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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緣分(연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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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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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바라 방자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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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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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고 책상 위에 펴 놓은 책도 보는 듯 마는 듯 우두커니 하고 무엇을 생각하고 앉았던 몽룡(夢龍)은 소리를 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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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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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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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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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고 익살덩어리로 생긴 방자가 어깨짓을 하고 뛰어 들어 와 책방 층계 앞에 읍하고 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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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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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룡은 책상 위에 들어오는 볕을 막노라고 반쯤 닫히었던 영창을 성가신 듯이 와락 밀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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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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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얘, 너의 남원 고을에 어디 볼 만한 것이 없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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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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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자는 의외에 말을 듣는 듯이 고개를 숙인 대로 눈을 치 떠서 물끄러미 몽룡을 치어다보더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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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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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인의 골엔들 어찌 볼 만한 곳이 없을 리가 있읍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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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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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으로 가오면 나물 캐는 것도 볼 만하옵고, 들로 가오면 농사짓는 것도 볼 만하옵고, 우물로 나가오면 여편네들 물 길어 놓고 밥솥에 밥 눗는 것도 다 잊어버리고 수다 늘어 놓는 것도 볼 만하옵고, 또 행길로 나가오면 술주정군이 술 주정하는 것, 술취한 남편 붙들고 내외 싸움하는 것도 볼 만하옵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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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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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라 이놈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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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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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고 몽룡은 괘씸한 듯이 책상을 딱 치며, 누가 그런 소리 너더러 줏어대라드냐. 어디 경치 볼만한 곳이 있느냐 말이다—어 그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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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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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그렇거든 애시에 그렇게 말씀하실 께지 소인인들 힘 들여 번 밥 먹은 기운을 헛소리에 다 써버리고 싶을 리가 있겠읍니까...... 소인의 골에 경치 볼 만한 곳으로 말씀하오 면 북문 밖에 조종산성 좋다 하옵고 서문 밖에 관왕묘도 그 럴 듯하다 하오나 제일 이름이 높기로는 남문 밖 나서서 광 한루와 오작교온데 경개 절승하옵니다. 과시 삼남에 제일 명승지라 할 만하옵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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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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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한루라 광한루, 오작교 오작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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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고 몽룡은 혼자 입속으로 불러 보더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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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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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얘, 광한루 오작교 이름이 좋다—광한루로 나가자. 나귀 안장 지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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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말에 크게 놀라는 듯이 방자가 껑충 뛰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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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련님, 큰일날 말씀 마시오—뉘 밥줄을 끊고 다리 마댕 이를 분지르실 양으로 그런 말씀을 하시오? 사또게서 들으 시면 마른 하늘에 벼락이 내릴 것이요...... 또 공부하시는 도 련님이 공부나 하실 게지 좋은 경치는 찾아 무엇하시려 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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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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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고 바로 몽룡을 경계하는 어조다. 서로 상하의 구별을 잊고 그만큼 친해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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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부하는 사람은 경치 구경도 못 간다드냐. 좋은 경치를 대하여야 좋은 글이 나오는 것이다—네가 무엇을 알겠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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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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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또 분부는 내 수쇄하마. 어서 나귀 안장 짓고 공방 주모 관청빗 불러서 자리와 술과 안주 준비하라고 일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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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고 몽룡은 벌써 일어나서 옷을 입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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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룡은 생명주 겹바지에 당베 중의 받쳐 입고 옥색 항라 겹저고리 옷고름에 약랑을 차고 남갑사 수향배자에 옥단추 를 달아 입고 당모시 중추막에 생초 긴 옷을 받쳐 입고 송 금단 허리띠에 모초 단 두리낭자 주황당사 벌매듭 끈을 달 아차고 널찍한 자주갑사 띠를 느슨히 매었는데 나귀가 걸음 을 빨리 걸을 때마다 띠끝이 석웅황 박은 숙갑사 토막 댕기 와 어울려서 펄펄 날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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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또 자제 사또 자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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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고 나귀가 지나가면 길가 사람들이 모두 부러운 듯이 우 러러본다. 오늘이 오월 단오라 울긋불긋 새옷 입은 아이들 은 떼를 모아 몽룡의 나귀를 따라온다. '사또자제 이 도령 이 얼굴 잘생기고 재주 있다' 하는 것은 남원 부내에서 모 르는 사람이 없었다. 그의 희고 넓은 이마, 광채 있는 눈, 높은 코하며, 후리후리한 키하며, 아직 나이는 열 여섯 살이 라 애티는 있지마는 과연 호남자의 풍격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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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이 자기를 모두 우러러볼 때에 몽룡도 기뻤다. '잘 났다' '재주 있다' 하는 말을 어려서부터 들어온 몽룡은 조선 팔도에 자기가 으뜸인 것같이 생각하였고 장차 자기는 글 잘하고 벼슬 높은 사람이 되어 이름이 크게 떨칠 것을 스스로 믿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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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룡은 의기 양양하여 일부러 나귀를 천천히 천천히 몰고 분홍당지 숭두선을 헌거로이 부치면서 광한루로 향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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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한루는 처음에는 잘 지었던 모양이나 매우 퇴락하여서 단청도 다 벗겨지고 기왓고랑에 묵은 풀이 우거지었으며 마 루청 널조차 여기저기 떨어져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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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룡은 방자가 자리를 까는 동안에 마루로 이리저리 거닐 며 사방의 경치도 바라보고 들어와 벽에 붙인 글귀와 지나 간 사람들의 성명 새겨 붙인 것도 보더니 매우 볼 만한 듯 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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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봐라 방자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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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고 방자를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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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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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한루라고 이름만 좋았지 어디 좋은 것 있느냐. 네가 이 것을 삼남 제일 승지라 하니 과연 상놈의 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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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자는 몽룡의 얼굴에 볼만한 빛이 있는 것을 보고 가장 수심된 듯이 두 어깨를 축 늘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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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길래 소인이 여쭈었지요—공부하시는 도련님이 가만 히 글이나 읽고 계실 것이지 승지 찾으시기 당치 않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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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 도련님께서 경치 보시는 눈이 열리지를 못하셨으니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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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고 손으로 뒤통수를 긁으며 혀를 끌끌 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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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룡은 기감 막혀 웃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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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디 경치 잘 보는 네 이야기 좀 들어 보자—네 눈에는 광한루가 그렇게 좋으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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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다 뿐이겠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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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고 방자는 혹은 왼편 팔을 들어 왼쪽을 가리키고 혹은 오른편 팔을 들어 오른쪽을 가리키고 혹은 고개를 번쩍 들 어 하늘을 우러러보며 혹은 손가락을 빳빳이 해가지고 땅을 가리키면서 노랫가락으로 광한루의 좋은 연유를 설명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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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까운 산은 초록이요 먼 산은 퍼렁이요 훨쩍 더 먼 산 은 회색이라. 가까운 산에 아지랑이요 먼 산에 안개오니 동 남서 삼방으로 둘러 선 첩첩 산이 그 아니 좋사오며, 일망 무제 넓은 들에 물 있으면 논이 되고 물 없으면 밭이 되어 도련님네 같으신 양반님네 진지 짓는 벼며 소인네 같은 상 놈들이 먹는 밥이 되는 조와 피와 보리, 밀 파릇파릇 자라 나니 그 아니 좋은 경치오며, 꽃 피는 산을랑 등에 지고 붕 어 메에기 송사리떼 노는 개천을랑 앞에 두고 무거운 기와 도 말고 끌어 오기 어려운 돌도 말고 가볍고 아무 데나 있 는 풀과 흙으로만 지은 농가가 둘씩 셋씩 셋씩 둘씩 조는 듯이 꿈꾸는 듯이 배부른 송아지들처럼 풀 속에 누웠느니 그 아니 절묘한 경치오며, 눈을 들어 우러러보오면 연옥색 하늘에 양떼 같은 구름 점이 오락가락 널려 있고 이따금 이 렇게 서늘한 바람이 슬슬 불어와 소인의 등에 맺힌 향기로 운 땀을 씻어 가니 그 아니 상쾌한 경치요? 게다가 이름조 차 광한루에 좋은 술과 안주까지 있으니 이런 좋은 경치가 또 있겠소? 어깨춤이 절로 나네, 좋을 좋을 좋을씨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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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고 얼씬얼씬 춤을 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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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 그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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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고 말없이 듣던 몽룡은 방자의 어깨를 툭 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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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얘, 너 그런 재담을 다 어디서 배웠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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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자 춤추기를 그치고 시치미를 뚝 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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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이야 바로 소인의 고을에 무슨 그리 좋은 경치가 있 겠읍니까. 그러하오나 다 보는 눈에 있사옵지요—소인같이 천줄 곰보 만줄 곰보로 빡빡 얽어맨 주제도 소인의 계집의 눈에는 선풍 도골로 보이는 모양으로 이만한 경치도 보시는 눈을 따라 과히 안 좋지는 아니하옵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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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연 네 말이 유리하다—네 말과 같이 광한루를 천하 제 일 승경으로 치고 술이나 먹고 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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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고 몽룡이 먼저 자리에 앉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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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바라, 너희들도 다들 올라 앉아라. 우리 오늘은 상하의 별 다 걷어 치우고 모두 친구가 되어서 특고 놀자. 자 다들 올라 앉아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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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말에 방자가 먼저 몽룡이 맞은편에 펄썩 앉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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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련님이 오르라시니 오르려무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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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고 어깨를 으쓱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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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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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고 몽룡은 손을 들어 자기에게 권하는 술잔을 막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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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당에는 막여치라니 좌중에 누가 제일 나이가 많으냐— 우리 나이 차례로 순배를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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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자가 좌중을 휘둘러 보더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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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 이 후배놈이 제일 연장자일 듯하오. 보기에는 요렇 게 땅딸보라도 정녕 마흔 살은 넘었을 것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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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 그러면 내게 존장은 넉넉하구나. 첫잔은 후배에게로 돌려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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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고 몽룡이 손수 술잔을 들어 후배를 권한다. 본래 용렬 한 후배는 도련님의 손에서 술잔을 받는 것이 너무도 송구 하여 잔 잡는 손이 벌벌 떨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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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놈아, 이것은 강신을 하느냐 술은 왜 엎질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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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고 방자가 자기 옷에 떨어진 술방울을 떨어 버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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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순배 두 순배 쉴 새 없이 돌아서 병에 술도 거의 다 하 고 안주 그릇도 하나씩 둘씩 비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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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주라야 과일포, 암치, 문어 따위에 불과하건마는 그런 것 을 좀체는 얻어 먹어 보지 못하던 판이라 모두 접시굽을 핥 을 지경이었다. 몽룡의 얼굴에 홍훈이 돌고 숨결이 빨라진 다. 용렬한 후배도 술잔이나 들어가니 몽룡이를 두려워하는 마음도 줄고 제법 고갯짓을 하며 떠든다. 제비 한 쌍이 처 마 밑으로들었다 나왔다 하는 것을 보고 후배는 흥에 못 이 겨하는 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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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남 갔던 구제비야 옛집 찾아 예 왔느냐 옛집은 예 있건만 옛 사람은 간 곳 없네 압다 너도 술이나 한 잔 먹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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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고 제 잔에 먹다 남은 술을 제비를 향하여 뿌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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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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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고 방자가 젓가락으로 장단을 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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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룡은 슬며시 자리를 떠나 난간에 지혀앉아서 담배를 피 웠다. 네 사람은 여전히 술병을 기울이고 웃고 떠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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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룡은 심신이 상쾌하여 이리저리 경치를 바라볼 적에 오 작교 저편 큰길 건너 늙은 수양버들 밑에서 녹의 홍상으로 차린 처녀 삼사인이 그네를 뛰는 양을 보았다. 치맛자락이 펄렁 댕기 끝이 너훌 앞으로 굴러 뒷가지를 차고 뒤로 굴러 앞가질르 찰 때에 흐느적 흐느적 흔들리는 수양버들 잎사귀 가 햇빛에 번뜻번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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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녀들이 그네 뛰는 것을 처음 보는 것이 아니언마는 오늘 따라 몽룡은 심사가 산란함을 깨달았다. 더구나 그네 뛰는 처녀들 중에 분홍 치마 노랑 저고리 입은 한 처녀가 이상하 게 몽룡의 맘을 끌었다. 동안이 뜨므로 그 얼굴까지는 볼 수가 없으나 그네 위에서 몸 가지는 태가 다른 처녀와는 유 별하게 아름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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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네를 뛰는 것이 아니라 춤을 추는 것이로구나.』 —몽룡은 이렇게 생각하였다. 담배도 잊어버리고 몽룡은 그 처녀만 뚫어지게 바라보노라니 가슴은 두근거리고 눈은 아 뜩아뜩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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견디다 못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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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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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고 몽룡은 방자를 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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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련님, 담뱃불에 중추막 타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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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고 방자가 몽룡의 중추막 자락을 걷어 치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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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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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얘 저게 누군지 아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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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고 몽룡은 중추막 자락 타는 것은 본 체도 아니하고 부 채로 그네 맨 수양버들을 가리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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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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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치 빠른 방자는 얼른 몽룡의 뜻을 알아차렸다—허기는 그 럴 나이가 되었는데 하고 빙끗 웃었으나 일부러 시치미 뚝 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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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은 보따리를 지고 가는 것을 보니 아마 먼길 가는 행인인가 보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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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그것 말고 저것 말이다—저기 저것 말이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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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그것은 아마 엿장산가 보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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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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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익 그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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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고 몽룡은 화를 내어 벌떡 일어나서 부채는 걷어 치고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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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기 저 지금 그네에서 내리는 저 처녀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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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허 도련님! 공부하시는 도련님이 남의 여자만 바라보 시고 담뱃불에 옷 타는 줄도 모르니 참 딱한 일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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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고 방자가 머리를 쩔레쩔레 흔들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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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이 오월 단오날이오니 여염집 계집아이들이 그네 뛰 는 것이옵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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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다. 네가 모른다. 닭의 떼에 학처럼 뛰어나는 저 계 집아이가 예사 계집아일 리 만무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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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련님도 취하셨소. 여기서 이렇게 보고 학인지 따옥인 지 어떻게 아신단 말이요. 당년한 계집애들은 먼발치서 보 면 다 미인같이 보입니다. 가까이 가 보면 다 그렇고 그렇 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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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다. 그렇고 그런 것이 아니다. 그래 네 눈에는 저 네 계집아이가 다 같이 보인단 말이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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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고 몽룡은 화증을 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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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인 보기에는 다 같은 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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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고 방자가 고개를 돌려대고 픽 웃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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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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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룡은 물끄러미 그네터를 바라보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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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허, 눈에도 상목 반목이 있어서 상놈은 눈도 양반만 못하단 말이냐—네 한 번 더 자세히 보아라. 저기 저 분홍 치마에 노랑 저고리 입고 지금 막 그네를 뛸 양으로 줄을 갈라 쥐고 한 발을 올려 놓는 저 아가씨를 보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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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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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자도 몽룡이가 가리키는 곳을 이윽히 보는 체하더니 이 제야 알아본 듯이 손벽을 딱 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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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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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저애 말씀이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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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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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네가 그 애를 아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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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그애 말씀이야요? 나는 누구라고...... 그애 같으면 안 다 뿐이겠소. 소인이 길러내다시피 한 계집앤 걸요...... 아이 똑똑하지요. 매우 얌전할 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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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놈아, 길러내기는 네가 나이가 몇 살인데 길러내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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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소인의 나이가 지금 갓서른이요. 남과 같이 돈냥이나 있어서 일찍 장가만 들었더면 저만한 딸을 둘은 두었겠 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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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룡은 다시 난간에 지혀앉고 방자의 소매를 끌어 곁에 가 까이 앉히며 나직한 어조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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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얘, 아무리 보아도 그 아가씨가 범상한 여자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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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가 길러냈다 하니 너는 그를 잘 알리라—대관절 그가 누구 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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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고 은근히 묻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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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상불 도련님 눈도 어지간 하시오. 그 애는 본읍 퇴기 월매의 딸 춘향이라 하옵는데, 절대 가인은 마치 모르겠소 마는 우리 호남 제일 미인이라고 소문이 장히 높지요—어지 간하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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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 그러면 기생이로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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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요, 기생은 아니지요. 대비 바치고 속량하여 기안에 이름을 어였으니 기생은 아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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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생 아니란 말에 몽룡은 잠깐 머쓱하더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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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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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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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어찌 좀 불러 올 수 없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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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를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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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향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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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향이를 이리로 부르셔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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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고 방자는 펄쩍 뛰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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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림도 없소. 그 계집아이가 양반의 씨라고 도고하기가 백두산 꼭대기 같아서 앉아서 도련님을 부를 지경인데 그 계집애를 불러 와요? 어림도 없는 일은 생념도 마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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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룡은 더욱 숨결이 높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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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도고하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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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말하면 헛말되지요. 관속 건달들은 말할 것도 없거니 와 호남에 누구누구하는 양반님네 선비님네도 수없이 얼러 본 모양입니다마는, 그 애가 거들떠 보기는커녕 대문 안에 들여를 놓아야 정하배라도 하지요—나들 대문에 붙인 입춘만 바라보고는 뒤통수 치고들 돌아갔나 봅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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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고 진저리가 나는 듯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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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홍 치마는 여전히 오르락 내리락, 버들가지는 흐느적 흐 느적 몽룡의 가슴은 갈수록 설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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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얘, 네가 내 맘을 졸이노라고 거짓말을 하나 보다. 아무 러기로 그대도록 도고하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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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고 몽룡은 눈치를 보려고 곁눈으로 방자의 얼굴을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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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자는 성난 듯이 한 걸음 뒤로 물러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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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인이 거짓말 아니하는 줄은 도련님도 아시겠소 그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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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인은 거짓말을 하면은 듣는 사람이 거짓말인 줄 알 리 만 치 하옵지 듣는 사람이 속을 거짓말은 일생에 한 일이 없 소. 그러니 아예 춘향이 불러 오실 일은 생념도 마시고 그 만치 노시었으면 들어가십시다—또 사또께서 걱정하시리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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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고 하인들을 돌아보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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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얘들아 도련님 들어갑신다. 나귀 내고 자리 치워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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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고 제 맘대로 분부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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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룡은 짐짓 성을 내어 담뱃대로 마룻바닥을 두드리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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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놈아, 내가 불러오라면 불러 올 게지 웬 잔말이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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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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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고 소리를 높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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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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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자는 마지못하여 하는 듯이 시무룩하여 그네터를 향하고 건너간다. 버들가지 하나를 심술궂게 뚝 꺾어서 잔가지를 우지끈 우지끈 다 다듬어서 거꾸로 집고 군노사령의 걸음 본으로 충충충 걸어간다. 오작교 큰길 건너 잠깐 집모퉁이 에 들어 안 보이더니 그네터에 썩 나서며 바로 그네에서 내 려오는 춘향의 뒤로 발자국 소리 없이 사뿐사뿐 뛰어가서 목을 쑥 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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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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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향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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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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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고 소리소리 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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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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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향이 깜짝 놀라 그넷줄을 탁 놓고 떨어지는 듯이 땅에 내려 서서 후유하고 한숨을 지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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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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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주릴할 녀석이 왜 그다지 소리를 질러? 하마터면 낙 상할 뻔했군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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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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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고 방자를 흘겨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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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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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자 능청스럽게 놀라는 모양을 보이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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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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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 안 되었구나—네가 요새 서방 만나서 거드럭거리고 잘 논단 말은 들었지마는 아직 젖내 나는 계집애가 어느 새 아 기를 밴 줄은 몰랐구나—거 가엾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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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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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고 고개를 기웃거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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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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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끼 망할 녀석! 누가 애기 뱄다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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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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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고 춘향은 얼굴을 빨갛게 붉히고 돌아선다. 방자는 춘향 의 앞으로 따라가며, 지금 낙태할 뻔했다고 안했니? 그러면 배지 아니한 아기를 낙태부터 한단 말이냐—아무려나, 내 딸이 낙태나 아니하면 다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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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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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듣기 싫어! 이 망할 녀석이 왜 오늘은 술이 잔뜩 취해 가지고 나를 못 견디게 굴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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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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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고 춘향은 방자를 피하여 집으로 들어가려고 하나 방자 는 허리를 구붓하고 이리 왔다가 저리 갔다가 춘향의 가는 길을 막는다. 춘향의 불그레한 얼굴에 이슬땀이 맺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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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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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향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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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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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고 방자는 갑자기 점잔을 빼고 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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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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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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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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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고 춘향의 대답에는 여전히 독살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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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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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얘야 춘향아, 그것은 다 웃는 말이고...... 내가 할 말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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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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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고 방자가 춘향의 곁으로 가까이 간다. 춘향은 방자가 가까이 오니만치 뒤로 물러서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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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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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 말일 있거든 저만치 서서 하려무나. 내가 귀를 먹었 단 말이냐. 왜 바싹바싹 대들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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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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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일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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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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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고 방자는 과연 무슨 큰일이나 생긴 듯이 고개를 끄덕뜨 덕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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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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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슨 큰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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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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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고 춘향도 방자의 말에 주의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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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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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이 오월 단오가 아니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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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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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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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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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이 오월 단오라고 책방 도련님이 광한루 구경을 나 오시어 지금 저기 앉아 계신데, 네가 그네 뛰는 것을 보시 고 그만 눈동자가 곤두박이를 치어서 날더러 너를 불러오라 고 야단이시니 이를 어찌하느냐. 어느 명이라고 거역할 수 는 없고 부득불 잠깐 네가 가서 보아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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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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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룡이가 자기를 부른다는 말에 춘향은 못마땅한 듯이 눈 초리를 샐쭉 끌어 올리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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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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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얘, 그 말 같지 아니한 소리 말아라. 책방 도련님이 내가 누군 줄 알고 오너라 말아라 한단 말이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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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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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고 잘 믿지 않는 태도를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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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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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자 한 손을 이마에 대어 볕을 가리우고 한 손을 넌짓 들 어 광한루를 가리키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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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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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얘 내가 언제 거짓말 하더냐. 네 저기를 바라보아라. 저 기서 남쭉 끝 기둥에 비스듬히 기대어 서서 부채질하는 이 가 책방 도련님이 아니시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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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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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향도 방자의 가리키는 편을 바라보았다. 서편으로 기울 어진 볕에 눈이 부시어 자세히는 분간할 수 없어도 방자의 말대로 어떤 소년 하나가 비스듬히 기둥에 기대어 섰는데, 그 차림 차림이 귀한 집 공자일시 분명하고 이곳에 귀공자 라면 책방 도련님일시 분명하다. 책방 도련님이 풍채 좋고 재주 있단 말은 춘향도 들었던 터이라 한 번 보았으면 하는 맘도 없지 아니하건마는 그렇게 부른다고 수월히 갈 리야 있으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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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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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쎄 그이가 책방 도련님인지는 모르겠다마는 그이가 나 를 누군 줄 알고 부르신단 말이야. 공연히 말 많고 일 많은 네가 묻지 않는 말을 춘향이니 난향이니 하고 일러바친 게 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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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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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이야 바로 하지. 네가 춘향이란 말은 내 입으로 나왔 다마는 네 이름도 알기 전에 네 모양만 보고 벌써 혼이 반 은 빠지어 달아나서, 날더러 네가 누군가 알아 올리라 하시 니, 내가 먹을 것이 있어서 내일부터라도 삼문안 구실을 안 다니면 몰라도 어찌 도련님을 그일 수가 있느냐. 그래서 말 이야, 바로 내 입으로 바른 대로 일러 바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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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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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고 방자는 춘향의 귀에 입을 가까이 대고 한층 말소리를 낮추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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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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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얘야, 말이야 바로 책방 도련님이 과연 네 배필이 될 만 한 양반이다. 풍채 좋고 마음 착하고 그러고도 시원시원하 고, 글이야 내가 아느냐마는 글도 잘 하신다더라—밤낮 글만 읽으니 그만치 읽으면 우리 집 도야지놈도 글을 잘못하고는 못 견딜 것이다. 나도 너를 친동생같이 아니 말이지 도련님 말을 잘 들어 보아라—해롭지 아니할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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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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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 너 나를 호려내려 드는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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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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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고 춘향이 방그레 웃더니 다시 정색하고 방자더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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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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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서 이렇게 도련님께 여쭈어라. 불러 주시는 뜻은 감격 하오나 규중 처자로서 모르는 남자의 전갈 듣고 따라가옵기 는 옛 성현의 훈계에 어그러지니 못 갑니다...... 또 공부하시 는 도련님이 소창을 나오시면 소창이나 하실 것이지 남의 집 처자더러 오너라 말어라 하시는 것이 점잖으신 체면에 어그러지지 않습니까 고—그렇게 가서 여쭈어라. 나는 갈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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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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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고 칼로 똑 끊는 듯이 말하고는 뒤도 안 돌아보고 새침 하고 집으로 들어가 버리고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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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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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자는 하도 어이없어서 춘향이가 대문으로 들어가 안보이 도록 얼빠진 듯이 섰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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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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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 그년 참 맵다—사뭇 호초알이로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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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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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고 혼잣말로 중얼거리고 두 어깨를 축 처뜨리고 기운없 이 오던 길을 도로 광한루로 건너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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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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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때에 몽룡은 껄떡껄떡 침만 삼키고 춘향이가 오기만 기 다리다가 춘향은 어디로 가버리고 방자만 어슬렁 어슬렁 기 운없이 돌아옴을 보고 분함을 못 이기어 발로 광한루 마루 를 탕탕 구르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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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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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쎄, 이 못생긴 놈아! 널더러 춘향이 불러오라고 했지 들여쫓고 올라고 하더냐—저런 못생긴 놈이 어디 또 있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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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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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자는 무안한 듯이 처분만 기다리는 듯이 허리를 굽히고 비하에 읍하고 서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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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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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인이 별소리를 다해도 고개 하나 까딱 아니하옵고 욕 만 톡톡히 얻어 먹었읍니다. 도련님께서 진실로 춘향이를 보시려거든 군노 사령을 내보내시어서 붙들어나 오셔야지 여간 전갈로 부르시기나 해가지고는 명년 이때까지 부르시 더라도 춘향이는커녕 난향이도 못 보시리다.—오늘 보니까 그 애의 매서운 양이 사뭇 칼이요 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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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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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고 실심한 듯이 먼 산을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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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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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자만 책망하여도 쓸데 없는 줄을 알고 몽룡은 다시 은근 한 어조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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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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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얘, 이리 올라오너라...... 그래 내가 부른다고 했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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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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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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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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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어라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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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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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서 이렇게 도련님께 여쭈라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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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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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어라고? 그런데 왜 내게 말을 아니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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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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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도 다 안 들으시고 벼락이 나리시니 언제 말씀할 새 가 있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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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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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내가 잘못했다...... 그래 무에라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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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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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러 주시는 뜻은 감격하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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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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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 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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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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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규중 처자로서 모르는 남자의 전갈 듣고 따라가옵기 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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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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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고 방자는 말 구절을 잊어버린 듯이 고개를 기웃거리고 머리를 긁는다. 몽룡은 방자가 전하는 춘향의 말을 한 번 입 속으로 외어 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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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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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 그렇지......그리고 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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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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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 성현의 훈계에 어그러지니 못갑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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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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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 옳은 말이다...... 그러면 춘향이가 글도 읽었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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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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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 도련님만치는 읽었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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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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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룡은 고개를 끄덕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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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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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그 밖에는 다른 말은 없더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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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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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자가 말하기 어려운 듯이 머리를 긁적긁적 긁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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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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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계집애가 버릇없이 도련님 노여실 말을 하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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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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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노여할 말? 옳은 말에 노열 내가 아니다. 바로 말 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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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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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면 바로 아뢰오—또 공부하시는 도련님이 소창을 나 오시면 소창이나 하실 것이지 남의 집 처자더러 오라 말어 라 하시는 것이 점잖으신 체면에 어그러지지 않습니까라 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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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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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을 마치고 방자는 몽룡의 얼굴을 치어다보았다. 몽룡은 잠깐 머쓱해지더니 다시 얼굴에 화기가 돌고 뜻에 맞는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끄덕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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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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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연 절절히 옳은 말이다! 내가 부끄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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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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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고 이윽히 고개를 숙이고 무엇을 생각하더니 오늘 글짓 는다고 가지고 나왔던 황모 무심필에 부용당 먹을 흠뻑 묻 혀서 빛 좋은 태문지에 서너 줄을 휘휘 둘러 쓰더니 봉투에 넣어 꼭 봉하여 방자를 불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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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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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얘, 너 춘향 아씨 집에 다시 가서 아까 전갈한 것은 잘 못되었다고 사죄하는 말하고 이 편지 드리고 답장 받아오너 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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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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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자 그 편지를 받아 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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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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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욕이나 얻어 먹으러 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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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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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고 주저하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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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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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곧 다녀오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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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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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고 몽룡이가 호령 소리를 높이므로 방자 다시 마지 못하 여 어슬렁 어슬렁 아까 돌아올 때보다도 더 느린 걸음으로 길가에 버들잎 풀잎 뜯어 피리 불어가며 춘향의 집을 향하 고 걸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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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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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자는 춘향의 집 대문을 들어서자 기운을 내어서 중문으 로 통통통통 발을 구르고 뛰어 들어가며 목을 길게 뽑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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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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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향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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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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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고 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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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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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향은 마침 산란한 심서를 풀 양으로 거문고 줄을 고르고 앉았다가 방자의 소리에 깜짝 놀라 거문고를 무릎에서 떨어 뜨리고 영창으로 아까 그네 뛸 때에 상기했던 것이 식지 아 니하여 아직도 불그레한 대로 있는 얼굴을 내밀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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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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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주릴할 녀석이 왜 또 와서 지랄이야. 춘향아 춘향아 하고 온 동네가 떠나가게 부르니 춘향이가 네집 종의 자식 의 이름이드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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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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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고 눈살을 찌푸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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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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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자도 골을 내는 듯이 눈을 부릅뜨고 우뚝 층계 앞에 서 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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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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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년에 계집애, 나를 보면 언필칭 주릴할 녀석이니 내가 네집 종의 자식이란 말이냐 네 집에 밥을 얻어 먹으러 왔단 말이냐. 팔자 기박하여 삼문안 구실을 다녀 밤낮 아이 어른 한테 이놈아 저놈아 소리를 식은 죽 먹듯하고 살아는 간다 마는 너한테까지 이녀석 저녀석 소리를 들을 까닭이야 있느 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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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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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고 마당에 가래침을 탁 뱉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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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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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자가 하도 야단을 하니 춘향이 좀 누그러지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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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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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가 행세를 잘 해도 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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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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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고 방자를 힐끗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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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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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자는 여전히 성이 안 풀리는 듯이 춘향을 위 아래로 훑 어보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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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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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얘야, 내 행세가 잘못 간 것이 무에냐. 네가 남없이 낯바 닥이 예쁘장하게 생겨 먹고 행실이 바르지를 못하여서 남을 걸음을 걸리지 그려 낸들 좋아서 너한테 욕이나 얻어 먹으 러 다니는 줄 아느냐—어 참 아니꼬운 일 다보겠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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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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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고 또 한 번 퇴하고 침을 뱉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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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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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실이 바르지 못하단 말에 풀리려던 춘향의 두 눈초리가 다시 쫑깃하고 올라가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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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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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녀석, 내가 행실이 바르지 못하다니 무엇이 바르지 못 하냐—네 집에 가서 무엇을 훔치어를 왔느냐 남의 집에 불을 놓았느냐—내 행실이 바르지 못하다니 어디 바르지 못한 연 유를 일러 보아라—혓바닥을 잘라 버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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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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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자 창 앞으로 한 걸음 바싹 다가 서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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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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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냐, 네 행실이 바르지 못한 연유를 들어보아라! 과년된 계집애가 행실이 바를 양이면 동넷집 수코양이 눈에라도 띄 울세라, 네집 안마당으로 다니더라도 고개를 고부슴하고, 네 집 후원으로 거닐더라도 행여 재채기 소리라도 밖에 들릴세 라 조심을 할 것이지 그렇지 않아도 예쁘장한 계집애가 새 옷 입고 단장하고 백주 대로변에 네 활개 활짝 뻗고 치맛자 락, 속옷자락까지 펄렁거리며 굼틀굼틀거리니 길가던 행객 까지 발이 길바닥에 딱 붙고 입이 헤벌어져서 정신을 잃어 버리게 하니, 그래 이러고도 네 행실이 바른다 할 것이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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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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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가 얌전스럽게 처녀답게 가만히 네 방안에 들어앉아서 글 이나 읽든지 바느질 수놓기나 하든지 심심하거던 징동 당동 거문고 가야금이나 울리든지. 설마 고양이가 고양이를 낳고 제 버릇 개 못 준다고 장구나 둘러 메고 얼씬얼씬 엉덩춤을 춘다기로 네집 방안에서만 하량이면, 아무리 책방 도련님이 잘 아는 데는 중방 밑 귀뚜라미라 하기로 네집 담벽까지 뚫 고 너라는 계집애가 있는지 없는지 들여다볼 리는 만무하지 아니하냐—그런데 제 허물을 모르고 애꿎은 날더러—주리를 할 녀석이니 서방을 삼을 녀석이니 하니 내가 그렇게 만만 하더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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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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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향이 방자의 말을 한참 우두커니 듣고 앉았더니 기가 막 히는 듯이 웃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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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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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쨌든 입심은 좋다—방자 노릇하기는 아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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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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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향 모 월매가 안방에서 옛 친구 이삼인을 청하여 가지고 오늘이 오월 단오라고 술 먹고 있던 차에 춘향이 방에서 떠 드는 소리 나는 것을 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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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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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얘, 누구하고 이렇게 언쟁을 하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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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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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며 신을 찔찔 끌고 나온다. 나이는 육십이 가까왔으나 아직도 옛날 남원 명기로 들날리던 빛이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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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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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가 누가 왔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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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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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다가 방자가 굽실하고 절하는 것을 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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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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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 네드냐. 구실이나 잘 다니고 어머니도 무고하시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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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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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처도 잘 있고 어린것도 잘 자라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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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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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앓지나 않지요. 아주머니는 점점 젊어 가시는구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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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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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고 방자는 춘향을 돌아보며 웃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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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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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어간다는 말에 월매는 생긋 웃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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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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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을 날이 가까와 오는 년이 젊어 가는게 다 무엇이냐, 호호호. 이년석 너도 인제는 어른 다 되었고나. 이년석 그새 한 번도 아니 오더니 오늘 어째 왔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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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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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좁쌀 여덟 섬에 모가지를 매달고 어른 심부름 아이 심부 름하기에 나올 새가 있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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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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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무엇을 그렇게 떠들었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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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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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고 귀여운 듯이 춘향을 바라보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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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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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네가 누구하고 말다툼이나 하는 줄 알았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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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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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향은 새침하고 고개를 방안으로 돌리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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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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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녀석이 책방 도련님보고 춘향이니 난향이니 하고 종지 리 새 열쇠 까듯, 경신년 글강 외듯 외어 바치어서 도련님 이 나를 불러 오란다고 벌써 이 바보녀석이 두 번째나 와서 지랄이라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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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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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제는 또 바보야? 하고 싶은 대로 다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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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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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고 방자는 기막힌 듯이 웃고 돌아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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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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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매는 책방 도련님이 춘향을 부른다는 말을 듣고 마음이 솔깃하여 빙그레 웃으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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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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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가 그러지 말아라. 이 애가 일러바치지 않으면 도련님 이 네 이름 모르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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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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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고 방자를 향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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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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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아기가 무에라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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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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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까 하도 도련님이 발광을 하시길래 이 애 그네 뛰는데 와서 도련님 말씀을 전하였더니 이 애가 세길 네길 뛰며, 주릴할 녀석 오랄질 녀석 하고 욕을 닷섬이나 얻어 먹고, 닭 좇아 가던 개 모양으로 뒤통수 툭툭 치고 도련님한테 돌 아가서 익애 하던 말을 여쭈었지요, 했더니 도련님 골이 댕 기 끝까지 흘러 내려가서 또 이놈 저놈 하고 어르지요. 어 쩌면 이놈의 팔자는 나이로 말하면 내아들 딸이라고도 할 만한 어린것들에게 이놈 저놈 이녀석 저녀석 소리만 듣고 살게 되니 참으로 기가 막히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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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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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도련님이 또 가보라고 하시어서 네가 왔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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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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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고 월매는 부드러운 소리로 방자를 달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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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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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까는 입으로 전갈을 하여서 황송 황송합니다고 가서 아가씨께 간절히 사죄하는 말씀 사뢰고 이 편지 드리고 답 장 받아 오너라 해서 왔다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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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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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매는 춘향을 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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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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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가, 그 편지 보았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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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향은 말없이 고개만 짤래짤래 흔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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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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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에는 방자를 보고 월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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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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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련님 편지 어쨌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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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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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째요, 여기 있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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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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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고 방자는 허리춤을 가리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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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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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춘향이 안 주었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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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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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을 차려야 주지요. 오는 길로 벼락이 내리니 정신이 들었다 났다 하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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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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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고 방자가 견딜 수 없이 불쾌한 듯이 연해 입맛을 쩍쩍 다시고 눈을 껌벅껌벅하더니만 휘끈 발을 돌려 중문간 밖으 로 뛰어 나가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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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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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라 빌어먹을—차라리 논게 강경이를 가서 모군을 서먹 든지 그도 못하면 지리산에 들어가서 중놈의 밥을 지어주고 얻어 먹는 것이 낫지, 이놈의 구실은 아니꼬와서 못해먹을 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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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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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고 중얼거리며 달아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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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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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향이 깜짝 놀라 버선발로 뛰어 나오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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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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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얘야 방자야, 편지나 두고 가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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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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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매는 허겁지겁하는 춘향의 뒷모양을 보고 고개를 끄덕끄 덕하며 빙그레 웃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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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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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얘야 방자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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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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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향은 한 번 더 높이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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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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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자 뛰어 들어오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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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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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불러? 강경이 갈 노자나 주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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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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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얘야, 그 편지가 노자 되느냐. 네게는 쓸데 없는 것이니 편지나 두고 가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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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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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고 춘향은 수삽한 듯이 고개를 숙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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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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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자 물끄러미 춘향을 바라보다가 껄껄 웃으며 월매더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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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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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새 계집애는 다 저렇단 말이야. 아주 겉으로는 맵기가 호초알 같고 매섭기가 피장이 칼날 같으면서 속으로 딴전 치것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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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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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고 편지를 꺼내어 춘향에게 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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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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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다. 만지고 쓰다듬고 뺨에 대고 혀로 핥고 가슴에 품 고 한자 영낙없이 잘 보아라. 그리고 답장이나 얼른 써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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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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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거행 더디다고 알경이나 치우게 말아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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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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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향은 편지를 떼어 본다. 월매와 방자는 편지 보는 춘향 의 얼굴만 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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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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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향이 편지를 다 보고 나서 무엇을 생각하는 듯 하더니 또 한 번 그 편지를 보고 또 생각하는 듯하더니 또 한 번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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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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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매 참다 못하여 담뱃대를 놓고 툇마루로 올라가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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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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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디 무에라고 하시었니—좀 읽어 보려무나—나도 듣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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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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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자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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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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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옳다 나도 좀 듣기나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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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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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싫소...... 그것은 무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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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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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서 읽어라. 좀 듣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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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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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편지를 읽으면 네까짓 녀석이 알아 듣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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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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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고 춘향이 웃으며 방자를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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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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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몰라 야. 진서로 썼거든 좀 새겨 보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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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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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서는 아니다. 시조다. 글씨 참 잘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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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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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고 춘향은 무슨 마음에 드는 선물을 받은 어린아이 모양 으로 기쁜 빛을 감추지 못하고 혼자 중얼거리더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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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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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 답장 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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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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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고 월매를 보고 묻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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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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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매는 담배가 다 타버리고 연기도 아니 나는 담뱃대를 집 어 빨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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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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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방 도련님이 네 맘에 드는 게로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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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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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고 생긋 웃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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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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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에그, 어머니도...... 그러면 어떻게 해요. 편지까지 하시 었으니 답장은 해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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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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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고 춘향은 귀찮은 듯이 몽룡의 편지를 문갑 위에 한번 던지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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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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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관절 무에라고 편지가 왔는데 너는 무에라고 답장을 할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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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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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고 월매가 문갑 위에 던진 몽룡의 편지를 집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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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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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춘향은 그것을 빼앗으려다가 지는 체하고 월매가 읽는대로 내버려 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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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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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매는 편지를 한참이나 보더니 한 손으로 무릎을 탁 치며 평조로 몽룡의 노래를 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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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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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지어 내 일이어 인연도 기이할사 언뜻 뵈온 님이 그 님일시 분명하이 광한루 예 보던 벗이 찾아온다 일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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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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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 부르고 나서 월매는 이상한 듯이 고개를 기울이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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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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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가, 광한루 예 보던 벗이라 하였으니 이전에도 네가 광한루에서 도련님을 본 일이 있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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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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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고 춘향을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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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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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춘향은 수줍은 듯이 몸을 비비 꼬다가 월매의 손에서 그 편지를 빼앗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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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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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 광한루가 어디 이 광한루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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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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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럼 광한루가 또 어디 있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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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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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경 광한루요—하늘에 있는 광한루 말이요—하늘에 선관 선녀로 있을 때에 서로 보던 벗이라고 해서 예 보던 벗이라 고 했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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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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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월매가 이 말에 고개를 끄덕끄덕하며,
|
|
3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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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참 그렇고나. 내야 무식해서 광한루라면 남원 남문 밖 광한루 밖에 아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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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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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고 이윽히 무엇을 생각하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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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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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가, 네 말을 들으니까 도련님 글이 참으로 이상도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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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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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가 너를 밸 때에 꿈에 한 손에는 이화를 들고 또 한 손에 는 도화를 들고 선녀 한 분이 내려와서 도화가지를 내게 주 고 잘 가꾸어 두라. 후일에 앞날이 있으리라. 이화 가지를 전하러 갈 길이 바쁘다 하더니 이제 생각하니 너는 분명 도 화 가지고 도련님은 분명 이화 가지로고나—도련님 성씨가 이씨가 아니시냐. 광한루 예보던 벗이란 말씀이 과연 허사 가 아니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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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8
|
|
|
하고 참인 듯이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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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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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머니도 용하게도 꾸며대시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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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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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고 춘향은 픽 웃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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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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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길 꿈타령은 있다가 하고 어서 답장이나 써다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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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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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고 방자가 재촉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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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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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아차, 어 술이나 한잔 줄걸 그랬고나. 늙으면 잔망해서 걱정이야—아가, 답장 써라. 오늘 저녁에라도 누옥이나마 찾 아 오시라고 그러려무나. 네가 말 부족하고 글 부족해 못 쓰겠니."
|
|
334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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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고 담뱃대를 들고 일어나 마당에 내려서며 방자더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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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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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너는 이리 들어와서 술이나 한잔 먹어라, 좋은 편지 가 지고 온 애를 맨 입으로 보내 쓰겠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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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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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때에 안으로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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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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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님! 성님! 월매 성님 무엇하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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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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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고 부르는 소리가 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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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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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월매는 신을 찔찔 끌고 걸음을 빨리 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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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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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응 들어가우,...... 어서 이리 들어오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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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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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고 방자를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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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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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술을 주시려거든 한 사발 내보내시오, 들어가서 마나님 들한테 허리 구부리기도 싫고 수다 듣기도 싫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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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3
|
|
|
월매는 더 방자를 재촉도 아니하고 안으로 들어가더니 무 슨 이야기통이 터지었는지 깔깔 웃는 소리가 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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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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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춘향은 문갑 속에 꼭꼭 싸두었던 간지 한 축을 꺼내어 그 중에 가장 살 좋고 윤 있는 것 한 장을 골라 놓고 벼루에 먼지를 입으로 혹혹 불고 연적에 물도 알맞추 떨어뜨려서 향기 좋은 해주먹을 갈고 또 갈고 진케 간 후에 순황모 무 심필을 끝을 입으로 잠깐 씹어 풀어 가지고 궁체 한글 글씨 로 똑똑하게 정하게 노래 한 머리를 쓴다—
|
|
345
|
|
|
"이몸의 정렬함이 삼생에 뻗었으니 천상 천하에 날 안달 님 없으련만 그처로 찾으시는 님을 막을 줄이 있으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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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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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렇게 노래를 다 써놓고는 몽룡의 편지를 다시 한 번 들 어 보고 그 끝에 이름 쓴 것을 모본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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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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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단향일에 성 춘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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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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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라 하고 이름을 써서 혹 말일 잘못 된 데나 없나 글자나 빠지지 아니하였나, 글씨나 잘못 된 데나 없나 하고 두서너 번을 내려보더니 맘에 맞는 듯이 방그레 웃고는 종이를 착 착 접어 봉투에 넣고 상단이 불러 밥풀 가지어오라 하여 꼭 꼭 봉하고 겉봉에 진서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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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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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수재 몽룡씨전』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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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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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라고 쓴 후에 봉투 왼편 밑에 좀 적은 글씨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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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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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생은 근함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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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2
|
|
|
하고 써서 봉투도 두세 번 살펴보고 붓을 던지며 지금 막 상단이가 갖다 준 술 한 사발을 먹고 나서 수염을 빠는 방 자더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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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3
|
|
|
"옜다, 답장 가지고 가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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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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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며 편지를 내어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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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5
|
|
|
방자는 접시에 놓인 문어 조각을 한입에 틀어 넣고 우물우 물 씹어가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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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56
|
|
|
"얘, 무어라고 답장 했니? 오늘 저녁에 오시라고 했니! 또 내가 사초롱 들고 네 집 걸음을 하게 되었고나. 그때에는 술값이나 조히 주어야 된다."
|
|
357
|
|
|
"술은 눈에 비지가 꾸역꾸역 나오면서도 그래도 아직도 술이 나쁘냐. 그저 술독에 빠지었으면 좋겠고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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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8
|
|
|
하고 춘향이가'오냐. 네 말대로 하마.'하는 웃음을 웃어 주는 것을 보고, 방자도 좋아라고,
|
|
359
|
|
|
"얘야, 그 말 마라. 너 같은 아이에게는 도련님 같으신 서 방님이 있고 도련님 같으신 서방님께는 너 같은 어여쁜 아 가씨가 있어서 다 그렇고 그렇고한 좋은 일도 많지마는 나 같은 놈이야 술이나 먹어야지 무슨 좋은 일이 있느냐. 술이 나 취해서 엄벙덤벙하는 때가 내 세상이다."
|
|
360
|
|
|
하고 얼씬얼씬 춤을 추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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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1
|
|
|
"얼씨고나 절씨고...... 얘 너 도련님 수청들어 귀이 되거든 이 불쌍한 오라범 술이나 잘 먹여다오...... 잘 있거라 저녁에 또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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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2
|
|
|
하고 편지를 허리춤에 감추면서 중문 밖으로 뛰어 나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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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63
|
|
|
춘향이 무엇을 잊어버린 듯이 툇마루에 뛰어나서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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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64
|
|
|
"방자야 아까는 잘못하였으니 용서합소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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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5
|
|
|
하고 소리를 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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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6
|
|
|
"오냐, 염려 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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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7
|
|
|
하는 소리가 대문 밖으로서 들어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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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8
|
|
|
이때에 몽룡은 취하였던 술도 다 깨어 버리고 방자가 가던 길만 먼히 바라보고 섰더니 그리로서 사람 하나만 번뜻 보 이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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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69
|
|
|
"여봐라, 저것이 방자가 아니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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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0
|
|
|
하고 곁에 있는 하인더러 묻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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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1
|
|
|
"아니올씨다. 방자놈은 키가 큽니다."
|
|
372
|
|
|
또 사람 하나가 번뜻 보이면,
|
|
373
|
|
|
"여봐라, 저것은 분명 방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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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74
|
|
|
"아니올씨다. 그것은 이리로 오는 사람이 아니라 저리로 가는 사람이 올씨다."
|
|
375
|
|
|
"이놈이 무엇을 하고 있단 말이냐. 정녕 길을 잃어버렸나 보다."
|
|
376
|
|
|
하고 몽룡은 애를 부덩부덩 쓴다.
|
|
377
|
|
|
"방자놈이 술버릇이 좋지 못하오니 아마 어디서 술을 처 먹고 주정을 하고 있나 보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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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8
|
|
|
하고 몽룡의 애를 태우는 대답만 한다.
|
|
379
|
|
|
이때에 방자의 충충거리고 오작교로 건너오는 양이 보인다.
|
|
380
|
|
|
방자가 오작교를 건너 오는 것을 보고 몽룡이 벌떡 일어나 며,
|
|
381
|
|
|
"여봐라 저것은 분명 방자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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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2
|
|
|
한 사령 일부러 한참이나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
|
383
|
|
|
"네. 저것은 분명 방자인 듯하오."
|
|
384
|
|
|
몽룡이 안심한 듯이 다시 난간에 지혀앉아, 휘유 길게 한 숨지며,
|
|
385
|
|
|
"허, 그놈 남의 애를 다 태는구나."
|
|
386
|
|
|
하고 얼마 있다가,
|
|
387
|
|
|
"여봐라, 저놈의 걸음거리가 기운이 있는 모양이냐 기운 이 빠진 모양이냐?"
|
|
388
|
|
|
"하 그리 기운이 빠진 모양은 아닌가 보오."
|
|
389
|
|
|
"기운이 빠지면 저놈의 걸음이 어떠하냐?"
|
|
390
|
|
|
"두 어깨가 축 처지고 대가리가 앞으로 숙읍니다."
|
|
391
|
|
|
몽룡이 안심한 듯이 고개를 끄덕끄덕 하며,
|
|
392
|
|
|
"어깨는 처지었는지 들렸는지 모르겠다마는 대가리는 분 명히 뒤로 잦혀지었다."
|
|
393
|
|
|
방자가 광한루 가까이 와서는 더욱 활개를 치고 몸을 우쭐 거리고 껑충껑충 뛰어오더니 몽룡이가 앉은 난간 밑에 와서 허리를 굽실하고 옷소매로 이마에 땀을 씻으며 씨근벌떡하 는 소리로,
|
|
394
|
|
|
"도련님! 또 욕을 한 섬이나 얻어 먹고 왔소."
|
|
395
|
|
|
몽룡은 조급한 듯이 난간 위로 허리를 굽혀 방자의 술냄새 나는 얼굴을 내려다보며,
|
|
396
|
|
|
"욕만 먹고 왔어?"
|
|
397
|
|
|
하고 소리를 지른다.
|
|
398
|
|
|
"또 술도 한 사발 얻어 먹었는데 아주 맛이 썩 좋읍디다.
|
|
399
|
|
|
그놈을 한사발 들이켰더니 지금 하늘이 돈잎만 하오——어 더워! 훠."
|
|
400
|
|
|
하고 옷고름을 끌러 옷자락으로 부채질을 하며 짖궂게,
|
|
401
|
|
|
"참 술맛 좋읍디다."
|
|
402
|
|
|
"그래 술 얻어 먹고 그리고는 어쨌어?"
|
|
403
|
|
|
하고 몽룡은 심히 맘이 조급하였다.
|
|
404
|
|
|
"술 먹고는 안주 먹었지요. 문어 발 먹었지요. 그놈 질깁 디다."
|
|
405
|
|
|
몽룡이 견디다 못하여,
|
|
406
|
|
|
"이놈아, 술 먹고 안주 먹고 그것뿐이야? 편지는 어찌했 단 말이냐?"
|
|
407
|
|
|
방자 능청스럽게 놀라는 듯이 한 번 껑충 뛰고 머리를 긁 적긁적하며,
|
|
408
|
|
|
"아차, 술맛이 하도 좋킬래 길 오면서 술 생각만 하노라 고 도련님 편지는 미처 생각도 못하였소...... 편지는 갖다 주 었지요."
|
|
409
|
|
|
"그래서?"
|
|
410
|
|
|
하고 몽룡의 기색이 좀 풀린다.
|
|
411
|
|
|
"춘향이가 읽어요."
|
|
412
|
|
|
"그리고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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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3
|
|
|
"또 한번 읽어요."
|
|
414
|
|
|
"그리고는?"
|
|
415
|
|
|
"또 읽던가 보든 걸요."
|
|
416
|
|
|
"이놈아, 춘향 아씨가 편지를 읽고는 어떻게 하더냐 말이 야...... 허 그놈 사람의 애를 식은 재가 되도록 다 태워버리 고야 말려는구나."
|
|
417
|
|
|
"소인의 애는 얼마나 탔는 데요?"
|
|
418
|
|
|
"그래 편지를 읽고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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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9
|
|
|
"자세히 말씀해요?"
|
|
420
|
|
|
"그래 자세히 말해라."
|
|
421
|
|
|
방자 잊었던 것을 생각한느 모양으로 한참이나 고개를 기 웃기웃하더니,
|
|
422
|
|
|
"춘향이가 도련님 편지를 읽고는—아마 열 일곱 번은 읽나 봅디다. 한참은 몇 번이나 읽나 보자 하고 세이다가 열 댓 까지 세이고는 구찮아서 말았소."
|
|
423
|
|
|
"압다, 이놈아 그래 편지를 읽고는 어찌하더냐 말이야?"
|
|
4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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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하고 몽룡이 갑갑증이 나서 발로 마루를 한 번 구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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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25
|
|
|
방자는 놀라는 듯 두려워하는 듯 또 한 번 껑충 뛰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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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6
|
|
|
"네 바로 아뢰오리다—춘향이가 그 편지를 읽더니마는—아 마 열 일곱 번이나 읽더니마는 두 빰은 발그레 두 입술은 오물오물 두 눈은 사르르 숨소리는 쌔근쌔근하더니만 제 어 미 월매를 보고 '답장 써요?'하옵디다."
|
|
4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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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하고는 방자가 코웃음을 씩 웃는다. 몽룡이도 참을 수 없 이 빙그레 웃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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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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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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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룡은 춘향이가 그 어미더러,'답장 써요?'하고 묻더란 말이 맘에 흡족하여 나오는 웃음을 참지 못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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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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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춘향 아가씨 어머니께서 무에라고 하시더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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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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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에라고 하시더냐?'하고 경대를 하는 것이 하도 우스 워서 방자 허허 웃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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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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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허 도련님, 어느 새에 춘향 어미 월매를 장모 대접을 하시오? 참 지레짐작도 유분수요. 콩밭에 가서 비지 찾고 밥짓기 전에 숭늉 찾고, 장가드시기 전에 아기 낳으시겠 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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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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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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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룡도 어이없어 웃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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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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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놈아, 재담 그만하고 어서 할 말만 하여라. 잎사귀, 가 지 다 내어버리고 줄거리로만 어서 아뢰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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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압다 도련님도, 무척 성급하시오. 아무리 빨리빨리 성화 같이 아뢰기로 첫말이 나오고야 다음 말이 나오지요. 이런 때에는 소인의 입이 여남은 구녕은 되었으면 쓰겠소. 한꺼 번에 여남은 마디씩 아뢸께 도련님도 정신차려서 귀떨어진 말 한 마디 빼놓지 말고 들으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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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고 방자는 광대가 갖은 타령 주워대듯 입을 나불나불 무 슨 소린지 알지 못하게 지껄인다. 그 중에서 몽룡이가 알아 들은 것은, 월매가 몽룡의 시조를 한 번 불렀다는 것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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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자는 한참이나 제비놀이하듯 지껄이더니 숨이 찬 듯이 길게 한 번 한숨을 쉬고 나서 알아들을 수 있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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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는 이 편지를 써 주시며, 아까는 잘못했읍니다고, 용서하십시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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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고 춘향의 소리를 흉내내고는 허리춤에 넣었던 편지를 몽룡에게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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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룡은 편지를 받아 위선 필봉에 쓴 글씨를 보더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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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봐라, 편지는 왜 네 배때기에 넣고 오라드냐. 피봉에 땀이 묻었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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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고는 피봉을 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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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룡이 이윽고 춘향의 답장을 보더니, 탄복한느 듯이 고개 를 끄덕끄덕하고 무릎을 툭툭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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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연 내 배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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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고 좋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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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자 고개를 번쩍 들고 몽룡이가 보는 편지를 치어다보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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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게 무에라고 썼는데 그렇게 좋아하시오? 오늘 저녁에 오시라고 하였소. 어디 소인도 좀 들어봅시다 그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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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까짓 놈이 들으면 알겠느냐? 그래도 한 번 들려주 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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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디 한 번 들어나 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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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라. 네가 내 중매가 아니냐. 내 부를께 네 들어 보아 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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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고 손으로 무릎을 치어 장단을 맞추며 찌름으로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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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몸이 정렬함이 삼생에 뻗었으니 천상 천하에 날 안달 님 없으련만 거처로 찾으시는 님을 막을 줄이 있으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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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르기를 마치고 또 한 번 무릎을 치며, 몽룡은 방자를 보 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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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떠냐? 알아듣겠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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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아듣기는 하였는데 도련님 무릎 너무 따리지 마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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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저녁에 또 다리 아파서 춘향의 집에 못가시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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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룡은 한 번 더 춘향의 답장을 읽어 보고 소매에 넣고 춘 향이그네 뛰던 터를 바라보고 또 바라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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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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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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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귀 내어라. 인제는 광한루에 일이 없으니 들어가리 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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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자 나귀를 끌어다가 몽룡이 앞에 세우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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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 볼 일은 다 보시었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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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고 빈정거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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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한루에서 돌아와서 몽룡은 날이 저물고 밤이 깊어 파루 소리 나기만 기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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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방에 아버지를 뵈오러 갔으나 아버지도 눈에 잘 보이지 아니하고, 내아에 어머니를 뵈오려 갔으나 어머니도 있는둥 없은둥, 밥상을 받아도 밥과 국을 분간할 수가 없고, 글을 읽으려고 책상 앞에 앉으면 글자 한 자가 두 자 되고 두 자 가 한 자가 되며, 대학을 읽노라 하는 것이 맹자—경양혜왕 도 쑥 나오고 맹자를 읽노라고 하는 것이'관관저구 재하지 주로다'하고 시전에 것이 나오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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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이게 웬 일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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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고 몽룡은 마음을 진정하려 하나 풍랑 일어나는 바다 모 양으로 가슴 속은 설레고 눈에 보이는 것이 오직 그네를 늘 어 오르락 내리락하는 춘향의 모양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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