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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개척자(開拓者) ◈
◇ 2 장 ◇
카탈로그   목차 (총 : 21권)     이전 2권 다음
1917년
이광수
목   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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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장

 

2.1

 
3
성순은 성재에게는 없지 못할 사람이었다. 그는 그 오빠의 동생 중에서 가장 그 오빠의 사랑을 받았고 또 가장 그 오빠를 사랑하였다. 성재의 동생되는 성훈만 추축하여 늙은 부모와 성재의 마음을 아프게 할 때에, 성순은 발명에 열중하는 장형(長兄)과 부랑한 차형(次兄)을 대신하여 곧잘 부모를 위로하며 또 성재에게도 위안과 용기를 주었다.
 
4
가족 중에 성재의 이상을 잘 이해하여 만강(滿腔)의 동정을 성재에게 주는 이는 오직 성순 뿐이었다. 성재가 동경서 고등 공업 학교를 마치고 경성 다동(茶洞) 본집에 돌아왔을 때 에는 성순은 아직도 보통학교 삼년생 되는 십이 세 되는 계집애였다. 성재가 발명의 뜻을 품고 천신 만고로, 불완전 하나마 실험실을 꾸미고 들어앉음으로 부터 아무도 이 실험실에 들어오기를 허하지 아니하되, 오직 성순은 아무 때나 들어올 수 있는 특권을 가졌었다. 가만히 있지 않고 장난하다가 두어 번 쫓겨난 일은 있으되, 성순이가 학교에 갔다가 돌아와서 실험실에 들어올 때마다 성재는 만사 제지하고 웃는 낯으로 맞아서 한번 안아 주며,
 
5
"가만히 여기 앉아서 구경해라."
 
6
하였다.
 
7
칠 년 동안 꼭 이 모양으로 하여 오다가 금년 봄엔 성순이가 고등 보통 학교를 졸업하고 집에 있게 되매 범절은 그의 손에 다 맡기게 되어, 회계에 관한 사무, 서신 왕복에 관한 사무까지도 다 맡게 되었다. 성순은 영리한 처자요, 그 중에도 그 오빠의 성미를 잘 안다. 그러므로 성순이가 한 일에는 대개 다 만족한 뜻을 보이고 무슨 일이나 성순에게 부탁하면 안심이 된다. 성순이가 아직 졸업하기 전에 성훈에게 무슨 일을 부탁한 적도 있었으나 대판 약포(大阪藥哺)에 보내는 환전 백 원을 훔쳐 쓴 뒤로는 일체 성훈에게 부탁하기를 그치고, 자기가 몸소 가거나 그렇지 아니하면 반드시 성순에게 부탁하였다.
 
8
성순도 성재를 위하여 노고하기를 싫어하지 아니한다. 다른 사람이 보기에는 주야로 성재밖에 생각하지 아니하는 것 같이, 매사에 '동경 오빠'라고 부를 것이다.
 
9
그러나, 성재는 성순에게 한 약속을 이행치 아니하였다. 성순이가 보통 학교에 다닐 적부터 방학에 돌아와서는,
 
10
"성순아, 제가 고등 보통학교를 졸업하거든 동경에 보내 줄께."
 
11
하였고, 성순도 동무더러
 
12
"나는 고등 학교 졸업하면 동경 가."
 
13
하고 자랑하였다.
 
14
"동경 가면 무슨 공부할래?"
 
15
하고 성재가 물으면,
 
16
"나도 오빠와 같이 고등 공업 학교에 가지."
 
17
하고 소리 높이 불렀다. 누가 들어도 그 소리에 분기(忿氣)가 섞인 줄을 알겠다. 마당에 들어서니 사랑 대청에는 배반(盃盤)이 낭자하고 수십 명의 중로가 취안이 몽롱하여 이리 저리 쓰러졌으며 구석구석 둘씩 셋씩 기생들이 떼를 지어 모여 앉아서 남남(??)히 지껄인다. 객들은 서로 듣지도 않는 소리를 크게 지껄이며 뚱뚱한 함사과는 화려한 연석에 기대어 가장 만족한 듯이 객들의 지껄이는 소리를 듣는다. 그 지껄이는 말은 대게는 함사과에 관한 말이요, 함사과에 관한 말이면 반드시 함사과를 칭찬하는 말이었다.
 
18
"졸업하거든 시집이나 가지 공부는 무슨 공부─"
 
19
하고 거절하였고, 그러면 성순은 눈물이 글썽글썽해지며,
 
20
"싫어요, 나 시집 안 가요."
 
21
하고 빽 소리를 지르기도 하였다. 그러할 때마다 성재는 성순의 머리를 쓸어 주며,
 
22
"걱정말아라. 내가 유학시켜 주지."
 
23
하여 지금토록 성순에게 안심을 주어 왔다. 그러나, 연해하여 온 실패에 금년에 이르러서는 진실로 성순을 유학시킬 자력이 없이 되었다.
 
24
언젠가 한번 실험실에서 네 시 반 담화 시간에 형매(亨妹) 간에 이러한 담화가 교환된 일이 있었다 (그 때에는 참 고통이 되더라고 수일 후에 성재가 성순에게 회억담(回憶談)을 하였다).
 
25
"얘, 이제는 졸업을 하였으니까 동경 가고 싶은 마음이 있겠구나?"
 
26
하는 성재의 말에 성순은 손가락을 한참 물어 뜯다가,
 
27
"가게 되면 가고 못 가게 되면 말지요."
 
28
"내가 이렇게 실패만 하여서, 너를 유학시킬 자격이 없구나."
 
29
하고 성재는 성순의 낯빛을 보았다. 거기는 분명히 실망의 비애가 드러났으며, 이것을 보는 성재의 심정은 참 아팠다.
 
30
"일 년만 참아라. 설마 금년 안에야 성공을 못하랴. 명년 사월 학기에는 기어이 동경에 보내 주마."
 
31
하였다. 그 후의 실험의 결과를 보건대 명년이란 말도 신용은 아니 되지마는 억지로 오빠의 말을 믿고 지금까지 온 것이다.
 
 
 

2.2

 
33
이렇게 말하면 성순은 오직 동경 유학하기만 위하여, 그 오빠를 위하여 힘쓰는 것 같지마는 결코 그러한 것은 아니다. 사람이란 잠시라도 사랑하는 것 없이는 못 사는 동물이니, 사랑할 사람이 없으면 무슨 물건이라도 사랑하고 배긴다. 성순은 어머니의 사랑을 떠나게 된 후로는 그 오빠되는 성재를 사랑하였다. 성재에게 대한 성순의 사랑은 그에게 마땅히 올 사랑할 사람, 즉 그의 지아비된 사람이 나서기까지는 변치 못할 것이다. 여자란 점점 성숙하여 갈수록 어머니나 동생 되는 동성의 사랑으로는 만족하지 못하고 반드시 이성의 사랑을 얻고야 만족한다. 그래서 품행 방정한 처녀들은 지아비되는 사람을 만나기까지 그 오라비에게 대한 사랑으로 생명을 삼나니, 오라비 없는 처녀가 흔히 침울한 것은 이 때문이다. 그러므로 성순이가 성재를 위하여 전력을 다하는 것은 오직 이러한 중류의 애정에서 나왔다 함이 마땅하다. 어찌 처녀만 그러하리요. 남자도 거의 마찬가지다.
 
34
이렇게 성순은 진정으로 자기를 생각하여 주건마는 성재의 마음에는 성순에게 대한 약속을 이행하지 못하는 것이 항상 찔렸다.
 
35
성순에게 대한 걱정뿐더러 부모에게 대한 걱정도 있고 동생에게 대한 걱정도 있었다. 더구나 빈가의 장자로 태어나서 일생을 고생으로 지내온 늙은 부모를 생각할 때에 자기가 그 부모에게 여년(餘年)의 낙을 드리지 못하고, 도리어 (비록 좋은 일을 위함이라 하지 마는) 가산을 기울여 노부모의 마음에 걱정이 아니 떠나게 하는 것이 어떻게 송구하고 가슴 쓰린 일이랴. 먹을 것을 먹지도, 쓸 것을 쓰지도 아니 하고 한푼 한푼 모아 각고 육십 년에 깨끗한 집간이나 땅마지기나 장만하여서 장차 안락한 여생을 보내려 할 때에 성재 자기는 유학하느라고 근 십 년 정성(定省)을 궐(闕)하고 졸업이라고 한 뒤에 칠 년이 넘도록 자기는 수만원의 재산을 시험관의 연기로 화하고 말아, 여간한 땅지기 집 문서까지 빚쟁이의 손에 들었으니, 자수로 성가한 노부모의 심통이야 그 얼마나 하냐. 그러하더라도 노부모가 자기의 사업이나 완전히 이해하고 주었으면 얼마라도 안심이 되련마는, 노부모의 낡은 사상으로 아무리 설명을 한다 하여도 이해할 길이 만무하니 성재의 마음은 더욱 고단할 것이다. 그 부모는 다만 성재의 착실하고 방정함을 알므로 전 재산의 사용권을 온통 성재에게 맡겨서 일가의 흥패를 성재의 쌍견(雙肩)에 지우고 말았건마는, 그래도 날로 줄어 들어가는 재산을 보고는 결코 안심될 리가 없는 일이다. 월전 최후 수단으로 가대 문권(假貸文券)을 전당할 때에 성재의 부친은 참다 못하여 약주를 취하게 먹고 성재를 불러 부득요령하는 분풀이를 한바탕 하였으며, 그 모친은 곁에 서서 주름 잡힌 얼굴에 눈물을 좔좔 흘렸다. 그러나, 자식이 하여 오던 사업을 중도에 좌절케 하기도 차마 못할 일이요, 또 사대 문권을 잡히는 함사과(咸司果)는 세의(世誼) 집일뿐더러 수십년 전에 자기의 은혜를 진 사람이나 설혹 기약이 넘어간다 한들 다른 채권자와 같이 강제 집행을 한다든지 할 리는 없다 하여, 얼마큼 안심도 된다 하여 가대 문권을 내어 주었다.
 
36
주기는 주었으나 그래도 분하여서 술김에 한 바탕 분풀이를 한 것이다.
 
37
이런 일 저런 일 생각할 때 성재의 마음이 잠시나 편안한 이유가 있으랴. 처음 졸업하고 올 때에는 아직도 일개 서생으로 다만 이상에만 살아났건마는 차차 낫살이 많아지고 실사회의 경험을 하여 옴을 따라서, 단순히 이상 하나로만 살아가지 못할 줄을 알았다. 부모에게 대한 의무, 형제에게 대한 의무, 차차 자라가는 자녀에게 대한 의무, 이러한 것이 차차 무겁게 양견을 누른다.
 
38
실험실 속에 어찌 실사회가 들어오랴 하련마는 지구를 버리고 천상으로 날아 올라가기 전에야 어디를 간들 실사회의 풍파가 아니 미치랴. 유리창 한 겹을 열면 실사회요 십여 보를 나아가면 종로 거리다. 성재의 실험실에도 아침부터 저녁까지 실사회의 고민 번뇌가 창틈과 벽틈으로 꾸역꾸역 들어온다. 시험관을 들고 앉았을 때에는 모든 것을 다 잊어 버린다 하더라도, 주정(酒精) 불이 턱 새지가 세상의 천사만려(千思萬慮)가 성재의 가슴을 누른다. 성재의 피난처는 실로 시험관과 성순과 둘 뿐이다.
 
 
 

2.3

 
40
실로 성재의 책임은 너무 중하다. 수다한 식구의 활계(活計)가 이제는 전혀 성재의 손에 달렸다 할 수밖에 없다. 가족이 일생에 먹을 것을 성재의 손으로 온통 시험관에 넣고 말았으니 이제는 그것을 시험관에서 다시 찾을 수 밖에 없이 되었다. 만일 성재의 계획이 성공이 되어 목적한 발명품이 여러 나라의 전매 특허를 얻고 경성에 그 특허품을 제조하고 큰 공장이 서는 날이면 성재의 몽상한 바와 같은 결과를 얻을 수도 있지마는 만일 아주 실패하는 날이면 성재의 일가족은 거지가 될 수 밖에 없다. 이러한 생각을 할 때마다 성재는 몇 번이나 심화를 내었으며, 몇 번이나 장애게 대한 공포에 눌려 시험관을 온통 깨뜨려 부수고 온다 간다는 말 없이 달아나려는 생각을 가졌으냐. 지난 사월의 대실패 때에는 속리산에 들어가 중이 되어서 일생을 보내리라는 결심까지 하였다. 그때에도 성순더러 농담삼아,
 
41
"성순아, 나는 멀리로 달아날란다."
 
42
"예?"
 
43
"멀리로 달아나고 말 테야."
 
44
"왜요?"
 
45
"하려던 것이 되지는 않고, 부모에게 걱정만 끼치고...... 그러느니보다 산간에 들어가서 중이나 될란다."
 
46
"에그, 왜 또 그런 말씀을 하셔요."
 
47
"내가 만일 성공만 하면, 만인에게 이익을 줄 것이지만 실패하는 날에는 곯을 사람은 나 하나 밖에 없을 것이다. 내가 비록 세상을 위하여서 재력과 정력을 다 허비하고 죽어 버린다 하여라도 내 계획이 성공만 못 되고 보면 세상이 그 공로를 알아 주기나 할테냐. 세상이란 자기네에게 당장 은택(恩澤)을 주려고 전심력을 다하다가 실패한 사람에게는 수고했다는 말 한마디도 아니하여 주는 법이다. 고래로 성공을 얻어서 세상의 감사와 존경을 받는 자도 많건마는, 애만 쓰고 마침내 실패하여서 세상에서는 왔다간 줄도 모르는 사람이 더욱 많을 것이다. 그러한 가운데 내가 성공에 달하는 운수를 만나기가 그리 용이할 것이냐!"
 
48
이러한 말을 들을 때에 성순은 변론으로 그 오빠를 설복하려 하지 아니한다. 변론으로야 성순이가 성재를 당할 뻔이나 하랴. 영리한 성순은 이러한 경우에 쓸 무기가 무엇인 줄은 잘 안다. 그래서,
 
49
"못합니다, 아무데도 못 가십니다. 가시려거든 시험하던 것을 성공하고 가셔야 합니다. 그렇지 아니하면 나는 어디까지든지 오빠를 따라가서 실험실로 붙들어 올 터이야요. 저 시험관에서 오빠가 바라는 결과가 날 때까지는 언제든지 몇 번이든지 나는 따라가서 붙들어 올 터이야요."
 
50
'의지의 사람'이란 별명을 듣는 성재도 이 무기에 대항할 만한 의지는 가지지 못하였다. 그 차디찬 듯한 성재의 흉중에도 따뜻한 애정에 감동하는 무엇이 있는 것이 참 신기하다. 이리하여 성재는 새 용기를 얻어 가지고 다시 시험관을 들고 앉았다.
 
51
(성공하면 세상 일, 실패하면 내 일.) 이러한 생각으로 날마다 실험실 사람이 되었다. 거지가 되면 되고 성공이 되면 되고 아무려니 시험관과 사생 결단을 할 작정이다.
 
52
지나간 칠 년 동안에 실패에 실패만 겸하였지마는 그래도 경험도 많이 쌓았고 지식도 많이 얻었다. 날마다 시험관을 들고 앉았으니까 실험하는 수완도 매우 숙련하게 되었다.
 
53
이만한 지식과 이만한 숙련을 가졌으면 어디를 가든지 매삭 육칠십 원 월급은 받을 것이요, 얼마간 지나서 진수완만 알아주게 되면 돈 백 원 월급은 무려하게 받을 것이다.
 
54
작년 추기에는 경성 공업 전문 학교의 초빙함을 받았고, 금년 사월에는 연희 전문 학교의 초빙을 받았다. 더구나 신설되는 연희 전문 학교에서는 실로 비사 후폐(卑辭厚幣)를 가지고 청하였건마는 실력이 부족하다 함이 교수에 뜻이 없다는 이유로 다 사퇴하였다. 성재의 뜻은 결코 백 원이나 이백 원의 월급에 있지 아니하다. 그가 칠 년 전에 정한 목적으로 더불어 일생을 마칠 것이다. '나는 이 일을 위하여서 세상에 났다. 그러하니까, 이 일을 위하여서 세상에 살아야 하겠다'하는 것이 성재의 결심이다. 아니, 결심이라기보다 신념이요, 신앙이다.
【원문】2 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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