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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머니 ◈
◇ (1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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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상
나도향
1
어머니 (16)
 
 
2
영숙은 혼자 자리에 눕지도 않고 가만히 앉아 있어 전후 일을 생각하여 보았다. 자기가 자기 마음을 헤아려 볼지라도, 아무 그른 것이 없고 또는 죄 될만 한 것이 없는데, 오늘 창하나 춘우의 행동이든지 기색을 보면 자기를 몹시 의심하는 듯한 것이 야속하였다. 물론 속을 알지 못하는 춘우로서 그와 같은 마음을 먹는 것도 그렇게 잘못이라고 할 수는 없지마는, 자기가 그렇게까지 사랑하는 춘우가 자기를 믿어 주지 않는 것도 또 한옆으로 설운 생각이 났다.
 
3
자기는 입이 있다. 이 입을 가지고 춘우에게 무슨 말이든지 못 할 것이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 말을 하지 못하는 것은 무슨 까닭이냐. 여기에 고민이 있고 세상이 뜻대로 되지 않는것이 있는 것이다. 만일 영숙이 춘우를 사랑하지 않았으면 이런 말 저런 말을 하였을 것이지마는, 그 말을 하지 못 하는 것도 영숙이가 춘우를 생각하는 까닭이요, 이 말을 들으면, 춘우의 가슴이 아플까 하여 말을 하지 않는 것인데, 도리어 춘우가 자기의 마음을 알아 주지 아니하고, 그렇게 하기 시작을 한다는 것을 생각할 때 자기의 머리를 자기가 쥐어뜯을 만큼 갑갑하였다.
 
4
그는 몹시 마음으로 방황하였다. 춘우에게 이 모든 사정의 말을 하여 버릴까. 그렇지 아니하면 아주 비밀로 덮어 버릴까. 말을 하자니 자기의 처지가 곤란하여질 것이요, 말을 하지 않자니 춘우를 잃어버릴 것이다.
 
5
그러자, 영숙은 복바쳐 올라오는 감정을 억제하지 못하여 혼자 그 자리에 쓰러져 자꾸 울었다. 운다 한들 속시원할 것은 없겠지마는, 자기는 춘우의 가슴에 안기어 우는 것이나 다름없는 감정으로 울어 보기도 하였다가, 또는 모든 세상 일을 단념하고, 춘우도 단념하고, 청아도 단념하고, 모든 것을 단념하고 자기의 팔이나 다리에 아무것도 거리낄 것이 없는 것 같이 홀홀 단신이 된 마음으로 혼자 나서려는 마음을 먹어 보기도 하였다.
 
6
지금 영숙은 십자가 길거리에 선 사람 모양으로 어느 길을 밟아야 옳을는지 알 수가 없었다.
 
7
춘우의 사랑이냐, 그렇지 않으면 어머니의 본분이냐, 여기에 서서 헤매 일 때 그의 마음에는 흐트러짐이 있고, 또 얽혀지는 것이 있었다.
 
8
시계는 자꾸 가는데, 춘우는 돌아오지 않는다. 방 안에 혼자 앉아 애 끓이는 생각을 하는 영숙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춘우는 열 두 시가 넘어도 돌아오지를 아니한다. 영숙은 이런 생각 저런 생각으로 마음을 태우다가, 어느덧 잠이 들었다.
 
9
닭이 첫번 울었다. 그러나 춘우는 오지 않았다. 영숙은 여러번 춘우가 집에 들어온 꿈을 꾸다가, 닭 우는 소리에 잠이 깨어서 그것이 꿈인 것을 알때 몹시 마음이 섭섭하였다. 그러다가, 눈꺼풀 위를 내리누르는 잠으로 말미암아 다시 혼몽히 잠이 들었다. 영숙의 꿈 속에는 청아도 보였다가 춘우도 보였다가 어수선 산란하여 단잠을 이루지 못하였다.
 
10
또 며칠이라는 날짜가 지나갔다. 저녁 때 일정한 시간에 자기 집으로 돌아오던 춘우는 날마다 술이 취하여 자정이나 새로 한 시에 돌아왔다. 그럴 때마다 전에는 당초 말이 없던 사람이 날마다 잔말이 늘어 가며 어떠한 때는 손으로 영숙을 때리기까지 하였다. 그러고는 공연한 트집을 잡아 가며 영숙을 괴롭게 하기에 모든 수단을 다 부렸다. 그럴 때마다 영숙은 춘우 앞에서 울었다. 그래서, 애원하는 목소리로,
 
11
『여보셔요! 당신이 저를 그렇게 미워하시는 까닭을 말씀하여 주셔요. 저를 왜 그렇게 못 믿어 주십니까, 당신의 행동을 보면 아마 내가 여자 로서하지 못할 짓을 하는 줄 아시는 것 같지마는, 그것은 결코 잘못 생각 하시는것이지요. 당신은 언제든지 서로 의심하지 말자, 영원히 믿자고 말씀 하신 일이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 왜 요사이는 이렇다저렇다는 말씀 한 마디 해주지 않으시고 날마다 약주만 잡수시니, 몸도 돌보셔야 할 것이 아녜요. 저는 당신을 위한다하면 무슨 짓이든지 하겠다고 하지 않았어요. 왜 당신은 저를 그렇게까지 알아 주시지를 않으셔요』
 
12
하면, 춘우는 다만,
 
13
『나는 아무것도 몰라. 내게는 사랑도 없고 믿음도 없다. 내가 한 번 사랑에 취하였을 적과 같이 술에 취해 볼 터이야. 그 사랑이 오늘에 나를 파멸하는 구덩으로 끌어넣으려는 것이 되는 것이나, 일반으로 이 술이 또한 나를 파멸로 끌어넣을 것도 내가 모르는 것이 아니야. 인생의 운명이란 하늘이 정한 것도 아닌, 동시 또는 자기 일개인이 만드는 것도 아니다. 다만 흘러가는 물 우에 떠 있는 부유(蜉蝣)와 같아서, 힘있게 누르는 운명의 힘의 조그마한 우리로는 마음대로 하려 하나 마음대로 되지 않는 것이라는 것을 이제야 깨 달았어』
 
14
할 뿐이었다. 이렇게 날이 갈수로 정신적으로 가정이 깨어져 가는 것은 물론 이요 물질적으로도 자꾸 부서져 가기를 시작하였다. 그리할 때마다 영숙은 서랍을 열고 상자 속에 넣어 두었던 패물낱을 들고 나갔다. 하루는 춘우가 몹시 얼굴빛이 좋지 못하여 집으로 돌아와서 말 한 마디 없이 혼자 끙끙 거리고 있는 기색을 영숙이가 살피고서,
 
15
『왜 무슨 걱정이 계시우』
 
16
하고, 다정히 물어 주었다.
 
17
춘우는 말을 할듯할듯하다가, 다시 딱 멈추며,
 
18
『아니, 별로이 큰일은 아니나』
 
19
하며, 채 말끝을 다물지 못하는 것을 보고 다시 영숙은,
 
20
『왜 큰 일이든 작은 일이든지 말씀을 하셔요.』
 
21
춘우는 이 말을 듣고서 속으로는 몹시 미안하나, 그렇게 지성으로 물어 주는 것만 해도 고마운 생각이 은연히 생겨서 부끄러운 웃음을 한 번 웃고 또는 미안한 걱정을 나타내며,
 
22
『그런 게 아니라. 돈을 한 사십 원 갚아야 할 일이 있는데, 지금 같아서는 속수무책이야.』
 
23
『그것은 무엇에다 쓰신 것인데요?』
 
24
『무엇에 썼느냐구?』
 
25
『예.』
 
26
춘우는 이 말대답을 하기는 몹시 부끄러웠다. 실상은 그동안에 술 먹고 영숙을 괴롭게 하기에 소비하려고 남에게 얻어 쓴 돈이었다.
 
27
『그것까지 말하기는 싫소.』
 
28
『왜 말씀을 못하셔요. 저는 벌써 짐작을 하였는데요.』
 
29
『무슨 짐작을 했단 말이요?』
 
30
『약주 잡숫고 계집의 집에 다니시느라고 쓰신 것 이지요』
 
31
할 때, 그는 보복을 하는 독부의 눈처럼 샐룩한 눈으로 춘우를 보았다. 그러고, 분풀이를 하는 쾌감을 느끼기까지 하였다.
 
32
『누가 술 먹느라고 빚을 졌단 말요? 알지도 못하는 소리를 하는구려』
 
33
하고, 그것을 말로는 부인하려 하였으나, 어째 힘이 없고 싱거웠다.
 
34
『그러면, 그렇게 걱정만 하시면 어떻게 해요. 번통을 하실 도리를 생각 해보아야죠.』
 
35
『글쎄, 어떻게 해야 좋을지 모르겠구려. 이번 월급은 거의 다 갖다 썼구.』
 
36
영숙은 고개만 기웃하고 있다. 저녁을 치르고 춘우는 갑갑하다는 핑계로다 시 집에서 나왔다. 그러고는, 다시 창하를 만나서 의논이라도 하여 보리라 하고 그의 집을 갔었으나, 창하가 없으므로 하는 수 없이 정처없이 돌아다니다가, 그는 우연히 황금정통에서 지나가는 전차를 쳐다본즉, 분명히 자기 집에 있던 영숙이가 그 속에 탄 것을 보았다. 이상한 생각에 가슴이 선득하여, 그대로 그 뒤를 따라서 가 본즉, 그는 철수가 묵는 여관으로 들어 갔다.
 
37
춘우는 문간에 서서 영숙이 나오기를 기다렸다. 한 시간이 되거나 두 시간이 되거나 어떻든지 만나 보고야 말리라 하였다.
 
38
만일 이 세상 사람들 사이를 이상하게 가려 놓은 장벽이 없다 하면, 그는 당장에 영숙의 뒤를 좇아들어가서, 철수와 재미있게 이야기하는 것을 그대로 눌러 죽여 버리거나, 영숙의 검은 머리를 한 팔에 휘휘 감아들고 그대로 태질을 친다 하여도, 그의 울분한 마음은 풀릴 것 같지 아니하였다. 그러나, 그는 영숙의 뒤를 따라 들어가지 않았다.
 
39
불같이 타오르는 질투의 마음으로는 당장에 무슨 일이든지 내고야 말 것 같았다. 들어갈까 하고 발길을 그쪽으로 향하였다가는 멈추고, 멈추다가는 다시 들어가려 하였으나, 그 몹시 뜨거운 피가 조수 밀리듯이 밀렸다가 내려가고, 더웠다가 식을 때마다 그의 발은 또한 앞으로 내놓아졌다가 다시 뒤로 물러섰다.
 
40
고요한 하늘에서 조그마한 별들이 작게 움직이고 시커먼 어둠이 춘우가 서있는 골목을 휩싸고 있는데, 군데군데 둥그런 전기불이 한 개 두 개 검은 포장에 누른 점을 찍은 듯이 켜 있을 뿐이다.
 
41
한 시간이 지났다. 그래도 영숙은 나오지를 아니하였다. 춘우는 지금 철수와 영숙이가 무엇을 하고 있을까 하는 것을 눈앞에 상상하여 볼 때, 그의 전신은 떨리었다. 그러고, 그것을 생각지 말아서 자기의 아픈 가슴을 진정하려 하였으나, 그것을 생각지 말려고 하나 아니 할 수가 없었다.
 
42
그러면, 자기가 이곳에 서 있어서 영숙을 기다리는 것이 도리어 어리석지아니 할까. 영숙은 이미 자기를 떠나 옛날에 그 사람에게로 돌아갔다.
 
43
그러면, 자기가 나를 버리었는데, 내가 그에게 더 무엇을 요구하려고 이 곳에 서 있는가?
 
44
내버리는 것이 누구에게든지 자유이면 내버림을 당하는 것도 그만큼 자유로 와야 할 것이다. 내가 영숙을 차지하였을 때, 영숙이 철수를 내버리었 고철수가 영숙을 다시 차지하게 되매, 또한 나를 내버리는 것이 그 무슨 인과(因果) 가 아닐까?
 
45
그러나, 철수나 나나 두 사람은 다 한 번씩 영숙에게 내버림을 당한 사람이다. 지금 내가 이 아픈 가슴을 웅켜잡을 때 맛보던 감정을 전일에 철수도 맛 보았을 것은 사실이다.
 
46
그때 내가 승리자(勝利者)의 자랑스러움을 느끼었던 것이나 마찬가지로 지금에 철수도 또한 그러한 것을 느끼었을 것이다. 이 점에 들어서 철수나 자기가 똑같을 것이요 또는 동감이었을 것이다.
 
47
그러면, 이번에 이 모든 것의 책임을 만일 돌려보낸다 하면, 그것은 영숙에게 있는 것이요 철수나 자기에게 있다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48
그러면, 내가 지금 이렇게 생각을 하기는 하면서, 불붙듯 타오르는 질투를 억제하지 못하는 것은 무슨 까닭일까? 내가 영숙을 조금이라도 생각하는 것이 있기에 이런 질투가 있는 것이지. 그렇지 않다고 하면 이런 질투가 있을리 없을 것이다.
 
49
이러한 생각을 하면서 이리저리로 왔다갔다할 때 그의 마음은 조금 가라앉은 듯하였다.
 
50
「고만두고 가서 자자. 그러면, 자기도 돌아올 터이지」
 
51
하고, 돌아섰다가도 그는 다시 발을 멈추고서,
 
52
「그래도, 다시 더 기다려 보자」
 
53
하고, 머뭇머뭇하는 동안에 어느덧 길거리가 조용하여지고 가끔가끔 전차 지나가는 소리가 들릴 뿐이다.
 
54
그래도, 영숙은 나오지 않았다. 그러더니, 몇 시나 되었는지 신발 소리가 저벅저벅 나더니 누가 나왔다.
 
55
춘우는 적지 아니한 반가운 생각을 가지고서 그 나오는 사람을 맞으려 할 때, 그의 추측은 전수 틀려 버리고, 그 나오던 사람은 찌걱하는 문소리와 함께 대문을 닫고 들어가 버리었다. 그는 그 대문이 자기의 마음 문을 틀어막는 듯이 답답하였다. 그 문을 자기의 손으로 열 수가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로, 자기의 마음 문도 자기가 열 수가 없었다. 그는 문 닫힌 사람이 영숙이가 아니요 철수가 아니지마는, 어쩐지 미운 사람은 영숙이와 철수같이 생각이 들었다. 그때 춘우의 마음은 슬그머니 복수(復讐)까지 할 마음으로 변하여지며, 어디까지든지 영숙이 나오기를 기다리리라 하였다.
 
56
먼데서 닭이 운다. 옷이 이슬에 젖어서 축축하여지며 풀이 죽어 온다. 그러나, 아직까지 영숙은 나오지를 아니하였다.
 
57
어디까지 나오기를 기다려 보리라고 결심까지 하였던 춘우는 시간이 갈수록 자기의 결심이 어리석은 것 같아서, 에, 고만두어라 하고 단연히 발길을 돌리었다.
 
58
여관 앞을 나와서 큰 길거리로 걸어올 때에 사람 하나 지나다니는 이 없고, 다만 길 양편에 켜 있는 전등들만 졸린 듯이 죽 켜 있을 뿐이다. 그러고, 먼 곳에서 울려 오는 야경(夜警)의 딱딱 하고 나무때기 두드리는 소리가 한층 더 세상에 적막한 느낌을 전해 준다.
 
59
일종의 비애 즉 가졌던 것을 잃어버린 듯한 슬픔과 자기를 내버린 원망과 또 질투의 마음은 분하기도 하였다가, 또는 모든 것을 부숴 버리고 싶은 생각이 났다. 울고 싶은 것은 자기가 얼마든지 하고 싶으면 할 수 있는 것 이지마는, 모든 것을 때려부순다는 것은 그리 쉽게 되지 않는 것이다. 거기에는 반드시 반항이 있고 투쟁이 있는 것이다.
 
60
그 반항과 투쟁에서 능히 이길 수 있다 하면, 그는 굳센 사람이며 세 상의 승리자라 할 수 있으나, 대개는 그것을 이기지 못할 뿐만 아니라, 싸움도 하기 전에 자기가 자기 몸을 스스로 깨뜨리는 사람이 흔하다. 지금에 춘우도 그 모든 것을 부숴 버리고 싶고 초인간적(超人間的)으로 살아 보리라 하였으나, 자기가 거기에 손을 대기도 전에 벌써 자기는 자기가 약한 것을 깨달아 알았다. 그것이 자기의 힘으로 되지 않을 것을 짐작하였다. 그렇다고 그는 지나간 일을 한 번에 잊어버리고 다시 새로운 길을 밟으려고 굳은 결심을 하지도 못하는 사람이다. 마치 납(鑞)으로 만든 사람과 같아서 녹기 쉬운 성질을 가지었다.
 
61
여기에 그는 스스로 자기를 깨뜨려 부수거나 자기를 내버리기 쉽게 되었다.
 
62
「모든 것을 나는 모른다. 나 같은 사람에게 무슨 행복이 있으랴. 행복은 차지하는 사람이 따로 있는 것이다」
 
63
하고, 자포자기하는 마음이 들 제, 그는 에이는 듯한 감정에서 샘같이 솟아나는 눈물을 금할 수가 없었다. 그는 길거리로 걸어가며 울고 싶은 대로 마음껏 울었다.
 
64
그러는 동안에 그는 자기 집 문앞에 당도하였다. 닫혀 있을 터인 대문이 방싯이 열리어 있고 방 안에는 불이 켜 있다.
 
65
「에그, 이게 웬일인가?」
 
66
그는 마음이 두근거려지며 머리속에는 도적이라는 것까지 연상이 되었다.
 
67
「아무도 없는 틈에 누가 들어와서 무엇을 가져가지나 아니하였나?」
 
68
다소간 떨리는 손으로 문을 열고 들어갔다. 문 소리가 찌걱 나자 방문을 열며,
 
69
『이제 오시우?』
 
70
하는 사람은 분명한 영숙이다. 춘우는 꿈 같은 생각 가운데 넋 잃은 사람처럼 멀거니 서 있었다.
 
71
그러다가, 다시 영숙은,
 
72
『왜 그렇게 서 계시우? 또 약주 잡수셨소?』
 
73
하며, 문을 열고 나올 때 춘우는 나오는 영숙을 똑바로 쳐다보며, 정말 이 것이 영숙인가, 나의 신경이 착란하여져서 환상(幻像)이 나타난 것이나 아닌가 의심하는 생각까지 났다.
 
74
영숙은 가까이 와서 춘우의 입을 맡아 보더니,
 
75
『약주도 자시지 않았는데, 왜 이렇게 정신 나간 이같이 서 계시우?』
 
76
춘우는 영숙의 손도 쥐어 보고, 목소리도 듣고, 그의 온 전신을 살핀 뒤에 그것이 정말 영숙인 것을 깨달아 알고 나서 그는 무엇이라 대답할 말이 없었다.
 
77
『아냐 아냐』하고만 있은즉, 영숙은 춘우를 이끌어 방으로 데리고 들어가며, 언뜻 생각 하기는, 옳지 춘우가 어떠한 곳에 새로운 애인을 두고 그 집에를 갔다가 늦게 돌아오니까, 할 말이 없어서 주저주저하고 말도 못 하는구나? 하고서, 가슴속에서는 또 맹렬한 질투의 생각이 불일듯 일어났다.
 
78
웃던 얼굴은 성낸 얼굴로 변하고 따뜻하던 손은 차디차지며 목소리가 날카로와 같다.
 
79
『대관절 어디를 갔다가 인제야 오셔요?』
 
80
『어디?』
 
81
『녜. 어디 갔다 오신 것을 말씀하시지 못할 것이 무엇예요?』
 
82
춘우는 괴롭고 답답하였다. 영숙에게 지금 무엇이라고 말을 해야 좋으냐. 자기가 철수의 여관 앞에서 영숙이가 나오기를 가다렸다 하면, 그것은 자기가 영숙을 못 믿는다는 것을 증거함이요, 또 그렇지 않고 다른 말을 하면, 그것은 그 영숙을 속이는 것이며, 영숙을 속이지 아니하자니 영숙은 나를의 심할 것이다. 그는 다만 말 한 마디 없이 앉아 있을 뿐이다.
 
83
『왜 말씀을 못 하셔요? 말씀을 하시지 않는다고 내가 그만한 것을 짐작 하지 못할 것도 없겠구요. 또 그만한 것을 짐작해 안다 하여도 모두 저의 팔자요 저의 탓이지요. 당신을 원망할 것도 없겠지요. 그렇지만, 당신이 그렇게 까지 하신다는 것은 저를 위해서 걱정이 되는 것이 아니라, 당신 자신을 위하여 걱정이 된다는 것예요.』
 
84
『무슨 짐작을 하였단 말이오? 그 짐작이라는 것을 좀 알아봅시다.』
 
85
『생각해 보시면 알 것이지요.』
 
86
『생각이 무슨 생각이란 말요.』
 
87
『무슨 생각이 무엇예요? 전에는 약주나 잡수신다고 핑계를 하고 늦게 다니셨지마는, 오늘은 약주도 잡숫지 않고 전보다도 훨씬 늦어 들어오셔서 어디 갔다 오셨느냐고 여쭈어 보아도 아무 대답도 못 하시니, 그것이 무엇을 증명하는 말예요? 계집의 집에 갔다가 오셨거나 그렇지 않으면 나같이 다 썩은 년은 고만 쓸 데가 없으니까 내버리시고 다른 여자를 생각하시는 것이겠죠.』
 
88
『글쎄 왜 그런 말을 하우. 무슨 일이 있어서든지 조금 늦게 돌아왔기로, 그렇게까지 말을 하면 나는 어떻게 하란 말이요.』
 
89
『무엇을 어떻게 하란 말씀예요. 그만한 일을 저에게 속이셔요? 당신의 마음을 알 것이지요.』
 
90
『무엇을 내가 속이었단 말이요. 내가 영숙을 속인 것이 무엇이요.』
 
91
『속이지 않으시고 무엇이예요? 왜 오늘 밤에 어디 갔다 오신 것을 말을 해주지 않으셔요. 말씀하지 않으시는 것이 즉 속이시는 것이지요.』
 
92
『내가 그 말은 참으로 영숙에게 할 수 없소. 영숙이가 어떠한 오해를 할지라도, 나는 그 말을 내 입으로 할 수 없다는 말이요.』
 
93
춘우는 간원하듯이 이 말을 하였으나, 영숙에게는 그 간원하는 것이 도리어 거짓을 꾸미는 것처럼밖에 보이지 아니하였다.
 
94
『고만두셔요. 당신이 그렇게 말씀하는데, 제가 더 무엇이라고 말할 수는 없읍니다. 그렇지만, 당신의 마음을 저는 믿지요. 무슨 거짓말을 하시더라도, 저는 당신의 말씀이라 하면 정말로 알 터입니다. 혹은 다른 사람이 이러한 말을 들으면 저를 어리석다 하시겠지마는, 저는 지금껏 당신을 위 하여 살아왔다고 생각하니까요. 저는 당신의 사랑을 받는 것보다 사랑하여 드리는 것을 더 즐거움으로 생각하니까요.』
 
95
『물론 그런 말을 여기에서 새삼스럽게 다시 말할 것은 되지 못 하지 마는, 나도 영숙이 지금까지 얼마나 나를 위하여 힘써 준 것을 모르는 바가 아니오. 그러나, 이번 일 하나는 나의 입으로 영숙의 앞에서 말할 수가 없소. 그것은 나를 용서하여 줄 수밖에 없소.』
 
96
이 말을 들은 영숙은 갑자기 눈물을 흘리면서,
 
97
『용서 해 드리지요. 모든 것을 용서해 드리겠읍니다. 그러나, 용서하는 사람의 마음이 어떠한 것은 잊어버리지 말아 주셔요』
 
98
하고, 그대로 엎드려 느껴 운다.
 
99
『고맙소.』
 
100
춘우는 이 말 한 마디를 입 밖으로 내보낼 때 말할 수 없는 감격을 느끼었다. 그의 눈에도 은연히 눈물이 핑 돌았다.
 
101
『잊지 않지. 나는 영숙이 나를 믿어 준다는 것과 같이 나도 영숙을 그렇게 믿어줄 터이요.』
 
102
이「믿어 줄 터이요」하는 소리가 영숙의 귀에는 무슨 의미인지 알 수가 없었다.
 
103
그날 저녁에는 무사히 잠이 들어 잘 자고 났다. 아침에 춘우는 어제 저녁에 된 일을 생각하기에 몹시 머리를 썩이었다. 전차 속에서 본 것이 분명히 영숙이었고, 철수의 여관으로 들어간 것도 분명한 영숙이었으며, 내가 그 여관 앞에서 나오는 사람이라고는 하나도 남겨 놓지 않고 모조리 보았으나, 문 닫힐때까지 영숙이가 나오는 것을 보지 못하였는데, 영숙이가 자기보다 먼저 자기집에 와 있다는 것은 아무리 해도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이 의문을 풀기도 전에 자기가 영숙의 앞에서 영숙을 믿겠다고 진정을 다해서 말을하다시피 한 것으로 말을 하더라도, 지금 냉정한 머리로 생각하면 어리석고도 또 부끄러운 일이 아니라 할 수 없다.
 
104
자기가 자기의 감각(感覺)을 전부 부인하기 전에는 어저께 일을 그대로 덮어 버릴 수가 없으며, 또는 어제 저녁의 자기가 영숙에게 취한 태도가 너무 약하였다는 것을 생각할 때 자기의 허위(虛僞)를 비웃지 않을 수가 없었다.
 
105
그는 아침에 일어나서 세수를 하고 밥을 먹을 때, 영숙의 거동이 전보다 더 친절하게 민첩하게 하는 것을 깨달았다. 그것이 너무 꾸미고 거짓 같아서 도리어 불쾌감을 느끼게까지 하였다. 춘우가 마루에 내려설 때 영숙은,
 
106
『잠깐만 기다리셔요』
 
107
하고, 방으로 뛰어들어가더니, 손에 무슨 종이쪽에 싼 것을 들고 나왔다.
 
108
『저.』
 
109
한참이나 말을 못 하고 있더니, 그것을 내밀면서,
 
110
『그것을 오늘 갖다 갚으셔요.』
 
111
춘우는 그것을 받아든 그 찰나에 그 속에 돈이 든 것을 알았다.
 
112
『이것이 웬 것이요』
 
113
하고, 영숙을 보았다.
 
114
『글쎄, 갖다 갚고 오셔요. 지금 장황히 어떻게 말씀합니까.』
 
115
『출처나 알아야 할 것 아니오?』
 
116
『글쎄, 이따 저녁에 조용히 말씀하지요.』
 
117
『나 그러면 아니 가지고 가겠소』
 
118
하며 도로 내미니까,
 
119
『글쎄, 퍽도 그러시우. 벌써 시간도 다 되고 하였으니, 어서 가지고 가셔요.』
 
120
춘우도 얼떨결에 주머니에 그 돈을 받아 넣고 문 밖으로 나왔다.
 
121
나오면서 생각을 하매, 그 돈이 수상하기도 하고 의심쩍기도 하며 또는 미안하기가 짝이 없다. 그러고, 또 한옆으로는 고마운 생각도 났다.
 
122
춘우는 그날 하루 종일 사십 원이라는 돈을 주머니에 집어넣어 놓고 영숙이가 어디에서 어떻게 만들어 온 것을 연구해 내기에 몹시 고생을 하였다.
 
123
어제 저녁에 자기가 영숙의 뒤를 분명히 따라가기는 갔었는데, 그것이 수수께끼와 같이 풀기 어려운 것이 되어 버린 것과 아울러서 또 오늘 아침에 자기에게 내어 준 사십 원 돈이라는 것도 알 수가 없다. 얼마 되지는 않는 돈 이지마는, 만일 이것을 얻어 온 수단이 자기를 위하여 상서롭지 못 하며, 그것을 받는 것이 자기에게 혹시 부끄러운 일이 아닌가 하고, 그는 그것을 줄 사람에게 주지 않고 다시 그대로 가지고 집으로 돌아왔다.
 
124
『아까 그 돈 어디에서 난 것이오.』
 
125
춘우는 들어가 옷을 벗고 영숙에게 물었다.
 
126
『빚은 갚으셨소』
 
127
하며 영숙을 되짚어 물었다.
 
128
『글쎄, 돈의 출처나 좀 가르쳐 주구려.』
 
129
『글쎄, 갚으셨거든 갚았다고 그러시고, 아니 갚으셨거든 아니 갚으셨다고 그러셔요.』
 
130
『그것은 어떻든지 내 말 대답부터 해 줘요.』
 
131
『난 싫어요. 그 말씀을 해 주셔야죠.』
 
132
춘우는 영숙의 말이 나오는 것을 듣기 위하여,
 
133
『갚았어』
 
134
하고 일부러 거짓 대답을 하였다. 그것은 그렇게 해야 그가 참으로 말대답을 할 터임이었다.
 
135
대답을 들은 영숙은 말이 나오지 않는 듯이 한참 머뭇거리다가,
 
136
『그것은 요담에 아실 날이 있어요』
 
137
하고 춘우의 환심을 사려는 듯이 상긋 웃었다.
 
138
춘우는 이 말을 듣고 속에서 분이 치밀어 올라왔다. 아무리 여자는 요사 하다 하지마는, 당장에 말을 하마 하고, 그것을 금시에 고치는 것은 너무나 간특해 보였다.
 
139
『무엇야? 어째서 이 당장에 말을 하지 못한단 말이오. 그럼, 진작 말 할수가 없다든지, 그렇게 말을 할 것이지. 지금 말을 한다고 하였다가, 또 말을 하지 못하겠다는 것은 무슨 까닭이오?』
 
140
『말할 수 없는 까닭이 있으니까 그렇지요.』
 
141
영숙도 약간 얼굴에 피가 올라오며 목소리가 높아진다.
 
142
『그 까닭이란 것이 대관절 무엇이오. 그 까닭 좀 압시다.』
 
143
『까닭을 가르쳐 드릴 테면 말씀을 하는 것이 낫지요. 그 까닭을 아실 건 없어요.』
 
144
『그러면, 당초에 말을 못 하겠단 말이오?』
 
145
『못해요. 어제 저녁에 당신이 늦에 돌아오셔서 제게 그 까닭을 조 금도 말씀 하실 수 없다는 것이나 똑 마찬가지로 저는 그 말을 당신에게는 할 수 없읍니다.』
 
146
춘우는 이 말에 입이 막히었다. 얼마간 입을 벌려 말을 하지 못 하다가,
 
147
『그렇지만, 만일 그렇다 하면, 자, 도루 가져가시오. 여기 있소』
 
148
하고, 돈을 꺼내서 영숙의 앞에다가 내던지며,
 
149
『나는 그렇게 까닭 모르는 돈은 쓰기가 싫소. 비록 영숙이가 주선하여 준것이라 할지라도, 그 까닭 모르는 돈은 쓰기 싫소』
 
150
하고, 그대로 옷을 떼어 입고 문 밖으로 나왔다. 영숙은 아무 말 한 마디 없이 앉아 있는 채 가만히 있었다.
【원문】(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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