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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실의 재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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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실군(任實郡) 재실(齋室) # 이로재
【향토】
(2024.01.02. 21:58) 
◈ 두월리 이로재(履露齋)
옛날 임진왜란이 일어났을 때 호남의 이공(李公)이 중봉(重峯) 조헌(趙憲) 등 여러 선비들과 함께 일시에 절개를 지켜 열열하게 의로운 이름이 천추에 빛나게 되었다. 우리 임금께서 임진년을 맞이하여 아경(亞卿)으로 추증하고 儘昇數也 그 후손 이종보(李鍾鳳)이 시를 지어서 그에 대해 적어 두었다. 내가 그 일에 대해서 듣고 장하다고 생각하여 그 운자(韻字)를 따라 부응하고자 한다.
목   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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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월리 이로재(履露齋)
 
 
 
 

1. 두월리 이로재 차운시[敬次]

298)
 
世襲簪纓講義明  벼슬살이 대대로 이어가며 강의(講義)를 밝히니
在公終不忝芳名  공께서도 끝내 향기로운 이름을 더럽히지 않았네.
恬退山林營老計299)  편안히 산림에 물러나 늙어갈 계책이었으나
蹶奔城壘勵軍聲  성루(城壘)로 달려가서 군성(軍聲)을 북돋웠네.
 
殉節定知移學力  순절(殉節)이야 배운 힘을 옮긴 것인줄 알겠지만
表忠今見渥恩榮  표충(表忠)은 이제사 두터운 은영(恩榮)을 보이셨네.
雲孫又有焚黃禮  운손(雲孫)이 다시 분황례(焚黃禮)를 올리니
嚮祝多時盡素情  지난 날 많은 때 본디 마음을 다하였던 게지.
 
눌사생(訥史生) 이우회(李友會)
 
 
 

2. 두월리 이로재

 
옛날 임진왜란이 일어났을 때 호남의 이공(李公)이 중봉(重峯) 조헌(趙憲) 등 여러 선비들과 함께 일시에 절개를 지켜 열열하게 의로운 이름이 천추에 빛나게 되었다. 우리 임금께서 임진년을 맞이하여 아경(亞卿)으로 추증하고 儘昇數也 그 후손 이종보(李鍾鳳)이 시를 지어서 그에 대해 적어 두었다. 내가 그 일에 대해서 듣고 장하다고 생각하여 그 운자(韻字)를 따라 부응하고자 한다.
 
 
昔在龍蛇之年 湖南李公與 趙重峯 諸賢 一時立節烈 烈義名 千秋炳烺 我聖上 壬辰 特贈亞卿儘昇數也 其後孫 鍾鳳甫爲詩以志之 余聞其事而壯之步其䪨而應之
 
 
堂堂旗字揭昭明  당당한 ‘기(旗)’자를 걸어 밝게 밝히니
褁革肆來烈士名  갑옷을 싸서 돌아오니 열사(烈士)의 이름이라.
古壘風雷悲釰氣  옛 성루(城壘)의 바람소리 우레소리에 칼빛이 서러우니
雙祠草樹凜軍聲  두 사당의 초목에 군성은 늠늠하다.
 
英雄感慨千秋淚  영웅이 감개하여 천추에 흘리는 눈물
忠義崢嶸一死榮  충의 서린 崢嶸에서 한 번 죽은 영광이라.
隧道焚黃孫再拜  무덤 가에 분황하니 후손들이 재배하고
殊褒足慰九原情  내리신 포상은 구원(九原)에 깃든 마음을 위로하기 충분하네.
 
내산(萊山) 정은조(鄭誾朝)
 
 
 

3. 두월리 이로재

 
敬次
 
錦山秋日至今明  금산(錦山)의 가을볕은 지금까지 밝구나.
三百年來一士名  3백년 내려온 한 선비의 이름.
身若鴻毛扶國脉  기러기 털이 가벼운 몸으로 국맥(國脈)을 붙드니
義思熊掌樹風聲300)  웅장(熊掌)을 생각하니 나뭇가에 불어오는 바람소리.
 
炳靈地水孤忠凜  땅속의 물 같은 영령301)홀로 충성되고 꿋꿋하시더니
貤贈天官曠世榮  이조에 증직되어 세세토록 영광이 빛나네.
黃紙焚香丹荔奠  황지(黃紙)에 분향하며 붉은 여지(荔枝)를302) 올려
又當舊甲不勝情  다시 옛 날 그때를 맞으니 그 마음을 이길 수 없구나.
 
종하생(宗下生) 종필(鍾弼)
 
 
敬次
 
龍蛇風雨會朝明  임진왜란 비바람에 조선과 명이 모였네.
錦字山高節義名  금산이라는 곳에 고절하고 의로운 이름
東國千年扶正脉  천년 이어온 우리나라의 정맥(整脈)을 부여잡고
南鄕十世倡家聲  남쪽고을에서 10대를 이어온 집안의 명성을 이끌었네.
 
多士封章淸蹕路  많은 선비들이 왕께서 지나는 길에 상소를 올려303)
特恩贈秩亞銓榮  특별히 아경(亞卿) 이조(吏曹)에 증지되는 영예 얻었네.
新銘隧石焚黃日  새로이 비문을 새기고 세우고 분황하는 날에
緬我諸孫感慕情  아득하여라. 우리 후손들의 감모(感慕)하는 마음이여.
 
후손(後孫) 태영(太榮) 삼가 지음.
 
 
敬次
 
卓節堂堂講道明  탁월한 절의 당당하고 강도(講道)는 밝았네
儘知沒世有稱名  돌아가신 후에야 그 이름을 모두 알게 되었네.
學於票爲能精業  율곡에게 배운 학문이 정밀하였고
義若重峰倂倡聲  중봉과 나란히 소리내어 창의(倡義)하였네.
 
公議不湮章甫龥  공의(公議)가 묻히지 않게 선비들이 부르짓으니
特恩蒙贈亞銓榮  특별히 아경(亞卿) 이조(吏曹)에 증직되는 영예를 입었네.
諸孫祗拜焚華詰  모든 자손들이 공손히 절하며 분황(焚黃)을 마치니
履露愀然感祝情  이슬 밟으며 쓸쓸히 감축(感祝)하는 마음이라.
 
후손(後孫) 치영(致榮) 삼가 지음.
 
 
 

4. 두월리 이로재기(履露齋記)

 
선영에 대한 예는 경전에서 징험할 수가 없으나 당송 이래로 인정(人情)에 연유하여 일어나 비로소 제사를 지내고 재실을 마련하였다. 주자께서 남강(南康)을 다스릴 때 유둔전(劉屯田) 응지(凝之)을 위하여 작은 정자를 지었고, 장남헌(張南軒)은 자기 선조 상국(相國)을 위하여 정자를 두었다. 진씨(甄氏)가 그 선대 묘소 아래에 정자를 지었고 진후산(陣后山)304)이 ‘사정(思亭)’이라고 명명하였는데 묘사(墓舍)에 이름을 붙이게 된 것이 여기에서 비롯되었다.
 
무릇 묘라는 것은 백(魄)이 묻힌 곳이기 때문에 돌보지 않아 폐허가 된 무덤을 보면 타인도 감응하는데 하물며 그 후손이겠는가? 우리 집안 돈녕(敦寧) 이규학(李圭學)씨가 그런 까닭으로 ‘이로재기(履露齋記)’를 위해서 그 후손을 보내어 나에게 알리기를
 
“선조 참지공(參知公)과 첨정공(僉正公) 양세(兩世)의 묘가 남원의 북쪽 노산(魯山)의 남쪽에 있다. 참지공은 임진왜란 당시에 중봉(重峯) 조헌(趙憲) 등 여러 제현들과 함께 금산에서 순절하여 옷과 신발만을 이곳에 묻었다. 근래 재각을 창건하였는데 아직도 기실(記實)를 지어 후손에게 물려주지 못하고 있다. 내가 팔십이 넘어 정신이 흐릿하여 대략 엮어서 그 처마에 걸어 두었는데, 그대가 나를 위하여 밝혀 주시오.”
 
하였다. 내가 이르기를, 이렇게 쓰는 것으로 어찌 이 재각의 실기(實記)가 될 수 있겠는가? 선대의 공훈(功勳)과 청백(淸白), 충효와 문학이 모두 여기에 실려 있다. 그 뒤를 이을 사람들은 여기에 모이고 여기에서 강학하며 서리와 이슬을 밟고 첨소(瞻掃)하고305) 유훈(遺訓)을 명심하여 경계해야 할 것이다. 그 행실을 삼가고 닦으면 국당(菊堂)의 옛집이 다시 일어나 창대해질 것이며 빙 둘러친 송추(松楸)와 공고(鞏固)한 동우(棟宇)가 반드시 장차 영원할 것이니 노인께서 게시하려는 뜻이 여기에 있지 않겠는가? 하물며 참지공(參知公) 증직포상되는 은전을 입은 지 300년이 지나도록 겨를이 없었다가 마침내 오늘에야 재기(齋記)를 완성하게 되었으니 이런 때가 있으리라 이렇게 기다린 것인가? 문호(門戶)가 이제부터 거의 융성하게 되겠구나! 내가 장차 눈을 닦으며 기다리겠다.
 
숭정(崇禎) 5계사(癸巳, 1893) 9월 어느날
종하(宗下) 정헌대부(正憲大夫) 예조판서(禮曹判書) 겸지경연(兼知經筵) 의금부(義禁府) 춘추관사(春秋館事) 동지성균관사(同知成均館事) 이유승(李裕承) 지음
 
 

4.1. 履露齋記

 
邱墓之禮於經 無徵唐宋以來 緣人情而起之 始有祭而又有齋 朱夫子守南康時 爲劉屯田凝之作小亭 張南軒爲其先相國置一亭 甄氏作亭於其先墓下 陣后山命之曰 思亭 墓舍之有名 亦始于此也 夫墓者魄之藏也 是以墟墓之感 他人尙有之 况 其後孫乎 吾宗同敦寧圭學氏 以其所爲履露齋記 送其胤諗 余曰 先祖參知公 僉正公兩世墓 在於帶方之北 魯山之南 而參知公當壬辰亂 與趙重峯諸賢同殉於錦山 只以衣履葬之 此齋近年所剏立 而未有記實之文 以貽後者 我以八耋老 昏略綴而揭其楣子 其爲我闡之 余曰是記豈徒爲是齋之記實乎 先世勳勞 淸白忠孝 父學俱載于此 爲其後承者 聚族于此 講學於此 履霜露而瞻掃 服遺訓而警惕 飭其躬而砥其行 則菊堂古家 復中起而昌大 松楸之衛護 棟宇之鞏固 必將永世矣 老人揭楣之意 其在斯歟 况參知公 贈褒之恩 歷三百年 未遑者竟蒙於今日 齋記之成 又在此時 是若有待矣 門戶之隆興 從此其庶幾乎 余將楷眠而待之
 
崇禎 五癸巳 九月 日
宗下 正憲大夫 禮曹判書 兼知經筵 義禁府 春秋館事 同知成均館事 裕承306)
 
 
 

5. 두월리 이로재기(履露齋記)

 
말천방[秣川]은 용성부(龍城府; 남원) 서쪽에 있는 명승지로 한 면을 빙둘러 계곡과 산이 맑고 수려하며 한아름 나무들이 울창하다. 여러 성씨가 터를 잡고 세거하며 선영(先塋)을 지키며 살고 있다. 언덕 기슭마다 어느 성씨의 봉분(封墳)이 있고 어느 성씨의 재각(齋閣)이 있는데 세상의 규범을 따라 묘재(墓齋)를 크게 짓게 된 것이다.
 
남원의 말천(秣川)이라고 하는 곳에서 2리 떨어진 곳에 사인동(舍人洞) 동쪽에 평평하고 거대한 암벽(巖壁)이 하늘을 향해 꼿꼿히 서 있는데 큰 글씨로 특별히 새기기를, ‘경주이씨 선산’이라 하였으니 곧 우리 이씨의 세장지(世葬地)이다. 이 골짜기는 선조 사인공(舍人公)이 일찍이 걸음하여 펼치신 곳이기 때문에 후인들이 그렇게 이름지었다. 뒤에 작은 고개는 ‘이현거(李峴)’이라고 하였는데 고개길 좌우전후에 돌 사이 사이에 꽃이 피는 곳이다.
 
몇 백년이 내려와 우리 가문이 자리를 잡게 되었으니 고개이름과 모여 사는 성씨가 상부(相符)한 하늘이 특별하게 다룬 기이한 증험이라고 하겠다. 동서 양쪽 기슭에 참판공(參判公) 이하 소목(昭穆)의 차례대로 안장되어 있다. 북쪽으로 묘 아래에 높다란 재각이 하나 있다.
 
옛날 경자년(1900) 고조부[高王考] 양낙당공(兩樂堂公)이 실로 경영하고 창립하면서 ‘이로(履露)’라고 편액하였고 옥류거사(玉流居士) 이삼만(李三晩)이 글씨를 썼다. 근래 돈녕부(敦寧) 대종백(大宗伯) 양공(兩公)이 아울러 실기(紀實)하였다.
 
매년 10월 상순에 우리 같은 할아버지의 후손들은 길일을 정해 옷을 갖춰 입고 이곳에서 모여서 제수를 진설하며 제사를 드리면 그 향기를 흠향(歆饗)하실 것이다. 재각에 올라 여기에서 여수례(旅酬禮)307) 를 행하면보고 느끼는 것이 있을 것이다. 눈서리 내릴 때 비맞고 이슬밟으매 보고 느끼는 것이 있을 것이다. 시물(時物)의 변천을 살펴보고 인사의 존몰(存沒)을 슬퍼하였다. 선조의 영령(英靈)이 좌우(左右)의 당호(堂戶)에 오르내리시니 음성이 들리는 것 같고 선조의 흔적이 완연히 계시니 거의 방불(彷佛)하다. 가만히 생각해보니 서리와 이슬은 짐짓 사람을 감동하게 하는 것이니 군자가 서리와 이슬을 밟는다는 것은 추원(追遠)의 정성이 『시경』에 이르기를, “너의 조상을 생각하지 않느냐, 그 덕을 닦아야 한다.”라고 하였으니 밤늦게까지 게으르지 않고 선조께서 하신 말과 행실을 생각하여 그 도덕(道德)과 충효(충효)는 어떠하였는지 문학(文學)과 행의(行義)는 어떠하셨는지 생각하고 생각하여 규범과 세업을 각준(恪遵)하니 그 아름다움이 어찌 군자가 진실로 상로(霜露)를 밟는 것이 아니겠는가? 그렇다면 어찌 하늘에서 이슬을 내리지 않아도 이 재각에 이슬 맺혀 감흥하며 어찌 사람이 이슬을 밟지 않아도 군자는 척념(惕念)하리니 이것이 양낙공이 당일에 재각의 이름을 지은 본뜻이 아니겠는가? 아! 재각이 완공된 지 60년이 흘렀고 공께서도 세상을 떠난 지 오래 되었다. 어찌 내가 감히 거친 글로 선조의 뜻과 사업을 이어가라고 할 수 있겠는가? 더욱이 상로로 감흥할 뿐이다.
 
경자년(1960) 3월 18일 상량 1주갑기념
후손 이원중(李種元) 삼가 씀.
 
 
 

5.1. 履露齋記

 
秣川龍城府 西一名勝地也 環一面溪山明麗 拱木鬱蒼 凡十數姓 接壤世居 保守 先壠亩岡麓 遇有一姓堂封 輒有一姓齋閣 率爲世規 是以墓齋之宏設 南鄕稱秣川 此距二里 舍人洞東畔 有平面巨巖 壁立天成 大書特鐫曰 慶州李氏先山 卽我李世葬兆也 是洞也 先祖 舍人公 往嘗履及而聿胥焉 故後人名其尙洞後一小峴曰李峴 據峴之左右前後 一花一石 幾百年來 爲吾家平宗 峴名與氏姓 聚相符合 殆天所異 儘一奇驗也 東西兩麓岡 參判公以下 序昭穆安宅 北就墓下稍爽地 一齋巍然 舊庚子歲 高王考兩樂堂公實經紀而 刱立之扁之以履露 前玉流居士 李三晩書之 近同 敦寧大宗伯 兩公並紀實焉 每遇歲十月上旬 凡我同祖雲仍 吉蠲盛服 齊會于此 籩䇺旣陳 上墓將事 苾芬訖饗 登齋旅酬於是 其有觀感乎 霜雪雨露 載降載濡 覽時物之變遷 愴人事之存沒 先祖英靈 陟降左右 堂戶而如聞聲容梓楸焉 宛存乎 澤庶乎其彷佛矣 窃惟霜露固物之善感人者也 君子履之也 追遠之誠 容有其已乎 詩曰無念爾祖 聿脩厥德 夙夜匪懈 克念先祖 前言往行 道德忠孝之如何 文學行義之如何 兆君子履之之實歟 然則何天無露 露是齋而興感 何人不履 履君子而惕念 此兩樂公當曰名齋之本意也歟 噫 齋成奄周星曆 公且下世已久 安知夫不肖敢將蕪辭 繼志述事云乎哉 尤切霜露之感也已
 
時庚子 三月 十八日 抛樑一周甲記念也
後孫 鍾元 謹記
 
 
 

6. 두월리 이로재(履路齋)

 
고(故) 첨지(僉知) 이공(李公) 퇴사암(退思菴)은 임진년(1592)에 창의했던 명현(名賢)이시다. 진실한 충성과 꼿꼿한 절개가 천지에 다함이 없고 고금에 뻗쳐 있으니 열열히 길이 보존되어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일찍이 생각건대 늠연(凜然)하게 어제 일 같으니 누군들 경앙(景仰)하며 격려하지 않겠는가!
 
그 후손 이종봉(李鍾鳳)이 왕년에 증직 첩지를 받들고 분황례(焚黃禮)를 행할 때 원운(原韻)을 꺼내 나에게 보여 주었다. 내가 비록 식견이 없다고 할지라도 선현(先賢)을 사모하는 뜻으로 구구하게 한 마디도 하지 않을 수 없어서 수창(酬唱)하며 대략 서술하고 사(詞)를 지어 화답한다.
 
 
故僉知李公退思菴 卽壬辰倡義之名賢也 貞忠直節窮天地亘古今 烈烈長存而不杇 嘗思之凜然若隔晨事 就不爲景仰激勵哉 其後孫 鍾鳳甫 往年 奉贈牒祗 行焚黃之禮 拈出原韻以示余 余雖湔涊蔑識 區區慕賢之義 不可無一言 酬唱略敍 拙詞而和之
 
 
卓節洋洋日月明  탁월한 절개는 양양(洋洋)하여 해와 달처럼 밝고
千秋不朽錦山名  금산(錦山)에 남긴 이름은 천추(千秋)에 영원하리네.
曾聞乙帳垂恩牒  일찍이 들으니, 어전[乙帳]308)에서 직첩(職牒)이 내렸으니
以勗龍年倡義聲  임진년에 창의(倡義)에 더욱 힘썼네.
 
祼薦須觀先世蠋  제사 올리니 선세(先世)의 흔적이 보이고
籙銘應篤後孫榮  새긴 이름에 번성한 후손들이 정의가 돈독하구나.
春堂鶴髮兼承渥  춘당(春堂)에 오른 백발 노인이 은혜를 받으시니
自激爲君攢賀情  저절로 북받치네 그대의 하례(賀禮)의 정.
 
백하(白荷) 정원화(鄭元和)
 
 
 

7. 두월리 이로재(履路齋)

 
퇴사암의 증직 분황에 차운한 시
 
孤忠卓節日星明  외로우나 탁월한 충절은 해와 별보다 밝으니
竹帛千秋不朽明  역사에 길이길이 변하지 않고 밝으리.
生事栗翁眞得力  살아서는 율곡선생을 섬겨 진실로 득력(得力)하더니
死從重老烈同聲  죽어서는 중봉선생을 쫓아 열열한 동지 되었네.
 
九天閭闔靑襟叫  임금 계신 곳에 유생들이 부르짓으니
五甲泉臺紫誥榮  오갑(五甲)이 지나 지하에309) 내린 310) 자고(紫誥).
克世其家賢嗣在  그 가문을 훌륭히 이어가는 현명한 후손도 있으니
闡揚是日感恩情  이 날에 천양(闡揚)되니 은정(恩情) 감격스럽네.
 
德殷宋秉珣稿 덕은 송병순
 
 
 

8. 두월리 이로재(履路齋)

 
대아 이졸헌(李大雅拙軒)이 선조가 추증되어 분황할 때의 원운을 보여주어, 또한 갑작스러워 삼가 용지(庸志)가 흠송하다.
 
 
李大雅拙軒 以其先祖 貽贈焚黃時 原韻 見示率爾 謹步庸志欽誦
 
 
褒忠恩誥感幽明  충의를 포창하여 은혜로운 교지를 내리니 유명(幽明)에서 감동하니
明百年來始顯名  밝은 백년 이래 비로소 명성이 드러났네.
氣作山河鞏國勢  기상은 산하가 되어 국세(國勢)를 굳건히 하여
典追金石樹風聲  금석같은 법전에 따라 추증하니 풍성(風聲)을 심었네.
 
儘知經學終爲用  경학(經學)을 공부하기를 종신토록 행하니
豈止鄕邦興有榮  어찌 향리에 그 영예가 그치겠는가.
鶴髮春堂亦承蔭  춘당(春堂)의 백발 노인이 음덕(蔭德)을 이으니
此停鸞鵠不勝情  여기에 난곡(鸞鵠)이311) 머무르니 그 정 이기지 못하겠네.
 
 
 

9. 두월리 이로재(履路齋) 차운시

 
錦山山氣萃文明  금산의 산 기운에 문명(文明)이 모이니
忠烈諸賢並有名  충열(忠烈)한 제현(諸賢)과 명성을 나란히 하네.
歲紀重回多積恨  세월이 거듭 돌고 돌아 한 쌓이고 쌓였네.
士林公議仰齊聲  사림의 공의로 일제히 우러르는 소리
 
當時騎省三堂職  당시 병조[騎省]의 삼당(三堂) 직책이러니
今日銓曹二品榮  오늘은 이조[銓曹]의 이품의 영광이라.
紫帶敬焚黃紙誥  자색 띠 삼가 분황(焚黃)하라는 교지 내리니
一門餘慶感恩情  일문(一門)에 경사 있으니 은정(恩情)에 감격스럽네.
 
단재(湍齋) 서의순(徐誼淳)
 
 
秋齋讀史剔燈明  우리 재실에서 역사 책 읽으며 밝은 등불 돋구네
難得人間曠代名  인간 세상에서 밝은 명성 얻기 어려웁네.
公與重峯死於國  공과 중봉선생은 나라 위해 죽으시니
卓然左海樹之聲  탁월한 우리나라 바닷가의 명성이여!
 
陣雲不散精忠魄  진운(陣雲)312)이 흩어지지 않으니 정성어린 충혼(忠魂)
鄕月初看封贈榮  고향달 봉증(封贈)되는 영광을 보았네.
此日仍孫縻好爵  오늘날 후손들이 좋은 벼슬 자리 지내니
焚黃拜墓若何情  분황(焚黃)하며 배묘하니 그 정이 어떠하리.
 
추당생(秋塘生) 송영대(宋榮大)
 
 
 

10. 두월리 이로재(履路齋)

 
廓掃氣祲仗大明  온누리에 나쁜 기운 청소하니 천지 밝고
立慬當日幾高名  충의를 떨친 그날 얼마나 이름을 날렸나
鄕山隱遯曾娛老  고향산에 은거하며 즐거이 늙어가니
黌塾藏修久播聲  학교에서 책읽고 학문하는 소리 오래도록 퍼지네.
 
義旅殉忠千古凜  의병이 충성으로 순절하니 천고에 늠름하여
天官贈衼一門榮  이조에 증직되니 일문(一門)의 영광일세
樹風百世皆矜武  백세토록 나무 바람, 용맹을 자랑하니
庶尉泉臺不寐情  지하에서 위로되리니 잠못드는 마음이여
 
간산(幹山) 조병필(趙秉弼)
 
 
차운시[敬次]
 
五度龍年際聖明  다섯 번째 임진년 즈음 내리신 성명(聖明)
朝家貽贈闡芳名  조정에서 증직하니 향기로운 이름 날리네.
貳銓華誥深追感  이조의 빛나는 교지에 추모하는 마음 깊어지고
百世貞烈蔚有聲  백세토록 정열(貞烈) 그 명성 무성하리라.
 
東土士民崇節義  우리나라 사민(士民)의 숭고한 절의(節義)
南州草木動光榮  남녘 고을 초목에도 광영(光榮)을 입었네.
揚先幸賴賢仍在  선조를 선양(宣揚)하는 현명한 후손 다행히 남았으니
宗族鄕閭頌祝情  향리에서 송축(頌祝)하는 종족들의 마음이여
 
유당(幽堂) 정인학(鄭寅學)
 
 
 

11. 두월리 이로재(履路齋)

 
敬次
 
錦峀蒼蒼錦水明  창창한 금산의 비단같이 맑은 물
英魂毅魄樹芳名  영혼(英魂)과 의로운 넋 옥수(玉樹)의 향기로운 이름.
護祠此地酬忠節  두 사당 이곳에서 충절(忠節)에 보답하여
一旅當時幷義聲  당시 하나의 의병 의로운 외침 드높네.
 
南帶方都懷故跡  남쪽 대방(帶方)의 고도 고적(故跡)을 품었으니
東銓部誥耀新英  이조(吏曹)의 직첩에 새로이 빛나는 영광.
鱗邦每地龍年感  이웃나라 모든 땅에 임진년의 감회
慷慨千秋烈士情  천추(千秋)에 강개(慷慨)하는 열사(烈士)의 마음이여.
 
이당생(怡堂生) 서병호(徐丙祜)
 
 
宿霧初消海月明  묵힌 안개 비로소 걷히니 바닷가 달 밝구나.
南證義旅久留名  남쪽의 의병[義旅] 오래도록 남은 이름.
兩賢俎豆同其重  두 현인 모시는 제사, 그 중요함이 같구나.
一世楧楷得此聲  일세(一世)의 모범이 되시어 이런 명성을 얻으셨네.
 
往事雨涼堪絶蹟  지난일 서늘한 빗줄기 끊어진 종적을 견디며
聖恩天覆始增榮  성은(聖恩)이 하늘처럼 보살펴주시니 비로소 영예 더해지고
雲孫華髮承簪笏  후손이 백발되어 벼슬살이 이어가네.
餘慶高門倍感情  집안 후손에게 남을 경사, 더욱더 감격스런 마음이여.
 
북계생(北溪生) 박돈양(朴暾陽)
 
 
 

12. 두월리 이로재(履路齋)

 
蹈命而安見理明  운명을 따라 순응하니 밝은 이치를 보았구나.
能於身後有其名  능히 그 몸으로 한 후에 그 이름이 되었네
從遊栗谷窺眞境  율곡선생을 종유하여 진경(眞境)을 엿보았고
曾與重峯倡義聲  중봉선생과 더불어 소리내여 창의(倡義)하였네.
 
一省靑襟揚善事  한결같이 살핀 유생 선사(善事)를 드높이고
九門紫誥貽殊榮  궁궐에서 내린 교지로 특별한 영광 입었구나.
鳴呼此歲如相待  아아! 올해에 기다린 듯
曠感千秋志士情  만나지는 못했지만313) 영원히 남을 지사(志士)의 마음이여!
 
기당(綺堂) 정원하(鄭元夏)
 
 
昭森星月滿天明  빛나는 별과 달이 하늘 가득히 밝구나.
大義堂堂百世名  당당했던 대의(大義) 백세토록 남을 이름
湖左溪山宜晩計  호남 좌도의 산과 계곡에 알맞은 만년 계책
島中樹木尙秋聲  섬 가운데 수목(樹木)에는 아직도 가을 소리 들리네
 
重峯烈士曾同志  열사(烈士) 중봉선생은 일찍이 동지였지
吏部華啣特貤榮  이조의 화려한 직함 특별히 증직된 영광
庭有肖孫能闡述  뜰안에 후손이 널리 이어가니
聞風異代不勝情  풍모를 들으니 시대가 달라도 어찌할 수 없는 마음
 
해평(海平) 윤달영(尹達榮)
 
 
 

13. 두월리 이로재(履路齋)

 
敬次
 
南湖水麗錦山明  수려한 호남의 금산이 밝구나.
不眛英靈在盛名  잠들지 못하는 영령이 남긴 성대한 이름.
赴義褊師掀岳勢  의병을 일으켜 큰산 들어올릴 기세
褒忠高秩樹風聲  고관에 증직된 포충(褒忠)은 나무 바람 소리
 
兩賢地下從無愧  지하에 계신 두 현인 쫓아 부끄럽지 않으리
百世人間與有榮  백세토록 인간세상에 남을 영예이구나.
宰木蒼蒼餘蔭發  무덤가 나무는 창창하여 선조의 여음(餘蔭)이 일어나리니
年湥猶慰子孫情  연연히 흘러서 자손의 마음을 위로하리라.
 
송수(松叟) 심능용(深能용)
 
 
 

14. 두월리 이로재기(履露齋記)

 
재실의 이름을 ‘이로(履路)’라고 한 것은 조상을 추모하며 감회에 젖어 서글퍼진다는 뜻이다. 남원 땅 북쪽 40리쯤 노산(魯山)의 남쪽 기슭 사인동(舍人洞) 뒤에 자좌원(子坐原)은 우리 11세조 참지공(參知公)의 무덤이 있는 곳이다. 선영(先塋) 아래에 몇 걸음 가지 않아서 10세조 첨정공(僉正公)의 무덤이 있다. 자손들이 묘 아래에 세거하면서 해마다 제물을 올리고 날마다 송추(松楸)를 살피면서 탄식하며 우러르며 슬퍼하는 마음이 있었다.
 
아! 우리 시조는 신라의 좌명공신으로 대대로 길게 이어졌다. 무릇 고려 말에 송암(松巖) 문희공(文僖公)의 훈공과 국당(菊堂) 문효공(文孝公)의 도덕에 대해 역사에 실려 있다. 조선조에 들어와서는 월성군(月城君) 이경중(李敬中)은 태조조에 찬성(贊成)을 지냈다. 판서공(判書公) 이연석(李延碩)은 세조조에 청백리에 녹훈되었다. 13세조에 이르러 사인공(舍人公) 이감(李堪)은 호남 순찰사를 지냈다. 12세조 현감공(縣監公) 이주신(李周臣)은 임실현감을 지낼 때 남원의 북쪽 사인동으로 옮겼다. 고을의 이름이 사인인 것은 사인공이 처음 자리를 잡았기 때문이다.
 
4대 참지공(參知公)은 임진왜란 때 중봉(重峯) 조헌(趙憲) 등 여러 선비들과 함께 의병을 일으켰다가 금산(錦山)에서 함께 순절하였기 때문에 공의 무덤에는 다만 의관이 안장되어 있다. 첨정공의 행적은 당세에 드러나 있어서 양대의 명절(名節)에 대해 공의(公議)가 있었다. 그러나 포증(褒贈)되는 은전은 아직까지 입지 못하여 자손들은 지금껏 한스러워 서리와 이슬을 맞으며 얼마나 흐느꼈는지 모른다.
 
우리 고종 임금님의 임진년(1892)은 공이 순절한 후 다섯 번째 맞이하는 해이다. 도내 유림들이 어가(御駕)가 지나는 길에 일제히 호소하여 특별히 포상하는 은전을 입었다. 이조참판에 증직되어 그 충절을 드러낼 수 있게 되었고, 호조참의에 증직되어 그 학행을 기리게 되었다.
 
2백여 년 제사를 드리며 구덕(舊德)에 보답하고 천은(天恩)에 감사드리며 선령(先靈)에 위로가 되었을 것이리라. 이듬해 두 분이 동교(童敎)에 추증되는 은전을 입어 묘갈(墓碣)을 다시 세우고 그 실적(實蹟)에 대해 새겨 두고자 한다. 일찍이 경자년 봄에 족대부(族大父) 후(厚)氏가 여러 종족에게 묻고 모의하여 재사(齋舍)를 창립하였는데 편액은 걸었는데 실기(實記)를 짓지 않아서 내가 지금 분황(焚黃)하는 날에 그 전말에 대해 간략하게 적어서 후손들에게 보이고자 한다.
 
1893년(숭정 5계사) 8월 일
후손 가선대부(嘉善大夫) 동돈녕부사(同敦寧府事) 이규학(李圭學)이 삼가 씀
 
 
 

14.1. 履露齋記

 
齋名履露者 追慕祖 先感時 沐湯之意也 帶方北四十里許 魯山南麓 舍人洞後 子坐之原卽 我十一世祖 僉知公 藏衣履之所 塋階下不數武之地 十世祖 僉正公 繼葬之所也 子孫世居墓下 歲享芬苾 日省松楸 愾然有瞻愴之心焉 粤我始祖佐命新羅 世襲蟬聯 逮夫麗季 松巖文僖公之勳烈 菊堂文孝公之道德 昭載史 乘入于我朝 月城君 諱敬中 太祖朝爲贊成 判書公 諱廷碩 世廟朝 錄淸白 至十三世祖 舍人公 諱堪 巡察湖南 十二世祖 縣監公 諱周臣 知任雲水 時搬奠于南原北舍人洞 洞名舍人者 以舍人公之始占于此故也 四代參知公 當龍蛇燹與趙重峯 諸賢幷 擧義旅 同殉于錦山 公之玄亟但以衣冠葬之 僉正公 以甚行著于當世兩代名節在公議可蒙褒贈之典 而尙闕焉 子孫至今筎恨不知幾泣霜露矣 今上 壬辰卽 公殉義後 五回甲也 道內章甫 齊籲蹕路 特蒙褒典 贈吏曹參判 以表忠節 贈戶曹參議 以褒學行 二百餘年之下 得享食 舊德之報 感祝 天恩庶慰如在之靈矣 粤翌年 繼蒙兩世童敎之贈改竪墓碣 而鐫其實蹟耳 曾於庚子春 族大父 후氏詢謨 諸宗創立需舍 有楣額 而無記實 故余於今焚黃之日 略記顚末 用示來裔
 
崇禎 五癸巳 八月 日 後孫 嘉善大夫 同敦寧府事 圭學 謹識
 
 
 

15. 두월리 이로재(履路齋)

 
퇴사암공(退思庵公)의 증직 첩지(牒紙) 분황할 때[원운]
 
선조 참지공(參知公)은 어려서 경학으로 이름을 알리고 율곡 선생을 종유(從遊)하였다. 말년에 절개를 지키려 호남으로 퇴거하였다. 임진왜란을 당하여 의병을 일으켜 중봉(重峯) 조헌(趙憲)과 함께 금산(錦山)에서 순절하였다. 지금 임금께서 임진년을 맞이하여 이조참판(吏曹參判)에 증직해 주셨기에 분황일에 사운시(四韻詩)를 지어서 정성껏 사모하는 마음을 붙인다.
 
 
退思庵公贈牒焚黃原韻
 
先祖參知公 早以經學著名 從遊栗谷先生 晩節退居湖南當龍蛇亂 倡起義旅 與趙重峯 同殉于錦山 今上壬辰蒙 贈吏曹參判 焚黃日拈構四韻 以寓感慕之忱
 
 
先祖精忠大義明  선조의 정충(精忠)과 대의(大義) 밝으니
壬辰靑史早垂名  임진년 역사에 이름을 드리웠네.
禮重焚黃加贈秩  분황(焚黃)의 예는 무거운데 증직되었으니
家傳淸白克追聲  집안에 전해지던 청백리(淸白吏) 더욱 추모하는 소리
 
百世苾芬將祀事  백세토록 제향을 올리며 사사(祀事) 하리니
一邱松柏帶恩榮  무덤가 언덕 송백(松柏)도 은혜로운 영예 두르네
北堂官誥同時降  북당(北堂)에도 교지가 동시에 내리니
喜感偏深小子情  기쁨이 아들의 마음에 더욱더 깊어지네
 
불초 종봉(鍾鳳)이 삼가 짓다.
 
 
 
 

16. 두월리 이로재(履路齋)

 
우리 집안 졸헌(拙軒)의 선조는 병조[騎省]314) 참지(參知)를 지내신 분이다. 공께서는 선조대에 경학과 문장으로 성대한 명성을 얻었다. 만년에는 호남으로 물러나 살았는데, 임진왜란 당시 중봉(重峯) 조헌(趙憲) 선생 등 여러 제현들과 함께 창의하여 금산(錦山)에서 순절하였다. 우리 임금께서 임진년(1892)을 맞이하여 특별히 이조참의[吏參]에 증직하셨다. 분황(焚黃)하는 날에 감회가 깃든 시를 내게 보여주기에 삼가 원운(元韻)에 따라 짓어 축하하고자 한다.
 
 
吾宗拙軒之先祖 騎省參知 公當宣廟盛際 以經學文章 蔚有聲望 晩年退居湖南 及龍蛇燹與 趙重峯 諸賢倡義 殉節于錦山 今上壬辰 特贈吏參 焚黃日 有詩寓感示 余謹步元韻以賀
 
 
邃學淸忠夙講明  깊은 학문에 맑은 충절을 밤낮으로 연구하여 밝히더니
身前身後兩全名  살아서도 죽어서도 그 이름을 온전히 하셨네.
貳卿特贈今銓選  오늘에야 이조 참판에 특별히 증직되니
百世相聞是義聲  백세토록 의리의 명성이 알려지겠네
 
華貫蕃支由積德  후손들의 화려한 관직살이 쌓아놓은 덕으로 말미암아
肖孫官秩又殊榮  그를 닮은 후손의 벼슬도 특별한 영광일세
遙知舞彩焚黃席  색동옷 입고 춤춘 마음 분황 자리에서 어렴풋이 알겠네315)
白首偏深孝子情  백발이 된 효자의 마음에 더욱더 깊어지네
 
종하(宗下) 규당생(圭堂生) 교영(敎榮)
 
 
 

17. 두월리 이로재(履路齋)

 
가선대부(嘉善大夫) 이조참판(吏曹參判)에 증직된 행병조참지(行兵曹參知) 퇴사암(退思庵) 경주이씨(慶州李公)의 묘갈명(墓碣銘)
 
국가가 100년 동안 평안하여 백성들은 전쟁을 겪지 않았고 중외(中外)가 느슨해져서 전쟁을 잊은 지 오래 되었다. 갑자기 임진왜란을 당하여 큰물의 흐름에 휩쓸리듯이, (일본군이) 지나간 성읍은 풍문만 듣고 달아나서 삼도(三都)에서 달아나 오묘(五廟)의 무덤마저 지키지 못하였다. 예부터 전쟁의 참상이 이보다 심한 적이 없었다. 당시 우리 선조와 같은 분도 있었다.
 
중봉(重峯) 조헌(趙憲) 선생이 창의(倡義)하여 의병을 일으키고 격문을 돌려, 원근의 열사(烈士)들과 함께 향응(響應)하여 서원(西原; 청주)에서 크게 승리하고. 다시 금산으로 다시 공격하려고 하였다. 공께서는 당시에 남원의 시골집에 계셨는데, 변고가 일어났다는 소식을 듣고 통곡하며 같은 뜻을 지닌 선비들을 규합하고, 집안에 있는 장정들을 거느리고 위험에 빠진 선생을 쫓아서 칼을 밟고 도끼를 무릅쓰고 기꺼이 달려 나갔으나 많은 적을 대적하지 못하고 힘이 다하여 운명하셨다. 운명을 함께 한 칠백 명 가운데 한 사람도 살아남지 못하였으니 이것은 더더욱 천고(千古)에 다시없는 일이었다.
 
공은 본관이 경주이고 이름이 이윤(李潤)으로 자는 존중(存中), 호는 퇴사암(退思庵)이다. 시조 알평(謁平)은 신라 좌명공신(佐命公臣)이었다. 고려말의 문희공(文僖公) 이세기(李世基), 문효공(文孝公) 이천(李蒨), 조선의 월성군(月城君) 이경중(李敬中)은 삼대가 계속해서 재상이 되었다. 다시 내려와 이정석(李廷碩)은 관직이 판서에 이르렀는데 공에게는 5대조이시다. 고조부 이동(李侗)은 감찰(監察)을 지냈으며, 이조 참의에 증직되었다. 증조부 이길안(李吉安)은 사정(司正)을 지냈으며 이조 참판에 증직되었다. 조부 이감(李堪)은 전라감사를 지냈으며, 아버지 이주신(李周臣)은 임실현감을 지냈다. 어머니는 안동김씨로 현감 김맹성(金孟誠)의 따님으로 아들 일곱을 낳았는데 공께서 넷째 아들이다.
 
일찍이 경학(經學)으로 율곡 이선생과 종유(從遊)하였고, 만년에는 중봉선생과 도의(道義)로써 교유하며, 춘추대의(春秋大義)를 강마(講磨)하였다. 선조조에 출사하여 병조참지(兵曹參知)를 지냈는데 후에 관직을 버리고 남원의 북쪽 말천방(秣川坊) 사인동(舍人洞)에 거주하였다. 이곳은 감사공(監司公)께서 전라감사로 있을 때에 정한 곳이었다. 감사공의 관직이 사인이었기 때문에 그 이름이 되었다.
 
공은 선조의 사업을 이어서 경술(經術)에 뜻을 두고 벼슬길을 나갈 뜻은 끊어버렸다. 세상이 어지러워지자 죽는 것을 자기 집에 돌아가는 것처럼 여기시고316) 그 뜻을 돌이키지 않으셨으니 어찌 이렇게 분별할 수 있는 것인가? 이로부터 후손들이 영락하여 타향살이를 하다보니 임금님께 상달(上達)하지 못하여 끝내 표창[褒寵]되는 은혜를 입지 못하여 사림들이 답답해하며 탄식한 지 오래되었다.
 
얼마나 다행인지 우리 고종 임금이 5회갑이 되는 임진년(1892)에 임금이 거둥하실 때 선비들이 올린 상언(上言)을 돌아보시고 감응하여 특별히 화곤(華袞)을317) 내려 아경(亞卿)의 관직에 증직되었다. 조정에서 은전을 내렸으니 남은 서운함이 없으며, 눈감지 못하였을 충현(忠賢)의 영령에게도 위안이 되었을 것이다.
 
집안사람들이 일찍이 공의 의관(衣冠)을 사인동(舍人洞) 뒷산의 자(子)의 방향 언덕에 부인과 함께 안장하였다. 부인 순천김씨(順天金氏)는 김사길(金思吉)의 딸로 정부인(貞夫人)에 증직되었다. 아들이 한명 있다. 아들 이천행(李天行)은 첨정(僉正)을 지냈고 호조참의(戶曹參議)에 증직되었다. 손자는 둘인데 장손은 이희(李凞)이고 첨정(僉正)을 지냈는데 후사가 없다. 둘째 손자 이점(李點)은 학행(學行)으로 동몽교관에 증직되었다. 증손은 다섯인데, 이지고(李志皐)와 이지설(李志卨)은 품행이 방정하고 뛰어났으며, 이지익(李志益)은 효성으로 교관(敎官)에 증직되었다. 이지열(李志說)과 이지석(李志奭)은 모두 학행으로 고을에서 이름이 났다. 이지석은 우암(尤庵) 송선생(宋先生)을 사사하였다. 후손들 가운데 문학과 행의가 있는 사람이 많아서 세상 사람들이 칭찬하였다. 어찌 선조들이 선을 쌓아서 얻은 보답이 아니겠는가?
 
공의 후손 이규필(李圭弼), 이종원(李鍾元), 이동우(李東雨)가 나에게 공의 공적을 보여주면서 일언(一言)을 얻어서 무덤가에 세우고자 한다고 하였다. 내가 비록 적임자가 아니라는 것을 알지만 선대의 정의를 생각하여 사양할 수가 없었을 뿐이다. 간략하게 서술하고 이어서 명을 짓는다.
 
 
有氣浩然  호연(浩然)한 기운 있어
克塞穹壤  천지 사이에 지키셨으니
人孰不受  사람이라면 누군들 받아들이지 않겠냐마는
患不能卷  그 행적을 남기지 못할까 걱정이었네.
有時而餒  그때에 굶주림에
禍福所動  화복(禍福)이 흔들렸으나
公之所存  공께서 사는 동안
義重身輕  의를 중히 여기시고 몸은 가벼이 여기셨으니
旣見死所  이미 돌아가실 곳을 알고
勇往力行  용감하게 앞장서서 힘껏 싸우셨으니
有來千秋  앞으로 오래오래
證諸幽堂  무덤 가에서 증명되리라.
 
무술(戊戌) 정월 하한
통정대부(通政大夫) 전행상주목사(前行尙州牧使) 진천(鎭川) 조원식(趙元植) 삼가 지음
 
 
贈嘉善大夫 吏曹參判 行兵曹參知 退思庵 慶州李公墓碣銘
 
國家昇平百年 民不見兵 中外恬嬉 忘戰已久 猝當龍蛇之變 如河流橫失 所過城邑 望風奔潰 遂放三都 失守五廟邱㙻 自古兵火之悿 未有甚於此者 時則有若我先祖 重峯先生 倡義起兵傳檄 遠邇烈士響應 大捷西原 再鏧錦山 公時在南原鄕第 聞變痛哭 糾合同志士子 收率家丁 從先生於危險之中 蹈刃冒鉞 如赴樂地 衆寡不敵 力盡而死 七百倂命 無一人苟活者 此尤千古 所未有之事也 公慶州人 諱潤 字存中 退思庵其號也 始祖諱謁平 爲新羅佐命功臣 麗季文僖公世基 文孝公蒨 本朝月城君敬中 三世相繼爲相 再傳而有諱廷碩 官至判書 於公爲五世 高祖諱侗 監察 贈吏曹參議 曾祖諱吉安 司正 贈吏曹參判 祖諱堪 全羅監司 考諱周臣 任實縣監 妣安東金氏 縣監孟誠女 生七男 公其第四也 早以經學 從遊栗谷李先生 晩與重峯先生 爲道義交 講磨春秋大義 仕穆陵朝 爲兵曹參知 後乃棄官 屛居于南原北 秣川坊舍人洞 卽監司公 按節時所卜之地 而監司公官舍人以是名焉 公承祖業 有志經術 絶意榮途 遭世板蕩 視死如歸 不有所卷 曷能辦此 自是雲仍 淪落遐陳 不能上達天聰 迄未蒙褒寵之眷 士林之齎鬱久矣 何幸 我聖上壬辰五回甲之年 一省章甫上言蹕路 九天晙感 特蒙華袞 贈以亞卿之秩 朝家酬報之典 靡有遺憾 而忠賢不寐之靈 庶可慰矣 家人曾以衣冠 葬于舍人洞後麓 負子之原 與夫人墓同封 夫人順天金氏思吉女 贈貞夫人 一男 天行 僉正 贈戶曹參議 孫男 二人 長曰 凞 僉正 無嗣 次曰 點 以學行 贈童敎 曾孫 五人曰 志皐 志卨 禮行卓邁 志益孝 贈敎官 志說 志奭 俱以學術聞于鄕 志奭師事尤庵宋先生 後孫多以文學行義 見稱於世 豈非積善之報歟 公之裔孫 圭弼 鍾元 東雨 甫袖示公蹟于余 曰願得一言 以意阡隧 余雖知非其人 仰念先誼 辭不獲已 略敍梗柒 遂系以銘曰
 
有氣浩然 克塞穹壤 人孰不受 患不能卷
有時而餒 禍福所動 公之所存 義重身輕
旣見死所 勇往力行 有來千秋 證諸幽堂
 
戊戌元月 下澣
通政大夫 前行尙州牧使 鎭川趙元植 謹識 (重峯 兒孫)
 
 

 
각주
298) 이윤 신도비에 따르면 고종 29년(1892)에 호남 유생 황원룡, 박해관 등이 상언하여 "선정 조문열 공이 금산전투에서 의사 이윤 등 700여 명을 이끌고 싸우다 동시에 전사하여 사적이 의록에 실려 있는 것이 타당하고 간절하게 표어할 뿐만 아니라 지금까지 수백 년 동안 포창하는 은전을 입지 못하였으니 이것은 비단 사림에 유감이 될 뿐만 아니라 또한 성대한 조정의 흠전이라고 하겠습니다.“라고 하였다. 이어 이조에서는 가선대부 이조참판 동지의금부 부사를 추증한다. 이로 인하여 이종원과 이동우가 최익현(1833~1907)에게 신도비문 작성을 요청하였다.
299) 전국 시대 제(齊) 나라 맹상군(孟嘗君)이 처음 설(薛)에 봉해졌을 때, 그의 문객 풍훤(馮諼)이 그에게 말하기를, “교활한 토끼는 세 굴이 있기 때문에 겨우 죽음을 면할 수 있는 것이다.〔狡兎有三窟 僅得免其死耳〕”라고 하면서 세 가지 계책을 건의하여, 맹상군이 그대로 따른 결과 그 후로 맹상군이 제 나라 재상을 수십 년 동안 지내면서 조금의 화도 입지 않았다는 고사에서 온 말이다.
300) 원문의 웅장(熊掌)은 맹자가 “생선도 내가 바라는 바이고 웅장도 내가 바라는 바이지만, 이 둘을 다 가질 수 없다면 생선을 버리고 웅장을 취하리라. 삶도 내가 바라는 바이고 의(義)도 내가 바라는 바이지만, 이 둘을 다 가질 수 없다면 삶을 버리고 의를 취하겠다.”라고 한 말에서 유래하였다. [孟子曰 魚我所欲也 態掌 亦我所欲也 二者 不可得兼 舍魚而取態掌者也 生亦我所欲也 義亦我所欲也 二者 不可得兼 舍生而取義者也 ]
301) 원문의 병령지수(炳靈)는 타국 사람을 모셔 놓고 제사 지낼 때 쓰는 말로, 신령은 땅속의 물과 같아서 어느 곳에서나 정성껏 받들면 그곳으로 온다는 것이다. 소식(蘇軾)의 조주한문공묘비문(潮州韓文公廟碑文)에 “공의 신령이 천하에 있는 것이 물이 땅속에 있는 것 같아 어느 곳이나 있지 않는 곳이 없다.[公之神在天下者 如水之在地中 無所徃而不在也]”에서 유래하였다.
302) 여지(荔枝)는 복건·광동·사천성에서 생산된다. 줄기는 3~4장이며 잎사귀는 우장복엽(羽狀複葉)으로 투명한 작은 점이 있다. 과실은 외피(外皮)에 거북이 등껍질 문형(龜甲汶)이 있고, 안은 하얗고 맛이 달며 즙이 많으며 용안에 비슷하다.『당서』에 양귀비가 여지를 좋아하여 남해에서 바쳤는데 나르듯이 진상하였다. 그러나 더워야 열매가 익는데 묵으면 즉시 부패한다. 이 여지를 진공한 고사이다.『후한서』 화제본기에 옛날 남해에서 용안과 여지를 헌상하였다는 기록이 보인다.
303) 원문의 淸蹕路는 왕이 거둥할 때 지나는 길에 사람의 통행을 금하고 길을 치우는 일을 가리킨다.
304) 진후산(陳后山 후산은 송(宋) 나라 진사도(陳師道)의 호임)
305) 첨소(瞻掃) : 살피고 빗질하여 쓴다는 말이다. 묘제 축문에 “무덤을 살피고 쓴다.〔瞻掃封塋〕”라는 말이 있고, 산신 축문에 “모친모관부군의 묘에 세사를 공손히 거행한다.〔恭修歲事于某親某官府君〕”라는 말이 있다.
306) 이 제기는 참지공의 후손 이규학이 서울에서 예조판서로 있을 때 이승유를 찾아가서 받은 글인데, 1893년에 지은 글이다. 이승유는 대한민국 초대부통령을 지낸 이시형의 아버지이다.
307) 여수례(旅酬禮) : 제례(祭禮)를 마친 뒤 많은 사람들이 함께 술을 권하며 공경하는 것이다.
308) 원문의 乙帳은 진귀한 보옥으로 장식한 갑장과 을장이 있는데 정전(正殿) 양 기둥 사이에 설치하였는데, 갑장은 한 무제 때 연회석에 치던 장악(帳幄)인데 칠보의 구슬로 장식하고 야광주(夜光珠) 등 보옥(寶玉)으로 만들었으며, 을장(乙帳)은 어전(御殿)에 둘렀다고 한다.
309) 원문의 천대(泉臺)는 땅속의 묘혈(墓穴)을 가리킨다.
310) 자고(紫詁) : 금랑(錦囊)에 담아 자니(紫泥)로 입구를 봉한 뒤 인장(印章)을 찍어서 반포하는 임금의 조서(詔書)를 말한다.
311) 난곡(鸞鵠) : 한유(韓愈)의 〈전중소감 마군 묘명(殿中少監馬君墓銘)〉에 “물러나 소부(少傅)를 보매 푸른 대 푸른 오동에 난새와 고니가 우뚝 선 듯하였으니, 능히 그 가업을 지킬 만한 이였다.〔翠竹碧梧 鸞鵠停峙 能守其業者也〕” 하였다. 여기서는 뛰어난 인재들을 비유하여 말한 것이다. 《古文眞寶後集 卷4》
312) 진운(陣雲) : 층층으로 두텁게 쌓여서 마치 전진(戰陣)처럼 보이는 구름을 말하는데, 옛사람들은 이것을 전쟁의 조짐으로 여겼다고 한다.
313) 광감(曠感) : ‘광세지감(曠世之感)’의 준말로, 동시대에 태어나지 못해 서로 만나지 못한 것에 대한 감회이다.
314) 기성(騎省): 기조(騎曹), 병조(兵曹)라고도 함. 조선시대 육조의 하나로 군사와 우역 따위의 일을 맡아보았다.
315) 무채(舞彩) : 색동옷을 입고 춤을 추는 것으로, 부모에게 효도함을 뜻한다. 춘추 시대 초(楚)나라 사람인 노래자(老萊子)는 효성으로 어버이를 섬기어, 일흔 살의 나이에도 색동옷을 입고 어린아이의 놀이를 하여 어버이를 기쁘게 한 고사에서 유래하였다. 《小學 稽古》
316) 정의를 위해서는 죽음조차도 두려워하지 않음을 비유한 것이다. 《사기(史記)》 〈채택열전(蔡澤列傳)〉에 “이러므로 군자는 난리에 의로써 죽는 것을 마치 자기 집에 돌아가는 것처럼 여긴다.〔是以君子以義死難, 視死如歸.〕”라고 하였다.
317) 화곤(華袞) : 옛날 왕공(王公) 귀족(貴族)이 입던 화려한 의복이다.
임실군(任實郡) 재실(齋室) # 이로재
【향토】 임실의 재실
• 두월리 영송재(永松齋)
• 두월리 이로재(履露齋)
• 산수리 동산재(東山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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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 General Libraries 최종 수정일: 2021년 1월 1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