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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거장(停車場) 근처(近處) ◈
◇ 정거장 근처 1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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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7.4~10.
채만식
1
停車場近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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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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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월이 내일 모레로 다가온 삼월 그믐, 남방의 꽃은 일러서 정거장 둘레로는 개나리가 한창 어우러져 피었다. 무더기 무더기로도 피고 집을 둘러선 울타리로도 둘러 피었다. 정거장 복판에도 피었다. 노란꽃이 푸른 잔디 언덕과 겨루듯이 정신이 들게 산뜻하다. 햇빛이 맑아서 꽃은 더욱 해맑다. 바람결도 알맞게 보드랍다.
 
4
정거장에서 바라보이는 들판의 금점판에서는 오늘도 다름없이 숱한 금을 파내느라고 이천 명의 일꾼이 군데군데 모여서 삽질을 하고 흙짐을 지고 도로꼬를 밀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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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한 일꾼들과는 다르게 이날 오후 세사나 되어서는 동만(東滿)으로 떠나갈 이민(移民)이 백 명 가량이나 정거장으로 들이닿았다. 근동에서 뽑은 스물여덟 가구(戶[호])에 아흔네 명의 이민이다.
 
6
허리가 꼬부라진 노인만 없지 웬만큼 늙은 사람도 있고 아기는 많다. 마침 시집갈 나이가 된 색시도 있다. 그런 색시는 정거장 둘레에 핀 개나리 꽃 같은 노랑저고리를 입었다.
 
7
등에 업힌 아기와 겨우 자박자박 걸음을 얻는 어린아이만 빼놓고 모두 크고 작은 보퉁이 하나씩을 이고 안고 걸머지고 손에 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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옷들은 제가끔 멀리 간다고 헌 것이나마 갈아 입었다. 얼굴들은 그대로 검누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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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누런 얼굴에 모두들 추레해서 낯빛이 더욱 어둡다. 좋아하는 것은 차를 타는 줄 아는 어린아이들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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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장이 앞을 서서 앞선 사람과 이야기를 하고 이민들은 말을 잊은 듯이 묵묵히 흐트러진 열을 지어 정거장 복판으로 들어온다. 보퉁이에 달아맨 바가지가 저희끼리만 달그락거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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맨 뒤에는 회색 양복에 회색 스프링을 입은 면장과 면의 서무와 주재소 소장이 웃고 이야기를 하면서 넌지시 따라온다. 그 뒤로 이민을 전별하려 한 오십 명이나 남녀 섞어 노소가 무더기로 따라온다. 그 사람들도 다같이 추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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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거장 복판에 다 들어서서 가는 사람과 보내는 사람이 한데 한 무더기씩 갈려가지고 미진한 작별을 한다. 눈물이 군데군데서 흐른다. 햇빛과 꽃빛은 그대로 맑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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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속에 덕쇠네 모자도 섞였다. 순갑이가 덕쇠네를 배웅하러 따라나왔다. 덕쇠어머니는 저편에서 배웅나온 동리 사람들과 비죽비죽 울면서 이야기를 하고 있고 덕쇠는 이편에서 순갑이와 이야기를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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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쇠는 어떻다고 할 수가 없고 그저 고향을 떠난다는 것이 슬프기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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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들판의 금점판을 후 둘러보느라니까 새삼스럽게 뱃속에 들어 있는 금덩이가 생각이 났다. 그새 십여일째 두고 아무리 나오기를 기다렸어도 아니 나왔었다.
 
16
“이 사람아, 이놈의 것은 영 안 나올라는가 보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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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쇠는 속을 아는 순갑이한테 제 배를 가리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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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 나와두 갈 데 있가듸? 백년 가두 뱃속에 들은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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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면서 순갑이도 덕쇠의 배를 바라다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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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다가 그냥 죽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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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냥 죽으면 자식들더러 면례헐 때 찾어먹으라지? 남은 수만금두 뫼였다가 자식한테 몰려준다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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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식이란 말에 덕쇠는 잠깐 잊었던 이쁜이 생각이 다시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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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까두 부탁하였지만 우리 예편네 응? 혹시 오거들랑 말이여, 자네가 잘 좀 보살펴주소잉? 그러구 바루 내게다가 편지히여, 그럼 내가 오든지 돈을 부치든지 허께…… 춘삼이헌데두 부탁히였으닝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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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세 그 걱정은 말래두, 잡것이 잔소리는 퍽 허구 있네! 그렇게 못믿어 허다가는 내가 도루 팔아먹을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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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히, 그렇지만 인제 나를 찾어오기는 오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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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 있는 놈허구 배가 맞어서 도망갔다문서 찾아오기는 개X을 찾어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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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쇠는 역시 그럴 것을 헛되게 희망을 가지는 것이 한심해서 추렷이 말이 없다. 그는 다른 일가친척이 없으니까 달리 사람을 못잊어하는 회포는 없어도, 그 대신 다만 한 사람 이쁜이가 미망이 져서 그런 대로 고향에 처져 있을 것을 공연히 떠나나보다 하는 후회를 지금도 두루 하고 있다.
 
28
전에 늘 발길로 걷어차고 하던 역부가 흘금흘그 곁눈질을 하면서 지나간다. 덕쇠는 인제는 그를 어려워할 것도 없고 버젓하게 차를 타는 손님이라서 고개를 꼿꼿 쳐들고 역부를 내려다본다.
 
29
망대(시그널)가 숙었다. 오래잖아 저쪽 아랫녘에서 이민을 오백 명이나 실은 이민열차가 들이 닿을 판이다. 망대가 숙으니까 사람들의 웅성거리는 소리가 적이 높아진다. 소리를 숨겨 우는 소리도 들린다.
 
30
정거장 사무실에서는 ‘귀빈’들의 재그르르 웃는 소리가 쏟아져나온다. 봄날의 오후에 알맞게 화창한 웃음소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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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쇠는 우두커니 개나리꽃 핀 것을 바라보고 있다가 성큼성큼 가더니 한 가지를 꺾어 쥐고 순갑이 옆으로 도로 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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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기두 이런 꽃이 피는가 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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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버텀 오랑캐 땅에는 꽃이 안 핀다구 허데마는…… 더군다나 그런 좋은 꽃이 필라든가?”
 
34
순갑이는 꽃망울을 하나 따서 들여다보다가 땅바닥에 흘려버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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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꽃두 마주막이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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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투산이가 꽃은 히여 무엇허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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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두 이런 꽃이나 피구 허면 고향 생각이 나더래두 좀 덜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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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허지 덜히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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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남은 살이나 먹은 계집아이가 옆으로 지나다가 덕쇠가 꽃 가진 것을 보더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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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꽃 나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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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고 손을 벌린다. 덕쇠는 꽃과 소녀를 번갈아 보다가
 
42
“오냐, 네가 이 꽃 갖구 가거라. 이 꽃이 우리 고향 맨 마주막 보는 거다 응? 저기 가면 이 꽃은 없대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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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면서 소녀의 손에다가 꽃가지를 쥐어준다. 소녀는 꽃처럼 웃고 돌아서서 간다.
 
44
기적 소리가 나면서 산모롱이로 차가 돌아온다. 이민들은 제가끔 보퉁이를 찾아 들고 열을 지어 선다. 역장이 나오고 면장, 소장이 나오고 구장이 분주하게 왔다갔다 한다. 차를 내어다보더니 덕쇠는 입을 실룩실룩하면서 순갑이의 손을 잡고 말을 못한다. 들판에서 일을 하던 일꾼들이 손을 멈추고 이민이 떠나는 정거장을 바라본다. 차는 씨근거리면서 가까이 들이닿고 이민들 사이에서는 우는 소리가 여러 군데서 들리고 정거장 근처의 개나리 꽃과 잔디 언덕과 오후의 봄 햇빛은 고요히 맑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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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女性 제2권 제3호~제10호, 1937>
【원문】정거장 근처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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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채만식(蔡萬植) [저자]
 
  여성(女性) [출처]
 
  1937년 [발표]
 
  소설(小說) [분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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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 General Libraries 최종 수정 : 2022년 09월 21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