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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과도기(過渡期) ◈
◇ 1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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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3
채만식
1
過 渡 期 [과도기]
 
2
14
 
 
3
"그래 오늘은 그리잖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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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고 정수는 평야에게 물었다.
 
5
"응, 오늘은 잠깐…… 그런데 왜 요샌 우리 집에 도무지 오질 않나? 무슨 섭섭한 일 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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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고 평야는 초곤초곤 말을 내었다.
 
7
"천만에, 무슨 그럴 리가 있나…… 하는 것 없이 바빠서 그랬지. 그런데 자네 매씨(妹氏) 두 잘 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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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고 정수는 의미있게 미소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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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야도 의미있게 웃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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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 잘 있지…… 그런데 내가 오늘 오긴 그애(자기 누이) 일 때문에 온걸세. 영자(永子) 그애가 원체 답답한지 인젠 나한테 세세한 말을 다 하데그려…… 물론 나두 대강은 짐작을 하구 있었지만…… 그래, 그런데 자넨 대관절 어찌 된 일인가? 자네 말두 좀 들어 보세 그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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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고 침착한 태도로 말을 꺼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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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정수는 하찮은 듯이 피식 웃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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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은 무슨 말이야? 영자씨가 자네한테 한 말이 그 전부지…… 그 밖엔 아무 것두 없단 말이야."
 
14
"아니, 자네두 그렇게 농말로만 그럴 게 아니야. 그애가 며칠을 두구 잘 먹지 않구 앉아 울기만 하다가 인젠 죽는다구만 한단 말일세. 자네두 영자나 내 근경을 좀 생각해 보게…… 영자와 나완 세상에서 보통 오뉘(男妹[남매])란 그 관계 보담 두 훨씬 더한 사정이 있는 터이니까. 자네두 혹 영자한테 들어서 알구 있는지는 모르겠네만…… 그애가 아홉 살 났을 적에 우리 아버지가 돌아가시구 나니까 소위 우리 어머니라는 인 채 한 달이 못해서 우리두 몰래 다른 곳으로 후갈(後嫁[후가]) 가버렸겠지. 아, 그러구나니까 이 넓으나넓은 이 세상에 불쌍한 우리 오뉘가 맨주먹만 쥐구 길거리로 유리하다시피 하잖았나…… "
 
15
평야의 하는 말은 나직하니 고저(高低)가 작고 약간 떨리는 듯한 그 목소리는 마치 저 창자 속에 깊이 뭉친 설움의 실마리가 풀려나오는 듯 하고 위로 치뜬 그의 눈은 멀리 옛일을 회상하는 듯하였다. 정수도 그제는 평야의 하는 말을 따라 얼굴이 점점 흐려갔다.
 
16
평야는 말을 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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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 그때에 우리 오뉘가 쓰린 고생을 하든 일을 생각하면! 때 내 나이가 겨우 열 여덟 지났댔나…… 어린 영잘 앞세우고 세상을 한번 돌아보니 넓기야 한없이 넓지만 조그마한 우리 오뉘의 두 몸을 의지할 곳이 있어야지. 슬픈 배두 많이 고파보구, 한뎃잠자리를 한두 번 했나. 그때 고생하던 말은 한두 시간을 가지 구 이루 말할 수가 없네. 그래 내가 이(齒[치])를 오그려물구 나서서 철없는 영자더러 '내가 인제부터 내 한몸은 부스러지는 한이 있더라두 어떻게든지 해서 집안을 다시 일으키구 널 장래에 잘 되도록 하겠다’구 굳게 맹셀 한 뒤에 그때의 그골똘한 맘을 변치않구 지내온 까닭에 그래두 넉넉은 못하나마 겨우 생활의 안정은 얻게된 걸세…… 그래 이렇듯한 사정이 있는 터라 내가 영잘 귀애하구 영자가 날 따르는 정이야말로 이 세상에선 둘두 없다구 해두 과언이 아니지. 그런데 그 애가 지금 와서 '인젠 죽는다’고만 한단 말이야. '이 세상에 살 재미가 없다’ 구…… 그러한 말을 들으니까 분한 생각이 꼭뒤까지 치밀어서 대번에 쫓아와자 넬 죽이기라두 하구 싶데그려. 사실대로 내가 자네한테 자백을 하는 말 일세만, 처음엔 내가 자넬 여간 저주한 바가 아닐세. 그러나 그것은 내가 영잘 너무 사랑 하는 까닭에 편벽된 생각에서 나오는 젊은 피의 소치로 그런 게니까 그건 자네두 과히 허물진 않을 줄 믿네."
 
18
이때에 마침 문자가 차를 끓여가지고 들어와 두 사람 앞에 차를 따라 놓았다. 정수는 차를 마시려고도 아니하고 눈을 내리깔고 앉아서 무엇을 생각하였다. 문자는 두 사람의 얼굴이 몹시 흐린 것을 보고 매우 이상히 여겨 호기심을 가지고 중간에서 듣는 말을 이해하여 보려고 애를 먹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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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야는 차를 마시면서 다시 말을 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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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자네가 어데까지든지 순결(純潔)한 태도로 영잘 대해나온 것은 나두 잘알구 있는 터이니까 깊이 감사하는 바일세. 만일 자네가 맘이 좀 불량한 사람 같았더라면 지금 영자가 어느 지경에 이르렀을지 알겠나? 그처럼 썩 괜찮은 처녀가 아주 그렇게 달겨붙은 터이니까 그대로 일시적 위안이나 보구선 헌신짝(廢鞋[폐혜]) 벗어 내던지듯 할 것이 요새 어린 놈들의 항용 하는 짓이니까. 그래 그건 그렇다 치구 자네두 영자가 그만큼 매우 자넬 사랑하는 줄을 알구 있을 터인데, 자네가 그것을 들어주질 않을 게 무언가? 자네가 아주 영잘 조금두 사랑치 않는다면 모르거니와 내가 보기에두 그렇진 않은 듯싶은데…… 그러니까 결관 어찌 되든 말이나 좀 하게. 그래야 나두 속이 시원하구 영자두 그런 줄이나 알 게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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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고 평야는 말을 맺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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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자는 그제야 이 평야라는 사람이 언젠지 정수가 그 애인이 있다고 한 그 여자의 오빠인 줄을 알고, 또 두 사람이 그 여자에게 대하여 이야기를 하는 것을 알았다. 문자는 평야의 하는 말 가운데 그의 입에서 '순결한 태도’란 말이 나올 적에 문자는 어쩐지 스스로 부끄럽기도 하고 또 한 자기의 순결하던 옛날이 그리운 듯도 하였다. 또한 그 '순결한 태도’란 말에 그는 정수의 얼굴을 한번 바라보지 않지를 못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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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수도 역시 정수라, 그 '순결한 태도’란 말에 문자를 한번 흘끔 바라보며 스스로 부끄런 듯이 얼굴을 돌렸다.
 
24
문자는 정수의 입에서 이러이러한 대답이 나오려니 하는 생각을 하고 스스로 자랑스러운 듯이 정수의 입만 바라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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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정수는 아주 침착하고 냉랭하게 말을 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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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네가 그처럼 말하는 것두 당연한 말일세. 모두가 무린 아니야…… 사랑을 최후까지 이루려는 영자씨두 무리가 아니구…… 또 귀애하는 자기 누이의 일을 그 처럼 돌봐주려는 것두 무리가 아니구…… 그러나 나두 역시 어쩔 수 없는 사정이 있으니까 자네들이 무리가 아닌 줄은 알건만 그래두 어쩔 수가 없단 말이야…… "
 
27
"그러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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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고 평야는 정수의 냉정한 듯한 말에, 또한 자기가 묻는 말을 넘겨짚고 대답 하는 그 말에 좀은 야속스러운 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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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면 자네의 그 어쩔 수 없는 사정은 무언가? 좀 들려주게…… "
 
30
"자넨 어찌 생각하는지 모르겠네만…… 연애라 하면 그것이 원칙상으로 봐서 그 목적이 남녀가 결합하려는 데 있잖나? 다시 말하면 남녀가 결합할 준비 행동(準備行動) 이 사람의 감정의 요구를 따라 미화(美化)된 게 연애라구 하겠지? 그렇지만 이 세상에선 연애가, 그 자격이 너무 높구 내용이 복잡해서 원칙의 목적인 결합까지 이루지 못할 만큼 그 정도에 벗어나는 게 많질 않은가? 나두 말 하자면 ㅡ 아니 영자씨가 ㅡ 결혼을 하지 못할 연앨 한 것이지. 그 상대자인 내가 결혼을 못할 사정에 있는 터이므로 말이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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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을 못해? 그러면 자네가 벌써 다른 여자하구 결혼을 했단 말인가…… "
 
32
"하기야 그렇지. 물론 난 벌써 결혼한 몸이지. 그렇지만 내가 만일 다시 결혼을 한다면 그것은 조금치라고 거리낄 게 없으니까. 난 결혼은 가시 않더라두 인제 곧 이혼을 할 터이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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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면 자네가 혹 이렇듯한 생각으로 그러잖나? 영자가 일본 여자니까 국경이 있다는…… "
 
34
"그건 지금 생각할 문제두 아니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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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면 왜 그래, 글쎄? 자네가 굳이 말하길 즐겨 아니하면 더 묻질 않겠네만 아무래두 난 모르겠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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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은 내가 결혼생활을 하구 싶질 않으니까 그러는 게지…… "
 
37
"결혼 생활을 하구 싶잖아? 왜 그럴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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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이 세상에서 아무것두 바라질 못하게 된 사람이니까…… 그러면 최후로 절대자 유나 한번 얻어 보겠다는 생각으로 그러는 걸세…… 그러니까 난 결혼 생활이란 환경을 내 손으로 만들어놓구 내가 요구하는 자율 빼앗기구 싶잖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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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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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고 평야는 탄식하 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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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네가 그건 너무하는 일일세. 자네가 염세증(厭世症)이 있는 줄은 나두 알던 터이지만 그건 참말 너무하네…… 자네 목적이 자넬 배반하거든 다른 방면으로 목적을 세워가지구 자네 자신을 개척해 나갈 것이구, 또 사회가 자네의 이상과 맞질 않거든 활발스럽게 나서서 사휠 좀 개조하게…… 자네가 지금 아직 나이 어린 사람이 그처럼 자포자길 해가지구 자네가 자네 자신을 그처럼 학대할 건 무언가? 아닌게아니라 사람마다 자네만한 나이 되면 그렇듯 공상두 하구 비관두 하구 허욕(虛慾)을 내어 보기두 하긴 하지만 자넨 특별히 더하네그려? 너무 그러지 말게…… 자네가 지금부터 십 년만 지난 뒤에 지금 한 일을 한번 돌아보면 자네 스스로 냉소를 않지 못할 게니까. 현실이란 참 무서운 걸세. 내가 지금 자네한테 두 마디 말을 부탁할 게니 들어보게…… 하난 자네두 인젠 그만 공상의 꿈을 깨어서 현실생활의 맛을 좀 보라는 말이구, 하난 우리 영자의 불쌍한 근경을 좀 생각하라는 말일세."
 
42
"자네가 그처럼 말해 주니까 얼만큼 고마운지 모르겠네. 하지만 자네가, 내 가지 금 생각하구 있는 것이 전혀 공상이라구만 믿어선 그건 잘못일세. 그것이 나의 이상이지 결코 허무한 공상이 아니니까. 그러니까 난 어디까지든지 내 맘에 하구싶은 대로 한세상 살려고 하는데야…… 그리구 자넨 지금 내가 생각하는 것이 순전히 공상이라구만 믿구 내 맘을 돌이켜주려구 그러나 보네만 그건 헛된 노력 일세. 차라리 그 노력을 가지구 영자씰 달래게. 영자씨야말로 지금 꿈을 꾸는 터이니까. 그야말로 참 현실에서 떠난 꿈이지. 영자씬 그 꿈만 깨면 그만일 게 아닌가? 나두 결혼생활이 한편으로 썩 좋은 줄은 모르는 게 아니야. 그렇지만 난 그 결혼에서 떠난 꿈이지. 영자씬 그 꿈만 깨면 그만일 게 아닌가? 난 그 결혼 생활에서 좋은 것보다두 낮은 것을 더 많이 발견한 터이니까. 그리구 내가 지금 한 걸음 양보해서 영자씨하구 결혼을 한다면 물론 잠깐 동안은 피차의 행복이 될지두 모르겠지만 그건 영원한 불행의 원인이 되구만단 말이야. 내가 결혼을 한 뒤에 바로 그 이튿날부터 영자씰 싫어하게 될지 또는 극단에 이르러서 내가 이혼을 하려 한다든지, 혹은 내가 결혼하는 그날 밤에 자살이라두 해버릴는지 어찌 안담? 내가 그만한 짓을 할만한 극단성을 가진 것은 자네두 잘 아는 터이지? 영자 씬 투으게니예프가 지은 소설 『격야(隔夜)』의 여주인공 에레나를 아주 썩 부러워하는듯 해…… 그렇지만 난 그 인사로프가 되질 않을 테야. 그건 내가 인사 로프가 에레나를 사랑한 만큼 영자씰 사랑치 않아서 그런 게 아니라, 도리어 그 보담 더 영자씰 사랑하니까 그러는 게야. 인사로프가 왜 그처럼 에레나를 사랑은 하면서 에레나의 영원한 행복은 돌아보지 않았느냔 말이야? 자기가 폐병이 들었으니까 얼마 더 살지 못할 줄은 알면서두 에레나를 데리고 간 것이 너무 생각이 부족한 게 아니라구? 그래 자기의 중한 생명을 더 짧게 하구…… 더구나 에레나를 길든 고향과 정든 부모의 품에서 떠나 그렇듯 참혹한 고생을 시킬 게 무어야. 눈앞의 행복만 보았지 영원한 불행은 생각질 않는 까닭이 아니라구? 내가 아닌게 아니라 영자씰 여간 사랑하는 게 아니야 그러나 지금껏 영자씨한테 그런 말을 하지아니한 것두 영자씰 위해서 그런 거야. 일전에 내가 갔을 적에 영자씨가 그젠 참다 못해서 내 목에 가 매달려 애원하듯이 눈물이 그렁그렁한 눈으로만 바라보며 ' 정수씨!……’라고 부르고는 다시 아무 말도 못하구 몸부림을 하드란 말이야. 그래 나두 그처럼 자존심이 많구 활발스럽던 영자씨가 내 앞에선 풀이 죽어가지구 그러는 걸 보니까 앞이 캄캄한 듯해서 그대로 꽉 쓸어안고 '오냐, 내 사랑아’ 하구 더운 키스라두 맘껏 할 생각이 와락 쏠렸지만, 그래두 뒷일을 생각 해서내가 나를 억제하구 아무 말없이 영자씰 떼치고 오긴 했지만…… 그러자니까 내 맘인들 여간 아프겠나? 난 인젠 다시 할 말 없네. 그러니까 자네가 돌아가서 잘 알아듣도록 달래게. 이 세상에서 연앨 하다가 최후까지 못 가구 중간에서 실패하는 수가 약간 많잖나? 그 실패한 걸 가지구 죽느니 못 사느니 하는 것은 너무나 생각이 미치지 못한 게 아니야? 물론 영자씬 맘이 천진스럽구 게다가 자존심이 많은 까닭에 이번 같은 일을 처음 당하구 보니까 맘에 섭섭두 하구 또 꺾인 자존심 때문에 약간 분하기두 하겠지. 그래 앞길이 아득해서 그처럼 낙심을 하기두 하겠지만, 그야말로 참 현실생활에 경험이 없는 소치가 아니겠나?"
 
43
평야는 정수가 처음에는 냉정한 듯하였으나 나중에 감상적 어조로 은근스레 말 하는 것을 유심히 듣고 있다가 정수의 말이 끝나자 한숨을 후유 내쉬며 '참 아깝다’ 란 말 한마디를 하고는 다시 아무 말 없이 묵묵히 앉아 무엇인지 생각을 하였다.
 
44
문자는 얼굴을 찌푸리고 정수의 말을 듣다가 평야가 있는 것도 꺼리지 아니하고 참지 못하겠는 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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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수씨 ! 정수씨가 그건 너무 하시는 게 아니야요!"
 
46
라고 문자에게는적당치 아니한 열정을 띠고 감상적으로 말을 하였다.
 
47
그러나 그 말에 정수는 아무 대답도 못하였다.
 
48
"자, 난 그만 가겠네…… "
 
49
하고 한참만에 평야가 초조히 일어섰다. 정수는 내키지 않는 웃음을 얼굴에 띠고 마주 일어서며
 
50
"그러면 가서 영자씨한테 부디 말이나 잘하게. 그렇지만 내가 그처럼 영자 씰 사랑 한단 말은 말구…… "
 
51
하고 부탁을 하였다.
 
52
아 ! 정수의 꿈, 영자의 꿈 ㅡ 장차 언제나 깨려는지!
【원문】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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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채만식(蔡萬植)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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