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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머니 ◈
◇ (1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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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상
나도향
1
어머니 (14)
 
 
2
일 주일이 지나서 창하는 철수를 길거리에서 만나 철수에게 끌려 어떤 서양 요리 집으로 점심을 먹으러 들어갔다.
 
3
철수는 창하를 속으로 몹시 원망하는 고로, 만일 자기의 친척 관계가 되지 않으면 당장에 절교라도 하고 무슨 일이 났었을 것이나, 본래 일가의 친척이 많지 않은 그는 그리 쉽게 그를 떼 버릴 수도 없을 뿐 아니라, 친척이라 함보다도 다정한 친구 이상으로 할 말 못할 말 통사정을 하고 지내던 터이요, 또한 영숙을 창하가 춘우에게 꾀어 보낸 것이 아니요, 다만 친구의 편의를 보아 주었을 따름이므로, 철수 역시 일개 여자로 하여 친척간에 서로 반 목을 하는 것은 사내스럽지 못한 일이라 해서 모든 것을 너그럽게 생각하고 있는 터이다.
 
4
『여보게, 자네가 여태까지 영숙을 생각한다는 것은 자네의 잘못으로 아 네. 나는 자네나 영숙이나, 또는 춘우 세 사람중 누구 한 사람을 더 사랑하고 덜 사랑하지는 않네. 그러나, 사람의 일이라는 것은 본래 그렇게 단순한것이 아니요, 또는 맘대로 되는 것이 아니니까. 자네가 지금 무슨 짓을 하 여서든지 영숙을 도로 찾아오겠다고 하지만, 이왕 간 영숙을 자네가 찾아오면 무엇 하나? 자네는 돈 가진 사람이요, 그 두 사람은 물론 돈이 없어. 그러나 그 돈으로 자네가 영숙의 마음을 살 수가 있을 줄 아나? 하필 영숙의 마음뿐 아니라, 아마 자네가 이 세상 사람의 누구의 마음이든지 돈으로는 살 수가 없을 줄 아네. 설령 자네가 돈으로 영숙을 다시 끌어온다고 하세.
 
5
그때에 자네는 영숙이란 사람의 몸뚱아리를 사온 것이지, 영숙의 마음까지 사오지는 못할 것이니, 그 점을 생각해야지. 영숙이의 몸뚱아리를 살 마음이 있으면, 이 세상에는 영숙이 몸보다도 더 젊고 더 예쁜 몸뚱아리가 얼마 든지 있을 것이 아닌가?』
 
6
하고, 음식의 거의 끝나갈 때, 창하는 철수에게 충고 비슷하게 말을 하였다.
 
7
『아니지요. 그것은 너무 이상(理想)으로만 달아나시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태고적 사람으로 있었다 하면 기운 많은 사람이 그 기운으로 능히 자기의 사랑하는 사람을 얻을 수가 있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오늘에는 돈을 가지면 능히 사람의 마음까지 살 수 있는 것을 알았읍니다. 더구나 여자는 그의 손가락에 끼이는 금강석 반지 하나만 사 주면 그들의 마음을 완전히 살수가 있는 것예요. 말씀하신 것과 같이, 돈이든지 명예든지 아무것도 다 싫고 다만 사랑을 위하여 살겠다는 여자가 이 세상에는 한 사람도 없다고 생각을 합니다. 영숙이도 지금은 자기가 멋모르고 일종의 호기심으로 저 와같이 지내겠지요마는, 내 생각 같아서는 단 일 년이 못 되어 내게로 다시 돌아올 것을 단언이라도 하라면 하겠읍니다.』
 
8
『글쎄, 그것야 자네가 날더러 언제든지 하는 말이지만』
 
9
하고, 창하는 접시의 고기를 입에다 넣으면서,
 
10
『그것이 자네가 언제든지 잘못하는 말이야. 일 년이 못 되어 설령 자네에게 돌아온다고 하여 보세. 그 사람의 마음까지 오는 것은 아니거든. 아까도 말한 바와 마찬가지로, 몸만 오면 무슨 일이 있나, 마음이 와야지. 그러니까, 이 뒷일은 어떻게 될는지 나로서 단언은 못 하겠네마는, 자네는 모든 것을 단념하는 것이 좋을 듯하이. 나로서 이러한 권고를 하는 것은 말 하는나도 미안한 일이요, 듣는 자네도 괴로운 일이지만 만일 자네가 기어코 영숙을 찾아온다 하면, 그 결과로 남는 것이 무엇이겠나? 춘우나 영숙이나 자네 세 사람은 모두 불행해질 것이 아닌가. 생각을 해 보게. 자네 생각 같아서는, 분한 마음에 원수라도 갚고 싶겠지만, 그런 생각은 의리 있는 사람으로는 갖지 못할 것이니까.』
 
11
『아니죠. 누가 의리가 없을까요? 나는 어디까지 해볼 것입니다. 영숙을 내가 못 빼앗아온다 하면, 그때에는 내가 나의 재산을 있는 대로 다 없애서라도 춘우와 싸워 볼 것입니다. 지금에 나는 세상에서 조소를 받고, 집안에서 못난이 소리를 듣고, 모든 부끄러움——남자로서 당하지 못할 모든 모욕을 당하고 있읍니다. 나는 이 모욕을 씻어 버리려고 그동안 두서너 달 두고 모든 것을 준비하였읍니다. 자, 이제는 때가 되었다고 생각을 해요.』
 
12
『허허, 그렇게 격분해 할 것이 아닌데 그러네그려. 때가 무슨 땐가. 제삼자 로서 냉정한 생각을 가지고 자네를 보는 나로서는 도리어 자네의 서두르는 것이 일을 그르치기 쉬울 줄 아네. 그러나, 철수 자네는 한 가지 잊어서는 안 될 것이 있네.』
 
13
『무엇이요?』
 
14
『자네가 만일 영숙이와 자네 사이를 다시 이으려 하면 거기에는 돈도 아니요, 아무것도 아니요, 다만 자네의 딸 청아밖에 없을 것이야. 나 역시 춘우와 영숙이 지금 저렇게 지내기는 지내나, 얼마 아니 가서 적지 않은 비극이 있을 것을 알지마는, 다 되는 대로 내버려두고 보기만 하지 어찌 하나. 어떻든 자네네 세 사람은 한 사람도 행복스러운 사람이 없는 것을 나는 이제 단언할 수가 있네.』
 
15
이와 같은 이야기가 있던 그날 저녁 때이다. 춘우는 자기가 다니는 회사에서 나오는 길에 진고개를 들러서, 아침에 나올 때, 영숙에게 부탁을 받은 사기그릇 몇 개와 양철 남비 한 개를 사 가지고, 다시 양말과 속적삼을 산후에 과자 가게에 들러서 영숙이가 좋아하는 과자 몇 봉지를 사 가지고, 전차를 타고서 새로이 세를 얻은 선린상업학교 뒤 자기 집으로 향하여 갔다. 춘우는 지금처럼 자기가 행복을 느끼는 때가 없다고 하였다. 전차 안에 탄 사람이 전에는 모두 다 시들어져 가는 것처럼 생기가 없어 보이는 것 같더니, 오늘에는 모두 생기가 있어 보이고, 혼인 잔치에 치하하러 가는 사람들처럼 즐거움으로 찬듯하였다. 만일 세상에 불행한 사람이라고 자기 스스로 말하는 사람이 있다고 하면, 오늘날에는 춘우에게는 그것이 거짓말이라고 할 만치 춘우는 행복스러워졌다. 춘우의 마음은 어저께보다 오늘, 아까보다 지금이 다르게 그 마음이 가라앉아지기 시작한다. 공중에 뜬 것 같이, 이리 불리고 저리 흔들리던 춘우의 마음이 점점 안정이 되어갈수록, 그는 더욱 더욱 말할 수 없는 희열을 느끼게 되고, 또는 그의 마음이 점점 냉정(冷靜) 하여질 수록 그 가운데서 무한한 흥취를 찾아낼 수가 있었다. 그리하고 그의 머리 속에서 어수선 산란하게 돌아다니던 모든 죄악의 잡념이 구름 개이듯 사라지고, 청청한 하늘에 다만 해가 있고 달이 있는 것 같이, 자기와 영숙이라는 것밖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영숙과 자기는 한아(閑雅)하고 그의 피는 무슨 정혈제(淨血劑)로 씻어 버린 듯이 깨끗하여진 것 같고, 다시 향수로 목욕을 한 것같이, 자기는 남에게 가도 꺼릴 것이 없고 향내 나는 몸과 같다.
 
16
그에게는 질투라는 것이 없고 희망이라는 것이 없고, 속임이 없고 또는 간음이 없게 되었다.
 
17
그는 다만 청정무구한 새 세상으로 돌아온 듯하였을 뿐이다.
 
18
저녁을 하여 놓고 자기를 기다리는 영숙을 생각만 하여 보아도 천사와 같이 아름다왔다.
 
19
아침이면 자기를 전송하고, 낮이면 빨래라든지 바느질이라든지 뜰 앞 화원에 김매기라든지 양지쪽에서 병아리 모이 주기라든지, 이와 같이 한가하고 단아한 생활 가운데서 춘우와 영숙은 꿈 같은 생활을 계속하는 것이다.
 
20
춘우는 전차에서 내려 반찬 가게에서 쇠고기와 왜파와 다른 양념거리를 사서 들고 자기 집으로 향하여 갈 때, 자기의 팔이 조금 아프고, 또는 전 같으면 점잖은 사람이 창피해서 어떻게 무엇을 들고 다니노 하고 하였을 터이지만, 오늘에는 부끄러움도 잊어버려지고, 다만 영숙의 반갑게 맞아 주는 웃음이 그에게는 모든 용기를 주고 말았다.
 
21
그는 자기 집으로 들어갔다.
 
22
『영숙!』
 
23
하고 부르매, 부엌에서 숯불을 피우느라고 부채를 들고 눈물을 흘리던 영숙이 툭 튀어나오며,
 
24
『에구, 무엇을 그렇게 많이 사 가지고 오시우』
 
25
하고, 행주치마에 손을 씻고서 주섬주섬 받아 놓는다.
 
26
춘우는 받아 놓는 대로 가만히 서서,
 
27
『울기는 왜 울어. 그래 한나절을 못 참아 그렇게 보고 싶드람』
 
28
하고 조롱을 하매, 영숙은,
 
29
『울기는 누가 울어요. 불 피우느라고 내워서 그랬지』
 
30
하며, 눈물을 씻고 빙긋 웃는다.
 
31
『그렇다면 모르거니와… 자, 이것 좀 받으우』
 
32
하며, 주머니에서 과자를 꺼내 주니까, 영숙은 그것을 받아서 펴 보더니 제입에 하나 넣고 춘우 입에 하나 넣어 주었다. 춘우는,
 
33
『저만 알지 남편은 모르는군! 제 입에부터 집어넣으니.』
 
34
영숙은 무의식중에 한 일이라 잘못된 것을 깨닫고,
 
35
『그럼, 내 입에 넣은 것허고 당신의 입에 있는 것허고 바꿉시다그려.』
 
36
춘우는 옷을 벗어 영숙에게 맡기고,
 
37
『대관절 밥이 어떻게 되었소. 시장해 못 견디겠으니.』
 
38
『장작이 굵어서 땔 수가 있어야지. 쌀은 앉혀 놓고 여태까지 불을 지 피지 못 했어요.』
 
39
『그거 안되었구려. 내가 좀 패지』
 
40
하더니, 동리 집으로 가서 도끼를 빌어 가지고 오는데, 동리 떠꺼머리가 따라와서 춘우의 장작 패는 것을 신기한 듯이 들여다본다. 춘우는 도끼를 들고 장작을 팰 때, 도끼가 손에 붙지를 않고, 제 멋대로 여기가 놓이고 저기가 놓인다.
 
41
그는 두서너 번 도끼를 들었다 놓았다 하더니, 겨우 한 조각을 쪼갰는데, 장작이 젖어서 짖이겨 놓았다. 춘우는 그것을 손으로 쪼개느라고 얼굴에 핏대를 올려 가며, 잡아당기어 겨우 반으로 갈라 내던지다가,
 
42
『에쿠!』
 
43
소리를 지르고 엄지손가락을 입에다 대고 혹혹 부니까 부엌에 있던 영숙이 달 음질 해 뛰어나오다가, 화로에 놓았던 찌개를 발길로 질러서 재가 푸 하고 일어났다. 이 소리를 들은 춘우도 화로로 뛰어가서 찌개 그릇을 바로잡아놓으려다가 뜨거워서 마당 한가운데다 내던져 뚝배기가 산산조각이 났다.
 
44
영숙은 기가 막히고 우습기도 하여 한참이나 깨어진 뚝배기만 내려다보더니, 허리가 부러지게 웃고만 있으니까, 춘우는 가시 박힌 손이 또 찌개 그릇에 데어서 쓰라리고 아파서 못 견디겠는데, 영숙이가 자꾸 웃기만 하니까 열을 벌컥 내어,
 
45
『압다, 남은 아파 죽겠는데 웃기는 왜 웃어』
 
46
하며, 원망스럽게 흘겨본다.
 
47
영숙도 그제야 웃음을 그치더니,
 
48
『남이 애써 해 놓은 찌개를 한꺼번에 태질을 치고 무슨 큰소리요. 어디 손이나 좀 봅시다.』
 
49
『고만두. 내가 태질을 치려 해서 쳤소. 영숙이가 먼저 발로 친 것을 바루 잡으려다 그리하였지.』
 
50
『그것도 내가 치려 해서 쳤소. 당신이 손 다친 것 보러 나오다 치마에 휩싸여 그렇게 되었지』
 
51
이렇게 내외가 말다툼 시작하는 것을 보고 있던 총각 녀석이,
 
52
『고만들 두십쇼. 대관절 손이나 많이 다치지 않으셨어요. 제가 장작을 패드리지요.』
 
53
두 사람은 저녁상을 대하여 밥을 먹었다.
 
54
풍로에서는 고기가 익고 밥상 위에는 상긋한 나물이 놓였다. 전 같으면 한두어 잔 술을 마셨으면 좋을 춘우는 오늘 와서는 염두에 두지도 아니하였다.
 
55
『조금 승겁지 않소』
 
56
하고 젓가락으로 이리 뒤적 저리 뒤적 하니까, 숟가락을 입에서 떼는 영숙,
 
57
『간장을 좀더 칠까 요』
 
58
하며 장병을 집는다.
 
59
『우리 내일은 일요일이니, 전에 말한 대로 인천을 가볼까.』
 
60
춘우가 영숙에게 의향을 물으매, 영숙은 어째 시원하지 않은 어조로,
 
61
『글쎄요』
 
62
하고 무엇을 생각하는지 똥그란 눈을 아래로 깔고 끓는 고기만 내려다본다.
 
63
『왜 시원히 대답을 하지 않소.』
 
64
『아마 내일은 내가 어디를 좀 다녀와야 할까 보아요.』
 
65
이 소리를 듣고, 춘우는 젓가락을 딱 그치며,
 
66
『어디를 가?』
 
67
『꼭 가 봐야 할 데가 있는데, 당신이 허락을 하실지 몰라요』
 
68
하고 영숙은 춘우의 기색을 살핀다.
 
69
『갈 만한 곳이면 가지, 내 허락 여부가 어디 있단 말이요.』
 
70
『당신이 들으시면 당신이 좋아하지 않으실 곳예요.』
 
71
『내가 좋아하지 않을 곳?』
 
72
하고 고개를 기웃하고 생각을 하더니,
 
73
『내가 좋아하지 않을 곳이 어디 있나. 그럼 영숙이는 좋은 곳이요? 영숙이가 좋은 곳이면 어디든지 가 보는 것이 좋지 않소.』
 
74
영숙은 잠깐 주저 하다가,
 
75
『저도 가기를 즐겨하는 곳이 아녜요.』
 
76
『그럼?』
 
77
『다만 책임상 안 가 볼 수가 없어요.』
 
78
『대관절 어디란 말이요.』
 
79
영숙은 입을 다물고 한참이나 말이 없이 가만히 있었다.
 
80
『어서 진지나 잡수셔요. 이따 이야기하지요.』
 
81
『이따가 이야기할 것 지금 말 못할 것이 무엇 있단 말이요. 말하구려, 답답하우.』
 
82
『말해야 당신 마음이 아프실 것이니까요.』
 
83
『글쎄, 아프든지 아니든지 캄캄하구려.』
 
84
『공연히 그런 말을 했군.』
 
85
『말할 것은 해야지, 속에다가 혼자 넣어 두면 못 쓰지.』
 
86
영숙은,
 
87
『그런 게 아니라요』
 
88
하고, 벌떡 일어나 서랍을 열더니 편지 한 장을 꺼내어 춘우를 준다.
 
89
춘우는 편지 봉투를 보았다. 거기에는 서투르디 서투른 필적으로 영숙의 이름을 쓰고, 그 뒤에는 영숙의 어머니 이름이 씌어 있었다.
 
90
『어머니께서 편지하셨구려. 어머니께 가 보겠단 말이지. 그것이 그렇게 쓰리니 아프니 할 것이 무엇 있소?』
 
91
『아녜요. 속을 보셔요.』
 
92
춘우는 다시 속을 끄집어내어 본즉, 그 사연에는
 
93
 
94
오래도록 너의 안부를 듣지 못하여 궁금하고 보고 싶은 마음이야 무엇이라고 해야 좋을지 모르겠다. 일래 몸 성히 잘 있느냐. 늙고 불쌍한 너의 모는 죽지 못하여 모진 목숨을 그럭저럭 부지하여 간다. 그런데, 다른 말이아니라, 수 일 전부터 청아가 병이 들어 지금은 거의 거의 위태할 지경에 이르 렀 는데, 요사이는 헛소리마다 너를 부르니, 차마 옆에서 그 꼴을 그대로 보기가 어렵다. 어린 인생이 죄가 있으랴. 너도 어미된 인정을 저 버리지아니하려거든, 한번 와서 보고라도 가기를 바란다. 아마 춘우도 그것은 용서할 줄 안다. 하루바삐 다녀가기를 바란다.
 
95
 
96
하였다. 춘우의 마음은 무슨 감격으로 떨리는 듯하였다. 편지를 척척 접어 영숙을 다시 주고는, 국물 한 숟가락을 뜨더니 말이 없다. 영숙은 춘우의 입에서 어떠한 최후 명령이 내릴지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말 나오기만 기다리고 있었다.
 
97
춘우는 영숙을 보낼 의무는 자기에게 있지 않다고 생각하여 보았다. 지금에 완전히 영숙을 자기 것을 만들어 놓은 이상 또다시 철수의 딸인 청아의 병을 보러 보낼 필요는 없을 것이라 하여 보았다. 청아와 나와 무슨 관계가 있으랴. 영숙이가 내어 버린 청아를 지금에 다시 보게 한다는 것은 도리어 춘우에게는 위태한 일일는지도 모른다. 조금 몰인정한 일 같지만, 잊어버린것은 영원히 잊어버리고 내버린 것은 다시 돌아보지 말라고 하고 싶었다.
 
98
『가고 싶소?』
 
99
춘우의 말에는 적지 않은 불평이 잠겨 있었다. 그러고 영숙을 보는 눈에는 시기의 광채가 번득거리었다.
 
100
『가지 말라고 그러시면 저도 가지 않을 터예요.』
 
101
영숙이가 대답은 이렇게 하기는 하였으나, 그 표정에는 숨기지 못할 괴로운 빛이 있었다.
 
102
『나는 가거라 말아라 할 수는 없소. 영숙이 마음대로 하구려. 내가 여기에 간섭할 수는 없소.』
 
103
『그러면 가는 것을 좋아하지 않으신다는 말씀이시죠.』
 
104
『나는 좋다 싫다 말을 하지 않을 터이요. 내가 되어서 가지 말라 하면 너무 아량이 없는 사람이 될 터이요, 또 가라고 한다 하면 가지 말라는 말보다는 좀 거북한 말이니까…』
 
105
『그렇게 말씀을 하시면 가지 않지요.』
 
106
딱 잘라서 말을 하는 영숙의 얼굴은 새침하여졌다.
 
107
『공연히 그런 말씀을 해서 퍽 미안하게 되었습니다.』
 
108
비꼬는 것 같기도 하고, 또는 원망하는 것 같기도 하다.
 
109
『온 별말을 다 하는 구려. 숭늉이나 한 그릇 가져오구려.』
 
110
숭늉을 가지러 간 뒤에 춘우는 혼자 앉아 생각을 하매 공연히 말을 그렇게 했구나 하였다.
 
111
퍽 가고 싶은 것을 내가 가지 말래서 못 간다 하면 그것은 공연히 원망 을사는 것이요, 또 비록 지금은 남이지만, 자기 자식을 보러 간다는 것을 막는대서야 자기도 남의 자식이 된 이상에, 너무나 몰인정한 일이 아닌가 하고 후회하는 생각이 났다.
 
112
숭늉을 들고 들어온 영숙의 눈치만 살피는 춘우는 대접을 갖다가 상에다가 놓을 적에 밥그릇과 맞부딪치는 소리까지 심상히 보이지 않고, 영숙의 불평이 손끝에까지 가득 찬 것 같아서 퍽 불쾌하였다.
 
113
밥상을 물린 후 전 같으면 서로 앉아서 이야기를 하든지 하다못해 팔뚝 맞기 화투라도 하였을 것이지마는, 두사람은 서로 말이 없이 앉아 있다. 춘우는 잡지장을 뒤적뒤적하고 영숙은 돌아앉아서 손에 잡히지 않는 바느질을 시작 하였다. 웬일인지 두 사람은 서로 눈치만 보는 것 같아서 콧 잔등이가 간질간질 하고 시선과 시선이 마주 다 닥칠 때마다 서로 피하느라고 애를 쓴다.
 
114
그와 같이 쓸쓸하고 부스러지는 것 같고 긴장하지 못한 공기 가운데 몇 십분이 지나갔다. 춘우는 생각하매, 공연히 두 사람이 싸움이나 한 것처럼 이렇게 있는 것이 어째 싱겁기도 하고 또는 우습고 어리석은 듯하여 말을 꺼내려고,
 
115
『그 양말이나 좀 꿰매 주구려, 지금 신은 것이 벌써 구멍이 뚫리게 되었으니』
 
116
하고, 제 발바닥을 만져서 영숙을 보이며 말을 하매, 두 눈썹만 깜박깜박 하고 앉아 있던 영숙은 보려고도 하지 않으며 여전히 바늘만 움직이며,
 
117
『아직 괜찮지 않아요, 내일이라도 꿰매죠. 그리 바쁘지 않은데』
 
118
하고 불복이다. 춘우는 전 같으면 반드시 당장에「녜」소리가 나왔을 터인데, 지금에 한하여 불복을 하는 것은 반드시 영숙의 가슴속에 못마땅한 것이 있어서 그리하는 것을 알고서, 속으로 무안도 하고, 또는 분한 생각 도나서,
 
119
『지금 못 꿰맬 것이 무엇이란 말이요. 자, 보우』
 
120
하고 조금 우락부락한 소리를 지르며, 구멍이 뚫어지려고 빨간 발이 내다보이는 발뒤꿈치를 손가락으로 가리킨다.
 
121
『지금 꿰매면 지금 신고 어디를 가신단 말요. 내일 아침에 신고 나가시게만 했으면 고만이지요.』
 
122
『그럼, 진작 그렇게 말을 하지. 당초에 꿰매 주지 않을 것 같이 말을 하니까 그렇지.』
 
123
『누가 안 꿰매 드린댔어요?』
 
124
『아까 무엇이라고 했소. 그래 꿰매 주마고 했소.』
 
125
『눈으로 보시면서 그러시우. 지금 하는 것이 있으니까 당장에는 해 드릴수 가 없댔지, 누가 당초에 안 꿰매드린댔어요.』
 
126
한참 말다툼을 한 뒤에, 두 사람은 모두 입들이 뾰족해 앉아서 아무 말이 없다.
 
127
마음이 좁은 여자인 영숙이 도무지 입을 다물고 말이 없으매, 춘우도 말을하고 싶은 생각이 적다. 그뿐 아니라, 이 불쾌한 감정을 두 사람 마음 가운데 일으킨 자는 여기 있는 이 두사람이 아니라, 저 멀리 있는 영숙의 전남편의 딸인 청아라는 제삼자(第三者)이기 때문에, 그렇게 쉽게 뭉킨 감정을 풀기가 어렵다.
 
128
더구나 춘우에게는 이 뜻밖에 일어난 조그마한 감정 문제가 크게 확대 되면두 사람의 치명상(致命傷)이 될 가능성(可能性)을 충분히 가진 것임으로써 그는 그리 쉽게 지나가는 회롱으로는 생각되지 아니한다. 다른 때 같으면두 사람이 겨드랑이 한 번 간질이는 것으로 능히 해결할 수 있었을 것 이지마는, 이번 일은 인륜(人倫)의 관계와 애정의 관계가 서로 세로 놓이고 가로 놓인 것이므로 조금 냉정한 생각으로 해결을 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래서 그는 자리에 누워서도 생각을 하매, 무슨 불행을 예약(豫約) 하는 무슨 암시(暗示)가 그 가운데 있는 듯하였다.
 
129
자기는 아랫목 벽을 안고 누웠고, 자기 안해인 영숙은 등을 꼬부리고 웃목을 향하여 누워 있는 것을 보매, 한 방에 누웠어도, 자기가 바라보는 방향과 영숙이 바라보는 방향이 서로서로 영원히 만날 수 없는 정반대 되는 방향을 향하고 있는 것을 볼 때, 그는 몸에 스며드는 듯한 쓸쓸함을 느끼었다.
 
130
그는 머리를 냉정히 하여 보려고 애를 썼다. 될 수 있는 대로 자기 하는것을 벗어 버리고 제삼자가 되어, 자기와 영숙과 또는 거기에 얽힌 사실을 멀리 놓고 관조(觀照)하리라 하였다.
 
131
부모나 자식 사이의 애정이라든지 정리와 남편과 안해간의 사랑이나 의리가 어떠한 곳에서 일치하는 수는 있을는지 모르지만 결코 똑같은 것은 아닐 것이다. 그러하면 영숙이 나를 사랑하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청아를 사랑 하는 것과는 다를 것이며, 내가 갖지 못한 그 어떠한 사랑을 영숙은 또 하나 더 가졌다. 세상에 가장 행복스러운 사람이 누구이냐 하면 그것은 남에게 사랑을 받는 사람이 아니라, 남을 사랑할 줄 아는 사람이다. 그 점에 들어서 영숙은 자기보다 하나 더 행복스러운 것을 가졌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자기는 영숙의 사랑을 받지 못하는 때에 비애를 느낄는지 알지 못하나, 영숙은 청아를 사랑하고 싶을 때 사랑하지 못하게 되면 그는 무한한 적막과 비애를 느끼는 것이다.
 
132
엘렌 케이 여사가 말하기를, 구주 전쟁 당시에 전선에 나가서 나라를 위 하여 용감스럽게 싸우던 용감한 남아들이 불행히 몸에 부상을 당하여 야전병원 침대 위에서 적막히 최후를 마칠 때에, 그의 입에서 나오는 소리는 모두 「어머니!」라는 말이었다고 한다.
 
133
어머니의 사랑은 절대(絶對)다. 상대(相對)가 아니다. 언제인가 춘우가 창하와 함께 처음으로 영숙을 찾아갔을 때, 이 세상 인류를 죄악의 구렁으로 쓸어 넣은 것이, 예수 믿는 사람의 말대로 하면, 우리의 선조의 안해 되는 이브라 하면, 오늘에 다시 세상을 구해 낼 자는 또 우리의 어머니가 되 리라고 한일이 있었다. 그때 춘우와 창하는 무심한 가운데 그 말을 하였지마는, 오늘 춘우가 생각하매, 그때 그 말이 자기에게 무슨 암시를 준 것 같았다. 가장 약한 가운데 가장 큰 힘이 있는 것이다. 너는 약한 자이다. 너의 이름은 여자이다하고, 옛날에 셰익스피어가 햄릿을 시켜서 자기 어머니를 꾸짖게 한 말이 있지마는, 그와 같이 약한 여자에게도 강하다고 거만한 체 하는 남자를 정복하는 힘이 있는 동시에 그 반면에 또한 자기의 어머니로서의 뜨겁고 무거운 힘이 있는 것이다. 이 세상에 어떠한 남자가 자기 어머니의 사랑을 부인하는 사람이 있으랴! 누가 자기 어머니 앞에 고개를 숙여 그 무한 히 인자하고 무한히 다정하고 고마움을 사례하지 않는 이가 있으랴! 어머니는 자식에게 들어서 천사이며 피난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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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와 같은 생각을 하는 춘우의 마음은 다시 자기의 몸으로 돌아왔다. 자기의 어머니에게로 돌아갔다. 그는 돌아간 어머니의 애정을 생각하고, 자기와 인우를 생각하여 보았다. 거룩한 어머니가 오늘에 계셨더면 하는 그리운 비애를 느낄 때, 그는 다시 영숙의 마음을 살필 수가 있었다. 자기의 어머니를 지금껏 그리워하는 것이나, 영숙이 자기 딸 청아를 생각하는 것이나, 청아가 자기 어머니인 영숙을 찾는 것이, 어머니와 어머니, 자식과 자식의 정리와 애정에 무엇이 다를 것이 있느냐. 자기의 어머니는 영영 돌아오지 못 할 곳으로 그 어떠한 힘이 끌어가고 말았고, 영숙은 또한 자기와 자기 사이 에 어떠한 힘으로 말미암아 청아에게서 영숙을 자기에게 뺏아온 것이다 하였다. 그는 그와 같은 생각을 할 때, 두 눈에서 가리울 수 없는 눈물이 흘러내리었다. 그는, 나이가 이만큼 먹은 나로서는 돌아간 어머니의 환영(幻影)을 끄집어내어 그의 품안에 안기려 한다. 아마 이 생각은 내가 죽을 때까지 사라지지 않을 터이지. 그러한데, 청아가 살아 있는 어머니의 젖꼭지를 찾는 것이 어째 무리라 하랴. 여기에 만일 참으로 공정한 진리가 있다하면 청아는 반드시 영숙에게로 돌아가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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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우는 이렇게 생각을 하다가, 어느덧 잠이 든 영숙을 돌아다보았다. 두 손을 가슴 위에 가만히 놓고서, 잠이 든 그의 머리속으로는 지금 반드시 청아의 꿈을 꿀 것이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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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 나는 나의 사소한 질투심을 내버려, 큰 진리를 위해야 할 것이다. 영숙은 청아에게로 보내야 할 것이다. 여기에 사람으로서 나의 의무가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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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덧 첫닭이 울었다. 춘우도 그럭저럭 잠이 들었다. 이튿날 아침 두 사람이 자리 속에 깨었을 때에, 서로 반대방향으로 누웠던 것이 서로 가슴을 향하여 따뜻하게 끼어안고 있는 것을 찾아내었을 때, 그의 가슴속에 뭉 켜있던 감정은 봄눈 녹듯 사라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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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 General Libraries 최종 수정 : 2021년 12월 07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