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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병창어(病窓語) ◈
◇ 병(病)과 추(秋)와 자연(自然) ◇
카탈로그   목차 (총 : 17권)     이전 17권 ▶마지막
1928.10.5~
이광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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病窓語[병창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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病[병]과 秋[추]와 自然[자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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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오랫동안 自然[자연]과 떠나 있었다. 내가 黃海道[황해도] 安岳郡[안악군] 燃燈寺[연등사] 鶴巢庵[학소암]을 떠난 것이 昨年[작년] 十一月[십일월] 末[말]이다. 그때부터 至今[지금]까지 滿一個年[만일개년] 동안을 나는 都會[도회]의 한 편 구석인 病室[병실]에서 지냈다. 病室[병실]에 누워 있더라도 하늘도 보고 山[산]도 보고 昌慶苑[창경원] 수풀에 代代[대대]로 살아 오는 새들이 오고 가는 것도 보았다. 猫額[묘액]만한 後園[후원]에 대싸리가 成林[성림]한 것을 보고 十五年前[십오년전]에 汽車[기차]로 通過[통과]하던 小白山[소백산]의 林相[임상]을 聯想[연상]하고 담 밑에 파다 옮긴 밤나무 한 그루에서 아람 쏟아지는 것을 줍고는 三十前[삼십전] 내가 生長[생장]하던 故鄕[고향]의 가을을 回憶[회억]하였다. 사람이 어느 곳에 있은들 自然[자연]을 떠나랴. 비록 깊은 獄[옥]속에라도 有時乎[유시호] 봄의 새소리와 가을의 달빛이 들어오는 것이다. 사람은 自然[자연]의 품에서 떠나려 하여도 떠날 수 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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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自然[자연]도 類萬不同[유만부동]이다. 成均館[성균관] 뒤 山[산]과 金剛山[금강산]과를 같다고 해서는 거짓말이요, 都會[도회]의 萬夫紅塵[만부홍진]을 通[통]하여 光線[광선]의 여러 部分[부분]을 잃어버린 뿌연 日光[일광]과 一碧無纖塵[일벽무섬진]한 하늘에 全國[전국]으로 폭폭 내려붓는 日光[일광]과를 같은 日光[일광]이라고 해도 안될 말이다. 人事[인사]를 點綴[점철]하여서 自然[자연]이 더욱 情[정]답게 아름답게 되는 수가 있으니 山[산]밑, 들머리에 二[이], 三[삼], 農家[농가]가 조는 듯함이나, 湯湯[탕탕]한 長江[장강]위에 一葉白帆[일엽백범]이 뜬 것이나 다 그러하거니와, 그래도 自然[자연]의 眞味[진미]는 亦是[역시] 그의 處女性[처녀성]에 보다 더 많은가 한다. 車馬[거마]가 自由[자유]로 다니도록 坦坦[탄탄]히 뚫린 大路[대로]에서 우리는 人生[인생]의 힘의 美[미]를 느낀다. 그러나 人跡[인적]이 지난 듯 만 듯한 崎嶇[기구]한 小路[소로]에서 우리는 自然[자연]의 處女美[처녀미]를 느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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都會[도회]의 自然[자연]은 人生[인생]에게 壓迫[압박]을 當[당]하고 變形[변형]을 當[당]하고 蔽遮[폐차]를 當[당]하고 있다. 내가 내 病室[병실]에서 멀리 道峯[도봉]의 한 뿌다구니를 바라보며 自然[자연]의 夢幻境[몽환경]에 耽溺[탐닉]하려 할 때에는 박석고개 넘어 오는 自動車[자동차] 소리가 나를 개솔린 내 나는 文明[문명]의 都會[도회]로 끌어들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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二個年間[이개년간]이나 病席[병석]에 있는 몸이 하고 싶은 일인들 한 두가지랴마는 浮碧樓[부벽루]에서 바라보는 大同江[대동강]과 釋王寺[석왕사]의 松林[송림]에 걸린 달과, 萬瀑洞[만폭동]을 올라가며 바라보는 金剛山[금강산]의 모양은 가장 보고 싶어 잊지 못하는 것 中[중]에 하나였다. 한번 더 그것을 보았으면 — 이것은 죽으려는 나를 붙들고 매어 달리는 꽤 힘있는 未練[미련]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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平生[평생]에 이 버릇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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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못 놓나니 煙霞放浪[연하방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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名山大川[명산대천]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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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생각만 해도 어깨춤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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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절로 나는 내 일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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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도 몰라하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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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행히 나는 汽車旅行[기차여행]은 하여도 관계치 아니할 만큼 健康[건강]도 恢復[회복]이 되었고 때마침 丹楓時節[단풍시절]도 되기로 매우 맘이 움직이던 次[차]에 지난 十九日[십구일] 밤에 除萬[제만]하고 家族[가족]에게도 말하지 아니하고 咸鏡線[함경선]의 밤 十時五十分[십시오십분] 車[차]를 탔다. 妻[처]는 근심도 하고 성도 났으려니와 重病患者[중병환자]가 遠距離旅行[원거리여행]을 한다 하면 펄쩍 뛸 것이므로 驛頭[역두]에서 葉書[엽서] 한 장을 집에 부치고는 도망군 모양으로 釋王寺[석왕사]를 向[향]하였다. 미상불 病[병]이 근심도 되지마는 明朝[명조]에는 雪峯山[설봉산]의 丹楓[단풍]과 釋王寺[석왕사]의 松林[송림]을 보려니, 그 못 잊히던 물소리를 들으려니 하면 마치 못 볼 뻔하던 愛人[애인]이나 찾아가는 양하여 가슴이 두근거리고 잠이 들지를 아니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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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도 丹楓[단풍]이 좋으려니 물소리도 좋으려니 하고 눈을 감고 있어도 환히 내다보이는 낯익은 三防[삼방] 三十里[삼십리] 長峽[장협]을 생각만 보지는 못하면서, 高山[고산] 龍池院[용지원]도 새벽 꿈결에 지나 釋王寺驛[석왕사역]에 내린 것은 午前六時十七分[오전육시십칠분]. 雪峯山[설봉산] 위에 啓明星[계명성]이 아직도 제 영채를 나타내고 있는 새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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驛[역]에서 내린 것은 나 한 사람과 郵便物[우편물] 한 주머니. 驛頭[역두]에는 巡査[순사]의 붉은 테가 유난히 빛날 뿐이요 졸린 듯한 改札驛夫[개찰역부] 外[외]에는 사람도 없다. 丹楓[단풍]조차 다 늦어간다는 이때, 솜옷을 입고도 덜덜 떨리는 이곳에 雪峯山[설봉산]의 啓明星[계명성]을 바라고 새벽 찬서리를 밟으러 오는 사람도 없는 것이다. 自動車[자동차]가 있나. 人力車[인력거]가 있나. 巡査[순사]도 성큼성큼 다 달아나고 보니 病身[병신] 나 하나만이 이 벌판에 홀로 버림이 되었다. 五里[오리]나 넘는 旅館村[여관촌]에를 어떻게 걸어가나. 經學院[경학원] 앞 네거리에서 昌慶苑[창경원] 앞 電車停留場[전차정류장]까지도 昨年以來[작년이래]에 四[사], 五次[오차]나 걸었을까 말까 하는 내가. 나를 태우고 오던 汽車[기차]는 너 잘 떨어졌다 하듯이 푸푸거리고 淸津[청진]을 가느라고 내닫는다 — 그것조차 아니 보인다. 달고 치면 아니 맞는 壯士[장사] 있나. 또 피를 토할 때에는 토하더라도, 가다가 中路[중로]에서 쓰러지더라도 인제는 가는 수 밖에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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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지팡이에 몸을 의지하고 아무쪼록 힘들지 아니하도록 걸음을 걸었다. 梧山場[오산장]에서도 다들 자고 아직 일어나지 않아 아직 나온 사람이 드물었다. 거기를 지나 내가 가장 좋아하는 벌판의 老松[노송]들을 바라보면서 두리번 두리번 서리에 젖은 길을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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雪峯[설봉]의 偉大[위대]한 屛風[병풍]은 아직도 灰色[회색]에 싸였다. 丹楓[단풍]이 어떠한고 할 즈음에 俄然[아연]히 진실로 俄然[아연]히 雪峯[설봉]의 上峯[상봉]인 鷲峯[취봉]이 피를 흘리는 듯이 鮮紅色[선홍색]으로 물이 드는구나. 진실로 俄然[아연]히! 나는 우뚝 섰다. 내 가슴은 뛴다. 나는 돌아섰다. 붉은 햇바퀴가 半[반]만 山[산]허리에 걸렸구나. 이글이글 씨물씨물한 불덩어리가 곧 쑥 올라오는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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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 보아라, 雪峯山[설봉산] 하늘에 닿은 屛風[병풍]이 모두 핏빛이로구나. 아니다 五色[오색]이 玲瓏[영롱]하구나. 仔細[자세]히 보니 千色萬彩[천색만채]로구나. 앓은 것이 비틀거리고 찾아 온 精誠[정성]은 十二分[십이분]으로 報應[보응]이 되었다. 이 앞을 지난 사람이 千[천]이요 萬[만]뿐이랴마는 이 瞬間[순간]을 본 사람은 나 하나뿐이로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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啓明星[계명성] 바로 밑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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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검은 것 雪峯山[설봉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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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쏘는 아침 빛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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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득 五色[오색영롱]키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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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사이 이어 친 서리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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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물든 丹楓[단풍]이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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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득 五色玲瓏[오색영롱]키는 나를 위하여 그럼이라고 하고도 싶으나 버릇없는 말이기로 참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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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가고 보고, 보고 가고 혼자 웃고 혼자 아하였다. 그렇게도 重病[중병]에 다 죽어가던 것이 이만큼이라도 살아나서 이러한 天地[천지]의 偉觀[위관]들을 보게 된 것도 또한 고마운 일이로다, 하고 걷는 걸음도 더욱 가벼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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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에 늦은 벼는 키가 한 뼘 밖에 아니 된다. 이삭은 꼬부라졌으나 알갱이는 일여덟 개, 그것도 쭉정인가 뿌옇게 血色[혈색]이 없다. 아마 그까진 걸 무얼 베여 하고 저 될 대로 되라고 내버려 둔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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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라도 걷는 길이 어느덧 半[반]은 지나서 어떤 村落[촌락]앞에 이르렀다. 볕은 벌써 村家[촌가]의 서리로 덮인 草家[초가] 지붕을 불그레하게 물들였다. 물동이 인 부인들이 우물 길에서 돌아오고 닭들도 쓰러진 코스모스 밑에서 모이를 줍는다. 코스모스는 언제 보아도 산듯하게 금세 핀 듯하지마는 식전 새벽에는, 더구나 새로 분세수한 아가씨 얼굴과 같이 新鮮[신선]한 것이다. 씨는 누가 뿌렸는지 뿌려만 놓고는 돌아보지 아니하여 이리 쓰러지고 저리 쓰러지고 암탉 수탉에게 매양으로 밟히는 코스모스, 그러면서도 滿足[만족]한 듯이 꽃은 필 대로 피어 謙遜[겸손]하게 가을 農村[농촌]의 아기 딸 노릇을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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春三月[춘삼월] 五六月[오육월]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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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도 없이 다 지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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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리 되게 친 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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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른 새벽 날을 받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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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옴도 맑고 찬 그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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性稟[성품]인가 하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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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軟弱[연약]해 보이는 — 줄기나 잎사귀가 꽃이나 — 코스모스가 찬서리 치는 늦가을에 泰然[태연]히 피어 있는 것은 女性[여성]의 매운 절개와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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뜰가에 코스모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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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희고 붉고 자주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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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담한 그 양자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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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비바람을 못 이기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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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워서 수줍은 양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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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못내 가련하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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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스모스에 여러 빛갈이 있거니와 그 中[중]에 代表[대표]되는 것은 암만해도 흰빛이다. 못 견디게 맑고 못 견디게 싸늘한 맛이 코스모스의 本色[본색]이 아닐 리가 없다. 위에 적은 노래 中章[중장]에 아담한 그 양자는 내게 印象[인상]되는 코스모스의 代表的[대표적] 形容語[형용어]다. 「淸楚[청초]한 그 姿態[자태]」라 함이 더욱 적당한 듯하건마나 音韻[음운]이 그만 못하기로 아담한 그 양자라고 하였다. 그 코스모스는 제 몸을 가누는 힘이 甚[심]히 弱[약]하여 가을 開花期[개화기]까지에 바로 선 대로 견디는 것이 드물고 여름내 된 風雨[풍우] 등에 부대끼고 부대끼어 쓰러지고 만다. 그렇지마는 몸은 쓰러져도 고개만은 반짝 치어들어 하늘을 바라보며 굽히지 않은 뜻을 보라고 외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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된서리 치던 날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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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을 길을 가노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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農家[농가] 마당 끝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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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흐트러진 코스모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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밑에서 노닐던 닭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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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리치고 닫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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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은 即景[즉경]이다. 코스모스 흐트러뜨리는 된서리 때문인 것 같이도 보이고 또 코스모스 아름다운 꽃 속에 무뚝뚝한 닭들이 설레는 것도 우스웠던 것이다. 農家[농가]의 한 情景[정경]이라고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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釋王寺[석왕사]의 松林[송림]은 언제 보아도 좋다. 沙器里[사기리]에서 斷俗門[단속문]까지의 平原性松林[평원성송림]도 特色[특색]이 있거니와 斷俗門[단속문]에서 登岸閣[등안각]에 이르는 約[약] 五里間[오리간]의 溪谷性松林[계곡성송림]이 더욱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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松林[송림]의 美[미]는 單純[단순]한 소나무의 集合[집합]이라는 一條件[일조건]만으로 되는 것이 아니다. 첫째는 소나무 개개의 생김생김, 둘째는 어린 솔, 젊은 솔, 늙은 솔, 큰 나무, 작은 나무의 布置[포치]된 位置[위치], 세째는 松林[송림]이 놓여 있는 環境[환경], 네째는 全松林[전송림]을 統一[통일]하는 어떤 原理[원리], 어린 것들이 어떤 松林[송림]의 美的價値[미적가치]를 決定[결정]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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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釋王寺洞口[석왕사동구]의 松種[송종]으로 말하면 優美典雅[우미전아]한 赤松[적송]인데다가 老[노], 少[소], 大[대], 小[소]의 布置[포치]와 雪峯山[설봉산]의 雄大[웅대]한 背景[배경]으로 하고 高低[고저]와 句配[구배]의 曲線[곡선]이 不險不夷[불험불이]한 丘陵[구릉]의 形勢[형세]가 다 그 宜[의]를 得[득]하였고 또 물 맑고 소리 맑고 屈曲[굴곡]과 形狀[형상] 아름다운 一條溪流[일조계류]가 全幅[전폭]의 風景[풍경]을 統一[통일]하여 주었고 이 溪流[계류]를 沿[연]하여 내인 道路[도로]가 또 우리에게 琓賞[완상]하는 變化[변화] 많은 位置[위치]를 提供[제공]하는 外[외]에 蜿蜒[완연]한 道路自身[도로자신]이 自然[자연]의 美觀[미관]을 돕는 一要素[일요소]를 成[성]하였다. 斷俗門[단속문], 登岸閣[등안각], 不二門[불이문], 曹溪門等[조계문등]의 길 목목이 세운 優雅[우아]한 古代建築[고대건축]이 自然[자연]의 美[미]에다 人類[인류]의 審美感[심미감]의 高尙[고상]한 一校正[일교정], 一補添[일보첨]을 加[가]한 것은 勿論[물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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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陰曆[음력] 九月九日[구월구일] 夜[야]에 上弦月下[상현월하]에 斷俗門[단속문] 안 시내가에 兀然[올연]히 홀로 섰다. 얼음같이 찬 大氣[대기]는 엉키어서 움직이지 아니하건마는 달빛과 별빛을 이고 선 老松[노송]의 가지 끝에서는 그침 없는 읖조림이 무슨 森嚴[삼엄]인고, 이 무슨 靜寂[정적]인고, 돌 위로 어둠 속으로 굴러오는 시냇물 소리조차도 멀고 깊은 神秘[신비]의 나라에서 울려오는 듯 하다. 반쪽보다 약간 더 큰 달은 垂楊[수양]버들 모양으로 가지 축축 늘어진 키 큰 늙은 소나무 위에 徘徊[배회]한다. 수풀 속으로서는 송진 향기가 있는 듯 마는 듯 떠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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平生[평생]에 솔이 좋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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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곧음도 좋거니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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굽음도 멋있거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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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애솔인들 궂으랴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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늙도록 더 아름다움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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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못내 부러워하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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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나무는 늙을수록 몸이 붉어지고 가지가 축축 늘어지고 살이 윤택해지고 俗態[속태]를 벗어 仙風[선풍]을 갖추게 되는 것이다. 世界[세계]에 朝鮮[조선] 사람처럼 솔을 愛好[애호]하는 이가 있으랴. 소나무 집에 소나무 때고 살다가 소나무 棺[관]에 담겨 솔밭 속에 묻히는 이는 朝鮮人[조선인] 밖에 없을 것이다. 소나무의 脫俗[탈속]하고 崇高[숭고]하고 閑雅[한아]한 氣象[기상]을 사랑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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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과 달 솔과 나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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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울어 예는 저 물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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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기론 찬바람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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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더운 볼을 스쳐가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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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풀이 어둡사옴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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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더욱 거룩하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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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72
어렴픗 아는 듯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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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채 모르는 宇宙神秘[우주신비]
74
耿耿[경경]한 작은 魂[혼]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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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 앞에 섰사오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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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밤을 어이 잘까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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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잠 못 일까 하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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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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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 이틀 대단히 춥고는 날은 다시 따뜻하여져서 키 작은 빨강 잠자리와 동글한 무당벌레들이 松林[송림] 사이 日光[일광]의 바다에 數[수]없이 오르락 내리락하고 논다. 더구나 夕陽[석양]의 光線[광선]이 살같이 쑥쑥 뻗을 때면 진실로 無窮無盡[무궁무진]한 微細[미세]한 生物[생물]들이 남은 日光[일광]과 남은 生命[생명]을 아끼는 듯이 아지랑이 모양으로 떠 논다. 어이 그리 많은 生命[생명]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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釋王寺[석왕사]는 海拔[해발]로는 그리 높은 곳도 되지 못하는 모양이언마는 地形[지형]에 因[인]함인지 空氣[공기]의 淸澄[청징]하고 日光[일광]의 純强[순강]함이 서울의 比[비]가 아니다. 옷을 벗고 살을 日光[일광]에 直接[직접] 내대어 보라. 마치 數[수]없는 銳利[예리]한 針[침]으로 폭폭폭 皮膚面[피부면]을 찌르는 듯이 刺戟[자극]이 强[강]하다. 煤煙[매연]과 塵埃[진애]에 紫外線[자외선] 다 빼앗긴 뜨뜻미지근한 日光[일광]과는 同一[동일]의 語[어]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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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이 몸도 休養[휴양]이 되었기로 하루는 人力車[인력거]를 얻어타고 旅舘村[여관촌]에서 五里[오리]나 되는 절 구경을 가기로 하였다. 내 마음에는 절 구경보다도 절에 가는 途中[도중]의 風景[풍경] 구경이 主[주]다. 하늘에는 一點雲[일점운] 없고 또 一點風[일점풍] 없다. 봄같이 따뜻한 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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松林[송림] 속으로 가느라면 때때로 雪峰山[설봉산]의 錦繡屛[금수병]의 바로 中央上部[중앙상부]가 눈에 뜨인다. 내가 처음 오던 날 볼 때보다도 더욱 빛이 날고 峰頭[봉두]에는 完全[완전]히 落葉[낙엽]이 되어 앙상하게 된 나무들도 멀리 바라보인다. 그러나 釋王寺[석왕사]의 丹楓[단풍]을 雪峰山[설봉산]의 錦繡屛[금수병]만에 限[한]할 것은 아니다. 溪谷[계곡]에 沿[연]한 松林[송림] 밑에 生長[생장]할 여러 가지 灌木[관목]들도 雪峰山[설봉산]에 五色[오색]의 玲瓏[영롱]할 때가 되면 저마다 제 빛을 들고 나선다. 一年生[일년생] 풀잎사귀까지라도 色彩[색채]의 絢爛[현란]은 정말 丹楓[단풍]만 못할지언정 누르스레, 붉으스레, 제 힘껏은 차리고 나서서 이 철의 큰 裝飾[장식]에 제 分[분]대로는 寄與[기여]를 하는 것이다. 푸른 솔잎, 朱紅色[주홍색] 솔나무, 그 밑에 울긋불긋한 나무잎, 풀잎, 이것도 決[결]코 버릴 景致[경치]는 아니다. 만일 얼음같이 차고 水晶[수정] 같이 맑은 寒溪[한계]의 고인 물굽이에 이끼 덮인 틈에 이름도 없는 한두 포기 누른 풀, 붉은 풀이 비치인 것을 본다 하면 그 一幅[일폭]의 小品畵[소품화]가 決[결]코 어느 滿山紅綠[만산홍록]에 지지 아니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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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흔히 丹楓[단풍] 구경 갔던 길에 丹楓[단풍] 가지를 꺾어 오거니와 마음 있는 이는 그것이 부질없음을 깨달을 것이다. 丹楓[단풍]의 美[미]는 여러 가지 나무의 저마다의 色彩[색채]가 가지각색 모양으로 配合[배합]된 綜合[종합]에 있는 것이요, 決[결]코 어느 한 나무, 어느 한 가지에 있는 것이 아니다. 아무리 아름답게 보이던 風景[풍경] 속에서라도 그 中[중]에서 어느 것 하나만을 집어내면 오직 平凡[평범]한 一草[일초], 一木[일목], 一石[일석], 一水[일수]에 不過[불과]하는 것이니 美[미]의 本質[본질]은 複雜[복잡]의 調和[조화]에 있는 것이다. 저 山[산]의 傾斜[경사]와 岩石[암석]과 溪流[계류]의 形狀[형상]과 松林[송림]과, 그 밑에 生長[생장]하는 草木[초목]들과, 그것들의 各種[각종] 色彩[색채] — 이런 것이 모두 범연한 布置[포치]가 아니요, 實[실]로 생각 깊은 「뎃상」으로 되어서 우리에게 美感[미감]을 주는 것이다. 釋王寺[석왕사]의 溪谷美[계곡미]는 奇[기]한 데도 있지 아니하고 壯[장]한 데도 있지 아니하고 오직 平凡[평범]의 調和[조화]에 있다. 아무 神奇[신기]한 것, 絶妙[절묘]한 것도 없건마는 그 地形[지형], 林相[임상], 溪谷[계곡], 水石[수석], 道路[도로], 明暗[명암]이 수수하게 그러면서도 俗[속]되지 않아서 여러 번 볼수록 淡[담]한 情[정]이 듦을 깨닫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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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작 釋王寺[석왕사]라는 절에 이르러서는 내 눈에 드는 것은 그 陽明[양명]한 집터와 建築物[건축물]로의 龍飛樓[용비루]와 方花即果[방화즉과]라는 無名氏[무명씨]의 額[액]뿐이요, 싫은 것을 주워섬기라면 限[한]이 없거니와 그 中[중]에 最[최]되는 것은 그 좋은 位置[위치]와 建物[건물]이 主人[주인]을 못 만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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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一九二八年十月二十七日~三十一日[일구이팔년시월이십칠일~삼십일일] 《東亞日報[동아일보]》 所載[소재])
【원문】병(病)과 추(秋)와 자연(自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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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광수(李光洙) [저자]
 
  동아 일보(東亞日報) [출처]
 
  1928년 [발표]
 
  수필(隨筆) [분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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