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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과도기(過渡期) ◈
◇ 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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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3
채만식
1
過 渡 期 [과도기]
 
2
9
 
 
3
그 이튿날이다.
 
4
문자는 무서운 짐승에게 휘달린 어린 양처럼 풀이 죽어 슬픈 눈동자로 형식 의방을 가끔 건너다보며 홀로 생각이 깊었다.
 
5
'어젯밤 일, 아! 어젯밤에 지나던 일…… 난 인젠 이 세상에서 자랑거리가 없어졌구나. 참 꿈결 같다. 하지만 저인(형식) 썩 다정스러운 이야. 말하자면 내가 저 일 유인한 셈이지…… 내가 저일 참말 사랑하나? 아닌게아니라 저이가 맘에 썩 좋아, 아주 썩…… 저이 같으면 한평생 믿고 살겠는데…… 그렇지만 저이가 맘이 어떤 지 알 수가 있어야지…… 저이도 날 사랑하나? 그렇잖고 그저 일시적 쾌락이나 취하느라고 그런 게 아닌가? 그거야 어쨌든 저이가 날 사랑하기만 하였으면 좋겠구먼 두…… 저이 맘이 어떤구? 나보고 음란한 계집애라고나 않나? 아이 고참, 저인 부인이 계시지…… 아! 이걸 어쩌나 ! 내가 그걸 번연히 알면서도 그게 무슨 짓이야. 저인 또 조선 양반이고 난 일본 사람인데…… 또 내가 우리 집 외딸이니까 저이가 나하고 정식으로 결혼을 하려면 저이가 우리 집으로 양자(養子)를 들어와야지…… 아 ! 아무래도 저이와 난 결혼할 형편이 못되는데…… 난 인젠 버린 몸이야. 몸은 버리고 사랑은 잃고…… 이걸 어쩌나 ! 난 인젠 저이 아니곤 살 수 없어. 어저께까지도 별로 그러진 않더니 오늘부터 갑자기 이래…… 오늘부텀이야. 아이고 이걸 어쩌면 좋아 ! 저인 왜 아무 말도 없이 저러고만 있나?’
 
6
하고 참다 못하여 답답한 가슴을 안고 엎드러져 울었다.
 
7
형식은 문자의 깊은 속을 몰랐다. 다만 어젯밤 일을 생각하고 부끄럼과 겁나는 맘으로 그러는 줄만 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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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그는 옆으로 가까이 가서 잘 위로라도 하고 싶었지만 남의 눈에 뛸까 하여다만 두어 마디 말로 타이르고 그대로 나가 놀다가 그날 밤 늦게야 돌아왔다.
 
9
형식이가 그처럼 나가는 것을 보고 문자는 더욱 마음이 조민하여지고 인제는 형식이를 영영 못 보나 보다' 싶어서 그날 해가 저물고 밤이 깊도록 울기도 하고 생각도 하여 보았으나 아무 좋은 도리는 없고 다만 가슴만 답답할 뿐이었다.
 
10
그는 무전의 안해에게 의심을 받을까 겁내어 몸이 편치 못하다는 핑계를 하고 물론 온종일 아무것도 먹지 아니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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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므로 하루 사이에 그의 형용은 몹시 파리하여졌다.
 
12
밤이 늦어서야 형식이가 돌아오는 것을 보고 문자는 매우 반가와 하였다.
 
13
형식은 돌아와서 말할 수 없이 깊은 비수(悲愁)를 띤 문자의 추렷한 형상을 보고 마음에 급히 변화가 일어났다.
 
14
사자에게 몰려가던 어린 양이 인제는 힘이 다하여 그 자리에 엎드러져서 잡아먹기만 기다리고 아무 반항과 원망이 없이 다만 두려움과 애처로운 눈동자로 사자의 상판을 말끄러미 바라보는 듯한, 그렇듯한 '죽음’의 빛이 가득한 문자의 얼굴을 본 형식의 가슴은 말할 수 없는 자비(慈悲)의 설움에 복받쳐 목이 메어지는듯 하여 잠깐 동안 말을 내지 못하였다. ㅡ 어린 양을 쫓아가던 그 사자가 그 양의 애처로운 눈동자를 보고 눈물을 머금은 듯한 그러한 정경으로.
 
15
문자는 그러한 중에도 형식이 자기를 보고 반기어 맞는 것을 본 형식은 마음에 어찌나 느긋하고 그리운지 그대로 문자를 쓰러안고 두 사람은 처음으로 더운 키스를 하였다. 두 사람은 한 가지로 창문턱에 걸터앉아 달을 띠고 이야기를 시작 하였다.
 
16
문자도 물론 문자거니와 형식이도 세상에 나서 이만큼 사랑을 느낀 적이 없었다.
 
17
그는 자기 아내를 사랑한 적도 있었지만 그것은 너무 거죽이 두터웠고 그동안 문자를 사랑하는 맘이 없는 것은 아니었으나 그것도 그다지 진진한 정은 아니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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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식씨……"
 
19
하고 문자가 먼저 입을 열어 형식을 불렀다.
 
20
"응……"
 
21
하고 형식은 문자를 바라보며 말이 나오기를 기다렸다.
 
22
"저, 아따 저…… "
 
23
하고 문자는 부끄러운 듯이 차마 말을 하지 못하고 우물우물하였다.
 
24
형식은 한층 더 다정스러운 말로
 
25
"무에야? 응? 말 해요…… "
 
26
하고 얼굴에 웃음을 띠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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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면 말할 테니 흉보지 마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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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흉? 흉은 무슨 흉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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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면 저…… 어제 저녁 일을 형식씬 어떻게 생각하세요?……"
 
30
한 말을 겨우 하여 놓고 문자는 머리를 숙였다.
 
31
"어제 저녁 일?"
 
32
하고 웃으며
 
33
"어제 저녁 일이야, 그야 말하자면 그저…… 말하자며 우리가 잠깐 잘못되었다고 할 수가 있겠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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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면 형식씨 절 사랑하세요?"
 
35
하고 문자는 말을 하고 또 머리를 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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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식은 얼굴에 흡족하여하는 웃음을 띠고 손끝으로 문자의 턱아리를 살짝 들어 그의 얼굴을 탐나는 듯이 굽어보다가 다시 한 팔로 그 목을 그러안고 붉은 그 입술을 한번 쪽 빨았다.〉
 
37
그리고 그의 아무말 없이, 다만 의미가 간곡하게 미소하며 문자의 얼굴을 바라보는 그의 눈은 문자의 요구하는 전부를 말하였다.
 
38
문자는 형식의 그 흡족하여하는 얼굴을 한참이나 바라보다가 무엇을 문득 생각한 듯이 다시 얼굴빛이 새 초롬하 여지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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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지만 우리가 아무리 서로 사랑은 한대두 그것은 보구 못 먹는 떡이야요. 전 그렇게 생각 해요…… "
 
40
하고 여기서부터는 아주 절망적으로 부르짖으며
 
41
"형식씨! 저하구 정식 결혼하실 테야요? 우리 집으로 양자 들어오실 테야요? 당신은 지금 고국에 부인이 계시잖아요? 네 살난 딸두 있지요? 당신은 조선 양반 이구 전 일본 계집이 아니야요? 전, 전, 당신이 조선 양반이건 청국 사람이건 제가 사랑하는 이면 그만이지만 당신은 ㅡ 예전에 당신이 하신 말씀과 비교해 보면 조선 양반이신 당신은 ㅡ 일본 사람 한테로 양자 들어올 형편이 못 되잖아요? 양자두 양자거니와 당신은 지금 남의 남편이시구 남의 아버지가 아니세요? 형식씨! 전 어쩌면 좋아요?"
 
42
하고 형식의 무릎에 엎디어 흑흑 느껴 울었다.
 
43
형식은 그 말을 듣고 나니까 자기 역시 아무 도리도 없는 듯이 다만 난처한 빛을 얼굴에 띠고 말없이 문자의 모양을 바라보다가 한참만에 문자를 일으켜주며
 
44
"울긴 왜 울어요 ! 많이 울어서 좋은 도리만 있으면 얼마든지 눈물이 말라 나오지 않을 때까지라두 울겠지만, 지금 와서 울어야 남보기만 흉했지 별수가 있어야지…… 그러니까 자, 울지 말구 우리 둘이서 잘 의논을 해보자구…… "
 
45
하고 어루만지듯이 달랬다.
 
46
문자는 겨우 눈물을 거두고 일어나 앉아 옷자락을 만지작거리며 형식의 말을 기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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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48
하고 형식은 소리를 가다듬어 말을 내었다.
 
49
"우리가, 남녀가 서로 결합하는 제일 큰 조건인 서로 사랑한다는 것은 확실한 사실이니까…… 문잔 날 사랑하지 ? 난 문잘 사랑하구…… 그러니까 그 외의 다른 어려운 일은 우리가 사랑하는 힘으로 이겨내면 그만이 아니야? 만일 그 어려운 일을 이겨내질 못한다면 그야말로 우리가 사랑하는 힘이 약한 표적이 아니라 구? 원체 남녀가 사랑을 한다든지 있던 사랑이 없어지든지 하는 것은 우리 사람의 의사론 어쩔 수가 없는 게야…… 이번 일로만 해두 문잔 내가 그렇듯한 처지에 있는 줄 문자가 모른 것이 아니지만…… 나도 역시 문자의 처지가 그렇듯 한 줄을 모른 것이 아니었지만, 그래두 오늘 이 지경이 된 걸 보면 사랑의 힘이란 범백을 초월하는 맹목적의 것이구 또한 사람의 면할 수 없는 운명이란 것을 문자두 깨달았겠지? 그러니까 우리는 인제부터 또다시 그 운명에 앞서서 힘 미치는데까지 노력을 하고 결과에 가선 운명에 맡길 수밖에 없단 말이야."
 
50
"형식씨 말씀 같아선 속이 시원한 듯두 합니다만 우린 그 운명에 앞서 노력만이라도 해볼 수 없는 참혹한 처지에 있질 않아요? 형식씬 아무래두 지금 남의 아버지 시구 남의 남편이 아니세요?"
 
51
"그거야, 이혼을 해버리지…… 계집애가 있는 거야 문자가 기르구……"
 
52
라고 무엇을 아주 과단을 하기는 하나 그래도 뒤로 끌리는 힘이 있어 확확 말을 못 하는듯 하였다.
 
53
"그러면 전 벌써 남의 어머니가 되나요?"
 
54
하고 문자는 잠깐 철없이 웃었으나 그것은 곧 사라져버리고 다시 참한 말로
 
55
"그렇지만 이혼을 하시면 부인께선 어쩌시라구요? 저 같은 사람 때문에…… "
 
56
"그거야 문자 때문에 이혼을 하나 ? 난 벌써부터 이혼을 해버릴 맘이 있었지만 그래두 차마 결심이 들어서질 않아서 지금까지 주저한 것이니까, 말하자면 문자는 다만 새로운 자극만 준 셈이지…… 어쨌든 한번 이혼은 면치 못할 게니까?"
 
57
"지금 계신 부인은 어떠하신 이에요?"
 
58
"기왕 말이 났으니까 그러면 내가 자세한 이야기나 해보지…… "
 
59
하고 형식은 한숨 한번을 쉬더니 다시 말을 이었다.
 
60
"내가 장갈 들긴 열여섯 나던 해구 그가(자기 안해) 열다섯 나던 해댔나 그랬지. 그래 그때엔 무슨 철을 알댔나. 그저 부모가 시키는 대로 할 따름이지…… 또 아닌게아니라 맘에 좋긴 하더군, 장갈 든다니까…… 그래 장가 들구 보니까 아주 썩 예쁜 색시가 ㅡ 본시 얼굴은 아주 보잘것없이 생기구 키는 난장이처럼 작았지만 그땐 어찌 그리두 곱게 보였던지! ㅡ 내 앞에서 아른아른하며 내 비윌썩 잘 맞추어주구…… 그리구 처가엘 가면 ㅡ 내가 가기나 하나. 왠 사인굘 가지고 날 모시러 오댔지 ㅡ 그래 아주 참 그건 부원군 팔자야. 그리구 우리 장모 라나 하는 사람은 어쩌면 날 그리두 귀애하는지…… 그리구 그때 내가 서울서 중학교 이년급에 다녔으니까 집에 있을 수 있나. 그래 서울 있으면서두 일상 집 생각이 간절했댔지…… 그리구 학기시험이 끝이 나면 그날 밤차로 바로 집엘 왔겠지…… 그게 한시라도 어서 보고 싶어서…… 그처럼 열여섯 일곱 여덟 아홉 나던해 봄에 중학굘 마치구 이 동경으로 오는 길에 집엘 들르잖았나. 참말이지 그때 이별 하긴 싫더군. 그래 둘이서 붙들고 울기까지 했겠지……"
 
61
하고 여기서 형식은 잠깐 말을 그쳤다. 말하는 동안에 즐겁던 옛일을 회상 하는 그의 얼굴에는 가끔가다 기쁜 미소까지 떠올랐다.
 
62
문자도 형식을 따라 웃어가며 재미스럽게 들었다.
 
63
"그래 그처럼…… "
 
64
하고 형식은 다시 말을 이었다.
 
65
"그래. 그처럼 그동안 둘이서 정이 꿀같이 지내다가 내가 동경으로에온 뒤에부터 맘이 변했지…… 내가 처음 와서 얼마 동안은 그가 그리운 생각두 나구 보구싶 기두 하더니, 두어 달쯤 지나니까 그제는 일절 보구 싶은 생각은 없어지구 도리어 가만히 그를 머릿속으로 상상해보면 싫구 미운 생각이 나더란 말이야. 그 래그 해의 여름방학에 집엘 돌아가 보니까 아니나다를까 예전엔 맘에 들구 귀엽게 보이던 모든 것이 아주 딴판으로 얄밉구 싫어 보이겠지. 그리고 아일 배었다 구배를 앞으로 뚝 내밀구…… 그래 일절 그 담엔 돌아보질 않구 남 보듯 했댔지. 그래 그는 예전 같음만 대구 나한테 말두 좀 해보려구 하구 그랬지만 내가 들어 먹어 주나, 웬걸…… 일절 안방에라군 발걸음도 않고…… 그러는 한편으론 내 가속의 어느 구석인지 한편이 빈 듯두 하구 공연히 맘이 슬퍼서 저절로 눈물이 흐르기두 하구 어떤 때엔 세상이 귀찮아서 곧 죽어버릴 생각두 나군…… 그러는데다가 일 년에 한번씩 집이라구 돌아가서 그를 보면 한층 더 짜증이 나더란 말이야. 그래 가끔 먹을 줄 모르는 술이나마 몇잔 집어먹군 안방으로 들어가서 이혼을 한다는 둥 자기 친정으로 가라는 둥 하며 성활 멕이구…… 그리구 우리 어머니더러는 장가 잘못 들여주었다구 짜증을 내구…… 그러니까 우리 집에선 공 방이 들었느니 일본다 첩을 얻어 두었느니 하면서 공방풀일 한다구 굿을 하구 경을 읽구 야단을 한 도무지 소용이 있나. 그의 성질이야 말이지 참 온순하구 썩 다정하지…… 내가 그처럼 욕지거릴 하구 성활 먹여두 곱다시 앉아 들을 뿐이지 말대꿀 한 번하거나 불쾌한 얼굴 한번 보인 적이 없구, 더우기 다른 사람한테 그런 말은 하질 않으니까. 정 참기 어려우면 저 혼자 울기나 할 뿐이지…… 그러다가 내가 작년 겨울방학에 집에 돌아가 ㅡ 이혼을 해버리려구 ㅡ 그날 밤에 바로 맘껏 조르구 나서 '이편이 이 세상에서 내 아내란 명색을 가지구 있는 동안엔 인제 난 한 시라두 더 살 수가 없으니까 내가 죽는 꼴을 보지 않으려거든 이 자리서 곧 이편의 집으로 가버리구 나하구 이혼을 하게 하라’구 내리 졸라댔지…… 그래 두 여간 해서 말대꿀 해주어야지. 그날 밤에 나두 술두 아니 먹고 그랬건만…… 그러다가 내가 하두 못견디게 조르니까 겨우 입을 열구 하는 말이 '당신이 날 보구이 자리서 당장 죽어버리라시면 두말 않구 죽기라두 할 것이니 제발 나가란 말만 말아 주오’하구 그만 느껴 울겠지."
 
66
여기서 형식은 한숨 한번을 내쉬고 잠깐 말을 멈추었다.
 
67
문자는 눈에서 눈물이 그렁그렁하여져 가지고 듣다가
 
68
"형식씨 ! 제발 마세요. 차라리 저 하나만 죽어버리면 그만 아니에요?"
 
69
하고 몸부림이라도 할 듯이 울었다.
 
70
"죽어 ? 죽긴 왜 죽어, 글쎄? 누가 문잘 잘못했다나? 그러지 말구 담말을 들어 봐요. 그래 그때 마침 계집애(자기 딸)가 제 할머니한테서 놀다가 마침 들어오겠지…… 내가 그동안 계집애만은 썩 그리구 귀여워했댔으니까 날 따르던 터이라…… 들어와서 제 어미가 우는 것을 보구 내 앞으로 아장아장 걸어오며 ' 아부지 아부지, 엄마 으으 운다’하구 제 어밀 가리키겠지…… 그걸 보니까 별난 감상이 다 나든군…… 그리구 내가 그때 그 자리서 너무 잘못했단 생각두 나구…… 그래두 맘에서 우러나는 귀여운 생각은 덮어 놓구 눈을 딱 부릅뜨구 '요년!’ 하구 나무랐더니 그게 노여워라구 비죽비죽 울면서 제 어미 무릎에 가 앉아서 날 가리키며 제 어미더러 '엄마 엄마, 아부지 에비다 아부지’ 그런단 말이야. 그러니까 제 어민 그걸 쓸어안구 눈물을 닦아 주구 젖을 먹이며 더욱 울겠지…… 내가 그 모양을 물끄러미 바라보니까 애처로운 생각이 무럭무럭 올라와서 내 눈에 서두 단번에 눈물이 흐르는 듯해요. 그래 와락 달려들어 두 어미 새낄 꽉 쓸어 안구 실컷 좀 울었으면 사라진 옛정이 다시 솟아날 듯해요. 그래 나두 다시 아무 말두 못하구 있다가 도로 이곳으로 오긴 했지만, 지금 와선 예전처럼 밉구 싫은 생각은 사라진 듯도 해. 그리구 그에게 대해서 무슨 생각을 하려면 불쌍한 생각이 앞을 서구…… 그러니까 내가 지금 이혼을 해버리면 한평생 홀과수로 늙기 아니면 그대로 타락이 되어버릴 게니까. 그가 지금 날 떠나서 저 혼자 바른 앞길을 열어 나갈 힘이 있어야지……'보름날’이란 말을 못해서 열닷샛날이라구나 하 구제 생일이 구월이라 했다 삼월이라 했다 하는 위인이야. 이렇듯한 처지에 있어가지구 이혼을 하려니까 낸들 약간 맘이 아플까 봐서? 문자는 그걸 차마 못 봐서 문자가 죽느니 어쩌느니 하지만, 가령 지금 문자가 죽어버린다든지 혹 날 저 버리구 다른 곳으로 간다든지 하면 난 그대로 이성에게 대한 요구가 사라져 버릴 듯 싶은가? 문자가 없더라두 다시 다른 여성이 내 가슴에 젊은 피가 있는 동안엔 언제든지 지금의 문자처럼 내 앞에 나타날 게 아니야?"
 
71
"그러니까 이혼일라컨 마세요. 그처럼 어지신 부인을 저버리시다니요? 저 같은것은 열번 죽어두 그이한텐 따르질 못할 게니까요. 전 그저 지금의 이것이면 만족이에요. 당신이 맘만 변치 않으시면…… "
 
72
하고 문자는 열정적으로 말을 하였다.
 
73
"지금의 이것으로 만족을 해?"
 
74
형식은 문득 불쾌한 듯이
 
75
"그러면 나하구 정식으로 결혼은 못하구 또 변치두 않구…… 그러면 그것이 무슨 말이야? 그래 그러면 처, 처, 첩으로 만족을 한단 말이야?"
 
76
하고 문자를 끄윽 바라보았다.
 
77
"아니예요. 첩이 아니에요. 그렇지만 첩이 아니라 첩보담 더한 이름이라두 관계 찮아요. 본처니 첩이니 하는 말은 이 세상에서 영화나 명예하구 작별한 저 한텐 그다지 구별이 없는 거예요. 오죽하면 이다지 팔자가 기구할라구요!"
 
78
하고 문자는 자포자기가 되어 절망적으로 부르짖었다가 다시 "그러니까 저한텐 이 세상에 아무것두 없고 다만 형식씨 당신 하나만 있을 다름이에요. 그리구 진정 말이지 당신 부인 같으신 이하구 함께 있어보기가 원이에요. 형식씨 ! 절 버리지 말아 주세요."
 
79
하고 애원하듯이 말을 하고 무량한 감개를 억제치 못하여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흑흑 느껴 울었다.
 
80
형식은 비창한 말로
 
81
"아무리 문잔 그런대두, 난 내가 사랑하는 문자로 봐서 그럴 순 없어. 사회가 또 허락칠 않아……"
 
82
하고 한숨을 거듭 내쉬며 눈을 위로 치뜨고 오래 생각을 하였다.
 
83
"자, 울지 말구도 내 말을 들어요. 어려운 대목이 또 하나 남았으니까…… "
 
84
하고 형식은 한참만에 겨우 입을 열어 말을 내었다.
 
85
문자도 울음은 그쳤으나 아직도 흑흑 느끼는 것은 억제를 못하고 띵띵 부은 눈으로 형식을 바라보며 말을 기다렸다.
 
86
"인제 또 한가지 것은 양자 문젠데…… 진정 말이지 내가 양잔 갈수가 없는 형편이야.〈난 어디까지든지 조선 사람이니까…… 지금 피정복자의 설움 가운데서 자기네의 존재까지도 의심할 만한 조선민족에게는〉'사랑이나 주의에는 국경이 없다, 는 말은 그다지 힘차게 울리질 않고…… 또 그것이 결코 무리의 일이 아니야. 이렇듯한 동포의 큰 기대나 희망을 저버리구서 내가 문자하구 결혼을 해서 피 섞인 자식을 뒤에 끼치는 것만해두 여간 큰일이 아닌데다가, 더구나 내가 아주 일본 사람이 되어버린단 것은 너무나 내가 잘못이 아니라구?"
 
87
문자는 잠깐 동안 무엇인지를 까막까막 생각 하다가
 
88
"사정이 벌써 이리 되었으니까 양자 문제 같은 것은 그다지 어려울 게 없잖아요? 정식으로 결혼을 못하게 된다면 양자 문젠 도무지 일어나질 않을 게니까요. 그리구 만일 정식으로 결혼을 하게 되는 때에 형식씬 양잘 들어오지 못 한다시 구우리 어머닌 양잘 아니 들어오시면 아무리 해두 결혼 허락을 않으신다면 전 그때엔 우리 집과 절연을 해버리면 그만 아니에요. 그러면 전 아주 자유니까…… "
 
89
하고 아주 담대한 표정으로 말을 하였다.
 
90
형식은 문자의 이 말에 자기 몸이 바싹 졸아들어 문자의 무릎 앞에 꿇어앉은 듯한 부끄런 생각과 감사한 생각이 일어나 문자의 손을 꽉 잡고, 문자에게 그만 한 용기가 있느냐?' 고 묻는 듯이 그 얼굴을 바라보았다.
 
91
아 ! 현실에서 멀리 떠난 두 사람의 꿈은 더욱 깊어진다.
【원문】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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