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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개척자(開拓者) ◈
◇ 14 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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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7년
이광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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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장

 

14.1

 
3
회당에서 돌아와서 성순은 아무쪼록 가족의 얼굴 보기를 피하고 자리에 들어갔다. 결코 잠이 들 리가 없었다.
 
4
이제는 자기의 전도는 작정이 되었다. 자기는 민과 일생을 같이 할 것이다. 평생에 사모하던 사람과 일생을 같이 하게된 것을 생각하면 다른 걱정은 다 잊게 된 것은 잊어버려지고 오직 가슴 속에 기쁨만 꽉 차는 듯하였다. 성순은 민이 지나간 일개월 동안에 자기를 위하여 얼마나 걱정을 하였을 것, 괴로워하였을 것, 슬퍼하였을 것을 상상하여 안다. 왜, 내가 벌써 그에게 내 뜻을 고하여 기쁘게 하여 드리지 아니 하였는가 하고 후회도 하여 본다. 그러나, 왕사(往事)는 왕사요, 이제부터는 민에게 위안을 주고 힘을 주어 민이 늘 몽상하던 대로 명년 동경 미술 전람회에는 큰 출품을 하게 하리라. 그것이 입선이 되고 특선이 되고, 익년 것이 또 입선이 되고 특선이 되고...... 이리하여 불쌍한 민으로 하여금 조선 미술사의 제일 페이지를 차지할 대미술가가 되게 하리 라.
 
5
성순은 민이 하던 말을 잘 기억한다. 자기가 미술을 배움은 조선인에게 복된 눈 하나를 더 주려 합니다. 사시(四時)의 산색(山色)을 보고 기뻐할 줄 아는 눈, 석양에 물든 서천의 구름을 보고, 모옥(茅屋) 가에 홀로 핀 매호를 보고, 오색으로 수를 놓은 홍엽(紅葉)의 산야를 보고 기뻐하는 눈, 또는 반공(半空)에 직선 곡선 여러 가지 선으로 그려진 산의 형용과 삼림의 윤곽을 보고 기뻐하는 눈, 우리 조선(祖先)이 남겨 준 위대하고 미려한 미술품을 보고 기뻐하는 눈 - 그러한 눈을 주려 함이다. 자연은 인생에게 세 가지 세계를 주었다. 진(眞)의 세계, 선(善)의 세계, 미(美)의 세계, 진의 세계의 잿간은 과학으로 찾을 것, 선의 세계의 재산은 아름다운 사화와 가정과 개인의 품성에서 찾을 것, 그리하고, 미의 세계는 예술로 찾을 것이다. 낡은 예술로 찾을 것이다. 낡은 조선이 빈약하고 비추(鄙醜)한 것은, 이 마땅히 찾을 재산이 찾지 아니하였음이니, 우리가 건설할 새 조선은 찾을 수 있는 대로 이것을 찾아서 부강하고 아름답고 즐거운 조선이 되어야 한다.
 
6
성재의 시험관도 이 의미로 뜻이 깊고 자기의 화필도 이 의미로 뜻이 깊다...... 성순은 이러한 민의 말을 잘 기억해 두었다.
 
7
'음악을 배우는 데도 세 가지 종류가 있다. 첫째는 자기가 혼자서 즐기려고 배우는 것, 둘째는 대음악가가 되어서 세계적 명성을 박(搏)하려 하는 것이니, 이 두가지가 다 좋다. 그러나, 셋째가 가장 좋으니, 그것은 즉 조선인에게 미묘한 음향의 세계에 들어가는 귀를 줄 양으로 배움이다.'
 
8
하고 그 말 끝에,
 
9
"성순이는 셋 중에 어느 것을 취하셔요."
 
10
할 때에 성순은,
 
11
"세째' 하고 웃은 것도 기억한다.
 
12
그리고 또 민이 자기에게 이러한 말을 하였던 것도 기억한다.
 
13
'금일의 사회는 남자와 여자의 공통한 소유물이다. 남자와 여자가 각각 그 천품의 특장을 따라서 최선의 노력을 다하여 우리가 이상하는 바 사회를 실현하여야 된다. 여자에게 남자 동양(同樣)의 교육을 해방하고, 직업을 해방하고......
 
14
물론 인격의 자유와 권위를 인정하는 것이 세계의 대세다.
 
15
더구나 남이 수백년 간에 이루어 놓은 문명을 수십년 간에 이루려 하는 금일의 조선인, 조선인은 더욱 남녀의 협동한 육력(戮力)이 필요하다. 그러니까 조선 여자도 주먹을 불끈 쥐고 일대 분발을 할 필요가 있고 의무가 있다.'
 
16
고 한 것과, 그 때 성순은 감격에 못이겨,
 
17
"저도 새 조선을 위하여서 무엇을, 무엇을 하고 싶습니다.
 
18
그러나, 제게 그러한 능력이 있을까요?"
 
19
할 때에 민은 소리를 높여서,
 
20
"하여 본 뒤에야 능력의 유무를 알지요. 하여 본 뒤에야 성공을 하였으면 능력이 있었던 것이요, 실패를 하였으면 능력이 없었던 것임을 알지요. 이러한 진리를 알았다면 조선에도 퍽 많이 사업을 이룬 사람이 났을 것이외다. 제 능력을 보아야지 하는 말을 얼른 듣기에 매우 영리한 듯하지마는 기실은 자기를 망케 하고 사회를 망케 하는 말이지요.
21
우리는 소아외다. 소아는 제 능력을 모르고서 무엇이든지 닥치는 대로 쳐들어 보려 하고, 깨뜨려 보려 하지요. 그러니?, 물론 실패도 많지요. 그렇지마는 실패도 많이 해야지요. 많은 실패 중에, 여러 실패하는 사람 중에, 그 중에야 설마 성공도 있고 성공하는 사람도 있겠지요."
 
22
하고 빙그세 웃는 것이 생각이 난다.
 
 
 

14.2

 
24
(그렇지!) 하고 성순은 한번 돌아누웠다.
 
25
(무엇이나 해 보아야지!) 하고 성순은 입을 힘껏 다물었다.
 
26
(내가 지금 하려는 일도 일종 모험이다. 대모험이다!) 하고 성순은 월광에 희미하게 보여지는 천정을 조려보았다.
 
27
(성재의 시험관의 실패가 죄가 아니라면 내가 설혹 실패를 한들 무슨 죄가 되랴.) 하고 성순은 조금 베개에서 들었다.
 
28
그러나, 이미 변과 약혼이 성립된 것과, 모친과 성재가 어디까지든지 자기를 정복하려 할 것과, 자기가 민을 사랑한다는 말을 들을 때에 세상이 조롱하고 욕설할 것을 생각하매 미상불 한숨이 아니 나올 수가 없었다. 생후에 아직 한번도 거역하여 본 적도 없는 모친과 성재의 말을 거역할 것도 고통이었고, 자기가 그 말을 거역하기 때문에 모녀의 정의, 남매의 정의, 그렇게 따뜻하고 굳건하던 정의를 상하게 될 것도 슬펐다. 생래(生來) 근 이십 년간 자기의 따뜻한 사 랑의 보금자리이던 가정에서 나기는 떠나야 된다. 평화 속에서 떠나는 것이 아니라 자기의 모반으로, 적대 행위로 떠나야 된다.
 
29
자기는 지금 모친에게 대하여, 오빠에게 대하여, 가정에 대하여, 몇 수천년 전해 오던 인습에 대하여 반기를 드는 것이다. 내가 이러한 반심을 품은 줄을 모르는 모친과 오빠는 안심하고 편안히 잔다. 내가 이러한 반심을 품은 줄을 모르는 서울은 안심하고 편안히 잔다. 가정도 이럭저럭 평화 속에 있고, 사회도 (비록 조그마한 파문은 있다 하더라도) 이럭저럭 평화 속에 있다. 그러나 내 반심이 드러나는 날에는 모친과 오빠와 가정과 사회는 내게 향하여 선전을 포고하고 포격을 가할 터이요, 나도 그네들에게 대하여 선전을 포고 하고 포격을 가할 것이다.
 
30
'내가 그네의 앞에 항복을 하던지, 그네가 나의 앞에 항복을 하는 날까지 결코 빼어 들었던 칼은 다시 칼집에 들어가지 아니할 것이다.' (카이제르의 말) 그네는 중(衆)하다. 대(大)하다. 그러나, 나는 과(寡)하다. 조롱과 해학(諧謔)으로써 임한다 하더라도 나는 피와 생명으로써 임하여야 할 것이다. 그러다가 다행히 이기면 사회와 돋거의 주권을 그네의 손에서 빼앗아서 내 손에 잡을 터이요, 불행히 천궁도최(天窮刀催)하여 지면 내 오체는 모반자의 비명(鄙名)하에 조작(鳥鵲)의 밥이 될 것이다.
 
31
상술한 사상과 그 중에 인용한 비유와 문자는 지금까지 민의 말에서 얻은 것이다. 민이 자기의 낡은 사회에 대하는 태도를 말할 때에 쓰던 것을 성순이가 지금 응용하는 것이다.
 
32
성순의 결심은 굳게 되었다. 원래 의지가 강한 계통인데다가 꽤 자각 있는 여자의 결심이라 좀처럼 변하지 아니할 것이다. 성순은 끝까지 이 결심으로 나아가리라 하였다. 그리고 성순은 자기가 민에게 대한 사랑을 검사해 보려 하였다. 지금토록 성순은 그것이 사랑이 아니라고 부정하려 하였다. 그러므로 될 수 있는 대로는 그것을 분석하려고도 아니하였고 더구나 이름을 짓는다든가, 그 정도를 알아 보려고도 아니 하였다. 그는 그러하기를 두려워하였고, 될 수만 있으면 잊어 버리기를 바랐었다. 그리하여 아무 풍파도 일으키지 말고 남들이 하는 것과 같이 평온 무사한 중에서 만사를 처리하여 가려 하였으며 그것이 교육하고 얌전한 여자의 마땅히 취할 길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행인지 불행인지, 그러한 시대는 다 지나갔다. 아까 회당에 가던 길에 전사관 학교 앞에서 민을 만나는 순간에 다 지나가고 말았다.
 
33
그때까지 성순은 어떤 전제 왕국의 일신민에 불과하였으나, 그때부터 성순은 이미 지존의 여오아이다. 만사를 자기의 지혜대로 정의대로 처결하여야 할 군주다. 그러니까, 그는 분명히 자기의 사상과 목적을 검사하여 볼 필요가 있다.
 
34
성순의 상상의 눈앞에 민을 세워야 한다. 그리고 극히 냉정한 눈으로 민의 안면의 각 선과 각 점과 어깨와, 가슴과, 다리와, 팔과, 손과 모든 것을 일일이 해부하여 보고, 다시 그 각 부분을 맞추어 일체를 성한 뒤에 전체를 조화며 심매트리며 색채며 하모니를 자세히 검사하여 보았다. 키는 중키, 얼굴이 좀 좁고, 콧마루가 날카롭고, 눈이 크고, 입술이 엷고, 이마가 넓고 희고, 귓바퀴가 투명하고, 말소리가 좀 여성답게 고음이지마는 괜찮고, 성질은 온화하여 나약한 듯 하면서도 속 깊이 굳센 힘이 흐르고 열정적이요, 천재적이요...... 이렇게 분석하였다가 종합하였다 한 끝에,
 
35
'내가 그의 무엇을 사랑하나? 그의 얼굴? 재주? 온화한 성질? 목소리? 입? 눈?'
 
36
이렇게 자문하여 보았다. 그러나 그것도 아니다.
 
37
'그의 조선을 사랑하는 마음? 아니 그것도 아니다. 모두 아니다.'
 
 
 

14.3

 
39
그러면 무엇? 그 모든 것을 다 모아 높은 '민'이라는 사람을 사랑한다. 그 얼굴, 그 성질, 그 재주가 오직 민의 것인지라 사랑한다. 그것을 하나씩 하나씩 떼어 놓으면 성순의 사랑을 끌 만하지 못하되 그것을 모아 놓은 민은 성순의 사랑을 끈다. 민은 결코 성순이가 분석하여 놓은 각 부분의 총화가 아니요, 그 밖에 또는, 그 위에 무엇이 있다. 그 각 부분을 총괄하는, 총괄한다는 것보다도 그 각 부분이 의존하는 즉 그 각 부분의 모체가 되고 원천이 되는 무엇, 그것을 영이라고만 하여도 불흡족하다. 영과 민이 합하여 되는 무엇, 민이라는 글자도 편이상, 대표하는 그 사람, 옳다, 그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다.
 
40
성순은 여기서 민의 말을 생각하였다.
 
41
'사랑에 세 가지 종류가 있다. 첫째는 그의 일부분에 대한 사랑이니, 가령 그의 품행이 방정한 것을 사랑한다든지, 용모의 미려, 재주, 구변, 또 세상에 흔히 있는 바와 같이 지위와 재산과 명예를 사랑한다든지 하는 것이 사랑의 일종이다. 그런데 이것은, 모든 사랑의 초계(初階)는 될 수가 있지마는 극히 근거가 빈약한 사랑인고로 그 사랑의 근고되는 그의 특장이 소멸하는 날이면 곧 소멸하는 것이니, 이것이 세상에서 항응 말하는 우정이죠. 둘째는 마치 죽마붕우라든지, 그렇지 아니하더라도 우연히 그의 전체를 사랑하게 되는 것이니, 이러한 사랑은 여간해서 변하지 아니한다. 그가 부할 때나 빈할 때나, 귀할 대나 천할 때나, 설혹 법률과 도덕이 온통 죄인이라고 내어 버리는 때까지라도 사랑하는 마음이 변하지 아니하나니, 이것이 고급의 우정(Friendship)이라, 이것은 세상 사람이 저마다 맛보지 못하는 것이요. 셋째는 고급의 우정에 존경과 열정을 가한 것이니 차종(此種)의 사랑은 항상 소유의 관념을 짝하는 것이라, 이것은 이성 간에 성립되는 것이니 곧 연애라. 그러므로 진정한 연애는 피차의 개성의 이해와, 따라서 나오는 존경과 애착의 열정과 영육이 일체가 되겠다 하는 소유의 요구로 성립되는 것이라......'
 
42
이렇게 말한 민의 말을 생각하고 성순은 과연 그렇다 하였다. 자기는 민을 안다. 존경한다. 애착한다. 일생을 같이 하고 싶다. 확실히 그렇다...... 하고 성순은 이에 처음 자기의 민에게 대한 사랑은 연애라 하는 단안을 내렸었다. 그리고는 자연히 가슴이 두근두근하고 숨결이 빨리짐을 깨달으며 혼자 빙그레 웃었다. 그러나, 박두한 문제를 어찌할까? 정월이 되면 변과 혼인식을 거행한다고 작정한 것을 어찌할까? 양반의 친척과 지구(知舊) 간에도 벌써 이럭저럭 약혼되었다는 소문이 난 모양인데 그것을 어찌할까. 이에 성순은 한번 더 한숨을 쉬지 아니할 수가 없었다.
 
43
물론 그것은 자기가 작정한 것은 아니요, 모친과 성재가 작정한 것이다가. 자기는 그 때에 약혼에 반대까지 하였다.
 
44
자기는 확실히, '나는 싫어요' 하였다. 그러나 그것으로 모든 책임이 다 면하여졌을까?
 
45
'나는 변과는 혼인할 수가 없읍니다. 내 지아비는 오직 민 뿐이외다. 어머니께서나 오빠께서 아무리 말씀을 하시더라도 저는 절대적으로 좇을 수가 없읍니다'
 
46
하고 이렇게 명확하게 말한 것도 아니요, 또 그 후 삼주일 간이나 넘도록 사건이 더욱 진행하여 가는 것을 보고도 자기는 찬성도 아니하였거니와 분명한 반대도 표시하지 아니하였다. 비록 마음으론 항상 불복한 생무 효력을 생(生)하지 못할 것이다.
 
47
(그러니까, 명조(明朝)에는 모친과 오빠에게 자기의 의견을 분명히 발표하여야 할 것이다. 분명히 발표하여서 그 의견이 서면 좋고, 아니 서면 단연히 선전을 포고하여야 할 것 이다. 모친과 오빠가 자기의 의견을 들으면 곧 성을 낼 것이요, 책망을 할 것이요. 그 다음에는 그 잘못됨을 타이를 것이요, 그리고는, 달랠 것이요, 그래도 아니 들으면 최후 수단으로 위협할 것이다. 성순은 그러할 줄을 잘 안다. 그러나, 자기가 이렇게 할 줄을 더욱 잘 안다. 아무러한 위협을 당하더라도 자기는 초지를 굽히지 아니할 줄을!) 성순은 이 이상 더 생각하려고 하지 아니하였다. 그렇게 난처하던 일도 큰 결심을 하고 나니 다 응히 해석됨을 보고 일종의 쾌감을 맛보았다.
 
48
그러나, 자기의 모반이 원인이 되어 가정에 대풍파가 일어나고, 모친과 오빠가 사회에 얼굴을 들지 못할 치욕을 느낄 것을 생각할 때에 슬펐다. 모친의 슬픈 눈물과 오빠의 비분하는 용모가 목전에 보일 때에 성순은 몸에 소름이 끼쳤다.
 
49
그러나, 한 사람은 결코 다른 사람(비록 그가 부모나 형제라도)의 체면이나 명예의 희생이 될 것이 아니다. 나는 내다.
 
50
내 사람이다. 모친의 성순도 아니요, 성재의 성순도 아니요, 오직 성순의 성순이다.
 
 
 

14.4

 
52
내가 사랑하는 모친이나 오빠에게 슬픔과 수치를 주는 것은 정(情)에 차마 하지 못할 일이다. 그러나, 민의 말과 같이 우리 조상이 부모나 가정을 위하여 자기를 희생하던 것과 꼭 같은, 또는 그보다 열렬한 의무의 염(念)으로 자기를 위하여서는 부모나 가정도 희생하여야 한다. 자기를 위한다 함은 자기로서 대표하는 신시대를 위함이니, 장래에 무한히 길 신시대와 무한히 번창을 자손은 부모보다도 중하다. 아니 모든 과거를 온통 모아 놓은 것보다도 중하다. 자녀를 부모의 소유로 아는 도덕은 결코 신시대에 깨칠 것이 못 된다. 민의 말과 같이 우리는 부모 중심, 과거 중심이던 구시대의 대신에 자여 중심, 장래 중심의 신시대를 세워야 한다.
 
53
그리하려면, 우리는 우선 구시대를 깨뜨려야 하고, 깨뜨리려면 깨드리는 사람들이 있어야 하고, 깨뜨리는 사람들이 있으려면은 맨 처음 깨뜨리는 사람이 있어야 한다. 민의 말과 같이 우리가 그 첫 사람이 되어야 할 것이다. 큰 전쟁의 첫 탄환이 되고 첫 희생이 되어야 할 것이다.
 
54
(옳다, 내가 구시대를 이기는 날까지 모친과 오빠에게 죄를 짓자.) 여기까지 생각을 하고 성순은 기쁜지 슬픈지 모르는 중에 어느덧 잠이 들었다. 깨어 보니 벌써 아침 볕이 창에 비치고, 같이 자던 성훈의 부인은 일어나 나갔으며 부엌에서 솥 부딪치는 소리와 물 쏟는 소리가 들린다. 성순은 자리에 누운 대로 작야(昨夜)에 한 것과 생각한 것을 한번 되풀이하여 보았다. 마치 여러 해전에 일어난 일 같고 꿈속에 일어난 일 같다. 그러나, 그것이 꿈이 아닌 꿈을 알 때에 성순은 빙긋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과려와 수면 부족으로 성순은 어찔어찔하고 머리가 띵하였다. 기운 없이 잠시 벽에 기대었다가 자리를 개고 라이온 치마분(齒磨紛)과 잇솔 담은 컵과 수건을 들고 방문 밖에 나섰다. 모친이 마루를 쓸다가 성순을 보며,
 
55
"무슨 잠을 그리 늦도록 자니?"
 
56
"어째 피곤해서-"
 
57
"눈이 벌겋구나. 아프지 않으냐?"
 
58
하고 성순의 얼굴을 본다.
 
59
성순은 모친의 시선을 피하는 듯이 앞으로 늘어진 머리털을 두 귀 밑으로 젖히며 마당으로 내려서면서,
 
60
"아니요, 아무데도 아픈 데는 없어요."
 
61
하고 이를 닦으면서 정신 없이 먼 산을 바라본다.
 
62
모친은 한참이나 귀여운 듯이 딸의 모양을 보고 섰다가 혼잣말 모양으로,
 
63
"참말 잠깐이다. 발버둥치면서 밥투정하던 것이 바로 어제 같은데, 벌써 저렇게 커다랗게 자라서 며칠 아니하면 시집을 가게 되었으니......"
 
64
하고 남의 딸이나 대하는 모양으로 혀를 툭툭 찬다.
 
65
성순은 모친에게 등을 향하고 서서 모친의 말을 들을 때에 말할 수 없는 슬픔이 복받쳐 올라서 이 닦던 손을 잠간 쉬고 멍하니 섰다가, 대야를 부엌에 가서 어멈한테 김이 무럭무럭 나는 더운 말을 한 대야 얻어다가 마당에 놓고 세수를 하였다. 그러고는 세숫물을 마당 뒤에 쌓인 눈더미에 쏟고 숭숭하게 구멍이 뚫리는 것을 우두커니 보고 있다가,
 
66
"추운데 왜 그렇게 섰니? 어서 들어가서 머리나 빗고 사랑에 나가 보아라. 오늘부터는 실험을 시작한다는데 네가 다 알아서 해야지- 이제는 네 오라버님 심부름도 몇 날 못 하게 되었다. 어서 들어와 머리나 빗어라!"
 
67
하는 모친의 말소리에 깜짝 놀라서 돌아서며 모친을 향하였다.
 
68
"오늘부터 실험을 시작해요?"
 
69
하고 성순은 놀라는 눈으로 물었다.
 
70
"너는 아직 모르니?"
 
71
"전 몰라요."
 
72
"어제 일본서 약이 건너와서 오늘부터는 실험을 시작한다고, 어젯 저녁에 네 오라범이 너무도 기뻐서 어쩔 줄을 몰랐단다."
 
73
"돈이 어디서 나서?"
 
74
"다 변서방 덕이지, 이제는 네 덕이다. 하하하하......"
 
75
"변서방?"
 
76
"그럼 그이가 돈을 내어서 일본에다 약을 부친 것이 어젯 저녁에 왔단다. 석유 상자만한 큰 궤에 넣어서 넓적한 쇠로 꽁꽁 동여서......"
 
77
이 말을 듣고 성순은 부지불각에 고개를 수그리며 한숨을 쉰다. 모친은 성순이가 기뻐 뛸 줄 알았다가 도리어 한숨을 쉬는 것을 보고 이상히 여겨서 크게 뜬 눈으로 성순을 보았다. 사랑에서,
 
78
"성순아, 성순아!"
 
79
하고 부르는 성재의 소리가 들린다.
 
80
선숭의 눈에서는 두어 방을 눈물이 무릎에 떨어졌다. 모친은 그 눈물의 뜻을 알지 못하고 다만 놀람으로 입을 크게 벌렸다.
【원문】14 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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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광수(李光洙) [저자]
 
  매일 신보(每日申報) [출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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