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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머니 ◈
◇ (15) ◇
카탈로그   목차 (총 : 20권)     이전 15권 다음
미상
나도향
1
어머니 (15)
 
 
2
아침볕이 머리맡 창에 금빛같이 쬐었다. 춘우가 눈을 다시 뜰 때에는 벌써 마루 위에 상 보는 소리가 들리면서 아침 공기를 울리는 신선한 소리로,
 
3
『어서 일어나시우! 공일이라고 이렇게 늦도록 주무시우』
 
4
하는 영숙의 일깨우는 소리에 그는 비로소 기지개를 켰다.
 
5
『벌써 이렇게 되었나.』
 
6
하품을 한 뒤에 이불을 걷어 젖히고,
 
7
『세숫물 좀 놓우.』
 
8
두 팔을 걷은 후에 마루로 세수수건을 떼어 들고 나왔다.
 
9
앞 뜰 푸른 풀 위에는 아침 이슬이 진주같이 어리어 햇빛에 눈동자같이 반짝거리다가, 다시 풀잎 한복판을 대구루루 굴러서 땅 위에 떨어지기도 하고, 밤새도록 이슬에 젖은 흙의 구수한 냄새가 신선하게 코를 찌른다.
 
10
모란과 작약은 죽었던 옛 가지와 옛 뿌리에서 새로운 싹이 뾰로통하게 솟아나고, 채송화꽃은 입을 벌린 듯이 노랗고 빨갛다.
 
11
멀리서 늦은 밭을 가는 소가 메인 쟁기 소리를 따라 늙은 농부의 어디 엇소리가 멀어졌다 가까와졌다 한다. 양지쪽인 마루에 놓여 있는 세수물은 햇빛에 비치어 오색 무지개가 서며, 그것이 또다시 울멍줄멍하여진다.
 
12
부엌에서는 뜸들이는 밥이 솥 속에서 소리없이 김만 내고, 영숙은 부엌 바닥을 수수비로 정성껏 쓸어서 아궁이에다 넣는다.
 
13
춘우는 어제 저녁에 쓸쓸하던 마음은 어느덧 사라지고 즐겁고 청신한 마음이 가슴에 찼다 넘치는 듯하였다.
 
14
『아까요?』
 
15
영숙은 무슨 말을 하려는지 귀여운 웃음을 띠고 춘우 앞으로 가까이 가며,
 
16
『나물 장수가 들어왔길래 싱검초 나물을 좀 샀더니 퍽 싸요』
 
17
하며 퍽도 신기한 것처럼 말을 하더니,
 
18
『그래서 그것을 조금 무쳤지요.』
 
19
춘우의 귀에는 그리 신기스럽지 않지만, 영숙의 뜻을 받아 주느라고,
 
20
『얼마나 샀는데, 그것 좋은 것 샀구려. 내가 퍽 좋아하는 것인데, 그러나저러나 오늘 아침 반찬이 무엇 좋은 것이 있소?』
 
21
『어저께 사오신 고기가 좀 남았길래. 그것을 지졌지요.』
 
22
『그것만 하면 고만이지. 더 잘 먹을 수 있소. 우리 살림에…』
 
23
하고 수건질을 하니까, 영숙은 대야의 물을 갖다가 내버리더니,
 
24
『오늘은 아무데도 가지 않으실 터이요?』
 
25
『글쎄, 나는 집이나 보지.』
 
26
『집이나 보시다뇨?』
 
27
하는 대답을 할 때 영숙의 마음은 기뻤었다. 옳지, 날더러 청아를 보러 어머니에게로 가라는 말이로구나 할 때, 춘우가 고마운 동시에 믿음 성스럽고 또는 사랑스러운 동시 어제 저녁에 성미를 거스른 것이 후회가 났다.
 
28
『오늘 어디를 간다면서 그러우』
 
29
하며, 춘우는「가거라」곧대놓고 말을 하지 않지마는, 승낙하는 것이나 다름없는 말로 영숙에게 가라는 뜻을 보였다.
 
30
『그럼, 혼자 계시기 심심하지도 않으시겠어요?』
 
31
좋은 마음에 공연히 허둥지둥하여진다.
 
32
『무얼, 오늘이 일요일이니까 창하도 나올 터인즉, 같이 이야기나 하고 놀지. 점심이나 많이 만들어 놓고 가구려.』
 
33
『점심야 염려없어요. 그렇지만, 그 어른이 오시면 또 약주 잡숫자고 하시게.』
 
34
『내가 술 끊은 줄 아니까, 이제는 먹자고 그러지를 않아. 일전에도 같이 점심을 먹게 되었는데, 날더러는 술을 먹지 말라고 제가 먼첨 그러던데…』
 
35
『그이는 사리를 짐작하고, 또 무던한 이니까, 조금 믿을 수가 있지만, 그래도 어떤 때 객증이 나면… 나는 사내들이 왜 술을 먹는지 아무리 해도 모르겠어.』
 
36
『다 먹는 것도 까닭이 있어 먹는 것이겠지. 공연히 먹을라고.』
 
37
『까닭이 무슨 까닭이람.』
 
38
『영숙은 아직두 그 까닭을 몰라.』
 
39
아침밥을 두 사람은 재미있게 먹었다. 영숙이 상을 대강대강 치워 놓고 옷을 입고 나섰을 때 춘우를 향 하여,
 
40
『얼핏 다녀올 것이니, 집 잘 보고 계셔요』
 
41
하고 점심밥은 어디 있고 반찬은 어떻게 만들어 놓았다는 것을 일러 주었다.
 
42
『몇 시쯤 해서 오료.』
 
43
춘우는 나가는 영숙을 보며 물어 보았다.
 
44
『글쎄요. 저녁 안에 오지요. 와서 저녁을 해야 할 것이 아녜요.』
 
45
『그럼 얼핏 다녀오.』
 
46
영숙은 다리가 땅에 닿지 않게 줄달음질을 하다시피 자기 어머니 집을 향 하여 간다. 전차 정류장까지 오는데 몇 번이나 발을 헛디디어 놓았는지도 몰랐다.
 
47
동대문을 향하여 가는 전차를 바꾸어 타고 남대문을 지나갈 때, 그는 몹시 흥분이 되었었다.
 
48
몇 달 전에 자기 어머니에게 최후의 선고를 하고 나올 때에는, 당초에 어머니를 다시 만나지 않으리라 하였던 것이, 오늘에 자기 어머니를 보러 간다고 할 제, 그의 마음은 기쁘고 반가운 중에도 또는 부끄럽고 거북하였다.
 
49
「어머니를 만나 뵈옵는다.」
 
50
얼마나 좋은 일이랴. 자기를 길러 준 어머니, 자기의 모든 뒤치다꺼리를 하여 주던 어머니, 자기의 잘못을 모두 용서하고 가리어 주던 어머니, 그리고 모든 화풀이와 핀잔을 달게 받던 어머니를 뵈오러 가는 영숙은 또다시 그의 혈맥에 윤기(倫紀)의 뜨거운 피가 흐르기를 시작하였다.
 
51
「그동안 얼마나 고생을 하셨으랴.」
 
52
이 소리를 혼자 속으로 중얼거릴 때, 그는 감격과 인정에서 우러나오는 뜨거운 눈물이 두 눈에서 핑그르르 돌았다.
 
53
그리고, 또다시 철모르는 것이라고 그대로 떼 버리고 온 청아를 생각 하여 보았다. 그때 자기가 자기 품에 안고서 젖을 먹일 때에는 귀찮은 생각도 많이 났었고, 또는 귀여운 생각도 적지 않아, 몹시 굴기도 하고, 울리기도 많이 하였으며, 어떤 때는 예쁘고 귀여운 김에 깨물어 먹고 싶을 만큼 사랑스러운 때도 많아서, 모든 것이 으례 있을 일이요, 그러할 일이려니 하였던것이, 오늘에 앉아서 생각을 하니, 그 모든 것은 한낱 꿈으로 사라지고, 다만 남아 있는 것은 어미 없는 자식이 불쌍하다는 것뿐이었다.
 
54
전차가 의학전문학교(醫學專門學校) 앞 정류장에 서자, 영숙은 전차에서 내려 연동 골목으로 들어 경신학교와 공업전문학교 의학전문학교를 다 지나서, 골목하나를 이리 돌고 저리 돌더니, 돌다리 건너 어떠한 초가집으로 들어섰다. 대문간 행랑에 쟁개비와 대접, 숟가락 나부랑이가 어수선하게 흐트러졌고, 마당을 들어서 건넌방을 보매, 옹솥 하나가 걸린데다 바가지를 엎어 놓았는데, 뚫어진 창구멍으로는 눈 하나가 내다본다.
 
55
『청아 있니!』
 
56
부르는 말소리를 주저하는 중에도 반가움이 넘치었다.
 
57
『그 누구!』
 
58
하며 방 미닫이가 열리며, 안경 쓴 두 눈이 쑥 내다보더니,
 
59
『이게 누구냐?』
 
60
하며 영숙의 어머니는 곤두박질을 하여 뛰어나왔다. 영숙도 따라서 달려들며,
 
61
『어머니!』
 
62
하고 모녀는 두 손을 맞잡고 어쩔지를 몰랐다.
 
63
『어서 오너라. 그러지 않아도 혹시 오지나 않나 하고 기다렸지. 이리 올라와.』
 
64
『청아가 앓는다죠?』
 
65
하고 방으로 들어가니, 아랫목에 청아를 포대기를 덮어서 뉘었는데 가까이 가서 보니, 옛날의 청아같이 토실토실한 뺨이라든지 몽글몽글한 손, 나팔나팔 하는 머리, 반작반짝하는 눈, 새빨간 입술은 그 그림자도 볼 수 없고 머리는 가시덤불 같은데, 땀에 젖어 앙상한 이마에 달라 붙어 있고, 두 뺨은 깎고 저며낸 듯이 수척하였으며, 입술은 지지리 타고 하다못해 푸르며, 눈은 죽은 사람처럼 쑥 들어갔는데, 다만 꽁꽁하고 안간힘쓰는 소리가 아직까지 살아 있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66
『좀 봐라, 그렇단다.』
 
67
영숙은 손으로 몸을 어루만지며 뺨에다 입을 대고,
 
68
『청아야, 청아야, 엄마 왔다. 응 청아야』
 
69
하고 불러 보았으나, 그는 귀가 없는 듯이 대답이 없이 다만 간힘만 쓸 뿐이다.
 
70
『청아야, 엄마!』
 
71
또다시 불러 보다가, 대답을 하지 아니하매, 하는 수 없이 청아를 끌어안 아보니, 전에는 묵직하게 무슨 금덩어리나 안는 듯하던 것이, 지금은 백지장을 드는 것보다도 더 가볍다.
 
72
『며칠이나 되었어요.』
 
73
『며칠이 무엇이냐. 벌써 달포가 넘었는데, 처음에는 감기처럼 몸이 덥고 기침을 하길래 나는 그저 감기로 알았더니, 버쩍 돋히는데, 하는 수가 있더냐. 약국에 가서 이 약 저 약 이야기만 하고 먹이니, 그것이 어디 맞아 주어야지. 제 아비에게 편지를 해도 그저 오늘 올라간다 내일 올라간다 하는것이 한 달을 넘어 끌더구나. 그래 며칠 전에 왔다고 하기에 찾아가 보고 그런 말을 하니까, 돈 십 원을 주면서 약이나 지어다 먹이라고 하니, 약은 아무리 먹여도 조금도 돌리는 기색은 보이지 않고 그저 저 모양대로 있으나, 죽거나 살거나 그대로 내버려둘 수도 없고 앓을 적에는 들여다보지도 않다가, 만일 무슨 일이 있으면 청원은 나 혼자 들을 터이니, 너를 부른 것도 내 성미에 여간해서 안 부를 터이지만, 너도 생각을 해 보아라. 네 자식 네가 죽이는 것은 아무 말도 안 하겠지만, 내가 애꿏은 소리 들을 게 무어 있으랴 해서 너를 불러 온 것이니까, 네 생각대로 해라. 죽이려거든 죽이고 살리려거든 살리고…』
 
74
한참 말을 하다가, 끝에는 화를 낸다. 영숙은 다만 다소곳하고 듣고만 앉아 있다가,
 
75
『죽기야 할라고요!』
 
76
하며, 다시 청아를 뚜덕뚜덕 할 때 청아는 다시 꼼지락 꼼지락 하더니,
 
77
『엄마! 엄마!』
 
78
하고 헛소리를 한다.
 
79
『왜! 엄마 여기 있다. 자 청아야, 엄마 엄마』
 
80
하고 어르고 불러 보고 흔들어 보았으나, 또다시 말이 없다. 청아는 엄마가 자기를 안고 있는 줄도 알지 못하고, 참말로 부르는지 거짓말로 부르는지 엄마를 부르기는 하나 대답은 할 줄 모른다.
 
81
영숙의 가슴은 터지는 듯하였다. 그의 눈에서는 눈물이 비오듯 하며,
 
82
『자 청아야, 너의 엄마가 여기 왔다』
 
83
하고 느끼어 가며 울 때 청아는, 너는 나를 내버린 어머니니까 나의 어머니가 아니라는 듯이, 아무 말대답도 하지 않아 주었다. 영숙은 순결하고 흠 없는 어린 청아에게 무슨 죄나 지은 듯이 고개를 틀어박고 뺨을 대고 입을 맞추고 미친 사람처럼 울었다. 뜨거운 눈물이 떨어져 어린애의 얼굴에 폭포같이 흐르도록 울었으나 그 눈물을 가지고도 자기 어머니가 자기를 내버린 허물은 용서 할 수가 없다는 듯이 아무 말이 없이 안간힘만 쓰면서 자고 있을 뿐이다.
 
84
영숙의 어머니도 눈물을 떨어뜨리며 그 옆에 앉아서, 치마끈으로 떨어지는 눈물을 씻고 있다. 고요한 방 안은 슬픈 빛이 가득하여 검정빛이 그 방을 휩싸고 도는 듯하다.
 
85
영숙은 속마음으로 청아에게,
 
86
「모든 것을 용서하였다구. 내가 모두 잘못했다」
 
87
하고 빌고 싶었다. 그리고,
 
88
「너만 몸이 다시 성하여 즐겁게, 아무 근심없이 잘 자라는 것을 보기 만하면 나는 모든 것을 내버려서 네게 바치마」
 
89
하고 싶었다.
 
90
아주 순결하고 아주 정한 모녀의 애정이 그의 가슴에 찼다가 넘칠 때, 그는 눈물을 흘리는 그 가운데에 또다시 없는 희열을 느끼었다.
 
91
「그렇다, 모든 것을 버리자. 나는 다만 청아 하나를 위하여 살아 보자. 내가 청아를 위하여 없어져야 한다면 없어지기라도 하자」
 
92
하는 것은 그때 영숙의 영혼 속에서 부르짖는 결심의 부르짖음이었다. 그는 춘우에 대하여서도 이와 같이 절대의 결심을 하여 본 일이 아직 없었다.
 
93
그는 눈물 어린 눈을 바로 들고서 또다시 생각하여 보았다.
 
94
그는 춘우와 정이 들자, 그에게는 아무것도 꺼릴 것이 없이 자유로운 생애를 일평생 누릴 수가 있으리라고 생각한 지가 몇 달이 지나지 못하여, 그에게는 또다시 사람으로서는 차마 볼 수 없으며 차마 당할 수 없는 비참한 사실이 어느덧 자기 몸에 얽힌 것을 오늘 이 자리에서 찾아내게 되어 의아하고 놀라움을 견딜 수가 없었다.
 
95
행복스러운 그 이면에는 그 행복스러운 것만큼 불행이 있는 것을 알지 못 하였었다. 자기가 오늘에 모든 부자유한 것과 허위와 또는 매음적(賣淫的) 안일한 생활을 일조에 벗어던지고 자유롭고 깨끗하고 신선한 생활을 하여가는 줄 알았더니, 벌써 자기가 알지도 못하고 의식(意識)하기 전에 자기 신변에는 장차 올 비극의 준비를 하고 있는 청아가 있었던 것이다.
 
96
춘우는 그리웠다. 잊을 수가 없었다. 잊는다고 하느 것은 한 번도 생각 해본 일이 없었다. 그러나, 영숙은 오늘 청아를 자기 무릎에 다시 안고 죽고 사는 지경에서 배회하는 것을 볼 때, 청아를 자기 손에서 놓을 수가 없었다.
 
97
그러나, 청아는 자기의 딸이 아니요 자기의 것이 아니다. 청아는 벌써 자기와 떨어진 지가 오래이다. 자기가 스스로 청아를 내버린 지가 오래이다. 내버릴 때에도 어찌 섭섭함이 없었으랴마는, 그래도 가장 큰 힘으로 자기를 잡아가는 힘이 최고조(最高潮)에 이르렀을 그때에는 능히 청아를 버릴 수가 있었지만, 오늘의 청아는 다시 버릴 수가 없다. 사람이 죽는다는 엄연한 사실 아래 섰을 때에, 모든 세상의 죄악은 사라지고, 신성한 인간의 본능과 양심이 동하는 것이다.
 
98
버림을 당한 청아가 자기를 내버린 어머니를 부르며 신음할 제 비로소 영숙의 핏속에서 꿈틀거리는 모성(母性)의 사랑이 움직이지 않을 수 없었다.
 
99
그는 청아를 자기 가슴에다 꼭 끼어안아 보았다. 조금 잠이 들어서 쌕쌕 콧소리를 하는 그의 작은 몸이 자기 흉곽(胸廓)을 누르고 그 속에서 팔딱팔딱 뛰는 심장을 누를 때, 그는 자기가 가지고 있는 모든 감정을 한꺼 번에 짜내어 절대한 힘이 다시 나는 듯하였다. 마디마디와 끝과 끝에 그 힘이 차지 않는 곳이 없으며, 찌르지 않는 데가 없는 것 같았다.
 
100
눈물이 겨우 그치고, 영숙과 영숙 어머니가 서로 대하여 앉을 때, 영숙어 머니는,
 
101
『그런데, 애가 저 모양이 되었는데, 애 아버지는 한 번 들여다보지를 아니하니 어떻게 하니!』
 
102
영숙은 자기 전 남편 철수를 박정한 사람이라고 하지는 못하였다. 그에게도 그만한 가슴 아픈 일과 도는 그만한 비애 번민이 있을 것을 모르는 바가 아니었다. 하필 남을 칭원할 것이 무엇이랴. 다만 몇 해라도 같이 살던 그를 원수로 알 것은 아니다.
 
103
『오지 않으면 어때요.』
 
104
『어떻다니, 의원 한 번도 보이지 아니하고 생사람을 고대로 죽인단 말이냐?』
 
105
『저도 오고 싶지는 않겠지요』
 
106
할 때, 영숙은 싱거운 웃음을 웃었다.
 
107
『글쎄,오고 싶든 오고 싶지 않든 말이다. 사람이 죽고 산다는데 모르는 체 하니, 그런 일이 어디 있니.』
 
108
『저도 생각이 있으며 와 보겠지요.』
 
109
『어느 천년에 사람이 다 죽은 뒤에 말야. 대관절 내가 송구하고 맘이 졸여서 못 살겠다.』
 
110
『그러면, 내가 갖다가 병구완을 할께, 어머니는 아무 염려 마시구려.』
 
111
『네가 갖다가? 얘, 말은 좋다마는, 누가 남의 자식 좋다구 한다드냐. 더구나 다 죽어가는 것을!』
 
112
이 말에 영숙은 아무 말이 없었다. 과연이다. 춘우가 비록 나는 사랑 한다 할지라도 철수의 자식, 자기의 원수의 자식을 갖다가 같이 죽는 꼴이든지 사는 꼴이든지 보자고 할는지가 의문이었다. 춘우가 그렇게까지 성인은 아닐 것이다.
 
113
영숙 어머니는 또다시,
 
114
『그러고, 네가 왔다 갔다는 말만 들어도 천길 만길 뛸 터인데, 거기 다가 딸을 찾아갔다고 해 보아라. 당장에 무슨 변이 나고 말 것이니.』
 
115
『그러면, 아이가 죽어도 모르고 그래도 내버려두는 것을 어떻게 해요. 죽으면 살려 놓을 재주가 있답디까?』
 
116
『사람의 맘이 어디 그래야지. 제 고집만 세우고 제 욕심만 채우면 고만 이지. 제 자식 제가 죽이든지 살리든지 맘대로 한다면 어떻게 하니?』
 
117
『무엇요?』
 
118
영숙은 소리를 질렀다. 그때 그 마음속에서는 불 같은 덩어리가 올라오며,
 
119
『뉘 자식얘요? 저만 자식이고 내게는 자식이 못 된답디까. 낳기는 누가 낳고 기르기는 누가 길렀는데요』
 
120
하며 혼자 화가 나서 날뛴다.
 
121
『압다, 그렇게 소리지를 것야 무엇 있니? 내가 무엇이라고 했니? 서로 의논이지!』
 
122
『글쎄말예요. 제가 입이 광주리만 해도 그런 말은 나에게 하지 못 하리다.』
 
123
영숙 어머니는 한참 생각을 하더니,
 
124
『그러나저러나 저것을 살려 놓고 보아야지, 잘 태났든지 못 태났든지 살은 인생을 죽으라고야 할 수 있니? 그러니 좀 어려운 말이다만 네가 내 말을 좀 들어라.』
 
125
『무슨 말을요.』
 
126
『그래도, 몇 해 간 살던 정리도 있고 또 그 사람이 그렇게 옹졸한 사람이 아니니, 네가 좀 가서 사정 이야기를 해 보아라. 내가 가는 것보다 네가 가면 들을 터이니…』
 
127
『내가 가요! 어머니는 나중에 별소리를 다 하시는구려. 내가 또 애 아버지를 만나 보아요! 나는 싫소.』
 
128
『싫으면 어떻게 하니? 내가 널더러 다시 살라는 것도 아니요, 가서 어린것을 위하여 말을 좀 하라는데, 그렇게 못 가겠다고 잡아뗄 게 뭐냐.』
 
129
『글쎄, 지금 무슨 낯으로 또다시 본단 말이오? 더구나 내가 내 발로 먼저 찾아가는 것을.』
 
130
『그러면, 네가 가기 싫어서 가지를 않는다 하면 어린 것은 누가 구해 줄것 같으냐. 그야 당초에 보지도 않으랴 하던 사람을 또다시 찾아가서 귀찮은 말하는 것이 누군들 하고 싶어 하는 것이겠니만, 그렇다고 잠깐 창피한것 —— 창피한 것도 없지마는——가기가 싫다고 가지 않으면 그 가기 싫은 것 까닭에 생목숨 하나를 끊게 한단 말이냐!』
 
131
영숙의 어머니는 영숙을 권고하기에 힘을 들인다. 혹은 위협도 하고, 타 이르 기도 하고, 달래기도 하였다.
 
132
『자, 그러지 말고 가 보아라. 네가 너 먹을 돈이나 양식을 다시 대 달라는 것도 아니요, 제 자식 제가 약쓰고 살리라는 말 하러 가는 것이 무엇 이그리 싫단 말이냐? 이악한 사람들은 재판질까지 해서 자식을 찾느니 양육비를 청구하느니 한다더라. 그러지 말고 지금이라도 가서 보고 사정의 이야기를 하여 보아라.』
 
133
『그것야 그렇지만.』
 
134
『어쨌단 말이냐. 나는 고집할 것이 아무리 생각해도 없을 것 같다. 그러지 말고 지금이라도 가 보아라.』
 
135
『가서 무엇이라고 한단 말요?』
 
136
『무얼 무엇이라고 하니? 참 딱한 애도 많다. 어린애가 명재경각에 이르렀으니 어린애를 데려가든지 그렇지 않으면 의원을 대서 고치든지, 양단간에 어떻 게든지 하라고 하지.』
 
137
『데려가라고요?』
 
138
영숙은 이 말을 하면서, 눈이 똥그래지고, 어린애를 다시 더 힘껏 끼어안았다. 마치 당장에 자기 품에서 어린애를 누가 빼앗아가려고 하는 것 같이, 그러고 가슴을 무엇으로 꽉 찌르는 듯이 선득하여지면서, 죽어도 철수에게 청아는 주지 않겠다는 결심이 그 순간에 번갯불같이 일어났다.
 
139
『나는 줄 수는 없어요』
 
140
하며 어머니를 쏘는 듯이 바라볼 때 어머니는 속마음으로 코웃음을 치며 무슨 승리의 만족을 느끼는 듯하였다. 네가 청아를 내버리고 간 지가 단 몇 날이 못되어, 또다시 청아에게로 돌아올 줄은 나도 벌써 짐작해 두었었지마는, 만일 네가 청아에게로 돌아오려면은, 또다시 철수에게로 돌아오지 않으면 안 되리라는 생각을 하고서, 시덥지 않은 코대답으로,
 
141
『그러면 어떻게 한단 말이냐?』
 
142
『무얼 어떻게 해요. 청아는 내가 데려갈 테예요.』
 
143
『무엇야! 네가 데려가?』
 
144
『예, 제가 갖다 죽이든지 살리든지 할 터예요.』
 
145
『그러면, 나는 어떻게 하란 말이냐.』
 
146
이 말을 듣고서 영숙은 답답하였다.
 
147
『청아를 네가 데려가면 네가 나 먹을 것을 주어야 할 것이요. 나 먹을 것을 주지 못할 것 같으면 청아는 데려가지를 못한다. 나도 몸이나 늙지 않았으면, 그것야 어떻게든지 남의 집 드난을 들어서라도 하루 밥 세끼야 못 얻어먹겠니 마는, 지금 같아서는 나는 달리 무슨 도리가 없지 않으냐. 너도 어미를 어미로 생각을 하면, 그런 생각 저런 생각을 다 해 주어야 할 것이 아니냐.』
 
148
영숙의 어머니 마음속에서는 새로이 어떠한 계획의 싹이 솟아났다. 영숙이 청아를 차마 놓지 못하는 것을 볼 때, 그에게서는 야심 하나가 생기기를 시작 하였다. 영숙이 청아를 가운데에다 두고서, 다시 철수에게로 돌아간다 하면, 옛날의 호화로움과 옛날의 안일한 생활이 다시 자기에게까지 돌아오리라. 그리하여 영영 춘우와 손을 다시 끊게 하는 무슨 계략을 생각하기 시작 하였으니, 그것은 결코 자기의 양심에 부끄럽지 않은 일도 아니었으나, 영숙의 행복과 청아의 행복뿐만 아니라, 세상의 모든 행복을 돈에다가 결착 시킬 줄밖에 모르는 그는 그것이 오히려 세상에 살아가는 첩경으로까지 생각 함이다.
 
149
영숙은 한참 동안 아무 말을 못 하였다. 그에게는 만 가지 계교가 궁 하였던 것이다. 어찌할 도리가 얼른 눈앞에 생각이 돌지 않았던 것이다.
 
150
영숙 어머니는 다시 말을 이어,
 
151
『그러고, 네가 청아를 데리고 간다 하나, 너는 데려가고 싶어도 춘우가 너의 자식까지 받고 싶어할 리는 만무하지 아니하냐? 설령 춘우가 너를 위 하는 맘으로 청아를 받는다고 하자. 그러면 춘우나 네게 무슨 그리 넉넉한 돈이 있어서 어린 것을 구하겠니? 만일 청아가 무슨 불행한 일만 있을 것 같으면, 그때에 그 칭원은 누구에게 돌아갈 듯싶으냐? 그러지 말고, 지금이라도 애 아버지에게로 가서, 어떻게 처치를 하여 달라고 하여 보아라. 그 저 내 말이 옳으니라, 범연한 말이 아냐.』
 
152
영숙의 마음은 괴로왔다. 이 갈래 저 갈래로 사방에서 자기 몸을 찢는 듯 하였다. 이러지도 못하고 저럴 수도 없었다.
 
153
영숙은 다시 춘우의 마음을 헤아려 보았다. 춘우가 진정으로 나를 사랑 한다. 그러면 진정으로 사랑하는 나의 딸을 자기가 또한 사랑하여 주어야 할것이다 물론 사랑할 것이다. 내가 사랑하는 청아를 춘우도 사랑하여 주어 야할 것이다 하여 보기도 하다가, 다시 어제 저녁에 자기가 어린애를 보러 가겠다고 할 적에 춘우의 기색이 좋지 못하던 것은 본 것을 생각하매, 다시 낙망이 된다. 자기가 자기 마음을 헤아려 보든지 또는 세상 사람의 적지 않은 실례를 들어 보더라도, 데리고 들어온 자식이나, 그렇지 않으면 전실 소생을 그렇게 사랑까지 하는 사람은 없을 것 같았다. 다만 의리로 하는 수없이 부모니 자식이니 하고 지내기는 지내지마는, 항상 질투와 미워함이 가슴속에 있어서 그것을 제지하느라고 적지 않은 노심과 괴로운 마음으로 지나가게 되는 것이 사실인 것을 생각하면, 자기가 자기를 위하여 청아를 데려다가 춘우의 마음을 거북하고 괴롭게 할 수는 없었다.
 
154
그렇다고 거의 거의 죽음이 임박한 불쌍한 청아를 내버려두고, 그대로 일어서 늙은 어머니에게 무한한 신고를 남겨 주는 것도 어머니와 자기, 자기와 청아의 관계를 보아서 인정상으로라도 차마 할 수 없는 일이요, 그렇다고 다시 철수에게 내주기도 싫었다.
 
155
적지 않은 번민으로 얼마를 앉아 있다가, 영숙의 마음속에서는 결심이 생기었다.
 
156
그래도. 나는 이것을 의논할 사람은 춘우밖에 없다. 가장 자기의 모든 해결 하기 어려운 문제를 호의적으로 의논하고, 도는 지도하여 줄 사람은 춘우가 그 중에 제일 믿음성스러운 사람이었다.
 
157
「그렇다, 춘우가 듣지를 않는다 하더라도 한번 의논은 하여 보리라. 그래서, 안 들어 주면 그만이지, 만일 들어 주지를 않는다 하면 그때는 애 아버지에게 담판을 가리라.」
 
158
이렇게 맘먹은 영숙은 어머니를 대하여,
 
159
『그러면, 나는 우선 집에 가서 춘우에게 그 이야기를 하여 줄 터이오. 그리하여 들으면 고만이지만, 만일 듣지 않거든 애 아버지에게라도 가서!』
 
160
영숙 어머니는 코웃음을 치면서,
 
161
『흥, 어림없는 소리도 하고 앉았다. 내가 사내가 되어도 어붓자식은 안 데려 들여오겠다. 거기다가 성하지도 않고 저렇게 거의 죽게 된 것을. 어디가서 말은 얼마든지 해 봐라마는, 될 성스럽지 않다』
 
162
하고 빈정거리더니,
 
163
『그럼, 저렇게 잊지 못할 자식을 왜 내버리고 갔드냐. 내버리고 딴 서방 따라갈 적은 언제고, 지금 와서 못 놓겠다는 것은 언제야.』
 
164
영숙은 공연히 울분한 마음이 생기며, 속에서 반역할 마음이 일어났다.
 
165
『내가 딴 서방을 했거나 화냥년의 짖을 했거나 어머니가 지금 와서 자꾸 되거퍼 말할 것이 무엇이요. 그러고, 내 딸 내가 찾아간다는데, 누가 뭐라고 해요. 나는 죽어도 철수에게는』
 
166
하고 얼굴이 파랬다 붉었다 하며 톡톡 소는 표독한 소리로 말대꾸를 한다.
 
167
『네 자식이냐. 네가 데려간다구? 말은 좋다. 네가 아무리 내 자식 내 자식 해도 아마 네 맘대로는 데려가지를 못하리라. 어디 재주 있거든 데려가 보렴.』
 
168
『왜 못 데려가요. 누가 못 데려가게 해요. 못 데려가게 할 놈이 누구예요.』
 
169
『얘, 이러다가는 욕하기 쉽겠다. 글쎄, 생각을 해 봐라. 그게 낳기는 네가 낳았더라도 씨는 누구 집 씬데 그러니? 나중에 애 아버지가 와서 자식을 내놓으라 하면, 네가 무엇이라고 할 터이냐? 그것을 생각해 봐야지. 그래, 내버리는 것이나 데려가는 것이나 모두 네 맘대로 해? 얘, 썩 장했다. 그렇게 세상 일이 쉬우면 나는 벌써 쌍가마라도 탔겠다. 공연히 용렬한 소리 말고 내말대로 해.』
 
170
『다 듣기 싫어요. 나는 나 하고 싶은 대로 할 터이니, 내가 청아를 못 데려가면 내가 죽고 제가 죽는단 한이 있드라도 무슨 요정을 내고야 말 터이니…』
 
171
『말야 무슨 말을 못 해! 어디 죽거나 말거나 네 맘대로 해 보기는 해 라마는 좀 어려울라』
 
172
하고 담뱃대에 담배를 피워 물고 말이 없이 두 눈만 끔벅한다.
 
173
영숙은 벌떡 일어나면서,
 
174
『자, 다녀올 터이니, 그런 줄 아시우. 이따래도 어린애를 데리러 올 터이니』
 
175
하며 문을 연다. 영숙 어머니는 일어서려 하지도 않고,
 
176
『흥, 허락 맡으러 가는구나. 어디 허락을 맡아 오나 보자』
 
177
하고 영숙의 뒷그림자만 쳐다본다. 영숙은 신을 신고 문 밖으로 나가 버리었다. 벌써 세 시가 넘어 네 시나 되어 간다. 그는 다시 전차를 타고 집으로 향하여 갔다.
 
178
영숙이 자기 집에 돌아왔을 때에는 춘우와 창하가 반가이 맞아 주었다.
 
179
『벌써 다녀오?』
 
180
하고, 춘우는 이제는 영숙의 일이 끝났으려니 하는 듯이 말 한 마디를 던지고 창하와 이야기를 하였다.
 
181
영숙은 옷도 갈아입지 않고, 그대로 머뭇머뭇하며 마루에 앉으면서,
 
182
『언제 오셨어요』
 
183
하고 창하에게 인사를 하니까, 창하는 그 인사를 받아서,
 
184
『예, 벌써 왔읍니다. 그러나, 청아가 대단히 앓는대죠?』
 
185
이 말을 들을 때, 영숙의 심장은 공연히 울렁울렁하였다. 자기가 어머니 집에서 나올 때에는 춘우에게 청아를 데려오자고 눈 딱 감고 말을 할려 하던 것이, 지금 춘우를 앞에다 앉혀 놓고 보매, 어쩐지 춘우는 벌써 자기가말하려는 것을 미리 알고 앉았는 것 같고, 또 그의 말이 없이 다문 입이 당초에 그런 말에 대답을 하지 않으리라고 결심한 입 같았다. 그는 가까스로,
 
186
『대단하다 뿐예요. 아마 죽을까 봐요?』
 
187
하고, 까만 눈썹을 아래로 깔 적에는 애수(哀愁)의 빛이 온 얼굴에 가득 찼다.
 
188
『어떻게 어디를 앓게.』
 
189
춘우는 고개를 돌리며 물었다.
 
190
『몰라요. 내가 가도 알아보지도 못하고, 자꾸 엄마만 부르고 간힘만 쓰는데 차마 볼 수가 없게 되었어요.』
 
191
『의사가 무슨 병이라고 하지도 않는단 말이요.』
 
192
『의사요? 의사가 다 무엇이요. 여태까지 약 한 번을 변변히 쓰지를 못 하였다는데.』
 
193
창하가 이 말을 듣더니, 눈을 뚱그렇게 뜨며,
 
194
『그게 웬일일까요. 애 아버지도 서울 와 있는데.』
 
195
『그거 야단났군. 오늘이라도 가서 권고를 해야 하겠군. 사람의 목숨이 왔다 갔다 한다는 데 그게 무슨 짓이람.』
 
196
영숙은 기침을 한 번 하고, 온 전신에 힘을 주어 결심을 하고 입을 열었다.
 
197
『그런데요, 두 분께서 다 들어 주셔요. 저는 청아를 이 집으로 데려오겠어요. 춘우 씨는 물론 싫어하실 줄 알겠지마는, 청아를 데려다가 죽이든지 살리든지 결말을 내기는 제가 낼 터예요. 창하 씨 생각에는 그렇게 하는 것이 어떻다고 생각하십니까.』
 
198
『글쎄요. 내야 이러거나 저러거나 간섭할 일이 못 되니까, 말하기가 거북합니다.』
 
199
영숙은 다시 춘우의 기색을 살피었다.
 
200
『그렇게 하는 것을 허락해 주시겠어요. 저는 참말이지 죽어도 애 아버지에게로 어린 것을 돌려 보낼 수는 없어요.』
 
201
춘우는 말이 없이 앉았었다. 어제 저녁에 자기 마음이 괴롭던 것을 자기가 생각 해 보매, 과연 청아에게 자기가 죄를 짓지 않고 자기 집에 두게 할는지 자기가 자기를 의심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러나 춘우는 또다시 오늘 아침에 영숙이를 보낼 적에 자기의 결심을 생각할 때 그것을 허락지 않는다는것은 너무 의리 인정이 없는 사람 같기도 하였다.
 
202
그는 한참이나 궁리를 하다가,
 
203
『데불어 오구려. 내게 물어 봐서는 무엇 하오? 남의 자식도 불쌍하면 거두어 기르는 일이 있는데』
 
204
하며 억지로 웃음을 띠었다.
 
205
『정말요?』
 
206
영숙은 거짓말을 듣는 듯이 다시 다짐을 한다.
 
207
『언제 내가 거짓말 합디까?』
 
208
『그러면, 오늘이라도 제가 데리러 갈 터얘요.』
 
209
『데려와요. 데려다가 병이 나으면 우리들이 기릅시다그려.』
 
210
영숙의 마음은 몹시 즐거워서, 당장에 뛰어다니며 춤이라도 추고 싶은 그 반대로, 춘우는 몹시 마음이 괴로운 것을 알아 주는 이가 별로이 없었을 것이다.
 
211
두서너 시간이 지났다. 창하는 작별을 하고 춘우의 집에서 나와 전차를 타고 경성으로 들어와서 찾아가는 곳은 철수가 유숙하는 여관이었다.
 
212
창하는 철수와 영숙이와 춘우 세 사람 사이에 일어나는 모든 사실을 냉정한 머리로 관찰하여 보매 차차 그들에게는 참담한 비극의 막이 열리기 시작 하는 듯하였다. 자기가 언제든지 생각하는 바나 일반으로 청아는 세 사 람사이에 있어, 그들의 행복을 위하여서는 장애물이다. 그들에게는 청아가 있는 것이 도리어 불행한 것인 것을 벌써부터 알고 있는 그는 속마음으로는 청아가 죽는 것이 오히려 다행한 일이 아닐까 하고 생각까지 한 일이 있었다.
 
213
창하가 철수의 여관을 막 들어서려 할 때, 영숙의 어머니가 나가는 것과 마주치었다.
 
214
『아!』
 
215
하고 영숙 어머니는 그대로 발을 멈추고, 한참이나 놀란 사람처럼 말이 없이 서 있다가, 겨우 입을 열어서,
 
216
『오래간만 이시구려』
 
217
하고 인사를 한다. 창하는 노파의 행동에 수상한 점이 있는 것을 발견하고,
 
218
『예, 안녕하십니까』
 
219
하고 다시 한번 아래위를 보았다. 그리고,
 
220
『누구를 보고 가십니까?』
 
221
하고 재우쳐 물으매, 당황한 꼴로 영숙 어머니는,
 
222
『저 애 아버지 좀 보고 가요』
 
223
하고 그대로 꽁무니를 빼려 하매,
 
224
『청아가 대단히 앓는다지요? 청아는 어떻게 하고 오셨읍니까.』
 
225
『예, 말 마시우. 여간 대단해야죠. 그래 애 아버지에게 그 말을 이르러 왔다 가요.』
 
226
『철수가 안에 있어요.』
 
227
『예, 있어요.』
 
228
창하는 영숙 어머니가 자기를 몹시 미워하는 것을 알므로, 그래서 이렇게 쭈뼛쭈뼛하나 하는 마음이 생겨,
 
229
『어서 가 보시지요』
 
230
하고 안으로 들어갈 제 마음속에는 어쩐지 영숙 어머니가 자기를 만난 것을 꺼리어 하는 듯하여 보이었다.
 
231
철수의 방으로 들어가서 앉았다. 철수는 마침 어디를 가려는 것처럼 옷을 갈아입으면서,
 
232
『어디서 오시는 길이십니까?』
 
233
하고, 넥타이를 맨다.
 
234
『어디 좀 다녀서 집으로 가는 길에, 자네 좀 보려고 왔네. 할 말도 있고…』
 
235
『무슨 말씀예요. 지금 어느 친구와 만나자고 해서 거기를 가는 길인데요.』
 
236
『뭐 길지 않은 이야기야. 대관절 청아가 대단히 앓는다네그려.』
 
237
『예, 그렇데요. 나는 바빠서 가 보지 못하였지만, 걔 외조모가 와서 그러는데요.』
 
238
『그러나저러나 말을 들으면, 자네가 약 지어 먹일 돈도 주지 않고, 의사도 보이지 않는다니, 그 말이 정말인가?』
 
239
철수는 눈이 둥그래지며,
 
240
『무엇요? 그럴 리가 있나요, 지금도 돈을 무엇 한다 무엇 한다 하고 삼십원이나 가져갔는데요.』
 
241
『삼십 원?』
 
242
『네, 그애 외조모가 와서 약값 줄 것이라고요.』
 
243
『그랬나. 어떻든, 그러면 다행일세. 내가 잘못 들었나보이. 그런데, 내 가하겠다는 말은 다른 말이 아니라 오늘 영숙이가 청아를 보고 왔다네그려.』
 
244
『영숙이가요?』
 
245
하고 왈칵 흥분이 되며,
 
246
『무엇 하러 청아를 보고 왔어요?』
 
247
『무엇 하러 간 것야 두말할 것이 없지 않은가. 그런데 다녀와서 하는 말이 청아를 자기 집으로 데려다가 기르겠다고.』
 
248
말이 끝나기고 전에 철수는 소리를 높이어,
 
249
『안 될 말입니다. 왜 제 집으로 데려가요. 그게 제 자식인가요. 당당한내 자식예요. 제가 내버리고 갈 적은 언제고 지금 또다시 찾아갈 적은 언젭니까? 모두 제멋대로 저 하고 싶은 대로만 하자는 말이지요.』
 
250
창하는 말을 더 느럭느럭해서,
 
251
『글쎄, 내 말을 좀 듣게. 자네가 그것은 잘못 생각하는 것이야. 어린 것이 지금 당장에 죽네 사네 하는데, 어머니 품에서 병을 고치는 것도 어린 애에게 좋은 일이요, 또는 어머니 된 사람으로 그러한 마음이 있는 것도 인정이니까, 이왕 춘우도 허락한 일이니, 앓는 동안만 갖다가 치료를 시켜서 낫거든 다시 찾아오기라도 하게그려.』
 
252
『싫어요. 내가 내 자식을 죽이는 한이 있더라도, 그것은 주지 않을 작정 입니다.』
 
253
『압다 그렇게 고집할 것이 아니라니까, 그러네그려. 생사람 하나 죽이는것보다도 잠깐 권도도 쓰지 못한단 말인가.』
 
254
『나는 권도도 쓸 줄 모르고, 이왕 어미 없는 자식 죽는다 하면 팔자 좋지요. 세상에 살아서 고생 하느니보다.』
 
255
『그저 속을 좀 펴지 못해. 왜 그렇게 마음이 좁은가. 좀 너그럽게 생각을 하여 보게.』
 
256
철수는 화가 나는 듯이 탁탁 털고 일어서며,
 
257
『저는 그 말 한 마디는 결단코 들을 수가 없어요. 다시 제게 그런 말씀 은하 지도 마시우』
 
258
하고 웃옷을 떼어 입고, 모자를 쓴다. 창하도 하는 수 없이 따라 일어서며,
 
259
『그럴 것이 아닌데 그러네그려. 오늘 저녁에라도 혼자 조용히 생각을 해보게.』
 
260
두 사람은 똑같이 마당에 내려서 문 밖으로 나왔다.
 
261
그날 저녁이었다. 춘우는 밤이 늦도록 영숙이 돌아오기를 기다리었다. 그러나, 열 한 시가 넘도록 오지를 아니하였다. 초조한 마음에 일어나 앉았다 드러누웠다 담배도 피웠다가 책도 보았다 하였다.
 
262
남산 등머리 소나무 수풀 사이로 살그머니 넘기어다보던 달이 어느 결에 공중에 불끈 솟아 백지로 바른 머리창에 처마 그림자를 반쯤 비추어 놓은 것이 차츰차츰 위로 올라가서는 어느덧 방 안까지 환하게 비추어 놓았다.
 
263
영숙을 기다리던 마음은 어느덧 변하여, 영숙을 의심하는 마음이 되었다. 의심하는 마음과 한꺼번에 일어나는 것은 질투였다. 영숙이 청아를 데리러 갔다가, 철수를 만나지나 아니하였나 하는 생각이 불현 듯이 생길 때에, 그는 몹시 불안한 생각이 나서, 문을 열고 마루 끝에 나와 앉아 달을 쳐다보고 담배만 피워 물고 있었다. 저 건너 양철지붕이 이슬에 젖어서 달빛에 뻔 지르르하게 빛이 나 보이고 동리집 개가 컹컹 짖는다. 말 갔다 오는 동리 집 머슴이 아리랑 아리랑을 흥에 겨운 목소리로 길게 뽑으며 지나갔다. 화단에 심은 꽃이 촉촉하게 젖은 향기를 실바람에 옮겨다가 얼굴을 스치고 지나갈 때, 입속에서는 달디단 꿀맛이 나는 듯하였다.
 
264
춘우는 이와 같이 한적한 달밤에 외로이 앉아 영숙을 기다릴 때, 그는 외국에 간 사람이 고향 생각을 하는 듯한 그리웁고 외로운 정조를 느끼는 듯 하였다.
 
265
그는 혼자 콧소리도 하여 보고 또는 입속으로 노래도 불러 보았다. 하늘에는 누가 부르는 듯이 박쥐 한 마리가 이쪽으로 날아오려다가, 다시 저쪽으로 달아났다. 멀리서 신용산 다니는 전차 소리가 들리었다 사라졌다 하였다. 때로 뻐꾹새가 뒷산 소나무 새에서 구슬프게 울었다.
 
266
「어째 오지를 않나?」
 
267
혼자 중얼거리다가, 문간을 내다볼 때 누구인지 흰 옷 입은 사람이 걸어가는 발자국 소리에, 영숙이가 아닌가 하고 자세히 보았으나 영숙은 아니요, 촌여 자였다.
 
268
그는 일이 있어서 늦게 오겠지 하고 관대한 생각을 먹어도 보고, 또다시 철수와 만나서 이야기를 하나 보다 하고 의심도 하여 보았다. 그의 마음은 마치 용수철 모양으로 줄어들었다가 늘어졌다 하는 것 같이 동요가 많았었다.
 
269
그는 마당에 내려서서 팔짱을 끼고서 이리 왔다 저리 갔다 하다가, 문 밖으로 나가서 영숙이 오는 것을 맞아 주려 하였다.
 
270
그러나, 기다리는 영숙은 아직도 오지 않았다. 그는 조금 높은 곳에 올라서서 멀리 달 그림자로 영숙의 오는 것을 보리라 하였다. 그러나 오지 않았다. 저쪽 기차길 너머로 벌써 빨간 불을 단 전차가 지나가는 것을 보았다. 그러고는 덜컥 걱정이 생겼다.
 
271
「벌써 막차는 나가는데, 웬일일고?」
 
272
하고 궁금증이 났다.
 
273
「오다가 무슨 일이 났나? 그렇지 않으면 늦어서 자고 오나? 마중을 가자니 집이 비고 궁금해 못 견디겠네」
 
274
하는 생각이 나며, 집을 내려다보매, 갓 이은 초갓집이 가라앉는 듯이 조용히 있다.
 
275
기다리던 마음이 화로 변하고, 화가 변하여 영숙을 책망하는 마음이 되었다.
 
276
「어린엔지 무엇인지 데려오려거든 얼른 데리고 오든지 밤중이 되도록 오지를 않으니, 기다리는 사람 생각은 해 주지를 않는단 말인가?」
 
277
하고, 다시 집으로 들어가려고 자기 집 모퉁이를 돌아설 때 영숙이 숨이 턱에 찬 것 같이 땀을 흘리며 문간으로 들어서려는 것과 마주쳤다.
 
278
『왜 인제 오?』
 
279
춘우는 책망하려던 생각이 영숙을 보자 풀어져 버리고 반갑고 시원해서 부드럽게 물었다.
 
280
『에그, 나와 계셨어요. 나는 퍽 기다리실까 봐서 뛰어오느라고…』하고는 안으로 두 사람이 들어갔다.
 
281
『그런데, 어린애는 왜 데리고 오지를 아니하였소』
 
282
하고, 춘우는 방 안으로 들어가, 전기불에 비친 영숙의 얼굴을 보매, 눈 가장자리에 분 바른 것이 어룽이 지고 눈물 자국이 그대로 있는 것을 보고 또한 번 속으로 놀라는 동시에 의심이 생기었다.
 
283
「옳지, 철수 앞에서 울었구나」
 
284
할 때, 춘우의 마음은 쓰리었다.
 
285
『애요?』
 
286
영숙은 대답을 채 다하지 않고 옷을 화난 사람처럼 활활 벗을 때 그에게는 어쩐지 황당한 빛과 침착하지 못한 사람 같았다. 마치 죄지은 사람이 쫓겨 온 것 같은 기색이 있었다.
 
287
옷을 벗고 앉은 영숙은 무엇이라 대답할는지 몰라서 한참 주저 하다가,
 
288
『병이 너무 중해서 바람을 쏘이고 데려올 수가 있어야죠. 그래서, 그대로 두고 왔어요.』
 
289
춘우는 곧이들었다.
 
290
『그렇게 중하드란 말요.』
 
291
『아마 죽을까봐요.』
 
292
영숙은「죽을까봐요」하는 말에 힘을 주었다.
 
293
춘우는 영숙이 청아를 데리고 오지 않은 것이 속으로 다행하였다. 그리고 무슨 사정이든지 생기어 영영 아니 데려오기를 가만히 기대하였다.
 
294
『그런데, 막차가 나가는데, 무슨 차를 타고 왔소?』
 
295
영숙은 조금 있다가,
 
296
『그 차를 타고 왔어요』
 
297
하는데는, 아무리 보아도 무슨 근심이 있거나 무슨 생각이 있어 보인다.
 
298
『왜 어디가 불편하우? 또 어머니허고 싸웠소?』
 
299
『아뇨!』
 
300
영숙은 고개를 내저었다.
 
301
『그럼, 왜 그러고 앉았소?』
 
302
『무얼 누가 어째요? 아무렇지도 않은데요』
 
303
하고 억지로 태연히 꾸미려 하나, 그 꾸미려는 고통이 나타나 보인다.
 
304
영숙의 가슴에도 무슨 비밀을 감추어 두었는지 모르나 춘우는 몹시 의심스럽고, 또는 갑갑한 동시에 불유쾌하였다.
 
305
『그럼, 어린애는 아주 데려오지 않으료?』
 
306
『글쎄요. 시방 형편 같애서는 데려올 수가 없어요.』
 
307
『무슨 형편이란 말요?』
 
308
영숙은 반짝반짝하는 눈으로 전기불만 들여다보더니,
 
309
『아니 별다른 형편이 아니라 요』
 
310
하고 말을 늦추어 가며,
 
311
『애가 너무 심하게 앓으니까요, 하는 말에요.』
 
312
『그렇다고 할머니한테만 혼자 내버려두면 어떻게 하우?』
 
313
영숙의 마음은 괴로웠다. 춘우가 제발 그런 말을 좀 물어주지 않았으면 좋겠다 하였다. 무슨 무거운 납덩이가 그 말 할 적마다 자기 가슴 위에 와서 부딪치는 것 같았다. 그러고는 자기가 오늘 지낸 일을 모조리 잊어버렸으면 좋겠다 하였다. 나중에는 청아가 이 시간에 얼핏 죽어 버려서 이 꼴 저 꼴 모두 잊어버리는 것이 도리어 낫겠다 하였다.
 
314
영숙은 춘우에게 오늘 지낸 이야기를 할까? 하지 말까? 하지 않자니 자기는 춘우에게 거짓말을 하는 사람이요, 하자니 춘우의 마음은 아픈 것이다. 차라리 모든 비밀을 자기 입속에 삼키어 두고 춘우의 마음을 괴롭지 않게 할지언정, 그 말을 입 밖에 내어, 자기가 정직한 사람이 될 수는 없었다.
 
315
『그러면, 영숙이가 날마다 가 보아야 하겠구려.』
 
316
『글쎄요. 틈 있는 대로 가 보지요.』
 
317
『그것 대단히 어려운 일이 생겼군. 그렇지만 아니 가 볼 수는 없지.』
 
318
춘우는 혼잣말처럼 이렇게 중얼거리었다.
 
319
두 사람은 길게 말을 하지 아니하고, 그 자리에 그대로 누워서 잠이 들었었다. 달은 어느덧 넘어가 머리창에 검은 그림자가 덮이어 버리고, 돌 틈에서 벌레 우는 소리만 고요하다.
 
320
춘우가 언제인지 불안한 꿈을 깨었을 때에 그의 귀에는 이상한 소리가 들리었다. 그는 실눈을 뜨고서 가만히 살필 제, 껐던 전등이 다시 켜지고 누웠던 영숙이 일어나 앉아서 의장문을 열어젖뜨리고 무엇인지 조심스럽게 상자에서 꺼내는 것이 있었다. 그것이 무엇일까? 춘우는 눈을 크게 뜨고 힘 있는 광채로 그것을 건너다보다가, 다시 눈을 감은 체하였다. 그러고 코를 골고 자는 체 하였다.
 
321
영숙은 이것저것 백지와 비단 헝겊으로 꽁꽁 뭉친 것을 하나씩 둘씩 펼 때, 적적한 방 안 전기등 밑에서는 금과 금이 부딪치는 소리가 땡 그렁 땡 그렁 일종 신비의 소리를 내인다.
 
322
춘우는 속으로 놀라고 또는 신기하였다. 영숙은 두 손가락에서 그것 중에서 하나를 집어들 때, 별 같은 광채가 나며, 금강석 박은 반지가 춘우의 눈에 띄었다.
 
323
영숙은 그것을 한참이나 들여다보더니, 다시 고개를 돌이키어 춘우가 혹시 잠을 깨어 보지나 않는가 조심하듯이 살피더니, 그것을 자기 손에 끼고서, 아까운 듯이 물끄러미 보더니 또한 한숨을 땅이 꺼지게 쉬었다. 그러면서 입속으로,
 
324
「하는 수 없지」
 
325
하며 한탄을 하였다.
 
326
춘우는 그것을 볼 때, 그는 모든 일을 알아차렸다. 여기 자기가 누워 있는이 집 세전을 얻어낸 것도 저 상자 속이요, 여태까지 지내올 제 그리 부족하지 않은 생활을 하여 오게 한 것도 저 상자 속에서 나온 것이요, 오늘에 청아가 죽을 지경에 있어서 약을 쓰며 의원을 부르게 되기도 저 상자 속에서 나올 것이 있는 때문일 것이다.
 
327
그러나, 영숙의 저 상자 속에 있는 것은 그것이 영숙의 힘들여서 생긴 것이 아니다. 그것은 모두 철수의 주머니 밑에서 나온 것이라는 것을 생각할 때 자기가 지금 이 집의 자리에 누워 있는 것도 던적스럽고, 부끄러운 생각이 났다. 그리고, 영숙이 저렇게 그것을 아까와하는 기색을 볼 때, 그에게서는 자기의 자부심이 얼마간 손상되는 듯하였다. 자기가 남의 남편이 되어서 그 안해가 자기가 존중히 여기는 패물까지 남편 몰래 팔아서까지 자기를 위하고 자기의 자식을 위하도록 내버려두는 것은 너무나 남의 남편 될 자격과 힘이 부치는 것 같이밖에 생각이 되지 않았다. 그때의 춘우의 가슴은 쓰리고 저리었다. 그러고 혼자 얼굴에 피가 끓어올라오는 듯이 부끄러웠다.
 
328
영숙은 다시 그것을 종이에 똘똘 뭉치더니, 상자를 장 속에 집어넣고 반지는 자기 손가방 속에 넣은 후에 자리로 다시 돌아왔다.
 
329
춘우는 안 오는 잠을 자는 듯, 눈을 감고 누워서 영숙의 거동만 살핀다.
 
330
불을 끄더니, 영숙은 잠이 오지 않는지 부스럭부스럭하며 몹시 번민 하는 사람처럼 이리뒤척 누웠다가 저리뒤척 누웠다 한다.
 
331
영숙은 그러더니, 다시 느끼어 가며 우는 소리가 나며, 고개를 베개에 틀어 박고, 춘우에게 그 소리가 들리지 않게 하기에 몹시 애를 쓰는 듯하였다. 그러나, 벅차서 나오는 울음은 점점 느끼는 소리를 높일 뿐이요, 나중에는 듣거나 말거나 울고 싶은 대로 운다는 듯이 소리까지 내어 울었다.
 
332
춘우는 이 우는 꼴을 보고서 그대로 있을 수가 없었다. 아까부터 이상한 눈치를 발견한 그는 그 울음 속에 반드시 무슨 수수께끼가 포함되어 있으리라, 그러고, 여태까지 우는 것은 고사하고, 참새나 제비처럼 유쾌하고 즐겁게 행동을 갖고 얼굴에는 행복의 빛이 나던 영숙이가 무슨 까닭으로 저 와같이 울까, 청아가 죽게 되었다니까, 그것을 불쌍히 생각하여 우나! 어머니의 몸이 되어 자식을 내버리었다가, 그 자식이 지금 최후에 임 하였다니까, 그것을 뉘우쳐서 우는 것인가? 그렇지 않으면 무슨 다른 사실이 그 속에 잠재 하여 있는 것인가? 물어 볼까 하다가, 춘우는 덮었던 이불을 제치고 팔을 내밀어 영숙의 어깨를 흔들었다.
 
333
『여보 여보.』
 
334
손이 어깨에 닿을 때 영숙은 잠깐 놀라는 듯하더니, 대답이 없이 더 소리를 높여 울었다.
 
335
『영숙! 영숙! 왜 이래? 응.』
 
336
춘우는 더 가까이 가서, 영숙을 자기 팔 위에 안고 얼굴을 들여다보려 하였으나, 창에 비치인 미약한 달빛의 반사로는 자세히 볼 수가 없어 불을 켰다.
 
337
『왜 그러우? 말을 하우? 말을 해요?』
 
338
영숙은 고개를 내저으며,
 
339
『아녜요. 아무것도 아녜요』
 
340
하고 대답 없이 울기만 한다. 춘우는 답답하여 영숙의 몸을 잡아 흔들며,
 
341
『내게 말 못할 것이 무엇이오? 무슨 일요? 대관절 말이나 좀 해요. 갑갑하구려.』
 
342
목메인 소리로 영숙은 대답을 하는 말이,
 
343
『당신에게는 말씀할 수 없는 일예요. 그러니, 그저 그렇게만 알아 두셔요』
 
344
하 매 춘우는 일부러 노한 목소리로,
 
345
『그러면, 영숙이가 나를 전만큼 생각하여 주지 않는다는 말이로구려. 전에는 영숙이가 내게 하지 않은 말이 없었지? 무슨 일이든지 같이 의논하였지! 그러고,무엇이든지 날더러 물어 보고 하지 않았소. 그러면 영숙이가 지금 와서는 날더러 그와 같은 말을 하는 것을 보면 전처럼 나를 생각지 않는다는 말이 아니고 무엇이요?』
 
346
『아녜요.』
 
347
영숙은 고개를 가볍게 내저으면서,
 
348
『내가 당신을 더 생각하는 까닭에 이 말을 못 한다는 것입니다. 이 말을하는 것이 안 하는 것보다 못하다는 말예요.』
 
349
『더 생각을 하면 무슨 말이든지 해 주는 것이 좋지 않소. 영숙의 일이 나나의 일이면 죽어도 한다 하지 않았소. 이 일이 죽는 것보다 더 큰일이라 할지라도 내게 말은 해 주어야 할 것이 아니오.』
 
350
『왜 그렇게 들으려고 그러세요. 저의 마음이 괴로운 것을 당신은 몰라 주십니까? 저를 믿지 못하십니까?』
 
351
『영숙을 못 믿는 것도 아니요. 의심하는 것도 아니요. 영숙이 괴로와 할 때 나도 괴롭고 영숙이 울고 있을 때 나도 눈물이 나는 것을 영숙은 알지 않소. 자, 무슨 일인지 이야기나 하우.』
 
352
『이야기를 해요?』
 
353
눈물 방울이 속눈썹에서 이슬같이 반짝인다. 춘우는 수건을 들어서 그것을 씻어 주며,
 
354
『응? 말을 해!』
 
355
『말을 하기는 하지요.』
 
356
영숙은 결심한 듯이 눈에서 광채가 나더니, 한참 있다가,
 
357
『그렇지만 여보셔요. 먼저 말씀하여 둘 것은 섭섭히 생각하시지 말으십시오. 그러고 저를 책망하여 주지 마셔요.』
 
358
『글쎄, 그런 말은 하지 말라니까 그러는구려. 어서 말을 들어 봅시다.』
 
359
『그러면, 말을 하지요』
 
360
하고 영숙은 입을 열어 말을 시작하였다. 춘우는 가만히 그 말 나오기만 기다리고 있었다.
 
361
영숙은 머리를 손가락으로 쓰다듬더니, 깊은 한숨을 한 번 쉬었다.
 
362
『저는 춘우 씨를 속이었어요. 속이었다고 하는 것보다 어느 정도까지는 배반 하였다고 할 수는 있읍니다. 제가 춘우 씨더러 언제인가 일평생 애 아버지와 만나지 않겠다고 맹세한 일이 있지요. 그 맹세를 오늘 저는 저 버리고 다시 애 아버지를 만나 보았어요.』
 
363
말소리가 점점 떨려 나오며 힘이 있어 간다. 춘우는 말이 꼬리를 이어서 엉클어진 실이 풀려 나오는 것을 정성껏 듣고 있다가, 이 말 구절에 와서 눈동자가 영숙의 얼굴로 돌아갔다. 그의 가슴에는 의심과 불쾌스러운 생각이 녹은 촛농이 편편한 데로 떨어지는 것처럼 슬그머니 일어났다.
 
364
영숙은 다시 침을 삼키고 말꼬리를 이어,
 
365
『애 아버지를 만나 보게 된 것은 내가 일부러 보고 싶어서 그리한 것도 아니요, 나의 정이 다시 그에게로 가서 그러한 것도 아니지요. 다만 어린것 하나 때문에 그렇게 하지 않을 수가 없게 되어서 그리 된 거예요. 아까도 말씀하였거니와, 청아가 그렇게 앓는 것을 그대로 내버려둘 수가 없어서, 그 애를 데려오려고 어머니 집을 가지 않았어요. 가 보니까, 어느 틈에 어머니는 애 아버지에게 그 말을 가서 하지 않았겠읍니까. 그러니까, 애 아버지가 이 소리를 듣고서 노발대발하여 청아가 죽어도 내놓지는 않겠다 하고 야단을 치지 않았겠어요.』
 
366
『누구를 제가 원망하겠읍니까. 어머니 하나 잘못 만난 탓으로 이 모양이 되어서 남과 같이 사람다운 생활을 하지 못하는 것이지요. 모두가 팔 자라하면 팔자일는지도 모르지만.』
 
367
『그래서 저는 맨나중 결심으로 애 아버지를 찾아가려 하였읍니다. 제가 당신께 말씀한 것도 있지마는 그것을 저버리는 것인 줄 알면서도 저는 애 아버지를 찾아갔어요』
 
368
할 때 영숙의 눈에서는 새삼스러운 눈물이 흐르기 시작하였다. 목소리는 메어 나온다. 그러고 고개를 춘우 무릎 위에 숙이고,
 
369
『춘우 씨! 당신은 그 죄를 용서하여 주시겠지요. 제가 애 아버지를 보러가려 할 때처럼 마음이 괴로와 보기는 처음이었어요. 저는 당신을 믿는 마음으로 당신에게 사죄를 하면 반드시 용서하여 주시리라는 마음으로 그리하였어요.』
 
370
춘우도 이 말을 들을 때 운모원반(雲母圓盤) 위에서 일어나는 감응 전기가 자기 몸에 닿는 듯이 저린 듯하였다. 그는 아무 말 없이 영숙의 손을 잡았다. 그럴 때 그는 마돈나의 순결하고 성(聖)된 손을 쥐인 것도 같았고, 예수가 물을 청하는 사마리아의 매음녀의 손을 쥔 듯도 하였다. 그러다가, 다시 막달라 마리아에게 향기로운 기름으로 발을 씻겨 받고 그 머리 터럭으로 다시 훔침을 당하는 듯하였다. 가장 신성한 감정과 가장 죄악의 마음이 자기의 전 영혼 속에서 움직이는 듯하였다.
 
371
영숙은 울어 가면서 말을 계속하였다. 엄숙한 밤 공기가 정적을 만들어 두 사람을 에워싸고 있는데 영숙의 울음 섞인 말소리가 그것을 바느질하듯 복판을 타고 나갈 뿐이다.
 
372
『그래서 애 아버지에게로 갔지요. 간즉, 나를 보고 반기는지 마는지, 그것은 제가 알 바가 못 되지마는, 어떻든 옛 정리를 조금이라도 가지고 있다 하면, 인사 한 마디라도 해 줄것이 아녜요. 본체만체 앉았다가, 제가 인사를 시작하니까, 마지못해 왔느냐는 말뿐이 아니겠읍니까. 제가 저를 보고싶어 간것도 아니겠고 무엇을 달라라 간 것도 아니겠는데, 그렇게까지 매몰스럽게 하는 것을 볼 때 저는 참으로 원통하였어요.』
 
373
『그것은 어찌 되었든지, 첫째 청아를 어째 못 주겠느냐 한즉, 내 자식 내가 맘대로 하는데 네가 무슨 관계가 있느냐. 전 같으면 모르겠다마는, 오늘은 네가 청아의 어미가 아닌 이상에야 단연코 내줄 수가 없다 하지 않겠 읍니까. 그래, 나는 하는 수 없이 청도 해 보고, 간원도 하여 보고 또는 빌어도 보고 떼도 써 보았으나, 그는 돌멩이처럼 까딱도 하지 않겠읍니까.』
 
374
『그러한 아비에게 어린 청아를 맡겨 둘 일을 생각하면 참으로 모골이 송연해요. 생각할 때마다 불쌍하고 속에서 피가 식는 듯해서, 못 견디겠어요.』
 
375
『그래, 거기서 싸움을 하다못하여 다시 어머니께로 간 즉, 어머니와 애 아버지와 무슨 내통이 있었는지, 어머니마저 청아는 데려가지를 못 한다고놓고 내주지를 않습니다그려. 그래 하는 수 없이 데리러 갔던 청아는 데려오지도 못하고, 당신에게 죄만 짓고 왔어요.』
 
376
느끼어 가며 영숙은 말을 끝내고 엎드려 운다.
 
377
춘우는 이 말을 다 듣고 나서, 무엇이라고 말할 수가 없었다. 다만 무엇이라고 꼭 집어 내어 말할 수 없는 감정이 그의 가슴 위를 지질러 놓았을 뿐이었다.
 
378
우리의 시조 때부터 몇만 년을 통하여 내려왔고, 또 우리의 자손에게 몇 만년을 이어서 내려갈 절대의 문제를 눈앞에 놓고 그것을 내다볼 때, 우리의 팔 이나 손이나 몸으로는 어떻게 할 수 없는 진리가 하나 있다.
 
379
그 자식이 있으면 그 어버이가 있는 것은 정한 이치니 이것을 어떠한 자가 있어 그렇지 않게 만들 수는 도저히 없을 것이다. 자식이 그 어버이를 저 버리는 것은 있어도 어버이가 그 자식을 내버리지 않는다는 옛말도 있지마는 그것이 사실로 거꾸로 되는 때도 혹간 없는 바가 아주 아닌 것은 아니나, 앞의 말보다 뒤의 말이 더욱 진리에 가까운데야 어찌하랴. 복잡하고 착종 한 우리 인류 사회에 나서, 또한 복잡하고 다단한 일생애를 보낼 때에 우리의 피난처와 우리의 낙원은 두 가지가 있다. 그것은 어머니 품속과 애인의 품속이다. 조물주가 춘우라는 인간과 영숙이라는 사람을 만일 숙명적(宿命的)으로 이렇게 얽어 놓았다 하면, 그 허물은 단순하게 그리로 돌리어 보내겠지마는, 만일 그렇지 않다 하면, 그 허물은 어디로 돌아가랴.
 
380
여기에 우리가 풀려고 애써도 풀 수 없는 그 무엇이라는 것이 남아 있는 것이다.
 
381
영숙은 어머니로서의 사랑을 가진 동시에 또한 남의 애인으로서의 애정을 가지었다. 이것이 서로 뭉치고 반죽이 되고, 또는 순탄한 길로 평행이 된다하면, 그리 어려운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것보다 임을 사람한다는 가장 귀한 감정을 가진 자로서 즐거운 생애를 보낼 수 있겠지마는, 그것이 부스러지고 서로 떨어지지 않을 수가 없고, 또는 서로 얽히는 곳에 영숙에게는 고민이 있고 불행이 생기는 것이다. 마치 금강석으로 금강석을 치느 것과 같이, 어머니의 사랑이라는 것과 또는 남의 애인의 애정이라는 그 사랑은 다 아름다운 감정이지마는, 이것이 서로 부딪칠 때 둘은 위태한 운명을 면 하지못 할 것이다. 그 어느 것이 완성하고 또는 보전하려면, 그 어느 것을 희생 하는 것이 되어야 할 것이다.
 
382
춘우의 마음은 아직까지도 단순하였다. 너무 이상적이요 또는 너무 착하였다. 영숙의 이와 같은 말을 듣고서, 그는 조그마한 의심과 또는 생각이 없이 모든 것을 용서라는 것으로 해결하여 버리려고 하였다. 영숙의 마음에는 벌써 틈이 장차 벌어지게 하는 그윽한 그림자가 비친 것은 어찌 되었든지, 춘우는 영숙을 동정하고 전보다도 더 많이 사랑할 수만 있으면 있을 만큼 사랑하여 주기를 노력하려 하였다.
 
383
『영숙! 고만 울우!』
 
384
타일러 가며 위로하여 가며, 자기의 마음을 늦추어 가며, 이번에 일어난 일을 어떻게 해서든지 칠판에 그리어 놓았던 그림을 지워 버리듯 지워 버려 자기 기억 속에서 사라지게 하고 싶었다.
 
385
『고만 울우, 울지 말아요. 내가 영숙을 용서할 권리는 없지마는, 나는 그것을 잊어버릴 터이오. 영숙도 이제는 잊어버리면 고만이 아니요.』
 
386
영숙은 그래도 울음을 계속한다. 고개를 숙이고 있는 영숙의 눈 속에는 죽어 가는 청아가 자기를 부르며 발버둥치는 것이 보인다. 그것이 옆에 있어서 자기를 위로하는 것보다도 더 자세하게 보일 때가 오히려 많았다. 자기의 머리속에 비치는 환상(幻像)이 옆에 앉은 정체(正體)인 춘우보다도 더 분명하고 똑똑하게 보이고 들리는 것은 무슨 까닭이랴. 여기에 그 무겁고 가벼운 것을 알 수가 있다고 할까? 아니다. 마치 한 옆에 무거운 것을 실어 놓아서 그것이 가만히 기울어져 있을 때에 또 다른 옆에 갑자기 다른 그만한 것을 갖다 놓으면, 그것이 그쪽으로 기우는 저울과 마찬가지로 영숙의 마음은 이제 적지 않은 동요가 생긴 것이다. 지금 어느 쪽이든지 한쪽에 약한 점만 보인다 하면, 그것은 기울어지고 말 위태한 지경에 있는 것이다.
 
387
영숙은 툭 터놓고 마음껏 울었다. 그 울음은 여러가지의 의미가 있었다. 마치 상식을 지내는 며느리가 자기의 시아버지나 시어머니를 생각하여 우는것 보다도 자기가 시앗본 것이 더 설워서 우는 것과 마찬가지로 울음의 동기는 청아의 앓는 데서 얻어 가지고 그것이 변하여 자기의 신세 타령과 또는 세상에 모든 울분한 것이 울적하게 쌓였던 것을 자기 애인에게 말로는 못 하는 울음으로 하소연하다시피 하는 것이었다.
 
388
어느덧 두 사람은 다시 잠이 들었다.
 
389
그 이튿날 영숙은 밥지으러 나오는 시간이 전보다 많이 늦었었다.
 
390
일 주일 가량이 지나서 영숙과 춘우 사이의 화평과 행복은 다시 예전처럼 회복 되었다. 흔들렸던 행복의 잔은 다시 가만히 고요하게 놓여 있고, 그 위로는 사랑의 샘물이 한량없이 찼다가 넘쳐 흐르게 되었다. 다시 웃음과 노래가 그의 가정을 둘러싸게 되었다.
 
391
그러나, 춘우가 알 수 없는 것이 한 가지 있었다. 영숙의 눈에는 언제든지 수심이 가득한 것이었다. 자기를 보고 웃고 자기와 서로 이야기를 할 때에, 모든 경쾌한 동작이든지 표정이 전과 틀림이 없지마는 말이 없이 있을 때에 영숙은 몹시 수심에 싸여 있어 보이었다.
 
392
혹간 영숙은 애조를 띤 소리를 입속으로 혼자 군소리처럼 하는 때도 있고, 멀거니 먼 산을 바라볼 적이 있을 때 춘우는,
 
393
『무슨 근심이 있소?』
 
394
하고 물어 보면,
 
395
『아뇨』
 
396
하고 고개를 내저으며, 다시 유쾌한 얼굴을 지어 그 수심의 빛을 지워 버린다.
 
397
춘우는 어디 가든지 이 문제를 풀기에 고심하였으나, 자기의 힘으로는 도저히 풀 수가 없었다. 어떠한 때에 춘우는 다시 영숙을 향 하여,
 
398
『청아 때문에 그러우?』
 
399
하고 위로하듯 물어 본 때도 있었으나, 영숙은 역시 고개를 내저으며,
 
400
『청아요?』
 
401
하고 되짚어 물으며,
 
402
『청아는 벌써 잊어버렸어요. 생각을 해 보십시오. 제가 청아를 생각 하느니 보다 그것을 잊어버리는 것이 낫지 않겠읍니까! 저는 아주 청아의 일은 단념하여 버렸어요. 저는 당신 한 분을 위한다 하면, 무엇이든지』
 
403
하고 채 말을 마치지 않던 일도 있었다. 이 말을 들을 때, 춘우는 다시 영숙을 권하였다.
 
404
『나를 위하여 청아를 내버릴 것이 무엇이오. 내가 혹시 영숙이가 철수와 가까이 하는 것을 싫어할까 하여 그와 같은 일을 일부러 한다 하면, 그것 은영 숙이가 나를 사랑하면서 나를 몰라 주는 것이 아니고 무엇이오. 만일 참정 말 나를 안다 하면, 영숙은 그렇게까지 청아를 단념할 것은 없을 것 같소』
 
405
하고 여러가지로 타일렀으며 나중에는,
 
406
『영숙이가 나를 사랑하지 않으므로 영숙이 마음속에 있는 것을 모조리 말해 주지 않는구려』
 
407
하고 성까지 내보았다. 그러나 만일 다른 때 이러한 말을 하면은 원통히 여길 터인 영숙이가 이번에는 도리어 웃음을 지으며, 그것을 그렇지 않다고 할 제 춘우의 마음은 그 울음으로써 원통함을 하소연할 때보다 그 웃음으로써 자기를 위로하려는 것이 몹시 싫었다. 그 가운데는 기만과 사휼이 섞이어 있는 것 같아서 마음이 서운해지는 듯하였다.
 
408
그러자 하루는 춘우가 몸이 불편하여 전보다 서너 시간 일찍이 집에 돌아와 본즉, 영숙이가 보이지 않았다. 문을 밖으로 잠근 것을 보면, 필연 멀리간 것이 분명하였다.
 
409
「어디를 갔을까?」
 
410
춘우의 생각으로는 알 길이 없었다. 어찌하였든 자기가 가진 열쇠로 문을 열고 들어가 요를 깔고 누웠으려니까, 낮부터 신열이 나던 것이 더욱 더욱 심하여지며 온 전신이 불덩이같이 더워 온다. 가뜩이나 몸이 괴로와서 편안히 누워 있으리라 하고서 집에 돌아온 것이, 와서 본즉 영숙이가 없으매, 마음이 불편하고 또는 화가 나서 공연히 몸이 더욱 불편해지는 것 같았다. 어찌하였든 돌아올 때까지 기다려 보기나 하리라 하고서 그대로 눈을 감고있었으나, 조금도 마음이 가라앉지를 아니하고 마음이 죄어 못 견디겠다.
 
411
한 시간이 지나갔다. 천장에 붙어 있던 파리가 앵 하고 날아오더니, 얼굴에 와서 앉는다. 춘우는 나른한 기운 속에 근지럽게 기어가는 파리를 쫓고다시 몽롱한 가운데 잠이 들었다 말았다 하였다. 다시 목이 말라서 물을 먹어 볼까 하고 눈을 떴을 때 벌써 시계는 다섯 시를 쳤다. 그러자, 문소리 가황 망히 나면서 들어오는 이는 영숙이었다.
 
412
『누구요?』
 
413
다만 반갑기만 한 마음에 춘우는 제 힘껏은 목소리를 높여서 불렀다.
 
414
『나예요.』
 
415
마당에 들어선 영숙의 목소리는 풀이 죽었다.
 
416
『어디를 갔다오? 나는 몸이 좀 불편해서 일찍 왔지.』
 
417
『어디가 편하지 않으셔요?』
 
418
『저 신열이 나고 두통이 나며 몹시 거북해서.』
 
419
영숙은 방으로 들어왔다. 그러고는 죄지은 사람처럼 조심스럽게 춘우 앞에 와서 앉아 춘우의 머리를 짚어 보았다.
 
420
『에구, 대단합니다.』
 
421
『글쎄, 웬일인지 알 수가 없어, 그런데 어디를 갔었소?』
 
422
영숙은 이 말에 또 한 번 말이 없이 있다. 그러고는 고개를 돌이키고 무슨 생각인지 한참 하고 있다가,
 
423
『저 그 전에 학교에 다니던 동무가 찾아와서 놀러갔다 와요』
 
424
하며 또 그 언제든지 웃는 웃음으로 말끝을 마치며 웃었다.
 
425
『그러면 집을 잠그고 나간단 말요. 내가 온 뒤에 가도 좋지 않소. 이렇게 적적한 집을 비어 놓고 다니면 위태하지 않소.』
 
426
『글쎄, 그런 줄 모르는 것도 아니지만, 자꾸 뒷솔밭에 놀러 가자고 재촉을 하는 것을 어떻게 해요.』
 
427
『그럼, 그이는 어디로 갔단 말요.』
 
428
『먼첨 들어갔어요.』
 
429
『왜 그렇게 총망하게.』
 
430
『집에 볼일이 있어서요.』
 
431
춘우는 웬일인지 영숙의 말 가운데는 구석이 지어 보이고, 또 그가 말을 채 끝내지도 않고, 외면을 하며 말을 피하려 하는 기색이 있는 것을 보아서 그것이 어느 정도까지 정말같이 보이지는 아니하였다.
 
432
그러고 그러한 생각을 자기가 하려고 하는 것은 아니지마는, 그러한 생각이 자연히 들어갈 때에는 자기가 자기를 책망하는 생각이 나며, 또는 양심상 부끄러운 생각이 들었다. 영숙이가 비록 무슨 일이 있어서 자기를 속이고 어디를 갔다 왔다 하더라도, 그것은 자기와 영숙의 두 사람을 위하려 함이요, 결코 자기에게 향하여 반기(叛旗)를 들려 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그러하고, 지금까지 영숙이 자기에게 하여 내려온 것을 보아서도 영숙을 의심하는 것은 죄악이라는 생각이 들어서, 자연히 자기 감정 가운데서 솟아 일어나는 것이지마는, 그것을 부인하고 그것을 억제하려고 하였다.
 
433
그러나 장마 때 흙 틈에서 새어나오는 물처럼 막으려 하면 또다시 새 어나 오고, 막으려 하면 또다시 새어나오는 그의 의심은 오늘에 비로소 생긴 것이 아니요, 벌써 그 단서가 잡힌 지가 오랜 것이다. 춘우는 장래할 미래의 그것이 어느 한 모퉁이를 문지르고 나갈 때가 있을 것을 미리 생각할 때 그는 몹시 무서운 생각이 났다. 그는 그의 마음을 누르려는 노력과 또는 그 누르는 것을 억지로 터뜨리고 쏟아져 나오려는 그 무슨 미묘한 감정과 싸우 기에 몹시 가슴이 괴로웠다.
 
434
춘우는 또다시 영숙에게 묻지를 아니하였다. 그러하나 그가 일과나 마찬가지로 하루 한 번씩은 으례 말을 하여 두는 말이 있으니, 그것은 자기의 마음이 얼마큼 괴롭기는 하나, 자기가 자기의 의무로 아는 것이니,
 
435
『청아에게는 정말 가 보지 아니하료?』
 
436
하고, 한 번씩 재우쳐 두는 것이다.
 
437
영숙은 이 말을 듣고서,
 
438
『청아요?』
 
439
하고, 무슨 죄악의 현장이나 발견된 사람처럼 눈을 크게 뜨고 반문을 하였다.
 
440
『청아에게는 무엇 하러 가요? 당초에 가지 않겠어요』
 
441
하는 말이나 얼굴이 몹시 냉담해 보였다.
 
442
춘우는 또다시 생각하였다. 영숙이 만일 나를 위하여 청아를 버린다 하면 그것은 나 한 사람만 위함이요, 결코 자기 자신을 위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443
자기 자신을 위하는 것보다 자기가 순교자(殉敎者)의 고행(苦行)과 같은 어려움을 당하고 있을 터이니, 또한 나로서는 그것을 그대로 내버려둘 수 없는 일이니, 그대로 내버려둔다 하면, 그것은 내가 영숙을 사랑하는 본의가 아닐 것이요, 그렇지 않고 영숙이 참으로 나라는 사람을 생각하여가 아니라, 사랑이라는 그것보다도 색정에 취하여 청아라는 자식을 내버렸다 하면 그의 피는 뱀의 피와 같이 찬 여자이니, 어느 때든지 또한 나를 내버릴 날이 있을 것이다. 하는 생각을 하고서 영숙을 쳐다볼 때 어쩐지 바로 쳐다볼 수가 없었다.
 
444
그날은 그대로 지나갔다. 그 후 며칠 후에 춘우는 평양에 출장을 갈 일이 있어서 사흘만에 돌아온 일이 있었다. 돌아와서 창하를 길거리에서 만났다.
 
445
『어디 갔다 오나?』
 
446
『평양 좀 다녀오네.』
 
447
『평양은 왜?』
 
448
『회사 일로.』
 
449
『그런데, 나는 몰랐어. 그러지 않아도 내가 자네 집을 갔었지.』
 
450
『집에 왔다면서 내가 어디 간 줄을 모른단 말인가.』
 
451
『글쎄. 그러게 말일세. 내가 자네 보고서 할 말이 있으니까 말일세.』
 
452
『무슨 말을?』
 
453
『이리로 오게. 조용히 앉아서 말을 하세.』
 
454
어느 카페로 두 사람은 들어가 조용한 이층으로 올라갔다.
 
455
『무엇을 먹으려나?』
 
456
『나는 식당차에서 저녁을 먹어서 별로이 먹고 싶은 마음이 없는데.』
 
457
『그러면 술이나 한 잔 들려나?』
 
458
『언제 내가 술 먹던가, 미친 사람일세그려. 대관절 무슨 말인가 그 말이나 좀 하게.』
 
459
창하는 자기 먹을 음식을 시켜 놓고 천천히 입을 열어,
 
460
『이 말을 들었다고 조금이라도 어떻게 생각은 하지 말게. 그러나 내가 이 말을 자네에게 하지 않을 수가 없어서 나는 자네의 친구 된 의무로 말을 하는 것이야.』
 
461
이 말 한 마디가 벌써 춘우의 머리속에 무슨 암시를 주는지 알아낼 수가 있었다. 그의 마음은 무엇으로 찌르는 듯하더니, 돌아서서 가는 영숙이가 눈앞에 보이는 듯하였다.
 
462
『어서 말이나 하게.』
 
463
『그런 게 아니라.』
 
464
말하기가 몹시 거북한 것처럼 맥주 한 컵 마시고서,
 
465
『영숙 씨 말일세』
 
466
하는 소리에 춘우는 얼굴에 뜨거운 피가 올라오는 것을 깨달았다. 창하는다시 말을 계속하여,
 
467
『요사이 나의 눈으로 보아서는 퍽 무슨 고민이 계신 모양이야』
 
468
하니까 춘우도,
 
469
『글쎄, 나도 그러한 생각을 가졌어. 지난번에 철수에게 다녀온 후부터는 웬일인지 기색이 좋지 않아서 나도 퍽 의심을 하는 중이야. 이번 평양을 가서도 이삼 일간 더 묵어 올 것이지만 마음이 놓이지 않아서 속하게 왔는걸.』
 
470
『글쎄, 나도 일전에 자네 집을 가지 않았겠나. 그러니까 문을 잠그고 아무도 없드란 말이야.』
 
471
이 말을 듣고 춘우는 고개를 끄덕하고,
 
472
『음!』
 
473
하고 무엇을 알아챘다는 듯이 가만히 창하의 계속하는 말만 듣고 있다.
 
474
『그러고 또 어저께는 내가 철수의 있는 여관에를 다녀나오다가 힐끗 보니까 그가 그 여관으로 들어가지를 아니하든가?』
 
475
춘우는 무의식하게 손바닥으로 테이블을 탁 치며 벌떡 일어서며,
 
476
『응! 무엇야?』
 
477
하고 실신한 사람처럼 서 있었다. 그러고는 번갯불같이 지나간 일이 연상 되며,
 
478
『옳지 알았다. 모든 것을 이제야 알았다.』
 
479
춘우는 흥분이 되어 먹지 않던 술을 마시기 시작하였다. 비록 독하지 않은 맥주라 할지라도 그동안 먹지를 않았던 까닭에 몹시 취해 왔다.
 
480
그러고 춘우는 몹시 흥분이 되어 이런 생각 저런 생각 여러 가지 생각을 할수록 그의 마음은 분하고도 또 한 옆으로 생각하면 자기가 어느 점까지 부족한 점이 있는 까닭에 그러한 일이 생겼으리라고 생각하였다.
 
481
그러고, 지난번에 자기가 생각한 바와 마찬가지로 자기가 몹시 감정 질인것을 자기도 생각하였다.
 
482
『그러면, 나는 어떻게 해서든지 그 사건의 진상을 알아보아서, 그것을 천명(闡明) 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네.』
 
483
그러고, 술잔을 거푸 먹기를 시작할수록 그의 마음은 자꾸 약해지기 시작 하였다. 그러고, 그는 이번에 창하의 말을 듣고 나서 지난번 자기가 생각 한마음을 어느 정도 까지 믿기 시작하였다.
 
484
영숙이가 문을 닫고는 어디를 갔다는 것과 또는 철수를 만나 보았다는 것을 들을 때, 그의 마음이 찔리는 것은 더할 것도 없지마는, 또 한 옆으로 생각하면 자기가 자기를 내버려서라도 영숙의 사랑을 완전히 하고 싶었다.
 
485
물론 영숙이가 자기를 내버리고 철수를 따라간다 하면 어느 정도까지는 자기의 마음이 괴로울 뿐 아니라, 자기를 모욕하고 자기가 자기를 내버리는 그 울분한 감정을 억제하기도 어려웠지만, 또 한옆으로 생각할 때에 자기에게 그만한 부족이 있는 까닭에 그와 같은 일이 발생한 것을 스스로 돌아보게 되었다.
 
486
춘우는 다시 말을 이어,
 
487
『그와 같은 일은 벌써 알았네. 자네가 그런 말을 하지 않더라도 나는 벌써 알고 있으니까.』
 
488
사실로 말을 하면 진정한 사실을 자기가 인정하기는 오늘이 처음 이지마는, 지금 춘우의 입에서 나오는 말은 이것이 처음이었다.
 
489
또한 춘우가 이 말을 듣고서, 자기의 감정 속에는 이러한 말이 있는 것을 미리 알고는 있었지마는, 그것이 입으로 나오는 말이나 또는 그의 마음 깊이 그것을 느낀 것은 오늘이 처음이었다.
 
490
그러고 춘우는 이 모든 사실을 종합하여 생각할수록 그의 마음은 이상하게 흥분이 되어 오며, 한두 잔 입에 대기 시작한 술이 자꾸자꾸 잔을 거푸 하기 시작 하였다.
 
491
『여보게.』
 
492
창하는 술이 조금 취하여 이 말을 듣고서는 자기가 이 사실을 당한 것과 마찬가지로 춘우에게 무조건으로 동정하기를 시작하였다. 그러고, 춘우가한 번 노하고 한 번 성내는 것이 자기가 한 번 노하고 한 번 성내는 것이나 마찬가지로 춘우에게 마음이 끌리어 이런 일을 자기가 당한 듯하였다.
 
493
물론 이런 일이 멀지 않은 장래에 있으리라고 생각하였으나, 오늘에 정말로 이 일을 당하고 보니, 그것이 정말 같지 않고 거짓말 같으며, 또는 이런 일이 이 세상에 정말로 있는지 의심하기까지 하게 되었다.
 
494
『그렇지만, 여보게, 내가 이러한 말을 한다고 어떻게 생각은 하지 말게. 내가 이 말을 하는 것이 정말인지 거짓말인지 그것을 확실히 알기 전에는 자네나 내가 알 수 없을 것이니까.』
 
495
『자네가 말하기 전에 나는 벌써 알고 앉았네. 자네 말이 거짓말이 아닌것은 나는 벌써부터 증명하지마는, 나 역시 이것을 생각할 때 어느 정도까지 짐작한 것이 있으니까.』
 
496
『글쎄 짐작을 하든지 말든지, 그것은 나는 모르겠네만 그것이 정말이 아니 기를 나는 바라네. 그것이 나의 눈으로 보아서 정말인 것을 어떻게 하나.』
 
497
창하는 어느 때까지든지 냉정한 생각으로 말을 하였다.
 
498
두 사람은 거기서 나왔다. 그러고, 전차를 타고서 춘우의 집으로 향 하여 갔다. 춘우가 자기 집으로 갈 때에 지금같이 허무한 일을 당해 본 일이 없었다. 허무할 뿐만 아니라, 이것이 거짓말 같아 보이기도 하고, 또는 이 것이 거짓말이 되었으면 좋겠다고까지 속으로 생각하였다. 자기가 여태까지 그러지 않아도 의심까지 하여 보다가, 창하에게 그 말을 듣고서 신경이 착란 하여지며, 머리가 혼탁하여져서 눈앞에 보이는 것이 바로 분명히 보이지 않고 흐릿하여 보이며, 모든 것이 꿈 같아 보이었다.
 
499
영숙이가 자기를 생각하여 준 것이 각별하였기 때문에 지금 영숙이가 자기를 다시 내버리고 철수에게로 사실로 간다 하면 어찌하랴. 아니, 간다 하느니보다 사실로 갔다 하면 장차 자기에게 어떠한 운명이 닥쳐오랴? 그러고, 창하가 이런말을 나에게 일러 준 것이 친구의 도리로는 그러할는지 알 수 없지마는 이런 말을 하여 주어서, 자기의 마음을 이렇게까지 괴롭게 하여주느니 보다 아무 말도 하여 주지 않아서 그것을 알지 못하는 가운데 영숙에게 속아 지내는 것이 도리어 자기를 위하여서는 좋을 것 같았다. 그것을 생각 하면, 창하가 어느 편으로는 고맙기도 하고, 또는 원망스럽기도 하였다. 그러다가 창하가 말이 없이 가만히 앉아 있는 것을 볼 때, 그의 가슴속에 무슨 계책을 품고서 그리하는 것이나 아닌가 하는 의심까지 나기를 하였었으나, 그것은 곧 사라지고 말았다. 지금이라도 자기 집에 가서 영숙이가 없다 하면, 어찌하랴. 그러다가, 내가 가서 한참 초조한 마음으로 기다리다가 영숙이가 들어온다 하면, 속에 숨어 있던 울분한 감정이 터져 나와서 어떠한 짓을 할는지 자기가 자기를 믿지 못하는 까닭에 지금 자기 집으로 가는것이 위태한 것 같았다.
 
500
더구나 오래간만에 그쳤던 술을 먹은 까닭에 그것이 자꾸자꾸 올라와서 얼굴이 덥고, 또는 불같이 타오르는 감정을 자기가 억제할 수 없을 것 같았다.
 
501
이 점에 들어서 자기가 혼자 자기 집으로 가는 것보다 창하를 데리고 가는것이 퍽 필요하고 든든하였다.
 
502
사흘이라는 날짜를 서로 보지 못하였던 까닭에 보고 싶지 않은 것도 아닌게 아니지마는, 만일 영숙이가 집에 있어 자기를 기다려 주지 않고 도리어 없는 것이 자기나 영숙 두 사람을 위해서는 낫지 않을까 하는 생각까지 하였다.
 
503
집에 왔다. 사흘 전에 나갈 적이나 별로이 다를 것이 없었다. 영숙은 무엇인가 마당에서 서성거리며 일을 하고 있었다.
 
504
그의 머리는 섬세하게 흐트러진 것을 아무렇게나 틀어 얹고 가 무스 름하게 때 묻은 저고리 치마가 아무러한 일도 없는 것을 말하는 것 같았다.
 
505
춘우의 돌아오는 것을 보고, 영숙은 비둘기같이 반가와하였다. 그리고, 그 언제든지 웃는 웃음을 지어서 춘우를 맞아 주다가 춘우가 말이 없이 눈치만 살피며 또는 얼굴에 전에 보지 못하던 술기운이 있는 것을 보고 눈을 크게 뜨고 놀랐다.
 
506
두 사람 사이에는 오늘이 무슨 간격이 생기는 것을 춘우가 먹지 않던 술을 먹은 것으로 영숙도 짐작하게 될 때 가슴이 두근거리는 것을 느꼈다.
 
507
『나는 이렇게 속히 오실 줄은 몰랐어요.』
 
508
영숙이가 자기 남편이 속히 온 것이 좋아 그랬는지 꺼리는 일이 있어서 그랬는지는 모르겠지마는, 춘우의 귀에는 모든 것이 의심쩍게만 들린다.
 
509
『왜 그러우? 내가 일찍 온 것이 영숙에게 방해되는 일이 있소?』
 
510
영숙은 춘우의 이 말을 듣고 속으로 에쿠 하였다.
 
511
『왜 말씀을 그렇게 하셔요.』
 
512
영숙은 도리어 성내는 체하며 말을 하였다.
 
513
『전에 하시지 않던 말씀을 하시니, 그리고 약주가 웬일이셔요.』
 
514
『나는 술 먹을 기회가 영영 오지 않을 줄 알았더니, 다시 술 먹을 기회가 와서 좋게 되었소.』
 
515
『그게 무슨 좋은 기회입니까, 그러나저러나 어서 들어가서 진지나 잡수셔요.』
 
516
창하는 두 사람의 눈치만 보고 앉아서 아무 말이 없을 때 속으로는 영숙이가 얄미운 생각이 나서 자꾸 눈이 찡그려진다.
 
517
『밥먹을 마음 없소. 그러나저러나 요사이 소문을 들으니까, 영숙이가 대단히 바쁜 일이 많다고 합디다그려.』
 
518
『일이 무슨 일예요』
 
519
하며, 영숙도 이제는 춘우가 그것을 알았구나 하며, 곁눈으로 창하를 보았다. 이 일을 만일 안다고 하면, 그것은 창하의 입에서밖에 나올 데가 없을 터인데 하는 생각이 들며, 창하가 몹시 미운 생각이 들었다. 전에는 춘우와 자기 사이에 들어서 모든 것을 주선하여 주어서 창하 같이 고마운 사람이 없더니, 지금 와서는 창하처럼 밉고 또는 무서운 사람이 없었다.
 
520
본시 마음이 굳지 못하여 남을 꼬집어뜯고 싶어도, 그렇게 아프게 꼬집어 뜯지 못하고, 그렇다고 마음속으로 집어만 넣고 끙끙 앓기만 하지도 않는 춘우 로서 비록 영숙이가 사실로 자기를 배반만 하였다 할지라도 상당한 증거가 없이는 그것을 책망할 수도 없고 또 그렇다고 그대로 내버려둘 수도 없어서 마음만 혼자 괴로왔다. 그러고 영숙이가 자기를 생각하는 것이나 자기가 영숙을 알아준 것이 너무 완선완미한 편이 있으므로 그것이 반동적으로 일어나는 질투와 또는 미운 마음이 속에서 용솟음을 쳐서 그것을 견딜수가 없었다.
 
521
춘우보다 창하가 더욱 면난한 점이 많고 또는 그대로 그 자리에 앉아 있기가 어려워서,
 
522
『자, 나는 그대로 집으로 가겠네』
 
523
하며, 일어서려 한즉, 춘우도 갑갑한 생각에 그대로 있기가 거북하여,
 
524
『그러면, 나하고 같이 나가 보세. 갑갑도 하고 그러니』
 
525
하며, 모자를 떼어 쓰려 한즉, 영숙이가 난처한 눈으로 춘우를 보며,
 
526
『지금 또 나가시기는 어디를 나가셔요. 고단하신데, 그대로 주무시지』
 
527
하며 만류하기를 시작한다.
 
528
『아니, 잠깐만 다녀와야 하겠소.』
 
529
예전의 영숙의 명령을 듣기 잘하는 춘우도 오늘에 와서는 어디까지 반항 하기를 시작한다.
 
530
춘우도 다른 말이 없이 그 자리에서 일어나서 창하와 함께 문 밖으로 나왔다.
【원문】(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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