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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개척자(開拓者) ◈
◇ 15 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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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7년
이광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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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장

 

15.1

 
3
성순은 성재의 부름을 받아 사랑에 나아갔다. 사랑문을 열려고 할 적에 성순은 웬 까닭인지 모르는 눈물을 씻었다.
 
4
성재는 약궤에서 약병을 내어 병에 붙인 약명을 쓴 레테르도 보며, 탁자 위에 벌여 놓기도 하다가 성순이가 들어오는 것을 보고,
 
5
"오늘부터는 실험을 시작하게 되었다. 너도 기뻐해다오."
 
6
하고 어린애들이 가지고 싶은 물건을 얻었을 때에 하는 모양으로 기쁨을 감추지 못한다. 아직도 병후의 수척한 얼굴에 기쁜 웃음이 띤 것을 볼 때에 성순은 웃지 아니할 수가 없었다.
 
7
"이제부터-"
 
8
하고 성재는 커다란 약병의 싸개종이를 벗기면서,
 
9
"시작하면 설마 오는 삼월까지야 바라던 것이 성공이 될테지. 어째 꼭 될 것만 같다. 너도 오랫동안 나를 위해서 고생을 꽤 많이 했다. 지금까지는 감사하다고 말 한 마디도 아니 하였지마는 여태까지 밀려 온 것을 오늘 다 말한다."
 
10
성순은 성재에게 이렇게 정중한 언사를 들여 본 적이 없었다. 지금토록 어린애에게 젖을 먹이느라고 묵묵히 앉았는 성재의 부인만 보았다. 그러나, 성순의 눈이 교집(交集)하는 줄을 알 것이다.
 
11
성재는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약병을 죽 내어서 탁자 위에 벌여 놓더니 우두커니 그 앞에 서서 자기가 벌여 놓은 것을 물끄러미 본다. 한참 그리고 섰다가 돌아서는 성재의 얼굴에는 큰 만족의 빛이 보였다. 그에게는 오늘부터 자기의 오매(寤寐)에 못 잊던 실험을 시작한다 하는 생각밖에 아무 생각도 없었다. 더구나 귀신 아닌 성재라, 자기의 곁에 섰는, 자기의 동생되는 성순이가 작야에 어떠한 고통을 하였고, 지금 어떠한 번민을 품었는지를 알 리가 없다. 성재는 성재 자신의 일로 기뻐하고, 성순은 성순 자신의 일로 슬퍼한다.
 
12
비록 동기라 하더라도 역시 딴 개인이다. 성순에게 아직 자기가 없을 때에는 성순은 성재의 기쁨을 기뻐하였고 성재의 슬픔을 슬퍼하였다.
 
13
그러나, 성순은 벌써 분명히 자기를 찾았다. 사랑하는 오빠의 기쁨을 기뻐하기 전에 우선 자신의 슬픔을 슬퍼해야만 한다. 일점에서 상교하던 양 직선은 영원히 다시 상교하여 보지 못하고 무한으로 달아나고 말것이다. 성순과 성재는 이미 교점을 지난 양 직선이다. 형매(兄妹)라는 각도는 변하지 아니하면서도 차차 양 직선의 거리가 떨어져서 마침내 상망(相望)치도 못할 무한대의 거리에 달하고야 말 것이다.
 
14
"어떠냐, 이만하면 다 되었지?"
 
15
하고 성재가 성순을 볼 때에 성순은 빙그레 웃을 뿐이었다. 작야의 결심을 말하려던 용기는 다 스러지고 말았다. 그 오랜 실망과 슬픔과 노역과 병고 후에 처음 얻는 오빠의 기쁨을 차마 깨뜰릴 수가 없었다. 만일 자기가 지금 변과의 약혼을 부인한다면, 동시에 일어날 오빠의 심히 상태를 성순은 잘 짐작한다. 성순은 아무리 하여서라도, 비록 자기를 전부 희생하여서라도, 오빠의 기쁨이 오래 가게 하고, 오빠에게 용기와 격려를 주는 것이 자기의 의무화 같이 생각하였다. 그래서 흉중에 솟아오르는 천사만려(千思萬慮)를 다 억제하고 한번 더 성재를 향하여 웃었다. 그리고는 활발하게 탁자 곁으로 나아가,
 
16
"주정등에 주정 넣어 와요?"
 
17
하고 밑에 조근 주정이 남은 주정등을 흔들어 본다.
 
18
"응, 좀 넣어다 다오."
 
19
"그리고 시험관도 무셔와야지요."
 
20
하고 시험관 틀에 세워 놓은 시험관을 차례차례로 하나씩 쳐들어 본다.
 
21
"글쎄-"
 
22
"이렇게 먼지가 앉았는데...... 제가 가서 말갛에 씻어 와요 --"
 
23
하고 성순은 전에 하던 모양으로 주정등과 시험관을 들고 나아간다. 부인은 불쾌한 듯이, 아니 떨어지려는 어린애를 억지로 방바닥에 내려놓고 벌떡 일어서더니,
 
24
"그런 것도 꼭 누이가 해야 해요?"
 
25
하고 성재를 노려본다.
 
26
성재는 어이없는 듯이 픽 웃더니,
 
27
"글쎄, 왜 걱정이오?"
 
28
"누이가 시집가면 책상을 지고 따라가셔야겠지!"
 
29
성재는 안방에 들릴까 두려워 말소리를 낮추며,
 
30
"여보, 평생 그 모양일테요, 사람 좀 되어 보기 싫우? 글쎄, 어쩌잔 말이오, 응?"
 
31
"제가 언제 사람되어 보겠어요? 남의 행랑으로나 돌아다니지!"
 
32
하고 훌쩍훌쩍 울기 시작한다.
 
 
 

15.2

 
34
오랫동안 자던 팔각목종이 다시 돌아가기를 시작하고, 오랫동안 개켜 넣었던 꼬깃꼬깃한 실험복을 입은 성재가 아침부터 저녁까지 주정등 불에 실험관을 쬐이기 시작하였다.
 
35
실험관에서 나오는 악취 있는 기체를 내어 보내기 위하여 한길로 향한 들창이 자주 열리고, 마친 그 앞으로 지나가던 사람들이 의외의 악취에 코를 쥐고 달아나기 시작하였다.
 
36
성순은 이전이나 다름없이 아침마다 성재의 실험 기구를 정돈하여 주고 할 수 있는 대로 여러 가지로 조력도 하여 주었다. 그러나, 오후 네 시 반의 담화 시간은 없었다. 부인은 실험 시간 동안 실험실에 아니 들어오지마는 시간이 끝날 만하면 결코 성재의 방을 떠나지 아니하려 하였다. 이러한 일도 있었다.
 
37
"책을 좀 보겠으니 어린애를 데리고 안에 들어가시오."
 
38
"왜 내가 있으면 책이 안 보여져요?"
 
39
"좋은 방에 사람이 많이 앉았으면 정신이 모여야지...... 왜 그렇게 무슨 말을 곡해를 하오?"
 
40
할 때에는 성재는 성이 났다.
 
41
"그러면 가지요. 집에 있는 것이 그렇게 보기 싫으면 아주 가고 말지요."
 
42
하고 부인은 울기를 시작한다.
 
43
이러면 성재는 보던 책을 덮어놓고 자기가 안으로 들어간다.
 
44
부인은 진정으로 성재를 그리워한다. 진정으로 성재의 곁을 떠나기를 싫어한다. 전에도 이러한 정은 있었지마는 빈한한 생활이 싫은 것과, 천성으로 타고난 자만과 고집을 이기지 못하여서 친정에 가 있었으나, 친정의 가족들이 자기를 좀 냉대하는 것을 보고, 또 이번에 성재가 중병으로 앓는 것을 볼 때에, 역시 자기는 성재 밖에 사랑할 사람이 없고 의지할 사람이 없는 줄을 결실하게 깨달았다. 그래서 입으로 행랑, 행랑 하고, 성재와 자기와의 침실을 천히 여기고 수치로 여기면서도 다시 친정에 갈 생각도 아니 하고 아무쪼록 성재의 곁을 아니 떠나려 함이다. 그러나, 부인은 자기가 사랑하는 사람에게 대하여서까지도 정다운 양을 보일 줄을 모르고, 말이나 행동이나 다정하게 온아하게 할 줄을 모른다. 자기의 성미에 맞는 일이면 빙그레 웃기만 하고 말지 마는, 자기의 의사에 틀리는 일이면 곧 안색을 변하고 어기(語氣)를 높이며, 조금 심하게 되면 눈물을 흘린다.
 
45
그는 그처럼 속으로는 성재를 위하면서도 성재에게는 한번도 쾌감을 주어 보지 못하고 항상 반담을 산다. 자기는 모처럼 성재를 위하여 정성껏 무슨 일을 하였을 때에 성재가 불쾌한 빛을 보이면 심히 불쾌하여지고 반항심이 나고, 심지어 성재를 증오하는 마음까지 난다. 이리하여서 부인은 혼인 생활 십여 년에 하직 한번도 즐거움이라든지 가정의 재미라는 맛을 보아 보지 못하고 항상 불쾌와 반항과 증오의 생활을 보내었다. 더구나 성순이가 용하게 성재의 비위를 맞추어 가지고 하인들의 비위까지 맞추어 가는 것을 볼 때에 부인은 화증이 아니 일어날 수가 없었다.
 
46
모친도 부인에 지지 아니하는 고집통이라 가끔 고집이 충돌하여서 불꽃을 날리는 수도 있엇으나, 모친은 어버이의 관도를 차리고 부인은 며느리의 체면을 보아서 대사는 아니하고 말았다. 그러나, 모친은 며느리를 버릇없고, 철없고, 배운 것 없는 계집이라 하여 속으로는 천히 여겼고, 며느리는 모친을 무시하고 시골뜨기 고집스러운 할멈장이라고 속으로 밉게 여겼다. 만일 성순이라는 탄력 많고 명민(明敏)하고 부드러운 중개자, 조화자가 없엇던들 고부(姑婦) 간에는 지금토록 어떠한 상서롭지 못한 사건이 일어났을지도 모른다.
 
47
그러나 이렇게 성순이가 중개자, 조화자가 되는 것이 마치 자기보다는 품격과 지위가 훨씬 높음을 표하는 것 같아서 부인에게는 몹시 불쾌하고 미웠다. 그 중에 있어서 가련한 성훈의 부인은 마치 벨리에(白耳義)나 스위스(瑞西製) 모양으로 세계의 변국에는 아무 상관 없는 중립국으로 있었다. 이렇게 성격이 합하지 아니하는 개인의 일단이 무슨 인연으로, 무슨 목적으로 한 가정이라는 범위 안에 모여 있어서 주야로 대소의 비희극을 연철한다. 그네는 무슨 인연으로 모였는지, 또는 자기네의 공동한 목적이 무엇인지도 모르면서 즉 자기네는 어찌하여 한데 모여 살게 되었는지, 또는 무엇을 당할 양으로 한데 모여 사는지를 모르면서 그래도 서로 떨어지지는 못한다 하는 무의식적 단결하게 살아 가는 것이다.
 
48
그것을 생각하려면 생각할 만한 성재도, 이작 그것을 생각하리라는 생각도 없었고 또 실험관에 몰두하여 그러할 여유 더 없었다. 그러나, 그 단체의 일원되는 성순은 이미 혁명 사상을 품게 되어 언제 그것이 폭발할는지 모른다. 굉연(轟然)한 폭성을 들을 때에 그네는 응당 끽경(喫驚)함을 금치 못할 것이다.
【원문】15 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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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매일 신보(每日申報) [출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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