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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실군(任實郡) 재실(齋室) # 명성재
【향토】
(2024.01.02. 18:13) 
◈ 옥전리 명성재(明盛齋)
이 재실은 청웅면 옥전리 하중산에 있다. 이 지역에 거주하는 청주 한씨(淸州 韓氏)의 재실이다.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 기와집으로 현판이 1개, 주련이 4개 걸려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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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전리 명성재(明盛齋)
 
이 재실은 청웅면 옥전리 하중산에 있다. 이 지역에 거주하는 청주 한씨(淸州 韓氏)의 재실이다.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 기와집으로 현판이 1개, 주련이 4개 걸려있다.
 
 
 
 

1. 옥전 명성재기(明盛齋記)

 
재실은 임실 중산(中山)의 남쪽에 있는데, 우리 13세조비 숙부인 함양박씨(咸陽朴氏)를 매년 제사 모시는 곳이다. 편액하기를 명성(明盛)이라 한 것은 무엇인가. 공자가 말하기를. ‘재계하고 깨끗이 하며 의복을 성대히 하여 제사를 받들게 한다’[齊明盛服以承祭祀]라고 한 것에서 취한 것이다.
 
대개 제사라는 것은 정성을 다하여 행하는 것이다. 재개하여 깨끗이 하는 것은 안에서 공경하는 것이며, 의복을 성대히 한다는 것은 밖에서 엄숙하게 하는 것으로, 안과 밖을 엄숙히 한 후에 정성이 있는 것에 이른 것이다. 그런즉 제사를 지냄에 재계할 곳이나 희생을 주관하는 곳이 없으면 어찌 능히 정성을 다할 수가 있겠는가.
 
삼가 숙부인(淑夫人)은 함양의 오랜 벌족으로서 고려조에 문과에 급제하고 은청광록대부 추밀원사(銀靑光祿大夫 樞密院事)를 지낸 박선(朴善)을 시조로 하여, 벼슬아치와 훈록(勳祿)이 세세토록 이어졌다. 박정(朴禎)은 현감을 지냈고, 박기림(朴起林)은 사직(司直)을 지냈으며, 박승호(朴承豪)는 생원을 지냈는데, 곧 아버지, 할아버지, 증조부 삼세가 된다. 어머니는 의인(宜人) 남원윤씨(南原尹氏)이고 묘는 중산리 임좌원(壬坐原)에 있다. 외손들이 해마다 제사를 지낸다.
 
숙부인의 생년과 졸년을 실전하였으나, 천성이 온순하고 규범이 올곧았으며 그윽하고 조용하였다. 청주한씨(淸州韓氏) 한축(韓軸)에게 시집왔다. 통정대부행용양위대호군(通政大夫行龍驤衛大護軍)를 지내신 부군(府君)은 고려 좌익공신태위(佐翼功臣太尉) 위양공(威襄公) [한란(韓蘭)]을 시조로 하였으며 벼슬아치들이 서로 이어졌다. 고려말에 한리(韓理)는 문과(文科)에 급제하고 보익공신(輔翼功臣) 이부상서(吏部尙書)를 지냈으며 시호는 충간공(忠簡公)이다. 조선에 들어와 한승순(韓承舜)은 병조판서(兵判)에 올랐고, 시호는 청성군(淸城君)이다. 한서룡(韓瑞龍)은 음직으로 이조판서에 올랐으니, 드러남이 있는 사람들이다. 증조 한종손(韓終孫)은 무과에 급제하고 추충좌익공신(推忠佐翼功臣)으로 병조참판(兵曹參判)은 지냈으며, 시호는 안양(安襄)이다. 조부 한희(韓曦)는 진산군수(珍山郡守)를 지냈으며, 한계상(韓繼常)은 사복시정(司僕寺正)을 지냈으며, (한축은) 그의 아들이다.
 
부인의 아름다운 말과 선행은 세상에 드러나, 사람들은 어질고 현명한 여인[賢媛]이라고 칭찬이 자자하였다. 아들 다섯과 딸 하나를 낳았는데 한응몽(韓應夢)은 용양위 부사용(龍驤衛 副司勇)을 지냈고, 한응빙(韓應聘), 한응태(韓應台)는 직장(直長)을 지냈고, 한응현(韓應賢)은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를 지냈다. 한응성(韓應聖)은 임진왜란 때 순절하여 정려가 내려졌으며 종용사(從容祀)에서 제향을 지낸다. 딸은 전주이씨 이열(李悅)에게 시집갔다.
 
숙부인께서 돌아가셨을 때에 의리(衣履)를 재실의 오른쪽 산록 부자원(負子原)에 장사지냈다. 자손들이 매년 제사의 예를 지낼 때마다 일찍이 모두 잠을 잘 수 있는 방이 없어서 치제(致齊)하기가 어려웠다. 그 혹 비나 눈이 오면 가리고 피하는 것 또한 어려웠다. 그러므로 여러 종인들이 한탄하며, 여러 차례 경영할 것을 도모하였다. 그러나 재력(財力)이 모자라서 늦추어져 이루지 못한 것이 오래되었다. 다행히도 을축년 겨울에 모든 종중 사람들이 힘차게 움직여 분발하여 똑같이 의견을 내어 재물을 모아서 병인년 봄에 여기에 터를 잡아서 장인을 불러서 이를 건립하였다. 한인석(韓寅錫), 한우호(韓楀鎬), 한양수(韓亮洙) 세 명이 그 일을 맡아서 몇 달이 지나지 않아서 공역을 마쳤다. 무릇 재사(齋舍)와 문간(門間), 고사(庫舍), 행랑(行廊)을 모두 갖추었다. 비록 웅장하고 아름답다고 말하지는 못할지라도 그곳에서 재계하여 옷을 차려 입을[齊明盛服] 방도를 갖추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니, 어찌 우리 가문의 하나의 숙원을 성취된 것이 아니겠는가.
 
무릇 우리 여러 종인들이 이 재실에 오르면, (명성이라는) 이름을 돌아보고서 의를 생각하여 반드시 그 공경을 생각하게 될 것이다. 그러하므로 사람을 사모하는 마음[羹墻67)]이 (그분이) 이곳에 있는 것과 같은 정성에 이르게 될 것이다. 즉 가히 먼 조상을 추모하여 근본에 보답하는 도리라 할 것이다. 또한 선대의 덕을 이어 덕을 닦아서 더럽히지 말 것이고, 선대의 영혼을 몸과 마음을 다하여 지극히 공경할 것이다. 이곳에서 모이고 이곳에서 강의하고, 이곳에서 다 같이 모여 이곳에서 제사지내고, 시와 예를 전수하고, 충효를 세워서 대대로 드날리며 쇠퇴하지 않게 하는 것이 바로 이 재각이다. 백세가 지나도록 끊임이 없어 서로 힘쓰고 힘쓸 일이다.
 
강신(講信)하는 자리에서 나에게 기(記)를 써 달라고 부탁하여 대략 몇 줄을 기록하여 후손들이 보고서 궁구할 수 있는 밑천이 되게 하고자 할 따름이다.
 
 
병인년 11월[至月] 상한(上澣) 13세손 우석(宇錫)이 삼가 짓고, 동석(東錫)이 삼가 쓰다.
 
 

1.1. 明盛齋記

 
齋在任實中山之陽 卽惟我十三世祖妣 淑夫人 咸陽朴氏 世薦之所 而扁以明盛者何也 取孔子曰 齊明盛服 以承祭祀之義也 夫祭祀者 誠之行也 齊明而肅於內 盛服而肅於外 內外兼然後 以致如在之誠矣 然則祭之行也 無齊沐之所 宰牲之所 則烏足以能盡其誠哉 恭惟淑夫人 以咸陽古閥 高麗朝 文科銀靑光祿大夫 樞密院事 諱善爲鼻祖 簪纓勳祿 世世連綿而 有諱禎 縣監 有諱起林 司直 有諱承豪 生員 其考祖曾三世也 妣宜仁南原尹氏 考妣墓在中山里 壬坐原 外孫奉修歲事 淑夫人生卒年佚 天性溫貞 閨範幽閒 笄歸於淸州韓氏 諱軸 通政大夫行龍驤衛大護軍 府君卽高麗 佐翼功臣太尉 威襄公爲始 圭組相承 至麗末 有諱理 文科補益功臣 吏部尙書 忠簡公 入李朝 有諱承舜 兵判 淸城君 有諱瑞龍 蔭吏判 有顯而 曾祖諱終孫 武科推忠佐翼功臣 兵曹參判 諡安襄 祖諱曦 珍山郡守 有諱繼常 司僕寺正之子也 夫人之嘉言善行著於世 人稱賢媛 生五子一女 應夢 龍驤衛 副司勇 應聘 應台直長 應賢 同知中樞府事 應聖 龍蛇亂殉義 命旌蹄享從容祠 女適全州李悅 淑夫人及其卒也 衣履收藏於齋之右麓 負子原 子孫行歲薦之儀 曾無齊宿之室 致齊爲難 其或雨雪 卽庇避亦難 故諸宗慨然乎 是累圖經營 然財力 未逮遷延 未就者久矣 何幸歲乙丑冬 諸宗蹶然 奮發 詢謀鳩財 丙寅春 擇址于玆 招工營之 寅錫 楀鎬 亮洙 三氏 擔其役 不幾月而訖功 凡齋舍門間庫舍行廊具備 雖不曰 輪奐然 其於明盛之方庶乎 有補而 豈非吾宗之一宿願成就也 凡我諸宗 登斯齋也 顧名思義必思其肅 然羹墻 以致如在之誠 則可謂追遠報本之道矣 且念聿修之德 無忝乎 先靈克敬身心 會于斯 講于斯 齊於斯 祭於斯 詩禮以傳受 忠孝以立 揚世世勿替 則是齋也 從百世無窮矣 盖相勉勗哉 講信之席 囑余爲記 故略敍數行 而仍資後昆之瞻繹云爾
 
丙寅 至月 上澣 十三世孫 宇錫 謹識 東錫 謹書
 
 

 
각주
67) 사람을 심히 그리워한다는 뜻. 옛날 순(舜)임금은 앉아서는 요(堯)임금을 담장에서 보았고, 식사할 때는 국에서 보았다고 한다[坐則見堯於墻食則覩堯於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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