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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머니 ◈
◇ (5) ◇
카탈로그   목차 (총 : 20권)     이전 5권 다음
미상
나도향
1
어머니 (5)
 
 
2
춘우는 영숙의 집에서 온 지 닷새만에 편지 한 장을 받았다. 그것은 영숙에게서 온 것이었다. 춘우가 이 편지를 받았을 때, 그의 가슴과 손은 돈을 훔치려는 사람처럼 떨리었다. 피봉을 이리 보고 저리 보다가, 그는 다시 책상 위에 놓고, 고개를 기울이고 생각하였다.
 
3
「저 속에 무슨 말을 썼을까?」
 
4
그러다가는 다시 들어 봉한 곳을 뜯고서, 속의 편지를 펴들을 때 그의 가슴은 이상하게 두근거려지었다. 그의 두 눈에서는 경이(驚異)의 광채가 나서, 그 광채가 편지 글씨를 점과 선마다 그대로 뚫을 것 같았다.
 
5
 
6
춘우 씨에게 두어 마디로 아룁니다. 옛날의 영숙이가 아닌 저로서, 춘 우씨를 만나 뵈는 것이 얼마나 부끄러운 일인지 알 수 없읍니다. 춘우 씨는 모든 것을 용서하여 주실 터이지요. 저는 그렇게 믿습니다. 그런데, 오는 일요일 하오 두 시에 청량리로 와 주셔요. 제가 춘우 씨에게 꼭 한 마디 말씀을 할 것이 있으니까요. 긴 말씀은 하지 못합니다. 용서해 주십시오.
 
7
칠월 이십오일 영숙 올림
 
8
 
9
춘우는 이 편지를 들고 한참이나 눈앞에 있는 시계가 돌아가는 것을 들여다 보고만 있었다. 새발향〔丁香[정향]〕의 그윽한 냄새가 도는 영숙의 편지를 한 손에 움켜쥐고서 눈하나 꼼작거리지 않고 앉았을 때 그의 가슴은 공연히 괴로왔다. 그는 혼잣말로,
 
10
「사랑이냐?」
 
11
하다가, 다시 혼자 냉소하듯 웃음을 나타내고, 편지를 들여다보며,
 
12
「아니지!」
 
13
하여 보았으나, 그는
 
14
「아니지!」
 
15
하는 말이 채 떨어지기 전에 그의 가슴은 알 수 없는 비애로 찼었다. 그는 편지를 다시 읽으면서,
 
16
「나를 사랑한다 하면, 내가 어떻게 할 터이냐!」
 
17
혼자 생각을 하다가, 그 대답으로,
 
18
「사랑은 아니겠지!」
 
19
할 때, 그는 편지를 내던지고, 팔 위에 고개를 베고서 아무 말 없이 자는 사람처럼 있었다.
 
20
「사랑이냐? 아니냐?」
 
21
자기 가슴속에서 타는 사랑이 영숙에게도 있을 리는 없을 줄 알았던 춘우가 영숙의 편지를 받아들고 생각할 때 헤매지 않을 수가 없었다.
 
22
「어째 영숙은 나에게 이런 편지를 하였을고? 얼마나 대담한 일이냐! 만일 자기가 참으로 나를 만나고 싶고, 한때라도 이야기를 하고 싶어서, 이 편지를 하였다 하면, 나는 이 편지를 도루 보내지 않아서는 안 될 것이다. 영숙은 남편 있는 사람이다. 만일 영숙이가 나로 말미암아 죄를 짓는다 하면, 그 죄는 내가 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나는 내가 죄를 지으면 지을지라도 남에게 죄를 짓게 하고 싶지는 않다.」
 
23
그는 편지를 뜯은 채로 다시 피봉에다 넣었다. 그래 가지고 겉봉을 쓴 후 책상 머리에 놓고, 자리 위에 누웠다. 그러다가는 다시 고개를 내저으면서,
 
24
「만일 사랑이 아니고 다른 일이라 하면?」
 
25
뒤집어 생각을 하여 보고서,
 
26
「나는 영숙의 옛날 동무가 아니냐? 나의 가슴속에서 영숙을 사랑하는 마음이 있으므로 영숙이가 나를 생각하는 줄로 오해를 하는 것이지.」
 
27
춘우는 서랍을 열고 편지를 집어 넣었다.
 
28
일요일이 되어 춘우는 청량리 정거장에서 내렸다. 청량리 어디란 말도 모르고, 막연한 목표를 향하여 춘우는 걸어간다. 바람에 휘둘려서 춤추는 녹음은 땀 나는 얼굴에 시원한 바람을 실어 오고, 진하고 엷고 누르고 푸른 풀들은 멀리 산 밑 언덕을 옷 입혔다. 서늘하게 우는 매미는 높은 가지에서 첫 가을을 노래하고, 두 날개를 벌린 잠자리는 물결 위에 뜬 배 모양으로 높았다 낮았다 한다.
 
29
춘우는 웃옷을 벗어 들고, 수건으로 땀을 씻었다. 푸른 비단을 땅 위에 깔고, 그 위에 하얀 줄을 아무렇게나 쭉 그은 듯한 길 위에는 풀 냄새와 섞이어 한적한 공기 위에 떠돌고, 맨발을 벗고 다리를 걷어올린 어린아이는 손에다 거미줄 친 잠자리채를 들고서 나무 밑으로 살금살금 기어든다.
 
30
춘우는 청량리로 발을 들여놓고, 비로소 막연함을 깨달았다. 넓은 청량리에 어디서 만나자는 말인가?
 
31
춘우는 절로 들어섰다. 이 초막 저 초막 길 위로 올라섰다. 다시 길 아래로 내려섰다. 이 집에도 고개를 기웃 저 집에 가서도 발을 머뭇, 그러나, 영숙은 보지를 못하였다. 여자의 신이 놓인 곳을 살펴보고, 파라솔이 있는 곳에서 물었으나, 모두 아니었다.
 
32
그는 다시 소나무 틈을 이리 꿰뚫고 저리 꿰뚫어 모래가 미끄러지는 산등 에 올라서 아래로 내리 살피었다. 먼 곳에서는 전차 가는 소리가 가늘게 바람을 따라 들려올 뿐이요, 나무 사이에는 돌아가는 사람의 옷자락이 보이었다 사라졌다 할 뿐이었다. 춘우는 모래 위에 앉아서 멀리 서울 쪽을 바라보고 앉아 있었다.
 
33
사면이 적막함을 따라 그의 마음은 잿물 속에 들어간 빨래처럼 씻어지는 듯하고, 혼탁하던 머리가 무엇으로 걸러 놓은 것처럼 밝아지는 듯하여 올 때, 그는 혈관 속으로 무슨 새 생명이 스미어드는 듯하여 두 팔을 들었다놓았다 가슴을 벌리었다 좁히었다 하였다.
 
34
삼십 분이 지나갔다. 쉬임 없는 시간은 사십 분 오십 분 한 시간이 넘었다.
 
35
춘우는 산 위로 올라갔다 우물가로 내려갔다 하였다. 그러고는, 속으로 홀로 어디 가 들어앉아 기다릴까 하였다. 그러다가는 다시 의혹이 생기기 시작 하였다.
 
36
「웬일일까?」
 
37
하고 그는 한번 생각하고, 주머니에서 편지를 또다시 꺼내어 들고 자세 자세 살펴본 후,
 
38
「나를 공연히 속이지는 않았으렷다」
 
39
하다가는, 다시,
 
40
「그렇지만, 어째서 여기서 만나자고 하였을까?」
 
41
안개 같은 감정이 그의 가슴에서 이리 서리고 저리 엉클어진다.
 
42
「나를 만나서 무엇 하려는가?」
 
43
춘우는 다리로 기어드는 개미를 골난 사람 모양으로 탁탁 털더니, 다시 걷기를 시작하였다. 그는 집으로 들어가기는 싫었다. 알 수 없는 의혹 속에서 한 밤중 먼 촌에서 반짝거리는 불빛 같은 희망이 그의 가슴속에서 탔다 사라졌다 할 때, 그는 정처없이 돌아다니고 싶었다. 그러다가는 어디 서든 지영 숙을 만나 보고 싶었다.
 
44
그는 옛적 홍릉 쪽을 향하여 갔다. 구부러진 길가에는 원추리〔宜男草[의남초] 〕가 고개를 쳐들고 노란 웃음을 띠고 있고, 철 잃은 할미꽃은 고개를 숙이고 말없이 있는데, 창부의 입술 같은 꽃잎 속에는 노란 이가 보이었다. 범나비가 오른쪽 숲 속에서 너울너울 춤을 추며 나오더니, 춘우의 허리 옆을 스치고, 다시 왼쪽 숲 속으로 들어가 버리었다.
 
45
춘우는 목이 몹시 마름을 깨닫고 약물터로 향하는 좁은 길로 들어섰다. 길을 넘는 옆에 나뭇가지들이 뺨을 때리고 얼굴을 긁어 잡아당긴다. 그러고는 피다가 스러지는 이름 모를 꽃들이 춘우의 발밑에 무참히 을크러지고, 발등 에선 푸른메뚜기 소장메뚜기가 재주를 부린다. 춘우는 저도 모르게 돌아다닌다. 물가에 가서 손으로 물을 마시고 세수를 한 후, 그 자리에 앉아서 담배를 피웠다. 물 먹으러 온 사람 두엇이 아무 말 없이 물만 먹고, 둔덕 위로 올라가 버리었다.
 
46
춘우는 마음을 놓고 물 묻은 수건으로 얼굴을 씻을 때 누구인지 자기 뒤에서 있는 것을 알았다. 그러더니, 가는 기침 소리가 들리며, 자기가 미처 고개를 돌리기 전에,
 
47
『춘우 씨』
 
48
하는 목소리는 꿈에 듣는 듯한 영숙의 소리였다. 춘우는 반가왔다. 그러다가 원망스러웠다.
 
49
벌떡 일어난 춘우는 고개를 숙여 인사를 할 때 영숙은 어깨에 걸었던 파라솔을 접으며,
 
50
『퍽 오래 기다리셨지요』
 
51
할 때 춘우의 눈에는 조금도 서두르고 주저하고 부끄러워하는 점이 없었다.
 
52
그와 반대로 춘우의 가슴은 공연히 물결치고 가늘게 떨렸다.
 
53
『아뇨, 별로이.』
 
54
그의 말은, 기다리고도 아니라 하지 않을 수 없었다.
 
55
『그런데, 어디로 오셨기에 이리 오셨어요?』
 
56
두 사람이 말하는 가운데에는 알 수 없는 근질근질함이 있었다. 춘우는 그 근질근질함을 없애고 싶어서, 그곳을 떠나려 하여 모자를 쓰며,
 
57
『더워서 물 좀 먹으러 왔어요』
 
58
하고 저리로 가려 하니까 영숙은,
 
59
『그러면, 저도 물 좀 먹구요』
 
60
하며 파라솔을 땅 위에 떨어뜨리고 우물로 가까이 갔다.
 
61
『바가지가 없읍니다.』
 
62
춘우는 제 집 우물이 아니었건만, 말할 수 없이 미안하였다. 영숙은,
 
63
『없으면 어때요. 손으로 먹지요』
 
64
하며, 매끈하고도 하얀 두 팔을 걷고서 두 손을 맞대어 물 속에 넣더니, 손가락을 굽히어 표자를 만들었다. 그러고, 물을 퍼서 먹을 때 춘우의 눈에는 상아로 만든 표자박으로 무슨 경장(瓊醬)을 마시는 님프와 같이 보이었다.
 
65
영숙은 한숨을 쉬고 두 손을 수건에 씻더니, 붉은 입술을 적신 수정 같은 물방울을 씻었다.
 
66
물을 다 먹더니, 다시 양산을 들고서 언덕으로 올라섰다. 두 사람은 아무 말 없이 나란히 서서 걸어갈 제, 영숙은 가끔가끔 입속으로 노래를 웅얼 거리는 것이 아주 마음 편한 사람 같았다. 춘우는 그와 반대로, 가슴속이 무엇을 기다리는 사람처럼 거북하였다. 춘우는 영숙의 입에서 무슨 말이 나오기를 기다리고 또 이 자리까지 자기를 부른 뜻을 알고 싶었다.
 
67
얼마 있다가 영숙은 아카시아 그늘 속을 지날 때 비로소 처음으로 춘우를 보고 무슨 말을 할 듯이 서 있었다. 영숙의 입술은 잠깐 떨리더니, 말이 새 어나 오는 데,
 
68
『춘우 씨가 저의 말을 꼭 한 마디 들어 주시겠어요?』
 
69
하고 사면을 살피더니, 저쪽에 누가 있는 듯하니까, 다시 양산만 빙글빙글 돌리면서 걸어간다. 춘우는 그 뒤를 따라가면서,
 
70
『무슨 말씀얘요?』
 
71
영숙은 대답이 없었다. 춘우는 자기 말에 대답이 없으므로 무색함을 이기지 못하여 얼굴이 은근히 더워지는데 영숙은 옆에서 푸르륵 나는 방아깨비를 쳐다보며,
 
72
『에그, 저것 보게 하늘로 자꾸 올라갑니다그려. 저것이 무엇이야요?』
 
73
춘우도 그것을 바라보며 힘없는 소리로,
 
74
『방아깨비 아닙니까?』
 
75
영숙은 또 말이 없었다. 갑자기 침울한 얼굴로 땅을 내려다보면서, 열 댓 걸음 걸어가더니 무엇을 결심한 사람처럼 쓱 돌아서며,
 
76
『우리 저쪽 큰길로 가시지요』
 
77
하며 손가락으로 큰길을 가리킨다. 춘우는 다만 아무 말이 없이 돌아서서, 영숙의 가는 곳은 어디든지 따라가겠다는 듯이, 큰길 쪽을 바라보고 서 있다.
 
78
오던 길을 다시 가던 영숙은 팔뚝에 감긴 시계를 보더니,
 
79
『벌써 네 시가 넘었네』
 
80
하고 깜짝 놀랐다. 그리고는 걸음을 재빨리 걸으면서,
 
81
『여기서 전차 정류장까지 몇 분이나 걸릴까요.』
 
82
춘우는 영숙이 황망하는 것을 보고서,
 
83
『왜 무슨 약조하신 것이 있읍니까?』
 
84
영숙은 약간 고개를 숙이더니,
 
85
『아뇨, 별로이 약조한 것은 없지만 너무 늦으면 집에서 기다리실 터이니깐 말씀얘요』
 
86
하며 양산 끝으로 땅을 판다. 춘우는 겨우 말을 가다듬어,
 
87
『그런데, 아까 제게 말씀하시겠다는 것은 무엇이십니까?』
 
88
『그것요?』
 
89
영숙은 영롱한 눈으로 춘우의 얼굴을 쳐다볼 때, 그의 눈에는 애원하는 듯한 빛이 있었다.
 
90
『춘우 씨는 저의 십 년 전 친구지요? 저를 아무 허물 없는 누이처럼 생각 해 주시지요?』
 
91
『그런 말씀은 다시 하실 것이 없지요. 저는 영숙 씨에게 다시 없는 친구며 오라비가 되기를 원하니까요.』
 
92
『그러면, 춘우 씨는 저의 지금 형편을 동정하시겠지요?』
 
93
춘우의 입에서는 나올 말이 없었다. 무엇이라고 대답하기가 싫었다. 영숙은 말을 계속 하여,
 
94
『저는 참으로 믿을 사람이 하나도 없어요. 저의 일생은 쓸쓸한 곳에 그칠 곳 같아요. 저는 춘우 씨에게 그것을 동정하여 주시기를 바란다 하고 싶어요』
 
95
하더니, 두 눈에 비애의 그림자가 끼이며, 한참이나 기운 없이 있다가, 잠꼬대 같은 소리로,
 
96
『그러나 그러나,』
 
97
하고 고개를 흔들면서,
 
98
『저 같은 여자가 춘우 씨의 동정을 구하는 것도 과분한 일이겠죠.』
 
99
춘우는 고개를 들고 힘있는 어조로,
 
100
『동정해 드립니다. 저의 모든 정열(情熱)과 정성을 다하여 동정해 드립니다. 나는 영숙 씨의 비애를 알고, 번민을 압니다. 영숙 씨! 우리는 옛날 어렸을 적으로 다시 돌아갈 수가 있을 것입니다. 영숙 씨가 만일 우리집 뒷동산에서 하시던 말씀을 잊어버리시지만 않으셨으면, 우리는 귀여운 옛날의 순결하고 때 묻지 않은 우의를 다시 이을수 있을 것이지요. 우리는 옛날로 돌아가시지요.』
 
101
영숙도 흥분되 말로,
 
102
『압니다. 어렸을 적에도 저의 친구는 춘우 씨 하나밖에 없었고, 오늘에도 춘우 씨 한 분 밖에 없읍니다. 춘우 씨는 저를…』
 
103
하고 아무 말이 없다.
 
104
『그러면, 오늘부터 반가운 동무가 되었읍니다. 두 사람의 가슴속에 있는 무엇이든지 서로 말하는 친구가 되었지요?』
 
105
춘우의 가슴속에서는 알 수 없는 정열의 물결이 치고 영숙은 자기 몸을 누구의 팔에 맡긴 듯하였다. 두 사람의 얼굴에는 은반(銀盤)에 비친 불볕같이 번득 거리는 희망이 비치어 있었다.
 
106
두 사람은 송림 사이로 들어섰다가, 다시 모래톱으로 내려섰다가, 물가로 거닐다가, 다리를 건너고 잔디 위에 앉기도 하였다.
 
107
영숙은 다시 춘우를 이끌고 절로 들어가, 밥을 사 먹고 나니까 날이 저물었다.
 
108
여드렛날이 바다와 같은 하늘 위에 떠 비뚜름히 두 사람을 내려다볼 때, 이슬 묻은 축축한 바람이 영숙의 치맛자락을 살짝 날리게 한다. 우뚝 선 장송은 머리 위에서 흔들흔들하는데, 물 사이 나무 틈에서는 이름 모를 벌레들이 제 가끔 자연 노래하고 있다. 암흑에 싸인 숲들은 새파란 하늘빛과 흐르는 달빛 속에 점점 그 빛이 진해간다. 먼 하늘에는 감았던 눈을 뜬 것처럼, 하나씩 둘씩 금강석 같은 별이 반짝인다. 끼었던 안개는 사면으로 흩어지어 한 폭의 장막을 휘두르는 듯이 좌우 산허리에 감겨 있고, 땅 위에는 달에 비친 두 사람의 그림자가 넓지 못한 산길을 가로질렀다.
 
109
두 사람이 길을 걷는 대로, 영숙의 부드러운 살을 가린 한 겹 모시 적삼 이춘 우의 양복 입은 살 위에 닿다가 떨어지었다 할 때마다 두 사람의 혈관 속에 가득 찬 정열은 식었다 더웠다 하는 듯하였다. 춘우의 코에는 영숙의 머릿 기름 냄새와 얼굴에 바른 분 냄새가 이슬 묻은 공기와 함께 콧속으로 스미어 들 때 무슨 마취제(痲醉劑)를 마시듯이 흥분됨을 깨달았다. 자박자박 마른 신 신은 발이 모래 위로 걸어가는 소리까지 춘우의 가슴속에 행복의 노래를 부르는 노래의 박자를 맞추는 듯하였다. 춘우는 흥분이 변하여 대담하여졌다. 그는 끝이 떨리는 손을 들어 영숙의 손을 잡았다. 영숙은 균일하게 걷던 발을 딱 멈추더니, 춘우의 얼굴을 쳐다볼 때, 그의 두 눈은 불과같이 번득거리었다. 그리고는, 잡은 손을 송충이나 떨어 버리는 것처럼 홱 뿌리치며,
 
110
『이게 무슨 짓이셔요.』
 
111
목소리는 날카롭게 떨리었다. 춘추는 자기 얼굴이 불같이 타는 것을 깨닫고, 꿈 속에 선 사람처럼 말없이 섰었다. 영숙은 고개를 숙이고,
 
112
『춘우 씨는 저의 친구얘요. 오라버니얘요. 저의 손목을 잡으실 수는 없는 몸얘요』
 
113
하고 돌아섰다. 춘우는 두어 발자국 물러서며,
 
114
『잘못 했읍니다. 친구의 잘못을 용서하여 주십시요. 영숙 씨는 모든 것을 용서 하지요?』
 
115
『용서가 무엇입니까? 그러나, 다시는 그런 일은 하지 말아 주세요. 저는 남편이 있는 사람얘요.』
 
116
『알았읍니다.』
 
117
춘우는 갑갑해 못 견디는 표정으로 머리를 쥐어뜯고 싶은 듯한 팔짓을 하며,
 
118
『알았어요. 세월은 못 속입니다. 다시 어떻게 할 수가 없읍니다. 나는 우리가 옛날로 돌아갈 수가 있을 줄 알았더니, 그것은 할 수 없는 것인 것을 이제야 알았읍니다. 절대로 못 돌아갑니다. 우리가 옛날로 돌아가자 하는것은 죽었던 사람을 다시 살리는 것과 똑같은 일입니다. 우리는 다만 꿈 속이나 생각으로는 옛날로 돌아갈 수가 있을지라도, 분명하고 똑똑한 현실로는 옛날로 돌아갈 수가 없읍니다…』
 
119
영숙은 다만 아무 말 없이 서 있다.
 
120
춘우는 성이 나서 돌아선 영숙의 뒤로 달려들 듯이 허리를 구부리고 서서, 모든 것을 자백하는 듯이 뜨겁고 힘있는 목소리로,
 
121
『영숙 씨! 저는 당신에게 참으로 무례한 사람입니다. 저는 저의 마음으로 벌써 당신에게 죄를 짓고 있었읍니다. 저는 당신을 사랑합니다.』
 
122
영숙의 고개는 갑자기 돌려지며 놀라는 사람처럼 춘우를 보고, 다시 느럭느럭 발길을 놓았다. 춘우는 뒤를 따라갔다. 그러면서 다시 말을 계속 하였다.
 
123
『저는 당신을 사랑하기만 하겠읍니다. 저는 당신에게서 무엇을 받으려 하지는 않습니다.』
 
124
영숙은 달아날 듯이 걸음을 속히 하며,
 
125
『그런 말씀은 듣기를 원치 않습니다. 만일 그런 말씀을 하시려거든, 저를 따라오지 마셔요. 저는 그런 말을 듣기 싫어하는 사람얘요. 그러고, 만일 그 말씀이 참말이시거든 춘우 씨는 마땅히 단념하셔야 할 것입니다. 단념하십 쇼. 그러고, 이제부터는 우리 집에 오시는 것과 저와 만나시는 것을 고만 두어 주셔요. 당신을 나쁘게 인정하고 이런 말씀을 하는 것이 아니라, 당신을 위해서 하는 말씀 입니다』
 
126
하더니,
 
127
『자, 아무 염려 마시고 댁으로 돌아가십시오. 저는 혼자 갈 터이니』
 
128
하고 혼자 걸어간다. 춘우는 황망한 듯이,
 
129
『아니, 전차 정류장까지 바래다 드리지요』
 
130
하며 따라가니까,
 
131
『아녜요. 아무 염려 마셔요. 저 혼자 가도 아무 무서울 것이 없어요.』
 
132
『그렇지만, 호젓한데.』
 
133
『호젓하지 않아요. 저는 저의 믿음이 있읍니다. 어디던지 갑니다』
 
134
하더니, 성낸 얼굴에도 탄식하는 한숨을 쉬며,
 
135
『이렇게 뜻밖에 만났다 또 뜻밖에 그런 말씀 때문에, 쉽게 떨어지지 않을 수 없는 것을 생각하매, 참으로 섭섭합니다. 섭섭은 하지만 하는 수 없는 일 이지요.』
 
136
춘우는 이 말을 듣더니,
 
137
『그러면, 우리는 다시 만날 수가 없을까요?』
 
138
『그렇죠, 춘우 씨의 가슴속에서 그 마음이 사라지기 전에는 언제까지든지 만날 수가 없읍니다.』
 
139
『그러면, 영원히 못 만나게 될지라도…』
 
140
『영원히요?』
 
141
영숙의 말소리는 중단이 된다.
 
142
『그래요.』
 
143
또다시 한참 있다가,
 
144
『그것이 영원토록 당신의 가슴에서 사라지지 않으신다면 영원토록 이겠지요. 그러나, 내일이라도 그 마음이 사라지신다 하면, 내일이라도 만나 뵐수가 있는 것이니까요.』
 
145
춘우의 가슴은 거북하였다. 영숙을 사랑하면 영원히 못 만나고, 사랑 하지 않으면 만날 수 있다. 아아, 세상은 모순이었다.
 
146
영숙은 따라오는 춘우를 괴로운 듯이 돌아다 보며,
 
147
『자, 나를 위해서 이 자리에서 가 주십시요. 먼저 가셔요. 그리고 영원토록 만나 뵙지 않게 해 주셔요.』
 
148
춘우는 한참이나 장승처럼 서 있다가,
 
149
『가지요. 그러고 영원토록 만나 뵙지 않지요. 그러면 안녕히 계셔요』
 
150
하고, 두 팔을 양복 주머니에 찌르고서, 힘없는 걸음을 내어놓을 때, 한참이나 있던 영숙은 춘우를 다시 부르며,
 
151
『춘우 씨!』
 
152
하고 그 자리에 섰다. 춘우도 고개를 돌리었다. 영숙은 춘우의 대답이 있기를 기다리었다. 그러나, 춘우는 참으로 영숙의 목소리로 자기를 불렀는지 의심이 나는 것처럼 다시 영숙이 부르기를 기다리었다. 그러나, 아무 말이 없 음을 듣고, 다시 돌아서 가려 하였다. 영숙은 돌아가는 춘우를 보더니,
 
153
『춘우 씨, 춘우 씨.』
 
154
부르면서 두어 발자국 나서더니,
 
155
『춘우 씨!』
 
156
하고 다시 부를 때 그의 목소리는 애원하는 소리였다. 춘우는 돌아선 채, 영숙이 오는 것을 바라보고만 있었다.
 
157
『춘우 씨, 내일 다시 만나게 하여 주셔요. 춘우 씨가 나를 사랑하시는 마음을 다 내버리시더라도, 내일 다시 뵙게만 하여 주셔요. 다시 만나 뵈어야 하겠어요.』
 
158
춘우는 굳세고 엄한 목소리로,
 
159
『저는 그렇게 가볍고 약한 사람이 아닙니다. 저는 당신을 다시 만나뵈 올 수가 없어요. 한 번 만나 뵈옵고 두 번 만나 뵈옵는 그 짧은 시간을 위 하여 저의 가슴속에서 타오르는 영원한 생명인 사랑을 내버릴 수는 없읍니다. 내가 가죠. 그리고 영원히 당신을 뵈옵지 않죠. 사랑은 고통에서 고통에 끝나는 것입니다. 안녕히 계십시요.』
 
160
발길을 돌리어 저쪽으로 걸어갈 제, 영숙은 그 뒤를 따라가며,
 
161
『참말 영원히 가시렵니까? 영원히 만나 뵙지 못할까요.』
 
162
춘우는 하늘만 쳐다보며, 아무 말이 없이 섰다가, 어눌한 목소리로,
 
163
『내가 가죠. 나 하나만 가면 모든 것은 해결될 것입니다. 나 하나만 괴로우면, 나 하나만 아픈 가슴을 쥐고서 쓸쓸한 가운데서 지내면 모두 다 행복스러울 수가 있읍니다.』
 
164
뒤쪽 수풀 속에서는 푸른빛 나는 반딧불이 요리 지나고 조리 흐른다. 때때로 흔들리는 나뭇잎에서는 달빛에 번득거리는 이슬이 풀 위에 떨어지어 구른다. 사면은 죽은 듯이 고요하다. 다만 두 사람을 보는 것은 씻은 듯한 하늘에 은반 같은 달뿐이었다. 영숙은 춘우의 가슴을 붙잡았다. 그리고, 고개를 그 위에 실었다. 춘우는 나무때기 모양으로 꿋꿋이 서 있을 때, 영숙은 눈물 섞인 목소리로,
 
165
『이 세상 모든 것이 다 거짓말일지라도, 춘우 씨의 말 하나만 참말이 되게 하여 주셔요. 지금에 이 자리가 꿈도 아니고 환영도 아닌, 참말이 되게 하여 주셔요. 그러고 알 수 없는 괴로운 경우에서 저를 끌어내어 주셔요. 네! 춘우 씨! 저는 당신을 사랑 합니다』
 
166
하는 영숙은 몸을 탁 춘우의 가슴에 실었다. 춘우는 두 팔로 자기에게 실리는 영숙을 끼어안으며,
 
167
『고맙습니다. 그렇게까지 말씀하는 것은 고맙습니다. 그러나, 영숙 씨가 날 사랑하여서는 안 됩니다. 영숙 씨는 다른 이를 사랑해 주어야 할 사람이 있읍니다』
 
168
하고, 고개를 숙여 자기 팔에 안긴 영숙의 얼굴을 내려다볼 때, 옥같이 흰 얼굴에는 달빛이 비치어 한층 창백해 보이는데, 그린 듯한 눈썹만 분명하게 까맣다 그러고, 섬세한 머리털이 이마 위에서 흩날리고, 다문 입술이 말 할수 없이 예뻤다. 영숙의 허리를 두른 자기 팔이 영숙의 가슴 밑을 지날 때, 힘 있게 뛰는 심장이 춘우의 팔을 지나가는 혈관과 부딪치어 그 고동을 자기 심장에 전하고, 그 여파가 다시 전신에 퍼진다. 춘우는 술 취했을 적과 같이 태탕한 기운이 얼굴에 올라왔다.
 
169
영숙은 고개를 내저으며,
 
170
『아녜요. 아녜요, 없어요. 참으로 없어요. 한 사람도 없어요. 저는 여태까지 참으로 남의 사랑을 받아 보지 못하였고, 주어 보지도 못했어요. 춘 우씨! 그렇지만, 저는 춘우 씨를 사랑하지 못할 사람예요? 춘우 씨의 사랑을 받을 자격이 없는 사람얘요.』
 
171
『그런 말이 아니지요. 나는 결코 당신의 사랑이 완전한 열매를 맺지 못 할것을 압니다. 영숙 씨는 영숙 씨의 주인이 있습니다.』
 
172
『없어요. 나의 몸은 주인이 있어도 나의 영(靈)은 주인이 없어요. 저는 이제 그 영의 주인을 얻었어요.』
 
173
『영의 주인을 얻었다구요?』
 
174
춘우는 팔에다 힘을 주며,
 
175
『그 주인이 참으로 주인노릇을 할 수가 있을는지 의문입니다.』
 
176
『아녜요. 저는 그 주인을 위하여 모든 것을 바쳤읍니다. 무슨 짓이든 하겠읍니다.』
 
177
춘우는 꿈꾸다 일어난 사람처럼 영숙을 보더니,
 
178
『천천히 가시면서 말씀 하시지요』
 
179
하고 팔에 실린 영숙을 이끌어 가지고 걸어간다.
 
180
『모두 다 알았읍니다. 꿈같이 받은 은혜가 또한 꿈같이 사라질는지는 알수 없으나, 그 꿈 같은 은혜를 받지 않는 것도 무정한 사람이겠죠.』
 
181
『저를 의심하지 마셔요. 꿈이 아닙니다. 참말입니다. 저는 새로운 세상에서 참으로 사람다운 생활이 하고 싶어요. 저는 아직까지 사랍답게 살지를 못해요. 저는 물건이나 장난감예요.』
【원문】(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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