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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거장(停車場) 근처(近處) ◈
◇ 정거장 근처 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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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7.4~10.
채만식
1
停車場近處
 
2
1
 
 
3
밤 열한점 막차가 달려들려면 아직도 멀었나보다. 정거장은 안팎으로 불만 환히 켜졌지 쓸쓸하다.
 
4
정거장이라야 하기는 이름뿐이고 아무것도 아니다. 밤이니까 아니보이지만 낮에 보면 논 있는 들판에서 기차길이 두 가랑이로 찢어졌다가 다시 오므려진 그 샅을 도독이 돋우어 그 위에 생철을 인 허술한 판장집을 달랑 한 채 갸름하게 앉혀놓은 것 그것뿐이다.
 
5
그밖에 전등을 켜는 기둥이 몇 개 섰고, 절 뒷간처럼 쫓겨간 뒷간이 있고 쇠줄로 도롱태를 달아놓은 우물이 있고, 그리고 넌지시 떨어져 술집, 사탕집, 매갈잇간, 주재소 그런 것들이 초가집, 생철집 섞어 저자를 이룬 장터가 있고.
 
6
그러나 그러는 해도 이 정거장이 올 가을로 접어들면서 굉장하게 번화해졌다.
 
7
금점판(砂金鑛[사금광])이 터져서 그렇다. 정거장 둘레로 있는 논바닥에서 요새도 날마다 수백 명씩 들이덤벼 금을 파낸다.
 
8
그래서 차를 타고 오고 가는 사람이 부쩍 늘고 장터에는 사탕집이 더 생기고 술집은 더 많이 늘고 전에 없던 이발소까지 생겨났다.
 
9
덕쇠는 오늘밤도 막차를 보려고 정거장에 와서 기다리고 있다.
 
10
그는 대합실로 섬뻑 들어가지는 못하고 옹송그려 팔짱을 끼고 밖에서 빙빙 돌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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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엣 사람은 그렇잖더니, 갈리고 이번에 새로 온 역부는 덕쇠가 대합실에 들어앉아 있는 것을 보기만 하면 눈을 부라리고 발길로 툭툭 걷어차고 해서, 그래 뒤가 걸려 덤쑥 들어앉지를 못하는 것이다.
 
12
바람은 성이 잔뜩 나서 휘익 쌀눈을 몰아다가는 귀때기를 때린다. 그럴 때면 옹송그린 데시기로 소름이 쪽 끼치게 눈이 휩쓸려 들어간다. 몸이 부르르 떨린다.
 
13
저녁을 굶어서 더 춥고 더 떨린다. 저녁 한 끼 굶은 거야 예사지만 속이 비어서 더 춥고 더 떨리는 것은 견딜 수가 없다.
 
14
덕쇠는 닫힌 유리창으로 대합실 안을 들여다보았다. 몇 번째 굽어다보는지 모른다. 아랫도리가 시뻘겋게 불이 단 난로가 보기만 해도 뜨끈뜨끈해서 부쩍 그러안아 보고 싶어진다.
 
15
난로가에는 촌 영감이 혼자 담뱃대에 담배만 풀씬풀씬 피우고 무료하게 앉아 있다.
 
16
덕쇠는 돌아서서 잠깐 서성거리다가 이번에는 대합실 안의 시계를 들여다 본다. 그러나 시계는 아까부터 암만 보아도 바늘 두 개가 한일자로 쭉 뻗친 채 그대로 서서 있다. 꼼작도 아니한다.
 
17
오늘 저녁에는 날이 이렇게 차고 바람이 불고 하니까, 혹시 막차가 오지않지나 아니하려나? 그렇다면 괜히 추운 데 와서 고생을 하고 있지나 아니하나. 그래 궁금증이 나기 시작했다.
 
18
그는 가만가만 대합실과 연달아 있는 사무실 옆으로 가서 불밝힌 안을 들여다보았다. 금테박이 역장은 나오지도 아니했고 난로가에 멀찍이 역부가 걸상을 타고 앉아 졸고 있다.
 
19
덕쇠는 잘되었다 싶어 냉큼 이편으로 돌아와 대합실 문을 살그머니 열고 들어섰다. 들키면 욕 좀 먹고 한두 번 걷어차일 셈 잡아도 뜨뜻한 날로불에 몸을 녹이는게 훨씬 낫고, 요행 들키지 아니하면 더구나 좋고.
 
20
대합실 안은 후끈 더운 기운이 치닫고 촌 영감이 버선발을 쬐어서 그런지 고차분한 냄새가 물큰 치닫는다. 그러나 덕쇠한테는 되레 구수했다.
 
21
덕쇠는 대합실 안으로 들어는 섰어도 난로 옆으로 가까이 가지 못하고 멀찍이 마룻전에 가 어설프게 반만 걸어 앉았다.
 
22
촌 영감은 들어오는 덕쇠를 소 닭 보듯 멀거니 치어다보다가 한참 있더니
 
23
“이 옆으루 가까이 와서 몸을 녹히지 왜 그렇게 멀리 앉어서 그러우? 추운디……”
 
24
하면서 심심한 판에 이야기를 청한다.
 
25
덕쇠는 미상불 그 말을 듣고 보니 기왕 들어온 판에 그럴 일이 아닌 것을 그랬구나 하고 히죽이 웃으면서 난로 옆으로 다가가 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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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디까지 가우?”
 
27
촌 영감은 침 흘러내리는 담뱃대 물부리를 입에서 뽑으면서 묻는다.
 
28
“아무디두 안 가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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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쇠는 한 대 얻어 피웠으면 꿀처럼 맛이 있을 것같아 시장한 것은 잠시 잊어버리고 담배 생각이 간절했다.
 
30
“그럼 이 근처 사우?…… 불 쬐러 왔구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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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유 짐 지러 왔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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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답은 건성으로 덕쇠는 담배 꽁초가 어디 떨어지지나 아니했나 난로 바닥과 사방을 둘러보다가 좋아서 성큼 일어섰다.
 
33
난로 바닥에 불쏘시개 자루에 가리어 잘 보이지 아니하는 놈이 한 개, 그리고 저편 차표 사는 앞에는 제법 굵기는 해도 발로 싹 밟아 으끄린 놈이 한 개 있다. 그는 두 개를 주섬주섬 집어다가 풀어서 허리에 찬 곰방대에 넣으려고 하니까, 촌 영감이 물끄러미 바라다보더니 옆에 놓인 희연 봉지에서 한 대 집어 손바닥에 놓고
 
34
“옜소, 이놈 태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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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고 웃는다.
 
36
“아이 미안히여서……”
 
37
덕쇠는 데시기로 손이 올라가 더북이 자란 막깎기 머리를 긁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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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괜찮소 받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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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쇠는 허리를 굽실하고 두 손을 내밀어 한손으로 담배를 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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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안히여서…… 헤……”
 
41
누런 앞니가 드러나고 겨울에도 가실 줄 모르게 볕에 그을은 검은 얼굴이 헤죽이 흐트러진다. 고맙다는 치하요, 그리고 만족한 표정이다.
 
42
오랜만에 보는 담배니 그렇지 아니할 수 없다. 돈이라고는 구경도 하기 어려운데, 더구나 요새는 값이 올라 담배를 살 염도 내지 못하고 정거장에 나와 권연 꽁초를 줍지 않으면 뽕잎을 피우는 판이다.
 
43
“옛날은 제각기 담배를 심어 두구 제 맘대루 피더니, 요새는 무슨 개명(開明) 속인지 담배두 못 심어 먹게 히여서!”
 
44
촌 영감은 덕쇠가 빗밋이 돌아앉아 담배를 피우는 것을 우두커니 바라보다가 탄식하듯 중얼거린다.
 
45
“그러나마 자꾸 값만 더 올리는걸유!”
 
46
“그러게 말이지.”
 
47
이야기는 잠깐 그쳤다.
 
48
“아, 요새 이 근처에 금점이 터져서 벌이가 좋다는디 그런 거나 허지, 이 춘디 밤으루 정거장 짐벌이를 허우?”
 
49
촌 영감이 심심한지 이야기 거리를 찾아낸다.
 
50
“것두 제마닥 못헌대유.”
 
51
“왜?”
 
52
“츰 삼백 명을 모집(募集)허는디 이 근처서 어찧던지 한 천 명 뫼여들 었는가버요.”
 
53
“천 명!”
 
54
“그렇지라우! 숭년은 들어서 먹구 살 것은 없구 그러닝개…… 허기사(허기야) 풍년이 들어두 그 대중이지만.”
 
55
“그리서 천 명은 다 일을 허우?”
 
56
“아니유, 그중에서 삼백 명만 골라 뽑구 그 남저지는 다 낙방되었어라우.”
 
57
불이 달았던 난로 아랫도리가 식어가는 것을 보고 덕쇠는 일어서서 석탄을 퍼넣는다. 황황 소리가 나면서 난로불은 세차게 탄다.
 
58
밖에서는 여전히 바람소리가 요란한데 대합실 안은 딴 세상인 듯이 아늑하다.
 
59
덕쇠는 석탄을 한 아궁이 가득 지피고 나서 도로 제자리에 앉았다. 촌 영감은 지르르하고 진이 끓는 담뱃대를 시멘트 바닥에 똑똑 털고 나서 어험 하품을 한다.
 
60
“지리허기두 허다!”
 
61
“노인은 어디까지 가세요?”
 
62
“x x까지 가우…… 저 너머 딸네 집에 왔다가…… 에, 게 아예 겨울에 대사(大事[대사]:婚姻[혼인]) 치를 것 아니여! 날은 춥고 모다 군색히여서……원 이렇게 저물 줄 알었으면 붙잡는 대루 하룻밤 더 자구 갔지!”
 
63
촌 영감은 늙은이답게 혼잣말로 꿍얼꿍얼 꿍얼거린다.
 
64
덕쇠는 그 말을 듣고 나서 비로소 촌 영감이 옆에 놓고 앉은 동쳐맨 대사리짝을 알아내었다.
 
65
저 속에는 고기며 저냐며 떡이며가 하나 그득히 들어 있을 텐데 촌 영감이 아까 담배 한 대 주듯이 떡이나 무엇 좀 꺼내 주지 아니하나, 그래 헛침을 꿀꺽 삼키고 촌 영감을 치어다보았다. 그러나 촌 영감은 맨숭맨숭하고 있다.
 
66
덕쇠는 자꾸만 더 시장기가 들었다. 떡을, 떡도 큼직한 인절미를 노란 콩고명을 묻힌 놈을 하나 어쨌든지 저 뜨끈뜨끈한 난로 위에다 올려 놓으면 그놈이 고소한 냄새가 나다가 부하고 떠올라오를 테니 그놈을 두손에 들고 쭉 잡아떼면 김이 물씬물씬 나고 하얀 속이 기다랗게 늘어나는 놈을 훅 불어서 입에다 넣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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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엣 ! 뜨거 뜨거 !”
 
68
덕쇠는 제 소리에 정신이 들었다. 촌 영감도 놀랐다.
 
69
“왜? 듸었오?”
 
70
“헤헤 아니유.”
 
71
덕쇠는 무렴해서 웃어버렸다. 그러나 무렴한 것은 잠깐이요, 눈은 빨리듯이 떡이 들어 있는 대사리짝으로 건너만 간다.
 
72
촌 영감은 종시 떡은 먹으라고 줄 눈치가 아니다. 그러니 혹시 잊어버리고 그냥 차를 탔으면 좋겠다고 덕쇠는 은근히 그거나 바랐다.
 
73
“정거장에 이렇게 와서 있으면 더러 벌이가 되우?”
 
74
촌 영감은 담배 한 대를 또 붙여 문다. 이번에는 덕쇠가 아까 주워 모은 권연 꽁초담배를 쟁이고 있어도 한 대 더 주지는 아니하고 이야기만 청한다.
 
75
“웬걸이유! 그저 사흘에 한 번 나흘에 한 번 돈 십 전씩이나 벌까말까허지 별루 없어유.”
 
76
“그걸 바라구 날마다 와서 왼종일 이렇게 기다리우? 차라리 다른 품팔이를 드는 게 낫지……”
 
77
“아니여유, 이 막차만 나와유…… 집두 멀구 또 낮차는 더군다나 짐이 없으닝개……”
 
78
옆 사무실에서 역장이 나왔는지 차가 올 때마다 나오곤 하는 순사가 나왔는지 이야기 소리가 도란도란 들려온다.
 
79
조금 있다가 땡땡 소리가 자주 들려오고 분주한 것 같더니, 망대(시그널) 젖히는 소리도 들린다.
 
80
오래잖아 차가 오게 되었다.
 
81
촌 영감이 두루마기를 젖히고 주머니를 풀어 차표 살 돈을 몇푼 꺼낸다. 덕쇠는 십 전만 주었으면 절을 백 번은 할 것 같아 연해 촌 영감의 손만 바라다본다.
 
82
철망을 조그맣게 쳐놓은 차표 파는 구멍이 덜커덩 열리더니
 
83
“차표 사시오.”
 
84
한다. 뒤이어 역부는 덕쇠를 내다보았던지
 
85
“고랏 ! 이놈아!”
 
86
소리를 친다.
 
87
덕쇠는 얼핏 대합실 밖으로 나와 기대놓았던 지게를 걸머지고 멀찍이 물러섰다.
 
88
기적 소리가 가까이 울리더니 연통으로 불을 뿜어올리면서 차가 들이닿는다. 차 탈 사람은 종시 아까 그 촌 영감 하나뿐이다.
 
89
덕쇠는 촌 영감이 떡 든 대사리짝을 가지고 나왔다 아니 가지고 나왔나 보려고 조촘조촘 가까이 갔다. 영감은 대사리짝을 무긋하게 쳐들어 들고 나섰다.
 
90
덕쇠는 혀를 찼다.
 
91
차 탈 사람은 하나뿐인데 역장, 역부, 순사 해서 멀찍이 서서 있는 덕쇠까지 네 사람이 대비를 하고 늘어섰다.
 
92
덕쇠는 마음이 졸였다. 그동안 벌써 사흘째 헛걸음을 했고, 오늘 아침은 좁쌀죽을 한 보시기씩 먹었을 뿐 저녁은 고스란히 굶었다. 춥고 시장하고 한데 또 헛걸음이나 하면 어찌하나 지레 겁이 나서 나오기도 싫고 집엣 사람이 말리기도 했지만, 무어 그게 밑천이 드는 거냐 헛걸음을 해도 밑질 것은 없으니 나가본다고 나오기는 나온 것이다.
 
93
그러나 벌지를 못하면 십리길을 덜덜 떨고 돌아가 그냥 자야 할 판이요, 그래도 행여 좁쌀 한 줌이라도 팔아오나 꼬박꼬박 기다리는 집엣 사람한테 미안하고 낯이 없을 판이다.
 
94
차는 씨근거리며 들이닿았다. 덕쇠는 정신을 차려 차에서 내리는 사람들을 일일이 여새겨본다.
 
95
촌사람이 셋 내렸다. 저편 뒤칸에서 조그마한 보따리를 든 색시를 데리고 안경 쓴 활량이 내렸다.
 
96
덕쇠는 어쩌면 괜찮겠다 싶어 그 남녀를 기다렸다.
 
97
차는 머무는 둥 마는 둥 하더니 다시 달아나버린다.
 
98
차에서 내린 사람들은 차에 가로막혀 기다리고 있다가 차가 떠나자 비로소 덕쇠가 목 지키고 서 있는 앞으로 해서 철둑을 건넨다.
 
99
촌사람 셋이 웅숭그리고 앞서 가고 색시 데린 활량이 덕쇠 앞을 지나가다가 힐끔 돌아보더니 무슨 말을 할 듯이 짯짯 치어다본다. 덕쇠는 한걸음 앞으로 나섰다.
 
100
덕쇠가 보매도 보따리는 그리 크지도 아니하고 해서 짐을 지울 것 같지는 않았다. 그러나 그새 몇 달 두고 더러 보면 짐은 무겁지 아니해도 정거장에서 집이 먼 사람은 호젓한 밤길을 혼자 가기가 안되었으니까 짐을 지우고 가는 수가 있었다. 그러한 자리면 가서 술잔도 얻어먹고 짐삯도 후히 받곤 했었다.
 
101
덕쇠는 이 활량도 꼭 그런 거리거니 생각하고 속으로 가슴이 뛰었다.
 
102
그러나 그 활량은 무슨 말을 할까말까 잠깐 망설이다가 그냥 휙 지나가 버리고 만다. 그 사람이 실상은 짐을 지우자는 것이 아니라 덕쇠를 알아서 알은 체하려고 그래 주춤거렸던 것인데, 덕쇠는 벌이가 생겼다고 좋아하다가 그만 헛다리를 짚어버린 것이다.
 
103
덕쇠는 넋이 나간 사람처럼 우두커니 서서 철둑을 건너 나란히 가고 있는 남녀를 바라본다.
 
104
뒤로 따라가서 짐을 지우라고 말을 해볼까 망설이는 것이다.
 
105
그러다가 지우지 않는다면?
 
106
어때! 그만이지.
 
107
덕쇠는 빈 지게를 덜썩거리면서 철둑을 건너 남녀의 뒤를 따랐다.
 
108
장터로 들어서서 거진거진 뒤로 바짝 다가 말을 건네려고 하는 판인데 남녀는 길 옆 술집으로 쏙 들어가 버린다.
 
109
덕쇠는 그만 땅에 가 펄썩 주저앉고 싶게 안타까와 두 눈에서 눈물이 핑 돌았다.
 
 
110
바람은 사정없이 쌀눈을 끼얹는다. 덕쇠는 기가 딱 질려 걸음도 느릿느릿 잘 걸리지 아니했다. 위아랫 이빨이 딱딱 맞히고 팔다리는 대 잡은 것처럼 떨리어 정신을 차릴 수가 없다.
 
111
그는 가까스로 전주집이라는 국밥집 앞까지 당도했다. 무슨 의사가 있어서 그 앞으로 오기도 한 것이지만 술청에서 나오는 구수한 국 냄새에 그는 눌어붙듯이 그 자리에 멈춰섰다.
 
112
술청에서는 아까 차에서 내린 촌사람 셋이 죽 앉아 술잔을 놓고 기다리고 있고, 전주댁이라는 안주인은 분주히 서두리를 하고 있다.
 
113
열어놓은 술국솥에서는 소담한 김이 뭉게뭉게 오른다. 그놈이 냄새가 그렇게 구수하게 나는 것이다.
 
114
전주댁은 흰 사발에 찬밥 한 덩이를 담아가지고 국자로 솥의 국국물을 떠부어 꾹꾹 누르다가 국물을 도로 솥에다 좌르르 따르고는 또 퍼붓는다.
 
115
이렇게 서너 번 하다가 마지막 건데기 얼러 국을 소담스럽게 퍼부어 손님들 앞 개다리소반에다가 통 하고 갖다놓고는 다시 다른 사발어치를 시작한다.
 
116
덕쇠는 왕방울 같은 눈을 끄덕거리지도 않고 전주댁의 손에서 노는 국밥 사발과 국자에 정신이 쏠려 목이 기다랗게 늘어난 것을 저도 모르고 있다.
 
117
술청에서는 차례차례 말아다 놓은 국밥 한 사발씩을 차지하고 앉아 세 사람이 술을 한잔씩 마신 뒤에 숟갈질을 시작한다.
 
118
숟갈이 밥과 콩나물과 우거지가 뒤섞인 국밥을 듬쑥 떠서 국물을 질질 흘리며 입으로 올려갈 때면 덕쇠는 저도 모르게 입을 떡 벌린다.
 
119
입을 그렇게 벌리고는 씹는 시늉을 해보나 맞히는 것은 위아래 이빨뿐이요 회가 동해서 걷잡을 수 없이 넘어오는 거위침이 입안에 그득 찬다.
 
120
덕쇠는 말고 항우라도 더 참을 수 없는 고패다.
 
121
덕쇠는 다시 생각할 겨를도 없이 졌던 지게를 내동댕이치듯 훌렁 벗어버리고 술청 안으로 성큼 들어섰다.
 
122
“막걸리유?”
 
123
전주댁이 힐끔 돌아다보는 둥 마는 둥 저 할 일을 하면서 묻는다.
 
124
덕쇠는 대답이 나오지 아니해서 입만 우물우물한다. 무어라고 대답해야 좋을지 그것도 모르거니와 아가리뼈가 뻣뻣하게 굳어서 입을 놀릴 수도 없는 것이다.
 
125
“벙어리 삼시랑(삼신)인가부네!”
 
126
전주댁은 덕쇠가 아무 대답도 아니하니까 다시 돌아다보고 혼자 종알거리더니
 
127
“막걸리 잡숴라우?”
 
128
하고 소리를 빽 지른다.
 
129
국밥을 먹고 있던 손들이 일제히 고개를 들어 덕쇠를 멀거니 치어다본다. 덕쇠는 겨우 입이 떨어졌다.
 
130
“아니유…… 저, 술은 그만두구…… 그런디 저.”
 
131
하고 더듬는다.
 
132
“그럼 국밥만?”
 
133
“예 국밥만 주는디 저 거시기, 저 돈은 내일 드리께라우.”
 
134
손들은 또 덕쇠를 올려다보고 전주댁은 어이가 없다는 듯이 짯짯이 바라보다가 손에 들었던 국자를 솥전에 통 부딪치면서
 
135
“참! 재수없네…… 외상은 못 히여라우?”
 
136
하고 싹 돌아선다.
 
137
덕쇠는 두말도 더 못하고 돌아섰다. 돌아서는 등 뒤에서 촤르릉 철소댕을 끌어다 덮는 소리는 그 푸짐한 국밥이 아득하게 멀어지는 것 같아 그는 내디디던 발을 멈칫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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