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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실군(任實郡) 재실(齋室) # 관수재
【향토】
(2024.01.02. 19:23) 
◈ 삼봉리 관수재(觀水齋)
30번 국도상 성수면사무소에서 백운쪽으로 평지 삼거리 못미처 금동마을로 들어서 삼봉리에 다다르면 원 삼봉마을에 위치하고 있다. 관수재(觀水齋)는 밀양박씨 종대(宗垈)로서 그들의 선조 박기래(朴幾來)와 그의 처 전주최씨의 재실이기도 하다. 현재의 건물은 1938년에 창건된 것으로 정면 3칸 측면 3칸의 팔작 기와집이다.
목   차
[숨기기]
삼봉리 관수재(觀水齋)
 
30번 국도상 성수면사무소에서 백운쪽으로 평지 삼거리 못미처 금동마을로 들어서 삼봉리에 다다르면 원 삼봉마을에 위치하고 있다. 관수재(觀水齋)는 밀양박씨 종대(宗垈)로서 그들의 선조 박기래(朴幾來)와 그의 처 전주최씨의 재실이기도 하다. 현재의 건물은 1938년에 창건된 것으로 정면 3칸 측면 3칸의 팔작 기와집이다. 재실 입구인 솟을대문 앞 정면에는 인례문(仁禮門)이라고 쓴 편액이 걸려 있으며, 솟을대문 중앙에 ‘밀양 박기래와 열녀전주최씨부처지려’라고 쓴 정려가 걸려 있다. 재실 안에는 중앙에 윤용구가 쓴 관수재(觀水齋) 편액과, 좌측에 송길섭이 쓴 영사당(永思堂), 우측에 주희가 쓴 영응재(霙應齋) 우측 뒤에는 송길섭이 쓴 입덕헌(立德軒) 좌측 뒤에는 송길섭이 쓴 진수정(進修庭)이 건립되었고, 솟을대문에는 주련이 2개가 있으며, 현판 3개와 16개의 주련이 걸려 있다. 재실 지붕에는 비둘기 모양을 올려놓았다.
 
 
 
 

1. 삼봉 관수재(觀水齋)에 관한 기록(記)

 
남쪽 지역에는 명산들이 매우 많은데, 임실의 성수(聖壽)산이 그 중 하나이다. 그 신령스러운 산자락 아래는 삼봉리(三峰里)가 자리하고 있고, 그 뒤쪽으로 밀양(密陽)씨 2대의 무덤이 자리하고 있다. 이곳은 산이 에돌아 감싸고, 물이 휘돌아 흐르니, 상서로운 기운이 웅혼하게 빛나는 땅이다.
 
도곡129)의 누추한 집 보다 크지는 않지만, 박 병갑(炳甲) 군(君)께서 재계할 곳을 지어, 이름을 지어줄 것을 청하며, “리산(離山) 가운데 시내가 하나 있었는데, 그곳을 경영하여 건물을 하나 지어, ‘물을 바라보는 곳(觀水)’이라 내걸었다고 들었습니다.”고 하면서, 다른 사람을 통해 그 이야기를 개괄해줄 것을 청하였다.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 ‘물은 크기에 상관없이 수원(原流)과 물줄기의 흐름을 갖지 않는 것이 없다. 물의 수원을 보면, 물의 흐름을 알 수 있고, 물의 흐름을 보면 물의 수원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수원이 멀리에 자리하고 있는 것은 그 물의 흐름이 틀림없이 멀리까지 이어지고, 그 수원이 맑은 것은 그 흐르는 물이 틀림없이 맑고 투명하다. 그러니 사람 사는 세상이 어찌 이와 다르겠는가.’
 
밀양(密陽) 씨의 후손들은 신라의 왕실로부터 위아래로 수 천 년 간, 이름 난 공신과 훌륭한 재상들이 우뚝한 기상을 서로 마주하였으니, 그 수원이 멀리 흘러나감이 진실로 이와 같은 것이다. 자손들이 번성하여, 관대(冠帶)를 한 자들이 팔도에 가득하였고, 훌륭하고 진실하며 효성스러웠으며, 문학지사(文學之士)들이 그 가운데서 이어졌다. 그러니 그 수원의 맑고 투명함을 또한 익히 상상해볼 수 있다.
 
지금 삼봉리에 흐르는 것은 조그마한 실개천에 불과하지만, 장마가 지면 물이 불어났다가 날씨가 가물어도 마르지 않고, 졸졸졸 밤새도록 쉬지 않고 흐른다. 그러니 어찌 수원이 있지 않다 할 수 있겠는가? 관대(冠帶)의 귀함이 비록 전대보다 못하고, 몸가짐이 향리에만 이름을 드날렸다고 할지라도, 또한 어찌 그 수원의 맑음을 얻어서가 아니겠는가? 계절에 한 번씩 성묘를 드릴 때마다, 이 재각에 올라 저 흐르는 물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효제(孝弟)의 마음이 뭉클뭉클 올라와 그 영예로움 받들기를 생각함이 응당 끝이 없을 것이다.
 
무인(戊寅)년 10월
안동(安東) 김(金)씨 영한(甯漢)이 기록하노라.
 
 
 

1.1. 觀水齋記

 
南服名山甚眾 而任實之聖壽 居其一 靈山之下 有三峰里 里之後 有密陽氏 兩世之阡 而山抱水回 吉氣熊熊 雖陶家半眠之地 無以加 云朴君炳甲 締搆齋沐之所 介而請其名 余聞離山之中有一澗 經緯之 盍以觀水揭之也 繼以請蓋其說 竊以為水無大小 算不有源有流 觀其源則知其流 觀其流則知其源 故其源遠者 其流必長 其源清者 其流必潔 人之家世 何異於此乎 密陽氏胄于羅室 上下數千載 名公碩輔 嵂嶪相望 其源之達 固如是矣 是血胤振振 冠帶之族 彌滿八域 而佳佳有忠孝 文學之士相繼於其間 則其源之清亦可想也 今夫三峰之水 不過一派之細流耳 潦而壯 旱而不縮 深深潺潺晝夜不息 豈非有源者歟 至如冕帶之貴 雖遜於前世 制行之潔 有聞於鄉敞 亦豈非得其源之清者耶 四時展掃之暇 登斯齋而觀其水 則孝弟之心 油然而生 思所以承其光烈者 當無窮矣
 
吾言止此勗㦲
著雍 攝提格 應鐘之月
安東金氏 甯漢 記
 
 
 

2. 삼봉 관수재 성은에 관한 기록(城隱記)

 
옛날 은자들은 반드시 조용하고 궁벽 진 곳을 택하여 그곳에 머물곤 했으니, 복잡하고 번다함에 눈이 멀고, 소란스러움에 귀가 멀어, 세상과 교유를 끊어버리고 고개를 숙인 채 자취를 감춰버리는 것이다. 그런데 오늘날 백제성에 어떤 훌륭한 자가 “城隱”이라는 글자를 편액에 대서(大書)로 새겨두었으니, 대은(大隱)일지어다.
 
눈은 복잡하고 번다함에 현혹되고, 귀는 소란스러움에 먹먹해도, 흰 구름은 바람 부는 대로 가는 법이니, 굳이 눈이 멀고 귀가 멀어버린 척 하지 않으며, 널리 벗을 만나 이로운 벗은 가까이 하고 해가 되는 벗은 멀리 하니, 굳이 교우를 끊어버리지 않는다. 또한 온갖 변화에 있어, 그 상황을 살피고 기미를 살펴, 취할 만하면 취하고 그렇지 않으면 버리니, 굳이 머리를 숙이고 자취를 감추지 않는다. 조용하고 외진 곳에 머무르던 자들과는 참으로 크게 다르니 과연 ‘대은(大隱)’이로다.
 
여기에서, ‘한 곳에 전일하여 다른 곳으로 향하지 않는 마음(主一無適)’이 확고하여 쉽게 동요시킬 수 없음을 헤아릴 수 있으니, 이를 사업으로서 논한다면, 성전(聖典)을 이어 어버이의 정려(旌閭)를 드높이고, 훌륭한 글을 새겨 거듭 선조의 봉분을 떨쳐 일으킴에, 선조의 음덕은 감추지 않되 스스로 자신의 덕을 감추며, 아무도 모르게 자신을 수양하고 의를 행하며 은혜를 베푼 것은 많지만 일체 이를 내세우지 않은 것과 같을지니, 식자(識者)들이 옳게 생각하리라.
 
무릇 천하에 자신의 뜻과 부합되지 않는 때를 만나 세상을 경륜할 뜻을 품고, 광채를 거두고서 그것을 숨긴 채 때를 기다리는 자들은 이미 한 국가를 다스리지 못하고 한 집안을 다스리고 있으니, 조상을 받드는 절도에 있어 그 정성을 다하고 그 선함을 다하여 후대에 본보기가 된 자가 몇이나 될 수 있겠는가? 빛나는 별이 은거하라고 손짓하는 날이 틀림없이 그대들보다 먼저 닿았을 것이다. 성은(城隱)은 누구일꼬? 밀양(密陽) 명문의 박(朴)군 병섭(炳甲)이로다.
 
무인(戊寅)년 12월 하순 경.
삼청재(三清齋) 거사(居士) 이중명(李重明)이 기록하노라.
 
 
 

2.1. 城隱記

 
古之隱者 必擇靜僻處而處之 瞽於紛華 聵於喧豗 息交絕遊 縮首斂迹矣 今於百濟城中 有一偉人焉 大書扁楣曰城隱 是大隱也歟
 
眼常眩於紛華 耳常聒於喧豗 雲空風過 不必佯作瞽聵 廣接朋友 益者親之 損者踈之 不必息交絕遊 且於萬機變幻 觀其象而玩其占 可以取之則取之 否則舍之 不必縮首斂迹 固與處靜僻者迫殊 而果大隱也,於是乎可揣 其確乎難拔主一無適之心法 而以事業論之 蒙聖典而崇雙親之旌閭 圖賢筆而刻 屢興之堂斧 無隱先德 自隱己德 闇然自修 行義施惠者 多而一切無伐焉 識者韙之
 
凡天下 不遇之世 抱經綸 而鞱光鏟彩者 既不得行政於一國 而為政於一家 凡於奉先節度 極致其誠 極致其美 為後世規範者 能幾人也㦲 晟辰招隱之日 必先於子 城隱為誰 密陽盛閥 朴君炳甲也.
 
著雍 攝提格 嘉平 下浣
三清齋 居士 李重明 記
 
 
 

3. 삼봉 관수재정려기(旌閭記)

 
정려(旌閭)를 기록함. 본래 군자(君子)라는 것은 결국 효자(孝子)가 되는 것이요, 본래 숙녀(淑女)라는 것은 결국 열녀(烈女)가 되는 것이다. 군자와 숙녀는 그 훌륭한 배필(好逑130))이 되기에 마땅하여, 효자와 열녀로서의 행실이 대대로 그리워하는 데에서 드러나고, 그 진심이 사람들의 마음에 쌓인 것이니 모두 기록할 만 한 것이다. 오직 밀양(密陽)의 거족(鋸族, 법도 있는 집안)인 박공(朴公) 휘(諱) 욱래(彧來) 부처(夫妻)가 이와 같다.
 
살펴 보건대 공(公)은 자(字)가 치명(致明)이고 호(號)가 만포(晩圃)이다. 신라(新羅)와 고려(高麗)때부터 우리 조정(朝廷)에 이르기까지 융혁(隆奕)이 매우 지극하였으니, 규정공(糾正公) 휘(諱) 현(鉉)과 응천군(凝川君) 휘(諱) 조(藻)께서는 훌륭한 조상(顯祖)이시고, 통덕랑(通德郞) 휘(諱) 중록(重錄)과 청설처사(聽雪處士) 휘(諱) 명식(明植)과 가선대부(嘉善大夫) 휘(諱) 오진(懊晉)과 선공감가감노역(繕工監假監勞役) 휘(諱) 준영(準永)께서는 효로써 이름이 나셨는데, 고조(古祖), 증조(曾祖), 조(祖)를 아버님처럼 모셨다. 공(公)의 어머니는 숙인(淑人) 김해 김씨(金海金氏)인데 정숙(貞淑)하시고 덕(德)을 지니셨다.
 
공(公)은 태어나 성품은 어질고 바탕은 두터워 지혜와 총명함이 남달랐으니 스승에게 나아가 수학함에 일찍 사랑하고 공경하는 의리를 이해하였다. 오직 부모의 명에 순종하여 감히 맘대로 하지 않아 겨우 성동(成童131))의 나이에도 점잖음이 마치 노성(老成)한 사람 같았다.
 
장성하여서는 일을 맡음에 직분을 다하였고, 온갖 일로 아무리 바쁘다 할지라도 한결 같이 부모님을 아침저녁으로 보살피되 부모님의 뜻과 안색을 살펴 반드시 받들고 기쁘게 하였으며, 부모님의 입과 몸에 맞는 물건이면 도리를 다하지 않음이 없었고, 일찍이 부모의 곁을 비운 적이 없었으며 모든 행동이 예절에 어긋나지 않았다.
 
북당(北堂, 어머니)께서 병으로 위급하시던 때에는 좋은 약을 다 써보았지만 효험이 없자, 일찍이 하늘에게 자신이 대신 죽기를 기도하였고, 마침내 손가락을 찢어 피를 내어 어머니께 드려 수명을 며칠 연장하였다. 그러나 오래도록 정성을 다했지만 끝내 먼 길을 떠나심에 정성이 미치지 못하자 억장이 막혀 스스로 슬픔을 다하였는데, 연이어 외간(外艱,아버님)의 상(喪)을 당하자 슬픔을 그대로 쏟아내 몸이 지나치게 상하고 말았다.
 
앞뒤로 상을 치름에 예를 따라 여한이 없게 하였고, 육년 동안 시묘 살이 함에 마음대로 씻거나 고기를 먹지 않았으며, 묘에 참배할 적에는 반드시 정갈하게 띠를 두르고 예를 하였으며 더위와 추위 비바람을 두려워하지 않았고, 잡초는 반드시 손으로 제거하였으며, 묘에 가는 길 의 네 귀퉁이에다가 열을 지어 소나무를 심었다. 기일(忌日)이 되면 반드시 목욕하고 청소하며 안팎으로 소란스럽게 떠드는 것을 금하여 산재(散齋)를 지극히 하고132), 슬픔을 다하여 한 결 같이 살아계실 때와 같이 하였다.
 
의(義)로써 아이를 가르쳤으며 은혜로써 집안사람들을 돌보았으니, 인도(人道)에 있어서 지극히 크다고 말할 수 있다.
 
공(公)은 고종조(高宗朝)에 침랑(寢郞, 능참봉벼슬)에 발탁되었고, 뒤에 통정(通政)에 올랐다. 부인은 전주 최씨(全州崔氏) 완산부원군(完山府院君) 충익공(忠翼公) 휘(諱) 양후(瀁后)의 덕홍녀(德洪女)이다. 부인은 유순하고 착하며 지혜로워 집안에 알맞은 사람이었으며 한결같은 마음으로 효도를 다하여 시부모, 시동생, 시누이에게 모두 알맞게 잘 하였다.
 
남편의 병이 많아 한창 병간호 할 때 천신(天神)과 지신(地神)에게 기도하여 정성을 지극히 하지 않음이 없었으나, 끝내 남편이 세상을 떠나게 되자 곧 따라 죽으려하다가 위로는 종사(宗祀)를 생각하고 아래로는 고아(孤兒)를 불쌍히 여겨 꾹 참고 스스로 강해져서 죽은 이 보내기를 예법에 따라 하였다. 아침 일찍부터 밤늦게까지 고심하여 교육하고 가산(家産)을 다스려 어려움 없이 기반을 이루어 집안의 명성을 크게 떨치니, 이것이 남편의 효행(孝行)이요 이것이 아내의 열행(烈行)이다.
 
서울과 지방의 사대부와 유생들 가운데 이를 공경하고 송축하지 않는 이가 없으니, 아! 훌륭하고 장엄하도다. 감히 임금께 아뢰니, 순종(純宗)께서 기유(己酉)년에 그 마을 문에 정표(旌表)하라고 명하시니, 두 문설주에 정표(旌表)한 광휘(光輝)가 온 나라에 밝게 비쳤다. 아! 그 훌륭함이여. 부부의 덕은 대덕(大德)이 확립되고 여러 행실이 아름다워 무너진 기강을 진작시키고 퇴폐한 풍속을 바로잡기에 충분하였다. 외아들 병갑(炳甲)은 외로이 혼자였으나 경사가 넘쳐 아들을 많이 낳았으니 또한 효행이 있다. 부모는 어질고 자손은 훌륭하니 이치상 진실로 높고 깊은 것을 좀 먹지 못할 것이요, 이미 묻고 기록함을 마치니 틀림없이 그 훌륭함을 더 할 것이로다.
 
무인(戊寅)년 동짓달 상순(上旬)에 통정대부(通政大夫) 전내부원외랑(前內部員外郞) 완산(完山 ) 이중명(李重明)이 기록하노라.
숭록대부(崇祿大夫) 전 판돈녕원사(前 判敦寧院事) 해평(海平) 윤용구(尹用求)가 쓴다.
 
 
 

3.1. 旌閭記

 
素稱君子者 終成孝子 素稱淑女者 終成烈女.君子淑女 宜其好述而孝烈之行 著于世懷 鉛畜素人 皆可以銘者 惟密陽鉅族 朴公諱彧來夫妻是已.
 
按公字致明 號晚圃 粵自羅麗至于我朝 隆奕已極 糾正公諱鉉 凝川君諱藻為顯祖 通德朗諱重錄 雪處士諱明植 嘉善大夫諱懊晉 繕工監假監勞役諱準永 以孝聞 高曾祖若考也 妣淑人金海金氏 貞淑有德 公生而性仁質厚 聰慧過人 就傳受學 早解愛敬之義 惟順親命 不敢自專 年纔舞象133) 屹若老成 及壯仰事盡軄 雖百忙 一勤定省 以志以色 必承必悅 適於口軆之物 無不畢道 未嘗虗側 進退周旋 不差儀節 北堂疾革之日 宜箹蔑效 嘗冀禱天 願以身代終 乃裂指進血 厪延數天之命 積久竭誠之餘 皇皇靡逮 臆塞自盡 連遭外艱 徑情過毀 前後喪葬 遵禮無憾 六祀居廬 不御泉肉 必整經帶式謁墓 不畏燠寒風雨 雜艸必手除 隧道四隅 植松成列 遇忌日必沐浴灑掃 禁內外喧譁 致散盡哀 一如事生 教兒以義 恤族以恩 於人道 可謂至奕
 
高宗朝 筮仕寢朗 後陞通政 配全州崔氏完山府院君 忠翼公諱瀁后 德洪女也 婉柔淑哲 在家適人 一心竭孝 父母舅姑 俱宜之 夫子疾谹多 方調護 至禱神祗 靡不用極 竟至崩天 即欲從殉 而仰念宗祀 俯憐孤兒 含忍自強 送終如禮 夙夜苦心 教育治產 無難成立 大振家聲 是夫之孝 是婦之烈
 
京鄉縉紳章甫 莫不欽頌 噢乎 褒壯 敢聞于天 純宗己酉 命旌其閭 雙楔光輝 照耀鄉國 吁其壯兮 牉合之德 大本立而眾行美 足以振頹綱 勵敗俗矣 一男炳甲 煢煢隻影 慶溢多男 亦有孝行 賢父母佳子孫 理固不食輪奧 既竣問記而必泚其頴
 
著雍 攝提格 一陽月 上瀚 通訓大夫前內部員外郎 完山李重明記
崇祿大夫 前判敦寧院事 海平尹用求書
 
 

 
각주
129) 진(晉) 나라 도간(陶侃)의 집을 가리킨다. 범규(范逵)가 그 집을 방문했을 때 대접할 것이 없자 도간의 어미가 머리칼을 잘라 주효(酒殽)를 마련해 주었던 고사가 전해 온다.
130) 《시경(詩經)·주남(周南)》관저(關雎)의 “窈窕淑女 君子好逑”에 보임.
131) 성동(成童) : 15세를 이르는 말로, 《예기(禮記)·내칙(內則)》의 “성동이 되면 象으로 춤추고, 활쏘기와 말타기를 배운다(成童舞象, 學射御)”에 보임.
132) 산재(散齋) : 제사 지내기 전에 7일 동안 행하는 재계. 여자를 가까이하지 않으며(不御), 음악을 듣지 않으며(不樂), 조상하지 않으며(不弔), 어버이의 거처(居處)ㆍ소어(笑語)ㆍ지의(志意)ㆍ소요(所樂)ㆍ소기(所嗜) 등을 생각하는 일이다.《예기(禮記)·제의(祭義)》에 보임.
133) 무상(舞象) : 춤동작을 짓는 모습을 말함.
임실군(任實郡) 재실(齋室) # 관수재
【향토】 임실의 재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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