랑을 모르고, 감옥 속 같이 쓸쓸한 조선 사회에서 사랑하는 애인의 사랑까지 잃어버린 듯한 생각을 가진 춘우도 웃을 때가 있을 것이다.
 
15
춘우는 꿈길을 걸어가는 사람처럼 자기 집 문간에 와 서서 대문을 열었다. 문은 힘없이 열리었다. 그러나 그 문이 결코 자기를 기다리고 있던 문은 아니었다. 자기를 기다리기 위하여 열어 놓은 것은 아니었다. 늦게 들어오는 자기에게 일일이 문을 열어 주기 귀찮으니까 그대로 열어 두는 것이었다. 문을 닫아 건 후에 자기 방으로 들어가 보니까 아까 아침 자리 속에서 보다가 놓고 나간 책이 그대로 책상 위에서 주인을 기다리고 있었다. 자리는 펴놓았으나, 방에서는 적적한 기운이 돌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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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우는 자리 위에 그대로 쓰러지어 고단한 다리를 펴려 하여 두 다리를 쭉 뻗었다. 그의 머리는 혼탁한 피가 몰려갔다 몰려와 똑똑한 의식과 분명한 감정을 찾아 낼 수가 없었다. 조금 있다가, 아버지의 큰기침 소리가 안방에서 들리었다. 그러고, 웅얼거리는 목소리가 들리었다. 춘우는 자기 아버지가 약주 취하신 것을 알았다. 또다시 불유쾌한 생각이 나며, 어머니를 생각 할 때마다 어린 동생이 생각났다. 어머니의 돌아간 것이 자기 아버지와 자기와 자기 동생에게 불행을 준 것은 사실이다. 자기 아버지의 가슴에 굵다란 못을 박아 준 것도 사실이다. 그리고, 자기의 행복을 하나 뺏아간 것은 일평생 잊을 수 없는 사실이다. 그리고 자기의 어린 동생 인우(麟雨)를 생각 할 때 마다 춘우는 말할 수 없이 불쌍하였다. 자기는 날마다 아침이면 인우를 데리고 옛날이야기도 하고, 창가도 가르쳐 주었다. 자기가 시골서 돌아온 후, 가장 귀여운 친구 중에 인우는 뺄 수가 없었다.
 
17
자기 동생과 같이 노래를 할 때, 그는 비로소 세상에도 낙원이 있음을 알수가 있었다. 오늘도 춘우는 자기 방으로 인우를 부르려 하였으나, 너무 늦게 돌아온 자기로서 잠 깊이 든 동생을 부르는 것이 도리어 인우를 괴롭게 할 것이요, 또 안방에서 주무시는 아버지가 깨실까 하여 그대로 누워서 잠을 자리라 하였다. 잠은 조금도 오지 않았다. 갑갑한 심사가 자기 누워 있는 자리 밑에 가시로 방석을 만들어 깔아 놓은 것 같이 찌르는 듯하여 이리 돌아 눕고 저리 뒤치게 하여 조금도 편하지 못하다. 일부러 눈을 감고서 잠을 청하려고 애를 썼으나, 가슴속에 공연한 비애와 불만이 가득 차서 녹아지지 않으므로 잘 수가 없었다. 그는 하는 수 없이 두 손을 머리맡으로 뻗어서 책상 위에 놓여 있는 책을 다시 들어 읽었다. 그러나 까뭇까뭇하고 꼬불꼬불 한 글자가 글자대로 눈에 비칠 뿐이요 의미는 하나도 알 수가 없었다. 막연한 무엇이 머릿속에 비치었다가, 사라질 뿐이다. 다시 책을 덮고 눈을 감았다. 전신의 피곤한 근육이 어떠한 때는 저 혼자 불불 떨리기도 하고, 몰려다니는 피가 솟쳐 갔다 솟쳐 오는 듯하기도 하였다. 눈 감은 춘우의 눈 속에는 다시 영숙이가 보이었다가 사라지고, 다시 철수가 보이었다. 영숙이가 보일 때에는 그래도 자기의 마음을 부드럽게 하여 주고 무슨 희망이 가슴에 차는 듯하였으며, 철수가 보일 때에는 자기 마음 가운데에 조소 하는 생각과 또는 멸시하는 생각이 자기의 우월감과 함께 일어났으나, 영숙과 철수 두 사람이 한꺼번에 생각이 날 때에는, 그는 두 사람이 모두 보기가 싫고 밉고 질투스러웠다. 철수는 영숙을 빼앗아 간 것 같고 영숙은 자기를 배반한 것 같았다. 그러한 생각을 할 때마다 깜깜한 밤중이 싫었다. 쇳덩이같이 무거운 암흑이 자기 전신을 내리 누르는 것 같아서, 그는 다시 눈을 떴다. 그리고, 또 오늘 자기가 만나자고 약조한 곳에 오지 않은 것을 생각 할 때 불길 같은 의심이 더럭더럭 일어나기 시작하였다. 영숙은 절대로 자기를 사랑하여 주지 않는 것이라 하였다. 만일 그가 참으로 자기를 사랑 한다 하면, 자기의 남편이 왔거나 무엇이 왔거나 반드시 자기를 찾아와 주었을 것이라 하였다. 자기의 처지를 반성하는 동시에 또한 영숙을 의심 하게 되었다. 자기는 인물도 잘생기지 못하였고 학식과 재주와 또는 재산도 없는 불쌍한 가운데에도 더 불쌍한 사람이다. 그와 같은 사람을 다만 옛날에 함께 학교 다니었다는 박약한 조건으로써 사랑한다는 것은 알 수 없는 일이다. 자기가 남의 첩이 되어 세상에서 죄 있는 사람처럼 인정하는 것이 싫어서 자기의 사회상 지위를 고치기 위하여, 나를 사랑한다 하면, 그것은 너무나 천박한 생각이 아니라 할 수 없다. 만일 자기가 이 세상 모든 조건을 떠나서 참으로 나라고 하는 사람 하나를 사랑한다 하면 모르거니와, 그렇지 않고 자기의 허영적 명예심을 충족시키기 위하여, 나를 한낱 이용물로 쓰겠다 하면 오늘부터라도 아주 끊어 버리고 만나 보지 않는 것이 가장 옳은 도리라고 생각하였다.
 
18
춘우는 다섯 시 치는 소리가 꿈 속에 들은 것인지 모를 만큼 혼수상태에 빠지었다가, 어느덧 눈을 떠 보니까, 날이 환하게 밝았었다. 그는 자리 속에 누웠는 것이 갑갑하여, 다른 날보다 유달리 일찌기 일어났다.
 
19
인우가 두 눈에 눈곱이 덕지덕지한 채, 방문을 열고 건너왔다. 춘우를 보는 인우의 얼굴은 또 무슨 불안한 소식을 가지고 온 것 같이 주저주저 하는 표정이었다. 인우는 슬며시 옆으로 와서 춘우의 눈치를 살피더니, 무슨 말을 할 듯이 잠깐 가까이 앉으려 하다가, 다시 뒤로 물러섰다. 춘우는 찌뿌드드한 얼굴을 비비며, 인우의 이상스러운 꼴을 보고서,
 
20
『거기 앉아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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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고 앉기를 청하였다. 인우는 비스듬 쓰러지는 것처럼 춘우 무릎에 기대 앉으며,
 
22
『저 ——』
 
23
하고 말을 꺼내려 하였다. 춘우는 인우의 등을 어루만지면서,
 
24
『춥지 않으냐?』
 
25
하고서 다시 무릎 위에다 끌어 앉히며,
 
26
『어젯밤에 아버지가 약주 취하지 않으셨든?』
 
27
인우는 손가락을 입에다 물고서 그런 말을 듣는 것이 부끄럽다는 듯이 몸을 비비꼬며 고개만 끄덕끄덕하면서 얼굴에는 웃음을 띠고, 차마 입 밖에나 오지 않는 목소리로,
 
28
『응』
 
29
하였다. 춘우는 그 부끄러워하는 것이 몹시 귀여워서 맞웃음을 치면서,
 
30
『주정 하시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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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니까, 인우는 또 끄덕끄덕할 뿐이더니,
 
32
『저!』
 
33
하고, 저 소리를 길게 빼어 말 시작을 한다.
 
34
춘우는 그「저」소리를 받아서,
 
35
『그래』
 
36
하였다.
 
37
『아버지가 밤새도록 우셨어.』
 
38
『밤새도록 우셨어?』
 
39
『어제 낮에 돈 달라고 오는 사람이 있었지? 그 돈 달라고 오는 이말야. 그이가 와서 돈 달라 하고 떠들고 간 뒤에, 아버지가 약주를 잡숫고 오시더니, 자꾸 우셨다누!』
 
40
그 돈 달라고 온다는 사람이란 말할 것도 없이 빗장이다. 춘우는 자기 아버지가 울었다는 말이 어린 인우의 순결무구한 감정으로 한 번 체질하 듯이 걸러 지어서 귀여운 입을 거치어 나온 것을 들을 때, 무슨 알 수 없는 정서(情緖) 가 자기 가슴속에서 머리를 번쩍 들더니, 그것이 온 전신으로 확 퍼지는 듯한 느낌이 있었다. 말끝이 나온 인우의 입에서는 자꾸자꾸 꼬리를 이어 나온다.
 
41
『그러구 언니! 인제는 우리 집안 식구가 모두 죽는대.』
 
42
철 모르는 인우의 입에서도「죽는대」라는 말소리가 나올 때에는 얼굴빛에 엄숙하고도 근심스러운 빛이 보이었다. 사람이 본능적으로 타고나온 관념 주에 가장 극단과 극단 가는 두 가지 관념은 죽는다는 것과 살겠다는 것이다. 이 두 관념 중에 죽는다는 것은 가장 비참한 것을 대표한 것이요, 산다는 것은 가장 행복스럽다는 것을 말하는 것인데, 어린 인우의 가슴속에서도 죽는다는 말을 할 때에는 그 가장 비참하다는 관념이 자기가 당해 보지 못한 그 어떠한 사실을 일으키게 하는 듯하였다.
 
43
춘우는 인우의 말을 듣고서, 어저께 일어난 무슨 사실을 알 수가 있었다. 자기 집은 지금 파산을 당하게 되었다. 날마다 찾아오는 이가 반갑지 못 한 채귀(債鬼) 들이요, 덜미를 누르는 것은 무서운 생활난이다. 오늘 이렇게 자기 집을 영락시킨 원인은 자기 어머니의 죽음이었다. 자기 어머니가 돌아가자, 자기 아버지는 다시 아내를 얻지 않는다고 맹세까지 하였다. 자기의 전도를 생각하여, 다시 아내를 얻지 않겠다고 하기는 하였으나, 전에는 입에다가 대지도 않던 술을 마시기 시작하더니, 집안 일을 돌아보지 않고, 세상을 엄벙뗑하는 가운데 보내게 되었다. 그러더니 아무리 자기가 아내를 얻지 않는다고 맹세는 하였으나, 성욕을 가진 그로서 여자와 조금도 관계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그는 다시 방탕계에 발을 들여놓게 되더니 그때부터는 돈을 물쓰듯 하기 시작하였다. 춘우는 할아버지가 원깨나 다닐 때, 모아 놓은 볏백이나 하던 재물은 떡덩어리 떼어먹듯 무척무척 없어지더니, 지금 와서는 재산과 부채를 따져 보면 집간 남은 것하고 땅뙈기 남저지를 모두 팔아도, 빚을 갚으려면 몇 곱절이 더 있어야 할 것 이다. 이와 같이 알면서도, 질질 끌리어 진흙의 구렁에로 들어간 춘우의 아버지는 지금에 가정(家政)을 만회할 길이 없어지니까 다시 자타락에 빠지게 되었다. 친구의 권고와 일가의 주선으로 아내라고 하나 갖다 놓기는 놓았으나, 그 아내의 애정이 깊이깊이 속이 썩은 춘우의 아버지의 마음을 바로잡아 놓기에는 너무 힘이 약하였다.
 
44
그래서, 춘우의 아버지는 어느 곳에 하소연할 곳이 없고 의논 한 마디 할 곳이 없어지었으나, 그래도 믿을 곳은 춘우밖에 없어서 춘우에게 집안 살림을 떼어 맡기려고 하나, 몇 해 전에 춘우의 아버지가 한참 방탕히 지낼 때, 춘우가 여러 번 간한 일이 있었으나, 춘우 아버지는 춘우의 말을 듣지 않고 어느 때 한 번은 춘우에게 대하여 너는 내 자식이 아니란 말까지 한 일이 있었다. 춘우는 그 말 한 마디를 들을 때에 원통함이 골수에 사무치는 듯 하였다. 그래서 몇 해 동안 시골과 내지로 돌아다닌 일이 있다가, 다시 경성 에 돌아온 것이다. 경성에 돌아와 보니까 자기의 책임이 무거워지었다. 한집안의 큰자식으로 자기 아버지가 진 빚을 아니 갚을 수 없다. 빚은 고사하고 오늘부터라도 나가서 일을 해야 어린 동생을 굶기지 않을 지경이다. 그러한 책임감을 가지고 있는데다가 이제 와서는 춘우의 아버지도 정식으로 춘우에게 다가 집안 일을 맡아 보아라, 늙은 아비를 먹여 살려라, 남의 자식 된 직책을 지켜라 하고, 날마다 때마다 만나는 대로 그 말에 머리가 셀 지경이다. 그러나, 춘우의 힘으로는 그것을 할 수가 없었다. 어디 가서 자기 밥 벌이 하나 할 수 없는 처지에 그러한 무거운 짐까지 지기에는 춘우의 힘이 부족하다. 때때로 자기를 번민시키는 책임 관념, 어린 동생에게 향 하는 본능적 애정, 부모에게 대한 뗄 수 없는 의리가 가슴속에서 불같이 일어날 때마다 춘우는 땅을 치고 울거나 가슴을 두드리고 탄식을 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다가, 그것이 극도를 지나가면 자기의 피가 모두 얼음장같이 식어 버린 듯이 냉정하여지고 자기의 몸을 아무렇게나 내던 지어서 죽거나 살거나 되는 대로 지내리라 하는 생각이 나며, 아버지도 밉고, 세상도 밉고, 모든 것이 모두 미웠다. 그러나 어린 인우 하나는 언제든지 잊을 수가 없었다. 인우는 자기의 친구요 애인이요 모든 행복을 주는 사람 가운데에 하나 이었다. 인우를 볼 때나 생각할 때마다 가슴속에서 몰려나오는 동정의 마음이 아무리 하여도 그 어린 동생을 자기에게서 떠나게 할 수가 없었다.
 
45
지금 다섯 살밖에 되지 않은 인우는 벌써부터 그 따뜻한 유년 시기에 외로움과 처량함으로 차디차고 쓸쓸한 세상 맛을 보게 될 것을 생각할 때 다만 조금이라도 그 천진난만한 어린 시기를 그대로 지내게 하여 주고 싶었다. 사람이 그러지 않아도 나이 먹음을 따라서 모든 괴로움을 맛보지 아니치 못 하는 것이 말할 수 없이 애석한 일인데, 피지도 못한 꽃봉오리에 차디찬 서리가 내리는 것 같이 흠 없는 어린 마음이 일찌기 시들어 버릴 것을 생각하 매, 불쌍하고 측은한 생각이 가끔가끔 춘우의 두 눈에 눈물을 머금게 하였다.
 
46
춘우의 아버지는 춘우와 마음이 맞지 않은 후부터는 인우까지 미워하였다.
 
47
더구나 아버지되는 자기보다는 형되는 춘우를 인우가 더 따르는 것을 볼 때 알 수 없는 질투의 마음이 생기며 인우에게 냉담하게 굴었다. 공연한 꾸지람과 핀잔을 주기도 하고, 쓸데없는 트집을 잡아서 때려 주기도 하였다.
 
48
어제 저녁에도 자기가 늦게 돌아와서 알지는 못하였으나, 필연코 아버지에게 꾸지람을 들었을 것이요, 공연히 부대낀 것이 틀림없다. 숙성한 인우가 비록 말로는 하지 않으나, 그 표정을 보아서 어제 저녁 일을 추측할 수가 있다.
 
49
춘우는 다시 인우의 손목을 쥐면서,
 
50
『어제 저녁에도 꾸지람 들었니?』
 
51
하니까, 인우는 안방 쪽을 향하여 보다가, 고개를 돌리면서 조심스러운 듯이,
 
52
『응』
 
53
하였다.
 
54
『무엇이라 하시든?』
 
55
『형님허고 나허고는 어디로 가라구 그러셔』
 
56
하는 말을 그친 인우는 손가락으로 춘우 무릎에 있는 신발을 뽑으며, 고개를 숙이고 앉아 있다.
 
57
춘우는 이 말을 듣고서, 납덩이같이 울분한 생각이 가슴을 누르는 듯 하였다. 그래서, 그 말을 듣고서는, 벙어리가 된 것 같이 멀거니 앉아 있을 뿐이었다. 인우는 다시 춘우의 얼굴만 살피더니, 용기를 내는 것처럼,
 
58
『언니! 우리는 딴 데 가서 삽시다. 날마다 아버지는 걱정만 하시니… 딴데 가서 살아도 괞찬우? 나는 언니허고 살면은 어디든 좋아!』
 
59
춘우의 가슴은 무엇으로 찌르는 듯하였다. 그러나 어린 동생까지 타락 을시 켜서야 될 일이냐? 아무리 부모가 자기에게 잘못하는 일이 있다고 할지라도, 부모를 거역하라고 동생에게 가르칠 수는 없었다.
 
60
『그런 소리 말아. 아버지가 다 너를 예뻐서 잘 하라고 그러시는 것이지, 미워서 그러시는 것은 아냐. 가기는 어디를 가니, 우리 집을 내버리고… 너 다른 데 가면은 밥 먹을 곳이 있니, 옷 입고 뜨뜻하게 잘 곳이 있니. 집에 있으면, 아버지가 밥도 먹이고 옷도 입히고 뜨뜻하게 자게도 하여 주지 않니! 아버지는 우리를 좀 귀애하시냐, 화가 나시니까 그러시는 것이지. 아버지 없는 아이가 되어 보아라, 얼마나 불쌍하였겠나. 집도 없고, 먹을 것도 없고, 입을 것도 없어서, 얻어 먹으러 다니는 거지가 되었는지 모르지.』
 
61
인우의 얼굴을 들여다보며, 등을 어루만지는 춘우의 말소리에는 아침 동산에 어리인 안개 같은 우수와 비애가 섞이었다. 인우는 자기 형의 말을 알아듣 기는 듣지만, 그래도 항상 자기 마음 한 귀퉁이가 언제든지 비어 있는 것을 무엇으로 채울는지 몰라서, 적적하고 외로움을 느낄 때마다 자기 형을 보고 언제든지 묻는 것처럼,
 
62
『그런데, 우리는 언제나 어머니 있는 사람이 되우! 남들은 어머니가 버선도 해 주고, 어디 갔다 오면 과일도 사다 주던데, 나도 어머니가 있었으면 좋겠어 우리 어머니(서모)는 어째 우리 정말 어머니 같지가 않아! 나는 정말 어머니가 있었으면 좋겠네! 정말 나를 귀애해 주는 어머니말야. 나는 언제나 정말 어머니가 생기우?』
 
63
춘우는 울고 싶었다. 무엇이라 말할 수가 없었다. 너의 어머니, 정말 어머니는 다시 오지 못하실 곳으로 영영 가 버리셨단다고 말할 수도 없고, 도 다시 오신다고 말할 수도 없다. 어머니가 그리운 것은 너뿐이 아니다. 나이 먹어 철이 난 나도 어머니가 이렇게 그리웁거든 나 어린 너로서야 아니 그리울 리가 있겠느냐? 춘우는 다시,
 
64
『인제 오신단다. 네가 내 나이만큼 먹고 어른이 되면은, 그때는 네가 너의 어머니가 어디 계신 줄도 알고 참말 어머니가 오시게 된단다.』
 
65
인우는 비웃는 듯이 형을 쳐다보며,
 
66
『정말요? 거짓말! 막둥네 아지머니(이웃집 여자)가 그러는데, 우리 어머니는 죽었다는데. 죽었으니까 다시 오지를 않는대.』
 
67
춘우는 옆의 집 여자를 원망하는 생각이 났다. 어린애에게 부질없는 소리를 하여 섭섭한 생각이 나게 할 것이 무엇이냐?
 
68
『아니, 그렇지만 다시 오시지 않는 것이 아니라, 네가 나이 먹으면 어머니 계신 곳에 갈 수도 있고, 또 어머니가 너에게 오실 수도 있단다. 내 말을 믿어라. 나는 너에게 거짓말을 하지 않으니.』
 
69
『그러면, 언니는 어머니한테 가끔가끔 가시우. 또 어머니도 가끔가끔 언니에게 오시구, 그러면 왜 나한테는 오시지를 않아?』
 
70
이러한 경우에 춘우는 양심의 부끄러움을 당하게 된다. 어린아이의 마음을 위로하고 믿음이 생기게 하기 위하여 거짓말을 아니 할 수 없다는 것을 생각 하면 어린아이를 보기에 부끄러운 생각이 났다. 그러나, 이것이 소위 사람이 살아가는데 없지 못할 것이라는 수단이었다.
 
71
『요사이는 오시지 않는다. 차차 겨울이 되면 날이 치워지니까 오실 수가 없지 않겠니! 그러니까 내년 봄에 눈이 녹고 날이 따뜻하여질 때 오시게 되지, 꽃도 피고 나비도 날아다니고 할 때말야.』
 
72
『그러면 그때가 오려면 며칠 밤을 자야 하우?』
 
73
『인제도 여러 백 날을 자야 하지.』
 
74
『어이구, 왜 그렇게 많아, 그러면, 그때는 꼭 오시지?』
 
75
『암, 오시지.』
 
76
『그러면, 나는 그때까지 기다리고 있을 터이야.』
 
77
『그래, 기다려라! 그런데, 우리 창가 한 마디 할까?』
 
78
『창가? 무슨 창가?』
 
79
인우는 부끄러움을 이기지 못하는 듯이 몸을 비 비꼬더니,
 
80
『언니가 먼저 하우.』
 
81
이때에 안방에서는 아버지의 기침 소리가 났다. 그러더니, 서모가 놋대야에 세숫물을 떠다가 마루 끝에 놓고 인우를 부르더니,
 
82
『인우야! 언니 세수하시라구 그래라』
 
83
하고 소금 그릇을 갖다 놓았다. 춘우는 인우 대신,
 
84
『녜.』
 
85
대답을 하고서, 둘이 병창하던 노래가 끝나기를 기다려 문 밖으로 나왔다.
 
86
세수를 다하고 석경을 들여다보며, 수건질을 할 때에 자기 얼굴이 수척하여 진 것을 발견하였다. 꺼뭇꺼뭇한 수염이 거칠거칠하게 나고, 가뜩이나 내민 광대뼈가 우묵하게 들어간 두 뺨과 두 눈 사이에 우뚝하게 솟았다. 그리고 우물 속에서 하늘 빛을 반사하는 물빛같이 음침한 두 눈망울이 힘없이 구러 다니는 것이 자기가 자기 눈을 보는 춘우에게도 무서움이 생길 듯 하게 한다. 말이 없이 다문 입과 잠깐 찌푸려진 듯한 이맛살이 영원토록 웃지 않는 사람과 같이 보인다. 비석 위에 때때로 쏟아지는 비가 어느 틈엔지 그 글자를 흐려 놓는 것과 마찬가지로 분명하게 꼬집어 말할 수 없는 불행의 인상이 어느덧 춘우의 얼굴에서 핏기 있고 생생한 젊은 기운을 깎아 버린듯 하였다.
 
87
춘우는 석경을 들여다보며, 쓰고 쓴 웃음을 웃어 보았다. 시꺼먼 입 속에서 윤기가 나는 하얀 이가 나타나 보일 때 춘우는 그렇게 초췌하여진 얼굴에서 그렇게 희고 윤기 있는 이를 발견한 것이 기적과 같았다.
 
88
어떻든 자기가 나이보다는 더 늙은 것이 사실이다. 다만 한때라고 더 젊은 몸으로 더 청춘을 누리어 보았으면 좋겠다 하는 것이 사람의 통성이 되어, 늙은 몸에도 향수를 뿌리고 분을 바르고 단장을 하여 젊게 보이려 하 거든 젊은 사람으로서 늙게 보인다는 것은 너무나 애석한 일이다. 일평생에 다시 돌아올수 없는 청춘 시기를 어디까지든지 청춘으로 지내 보겠다. 뜨거운 정열을 가진 사람으로 생기 있게 살아 보고 싶다는 것이 그때 춘우의 전 신의 피를 사르는 듯한 욕망이었다.
 
89
그는 빗을 들어 더부룩한 머리를 빗은 후 화나는 사람처럼 책상에다가 탁 내던지었다. 춘우는 공연히 몸부림을 하고 싶고 어디다가 화풀이가 하고 싶다. 어제 저녁에 영숙을 만나 보지 못한 섭섭하고 야속한 질투가 뒤섞여 용솟음 치는 감정의 나머지가 아직까지도 가슴속에서 사라지지 않는데다가 어린 동생의 애처로운 말소리를 듣게 되니, 버티어 놓은 석경을 깨뜨려 부수 거나, 무슨 굉장한 사실이 당장에 발생하여 자기의 지금 생활을 그 어떠한 다른 생활로 바꾸어 놓았으면 좋겠다 하는 생각이 났다. 그 다른 생활이라는 것이 지금 이 생활보다 더 비참하여도 좋았다. 어떻든 지금 이 생활에 싫증이 난 그는 무엇이든지 새로운 것이 맛보고 싶었다. 새로운 생활 그것이 더 달거나 더 쓰거나 그것은 관계할 것이 없이 어떻든 새것이 맛보고 싶었다.
 
90
아침밥을 먹으려고 안방으로 건너갔다. 아버지는 이제야 일어나 앉아서 전복에 실백을 싸서 먹고 앉았다. 이 전복에 실백을 싸 먹는 것이 아버지의 가장 좋아하는 음식도락이다. 그의 주머니 속에는 어느 때든지 신문지에다가 전복과 실백을 싸 가지고 다닌다. 그래서, 아침에 일어날 때나 저녁에 잘 때는 으례 한 번씩 먹어야 하고 또는 심심할 때와 남하고 이야기할 때는 빼놓지 않고 내놓는다. 본래의 궁한 것을 모르고 지내던 사람이라 자기가 좋아하는 것이니까 남도 좋아하려니 하고, 싫다고 하여도 남에게 권한다. 그 대신 담배를 먹지 않으므로, 남의 담배 먹는 대신 그것을 먹는다. 지금도 한 쌈을 싸서 입에다가 들어뜨리더니, 두 손 끝을 탁탁 털고 싹싹 비빈 후, 움질움질 씹다가 방바닥에 떨어진 잣 알갱이를 집어 먹으며,
 
91
『전복이 벌써 다 없어졌나?』
 
92
하고, 식성이 차지 않고 부족하다는 듯이 뒤로 물러앉는다. 춘우의 서모라는 이는 상을 춘우 앞으로 가까이 놓으면서, 영감의 대답을 핀잔 비슷하게 꽉 쥐어지르는 소리로,
 
93
『벌써가 다 무엇요? 그동안 적게 자셨소? 생각을 좀 하여 보시구료?』
 
94
하니까.
 
95
『글쎄 먹기도 무던히 먹었지마는, 그럼 또 좀 들여오래야겠군!』
 
96
『어보, 누구더러 들여오랜단 말요? 이젠 전복에 진절머리도 나지 않는 단말 이오? 온 전복을 그렇게 허구한 날 자신단 말이요. 어물전에도 갚을 돈이 여러 십 원이 있는데, 돈도 주지 않고 들여오라구만 하면 누가 준답디까?』
 
97
할 말은 없으나, 여편네에게 말 한 마디라도 지는 것이 위신상 부끄러운듯 시 사내의 억지를 부려서,
 
98
『압다, 별걱정 다 하네. 언제든지 주기만 하면 고만이지. 그까짓 것이 무서워 먹을 것도 먹지 못한단 말이야? 공연히 식전부터 남의 맘을 글컹 거리 거든!』
 
99
여편네 된 꽁한 마음에 옳은 말 하는데 듣지 않는 것이 분해서,
 
100
『누가 맘을 글컹거린단 말이오. 내가 조금인들 그른 말 하였소? 빚장이는 날마다 와서 조르는데, 그 비싼 전복만 먹고 앉았기만 하면은 심평이 핀답디 까?』
 
101
『압다, 퍽두 앙앙거리네. 식전부터 여편네가 왜 이 모양이야. 집안이 가뜩이나 망하여 가는데.』
 
102
이 말을 듣는 춘우의 서모는 갑작스럽게 두 눈썹이 찡긋 일어서는 듯 하더니, 두 눈에서 독살스럽게 광채가 번갯불같이 있어났다. 본래 자기가 남의 소실이 되어, 자격지심이 언제든지 사라지지 않고 가슴 한 귀퉁이에 숨어있는데, 자기 남편이 자기는 조금도 긁는 말 한 것이 없는데, 자기 때문에 집안이 망한다는 말을 듣고서는 그대로 참을 수가 없었다.
 
103
『무엇이 어째요? 집안이 망해요? 나 때문에 집안 망한 것이 무엇요? 집안을 망해 놓은 사람이 누구요? 내가 당신 집에 와서 집안을 망해 놓은 것이 무엇이요? 내가 당신 집 온 후로 당신이 나를 호강 한 번 시켜 주었단 말 이오. 몇 천 석 추수를 떼어 주었단 말이오. 왜 걸핏하면 날더러 집안이 망하느니 흥하느니 하고 여러 말요?』
 
104
이 꼴을 젓가락 끝으로, 밥알을 고르면서 듣고 있던 춘우는 불쾌한 생각 이나서, 얼핏 두어 술 뜨고, 바깥으로 나가서 이 꼴을 보지 않으리라 하였다. 영감은 자기 말이 잘못 나가서 듣는 사람은 오해하게 되었다 하는 생각이 들었으나, 본래 고집이 세고 또 자기가 홧김에 말은 그리 하였으나 본 마음에서 나온 것이 아니므로, 내내 뻣뻣하게 나간다.
 
105
『압다, 언제 내가 마누라 때문에 집안이 망했댔나? 아침부터 남의 심사를 건디리니까 말이지, 왜 소리를 버럭버럭 지르고 야단이야.』
 
106
인우는 자기 형과 겸상하여 밥을 먹고 앉았다가, 숟가락을 든 채, 두 눈이 똥 그래지어서 두 사람의 눈치만 보고 앉았다. 춘우는 인우가 겁이 나서 밥도 먹지 않는 것을 보고서,
 
107
『밥 먹어라! 어서 밥 먹고 나가 놀아라』
 
108
하니까, 인우는 그때야 밥그릇에 숟가락을 꽂으며, 고개만 끄덕끄덕하고 춘우에게서 무슨 위안을 얻은 듯이 다시 고개를 이쪽 밥상 편으로 돌리었다. 춘우서모는 다시 두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 하여지며,
 
109
『아무리 내 팔자가 사나워서 영감 집에 와서 살기는 하오마는, 내가 도적이 아닌 이상에 남의 집을 망해 놓으려 하지는 않는다우.』
 
110
『웬 잔소리야. 엥』
 
111
하며 본래 생시에는 말 한번 없는 사람이라 공연한 역정을 내기는 하고서 뒷말 감당을 못 하여 속에서 답답한 울화만 치밀려 올라와서 손끝만 맞 비비며 얼굴빛이 푸르락누르락하여 엥엥거리고만 있었다. 춘우의 서모는 밥도 먹지 아니하고, 그렁그렁하였던 눈물이 찔끔 나와서 그것을 감추지도 못하고, 춘우 있는 것이 부끄럽던지 행주치마로 그것을 씻으면서 바깥으로 나가더니, 훌적훌적 소리를 내어 운다. 우는 소리를 듣는 방 안에 앉은 세 사람의 얼굴에는 쓸데없이 비창한 빛이 들면서 조상하러 온 사람들 모양으로 엄숙하고도 슬픈 얼굴로 말없이 앉아 있다. 춘우 아버지는 말로는 춘우의 서모를 위로하거나 타이르거나 꾸짖을 만한 수단이 없고 속으로 답답한 생각만 나서, 빙충맞은 소리로,
 
112
『압다, 쪽쪽 울기는 왜 울어!』
 
113
하고서는, 받았던 상을 홱 내는 바람에, 숟가락과 젓가락이 방바닥에 땡 그렁 하고 떨어지었다. 춘우는 밥을 먹으면서 어서 바삐 창하의 집에 가서, 영숙의 안부와 동정을 들어 보고 싶은 마음이며 어제 저녁에 만나 보지 못한 섭섭한 감정, 또는 머릿살 아픈 세상을 어떻게 해야 좋을는지 알지 못 하는 성가신 마음으로 밥 두어 술을 뜨고서, 일어서 나오려 할 때 그의 아버지는 풀리지 못한 화풀이를 다시 춘우에게 하려고,
 
114
『어디를 가니?』
 
115
하며 몹시 마땅하지 않다는 듯이 쳐다본다.
 
116
『문안 가요.』
 
117
『문안은 왜?』
 
118
언제든지 아침만 먹으면 나가는 줄 알건마는 공연히 물어 본다.
 
119
『누구 좀 볼 일이 있어서요.』
 
120
『누구를 본단 말이냐, 누구야 누구?』
 
121
『창하의 집요.』
 
122
『응, 창하의 집』
 
123
하고 한참 말없이 창만 내다보더니,
 
124
『날마다 너는 하는 게 무엇이냐?』
 
125
이 말을 들을 때에 춘우는 불 같은 감정이 또다시 가슴속에서 치밀어 올라왔다. 아버지는 말을 이어서,
 
126
『너도 나이가 스물이 넘었으면 철이 좀 나야지! 대강이가 커단 것이 날마다 빈들빈들하면서 아비의 밥 얻어먹기만 하면 제일이란 말이냐? 너 하는것이 무엇이냐? 대관절…』
 
127
춘우는 꿀꺽 참고 그대로 들으리라 하였다.
 
128
『너는 네 아비가 어떠한 처지에 있는지 알지 못하니? 날마다 빚장이에게 졸리는 것을 너는 알지, 먹고 살 것이 없는 것도 알지 않니.』
 
129
춘우는 이 말을 한두 번 들은 것이 아니요, 머릿속에 굳게 박히고 박히어 이제는 의례건으로 가끔가끔 듣지 않으면 도리어 기적이 될 것 같이 되었다.
 
130
『오늘부터라도 너 먹을 벌이는 네가 할 것이 아니냐? 어린 동생도 생각 해야지. 사람의 자식이 아무리 철이 없고 생각이 없고 미련하기로 그런 생각을 못 해?』
 
131
춘우는 이 소리를 듣고서 불꽃같이 가슴속에 타오르는 무엇이 있었다. 철이 없고 생각이 없고 또는 어리석다고 하는 말은 아무리 자기 아버지라도 그대로 들을 수 없는 모욕이었다. 그러나 그것을 무엇이라고 탄하여 말을하랴. 또는 말대답을 하는 것은 동양 윤리에 거슬려지는 것이라는 관념을 아직까지도 머리속에 보존한 그는 목구멍으로 치밀어 올라오는 화를 참고서 장승같이 서 있었다.
 
132
『너는 인제부터 어떻게 할 작정이냐. 내가 언제든지 네게 말한 것과 같이 인제는 너 할 직책을 지켜야 하지 않겠니? 대답 좀 하여라. 네 소견은 어떠한 소견을 가지고 있니? 그것 좀 들어 보자.』
 
133
춘우는 공연한 혐의로 검사에게 취조를 당하는 것처럼 속이 거북하고 괴롭고 귀찮아서 견딜 수가 없었다. 그래서 이를 악물고 당초에 대답을 하지 않으리라, 그러면 아버지도 자기 출물에 고만두리라 하였다.
 
134
『………』
 
135
『어디 대답 좀 들어 보자, 응? 대답을 좀 해라.』
 
136
그래도 말이 없다.
 
137
『엥, 망할 자식, 갑갑하다. 이렇다든지 저렇다든지 대답을 해. 그렇지 않으려거든 오늘부터라도 내 눈앞에 보이지를 말아라.』
 
138
이 말을 들을 때에 춘우는 자기 아버지의 마음을 짐작하거나 세어 볼 여지가 없이 가장 분한 마음이 치밀어 올라왔다. 이 세상에서 가장 분한 것은, 떼려 하나 뗄 수 없는 정리를 그 어떠한 한쪽에서 스스로 떼려 하는 것이다. 춘우는 입은 어느덧 떨어지더니,
 
139
『아버지 앞에 오지 말라고 그러시면은, 언제까지든지 오지 않겠읍니다.』
 
140
비장한 목소리는 힘있게 떨리었다. 지금까지 참았던 모든 울분이 막혔던 보가 터져 나오는 것 같이 목구멍을 찢을 듯이 뭉텅이가 되어서 나온다.
 
141
『아니 오죠! 얼마든지 아버지 앞에 오지 않죠』
 
142
하는 얼굴은 우는 듯하기도 하고, 무서운 결심을 하는 듯하였다. 아버지는 갑작스럽게 이와 같이 엄숙한 장면이 눈앞에 나타날 줄은 알지 못하였다. 또는 자기 아들은 언제든지 자기의 명령을 복종하며 자기의 의견과 자기의 하는 바를 절대로 이행하며 순종할 줄만 알았다. 그래서 오늘 춘우의 한 마디 말이 춘우 아버지에게 이 세상에는 어디 가든지 들어 보지 못할 말로 알게 되는 동시, 춘우의 행동을 괴상하게 여기게 되어, 혹시 정신이 이상하여지지나 아니한가 하고 한참 물끄러미 바라보게 되었다.
 
143
『가라고 하시면 가지요! 아버님께서는 언젠가 절더러 아들이 아니라고 하신 일이 있지요? 아버지 입으로 저를 자식 아니라고 하신 일이 있지요? 그러시더니 오늘은 저더러 가라고 하시지요? 제가 여태까지 아버지 앞에 있기는 있었으나, 아버지의 밥과 아버지의 옷을 입어 보지를 못하고 먹어 보지를 못했읍니다. 또 아버지의 사랑을 받아 보지 못했읍니다. 아버지는 아버지의 아들을 아들이 아니라 하시고, 또 나중에는 나가라고까지 하시었지요! 이 집안을 망하게 한 사람이 누굽니까? 그것이 아버지시지요? 제가 여태껏 먹고 살아온 것은 아버지의 힘으로 장만한 것이 아니라, 할아버지가 우리에게 물려 주신 재물이 아닙니까? 아버지는 그 재물을 모두 없애 버리셨지요. 그러고는 할아버지의 손자요, 아버지의 아들을 아들이 아니라 하시고, 또 나가라고까지 하시었지요. 가라고 하시면 얼마든지 가겠읍니다. 가지요…』
 
144
하고서, 문을 홱 열어제치고 나갈 때,
 
145
『언니!』
 
146
하고 인우가 따라나오며 옷깃을 잡고,
 
147
『나하고 가!』
 
148
하며 매달려 운다.
 
149
춘우는 어머니의 마음은 갖지 않았었다. 그러고, 그때에 춘우의 감정은 이 세상에 가장 완악하고 악착스러운 악마 같은 마음으로 변하였었다. 그래서, 달려 나오는 인우를 뿌리치어 마룻바닥에 엎드러지게 하였다. 그러고, 어린인우가 철썩 거꾸러질 때, 연한 살과 약한 뼈가 문지방에 무딪치는 소리를 듣고서, 찌르는 듯하고 저리는 듯한 감정이 가슴에 울려 오지 않을 바가 아니지마는, 그는 뒤퉁그러진 입술을 찌푸리며,
 
150
『너는 다 무엇이냐. 동생이 다 무엇이냐.』
 
151
혼자 중얼거리며, 건넌방으로 건너갔다.
 
152
인우는 아픈 것도 잊어버리고, 정강이를 비비면서 건넌방으로 춘우를 따라 건너갔다. 춘우는 두루마기를 집어 입고 모자를 눌러 쓰고 마루 끝으로 향 하여 내려왔다.
 
153
인우는 종종걸음을 치면서,
 
154
『언니, 언니』
 
155
하고 춘우의 두루마기 자락을 부여잡고,
 
156
『가려거든 나구 가!』
 
157
하며 구슬 같은 눈물이 얼굴에서 비오듯 한다. 춘우는 아까 방에서 나올 때에는 그렇게 매정하게 뿌리쳤으나, 이번에는 뿌리칠 수가 참 없었다. 다만 물끄러미 우는 인우를 바라보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다가는, 또다시 자기 마음속에서 불 같은 노여움이 솟아오르고, 누가 옆에서 소리를 질러 일러 주는 것처럼,
 
158
「모든 것을 다 내버리고 정처 없이 떠돌아다닐 터이다!」
 
159
하는 생각이 다시 날 때 그는 자식이 매달리는 것을 매정하고 억척스럽게 뿌리치는 독부처럼 인우를 다시 뿌리치었다.
 
160
「나는 동생도 없다.」
 
161
술취한 사람처럼 모든 것을 깨뜨려 부수고 모든 거추장스러운 것을 끊어 버리려 하는 마음이 온 전신에 팽창한 그는 조금도 틀림없는 악마이었다. 사람의 본능(本能) 가운데 어느 귀퉁이엔지 숨어 있는 잔인 포악한 악마성(惡魔性) 이 여지없이 발휘되었다. 그는 옷고름이 풀어져 사자의 갈기처럼 흩날리고 두루마기 구김살이 독수리의 날개같이 번득거리는 것을 휩싸 들고서, 대문간으로 뛰어나갔다. 마루 끝에서는 어린 인우가 느껴 가며 언니를 부르며 우는 소리가 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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