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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개척자(開拓者) ◈
◇ 1 장 ◇
카탈로그   목차 (총 : 21권)     처음◀ 1권 다음
1917년
이광수
목   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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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장

 

1.1

 
3
화학자 김 성재(金性哉)는 피곤한 듯이 의자에서 일어나서 그리 넓지 아니한 실험실 내를 왔다갔다한다. 서향 유리창으로 들이쏘는 시월 석양빛이 낡은 양장관에 강하게 반사되어, 좀 피척하고 상기한 성재의 얼굴을 비춘다. 성재는 눈을 감고 뒷짐을 지고 네 걸은쯤 남으로 가다가는 다시 북으로 돌아서고, 혹은 벽을 연(沿)하여 실내를 일주하기도하더니 방 한복판에 우뚝 서며 동벽에 걸린 팔각종을 본다. 이 종은 성재가 동경서 고등 공업 학교를 졸업하고 돌아오는 길 에 실험실에 걸기 위하여 별택으로 사 온 것인데, 하물로 부치기도 미안히 여겨 꼭 차중이나 선중에 손수 가지고 다니던 것이다. 모양은 팔각 목종에 불과하지만 시간은 꽤 정확하기 맞는다. 이래 칠 년간 성재의 평생의 동무는 실로 이 시계였었다. 탁자에 마주 앉아 유리 시험관에 기기괴괴한 여러 가지 약품을 넣어 흔들고 짓고 끓이고 하다가 일이 끝나거나 피곤하여 휴식하려 할 때에는 반드시 의자를 핑 들려 이 팔각종의 시계 분침이였다. 실험실 내 고단(孤單)한 생활에 서로 마주보고 있었으니 정이 들 것도 무리는 아니다. 칠년 북은 목 종은 벌써 칠(漆)이 군데군데 떨어지고 면의 백색 판에도 거뭇거뭇한 점이 박히게 되었다. 돌아가는 소리인지 금년 철 잡아서는 두어번 선 적이 있었다. 성재는 시계가 선 것을 보고는 가슴이 두근두근하도록 놀라고, 그의 누이되는 성순(性淳)도 그 형으로 더불어 걱정하였다.
 
4
그러다가 시계가 다시 돌아가기 시작하면 형매(兄妹)는 기쁜 듯이 서로 보고 웃었다.
 
5
고요한 방에서 성재가 혼자 시험관을 물끄러미 주시하고 앉았을 때에는 그의 측면에 걸린 팔각종의 똑딱똑딱 돌아가는 소리만이 실내를 점령하는 듯하였다. 그러다, 그러다가는 으레히 성재가 일어서서 지금 모양으로 실내를 왔다갔다 한다. 성재는 흔히 시계 소리에 맞춰서 발을 옮겨 놓았고 성재가 걸음을 좀 빨리 걸으면 시계도 빨리 가고, 성재가 걸음을 더디 설으면 더디 가는 듯도 하였다.
 
6
성재는 그 팔각종을 노려보며 팔짱을 끼고, (칠 년! 칠 년이 짧은 세원을 아닌데─) 하고 고개를 돌려 지금 실험하던 시험관을 본다. 그 실험 관에는 황갈색 액체가 반쯤 들어서 가만히 있다.
 
7
성재는 빨리 탁자 앞으로 걸어가서 그 시험관을 쳐들어서 서너 번 쩔레쩔레 흔들어 보더니, 무슨 생각이 나는지 의자에 펄썩 주저앉으며 주정등(酒精燈) 뚜껑을 열고 바쁘게 성냥을 그어서 불을 켜 놓은 뒤에, 그 실험관을 반쯤 기울여 그 불에 대고 연해 빙빙 돌린다. 한참 있더니 그 황갈색 액체가 펄럭펄럭 끓어 오르며 관구(菅口)로 무슨 괴악한 냄새나는 와사(瓦斯)가 피어오른다. 성재는 고개를 반만치 기울이고 한참 비등하는 액체만 주시할 때에, 그 눈은 마치 유리로 하여 박은 듯이 깜박도 안 한다. 그러나, 그 악취가 실내에 가득 차게 되매, 제 아무리 성재라도 가끔 손수건을 코에 대리고 하고 소매로 눈을 씻기도 한다. 한참 이 모양으로 시험관을 돌리더니 다시 그것을 세워 놓고 탁자 위에 놓았던 조그만한 병에서 백색 분말을 좀 떠내어서 천평에 단다. 조그마한 숟가락으로 병의 것을 더 떠서 천평에 놓기도 하고 천평의 것을 도로 떠서 병에 넣기도 하더니, 얼마 만에 천평이 평형을 얻어 가만히 서는 것을 보고 얼른 천평 접시를 들어 그 백색 분말을 시험관에 집어 넣는다. 그 분 말이 들어가자 시험관 속에서는 푸시시 하는 소리가 나며 수증기 같은 것이 피어 오른다. 성재를 수증기가 그치기를 기다려서 다시 그 시험관을 주정등에 대고 아까 모양으로 빙빙 돌린다. 그 황갈색 액체는 아까보다 조금 담(淡)하게 되었으나, 여전히 황갈색대로 부글부글 끓으고 앉았는 겿에서 그 팔각종이 똑딱똑딱 가면서 주인의 실험하고 앉았는 양을 물끄러미 내려다본다.
 
8
주인의 얼굴에는 기쁜 듯한 미소와, 걱정스러운 듯한 찡그림이 몇 분간을 새에 두고 번갈아 왕래한다.
 
 
 

1.2

 
10
이러할 때에 안으로 통한 문이 방싯 열리더니 서양머리 쪽찐 십 팔구 세가 되었을 듯한 처녀가 가만히 들어선다. 얼굴은 그렇게 미인이라고 할 수는 없으도 가지런한 눈썹 밑으로 맑은 영채를 발하는 눈과 둥그스름한 아랫턱이 퍽 사랑스럽다. 머리에는 기름도 아니 바리고 좀 헙수룩하게 쭉 찐데다가, 지금 무슨 부엌 일을 하다가 오는지 부르걷은 고운 때묻은 양목 증키나 될까, 비록 검소한 의복에 모양을 보지 아니하는 태도연 마는 무엇을 입으나 잘 어울릴 듯한 그러한 체격이다. 그 얼굴이 좀 길쭉하고, 웃는 입술이 좀 두터운 모양이 그가 김 성재와 등기인 것을 가리킨다.
 
11
가만히 문안에 들어서며 손으로 코를 막고 잠간 얼굴을 찌푸리더니 소리 없이 서너 걸음 걸어 나와서 성재의 어깨 너머로 시험관에 황갈색 액체의 부글부글 끓는 것을 우두커니 보고 섰다. 성재는 그런 줄도 모르고 연(連)해 시험관을 빙빙 돌리다가는 잠시 쳐들어 보곤 한다. 성재의 얼굴에는 분명히 그 시험관의 성적에 주의하는 빛이 보인다. 이렇게 얼마를 있다가 성순(性淳)은 허리를 펴서 팔각종을 보고 실내의 일영(日影)을 보았다. 팔각종의 시침이 사와 오의 사이에 있고 분침은 육과 칠의 사이에 있었다. 성순은 "네 시 반보다 오 분이 지났네"하고 혼자 생각하였다. 네 시 반은 성재가 실험을 그치고 삼십 분 동안 산보를 하거나 성순과 이야기를 하는 시간이니 이것은 삼 년 내로 일정불변하는 가규 라. 제 시 반이 지나면 성순을 으레히 실험실에 찾아오고, 그래도 성재가 시간 가는 줄을 모르고 있으면 성순이가 우수(右手)의 식지(食指)로 성재의 왼쪽 어깨를 가만히 두드리며 "오빠, 십 분 지났어요" 하는 법이요, 그리하면 성재를 잠시 고개를 돌려 성순을 보고 다음에는 팔각종을 보고 시험관을 세우고 주정등에 불을 끄고 의자에서 일어나 성순의 손을 잡으며 "아아, 오늘도 그저 보냈다" 하는 법이요, 그러고하서는 "산보 갈란다. 내 모자 다오" 하든지, 산보 갈 마음이 없으면 "저 의자 갖다 놓고 여기 앉아라"하여 성순이와 이야기를 하든지 하는 법이요, 그러다가 팔각종이 다섯 번을 땡땡 치면 "자, 저녁 먹자"하고 성순의 뒤를 따라 오전 여덟 시에 떠난 안방에를 아홈 시간 만에 처음 들어가는 법이라.
 
12
성순은 분침이 꼭 Ⅶ자상(字上)에 달(達)한 때를 보아서 예대로 오른손의 식지로 성재의 왼편 어깨를 두어 번 두드리면서 다정한 목소리로,
 
13
"오빠, 십 분 지났어요."
 
14
하였다.
 
15
성재는 법대로 웃는 낯으로 성순을 보고 다음에는 팔각종을 보고, 그리고는 시험관을 세우고 주정등 불을 끄고, 탁자 위에 놓였던 기구며, 약병을 찬찬히 약장에 집어 넣고, 그리고는 어깨 위에 놓인 성순의 손을 잡고 일어서면서,
 
16
"아뿔사, 오늘도 그저 보냈다."
 
17
한다.
 
18
"왜 그저 보내요, 오늘 종일 일 아니 하셨어요."
 
19
하고 성순을 오빠를 책망하듯이 말한다.
 
20
성재는 한번 더 팔각종을 쳐다보고 군데군데 약물에 구멍 뚫어진 양목 실험복을 벗어 성순에게 주고 도로 의자에 앉으면서,
 
21
"글쎄, 생각을 해 봐라, 왜 그러한 한탄인들 아니 나겠니.
22
지 시계가 칠 년 보험인데, 금년이 꼭 칠 년째되니, 저 시계로 말하면 일생을 다 보낸 셈이로구나."
 
23
하고 픽 웃으며,
 
24
"저것 봐라, 그렇게 단단하던 시계가 이제는 다 늙어서 칠이 다 떨어지고 말이 아니다. 그런데 나는 칠 년 동안이나 이 실험실에 들어 박혀서 하여 놓은 것이 무엇이냐! 저 시계도 보기가 부끄럽다."
 
25
하고 두 손을 두 무릎 위에서 턱 놓으면서 고개를 푹 숙인다. 성순은 어이없는 듯이 우두커니 서서 보더니 머리를 북북 긁으며,
 
26
"왜, 오늘은 또 그렇게 기운이 없으셔요? 그새 며칠 동안은 시험이 썩 좋다고, 이대로 가면 성공할 날이 가까이 있을는지도 모르겠다고 기뻐하시더니 오늘은 왜 갑자기 그렇게......"
 
27
하고 성순은 울음을 참는 모양으로 일을 꼭 다문다. 실로 지나간 칠 년에 실패도 꽤 많이 하였다. 무슨 광명이 보일 듯하다가는 실패하고, 무슨 광명이 보일 듯 하다가는 실패하고, 이렇게 하여 오기를 십수차나 하였다. 그렇게 한번 하면 실패할 때마다 많지 아니한 재산은 봄날에 눈 슬 듯 차차 스러졌다.
 
 
 

1.3

 
29
이번 계획을 세운 뒤에도 성공할 듯하면서 실패한 것이 벌써 두 번이나 되었다. 그러할 때마다 성재의 실망은 물론이려니와 성순의 실망은 여간이 아니었으며, 더구나 다정한 여성으로 생겨나서 사랑하는 오직 하나인 오빠의 실망하여 가는 것을 보는 심정은 실망하는 당자보다도 더욱 간절하였었다. 성재가 실험에 아주 실패하여 며칠 동안 음식도 잘 먹지 못하고 밤에도, 불을 켜 놓은 대로 방안에서 왔다갔다 하여 괴로워 하는 양을 보고는 성순도 잠을 이루지 못하고 눈물과 베개를 적시는 일도 흔히 있었다. 지난번 사월에 한 번 실패하였을 적에는 성재가 이렇게 실망이 되고 상기가 되었는지 자살이라도 할까 두려워, 성순은 잠시도 오빠의 곁을 떠나지 아니하고 오빠의 침실에는 칼이나 끄나풀 같은 것이 떨어지지 아니하기를 주의하였다. 그러다가 이번 구월 부터 시작한 실험은 매우 경과가 좋았던지 그동안 성재는 대개 만족한 얼굴로 지내었다. 그래서 성순도 시름을 놓고 기쁘게 지내였다. 그러나, 오후 네 시 반에 실험실 문을 방싯 열 때마다 성순의 가슴은 자연히 울렁울렁하였다. 오늘 실험 결과는 어떠한가, 과연 성공이 되었는가, 성공은 못 되었더라도 기분(幾分)의 광명이나 얻었는가, 그렇지도 못하더라고 실패나 아니 되었는가. 이런 근심을 가지고 문을 열고 들어갔다가 성재가 웃으며 자기의 손을 잡고 일어서는 양을 보고야 비로소 마음이 놓였다.
 
30
오늘도 성재의 웃는 낯을 보고 마음을 푹 놓았다가 문득 그가 고개를 숙이며 한탄하는 것을 보고, 또 가슴이 쿵 하고 내려앉은 것이다. 성재는 고개를 번쩍들어 가운없이 우두커니 섰는 성순을 보고,
 
31
"의자 갖다 여기 앉아라."
 
32
성순은 시키는 대로 의자를 끌어다가 성재와 비스듬히 마주 놓고 앉으면서,
 
33
"글쎄, 왜 오늘은 그렇게 기운이 없으셔요?"
 
34
하고 재치 묻는다.
 
35
"애, 성순아!"
 
36
"네?"
 
37
"내가 성공할 듯싶으냐."
 
38
"그럼요, 그만한 자신이 없으십니까?"
 
39
"자신이야 있지, 자신이 있기에 날마다 종일 시험관만 들여 다보고 앉았지."
 
40
"그러면 왜 그러셔요?"
 
41
"그런데 꼭 될 듯 될 듯하면서도 안 되는구나. 그 해 오길 칠 년이나 해도 그냥 안 되는구나, 이번 계획도 처음에는 순순히 되어 오는 듯하더니 어제 오늘에 와서는 또 위태위태 하여지나 보다."
 
42
하고 길게 한숨을 쉰다.
 
43
성순의 몸에는 오싹 소름이 끼친다.
 
44
"응, 물론 성골할 테지."
 
45
하고 성재는 손으로 낯을 한번 만진 뒤에,
 
46
"그러나, 이제는 돈이 있어야 아니하니? 약품은 무엇으로 사고 주정은 무엇으로 사나."
 
47
"주정은 아직도 번 통 남았어요."
 
48
"반 통?"
 
49
"네, 지나간 사월에 부쳐온 것이 한 반통 남았어요."
 
50
"그러면 주정은 금년 일년, 명년 삼월까지는 걱정이 없겠다. 그러면 약품만 한 이백 원어치 샀으면 명년 삼월까지는 이럭저럭 지내겠다. 그런데 돈이 좀 남았니?"
 
51
"한성 은행 저금 통장에 백 육십 원이 남았어요."
 
52
"백 육십 원?"
 
53
"네, 함사과(咸司果)한테 집 문서 잡히고 취해온 중에서 저번에 약 부쳐 오고 책 사오고......"
 
54
"백 육십 원이라."
 
55
하고 혼잣말로,
 
56
"그러면 걱정은 없다."
 
57
하고 얼굴에 화기가 돌며 벌떡 일어나서 약품 목록과 주문서를 내어 연필로 무엇을 쓴다. 성순은 가만히 앉아서 성재의 손과 몸이 움직이는 것을 본다.
 
58
(어서 성공을 하였으면, 만일 명년 삼월까지에도 또 실패를 하면 어찌하나.) 이러한 생각이 희망과 공포와 한데 버물려서 성순의 흉중으로 왕랴한다. 그런나, 그 오빠가 그러첨 열성으로 자기의 초지를 관철하려고 애쓰는 것을 볼 때에 한껏 존경하는 마음도 생기고 또한 한껏 불쌍한 듯한 생각도 난다. 이렇게 성재에게 동정하여 주는 점으로 보아서는 성순은 마치 성재를 보호하여 주는 맏누이와 같다.
【원문】1 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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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광수(李光洙) [저자]
 
  매일 신보(每日申報) [출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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