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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영일의 사(死) ◈
◇ 제1막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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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1.7
조명희
목   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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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김영일의 사[死]
 
 
2
• 서사
 
3
무궁(無窮)으로부터 무궁으로 이는 때의 실마리 영겁(永劫)으로 영겁으로 흐르는 생명의 물결. 그 사나은 바다 위에 한갓 붉은 살덩이로 싸워나간 자, 오직 인생이 아닌가? 열화보다 더운 생명의 불꽃, 홍화보다 붉은 뛰는 피, 진리의 궁전으로 애의 왕국으로 쉬지 않고 돌진하려는 힘. 한갓 인생의 휘날리는 행진기가 아닌가? 흐르는 물, 사라지는 빛, 달아난 구름, 치는 물결, 바람은 몇 번이나 일며 꽃은 몇 번이나 졌노? 아침 볕에 뛰놀고 지는 해에 울며 감람수하(橄欖樹下)에 단꿈이 뒤눕는 윤회선풍(輪迴旋風)에 사라져 굴리는 비희극의 필름이 쉬일 새가 있으랴. 사람은 사람과 싸우고 자기는 자기와 싸워 영은 육에 대하여 전쟁하고, 육은 영에 대하여 전쟁하여 싸우고 싸워, 쉬지 않는 전쟁이 그칠 날이 있으랴. 생은 비극, 인세(人世)는 전쟁장, 사람은 전사, 사람은 아니 싸우지 못할 운명을 가졌나. 구극 운명에 대한 악전이 아닌가. 악하기 사갈(蛇蝎) 같은 무리는 명리(名利)의 항(巷)에 출몰하고 추하기를 돌 같은 무리는 육의 향기에 취하여 잠들었다. 약하고 불쌍한 사람은 모진 칼날에 넘어지고, 순결하고 착한 사람은 쓰레기통의 빵조각도 구할 수 없으니, 이것이 사람의 죄인가? 운명의 죄인가? 또는 세상의 죄인가? 이것이 언제까지 이러고 말 것인가? 아니다, 아니다. 우리는 의분의 피가 끓고 정의의 기가 날리며 인도(人道)의 길이 열릴 때에 우리는 푸른 하늘을 가리켜 맹세하고 땅을 구르며 부르짖음. (사이) 거칠은 조수, 함부로 들이미는 이때 암흑의 구덩이에 부르짖던 김영일은 과감하게 운명과 싸움하며 자기 신생을 개척하려고 움집의 병든 어머니와 우는 동생을 두고 멀리멀리 부상(扶桑)에 고학 서생이 되었다. 때는 눈바람치는 2월 하순 물질에 울고 영에 애끓던 그 나약한 팔뚝, 뛰는 핏줄기, 싸우고 싸우던 그이니 세상 학대로 필경 사의 함정에 빠져 비참한 최후를 마쳤으니 이것은 그가 약한 죄인가? 운명의 죄인가? 또는 세상의 죄인가? 그 죄는 반드시 짊어질 자가 있어야 할 것이오. 그것은 세상사람 판단에 맡기고 이 한 폭 인생의 비극을 여기에 뵈임.
 
4
• 시대  현대
5
• 장소  동경
 
6
• 등장 인물
7
김영일  (金英一; 고학생)
8
박대연  (朴大淵; 김의 벗)
9
이춘희  (李春熙; 동)
10
전석원  (全錫元; 김의 지인)
11
장성희  (張星熙; 전의 벗)
12
오해송  (吳海松; 동)
13
최수일  (崔秀日; 동)
14
하녀
15
순사
16
형사 2인
17
의사
 
 

1. 제 1막 [제1장]

 
19
2월 하순 어떤 날 아침 김영일의 셋방, 무대 좌측으로 통행문이 있고 중앙면으로 두 쪽인 들창 장자[떨어진 구멍을 인쇄물인 종이로 바른 것]가 있고 창 반면에는 아침 볕이 비쳐 있다. 그 창을 열면 멀리 보이는 소구삼림(小丘森林)의 활엽 상록수가 아침 볕을 받아 은은히 빛남이 보이게 되었다. 그 창 앞 중앙면으로 헌 책상 3개가 놓였으며 그 위에 책과 필통 등이 약간 놓여 있고 그 옆으로 값싼 북 케이스가 있고 드러난 붕내(棚內)에는 헌 책과 몇 가지 새 책이 많지 않게 옆으로 세워 있다. 그 케이스 위에는 값싼 석고소상(石膏塑像) [로댕의 판스루]이 놓이고 그 위 벽에는 삼색 판화 2매, 다리에 서서 연인 베아트리체를 기다리는 시성(詩聖), 단테[Ecce Homo]와 형관(荊冠) 쓴 그리스도가 붙어 있다. 그 옆으로 화복(華服)이 걸려 있다. 방 중에는 숯불 약간 담긴 화로가 놓여 있다. 무대 후면으로부터 아침 두부장수의 피리소리가 나며 그 이웃집 문 여는 소리 들리자 ‘오하요’ 두부장수의 아침 인사 소리가 난 뒤에 피리소리 다시 연하게 나며 멀어져 간다.
 
 
20
김영일이 신문배달부 옷을 입고 급보로 등장.
 
21
김영일  (어정어정 걸어 책상 앞으로 나와 서며 품 속에서 지갑을 꺼내어 그 속에 지폐를 세어 보더니) 89원이로군! (쇠돈 소리나며) 또 잔돈 얼마! (또 지갑 속으로 명함을 이리 뒤적 저리 뒤적거리더니 경악한 어조로) 전석원? (고개를 끄덕이며) 아아, 이것이 전석원, 이것이야! (잠깐 무슨 생각을 하더니 좀 증오스럽고 분한 표정으로) 고약한 놈! 이따위 놈의 재물은 먹어야지. (돈과 명함을 지갑에 넣고 품 속에 집어 넣으며 두 손으로 팔짱을 끼고 무선 생각을 잠깐 하더니 방 안으로 왔다 갔다 하다가 우뚝 서서 벽을 바라보며) 남의 재물을 먹어! 전석원의 재물을. (벽을 바라보고 침묵. 고개를 옆으로 끄덕거리며 흥분한 어조로) 이것이 전석원의 소유가 아니라 신의 소유이다. 신의 아들은 다 같이 먹고 살라는 것이니까 나도 먹을 권리가 당당히 있다. (다시 왔다갔다) 먹어? 그러나 말없이 먹는 것이 좀 부정당하지. 더군다나 법률이 이것을 알면 용서 아니 할 터이지. 그러면 좌우간 옳지 아니 할까? (00 정보. 높은 어조로) 아니 옳지 않다 함은 지금 세상에 00 말, 눈뜨지 못한 사람들이 사슴을 말이라고 가리켜 놓은 00 다. 예수의 말씀이 권세 가진 자에게 복종하라고. (000 어조로) 권세는 하나님이 정한 것이라고, 이것은 반대다. 반대, 내가 아무리 크리스찬이지마는, (침묵. 왔다갔다) 그러나 말없이 먹는 것이 떳떳진 못해. 아무래도 무엇을 속이는 것 같애. 남을 속이는 것, 원래 세상에 행복이라든가 명리라는 것은 제 마음을 속이고 세상에 아부하는 여우 같은 놈에게 돌아가더라. 사람다운 사람은 손톱만치도 아니 돌아오더라. 나도 공연히 고결한 체만 하고 고생만 하지. 그러다가 죽으면 무엇이 나은가. (우뚝 서며) 주저할 것없이 먹지. (결심한 모양으로 입을 악물으며 고개를 끄덕이며) 먹어라, 먹어. (가서 책상 위에 걸터 앉으며 두 손으로 이마를 만진다) 아, 아, 두통! (침묵, 거울을 집어 얼굴을 보며) 오늘은 화장도 아니하였다. (책상에 내려 앉으며 서랍 속에서 크림을 꺼내어 들고 빙그레 웃으며) 내가 비록 신문배달을 하여 가며 먹기에도 곤란하지마는 이때껏 화장료는 떨어진 때가 없었다. (거울을 세우고 크림을 바르며) 아-아, 내 얼굴이 어찌하여 이렇게 쇠하였나? 작년쯤 해도 남들도 미남자, 미남자라고 일컬었는데 그만 그 몹쓸 고생에 응-. (크림병을 방바닥에 홱 집어 던지며 비웃는 표정으로) 지금 세상에 소위 더러운 불순한 연애란 것은 돈이 있어야 한다나? (두 손으로 후방 방바닥을 짚고 앞 벽을 바라보다가) 두통은 또, 아이고 어지러워라, (손으로 머리를 받치고 앉았다가 옆으로 쓰러져 눕더니 다시 기운없이 일어나며 한숨을 연다)
 
22
아하, 요전 새벽 신문배달인지 무엇인지 때문에 경사지 빙판에서 몹시 자빠져 다친 뒤로는 몸에 딴 신병이 더 생겼어. 이러다가 내가 죽을 날이 언제일는지 모르겠다. (우수로 얼굴을 고이고 눈을 감는다. 잠깐 있다가 눈을 뜨며) 아 참, 최수일 최수일, 그 사람 보아! 그 사람도 처음에 꽤 팔팔하고 유망하여 보이더니 그만 그 지긋한 고생 끝에 중병까지 걸리어 지금은 눈자위가 해멀겋고 무감각한 산 송장같이 되었어. 약한 인간의 힘으로 간악한 운명의 힘을 당할 수 있나? 몹쓸 운명! 아 무서워, 몹쓸 운명! 아 무서워, 진저리쳐져. 오, 그 무서운 시커먼 그림자! 세상 일이 다 식은 잿더미같다. 죽기 전에 제멋대로 하고 살지. 휘-. (한숨을 쉬며 고개를 떨어뜨린다. 한참 있다가 벌떡 일어나며) 이 돈 가지고 잔치나 굉장히 한번 하여야 할 터인데 이 사람들은 언제나 올라나. (창 앞으로 가 서며 창문을 열고 바깥을 내다본다. 일광은 그 얼굴과 방바닥에 들이 비친다) 아-아, 저 일광! 비록 겨울일망정 저 상록수 숲 나무 잎 위에 빛나는 저 일광! 춤추는 저 일광! 세상이 과연 아름다운 것이다. (두 손으로 일광이 비친 얼굴을 만지며 감탄한 어조. 시 읊는 어조로) 오, 따뜻한 태양이여, 자비 깊은 어머니여, 그는 부드러운 손으로 나를 쓰다듬어 주며 따뜻한 입으로 내게 입맞춰 주다. 오 거룩한 그는 그는…….
 
23
(감격하고도 감상적인 표정으로 작가 무대면을 돌아보며 다시 고개를 돌려 여전히 한참 바라보다가 창을 닫고 돌아서며) 에…… (혀를 차며) 저……어찌하여 마음이 깨끗치가 못하다. (고개를 숙이고 침묵, 고개를 옆으로 흔들며) 아무래도 이 일이 사나이다운 일은 아니야. 정대한 일은 아니야. 나는 암만 하여도 그 속중들과 같이 그렇게 흐리터분하게는 살 수 없어. (어조를 높이며) 떳떳하게 살아 나가는 것이 옳아. 사나이답게. 세상이란 참 더럽더라. (주먹으로 때리는 형용을 하며) 모든 장애의 성벽를 깨치고 애의 앞으로 진리의 앞으로 ……. 이 세상에 가장 큰 환희는 혈전하는 속에 있을 것이다. 세상에 미운 허위, 교사, 더러운 구차, 타협……. (침묵, 왔다갔다) 그러나 나도 철저치는 못하다. 조그만치라도 허위도 있고 악도 있다. 그러나 속중들과 다른 것은 내가 조그만치라도 나쁜 일을 하고 나면 내 영혼에게 위대 진실한 마음에게 가책을 받는다. 나는 언제까지든지 이러고 말 것인가 아니다, 아니다. (주먹으로 가슴을 치며 주먹으로 공중을 치며 팔짱을 끼고 왔다갔다 홱 돌아서며) 에이! 돈은 갖다 주자. 그리고 떳떳이 달래서 쓰자. 그게 옳은 일이다. 00 다운 일이다. (벽에 걸린 화복을 배달복 위에 그대로 껴입고 속보 퇴장)
 
 
 

2. 제1막 [제2장]

 
25
동일 야, 동 장소, 박대현, 이춘희 등장. 3인은 다 남루한 화복을 입고 헌 캡을 썼다. 朴은 키가 크고 열정적인 인물, 당당한 품격을 가졌다. 李는 그 반대로 온화한 성격을 가졌다. 책보에 무슨 궐련상자 같은 것을 싸서 들고 힘없이 후줄근한 모양으로 들어오며 추운 기색이 완연하다.
 
 
26
박대연  (들어오며) 아, 어두워라. (전등 앞으로 가서 스위치를 틀어 불을 켜고 소포를 슬며시 옆에 던지고 털썩 주저앉으며 한숨을 쉰다.) 휘-참, 이 노릇 어디하여 먹겠나. 공부도 변변히 못하고 외상 고생만 하지, 어, 창피스러워 다시 엿 팔러 다닐 놈은 생겨나지도 아니 하였다. 이 고생이 누가 시키는 무리한 고생이야? 에…….
 
27
이춘희  (朴을 대하여 앉으며 화로를 끌어 집어 당긴다.) 아, 추워 화로에 불도 없네 그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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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대연  오늘 두 사람 틈에 부은 돈이 겨우 2원일세 그려. 전차 삯 30전 제하고 우동값 40전 제하고 보면 남을 것이 겨우 90전일세 그려. (바깥을 훌쩍 쳐다 보더니) 구름낀 것 보니까 비나 눈이 또 오려나 보다. 동경은 어서 그리 일기가 자주 변하는지. 비나 눈이 또 오면 내일은 벌이하러 나갈 수도 없겠지. 90전이 있으니까 내일은 굶진 않겠다. 두 끼쯤은 고구마나 사 먹고 설마 굶어 죽진 아니할 터이지. 그런데 엿은 3분의 1밖에 못 팔았어. 그러고 나는 이 노릇 못하여 먹겠네. 차라리 인력거를 끌지. (침묵, 얼굴을 무대면으로 향하여 분개한 표정으로) 사람이 먹으며 함은 살려 함이요, 살려 함에는 생의 심중 광대한 요구가 있겠는데 지금 세상은 먹을 것에 도리어 압박 구축을 당하니 이것이 뉘 탓이야? 뉘 탓! 살려는 운명을 타고 나서 살지 못하게 함이 무슨 까닭이야? 무슨 까닭?
 
29
이춘희  그런 줄이야 누가 모르겠나마는 당장 우리 처지를 생각하여 보게. 대관절 공부나 잘 되어야지. 월사금이 있어야 학교를 가지. 돈이 있어야 책을 사 보지, 시간이 있어야 책을 보지.(어조를 높이며)
 
30
박대연  돈 있는 사람이라고 공부 다 잘하는 줄 아나? 지금 세상 돈이란 것은 없는 사람은 지질지질히 학대하고 너무 있는 사람은 돈에 중독이 된다네. 있는 놈은 살쪄서 영을 죽이고, 없는 놈은 굶어서 육신을 죽인다네.
 
31
이춘희  (창문을 바라보고 휘파람 불다가 방 안을 휘-돌아보며 화로 속에서 궐련 깜부기를 주워 피워 문다.) 담배를 오래 줄였더니 그 깜부기도 매우 맛이 좋다. 이 사람 영일이 그저 아니오네 그려. 석간 신문은 벌써 다 배달하였을 터인데 마음이 상하여 축겠다고 하더니 필연 어디로 간 것이야. 요전에도 가을 밤에 도야마하라(戶山原) 가서 잔디밭에 혼자 엎드려 울고 있는 것을 보았더니. 아. 그 사람이야 참 딱하여.
 
32
박대연  영일의 사정 이야기를 들이면 참 불쌍하지. 영일이 아버지가 일찍 죽었다네. 그 사람이 형제요, 손아래 누이 하나니, 그 어머니가 영일이 어렸을 때 홀로 되어 장성한 아들이라고는 영일의 백씨 하나 데리고 살아 나가다가 재작년 봄에 유행성 감모에 걸리어 죽었다네.
 
33
이춘희  그때, 그 집 참상이 어떠하겠나. 집 꼴이 어찌 되겠나? 영일이가 서울서 다니던 학교도 중도에 그만 두고 집에 와서 남의 땅마지기 얻어 가지고 농사를 지어, 아니 하여 보던 생 일을 다 하였었네. 그 해 1년 그러하게 지나가고 자기 집 사정도 어렵지마는 암만 하여도 공부는 하여야 하겠다고 단연히 마음을 먹고 작년 봄에 여기를 건너오지 아니 하였나? 아이고, 그 영일이 떠나올 제 그 모자의 이별하는 모양이라니.
 
34
박대연  그러면 그 집은 어찌 지나가고? 영일이도 없이.
 
35
이춘희  그러니 말이지, 그 모녀가 남의 박토 마지기 얻어 가지고 농사지어 살아 나가자니 말할 수 있나. 그러하기에 영일이 0 동경 온 뒤에도 자기 집 생각을 하고 마음 편할 날이 있00 더구나 자기 역시 고학을 하여 가며……. 정신 고통과 00 고통이 겹겹이 에워싸고 과도한 피로 끝에 신병이 0000 니하였나? 요사이 그 사람 얼굴 보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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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대연  참, 무던히도 박운한 사람이 지긋하게도 고생을 해, 00 마음이 어진 까닭으로 더 한층……, 세상 과연 박정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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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춘희  그 사람 찬 진기한 이야깃거리 있나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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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대연  무슨 일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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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춘희  바로 오늘 아침 일일세. 신문 배달하고 오는 길에 지갑을.(말을 마치지 못하여서)
 
40
박대연  응, 그 이야기는 나도 들었지. 그 놈 가면 쓴 도적놈! 제 집은 만석 추수나 한다데 그려. 어려운 사람 사정을 조금도 모르고 겨우 돈 10원을 떼어 주더라지. 그래 영일이가 도로 집어던지고 왔다네 그려. (분개한 어조로) 아, 그 사람 영일이가 약한 사람이야! 지금 세상에 없는 놈이 있는 놈에게 그렇게 약하게 센티멘털로 애원하여! 그저 눈부리고 주먹 쥐고 을러야지. 테러리즘을 써야 해. 종교가가 아무리 설교를 하고 예술가가 아무리 비극을 그려낸다 하여도 그들 똑같은 야인들이 휴머니티가 살아날 줄 아나? 다 소용 없어. 소위 기독교적 사회주의니 무저항주의니 하지마는 그렇게 부드럽게 ……. 다 소용없네. 인간이란 것을 그처럼 믿을 수 없는 것이야. 야소(耶蘇)의 말씀이 “칼 집고 일어선 자는 칼로 망한다“ 하였지마는 그것도 한 진리인지는 모르나 지금 당장 사람이 모두 굶어죽지 않나? 그저…….
 
41
이춘희  그 석원이가 우리 회에 중요 임원이 아니겠나? 처음에는 무슨 사상도 있는 듯싶고 주의도 철저한 듯싶더니, 차차 알아보니까 멀쩡한 허위자야. 그 우리가 찾아가면 싫어하는 눈치가 뵈이지 않나? 아마 없는 놈은 무슨 없는 내음새가 나는 모양이야.
 
42
박대연  옳다, 옳다. 네 말이 옳다. 없는 놈은 없는 내음새가 속중의 코에는 반드시 맡아진단다. 그러한 야인들만 무리하게 나무랄 것이 아니야. 그 저, 아, 그 全가 말이지. 제법 무슨 사상이나 있는 듯싶기에 중임을 맡겼더니 주둥이만 살살 까고 무엇 진심껏 하는 것 보았나? 요사이 그 따위 놈들은 모두 명리나 얻으려고 살살 주둥이만 까고 인기나 얻으려고 돌아다니지 않나? 그 따위 놈들은 이 사회에서 한편으로부터 몰아내어 쫓아야지. 그래도 그런 일을 하자면 주의가 철저하고 의지가 굳세야 하자! (힘을 들여) 울고 부르짖는 소리를 듣고 끓는 피, 흐르는 눈물을 뿌리며 모든 불합리한 우상을 깨치고 진리의 앞으로, 진리의 앞으로 나가자는 감격성이 있어야지. 뜨거운 핏속에 흐르는 인스피레이션이 있어야지. 승냥이 같은 부정의 비인도한 소위 교활한 영웅이란 놈들. 지나(支那)의 원세개(袁世凱) 같은 놈들 거머리(蛭) 뱃속같이 창자도 없이 피만 빨아들이려고 하는 놈들 외에는 워싱톤이고 링컨이고 하는 영웅들도 다 뜨거운 인스피레이션을 가졌다네.
 
43
이춘희  자네는 무던히도 열정적 남아일세. 참 혁명가의 자품(資稟)이 뚜렷해. 나는 자네를 진심으로 경앙하네. (침묵, 방 안을 휘휘 돌아보더니) 아, 춥고 배고프다. 영일이 이 사람 그저 아니 오네 그려…….
 
44
박대연  그러세.
 
45
(양인 퇴장. 한참 있다가 신문 배달부의 옷을 입은 김영일이 휘파람을 불며 등장)
 
46
김영일  이 사람들 그저 아니왔군. (방 안을 돌아보더니) 아, 저, 엿 보퉁이 보니까 오기는 왔는데, 어디 갔나? 저녁밥 먹으러 식당에 간 것이로군. 요사이 엿이나 잘 팔릴라고. 그것들 어찌하면 좋을까. (힘없이 털퍽 주저앉는다. 바깥으로 바람소리 우우 지나간다. 벌떡 일어나 가서 창을 열고 보며) 구름이 끼었더니 그 사이에 벌써 눈이 오네. (침묵, 시 읊는 어조로) 눈이 오네! 편지가 오네! 그 무슨 편지가? 그 무슨 눈이? 오, 그 편지가 어디서 오나? 어둠의 나라에서 알 수 없는 나라에서. (창을 닫고 휘파람을 불며 서슴서슴 하다가 책상 앞으로 가 앉으며 경건한 표정으로 기독 사진을 쳐다보다가 엎드려 묵도, 바깥으로 유빈 소리 난다. 잠깐 지체, 기도를 마치고 나가서 편지를 집어가지고 들어와 등불 앞에 서며) 아, 집에서 영희가 한 편지로구나. 아무 연고도 없나? 원-. (뜯어서 묵독. 한참 보다가 경악한 어조로) 아, 병환! (안색이 노래지며 끝난 듯한 실망과 돌자하는 고민을 피하려고 상을 쭈그리고 고개를 두어 번 흔들더니) 아이고! 이것을 어찌하나. (벌퍽 주저앉으며 저주하는 눈으로 천정을 쳐다보며 부르짖는다.) 아! 운명이여, 나에게 죽음을 내리느냐? (침묵, 벽상에 걸린 기독사진을 눈흘겨 보더니 벌떡 일어나 미친듯이 쫓아가 사진을 떼어 왼손에 들고 분노한 표정으로 바라보며 다시 돌려 무대 전면을 바라보고 소리를 높이며) 억만년의 시간이 있고 억만의 생이 있다 하더라도, 20년의 짧은 나와 오척 단구의 적은 이 몸이 저 건너 저 앞산보다도 더 크고 중하다. 아니, 전 우주 보다도 더 크다. (다시 기독 사진을 보며) 너는 귀중한 생의 온갖 향유를 박탈하며 강자로 하여금 약자가 되게 한 마왕이다. 마왕. (사진을 두 손으로 북북 찢어던지며 방바닥에 쓰러지며) 죽음! 폭풍우 앞에 죽음. (혼도)
 
47
(朴과 李 등장)
 
48
박대연  어허, 배부르니까 살겠다. 시장하다 먹으니까 우동맛이 신선로 맛보다 더 낫다. (어정어정걸어 들어오다가 의아한 눈으로 영일을 흘끗 쳐다보며) 아-아, 이 사람 인제 왔네? 이 사람 왜 이리 또 해? 여보게! (영일의 옆으로 가서 손으로 흔든다.
 
49
이춘희  우두커니 서서 연민스러운 표정으로 영일을 물끄러미 쳐다 보다가 영일의 책상을 흘끗 쳐다보고 영일의 옆으로 나와 앉으며 댁에서 또 무슨 좋지 못한 기별이 온 것일세 그려?
 
50
김영일  (엎드려 있는 채로 아무 대답이 없다.)
 
51
박대연  (영일의 어깨를 흔들며) 이 사람, 이 사람아.
 
52
김영일  (일어나 앉으며 李와 朴의 손을 잡고 애원한 말로) 이보게 박군! 이군! 나를 좀 도와주게. (다시 고개를 숙인다.)
 
53
박대연  이 사람, 어서 이야기나 시원히 하게.
 
54
김영일  (고개를 다시 들고) 나는 집에를 나가야겠네. 우리 어머니께서 병환이 위중하시다는 기별이 와서. (李, 朴을 애원히 쳐다보고) 여보게들, 어찌하면 좋을까? 나를 좀 도와주게.
 
55
박대연  어 그것 참, 너무도……. (朴과 李는 침묵, 가운데 金의 어깨와 손을 만져주며 애닯고도 걸리는 표정이 드러난다. 방 안은 침묵)
 
56
이춘희  (입맛을 쩍쩍 다시더니) 별 도리없네. 내 아까도 이야기 들었지마는 그 괘씸한 전석원한테-. 자네같이 그렇게 약하게 하여서, 자네가 크리스찬의 착한 마음으로만, 다 소용 없어. 너무 바가쇼지기(바보)야. 우리같이 공연히 착한 체만 하다가는 생명도 잃어버리지.
 
57
(급한 어조로) 두말 말고 全가 찾아 가세. 찾아 가서 달라다가 아니 주거든 좀을 놓고 내리세.
 
58
김영일  그렇게 난폭하게 으를 수야 있나.
 
59
박대연  (급한 어조로) 아, 이 사람 너무 착해! 너무 약해! 자네같은 크리스찬은 이 세상 학대에 씨도 없이 죄다 말라 죽고 말 터이니! 별말 말고 찾아가세, 찾아가 우리 다 같이 가세. 오늘 저녁 혹도회에 불가불 갈 일도 있네마는, 그까짓 것은 그만 두더라도.
 
60
김영일  (고민하는 모양으로 앉았기만 한다.)
 
61
박대연  (화나는 말로) 에, 그 사람! 가세, 지금. (손목을 끌어 잡아 다니며 일어선다.)
 
62
김영일  (결심한 모양으로) 가세. (벌떡 일어서다가 비슬비슬하며 옆으로 쓰러진다.) 아이고, 어지러워! 아, 내게 장차 죽음!
 
63
이춘희  (朴은 황급히 옆으로 가서 주무른다.)
 
64
김영일  (기운없이 일어나며) 잠깐 현기증이 나서, 가보세.
 
65
(3인 퇴장)
【원문】제1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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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본 정보
◈ 기본
  # 김영일의 사 [제목]
 
  조명희(趙明熙) [저자]
 
  1921년 [발표]
 
  희곡(戱曲) [분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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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영일의 사(死) ◈
©2021 General Libraries 최종 수정 : 2022년 11월 17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