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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실군(任實郡) 재실(齋室) # 노양재
【향토】
(2024.01.02. 21:38) 
◈ 덕계리 노양재(魯陽齋)
오수에서 삼계 소재지로 가는 도중 덕계리 모가울마을로 우회전하여 600여m를 안쪽으로 가다가 보면 노양재(魯陽齋)가 외따로 떨어져있다. 이 재실은 양천 허씨 문중에서 지어 관리하고 있으며 선조 매예(梅裔) 허변(許.)의 재실이다. 팔작지붕에 정면 4칸 측면 2칸의 시멘트기와지붕으로 되어 있다. 건물 내에는 주련이 5개가 있으며, 현판 2개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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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계리 노양재(魯陽齋)
 
오수에서 삼계 소재지로 가는 도중 덕계리 모가울마을로 우회전하여 600여m를 안쪽으로 가다가 보면 노양재(魯陽齋)가 외따로 떨어져있다. 이 재실은 양천 허씨 문중에서 지어 관리하고 있으며 선조 매예(梅裔) 허변(許.)의 재실이다. 팔작지붕에 정면 4칸 측면 2칸의 시멘트기와지붕으로 되어 있다. 건물 내에는 주련이 5개가 있으며, 현판 2개가 있다. 건물은 계미년(1943)에 지었으며 문간에는 고방이 있다. 또한 재실 앞에는 오래된 반송 한 그루가 보기 좋게 자 라고 있다.
 
 
 
 

1. 덕계 중촌 노양재기(魯陽齋記)\\br-;283)\\;

 
만물이 생장하는 하는 것은 하늘의 도에 달려있고, 인걸이 세상에 나는 것은 지세에 달려있다. 동방의 무궁화 피고 지는 지역에 장백(長白)의 거령(巨靈)과 소백의 일맥(一脈)이 높고 급하게 서쪽으로 내달려 덕유산(德裕)과 팔공산(八公)에 이어서 내려 앉았다가 솟아올라 치솟은 노산(魯山)이 날듯이 솟아 올랐다. 툭 튀어올라 갈라진 고갯길에 산을 머금고 열려있는데, 동네 이름은 서림(書林)이고 마을 이름은 목동(木洞)이라고 한다.
 
옛날에는 남원부(南原府)이었지만 새로 임실군(任實郡)이 된 곳으로 지세가 영험하니 어찌 현철(賢哲)한 사람이 없었겠는가? 숙종 연간에 세상이 살 만하고 인걸이 무성하였는데 특히 철인(哲人)이 태어났으니 매와석덕(梅窩碩德) 이름은 변(玣)이고 성은 허씨(許)이시다. 공암(孔岩)의284) 세족으로 성품과 행실이 고결하여 일찍이 세속에 섞이지 않았다. 문장(文章)은 자연히 천 길에 날아올라 빛났다. 이곳을 택하여 거처하고 이곳에서 묻혀 운손(雲孫)과 잉손(仍孫)이 세거한 지 3백여 년 제사를 지내고 선조들의 유훈을 받들며 후세에 알려 대대로 충효(忠孝)를 업으로 삼고 나머지 문장에 힘썼으므로 향론(鄕論)에 이르기를, 시예(詩禮)는 ‘목동의 허씨[木許]’라고 지목하였다.
 
광무(光武) 병오년(1906)쯤에 율와(栗窩) 허석(許晳)이 의견을 내서 서로서로 알리고 권유하여 묘 근처에 재각을 지었다. 다섯 기둥을 세우고 띠로 지붕을 이고, 단계(單階)을 놓고 합문(閤門)을 두지는 않았다. 노양(魯陽)이라고 이름을 지었지만 편액을 달지는 않았다. 봄가을로 향기로운 제수를 올리고 여름과 겨울에 강독(講讀)하였다.
 
오호라! 한말에 세상 일이 더욱 나빠져서 이때에 노서(蘆西) 허간(許幹)이 학규(學規)-노양학규(魯陽學規)를 연구하고 성학(聖學)을 부지(扶持)하며 자신의 임무로 삼았다. 석당(石堂) 허주(許柱)와 몽매(夢晦) 허업(許業) 두 사람이 계승하여 동서고금의 실학(實學)을 참구(參究)하여 먼저 성현의 학문과 도덕, 윤리와 의리를 익히고, 이어서 새로 경제(經濟)와 문리(文理)를 배웠다. 원근에서 배우려고 오는 사람들을 방에 다 들일 수가 없을 정도였다.
 
세월이 흘러 회갑이 되었다. 산골짜기 물가 푸른 소나무 아름드리 목재가 되었기에 집을 고쳐 짓고자 하였으나, 세상이 어지러워져서 재각의 규모를 완성하지 못하여 사람들이 모두 안타깝게 여겼다.
 
갑자년에 종중에서 보수하기로 의논하여 동욱(東旭), 중욱(重旭), 관욱(寬旭), 철욱(哲旭), 용식(用植) 등이 밤낮으로 전념하며 있는 힘을 다해 정성을 드렸다. 일이 막중한데 재력은 미약하여 공적을 모아 나타내기 위해 방책을 다하였는데 밖에 사는 많은 종인들이 소문을 듣고서 협찬하여 물심양면으로 정성을 다하였다. 더러는 후손들이 앞다투어 400을 투자하여 거의 갖출 수 있었다. 당에 올라서는 선조를 추모(追慕)하고 방에 들어가는 예에 대해 강론하게 되었으니 선령이 은연히 도아주고 제군(諸君)이 힘을 모은 덕분이다. 종중에서 현판(懸板)에 대해 의논하여 나에게 글을 쓰라고 하였는데, 견문이 부족한데도 감히 사양하지 못였다. 상량문과 뜰에 앵두나무에 어린 흔적은 아직도 새롭다. 선부군(先府君) 석당(石堂)선생이 노양재(魯陽齋)와 상량문(上樑文)을 손수 쓰셨다. 뜰마당에는 아가위 꽃 피는데285) 지금 봄이다. - 추모하는 문물(文物)에 마음을 끝내 갚지 못하였고 끝내 마음을 에 그 정을 끝내 사양하지 못하고 글은 거칠어 그 마음을 다 채우지 못하였다. 이 글을 우러러 바치니 선인들이 쌓은 사업을 떨어뜨리지 말고 모든 종중에서 힘써 받들기를 바란다.
 
광복후 갑자년(1984) 3월 어느 날
용강(龍崗) 죽오(竹塢)에서 8대손 정(政)이 삼가 적음
 
 
 

1.1. 魯陽齋記

 
萬物發育係於天道 人傑世出由於地靈 靑邱槿域 長白巨靈 小白一脈 嵂崒西馳 德裕八公 次第跽崛崔嵬 魯山翼然聳出 芬岐峛崺 哺岈開局 洞稱書林村名木洞 古府南原 新郡任實 地勢旣靈 豈無賢哲 肅宗年間 世樂人茂 特生哲人 梅窩碩德 諱玣姓許 孔岩世族 性高行潔 未嘗混俗 文章自然千仞羾濯 于斯捧居于斯卜壙 雲仍世居三百餘 禩承奉先訓 以詔後昆 世業忠孝 餘力文章 鄕論詩禮 指目木許 光武 丙午 栗窩(諱 晳) 刱議 胥告胥勸 築齋墓側 五楹草葺 單階無閤 齋號魯陽 楣無題顔 春秋苾芬 夏冬講讀 嗚呼 韓末世事盖下 于時蘆西 (諱 幹) 究景學規(魯陽學規) 扶持聖學 以爲己任 石堂(諱 柱) 夢晦(諱 業) 兩從繼承 參究東西古今實學 先習聖學 道德倫義 次以新學經濟文理 遠近來學 室不能容 荏苒歲月 忽忽回甲 澗畔養松 抱圍成材 改築構屋 世値時擾 齋儀未成 人皆含痛 歲開甲子 宗議治繕 東旭重旭寬旭哲旭用植 晝夜將事 殫誠竭力 事重力綿 鳩僝沒策 在外僉族 聞風協讚 物心盡誠 或後爭先 投資四百 庶幾具容 上堂慕先入室講禮 先靈隱相諸業協誠 宗議懸板 命我記實 聞訟見寡 固謝不敢 樑文庭棣 手譯尙新
 
(先府君 石堂先生 書魯陽齋 上樑文手哉 庭除常棣花 只今尙春)
 
追慕文物 情不終謝 筆莾辭荒 未盡克情 一說仰貢 莫墜先業 願焉諸宗勗哉 勉哉
 
時光復後 初甲子 三之月 日 於龍崗竹塢 八代孫 政謹識
 
 
 

2. 덕계 중촌 노양재(魯陽齋) 중수기(重修記)

 
무릇 조상을 받들고 후손을 교양하는 것은 인류의 큰 본분이라 하겠다. 우리 노양재는 선조 매와처사(梅窩處士) 허변(許玣)에게 제사를 올리는 곳이며 자손들이 강학하던 곳으로 지금으로부터 79년전 단기 4239년 병오(1906)에 나의 조부 허석(許晳)께서 발의하여 종중 재산으로 건립하였다. 유구한 세월에 대들보가 기울고 무너졌기에 지난 42년 전 계미년에 중건하였고, 또 다시 갑자년 봄에 재산을 모아 보수하여 한 달여 만에 공사를 마쳤다. 이에 필요한 재화 3백75만여 원이었다. 아! 앞으로 세상에 바라는 것은 대대로 면면히 중수하는 것이니 그리하면 이 재실의 보존은 무한할 것이라 믿는다.
 
단기 4319년 갑자(1986) 10월 일 9세손 동욱(東旭)이 삼가 쓰다.
 
중수 헌금을 낸 방명기록 생략
 
 

 
각주
283) 삼계면 덕계리 모가울 마을 북쪽에 자리. 양천허씨 매와(梅窩) 허변(許玣)의 재실이다. 오수역에서 동계로 향하는 13번 국도상 삼계면 소재지에 이르기 전 덕계사거리에서 우회전하여 곧바로 왼쪽의 음지교 건너 중촌마을 진입 전 오른쪽으로 난 길 끝, 대단위 축사 뒤 산기슭에 있다. 노양재는 팔작지붕 아래 정면 4칸, 측면 2칸으로 1943(계미년)에 지었다.
284) 양천을 일명 공암(孔巖)이라고도 부르는데 수중(水中)에 공암이 있어서 이 이름으로 현(縣)의 이름을 붙였다
285) 가정(稼亭) 형제의 정의(情誼)가 남다르게 두터움을 비유한 것이다. 형제간의 우애를 읊은 『시경』 〈소아(小雅) 상체(常棣)〉에 “아가위 꽃송이 활짝 피어 울긋불긋, 지금 어떤 사람들도 형제만 한 이는 없지.〔常棣之華 鄂不韡韡 凡今之人 莫如兄弟〕”라는 말이 나온다. 또 옛날에 전진(田眞) 형제 3인이 분가(分家)하려고 재산을 나눈 뒤에 정원의 자형(紫荊) 나무 한 그루까지도 삼등분할 목적으로 쪼개려고 하였는데, 그 이튿날 자형 나무가 도끼를 대기도 전에 말라 죽어 있자, 형제들이 크게 뉘우치고 분가하기로 한 결정을 철회하니 자형 나무가 다시 살아났다는 이야기가 남조 양나라 오균(吳均)의 『속제해기(續齊諧記)』에 나온다.
임실군(任實郡) 재실(齋室) # 노양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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