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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실군(任實郡) 재실(齋室) # 운암재
【향토】
(2024.01.02. 18:30) 
◈ 금기리 운암재(雲巖齋)
이 재실은 운암면 금기리에 있다. 이 재실은 남양 홍씨 홍우경(洪宇慶)의 재실이다. 홍우경(1558~1617)의 자는 기서(箕瑞), 호는 운애(雲涯), 본관은 남양이며 출생지는 임실이다. 호은공(湖隱公) 황(潢)의 후손이며, 원주목사 석방(碩舫)의 손자이고, 아버지는 수제용감첨정(守濟用監僉正)을 지낸 홍붕(洪鵬)이다.
금기리 운암재(雲巖齋)78)
 
이 재실은 운암면 금기리에 있다. 이 재실은 남양 홍씨 홍우경(洪宇慶)의 재실이다. 홍우경(1558~1617)의 자는 기서(箕瑞), 호는 운애(雲涯), 본관은 남양이며 출생지는 임실이다. 호은공(湖隱公) 황(潢)의 후손이며, 원주목사 석방(碩舫)의 손자이고, 아버지는 수제용감첨정(守濟用監僉正)을 지낸 홍붕(洪鵬)이다. 부인은 임란 명장 전의 이씨 이정난의 딸이다. 임진왜란이 일어나 선조가 의주로 몽진하자 조부인 석방의 명에 의하여 군량과 지포(紙布)등을 어전에 헌납하니, 선조는 그 충성심을 가상히 여겨 목사공 홍석방은 예조참판에 증직하고, 운애공에게는 즉석에서 정사품의 벼슬을 하사하였으나 사양하였다. 1606년(선조39)에 생원시에 합격하였다. 『운애유고』가 있으나 전하지는 않는다. 정면 4칸, 측면 2칸의 팔작 기와집으로 현판이 1개 걸려있다.
 
 
 
 

1. 금기 운암재

79)
 
완산(전주)의 남쪽 운수(雲水; 임실)의 치소에 나래산[翼山]80)이라는 산이 있다. 이 산의 동쪽 산기슭이 구불구불하게 이어져 내려와 소반을 에워 싼 것과 같은 곳이 있으니, 이곳이 이른바 기동(基洞)81)이다. (이곳은) 우리 선조인 운암공(雲巖公)82)이하 여러 대의 무덤이 있는 곳이다. 이 산의 맥은 백련봉(白蓮峰)83)으로부터 용이 날고 봉이 춤추는(龍飛鳳舞) 듯 이어져 와 운암강에 이르러 멈추었다. 산의 형상이 휘어져 가고 되돌아오는 것이 마치 창려(昌黎)와 같으니 이른바 반곡(盤谷)84)이라 할 만하다. 차가운 구름은 흩어지고, 암곡은 그윽하니 회암(晦菴, 주희)이 거처한 운곡(雲谷)85)과 흡사하다. (이곳은) 공이 전일에 소요[盤旋]한 곳이며, (이러한 이유로) 스스로 운암조수(雲巖釣叟)라 하였다.
 
공의 묘는 본래 옥전(玉田) 상동(上洞)86) 감정공(監正公)87) 묘소와 같은 곳에 있었으나 후에 다시 이곳으로 이장하였다. 그 동쪽 언덕 북쪽에는 승의공(承議公)의 무덤과 같은 기슭이고, 가장 높은 곳에는 장락공(掌樂公)의 유택이 있으니, 모두 이에 앞서 조성한(所卜) 곳이다.
 
매번 상로(霜露)가 내릴 때 산소를 깨끗이 하고 제사를 모시었는데(瞻掃享祀), 예전에는 재각(齋閣)이 없어 같은 종친(宗黨)들이 모일 때에 진실로 잠잘 곳(齋宿)과 수리(受釐; 제사를 지낸 뒤 복을 받는 것)할 곳이 없는 것이 넉넉한 가운데 모자란바 되었다. (그래서) 이 재각을 조영하는 것을 바라게 되었다.
 
지난 가을 제사 때에 종장(宗長)이 산 아래에 목재(林木)와 약간의 재물과 곡식이 준비되어 있는 것이 있으니 (이것을 이용하여 건물을 짓는 것을) 의논으로 삼으니, 모두 승낙하였다. (사실) 재목과 기와는 어소사(於蕭寺)에 구입하여 비치해 놓은 것이 이미 여러 해였다.
 
그것으로써 방을 만들어 여러 종인들에게 주어 재숙(齋宿)의 장소로 삼고, 대청을 넓게 하여 향사 후에 수리(受釐)하는 장소로 삼았다. 재각의 아래에 또 3간여의 집을 지어 수직인(守直人)을 거하게 하기로 하였다. 공사를 시작한지 여러 해가 지난 지금에 이르러 일을 이루어 성립하니 또한 시간이 있음이다.
 
이번 이후로 종인(宗人)들이 제사를 지내기 위해 잠을 잘 수 있는 방이 생기게 되었으며, 정결하게 제사지내고 수리(受釐)할 수 있는 대청이 있으며, (대청은) 넓어서 수리하는데 여유가 있게 되었다. 이곳에서 자면서 머물면서 서로 이야기 하여 일가들끼리 정을 두텁고 사이좋게 할 수 있게 되었으며, 오래 떨어져 있었던 것에 대해서 이야기 할 수 있게 되었으니 어찌 좋지 않은가.
 
오호라 우리 선조 운암공의 덕행과 도의(道誼)는 경옹(敬翁)을 지극히 이어받아 당세의 모범이 되었다. 일찍이 젊은 나이에(粤在妙齡) 흑룡의 난(黑龍之亂; 임진왜란)88)을 당하여 백의(白衣)로써 조부인 참판공의 명을 받들어 산을 넘고 물을 건너(跋涉)는 험난함을 이기고 호종하여 영유(永柔)89)에 있는 행재소에 도달하니, 임금이 이를 가상히 여겨 특별히 직분을 내렸으나, 나이가 차지 않았다고 하여 사양하였다. (임진왜)란이 끝난 이후에 세상의 도가 출세를 위해 날뛰었으나, (운암공은) 벼슬길에 나가고자 하는 뜻을 가지지 않고 덕구원(德邱園)에 머물면서 산수를 즐기는 것으로 경적(經籍)을 삼았다. 포부를 펼치지 아니하고 세상을 떠나자 당세의 식자들이 이를 애석해 하였다.
 
돌아가신 뒤에 고을 사람들이 제사를 지내주자는 의논이 있었으나, 나라에서 금지하여 이루지 못하자 당시의 여론이 억울해 했다. 아, 오래된 집안의 충효하는 도와 공경하고 삼가는 학문은 이어 받아 여러 대 동안 이어지면서 풍성한 가법이 있는 것이다. 지금 사림들이 오히려 더욱 우러러 사모하는데 하물며 우리 후손들은 어떠하겠는가.
 
그를 일러 천천히 흐르는 강물이 흐름이 길다고 하는 것이다. 유구한 고반(考槃; 악기를 타며 유유자적하며 자연속에서 사는 것)의 흔적은 어떤 물가이고, 어떤 언덕인가. 높은 산처럼 우러러 사모하는 것이 끝이 없이 넓다. 이와 같은 신령함이 저곳이겠는가, 이곳이겠는가. 이곳이로다. 그 덕을 우러러 사모하니 이에서 예의가 있는 것이다. 그 유풍을 상상(像想)한 즉 이 재각을 세우는 것 또한 보탬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러한 후에 후손들 중에서 이 재각에 오르는 자로 하여금 정자를 생각하게 할 것이다. 이 산을 동서로 지나가는 자들도 무덤[南陽阡]90)을 가리키게 될 것이니 또한 아름답지 않은가.
 
그 뜻을 무겁게 하여 말하기를 세상 사람들이 대략 1대를 지나고 2대를 거쳐 대수가 점차 멀어지고, 거주하는 곳도 또한 흩어지게 되면, 각기 몸이 그 몸이요, 각기 그 집이 그 집이 되어, 또한 (왕래가) 드물어지고 어그러져 낮선 사람과 같이 되는 것을 볼 수 있다.
 
우리 선조로부터 그것을 보니 같은 자손이어서 어찌 대가 점차 멀어진다고 그 근본을 버림이 있겠는가, 어찌 살고 있는 곳이 서로 멀어지게 된다고 해서 그 마땅함이 어찌 성기어지겠는가. 무릇 우리 조상을 같이 하는 사람들은 힘쓰고 힘쓸 지어다. 선영이 이곳에 있다.
 
재각을 만드는 일을 2월에 시작하여 5월에 마쳤다. 종장 남택(南宅)씨가 실제로 고생하였다. 재각이 이루어짐에 감사하고 여러 달 동안 특별히 수고하였음이다.
 
전체의 내용을 요점만 간추려 이 시로써 기록한다.
 
재각의 아래에 장강이 있고, 건물 위는 산이로구나
우리 공의 흔적이 이 사이에 있으니
별들이 밝게 비추고 하늘이 열려 통 하는구나
용과 호랑이가 서려있으며, 땅의 기운이 감추어져 있구나
어렴풋하게 둘러져 있는 곳은 제사를 지내는 곳이로구나
정연한 집과 방은 수리(受釐)하는 곳이로구나
해마다 이곳에서 모이니 의가 좋고 화목함이 옳구나
후대의 자손들[雲仍]이 더불어 머무르니 여러대가 보이는구나
 
병술년(1826) 10월 7대손 홍재일91)이 삼가 쓰다.
 
 
 
完山南雲水治 有曰翼山者 其山之東麓 逶邐而下 盤崛包藏者 是所謂基洞 惟我先祖雲巖公 以下累世 壽藏之所也 玆山之脈 盖自白蓮峰 龍飛鳳舞 崒于雲巖江而止 山之形繚 而曲往而復 有若昌黎 所謂盤谷者焉 寒雲散漫 巖谷幽夐 又似晦菴所居 雲谷者焉 豈公之昔日 盤旋之所 而自號曰 雲巖釣叟者歟 公之墓本在玉田上洞 監正公墓所同局 而後更移安于此 其東崗陰 乃承議公塋兆同麓 最上掌樂公幽宅 皆前此所卜者也 每以霜露時 瞻掃享祀 而舊無齋閣 宗黨齊會之時 固以齋宿受釐之無所 容給爲欠 營建此閣者尙矣 往在秋享時 宗長有以山下林木 準備如干 財穀爲議 僉曰諾 材瓦則辦置於蕭寺者 已數年矣 爲之房以給諸宗人 齋宿之 所爲之廳以廣 享祀後受釐之地 閣下又爲之舍三數間 以居守直之人 營之多歲 乃今而成事之成立 亦有時也 今番以後 宗人齋宿有其室 而淨潔享祀 受釐有其廳 而廣豁 受釐之餘於焉 宿留于 以講敦宗 于以叙離濶 豈不美乎 嗚呼 我先祖雲巖公 德行道誼 克襲敬翁 爲當世矜式 粤在妙齡 當黑龍之亂 以白衣奉祖考參判公䟽 跋涉難險 扈從於永柔行在 自上嘉之 特有職命 而以年未强仕辭 經亂以來 世道奔競逐 無意仕進 隱德邱園 經籍爲娛山水 自邊終未展抱負 於當世識者惜之 易簀後鄕人 卽有俎豆之議 而以邦禁未果 時論抑鬱 噫 古家忠孝之道 敬謹之學 承承累世 蔚有家法 士林今猶景慕 況我後昆 其曰 敢懈江流永矣 悠悠 考槃之跡 某水歟某邱歟 高山仰止洋洋 如在之霛 于彼乎 于此乎 於此焉 瞻慕其德 儀於此焉 像想其遺風 則此閣之建 亦不爲無助 然則後昆之登此閣者 以之爲思亭 東西之過 此山者 指點爲南陽阡 不亦美乎 重爲之志曰 世之人 大率一代 二代 代漸遠 而居 又散處 各身其身 各家其家 見且稀濶 則便成路人 自我先祖視之 同一子孫 豈可代漸遠 而遺其本乎 豈可居相遠 而䟽其誼乎 凡我同祖之人 勗哉 勉哉 先塋在此也 閣之役 肇于二月 訖于五月 宗長南宅氏 實爲勤勞也 閣旣成爲謝 多月之賢勞爲之
 
記叙其梗槪 爾詩曰 閣下長江閣上山 我公衣履在斯間 星辰照耀天開豁 龍虎盤挐地秘慳 僾若羮墻將事處 秩然堂室受釐班 年年此會敦親誼 留與雲仍世世看
 
丙戌陽月下澣 七代孫 載一 謹識
 
 

 
각주
78) 전북 임실군 운암면 금기길 20-97(전북 임실군 운암면 금기리 193-22) 운암면 금기리 텃골마을에 있다. 전주에서 순창으로 가는 27번 국도를 타고 가다가 금기로 빠져 텃골마을로 들어가 마을 뒤편 산으로 이어지는 길을 따라 가다보면 길이 끝나는 지점에 있다. 이곳은 남양 홍씨의 재각이다. 운암재는 본래 아래쪽에 있었으나, 1940년 10월 운암댐 축조로 수몰되어 현재의 위치로 옮겨지게 되었다. 운애공(雲涯公 휘 宇慶)을 모신 재각이다.
79) 전북 임실군 운암면 금기길 20-97(전북 임실군 운암면 금기리 193-22) 운암면 금기리 텃골마을에 있다. 전주에서 순창으로 가는 27번 국도를 타고 가다가 금기로 빠져 텃골마을로 들어가 마을 뒤편 산으로 이어지는 길을 따라 가다보면 길이 끝나는 지점에 있다. 이곳은 남양 홍씨의 재각이다. 운암재는 본래 아래쪽에 있었으나, 1940년 10월 운암댐 축조로 수몰되어 현재의 위치로 옮겨지게 되었다. 운애공(雲涯公 휘 宇慶)을 모신 재각이다.
80) 나래산 운암면 용운리와 청운리 경계에 있는 산, 높이 544m.
81) 임실군 운암면 금기리, 텃골.
82) 洪宇慶(1558~1617), 자는 箕瑞, 호는 雲涯, 본관은 남양이다. 출생지는 임실이다. 湖隱公 演의 후손이며, 원주목사 碩舫의 손자이고, 아버지는 수제용감첨정(守濟用監僉正)을 지낸 홍붕(洪鵬)이다. 부인은 임란 명장 전의 이씨 이정난의 딸이다. 임진왜란이 일어나 선조가 의주로 몽진하자 조부인 석방의 명에 의하여 군량과 紙布 등을 어전에 헌납하니, 선조는 그 충성심을 가상히 여겨 목사공 홍석방은 예조참판에 증직하고, 운애공에게는 즉석에서 정사품의 벼슬을 하사하였으나 사양하였다. 1606년(선조 39)에 생원시에 합격하였다. 『운애유고』가 있었으나 전하지 않는다.
83) 백련산, 강진면 방현리, 백련리와 청웅면 두복리 경계에 있는 산, 높이 754m. 백련암이 있다.
84) 한유(韓愈)의 송이원귀반곡서(送李愿歸盤谷序)에서 창려와 반곡을 가져 온 듯. 창려는 한유의 고향임.
85) 주자(주희)의 운곡이십육영(雲谷二十六詠) 중 운곡은 다음과 같다. 雲谷 寒雲無四時 散漫此山谷 幸乏霖雨姿 何妨媚幽獨
86) 임실군 청웅면 옥전리 상동
87) 입향조 호은공 징(徵)의 아들인 휴(休)를 말함.
88) 임진년의 별칭은 현룡(玄龍)이다. 이때 玄은 黑과 같은 ‘검다’는 뜻으로 玄자 대신에 黑자를 사용한 것으로 보인다.
89) 평안도 영원군. 선조가 평양에서 의주로 갈 때 수 개월간 머물렀다.
90) 南陽은 地名이고 阡은 무덤으로 漢나라 때 游俠인 原涉의 先塋이 이곳에 있었기 후세에 장례를 하는 곳을 가리킴
91) 洪載一(1768~1828). 자는 伯惟, 호는 心窩, 본관은 남양. 순창군 적성면 괴정리에서 출생. 제용첨정 敬齋 鵬의 8대손, 통덕랑 成宅의 아들.
임실군(任實郡) 재실(齋室) # 운암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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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 General Libraries 최종 수정일: 2021년 1월 1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