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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머니 ◈
◇ (18) ◇
카탈로그   목차 (총 : 20권)     이전 18권 다음
미상
나도향
1
어머니 (18)
 
 
2
춘우는 그날 저녁을 인우에게 끌려 자기 본집에서 잤다. 어제 저녁에 어린인우가 자기에게 한 말이 뼈 속에 사무친 듯 하여 잊을 수가 없었다.
 
3
어린 동생이 그렇게 어머니가 보고 싶어할 것은 춘우가 생각지 못한 바가 아니지마는, 진정으로 이렇게 핏속에까지 그것을 느끼어 보기는 드물었다.
 
4
지금에 자기가 실연이라고 하는 것보다도 어떠한 운명의 번롱을 받아서 그렇게 사랑하던 영숙과 서로 떨어지지 않으면 안 되리라는 가슴 아픈 사실을 앞에다 두고, 또는 어린 인우의 불쌍한 꼴을 볼 때 그는 어찌 가슴속에서 물 끓듯 용솟음치는 느낌과 깨달음이 없었으랴.
 
5
춘우는 직감적으로 어머니가 어떠한 것을 알았으며 다시 생각할 여지도 없이 어머니의 사랑이 그리웠다.
 
6
춘우는 어린 인우를 그대로 남겨 두고서 나올 수가 없었다.
 
7
『언니, 나허고 가』
 
8
하고 옷고름을 입에다 물고 눈물 방울이 어린 눈으로 자기를 쳐다볼 때, 그는 어린 인우의 따르는 마음을 이끌어다가 자기를 반성하여 보았다.
 
9
『내가 그렇게 무정한 사람도 아닌데』
 
10
할 적에는 모든 원망과 저주의 마음이 가슴 한복판에 모여들며 하늘을 우러 러 실컷 울고 싶은 것 외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11
춘우는 거기에서 바로 자기의 회사로 갔다.
 
12
가는 길에서도, 앉아서도, 서서도, 무엇을 먹으면서도 잊혀지지 않는 것은 오늘 아침에 인우가 밥을 먹으면서 자기를 향 하여,
 
13
『언니, 어머니가 오시지를 못하시거든, 나를 데려가시라고 해 주지를 못 하겠소?』
 
14
하는 말이다.
 
15
아아, 데려를 가 달라는 곳이 어린 인우는 어느 곳이며 어떠한 곳인지 모르고 하는 말일까?
 
16
거기에는 무슨 암시가 있는 듯하였다. 어머니만 볼 수 있으면 어디든지 간다. 그곳이 다시 돌아오지 못하는 곳일지라도.
 
17
그는 인우의 경우를 다시 청아와 영숙에게 갖다 대보았다. 옛날에 어머니가 자기와 자기 동생에게 하시던 것을 생각하여 보고 영숙이 청아에게 할것을 생각하여 보았다. 자기 어머니는 자기에게 한 것이 반드시 그렇게 해야 할 일이 되어서 그렇게 한 일도 아니겠고, 자기가 어머니에게 사랑을 반드시 받을 만한 무엇이 있어서 받은 것도 아니다. 절대의 모성의 사랑이 우리 인간에게 있어 영겁으로부터 영겁에 그것이 흘러내려가는 것이니, 그것은 이해 관계나 채권과 채무와 같이 따질 수는 없는 것이다.
 
18
자기와 자기 어머니의 사랑을 만일 여기에 누가 있어서 저해하였다 하면, 아니라, 인간의 목숨이라는 것이 그것을 벌써 저해하여 지금에 자기와 인우를 이렇게 불행하게 만들었으매, 자기는 하늘과 운명을 저주하는 것이다. 만일 단념하지 않으려 아니 할 수 없는 목숨이 자기의 행복을 저해하지 아니하고, 그 다른 것이 있어서 저해하였다 하면, 얼마나 자기는 그것을 미워하고 원수로 알았으랴? 이것을 보면 영숙은 나를 사랑하고 내가 또한 영숙을 사랑은 하지마 청아야 또한 어떠하랴. 자기 어머니를 빼앗은 나를 얼마나 원망하고 저주하랴.
 
19
『만일 어제 설성월의 한 말이 정말이고 하면? 영숙이가 참으로 철수에게로 돌아갔다 하면 그의 마음이 아니요 몸일 것이며, 이성(異性)의 사랑이 아니라 모성(母性)의 사랑일 것일까?』
 
20
『그러나, 그것을 누가 믿으랴? 내버림을 받은 나는 언제든지 내버림을 받은 것이 아니냐? 그것이 다만 육체상뿐이라고 하더라도.』
 
21
『그러하면, 지금에 영숙이 그렇게까지 다시 철수에게로 돌아가기를 승낙 하였다 하면 어찌하여 나에게 그와 같은 말을 하고 용기 있고 또는 말짱하게 얼핏 가지를 아니하고 미지근하고 유명무실하게 질질 끌고 있는 것은 무슨 까닭이며, 또는 그런 기색을 알리지 아니하려는 것은 무슨 까닭일까?』
 
22
『만일 그래도 사랑이 나에게 남은 것이 있다고 하면, 그 나머지 사랑을 쓸어 가지고 가는 것이 옳으며, 그렇지 않고 나에게 사랑의 전부가 그대로조 금도 이지러진 곳이 없이 남았다 하면, 그때에는 다시 나에게 오는 것이 옳을 것이어늘, 벌써 가기를 승낙한 그로서 그것을 결단하지 못하는 것은 헤아릴 수 없는 일이다.』
 
23
이 모든 생각을 하여 가면서, 춘우는 잡았던 붓을 책상 위에다 아무렇게나 내던졌다.
 
24
그는 몸이 불편하다는 핑계로 오정 칠 때 일을 고만두고 회사 문 밖으로나 왔다.
 
25
전 같으면 으례 발길이 자기 집으로 향하였을 터이지마는, 오늘에는 발길이 그리로 돌아서지를 아니한다. 어제 저녁에 설성월이 앞에서 큰 소리를 하던 것이 오늘에는 어느덧 풀어져 버리고 힘이 죽었다.
 
26
그저께는 사랑의 셈을 따지려고 자기 집으로 가는 길에 친구에게 끌려 술 먹으러 갔다가 설성월을 만나 그것을 중지하였고, 어저께는 어린 인우를 만나느라고 그것을 고만두었더니, 오늘은 춘우 가슴에 이상한 감개가 있어서 또 허락하지 않게 되는 모양이다.
 
27
춘우는 나오기는 나왔으나, 발 내놓을 곳이 없었다. 그는 길거리에 한참 서서 어디로 가야 좋을까, 그것을 생각할 때, 자기가 비로소 넓으나 넓은 세상에 몸 하나를 붙일 곳이 없이 외롭게 된 것을 느끼었다.
 
28
춘우의 발길은 다시 창하의 집으로 돌려졌다.
 
29
자기가 자기 혼자 해결하지 못할 이 일을 같이 의논할 사람이라고는 창하밖에 없다.
 
30
창하는 마침 문 밖으로 나오다가 춘우를 보고서,
 
31
『이게 웬일인가? 오늘이 일요일도 아닌데』
 
32
하며 이상스럽게 본다.
 
33
『오늘은 몸이 좀 아파서 일찍 나왔네.』
 
34
『어디가 그렇게 아프단 말인가. 또 어제 저녁에 너무 먹은 게지?』
 
35
『아냐, 먹지도 않았어. 대관절 어디로 가는 길인가?』
 
36
『별로이 정한 곳은 없네.』
 
37
『그러면, 내가 의논할 일이 있어 왔는데.』
 
38
『무슨 일?』
 
39
창하는 돈이나 꾸어 달라는 줄 알고, 속으로 돈 변통할 궁리부터 하였다.
 
40
춘우는 잠깐 아무 말이 없다가,
 
41
『어쨌든 천천히 걸어가며 말하지.』
 
42
두 사람은 어깨를 나란히 하여 걸어온다.
 
43
『그런데, 여보게, 그저께 저녁에 명월관 지점에서 설성월이를 만나지 않았겄나?』
 
44
『성월이?』
 
45
하고 창하는 눈을 크게 뜬다.
 
46
『그래?』
 
47
『무엇이 그래야, 만났다니까.』
 
48
『퍽 컸지?』
 
49
『크기도 퍽 컸거니와, 사람도 아주 변했데. 인제는 아주 기생야.』
 
50
『그럴 테지.』
 
51
『그런데, 이상한 일이 있지 않은가.』
 
52
『무엇이?』
 
53
『그 애가 나와 영숙과의 일을 여간 소상히 알지를 않데그려.』
 
54
『어떻게? 아마 조사를 해 본 게지.』
 
55
『조사가 다 무엇이야. 철수가 그집에를 다니데그려.』
 
56
『무어야?』
 
57
하고 창하는 춘우의 얼굴을 한참이나 물끄러미 들여다보았다.
 
58
『그래서?』
 
59
『그래 아마 내 이야기와 자기 사이를 모조리 말한 모양이야.』
 
60
『그러고, 어저께는 내가 성월이에게 여간 훈계를 받지 않았네.』
 
61
『무엇이라구?』
 
62
『날더러 영숙을 단념하고 저하고 지내잔 그 말야.』
 
63
『빌어먹을 년, 기껏 그런 소리밖에 모른담. 어쨌든 자네는 팔자 좋아.』
 
64
『무슨 팔자가 좋아? 여보게, 말 말게. 팔자 존 사람이 계집에게 내버림을 당해.』
 
65
『누가?』
 
66
『누가 누구야, 영숙의 일 말이지.』
 
67
창하도 거기에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하였다.
 
68
『그런데 여보게, 내 생각 같아서도 영숙이와는 암만해도 손을 끊는 것이 옳을 것 같의.』
 
69
춘우는 조금 침울한 빛으로 말을 하였다. 창하는 다만 앞만 내다보며 걸어가면서,
 
70
『글세, 어떻게 해야 좋을는지』
 
71
하고 확실한 대답은 할 수가 없는 모양이다.
 
72
『영숙이가 나를 사랑하는 것이 아닌 것도 아냐. 그렇지만 그에게는 청아가 있으니까.』
 
73
『청아가 있으니까. 어떻단 말인가?』
 
74
『아무리 생각을 해 보아도 내가 인정이 없는 것 같애.』
 
75
『무슨 인정이 없단 말인가. 영숙이 청아를 떼치지 못해서 그리하는 것은 혹 어머니 된 도리에 그러할는지도 모르지. 그렇지만, 생각을 해 보게. 맨 처음에 자네를 따라올 적에는 청아를 그렇게 내버리고 와서는 천 년 만 년같이 살자하던 여자가 갑작스럽게 자식 생각을 한단 말인가. 여자는 그래서 사귀기 가 어렵다는 것이야. 처음에는 여러 가지 바깥 유혹과 또 자기 유혹, 즉 자기가 공상도 하여 보고 희망도 하여 보아 자연히 거기에 끌려 넘어가는 그러한 유혹에 빠져서 자네 하면 자네에게 왔다가 그것이 싫증이 나고 또는 부족하여 다시 가는 것이지.』
 
76
『그러면, 어떤 다른 남자를 따라간다는 것은 모르지마는, 왜 전엔 싫다고내던진 사람에게로 가느냐 말야.』
 
77
『압다, 딱두 하이. 생각을 좀 해 보게. 자네는 돈이 없지 않은가. 자네 허구 살려면 자연히 고생을 하지 않을 수가 없게 되지 않겠나. 그러니까 당장에 딴 남자 구하랴 할 수 없고 또 구한다 하드라도 그만큼 돈 있는 사람이 없을 듯 하니까, 사람은 조금 부족하드라도 청아를 핑계삼고 다시 들어가는것이지. 저도 그만하면 철이 날 때가 되었으니까, 그럴 것 아닌가. 인제는 그저 덮어 놓고 사랑 사랑 할 때가 아니거든.』
 
78
춘우는 창하의 말이 옳다고는 하면서도 듣기에 좋지는 아니하였다.
 
79
『그러면, 왜 얼핏 가지를 아니하고 그러고 있어.』
 
80
『그것은 또 이유가 있지. 만일 제가 그대로 단결에 휙 뿌리치고 가보게. 세상에서 누구를 욕하겠나. 그러니까, 자연히 정의가 버스러지거든, 그 책임을 자네에게 둘러씌고, 자기는 곱다랗게 빠져 가잔 그 말이거든. 그래서 철수에게 몰래 다니며 내용은 다해 놓고, 자네가 물러서기를 기다리는 것이란 그 말야. 내 말이 옳으이. 그래 애당초에도 내가 자네더러 그러지 않았나. 옛날에 베드로가 닭 울기 전에 예수를 세 번 속인 것처럼 자네도 나를 속인다고.』
 
81
춘우는 처음 창하를 찾아올 때 그래도 속으로는 창하가 자기와 영숙을 다시 얽어매는 무슨 좋은 방법을 가르쳐 주기를 바랐더니, 지금 너무 냉연한 태도로 그렇게 말하는 것을 듣고서 속으로 섭섭한 마음까지 났으나, 또한 그 말이 그럴 듯도 하여 춘우의 마음은 동요가 되기 시작하였다.
 
82
『그렇지만, 사람이 그럴 수야 있나. 영숙이가 어데로 보든지 그런 사람은 아니든 데.』
 
83
『자네 눈에야 왜 아니 그렇게 보이겠나? 미운데도 예뻐 보일 터이지. 그렇지만 내 눈으로 본다든지 내 생각 같아서는 그리 영숙의 일을 찬성은 할 수가 없네.』
 
84
춘우는 몹시 창하가 야속한 것 같았다. 어떤 때에는 이 사람이 무슨 혐의로 자기와 영숙 사이를 떼어 놓으려고 하는 것 같기도 하였다.
 
85
그렇게까지 친구를 의심하는 마음이 나기까지 하였었으나, 춘우는 그것을 얼핏 제어하고 아무리기로, 창하가 내게 그렇게까지 할 리가 있을 리는 없지하고, 얼른 마음을 돌려먹었다.
 
86
그러면, 내가 영숙을 아주 단념해 버리는 것이 옳을까. 만일 그랬다가 도리어 두 사람에게 더 큰 불행이 돌아온다 하면 어찌할까. 춘우는 여러 가지로 걱정을 하며 마음을 결단하지 못하는 중, 어는덧 종로에 두 사람은 왔다.
 
87
네거리에 선 두 사람은 사면을 훑어 보며,
 
88
『어디로 갈까?』
 
89
하고 서로 얼굴만 쳐다본다.
 
90
『글쎄.』
 
91
춘우는 도리어 창하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92
『저 성월의 집에 가 보세, 어딘가?』
 
93
춘우는 창하의 입에서 이 말이 떨어질 때, 그는 번개와 같이 어제 저녁에 자기가 한 말이 생각되며, 또 성월이가 자기에게 웃으며 하는 말이 「내일 이맘때 가 되기 전에 만나 뵈옵지요」하던 것이 생각난다. 그러나, 어저께 주먹을 쥘 때의 춘우만큼 힘이 스러진 지금의 춘우는 성월에게 마음이 끌리어 가는 줄 모르게 마음이 끌려가고 싶은 생각이 불현 듯 난다.
 
94
『성월의 집?』
 
95
『그래.』
 
96
『거기는 무엇 하러 가나?』
 
97
『오래간만에 만나 보니 말야.』
 
98
『나는 가기가 거북한 걸.』
 
99
『왜?』
 
100
『어제 저녁에 술이 취하여 다시는 만나 보지 말자고 그랬어.』
 
101
『하하, 그것은 취담으로 알겠지. 어서 가 보세.』
 
102
창하는 춘우의 소매를 끌어 잡아당긴다.
 
103
『나는 집만 가르쳐 주겠네.』
 
104
춘우는 마지못해 끌려가는 듯이 따라갔다.
 
105
『압다, 공연히 그러네그려. 가고 싶거든 국으로 가지 잔말이 무슨 잔말야.』
 
106
『정말야, 들어가기는 싫어.』
 
107
『염려 말게. 내가 끌고 왔다고 해 줄 터이니.』
 
108
춘우는 고개를 쳐들고 기막히다는 듯이 크게 웃었다.
 
109
두 사람이 설성월의 집에 들어서서 성월을 찾았을 때는 마침 목욕을 하러 갔으므로 만나지를 못하였다. 춘우는 가슴을 내려앉히고 저으기 후련하였었으나, 또 한편으로는 못내 섭섭한 생각이 들었었다.
 
110
『그러면 어떻게 할까? 갈 곳이 있어야지.』
 
111
『글쎄, 화나는데 술이나 좀 먹었으면 좋겠는데.』
 
112
『술? 술 먹기야 쉽지. 어디 가서든지 한잔 해 볼까?』
 
113
『하지만, 너무 일러서…』
 
114
『일르면 어떤가, 아늑한 곳에 가서 먹세그려.』
 
115
두 사람은 다시 아늑한 곳을 찾아서 문 밖으로 나왔다. 절에서 술을 시켜서 먹을 때 춘우는 옛 생각이 가슴을 치밀어 올라와 실없이 처량한 생각이난 다.
 
116
『여보게』
 
117
춘우는 창하를 술이 취하여 거슴츠레한 눈으로 보면서 애조가 끼인 목소리로,
 
118
『나는 자네 말이라면 무엇이든지 믿지 않나? 그렇지만, 오늘 자네가 내게한 말은 아무리 하여도 믿을 수가 없네그려. 자네가 오늘 이 자리에서 내 말 하나만 들어 주겠나?』
 
119
『무슨 말을.』
 
120
『나는 영숙의 일을 아주 못 믿을 수도 없고 또 아주 믿을 수도 없네. 그러니까, 나는 이것이 죄악일는지는 모르되, 영숙의 마음을 한 번 시험해 볼터이야.』
 
121
『어떻게 시험을 한단 말인가?』
 
122
『그것은 내가 성월에게 사랑을 옮긴 것처럼 하여 보이겠네. 그래서, 자기가 나를 성월의 말과 같이 참으로 사랑을 하여 그런 말을 하였다 하면 내 가행 복자인지 모르지마는, 그렇지 않고 자네 말과 같다 하면, 나는 그대로 있을 수가 없네. 또 영숙이가 참으로 청아를 위하여 부득이 나를 떠나간다 하면, 나는 나를 희생하는 수밖에 없어. 그 점에 들어서는 나는 절대로 양보할 터일세. 나는 그 자식을 위하여 자기의 애인에게 대한 사랑을 희생 하는 그 고상한 생각과 또는 성자(聖者)의 난행(難行) 같은 행동을 저해하려 하지 아니하네. 거기에 얼마나 고통과 번민이 있는지 그것은 나의 몇 백 배 일터이지.』
 
123
창하는 억지로 자기의 주장을 세울 수는 없었다. 그는 거기에 어디까지든지 후원을 하여 보마 하였다. 뜨거운 손을 서로 잡고 맹세하였다.
 
124
『자네의 일이면 어디까지든지 힘써 보지.』
 
125
시험을 할 만큼 춘우가 냉정한 사람은 아니었다. 물론 영숙에게 더할 수 없는 사랑을 받고, 또는 더할 수 없는 사랑을 영숙에게 줄 때에는 다른 데 마음이 끌릴 데가 없었으나, 자기의 가슴이 지금 공허(空虛)함을 느낄 때에 그는 어디로든지 잡아당기는 데가 있으며, 그리고 기울어지기가 쉽다. 아무리 분별이 있고 이지(理智)에 강하다 하더라도, 춘우의 온몸에는 뜨거운 피가 흐른다. 자기가 자기를 믿을 수 없는 청춘이다.
 
126
그날 저녁부터 춘우는 집에 들어가는 것을 고만두었다. 그리고, 설성월에게 가서 날마다 파묻혀 있다시피 하였다. 여기에는 독자의 의혹을 풀기 위하여 한마디 말하여 둘 것은 춘우가 설성월의 집에 다닐 때에 반쯤은 마음이 끌리어 애인처럼 대접하고, 반쯤은 순전히 기생처럼 대하였다고 하여 둔다. 설성월도 역시 춘우를 미덥고 그리우나 그 반면에는 어디까지든지 기생으로서 기생 노릇을 한 일이 있다는 것을 말하여 둔다.
 
127
사흘이 지났다. 영숙은 홀로 사흘밤을 자고 나서 창하를 찾아왔다.
 
128
『창하 씨! 어떻게 해서든지 춘우 씨를 집으로 돌아오도록 권고를 해 주시지 못할까요?』
 
129
하고 울면서 청을 하였다.
 
130
『내가 친구를 위하여 애는 써 보죠. 그러나 책임을 질 수가 없어요.』
 
131
하며 냉정하고도 원망하는 어조로 간단히 대답을 할 뿐이다.
 
132
『그러면, 어떻게 한 번 만나 보게만 하여 주셔요.』
 
133
하는 영숙의 마음에는 몹시 후회하는 정이 생기었다.
 
134
자기가 자기의 마음을 살필 때, 결코 춘우를 내버리려 한 것은 아니요, 지금 어찌할지 몰라서 가로에서 헤매일 때, 춘우가 저렇게 타락하여 가는 것을 보고 그대로 참을 수는 없다는 의협심이 불덩이같이 솟아올랐다.
 
135
『예! 어떻든지 한 번만 만나 보게만 해 주실 수 없을까요. 영숙이 모든 것을 회개하고 옛날과 같이 기다린다고 좀 데려다 주셔요. 제가 춘우 씨를 만나 뵈 옵고 모든 것을 자백하겠다고 말씀을 하시고, 집으로 데려다 주셔요.』
 
136
조르는 말에 창하는 어디까지 엄연한 태도로,
 
137
『영숙 씨가 철수의 집에 발을 들여놓지를 않는다면, 언제든지 돌아가 마고 말을 하였읍니다.』
 
138
영숙의 가슴에는 가시를 박는 것 같이 찔리는 말이다.
 
139
『누가 그런 말을 춘우 씨에게다가 했어요. 제가 애 아버지에게 다닌다는말을 누가 했어요.』
 
140
『누가 한 것은 아실 것이 없겠지요. 지금 세상에서는 춘우더러 실연자라고 하니까요.』
 
141
『실연자요?』
 
142
『예, 실연자죠. 영숙 씨가 춘우를 내버렸지요.』
 
143
영숙은 무서웠다. 세상이 무서운 것을 비로소 알았다. 자기의 마음은 알지를 못하고 춘우를 실연자를 만들어 준 것은 무서운 세상이다.
 
144
『그럴 리가 없지요. 저는 전과 조금도 변함이 없이 춘우 씨를 사랑 합니다. 결코 변할 리 없어요.』
 
145
창하의 귀에는 그 소리가 가증하게 들릴 뿐이다.
 
146
『그러면, 그 증거를 분명하게 보이지를 않으시고, 세상의 의심을 살 만한 행동을 하시나요? 이런 말을 내가 할 말은 아니지마는, 친구의 부인이라는 것을 떠나서 나의 친구나 또는 누님이라는 생각으로 충고를 하는 것이니까, 어떻게 알아 주지는 마셔요.』
 
147
『예, 저 역시 언제든지 오라버니와 같이 믿고 공경하는 마음으로 창하 씨의 말씀을 들어 왔어요. 또는 저를 위하여 귀찮게 군 때도 있었으니까요.
 
148
그런데, 세상에서 그렇게 떠든다는 것은 오해겠죠. 어쨌든지 춘우 씨를 만나지 않고서는 말씀하지 않으려고 해요.』
 
149
『춘우를 만일 영숙 씨가 만나겠다고 하면, 춘우는 도리어 만나지 않으려고 애를 쓸 터이지요. 춘우의 마음은 아직까지도 영숙 씨를 잊지 못 하니까 요. 그 사람이 지금 세상에서 말하는 것과 같이 그렇게 쉽게 타락할 사람이 아닌 것은 내가 보증을 하겠읍니다. 그러나, 나에게 일전에도 말한 바와 같이 억지로 영숙 씨를 단념하려고 애쓰는 춘우겠지요. 그러고, 정을 딴 데로 옮기어 자기의 괴로움을 잊어버리려 하는 것이지요.』
 
150
『그것은 너무 나를 믿어 주지 않는 까닭이 아닐까요?』
 
151
『아니지요. 춘우는 너무 영숙 씨를 믿었지요. 너무 믿었던 까닭에, 오늘에 이 일이 생긴 것이지요.』
 
152
『그렇다고 하면, 춘우 씨를 절대로 다시 돌아오게 하지 못할까요.』
 
153
『그것은 영숙 씨가 하시기에 있지요.』
 
154
『어떻게요?』
 
155
『어떻게요? 그것은 영숙 씨가 지금이라도 그동안에 하신 것을 분명하게 춘우에게 말씀을 하시고, 춘우에게 사죄하셔야죠.』
 
156
『사죄요?』
 
157
영숙은 속으로 기가 막혔다. 사죄할 것이 무엇이 있느냐. 사죄할 만큼 내가 춘우에게 부족히 한 것이 무엇이냐. 한옆으로는 분한 생각까지 나서, 그대로 일어서 나오고 싶은 생각까지 났으나, 그는 아서라 하고 마음을 돌려 먹었다.
 
158
『사죄하죠.』
 
159
목소리는 떨렸다.
 
160
『춘우 씨를 다시 돌아오시게만 하면 무슨 짓이든지 하겠읍니다. 그러니, 어떻든 만나 뵈옵게만 하여 주셔요.』
 
161
『그러면, 내가 권고를 하여 보겠읍니다. 그러면 댁에 가서 기다리십시요.』
 
162
『아뇨. 여기서 기다리지요. 다녀오셔요.』
 
163
창하는 춘우에게 이 말을 전하여 주려고 설성월의 집으로 갔다.
 
164
춘우는 술이 몹시 취하여 설성월의 방에 누워서 잠이 들었었다. 설성월은 마루에 나와서 하인을 데리고 무슨 일인지 하고 있었다.
 
165
창하는 누워 자는 춘우를 흔들었다.
 
166
『왜 이래 잠도 못 자게.』
 
167
『나야 날세. 웬 잠을 이렇게 자나?』
 
168
『귀찮아.』
 
169
춘우는 손으로 창하를 후려친다.
 
170
『내 말 좀 듣게.』
 
171
『허, 저리 가.』
 
172
『이게 웬 술을 이렇게 먹었누.』
 
173
설성월도 들어와서 흔든다.
 
174
『여보서요 선생님. 박 선생님 오셨어요.』
 
175
『무엇야. 창하가 왔어.』
 
176
이제야 조금 정신이 든 모양이다.
 
177
『어디』
 
178
하고 고개를 쳐들어 보더니, 다시 누우며
 
179
『웬일인가, 식전 참에』
 
180
하며 다시 씩씩하고 자려 한다.
 
181
『고만 좀 일어나서 내 말을 좀 듣게.』
 
182
『무슨 말.』
 
183
『글쎄 일어나.』
 
184
설성월도 빽 지르는 목소리로,
 
185
『글쎄 일어나셔요. 박 선생님이 하실 말이 있다고 하시니.』
 
186
『할 말이 있거든 해. 내 귀로 들을 터이니.』
 
187
『그런 게 아니라, 여보게.』
 
188
창하는 하는 수 없이 입을 열었다.
 
189
『영숙이가 오늘 집에를 왔어.』
 
190
춘우는 숨소리를 죽이고 가만히 들으며,
 
191
『왜?』
 
192
『왜가 무엇야. 자네가 사흘이나 안 들어온다고 날더러 데려다 달라고.』
 
193
『나를 데려다 무엇을 해?』
 
194
『누가 아나. 울며 불며 모든 것을 잘못하였다고, 자네만 만나면 사죄를 하겠다고 하데.』
 
195
『사죄? 흥, 무슨 사죄야. 제가 내게 잘못한 것이 있나? 사죄를 받을 아무 것도 나는 갖지 않았으니까…』
 
196
『하지만, 모두 자기가 잘못하였으니, 지난 일은 모두 용서하고 돌아와 달라 고 하데.』
 
197
설성월은 춘우의 입에서 떨어지는 말과 또는 그 행동이며 표정만 살피고있다.
 
198
『가거든 이렇게 말이나 하여 주게. 영숙과 나와는 다시 만날 기회가 영원히 없으리라고. 그러고 철수에게로 돌아가서 행복스럽게 살기만 하면 나는 더 만족한 것이 없다고. 그리고 춘우라는 사람은 일평생 죽을 때까지 영숙을 잊지 않겠다는 말을 하더라고 하여 주게.』
 
199
춘우는 눈을 감고 군소리하듯이 말을 하였다.
 
200
『그러나, 꼭 한 번만 만나면 모든 자세한 말을 하겠다고 하니, 가 보는것도 좋지 아니한가?』
 
201
『안 될 말. 그렇게까지 어리석은 춘우는 아직 세상에 나지를 않았다고 말 하여 주게. 그동안에 내게 하여 준 고마운 마음은 진정으로 감사를 한다고 그러고, 옛날과는 아주 다른 춘우가 지금 영숙을 만날 필요는 없다구 그래.』
 
202
하며 성월의 손을 잡으며,
 
203
『내게는 설성월이라는 애인이 있다고 하여 주게. 나의 마음은 시냇물같이 설성월에게 흘렀다고 하여 주게.』
 
204
하고 한참 말이 없다가,
 
205
『흥, 그러나 성월에게도 충고다. 어느 날 어느 때에 나의 마음이 다시 또다른 곳으로 흐를는지 나도 알지 못하니까 성월 너도 아주 믿지는 말라는말야.』
 
206
성월은 다만 코웃음 비슷한 웃음을 띠었다.
 
207
창하는 더 권해야 쓸데없을 것을 알아채었다. 그래서 그 대답을 하여 주 려고 자기 집에 있는 영숙에게로 가고 춘우는 다시 잠이 들었다.
 
208
창하가 간지 두서너 시간이 지나서 어떠한 사람 하나가 설성월의 집으로 춘우를 찾아왔다. 그는 얼핏 보기에 시골 농촌에서 농사를 하는 사람 같은데, 와서 춘우를 찾았다.
 
209
『여기 이춘우 씨라고 계시죠?』
 
210
『어데서 오셨어요?』
 
211
설성월은 의아해서 주저주저하며 시원히 대답을 하지 않았다.
 
212
『저 편지를 가지고 왔읍니다.』
 
213
『어디서요.』
 
214
『그 어른 부인에게서요.』
 
215
『부인요?』
 
216
하며 편지를 달래서 앞뒤를 뒤적거려 보다가,
 
217
『예, 계십니다. 그러나, 지금은 안 계신데요.』
 
218
『언제나 오시나요.』
 
219
『이따 저녁 때쯤 오시겠죠.』
 
220
『그럼, 그 편지를 두었다가 드려 주십시요.』
 
221
『그렇게 하셔요.』
 
222
설성월은 그 편지를 받아 들고 몹시 마음이 좋지 못했다. 일변의 질투의 마음이 생기며 그 편지를 당장에 찢어 버리고도 싶었다.
 
223
그러나, 다시 편지를 들여다보다가,
 
224
『이 속에 무엇이라고 씌어 있누.』
 
225
뜯어서 먼첨 보고 싶은 마음이 생기며 편지 든 손이 떨린다.
 
226
『아니다. 남의 편지를 뜯어 보아서는 안 된다는데』
 
227
하다가도, 누가 들어오는 기색만 있으면 얼핏 그것을 감추었다.
 
228
물김에 봉한 것을 눅이어 떼어 보려고 하기도 몇 번인지 몰랐으나, 그래도 차마 그것을 그렇게 하지는 못하였다.
 
229
그날 저녁에 설성월이 놀음에 다녀서 두 시 가량 해 자기 집으로 돌아왔다.
 
230
돌아와 보니까 춘우가 와서 자리를 깔고 잠이 혼곤히 들어잔다. 옷을 갈아입은 설성월은 춘우를 깨웠다.
 
231
흔들어 깨는 바람에 춘우는 눈을 뜨고 쳐다보더니,
 
232
『어느 틈에 왔어?』
 
233
하고 기지개를 켜다가 성월의 허리를 끼어안으려 하니까 성 월은,
 
234
『왜 이러셔요. 가만히 계셔요.』
 
235
하고 팔을 떼밀치며,
 
236
『오늘 나으리께 반가운 것을 하나 드리려고 하는데, 그것이 무엇인지 알아맞히시면 용치.』
 
237
『무슨 반가운 것을?』
 
238
『글쎄, 무엇이든지 알아맞혀 보셔요.』
 
239
『무엇을 알아맞혀. 아닌 밤중에 홍두깨도 분수가 있지.』
 
240
『그러면, 그것을 드릴 텐데요. 내 청 하나 들어 주실 터입니까?』
 
241
『또 무슨 청야.』
 
242
『글쎄, 들어 주실 테예요?』
 
243
『청야 벌써 들어 주지 않았나.』
 
244
『아니, 난 싫어. 그런 소리만…』
 
245
『그럼 또 무슨 청야, 말을 해.』
 
246
『싫거든 고만두시구려. 나도 드릴 것을 드리지 않으면 고만이지.』
 
247
『대관절 준다는 건 무엇야?』
 
248
『무엇이 무엇예요. 당신 애인에게서 온 것이지.』
 
249
『내 애인이 또 누구람, 생트집을 잡아도 분수가 있지.』
 
250
하고 말도 하기 싫다는 듯이 돌아 드러눕느다.
 
251
『그렇게도 보기 싫으셔요? 보기 싫으시기도 하겠지. 누구시라구. 척척 편지를 보내는 여자가 있으니까. 장하시우.』
 
252
『편지가 또 무슨 편지야. 그거 사람 미치겠네.』
 
253
『고만두셔요.』
 
254
『무얼 고만두어?』
 
255
『성월쯤야 어디 선생님 같으신 이가 눈이나 떠보실 테예요.』
 
256
『농담도 오래하면 재미없어. 잠이나 자』
 
257
하고 이불을 뒤집어쓴다.
 
258
설성월은 혼자 떠들다가, 춘우가 대꾸를 해 주지 아니하니까 싱거워서 서랍 속의 편지를 꺼내서 춘우 머리맡에다 내던지며,
 
259
『자, 이것 좀 보셔요.』
 
260
하였다. 춘우는 무엇인가 하고 그것을 집으려 하니까, 설성월은 그것을 재빨리 다시 집으면서,
 
261
『혼자는 못 보실 걸』
 
262
하고 주지를 않는다.
 
263
『어디서 온 것야. 피봉이나 잠깐 봐.』
 
264
『자요』
 
265
하고 멀찌막이 들고서 피봉만 보인다.
 
266
춘우는 그것을 보더니, 와락 달려들어 빼앗으려 하며,
 
267
『그것이 언제 왔어.』
 
268
하니까, 설성월은 다시 손에다가 움켜쥐고,
 
269
『왜 이러셔요, 그렇게 쉽게요. 한번 내 손에 들어온 것인데.』
 
270
춘우와 설성월은 편지 하나를 중심으로 씨름이 시작되었다.
 
271
춘우는 빼앗으려고, 설성월은 아니 빼앗기려고, 서로 끼고서 온 방 안을 딩 굴었다. 나중에는 떠다 놓은 자리끼가 엎질러진 것도 불계하고, 서로 간질이고 꼬집고 어기고 비틀었으나, 설성월은 눈물을 흘려가면서도 놓지 않았다.
 
272
『엥.』
 
273
춘우는 화가 났다.
 
274
『앙시기도 하지.』
 
275
하고 요 위에 가 쓰러지며,
 
276
『그 놈의 편지 안 보아도 괜찮아.』
 
277
하고 숨이 차서 펄떡거린다.
 
278
『그렇게 쉽게.』
 
279
성월은 걸레로 방바닥을 훔치며 춘우를 노려본다.
 
280
『글쎄, 그것을 가지고 있으면 무엇을 한다는 거야?』
 
281
『남 무엇을 하든지간에 상관하실 게 무엇예요.』
 
282
『왜 상관이 안 돼. 내게 오는 편지를 가지고 안 내놓니까 말이지.』
 
283
『누가 안 드린대요.』
 
284
『그럼.』
 
285
『나고 같이 보시잔 말예요. 내 손으로 내가 들고 같이 보셔요.』
 
286
『그럼, 진작 그러지.』
 
287
『누가 진작 안 그랬어요. 남의 손을 모두 비틀어 놓으시구.』
 
288
분한 듯이 손을 들여다 보다가,
 
289
『예끼』
 
290
하고 달려들어 춘우를 꼬집어 뜯는다.
 
291
『이게 무슨 짓야, 아파. 자, 같이 봐, 같이.』
 
292
성월은 어느덧 춘우의 이불 속으로 들어가 나란히 엎드려 편지를 뜯어 서둘이 보기를 시작하였다. 이 아래 쓴 것이 그 편지의 전체이다.
 
293
 
294
당신이 나가시던 날 저는 공연히 섭섭한 생각으로 하루 종일 울고 지냈읍니다. 그랬는데, 정말 그날 저녁에 당신이 돌아오시지를 않으시지요. 혹시 어디 가 약주나 잡수시고 실수나 하시지 않으셨나 하고, 밤새도록 잠을 자지 못하고 기다렸어요. 춘우 씨! 사흘 동안을 이때나 오시나 저때나 오 시나하고 기다리기는 하였으나, 반가운 춘우 씨가 오시기는 고사하고 춘우 씨가 다른 여자에게로 마음을 옮기시고 저는 돌아보지 않으신다는 소문을 듣고서 얼마나 제가 낙담을 하였는지, 그때의 저의 마음은 만 척이나 높은 절벽에서 떨어져 죽는 것이 오히려 나을 것 같았읍니다.
 
295
당신의 사랑을 받는 것이 제게는 더할 수 없는 행복이며, 감사할 일이요, 다시 당신에게 내버림을 당한다 하더라도, 그것은 운명이 그렇게 시키는 것이니까, 누구를 원망하고 허물을 할 것은 없을 줄 압니다.
 
296
그러나, 오늘 창하 씨에게 말씀을 들으니까, 당신이 저를 의심하시며 다시는 만나지 않겠다고 하시더란 말을 듣고서, 저는 눈물이 쏟아져 흐르는 얼굴로 글자가 흐려 보이지 않는 붓을 잡고, 모든 일의 자세한 것을 말 대신 여쭈어 드리려 하는 것입니다.
 
297
제가 당신을 사랑하는 것은 옛날이나 오늘이나 또는 장래가 똑같을 것 입니다. 차라리 더욱더욱 깊어가기는 할지언정 조금이라도 빛이 여위거나 엷어가는 것은 아닙니다.
 
298
오늘에 당신에게 이와 같이 오해를 받게 된 것도 제가 당신을 사랑하는 데서 나온 일이 도리어 당신의 노여우심을 사게 되었고, 마음을 아프게 하여 드리어 그것은 무엇으로써 사함을 받아야 좋을지 저는 알 수가 없읍니다.
 
299
당신이 오늘 그와 같이 하시는 것도 무리가 아니지요. 또는 나를 사랑 하시지 않는 까닭이 아니신 것도 저는 압니다.
 
300
다만 죄 많은 몸이 어려서 부모를 그릇 만난 죄인지 철모를 제 시집을 잘 가지 못하여 남의 첩의 몸이 되어 거기에서 죄악의 씨라고 하올는지, 청아라는 계집애 하나를 낳아서 어머니 노릇을 하게 된 것이, 오늘에 저를 참으로 사랑하여 주시며, 참으로 사람답게 알아 주시는 당신까지 그렇게 괴로우시게 하여 드리게 되었읍니다. 저는 두 번 당신을 속였읍니다. 아니지요. 두 번뿐이 아닙니다. 다시 애 아버지하고 만나지 않겠다고 제가 스스로 맹세를 하여 놓고 그것을 맹세대로 이행하지 못한 것이 두 번이오며, 또는 그두 번 죄를 짓는 것에 따라서 수없이 당신의 눈을 가리우게 하였읍니다.
 
301
춘우 씨! 그것이 죄인 것을 알았읍니다. 당신을 속이고 청아의 병을 위 하여 애 아버지에게 다니는 것이 죄인 것을 모르지는 않았아요. 그러나, 그 말을 제 입으로는 당신에게 말씀을 할 수가 없었읍니다. 차라리 제가 제 가슴에다 독약 묻은 화살을 박는 것이 낫다고 생각하였읍니다. 또 그렇다고 어미 된 마음에 청아를 잊어버리려고, 여간 노력을 하였사오나 그것도 저의 힘으로는 되지 않았읍니다. 그것이 천륜이 되어 그러한지 무정하게 어린 것을 떼어 버릴 수는 없었어요. 여기에 저는 몹시 고민하였읍니다. 당신이 절더러 무슨 근심이 있느냐고 물어 보실 때마다 저는 가슴이 저리는 듯 하였어요.
 
302
어머니가 되랴, 남의 애인이 되랴? 저는 참으로 헤매었읍니다. 어머니가 되자면 애인을 내버려야 할 터이요, 애인이 되려면 어린 것을 잊어야 하게 되었읍니다. 어머니가 된다 하면, 그것은 일평생 사랑 없는 남편 밑에서 유모와 같이 쓸쓸한 세상을 지내야 할 터이요, 그렇지 않으면 애인을 따라 야할 것이라는 생각을 할 제, 어느 정도까지 동정하여 주셔야 할 만한 고민을 느끼었읍니다.
 
303
당신에게는 죄라 하겠지마는, 어떠한 때에는 당신을 잊자 하고 굳은 결심을 하고서 애 아버지에게 다시 돌아가겠다고 승낙까지 하였다가 그날 저녁에 집에 돌아와 후회를 하고 운 일까지 있었어요.
 
304
춘우 씨! 참으로 괴롭고 무서운 세상예요. 어쩌면 좋을지 모를 세상예요.
 
305
당신은 저를 원망하시겠죠. 원망도 좋습니다. 또 책망하시다 하면, 그것을 받지요. 당신이 이 괴로움을 없이 하여 주기 위하여 저를 죽여 주신다 하면, 그것도 달게 받겠읍니다.
 
306
아아. 그런데 춘우 씨! 돌아오십시오. 모든 것을 단념하고 잊어버리고 다만 홀로 깨끗한 마음으로 저는 당신을 기다리고 있읍니다.
 
307
다시 효창원에서 꽃을 따며 노래하던 그때로 돌아가셔요. 그때의 그 잊을수 없는 즐거움을 지금에 다시 생각할 때에 춘우 씨가 새삼스럽게 그리운듯 합니다.
 
308
즉일 영 숙
 
309
 
310
춘우는 편지를 읽다가 그대로 엎드려 울었다. 설성월도 웬일인지 눈물 이나서 고개를 돌리었다.
 
311
『내가 잘못야.』
 
312
눈물은 베개 위에 시내처럼 흐른다.
 
313
『고만 우셔요.』
 
314
한참 울도록 가만히 내버려두던 설성월은 춘우의 어깨를 흔들면서 울음을 그치라고 위로를 한다.
 
315
『내가 생각한 것이 옳지.』
 
316
춘우는 혼잣말처럼 중얼거리었다.
 
317
『눈물이나 씻으셔요.』
 
318
설성월의 그때 감정은 자기가 영숙이가 되어서 춘우의 뜨거운 눈물을 흘리며 후회하는 것을 듣는 듯이 춘우에게 동정이 갔었다. 그는 눈물을 씻기며 어린 애 어루만지듯이 어루만지면서,
 
319
『그렇게 우실 것이 무엇예요? 선생님께는 다시 옛날의 행복이 돌아오지 않았어요.』
 
320
동정은 하면서도, 그의 마음은 다시 질투의 불길이 타올라오기 시작 하여말하는 어조마다 비꼬아 말을 한다.
 
321
『선생님이 지금은 눈물을 흘리실 때가 아녜요. 지금이라도 기다리고 계신 영숙 씨에게로 가시지요.』
 
322
춘우는 설성월의 이 말을 듣고 속으로 비웃었다.
 
323
『내가 다시 영숙에게로 가?』
 
324
『그럼요.』
 
325
『아니지, 가지 못하지.』
 
326
하고 춘우는 다시 눈물이 두 눈에 핑그르르 돈다.
 
327
『왜 못 하셔요.』
 
328
설성월은 거짓말이라는 듯이 춘우를 본다.
 
329
『그것은 성월이는 모를 것이야. 어떠한 일이 있든지 나는 영숙에게로는 다시 가지를 않을 터이니까.』
 
330
『거짓말 마셔요. 왜 가시지를 않으셔요. 그렇게까지 모든 것을 자백하고, 또 그렇게까지 결심을 하고 있는 이에게.』
 
331
『안 가지. 내가 그만큼 영숙을 못 믿거나 또는 사랑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영숙이가 나를 사랑하는 까닭에 말을 하지 못한 것이나 마찬가지로, 나도 영숙을 사랑하므로 가지 않는 것이야.』
 
332
『그렇지만, 선생님이 참으로 진정으로 사랑을 하신다 하면, 남이 가지 마시라고 해도 가실 터인데, 일부러 선생님 자신이 안 가신다는 것은 어디까지든지 선생님 마음 가운데 영숙 씨를 사랑하시는 마음이 부족하신 까닭 이겠지요.』
 
333
춘우는 고개를 내저으며,
 
334
『그렇게 말을 하는 사람은 그렇게 생각을 할는지도 모르지. 그렇지만, 내 마음은 그렇게 단순하지가 않는 것을 나는 어떠한 경우에 슬퍼하는 때도 있어. 벌써 나의 마음은 그렇게 열정적이 아니요, 그렇게 단조하지가 않으니까.』
 
335
『그렇지만, 가 보셔야죠. 가 보시지 않고 어떻게 합니까. 젊은 부인이 혼자 계실 터인데.』
 
336
『영숙의 몸을 보호할 사람은 나 외에 또 있으니까, 그것야 걱정할 것이 없지. 그러나, 마음을 보호하여 주는 사람은 아마 일평생 없을 터이지. 그의 마음의 성벽은 이미 무너졌으니까.』
 
337
설성월은 춘우의 이 말을 믿을 수가 없기도 하고, 또 한편으로는 춘우가 영숙에게 향하는 정이 벌써 식어 버렸는지도 알 수가 없어서 춘우의 마음을 자세히 알아보려고 애를 쓴다.
 
338
『그러면, 장차 어떻게 하시 터얘요?』
 
339
춘우는 이말을 듣고 나서,
 
340
『장차? 장차는 성월이허고 결혼이나 하고 살까?』
 
341
하고 실없는 말이라는 의미인지 씽긋 웃었다.
 
342
설성월은 속마음으로 그렇게 되면, 자기에게는 만족할 일이어서 속으로는 좋았으나, 기생이나 그와 같으 사회에 있는 여자들이 거의 공통으로 가진 자포자기와 또는 동정할 만한 단념의 관념에서 나오는 말로,
 
343
『피, 듣기 싫어요.』
 
344
하며, 저도 웃음에 붙여 버린다는 듯이 말대꾸도 하지 않으려 한다. 그러나, 또다시 말문이 열리며,
 
345
『정말 어떻게 하실 터얘요. 아주 영숙 씨허고는 헤어지실 터입니까?』
 
346
하고 지근덕거린다.
 
347
『그렇다니까 그러네. 일평생 결혼을 하지 않고 지낼 마음야.』
 
348
『듣기 싫어요. 어디 두고 보셔요. 영숙 씨와 만나지 않으신다는 말도 거짓 말이요, 결혼하지 않는다는 것도 거짓말예요.』
 
349
어느 틈에 닭이 울더니, 두 사람은 눈 위에 잠시 내리눌리어 어느덧 잠이 들었다. 춘우는 영숙과 만나매, 그 편지를 한 일도 없고 또는 영영 자기를 내버린 것을 속 못 차리고 찾아가서 영숙의 냉정한 대우를 받고 분한 마음 에 영숙을 죽이고 자기도 죽으려고 덤비려 하니까, 그 뒤에서 철수가 나타나서 사냥총으로 자기의 뒤를 향하여 놓으려 하는 것을 어쩐 일인지 설성월이가 난데없이 튀어나와 그것을 가로막다가 가슴을 맞고서 그대로 쓰러지는 바람에 깜짝 놀라 깨니, 그것이 꿈인 것을 알고 옆을 보니까, 성월이가 머리를 흐트린 채 곤하게 자고 있는 것이 보였다. 그는 가슴을 문질러 내려앉히고 날이 밝도록 잠을 이루지 못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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