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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실군(任實郡) 재실(齋室) # 영사재
【향토】
(2024.01.02. 20:43) 
◈ 오암리 영사재(永思齋)
오수면 소재지에서 동북쪽 전주 방향으로 가다보면 17번 국도변에 오암리 오촌마을이 있고, 오촌마을 동쪽 끝에 있다. 영사재(永思齋)는 팔작지붕 기와를 얹은 정면 4칸, 측면 2칸의 재실로 이 지역에 거주하는 교하노씨(交河盧氏) 문중에서 숭정기원후오갑신(崇禎紀元後五甲申)인 1910年에 지었다. 영사재 현판은 전라도 관찰사를 지냈던 해사 김성근이 썼고, 재실 양쪽으로 2개의 방이 있다.
오암리 영사재(永思齋)
 
오수면 소재지에서 동북쪽 전주 방향으로 가다보면 17번 국도변에 오암리 오촌마을이 있고, 오촌마을 동쪽 끝에 있다. 영사재(永思齋)는 팔작지붕 기와를 얹은 정면 4칸, 측면 2칸의 재실로 이 지역에 거주하는 교하노씨(交河盧氏) 문중에서 숭정기원후오갑신(崇禎紀元後五甲申)인 1910年에 지었다. 영사재 현판은 전라도 관찰사를 지냈던 해사 김성근이 썼고, 재실 양쪽으로 2개의 방이 있다. 건물에는 1개의 현판과 5개의 주련이 있으며, 앞쪽으로는 나무로 만든 난간이 있는 것이 특이한 형태로 보인다. 뜰에는 건물을 지었을 때 심었다는 은행나무가 서 있다.
 
 
 
 

1. 오암 영사재기(永思齋記)

 
운수의 남쪽, 오산의 아래는 곧 노씨의 평천장(平泉莊)이다. 대대로 효우와 문행으로 고을에서 이름이 났었다. 일찍이 선영의 왼쪽에 재실을 건축하고, 직접 소나무와 잣나무를 심으니, 울창한 숲이 되었다. 한편으로는 시절에 맞춰서 제사를 올릴 때, 비바람을 막아주며, 한편으로는 자손들이 모여서 시를 외우고 책을 읽는 곳이 되었다.
 
이윽고, 문중의 소년 재곤(載坤)이 나에게 와서 상의하며, 재실의 현판에 쓸 글을 청하였다. 이전에 들은 <시경>의 시에, ‘길이 효도를 함이라, 효가 오직 법이 된다’는 내용이 있었다. 자사자(子思子)는 ‘신의 이르심을, 가히 헤아리지 못하는데, 하물며 가히 싫어하랴’라고 말했다. 대체로 집안의 정신과 선조의 정신은 똑같아서, 유명(幽明)과 간격이 없으니, 여기에서 취해 뜻을 붙이면, 근사할 것이라고 여겨서 마침내 기문을 지었다.
 
선왕이 제례를 정할 때에, 집에는 반드시 사당이 있었고, 사당에는 반드시 신주가 있었다. 신주를 처음 모실 때에는 세 번 제를 지내어, 그 신을 위안한 다음에 모셔다가 사당에 받들었다. 그리고 세시에 따라 제사를 지내니, 이는 신명에 의지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아버지의 사당이 있으면 자기의 형제자손들이 다 모인다. 할아버지의 사당이 있으면, 아버지의 형제 자손이 다 모이며, 증조의 사당이 있으면, 할아버지의 형제 자손이 다 모이고 고조의 사당이 있으면 증조의 형제 자손이 다 모인다. 대종의 사당이 있으면 모든 종족의 형제 자손이 다 모인다. 이것이 곧 선조를 높이고 종족을 합하는 큰 법으로, 음양의 뜻으로 살펴보아도 지극하다고 할 것이다. 그러나 산소는 체백을 모신 곳이고, 의리(衣履)를 간직한 곳이므로, 여기에서 신명을 구하는 것은 말이 없을 수가 없다.
 
그래서 삼대(三代) 이전에는 묘제(墓祭)가 없었는데, 진나라에 와서 비로소 묘 옆에 집을 지으니, 이것이 효시가 되었다. 주선생이 말하기를 ‘묘제는 옛날에 명문화된 것은 없으니, 친진(親盡)한 조상에게는 무방할 것이다. 사당제사와 묘제는 경중(輕重)이나 상략(詳略)이 스스로 다른 것이 아니겠는가.
 
그러나 묘제는 만물이 수장하고, 한서가 교체하는 때에 슬퍼하고 그리워하여서 근본을 돌아보고 조상을 추모하는 마음을 일으키는 것은 곧 효자자손(孝子慈孫)의 억제할 수 없는 떳떳한 감회이며, 밖에서부터 힘쓴다고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고금의 풍속이 다르다 할지라도 묘제를 지내는 것은 너무나도 분명한 일이다.
 
이것이 곧 노씨들이 정성을 쏟은 뜻이니, 대개 하루아침에 이룩된 것이 아니고, 진실로 효사의 무궁함이 되는 것이니 그들의 천양(闡揚)을 어찌 말릴 수가 있겠는가.
 
그래서 이를 써서 그 묻기를 좋아하는 성의에 답한다.
 
신축년(1901) 12월 상한에
자헌대부 전공조판서 겸지의금부사 월성 최익현 쓰다.
 
 
雲水之南 鰲山之下 卽盧氏之平泉224) 世以孝友文行 著於鄕 曾築室先塋之左 手栽松楸 蔚然成林 一以爲時節薦享風雨之庇 一以爲子姓宗黨 誦讀之地
 
旣而使門少年載坤 謀及於余 請所以扁其顔者 窃聞詩曰 ‘永言孝思 孝思惟則’225) 子思子云 ‘神之格思226)不可度思 矧可射思’ 盖言自家精神與祖考精神一般而無間於幽明也 取而寓意 可庶幾乎
 
遂爲之說曰 先王之制祭禮也 家必有廟 廟必有主 主之始立也 三祭以虞之 旣歸而奉諸其廟 歲時祀之 曰是神明之所依也 有禰之廟者 自己之兄弟子孫 皆至焉 有祖之廟者 自父之昆弟 子孫 皆至焉 有曾祖之廟者 自祖之兄弟子孫 皆至焉 有高祖之廟者 自曾祖之兄弟子孫 皆至爲 有大宗之廟者 凡族之昆弟子孫 皆有至爲者矣 是乃尊祖合族之大法 而求諸陰陽之義 至矣盡矣
 
夫墓者 體魄之所安 衣履之攸藏 於斯求之 不爲無辭 而三代以前 無墓祭 至秦 始起寢於墓側者 斯爲一據 而朱先生亦以爲墓祭古無明文 惟親盡而祭無妨云爾 二祭之輕重詳略 自有不同者耶 惟於萬物收藏 寒暑交遞之際 所悽愴怵愓而起反本追遠之思者 乃孝子慈孫沮遏不得之秉彛(常情) 而非勉强由外者 則切不可以古今異俗而全然無事者審矣 是則盧氏之眷眷致意 盖非一朝一夕而信其爲孝思之無窮也 著之惡可己乎 爲書此 以塞其好問之盛云
 
重光赤奮若 孟冬 上澣
資憲大夫 前工曺判書 兼知義禁府事
月城 崔益鉉記
 
 

 
각주
224) 평천(平泉) : 평천장(平泉莊), 당(唐) 나라 때의 명 재상 이덕유(李德裕)의 별장 이름.
225) 영원토로 효도를 행한다(永言孝思 孝思惟則) : <<시경> 대아 문왕지십>. ‘왕이 믿음을 이루사 하토의 법이 됨은 효도를 길이 함이라. 효가 오직 법이시니라.’(成王之孚하사 下土之式은 永言孝思라 孝思維則이시니라)
226) 신지격사(神之格思) : <<시경> 대아 억편> ‘신의 이르심을 가히 헤아리지 못하는데 하물며 가히 싫어하랴?’(神之格思를 不可度思온 矧可射思아
임실군(任實郡) 재실(齋室) # 영사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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