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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토】 임실의 재실
◈ 오류리 오류재(五柳齋)
이 재실은 성수면 오류리 68-2번지에 있다. 전주~남원 간 17번국도 중간 지점인 성수면 오류리는 임실에서 5km 지점의 오류마을 회관 뒤에 있다. 오류재(五柳齋)는 진주 강씨 선조인 강필열(姜必烈 : 1666~1735)의 재실로 문중에서 1973년 12월에 건립하였다. 정면 3칸 측면 3칸의 팔작 기와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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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류리 오류재(五柳齋)
 
이 재실은 성수면 오류리 68-2번지에 있다. 전주~남원 간 17번국도 중간 지점인 성수면 오류리는 임실에서 5km 지점의 오류마을 회관 뒤에 있다. 오류재(五柳齋)는 진주 강씨 선조인 강필열(姜必烈 : 1666~1735)의 재실로 문중에서 1973년 12월에 건립하였다. 정면 3칸 측면 3칸의 팔작 기와집이다. 현판 1개, 12개의 주련이 있는데 주자의 글을 주련으로 사용하였다. 1938년 戊寅 10월 5세손 옥성(玉馨)이 지은 오류재기(五柳齋記)가 있다.
 
 
 
 

1. 오류 오류재기五柳齋記

 
운수현(雲水縣)의 동쪽에 오류촌(五柳村)이 있는데 그 뒤 신산(新山)의 자원(子原)은 바로 우리 5대조 중추공(中樞公)과 4대조의 부인 경주김씨(慶州金氏) 두 분이 안장된 곳이다. 무덤 아래 비바람을 피할 곳이 없어 후손들이 슬퍼한 지 오래 되었다.
 
정축년에 종친들이 의논하여 모두 같은 뜻으로 재각을 창건(刱建)하기로 하였다. 위로는 조상을 위해 제수를 마련하는 곳이고 가운데로는 친척들이 기쁘게 모이는 곳이고 아래로는 자손들이 강학(講學)하는 곳이다.
 
봄이슬 가을서리 내릴 때에 슬퍼하고 그리워하고 근본을 돌이켜 보며 조상을 추모하는 마음이 일어나는 것은 사람이라면 누구나 지니고 있는 마음이기에 무덤 아래 집을 짓고 사모하는 마음으로 우거한 것은 오래된 일이다. 진(晉)의 병사(丙舍)와 당(唐)의 향정(享亭)이 바로 그런 것이다.
 
대저 종족은 같은 선조가 남긴 후손으로 가깝게는 상복[朞功]을 입는 사람에서 멀게는 무복(無服)에 이르기까지 비록 친소(親疎)가 같지는 않겠지만 조상이 보기에는 모두 같은 후손이다. 후손들도 또한 조상의 마음으로 자기 마음을 삼는다면 어찌 원근(遠近)과 친소(親疎)로 구별하겠는가? 그래서 장씨(張氏)가 함께 거주하고 범씨(范氏)의 의전(義田)이 있게 되었던 것이다. 지금 우리가 재각을 짓는 뜻도 조상을 사모하고 후손을 넉넉하게 하려는 뜻에서 비롯되었으니 어찌 중대하지 않겠는가?
 
아! 우리 선조 금재공(琴齋公)은 처음 함양(咸陽)에 거주하였고 도학연원(道學淵源)으로 구천원[龜川院]에 제향되었다. 생원공(生員公)은 이름이 위황(渭璜)으로 함양에서 임실로 옮겨서 우거하셨는데 그 행적을 초야에 숨기시고 성리(性理)를 궁구하셨다. 유고(遺稿)가 남아있다. 중추공(中樞公)은 이름 필열(必烈)로 집안의 규율과 도덕[家道]을 창시하였으며 문학(文學)과 덕행(德行)을 오로지 시작과 끝으로 삼았으니 공께서 드리운 음덕은 영원할 것이다.
 
낙성하는 날에 ‘오류(五柳)’라고 편액하였는데 선조들께서 살았던 옛 터의 이름으로 인하여 백세토록 사모하는 마음을 담은 것이다.162) 그러므로 모든 일에 정성을 드린다면 그 일을 할 수 있겠지만 정성을 드리지 않는다면 그 일을 할 수 없는 것이니 자손이 자손을 생각하는 곳이라고 하겠다. 크고 크구나.
 
위에 계신 듯하고 옆에 계신 듯하니 대저 선조의 영령은 자손의 정성과 함께 유명(幽明)한 곳에서 무간(無間)하게 감흥을 일으키는 것이기에 그러하다. 종친들과 돈목하고 학문을 성취하게 된다면 우리가 드린 정성 가운데서 비롯되는 것이리라. 이 재각에 오르는 사람들은 그 이름에 담긴 뜻을 돌아보고 지성으로 그 뜻을 이어받는다면 진의 병사와 당의 향정을, 장씨와 범씨가 친족과 화목하게 지냈던 것을 오늘날 다시 볼 수 있을 것이니 힘쓰지 않겠는가? 힘쓰지 않겠는가?
 
 
歲戊寅 十月 日 五世孫 玉馨 謹讚
 
 
 

1.1. 五柳齋記

 
雲水縣東五柳村後 新山子原 卽 我五世祖考 中樞公 若四世祖妣 慶州金氏 兩世壽藏也 阡下 無風雨之庇 後孫之愴悒 久矣 歲丁丑 族議僉同 刱建一齋上以爲祖 先蒸嘗之所 中以爲花壽悅親之會 下以爲子孫講誦之地 夫霜露降濡之際 悽愴沐湯而起反本追遠之思者 因人所固有秉彛之常性 故建舍於墓下 爲寓慕之所 其來久矣 晉之丙舍 唐之享亭 是也 盖宗族同先祖之遺裔 近自朞功 遠至無服 雖有親疎之不同 祖先視之則 均是我孫也 爲後孫者 亦以祖先之心 爲心則 豈有遠近親疎之別乎 張氏之同居 范氏之義田 所以然也 今吾建齋之意 亦由出於慕先裕後之策 豈不重且大歟 嗟乎 吾先祖琴齋公 始居咸陽 以道學淵源 享龜川院 生員公 諱渭璜 自咸陽 移寓任實遯蹟林泉學究性理 有遺稿焉 中樞公 諱必烈 始昌家道文學德行 終始惟一 其垂蔭也 永遠焉 落之日 扁額曰 五柳者 因先祖舊址之名 而寓百世 羹墻之義也 然凡事有誠則 有其事無誠則 無其事 子思子所云 洋洋乎 如在其上 如在其左 盖先祖之靈 與子孫之誠 感發無間於幽明而然也 其於族之敦睦 學之成就 亦由我誠中出來也 登斯齋者 顧名思義至誠紹述則 晉唐之亭舍 張范之敦族更見於今矣 可不勉勵 可不勉勵哉
 
歲戊寅 十月 日 五世孫 玉馨 謹讚
 
 

 
각주
162) 원문의 갱장(羹墻)은 선왕(先王)의 거룩한 업적을 사모하며 좋은 정치에 매진하는 것을 말한다. 옛날 요(堯) 임금이 죽은 뒤에 순(舜)이 3년 동안이나 앙모(仰慕)한 나머지 “앉아 있을 때에는 담벼락에 요 임금이 보이고 식사를 할 때에는 국그릇 속에 보였다.[坐則見堯於墻 食則覩堯於羹]”는 고사에서 유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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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1.02. 19: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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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 General Libraries 최종 수정일: 2021년 1월 1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