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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염마(艶魔) ◈
◇ 5. 참극(慘劇) ◇
카탈로그   목차 (총 : 15권)     이전 5권 다음
1934.5.16~11
채만식
1
艶 魔[염마]
2
5. 慘 劇[참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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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4
영호는 그들을 한번 둘러보았다. 그러나 도저히 퉁탕거리고 주먹질을 할 상대자가 되지 못함을 알았다.
 
5
정작 권투가에 눈에 비친 그들의 덤벼드는 자세는 맨 빈틈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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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일 주먹을 사용한다면 하나 앞에 한 대씩 세 대면 충분하겠다.
 
7
영호는 여전히 빙긋이 웃으며 탄무타의하게 한걸음 앞으로 나서 주먹코의 팔을 가만히 잡았다.
 
8
주먹코는 그것을 뿌리치려고 하였으나 이미 늦고 다음 순간 그의 팔은 마치 쇠집게에게 물린 듯이 뼈가 부스러지게 아팠다. 그는 부지중에 몸을 비꼬며 '아이구 아얏!’ 소리를 쳤다.
 
9
왼편으로 영호에게 덤벼들던 키다리가 마저 팔을 붙잡혀 가지고는 역시 비명을 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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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 작은 겁장이는 눈이 휘둥그래서 쩔쩔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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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호는 움켜쥔 두 사람의 팔을 한번 더 꼭 쥐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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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래도 나하고 싸워볼 생각이 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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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고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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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저 자 자 잘못했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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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사람은 대번 항복을 하고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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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호는 팔을 놓아주었다. 둘은 아픈 팔을 우디고 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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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리 앉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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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호는 위엄 있게 명령하는 어조로 동편 창 앞에 있는 소파를 가리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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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사람은 아무 소리 없이 그곳으로 가서 나란히 걸터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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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호는 탁자 옆에 걸터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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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콩밥을 좀 먹고 싶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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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은 아무 대답이 없이 고개만 숙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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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못생긴 것들! 그래 무얼 해먹으면 못해먹어서 남의 꼬임에 빠져가지고 가 형사질을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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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까 키 작은 겁장이가 겨우 고개를 쳐들고 애원하듯 말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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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저 용서해 줍쇼. 어리석은 탓에 남의 꼬임에 빠져서 그랬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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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영호는 그들을 더 나무라거나 추궁할 흥미와 필요도 없는 것이다.
 
27
그는 일어서서 침실 도어를 열어놓았다. 그리고 다시 주먹코의 손목을 끌어다가 잠깐 침실 내부를 들여다보여 준 뒤에 도로 소파로 돌려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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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았지? 없지?"
 
29
"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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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거 봐…… 나는 남의 집 여자를 약탈해오는 도적놈도 아니고 그렇다고 경찰서의 촉탁이나 그런 사람도 아니야…… 그런데 그 노인이 괜히 나를 오해하고 그리는 거야. 응 알겠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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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사람은 동시에 "네"하고 굽신한다.
 
32
"그러니까 내가 오해도 풀고 또 불가불 만나보아야 할 일이 있으니까 지금 가서 그 노인을 만나야 할 텐데 어데서 기다리기로 했나? 훈정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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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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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먹코가 대답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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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묘 옆 훈정동 그 집이 아니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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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훈정동집이란 모릅니다. 만나서 이야기하기는 중국요리집인데 일 끝나고 만나기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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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까지 이야기를 하다가 그는 동간들을 둘러보고 말끝을 흐려버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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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호는 생각하였다. 훈정동 그 집이 아니라면 대관절 어딜까? 역시 또 한 군데 집을 차려놓은 데가 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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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데로 만나기로 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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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그들은 역시 서로 얼굴만 치어다보며 대답하기를 꺼리어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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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을 아니할 텐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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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호의 어성은 약간 거세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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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먹코는 아주 난처한 듯이 머리를 긁적 긁적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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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상 굳은 약속이 있어서요. 어떤 일이 있든지 그 노인이 시켜서 한 일이라고는 하지 말기로 약속을 했는데 그건 벌써 아셨으니까 할 수 없지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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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주지 못하겠단 말이지? 약속이 있으니까…… 그렇지만 만일 그것을 대주지 아니하면 여기서 뇌여나가지 못할 테니 그건 어쩔 텐가?"
 
46
이 말에 그들의 얼굴에는 확실히 곤혹의 빛이 떠돌았다.
 
47
그들은 노인과의 약속도 약속이려니와 그보다도 일은 실패했지만 그대로라도 가서 백 원은 그만두고 단 얼마씩이라도 돈을 더 빼앗아낼 요량인 것이다. 그러니까 더구나 방해가 될지도 모르는 이 집 주인에게는 대어주고가싶지 아니한 것이다.
 
 
48
2
 
 
49
"어덴지 대지 아니할 테야?"
 
50
영호는 재촉하였다. 그리고 타이르듯이 설명을 하였다.
 
51
"인제 나하고 같이 가보면 알겠지만 나는 되려 그 노인의 도움이 될지언정 해를 끼칠 사람이 아니니까 염려 말어요."
 
52
무엇인지 혼자서 까막까막 생각하고 앉아 있던 주먹코가 갑자기
 
53
"선생님, 그러면 탐정……이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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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고 묻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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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호는 싱그레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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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고 할 수도 있고 그렇잖다고 할 수도 있지만…… 그러나 내 직업이 탐정은 아니니까…… 취미로 하는 장난이지."
 
57
주먹코는 벙실벙실 웃는다.
 
58
"그러시다면 대드리지요. 동소문 밖 흥천사 들어가는 바른편 외딴 집에서만 나기로 했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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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 틀림없지?"
 
60
"네."
 
61
"그러면 다들 돌아가…… 그러고 다시는 이런 숭내는 내지 말어야 해…… 그러고 어데 가서 누구한테든지 이런 이야기를 해서는 안돼…… 만일 발설이 되면 자네들이 위선 잡혀가서 경을 칠 테니까."
 
62
세 사람은 코가 땅에 닿도록 인사를 한다.
 
63
키다리와 키 작은 두 사람은 선선히 나가려고 하는데 주먹코가 주춤주춤 하다가 겨우
 
64
"저, 저의들…… 저 심부림 좀 시켜 주셨으면…… "
 
65
영호는 그 뜻을 얼른 알아채었다. 그러나 ──
 
66
"팔 한번 꼭 쥐어주었다고 대번 항복하는 겁쟁이들을 심부림을 시켜!!"
 
67
주먹코는 무렴해서 얼굴이 붉어진다. 그러면서도 미련겨운 듯이 영호의 눈치를 살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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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서들 있게…… 일이 있으면 찾을 테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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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호는 뚝 잘라 거절하느니보다 그래 두는 것이 나을 것 같았다.
 
70
"네네…… 그저 아무 심부림이라도…… 종로 사정목 ××양화점에 와서 ' 뿌루도꾸’ 라면 다 안답니다."
 
71
영호는 실소를 하였다. 그들도 웃었다.
 
72
이렇게 길을 들여놓고 보니 미상불 쓸모가 있음직도 하여 보였다.
 
73
"인제는 어떤 일이 있어도 아프다고도 아니하고 항복도 아니 합니다…… 꼭 좀…… "
 
74
주먹코는 이렇게 열심으로 조르나 다른 두 사람은 오늘밤 단단히 혼이 나서 그런지 그다지 흥이 나지 아니하는 모양이다.
 
75
영호는 그들이 자동차를 문 밖에 기다려 두었을 것을 생각하고 같이 집을 나섰다.
 
76
과연 운전수가 졸고 있는 자동차가 놓여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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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호는 차를 타고 내려가면서도 한가지 궁금한 것은 그 노인이 어떻게 해서 자기의 집을 알아내었으며, 또 그보다도 어째서 자기가 그의 딸과 젊은 사람을 붙잡아 왔다고 단정을 하였는가 하는 것이다.
 
78
어젯밤에 그 다른 일파가 그 여자와 헙수룩한 사나이를 잡아가는 것을 그러면 노인이 목도했나? 그리고 그것이 영호 자기로 알았는가?
 
79
그러나 그 장면을 목도했다면 그는 어떻게 해서든지 그 뒤를 따라갔을 터이니까 다른 일파의 소굴을 발견했을 것이니 그것이 영호의 소행으로 알게 되지는 아니할 것이 아닌가.
 
80
그렇다면 분명 어젯밤에 그 야단이 끝난 뒤에 그도 근처에 있다가 영호가 나오는 뒤를 밟았든지 오늘 아침에 오복이가 집으로 올라오는 것을 뒤를 밟았 음에 틀림없는 것이다.
 
81
오늘 아침 그가 상준이에게 뒤를 밟힌 것은 그가 이미 오복의 뒤를 밟아 영 호의 집을 알아가지고 또 한번 익선동 그 집을 들러나온 때다.
 
82
이렇게 생각하고야 영호는 비로소 사실을 이해할 수가 있었다.
 
83
영호는 종묘 앞에서 가형사 일행과 작별하고 상준이가 있는 곳으로 갔다.
 
84
근처에 오복이의 자동차가 있는가 둘러보았으나 아무데도 보이지 아니하였다.
 
85
역시 오늘 낮에 영호의 준 충동이를 받아가지고 공을 세우느라고 동분서주 하느니라 생각하니 영호는 되레 오복이가 가엾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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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준이는 너무 속을 졸이고 기다렸다는 듯이 보고를 한다.
 
87
"열한시가 좀 못되어서 노인이 들어왔다가 이내 나가더니 한 십분 후에 웬 양복쟁이 하나가 들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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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은 또한 뜻하지 아니한 사실이다.
 
89
양복장이라니, 그는 그러면 누구일까?
 
 
90
3
 
 
91
"양복쟁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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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고 영호는 반문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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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생겼드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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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침해서 잘 보이지는 않는데 양복 입은 게 어떤지 얼리잖고…… 오! 참 그러고 어떻게 해서 방문을 여는데 그때 방안의 불이 사람 얼굴에 비치는데아주 얼굴이랑 머리랑 헙수룩해요."
 
95
'헙수룩한 사나이’인 듯하다. 그러나 그는 어젯밤에 그 여자와 한가지로 붙잡혀 갔는데…… 혹시 달아나왔다?
 
96
상준이의 그 다음 말은 이러하였다.
 
97
그가 자동전화에 가서 보고를 하고 오니까 오래잖아 오복이가 희색이 만면 하여 가지고 들어왔다. 그는 저 누상동 근처에서 문제의 감찰 없는 인력거를 발견하였다는 것이다.
 
98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 문소리가 나기에 구멍으로 내어다보니까 아까 들어왔던 사나이가 도로 나와 밖으로 나가고 있었다.
 
99
오복이는 유여치 아니하고 그의 뒤를 따르기 위하여 밖으로 나갔다. 그 뒤에는 아무 일도 없었다.
 
100
영호는 상준이를 남겨두고 그 집을 나왔다.
 
101
그 헙수룩한 사나이가 잡힌 곳에서 도망해 나온 듯하고 그리하여 그는 이 곳으로 왔다가 노인이 없으니까 동소문 밖 그 집으로 간 것이다. 그 뒤를 오복이가 따라가고. ── 영호는 시계를 꺼내 보니 벌써 열두시가 훨씬 지났다.
 
102
좌우간 동소문 밖으로 나가기는 해야 할 터인데…… 하고 생각하다가 지나가는 빈 택시를 잡아타고 우선 경성자동차부로 갔다.
 
103
오복이와의 관계로 해서 그곳 주인은 영호를 잘 아는지라 청하는 대로 속력 좋은 택시 하나를 서슴잖고 빌려주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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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호는 오복이가 그동안 집에 돌아왔다면 모르거니와 그렇잖다면 또 무슨 일이 생기었나보다 하는 막연한 불안을 품고 손수 택시를 몰아 동소문 밖으로 향하였다.
 
105
오복이는 낮에 영호에게 냉대를 받고 분한 생각으로 방향 없이 자동차를 몰고 돌아다니었다. 그러다가 밤 늦게 우연히 누상동 새로 난 큰길 거리에서 문제의 감찰 뗀 인력거를 발견한 것이다.
 
106
그는 그것이 기뻐 가슴이 뛰는데 또다시 훈정동 그 집에서 나오는 양복장이의 뒤를 밟게 되니 용기 백배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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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아하니 그 '헙수룩한 사나이’인 듯싶었다. 그는 종묘 어귀에서 두리 번 두리 번하다가 서쪽으로 향하고 올라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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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복이는 자동차를 천천히 몰아 앞섰다 뒤섰다 하면서 그의 뒤를 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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헙수룩한 사나이는 ××자동차부로 들어가더니 조금 후에 자동차 안의 사람이 되어가지고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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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복이는 대번 속력을 놓아 그 뒤를 따랐다.
 
111
앞의 자동차는 동관을 곧장 북으로 올라가 바른편으로 꺾이어 가지고 종묘 뒷길로 달리고 있다. 오복이는 물론 뒤를 따랐다. 앞 자동차에서는 뒤를 밟히는 줄 알았던지 속력을 내기 시작한다.
 
112
오복이도 속력을 높였다. 그는 미행에 성공을 못하면 내놓고 달려들어 붙 잡아가지고라도 올 배짱이다.
 
113
그런 생각을 하며 자동차를 몰아 대학병원 네거리에서 왼편으로 돌아 박석고개를 넘는데 문득 뒤를 돌아다보니까 웬 트럭 ── 화물자동차 한 채가오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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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복이는 근읍에서 짐을 싣고 왔다가 돌아가는 화물차이거니 생각하고 그다지 유념도 아니하였다.
 
115
앞의 차는 여전히 달리고 있다. 동소문 파출소 앞에서 조금 속력을 늦추고는 그대로 동소문 옆길로 달리고 있다.
 
116
되었다. 시외로만 나가면 일은 다 된 것이다. ── 이렇게 생각하고 일심으로 앞만 바라보고 가는데 뒤에서 오는 화물차는 화물차 답지도 아니하게 속력을 놓아 점점 두 사이를 가까이 줄이는 것이다.
 
117
오복이는 차라리 화물차를 앞세워 보내는 편이 낫겠다고 ── 인제 시외이니까 앞차를 놓칠 염려는 없으므로 ── 생각하고 동소문 옆을 넘으면서 속력을 줄이고 살그머니 왼편으로 길을 비키어 주었다.
 
118
그런데 고의인지 운전수의 잘못인지 옆에 바싹 당도한 화물차는 그 커다란 대가리를 이편으로 향하여 들여밀고 있는 것이다.
 
119
"앗!"
 
120
하고 소리도 지를 틈이 없이 오복이의 차는 떡 밀리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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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122
오복이의 차는 성난 황소 대가리에 받친 고양이 새끼처럼 그냥 낭떠러지 밑으로 굴러떨어지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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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물차는 솜씨 있게 다시 핸들을 돌리어 방향을 바로잡아 가지고 전속력으로 달아나고 말았다. ── 겨우 삼사 초 동안의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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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이 백주라든가 또 시내이었더면 될 뻔이나 한 불법이랴만 자정이 가까운 시외니 누구 하나 그것을 목도한 사람도 없고 따라서 시비할 사람도 없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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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란한 충격 소리와 이상한 비명 소리에 잠이 깨어 동리 사람이 모여들었을 때에는 낭떠러지 밑에 굴러져 있는 자동차의 유해를 발견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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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었는지 살았는지 다만 피투성이가 된 운전수 ── 오복이는 들것에 담기어 대학병원으로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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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사가 현장에 달려오고 한 것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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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는 여기서 또다시 잠깐 뒤로 물러가서…… 붙잡혀 간 헙수룩한 사나이는 겨우 정신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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깰 만하면 마취를 시키고 시키기 때문에 머리가 마치로 얻어맞은 듯이 띵하고 목이 타는 듯이 마르다.
 
130
때는 어느때쯤 되었는지 모르겠고 멀찍이 촛불 하나가 켜져 있다.
 
131
방안을 둘러보니 든든한 철문 하나가 있을 뿐 아무데도 창이 없는 것이 지하실 일시 분명하다.
 
132
그나마 공사를 하다가 말았는지 벽돌을 쌓은 사이에 굳어 붙은 시멘트가 그대로 비죽비죽 솟아 있고 이 구석 저 구석에는 공사에 쓰던 시멘트 묻은 바께쓰며 나무통이 난잡하게 굴러 있다.
 
133
그는 아가씨는? 하고 둘러보았으나 자기 혼자뿐이다. 아가씨란 '그 여자’ 말이다.
 
134
그는 자기 자신을 굽어다보았다. 위아래 내의만 입은 채 꽁꽁 결박을 지우고 거적자리 위에 굴러져 있는 것이다.
 
135
조금 저편에 누가 벗어 던졌는지 양복바지와 저고리가 굴러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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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운 품으로는 그거나마 집어다가 걸쳤으면 좋겠는데 팔다리가 묶였으니 몸을 움직일 수가 없다.
 
137
그러다가 시험삼아 뒤로 결박지은 팔목에 힘을 주어보니 이게 웬일! 스르르 묶인 것이 풀어지지 아니하는가!
 
138
물론 어떠한 사람이 당했던지 이 경우에 이 일을 당했으면 미칠 듯이 기뻐아니 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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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기운이 버쩍 났다.
 
140
그는 손 재게 다리 묶은 줄을 풀어버렸다. 그리고 우선 벗어 내던진 양복을 집어 입었다.
 
141
그러나 그 다음 순간! 그는 절망을 하였다.
 
142
응당히 밖으로 잠겨 있을 저 철문을 어떻게 열고 나간단 말인가!
 
143
우두커니 서서 원망스럽게 철문을 바라보다가 그는 그 앞으로 척척 걸어갔다.
 
144
처음 손으로 밀어보았다. 다시 팔로 밀어보았다. 조금 반응이 있는 것 같아 이번에는 어깨를 대고 밀어보았다.
 
145
조금씩 조금씩 소리도 없이 철문은 나갈 자리를 벌려주는 것이다.
 
146
그의 몸은 필경 철문 밖으로 비어져 나왔다.
 
147
캄캄 어두워서 아무것도 보이지 아니한다.
 
148
그러다가 바른편으로 저편에 희미한 불빛이 겨우 보인다.
 
149
그는 살금살금 기어서 불 비치는 앞에까지 이르렀다.
 
150
말소리가 유리창으로 스며나온다. 톡톡 하는 소리도 들린다.
 
151
가만히 고개를 들고 들여다보니 두 사람이 희미한 촛불 밑에서 화투를 치고 있고 두 사람은 거적자리 위에 이불을 펴고 잠을 자고 있다.
 
152
여기까지는 무사히 나왔지만 밖으로 나가자면 어디로 가야 할까.
 
153
설마하니 저 녀석들더러 물어볼 수는 없는 일이고…… 그는 가는 데까지 가보겠다고 또다시 엉금엉금 기었다.
 
154
지금 그가 기고 있는 곳은 지하실의 복도인 듯하다. 바른편으로 다시 꼬부라져 기어가노라니까 무엇이 대가리에 부딪친다. 역시 철문이다. 부딪는 소리에 방안에서 무슨 반응이 없나 하고 잠시 귀를 기울였으나 그대로 무사하였다.
 
155
먼저와 같이 그는 철문을 열었다. 돌층계를 여덟 개쯤 올라가니 훤하게 별을 박은 하늘이 보인다. 인제는 살았다.
 
156
그러나 그는 그 다음 순간 달아나려 아니하고 되레 돌층계에 주저앉았다.
 
 
157
5
 
 
158
아가씨를 그대로 내버리고 혼자 갈 수는 없는 노릇이다.
 
159
어젯밤에 아가씨를 모시고 왔다가 놈들에게 이렇게 잡혔으니 영감님이 얼마나 근심하실 것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만일 지금 이대로 혼자만 빠져나간 다면 일도 아니요 도리도 아니다. 찾아볼 대로 찾아보아야 한다.
 
160
그는 도로 돌층계를 내려가 무거운 철문을 열고 굴속 같은 복도를 엉금엉금 기었다.
 
161
기면서 좌우의 벽을 만지어 보았다.
 
162
자기가 갇히어 있던 근처에 오니 철문 하나가 손에 만지어진다. 힘들여 밀쳤으나 열리지 아니한다. 위로 더듬어보니 자물쇠가 잠기었다.
 
163
그는 생각하였다.
 
164
또 한 곳 철문이 있으나 역시 자물쇠가 잠기었다.
 
165
저 수직하는 방으로 뛰어들어가 놈들을 때려눕히고 열쇠를 뺏을까?
 
166
그랬으면 좋을 것이다. 그러나 저편은 도통 네 놈인데 이편은 한몸…… 그러나 네 놈이 무서운 것이 아니요, 네 놈의 손에 쥐어진 피스톨에는 항우장사라도 어찌하는 수가 없는 것이다.
 
167
그는 할 수 없이 일단 혼자 달아나 영감님과 상의한 뒤에 다시 거사를 하리라고 또 한번 엉금엉금 기어 밖으로 나왔다.
 
168
밖에서도 될 수 있으면 발자국 소리가 무겁지 아니하게 나도록 하노라고 엉금엉금 기었다.
 
169
한참 기어나오니 눈 아래 경성시내의 밤이 전등불과 한가지로 내려다보인다.
 
170
뒤는 보니 자기가 기어나온 벽돌집이 시커멓게 우뚝 서서 있다.
 
171
그는 다시 조심조심 분간 못할 길을 찾아 내려왔다.
 
172
그는 경성의 지리를 잘 알지 못하는지라 어디가 어딘지 분간을 하지 못 하였다.
 
173
겨우겨우 큰길까지 찾아나와서는 그저 덮어놓고 뛰었다.
 
174
밤은 저으기 깊은 듯하나 거리에 사람이 드물지 아니하다.
 
175
누구더러 길을 물을 것도 없이 그저 이리저리 닥치는 대로 뛰었다.
 
176
그리하여 어디를 어떻게 해서 왔는지 전차길 네거리에 당도하였다.
 
177
자세히 살펴보니 몇번 지나본 총독부 앞 광화문 네거리다.
 
178
그는 전차길을 따라 동으로 걸어갔다.
 
179
인제는 뛸 필요도 없다. 좌우를 살펴보았으나 사람이 빈번히 왕래는 하지만 자기를 따르는 사람은 있어 보이지 아니한다.
 
180
필경 종묘 앞에 이르렀다. 사방을 조심조심하여 훈정동 그 집으로 들어갔다.
 
181
그러나 영감님의 그림자는 보이지 아니한다.
 
182
잠깐 기다리다가, 그러면 위험을 느끼고 동소문 밖으로 피신을 한 듯 하니 그리로 가겠다고 그 집을 나섰다. 나섰다가 오복이에게 띄고 만 것이다.
 
183
그는 속을 졸이며 운전수를 졸라 속력을 내게 하였다.
 
184
그러다가 돌아보니 뒤쫓던 자동차는 간 곳 없고 화물자동차 한 대만이 전속력을 놓아 앞을 질러가고 말았다. 그는 후하고 한숨을 내어쉬었다. 인제는 쫓아오는 자동차도 없고 또 화물자동차를 의심했더니 그 역시 앞으로 지나쳐 가버리고. ── 흥 천사로 갈려 들어가는 어귀에서 화물차가 머물러 있었다. 가슴이 뜨끔하여 내어다보니 운전수가 달랑 혼자서 고장을 수선하고 있다. 안심이다.
 
185
무사히 목적한 곳에 다다랐다. 생각한 대로 영감님이 혼자 기다리고 있다.
 
186
영감님은 의외에도 의외라는 듯이 그를 붙잡아들인다. 그도 그럴 것이 가짜 형사대에게 영솔되어 딸과 같이 와야 할 것이거늘 혼자 오는 것을 보았으니까. ── 우선 운전수에게 후한 팁을 주어 누가 묻더라도 말을 말아달라고 부탁을 하고 주종은 마주 앉았다.
 
187
노인은 그에게서 어젯밤 이래의 이야기를 듣고 놀랐다.
 
188
계동으로 붙잡혀 간 줄 알고 그리로 가형사대를 보내어 그들이 돌아오기를 기다리는 판인데…… 그러면 계동 산다는 그 백아무라는 자는 웬 인물인가?
 
189
그러나 그것보다도 당장 큰일은 딸을 구해낼 방법을 차려야 할 것이다.
 
190
주종이 앉아서 그 상의를 하는데 방문이 소리없이 열리며 네 개의 몸뚱이가 슬며시 들어선다.
 
191
주종은 마치 유령이나 만난 듯이 얼굴이 새파랗게 질려가지고 멍하니 앉아있다. 사람이 너무 의외의 놀라움에 접하면 한동안은 넋이 나가는 법이다.
 
 
192
6
 
 
193
네 명의 장한의 손에 쥐어 있는 피스톨은 주종의 가슴을 겨누고 있다. 두 자루는 모젤이요, 두 자루는 조선에서는 구경하기도 어려운 소음(消音) 피스톨이다.
 
194
'헙수룩한 사나이’에게는 네 명이 모두 낯이 익다.
 
195
그들은 조금 전에 지하실에서 둘은 잠을 자고 둘은 화투를 치던 꾼들이다.
 
196
그런데 어떻게 여기를?
 
197
노인에게는 하나만이 아는 얼굴이다.
 
198
만일 온다면 가형사대가 왔을 것인데 그들은 아니다.
 
199
도무지 이게 어떻게 된 일인가!
 
200
주종이 놀라하는 것을 보고 그중 하나가 유쾌한 듯이 웃는다.
 
201
헙수룩한 사나이는 겨우 정신을 가다듬어 가지고
 
202
"우리를 잡어갔던 놈들입니다."
 
203
하고 노인에게 한마디 설명을 한다.
 
204
"그런데 어떻게 여기를?"
 
205
노인의 묻는 말이다.
 
206
헙수룩한 사나이는 고개를 내어두른다.
 
207
먼저에 웃던 사나이가 또 한번 허허 웃더니
 
208
"왜 알고 싶어? 허허."
 
209
하고는 자랑스럽게 이야기를 한다.
 
210
그들은 일부러 포로 가운데 하나인 헙수룩한 사나이의 묶인 것을 풀고 문도 열어놓았다. 달아나는 뒤를 밟아 노인까지 잡든지, 가령 그것이 실패하더라도 그때에는 딸을 찾으려고 노인이 덤벼들 테니 그때에 다같이 잡을 수가 있는 것이다.
 
211
그 꾀를 모르고 헙수룩한 사나이는 그곳을 빠져나왔다.
 
212
뒤는 계획한 대로 밟았다. 광화문 네거리에서는 화물차로도 따랐고 걸어서도 따랐다.
 
213
그러다가 종묘 앞에서 잘못하여 그림자를 놓치었다.
 
214
그래서 그냥 돌아가려다가 조금 기다리고 있는데 어디선지 '헙수룩한 사나이가’ 가 다시 나왔다.
 
215
그때 또다시 뒤를 쫓는데 늘 거칫거리는 백영호가 ── 그의 탄 차의 번호를 보아 틀림없다 ──(그들은 오복이인 줄은 몰랐다) 앞차와 화물차 사이에 뛰어들었다. 그리하여 동소문 밖에서 우선 그를 처치해 버렸다.
 
216
그러고 나서 줄곧 따라오기만 하면 눈치를 채겠으므로 일단 앞을 질러 갈림길인 골목 어귀에서 기다렸다. ── 차의 고장을 수선하는 체하고.
 
217
헙수룩한 사나이의 차가 골목 어귀를 돌아갈 때에 한 사람이 날쌔게 차 뒤에 올라붙었다.
 
218
그는 차 뒤에 붙어서 이 문앞까지 왔다가 물정을 살펴가지고는 다시 돌아오는 그 차 뒤에 붙어서 길 어귀까지 나왔다.
 
219
운전수는 그런 줄도 모르고 뒤에 붙은 사람을 내려놓고는 가버렸다.
 
220
그만하면 만사는 OK.
 
221
"어때? 신출귀몰이지? 허허허허."
 
222
그는 말을 마치고 또 한번 유쾌하게 웃는다.
 
223
"너 이놈! 네가 이놈 이래야 옳아?"
 
224
노인은 분에 타는 눈으로 그 설명하는 사나이를 쏘아보며 호령을 한다.
 
225
그러나 그 호령이 무슨 힘이 있으리요!
 
226
"네."
 
227
하고 그 사나이는 일부러 허리를 굽히며 밉상스럽게 조롱을 한다.
 
228
"당신이야말로 그래야 옳습니까? …… 좌우간 같이 좀 가시지요…… 수고스럽지 만…… "
 
229
"어델 가?"
 
230
"우리 두령께서 지금 만반진수를 채려놓고 기다리십니다."
 
231
"너의 두령이 누구란 말이냐?"
 
232
"그건 가보셔야 압니다."
 
233
"나는 못가겠다."
 
234
"그러면 미안하지만 모시고 가지요."
 
235
이때 밖에서 자동차 소리가 들리었다. 그 소리를 듣고 노인은 눈이 빛났다.
 
236
"흥! 기뻐 마십쇼. 저건 우리 화물차 ── 당신과 이 바보를 모셔갈 양으로 우리가 타고 온 화물차랍니다."
 
237
웃던 사나이가 그렇게 설명을 한다.
 
238
미상불 자동차 소리가 뚝 그치고는 그 뒤는 아무 기척도 없다.
 
239
노인은 한가지 그저 그 가형사대가 ── 일은 성공했거나 못했거나 오기는 올 그들을 심중으로 고대하고 있다.
 
240
어떻게 해서든지 시간을 잡아 끄노라면 그들이 오겠지…… 오기만 하면 무슨 변통수가 생기겠지.
 
241
'헙수룩한 사나이’는 아무 말이 없이 눈방울만 내두르고 있다가 앞에서 겨눈 피스톨이 잠시 한눈을 파는 사이에 나는 새와 같이 달려들었다. 그 통에 그의 머리에 부딪친 전등이 퍽하고 폭발이 되며 방안은 암흑 천지가 되었다.
 
 
242
7
 
 
243
방안에서는 전등의 폭발 소리와 아울러 푸시, 푸시 하는 소음 피스톨 소리가 두 번 들리었다. 회중전등이 번쩍거리고 그리고는 한참 쿵쿵거리더니 앞뒤로 문이 열리며 사람의 그림자가 사방으로 확 흩어졌다.
 
244
한 십 분 후에는 문앞에서 기다리던 화물차가 다시 오던 길로 돌아가고 말았다.
 
245
이편은 영호…… 그는 초조한 마음으로 풀스피드를 놓아 동소문 옆 고개를 넘을 때에 헤드라이트에 비치는 길바닥이 우연히 눈에 띄었다.
 
246
그대로 지나치려다가 그는 차를 돌이켜 그곳을 다시 한번 비추어 보았다.
 
247
타이어 자죽이 요란히 흐트러진 것이 결코 심상치 아니하다.
 
248
그는 오복이가 이 길로 가서 돌아오지 아니하였다는 선입감만 없었더라도 그냥 지나쳤을 것이다.
 
249
그는 차를 세워놓고 뛰어내려 현장을 회중전등으로 비추어 보았다.
 
250
타이어가 미끄러진 뒤를 따라 비추는 회중전등이 낭떠러지 밑에 엎 드러진 자동차에 비쳤을 때에 영호는 갑자기 숨이 칵 막히는 듯하였다.
 
251
그는 급히 낭떠러지 밑으로 내려가 자동차의 번호를 비춰보았다.
 
252
갈데없는 오복이의 차다.
 
253
그러면 오복이는?
 
254
그는 동리 사람들을 두드려 깨울까 하다가 차로 돌아와 오던 길로 해서 동소문 파출소에 머물렀다.
 
255
파출소에서 오복이가 대학병원으로 떠메어 갔다는 말을 듣고 다시 차를 몰아 대학병원으로 달리었다.
 
256
오복이는 머리에 붕대로 동이고 혼곤히 잠이 들어 있었다.
 
257
영호는 눈에 눈물이 괴었다. 그리고 후회하였다. 만일 오늘 낮에 그러한 충 동이만 시키지 아니하였어도 오복이가 이런 일은 당하지 아니하였을 터인데…… 그는 숙직실로 의사를 찾아가서 상태를 물어보았다.
 
258
── 제일 위험한 상처가 왼편 귀 위에 받은 파열상인데, 다행히 그것이 상처를 받을 때에 뇌에까지 울리지 아니했기 때문에 생명에 별조가 없을 것이요, 그 밖에는 골절도 없고 또 피도 많이 나오지 아니하였으니 안심할 수가 있다고 의사가 설명하여 주었다.
 
259
영호는 겨우 숨을 돌이켜 쉬고 다시 병실로 돌아왔다.
 
260
그는 간호부에게 쓰끼소이와 전속간호부를 사고 또 병실도 갑등(甲等)으로 옮겨 달라고 돈을 주어 부탁하였다. 아직 움직일 수는 없으니까 밝는 날 병실은 옮기기로 하였다.
 
261
잠깐 앉았노라니까 오복이가 잠이 깨어 눈을 떴다.
 
262
그는 영호를 보고 반겨 힘없는 입술로 무슨 말을 하려는 것을 영호가 손으로 제지하였다.
 
263
그는 안심한 듯이 다시 눈을 감았다.
 
264
영호는 병원을 나오면서 상준에게 보내는 명함을 적어 인력거꾼에게 보내었다.
 
265
그곳은 그만두고 이곳에 와서 오복이의 시중을 들어주라고.
 
266
그러는 동안에 밤은 한시가 지났다.
 
267
노인이 기다리다가 또 무슨 탈이 났나 하고, 어디로 피난을 했으면 어찌 하나 싶어 영호는 최고 속력을 놓아 차를 달리었다.
 
268
동소문 밖 흥천사 들어가는 골목의 바른편 외딴집이라고 주먹코가 대어주었으나 캄캄 어둔 밤에 그 말만 가지고는 집 찾기가 매우 곤란하였다.
 
269
영호가 갈림길에서부터 일부러 차머리를 이리저리 내둘러 사방을 비춰 보며 천천히 올라갔다.
 
270
거진 흥천사까지 다 가서 겨우 그것인 듯한 집을 찾아내었다. 바른편의 외딴 집 이랬으니 하나밖에 없는 집일 것이요, 그렇다면 이 집일시 틀림이 없을것이다.
 
271
그러나 올 사람을 기다리면서 불을 죽인 것은 좀 이상하였다.
 
272
대문은 훤히 열리었다.
 
273
회중전등을 비춰보니 안방문도 열리었다.
 
274
의심이 더럭 나면서, 그러나 기침을 캑 하여 보았다.
 
275
아무 반응도 없다.
 
276
잔다면 방문을 저렇게 열어젖혀 놓았을 리가 없고…… 영호는 조심조심 마루로 올라가 방안으로 회중전등을 비춰보았다.
 
277
그 순간 '억!’ 소리를 치고 그는 뒤로 물러섰다.
 
 
278
8
 
 
279
영호는 부지중에 꺼진 회중전등을 다시 비춰보았다.
 
280
확실히 그 노인이다.
 
281
방바닥에 엎으러진 노인의 옆에는 흥건히 흐른 피가 아직 완전히 엉 기 지도 아니하였다.
 
282
영호는 방으로 들어가 우선 엎드러진 노인을 바로 뉘고 앞가슴을 풀어 보았다.
 
283
심장 정통에 동전만한 입이 벌어졌다. 아주 완전한 시체다.
 
284
그는 손에 피가 묻지 아니하도록 조심하여 노인의 몸을 뒤지었다. 그러나 소지품이라고는 종이조각 하나도 없다.
 
285
가해자가 벌써 뒤져간 것이다.
 
286
옷고름을 문득 보니 피묻은 손가락 자국이 남아 있다. 영호는 그것을 떼어 포켓 속에 집어넣었다.
 
287
그는 노인을 전대로 해서 엎드려 뉘고 일어섰다.
 
288
회중전등에 비치는 방바닥은 난투의 자국으로 낭자하다.
 
289
그러나 원래 장판바닥인지라 참고될 흔적까지 남지는 아니하였다.
 
290
전등은 파열이 되었다.
 
291
벽에는 노인의 모자와 두루마기와 외투가 걸려 있을 뿐 아무것도 없다.
 
292
영호는 이거나마 일후에 '그 여자’에게 전하리라고 외투를 떼어 자기가 입었다.
 
293
마루로 나와 보니 대뜰에는 노인의 신발인 듯한 신발 외에 허름한 구두 가한 켤레 놓여 있다. 영호는 구두를 집어들었다.
 
294
건넌방문을 열고 보았으나 텅 비었고 부엌에도 장작이 조금 있을 뿐 솥도 걸려 있지 아니하였다.
 
295
본거는 훈정동 그 집이요, 이것 역시 임시로 쓰는 곳인 모양이다.
 
296
영호는 뒤 울안으로 돌아가 보았으나 역시 아무것도 발견하지 못하였다.
 
297
그는 자동차로 돌아와서 스타트를 시켰다.
 
298
구두와 외투는 쿠션 밑에 숨겨두었다.
 
299
사람은 혼자 죽어 넘어졌는데 구두는 두 켤레다.
 
300
그러면 이것은 분명 범인의 것이 아니면 또 한 사람 같이 있다가 달아난 사람의 것일 것이다.
 
301
달아난 사람…… 그는 '헙수룩한 사나이’임에 틀림없을 것이다.
 
302
그는 동소문 밖에서 자동차를 일부러 시내에서 나온 것처럼 머리를 문 밖으로 향해 세워 놓고는 동리 사람을 두드려 깨웠다.
 
303
영호는 그를 데리고 전복된 오복이의 자동차 옆에까지 와서 아이들이 장난을 하거나 또 누가 타이어 같은 것을 잘라가지 못하도록 감시를 해달라고 일원 짜리 두 장을 쥐어주며 부탁을 하였다.
 
304
영호는 회중전등을 비춰 팔걸이 시계를 한참이나 굽어다보았다.
 
305
그러니까 그 동리 사람이
 
306
"지금 몇시나 되었어유?"
 
307
하고 묻는다.
 
308
"새로 한시요."
 
309
"한시요? …… 나는 더 늦인 줄 알었더니 그렇게밖에는 아니 되었군…… "
 
310
하고 그는 혼자 중얼거린다.
 
311
실상 그때의 시간은 벌써 두시 반이나 되었지만 영호는 속으로 생각 하는 일이 있어 그가 아까 처음 이곳에 와서 자동차 전복된 것을 발견한 때의 시간 ── 그 시간에서 한 삼십 분만 더 늦게 ── 그 동리 사람에게 대어 준것이다.
 
312
영호는 그의 성명과 주소를 적어놓고 차를 돌리었다. 그는 자동차의 뒷 불을 꺼 번호를 보지 못하도록 하여가지고 그 길로 훈정동을 향하였다. 대학병원에는 일부러 아니 들르고. ── 대문은 잠기었으나 낮에처럼 손가락을 넣어 열 수가 있었다.
 
313
응당 그 헙수룩한 사나이가 이 집에 와서 있으리라고 생각하고 온 것인데, 그러나 집안은 교교하고 아무 인기척도 없다.
 
314
그러면 그는 도로 잡혀갔나? 잡혀갔으면 신발쯤은 신고 갔을 터인데…… 그렇잖고 여기도 위험할 줄 알고 영영 딴 곳으로 달아났나?
 
315
영호는 이렇게 두루 생각을 하며 좌우간 검사나 해보리라고 마루로 성큼 올라섰다.
 
316
그러자 갑자기 안방문이 와 열리며 시커먼 그림자가 튀어나오더니 그 대 로영호를 덮어누르는 것이다.
 
317
너무도 뜻하지 아니한 습격인지라 영호는 방비할 겨를도 없이 그대로 껴 눌리고 말았다.
 
318
괴한은 이어 준비해 가지고 있었던지 동바로 결박을 지으려 하는 것이다.
 
319
영호는 아뿔싸 큰일이로구나 생각하였으나 위에서 누르는 사람이 원체 억세어서 곧잘 빠져날 수가 없다.
 
 
320
9
 
 
321
만일 이대로 묶이는 날이면 일도 모두 글러지려니와 또한 영호의 일생의 대 수치다.
 
322
이렇게 생각하매 분한 생각에도 참을 수가 없다.
 
323
그는 괴한이 결박을 지으려고 잠시 누르는 힘을 늦추는 기회를 타서 만 신의 기운을 다하여 몸을 비틀어가지고는 이어 발길로 차내던졌다.
 
324
쿵 하고 마루에 나가떨어진 괴한은 황소와 같이 식식거리며 다시 덤벼 든다.
 
325
그러나 인제는 안될 말이다. 어두운 속에서도 겨냥을 대어가지고 내 뻗치는 영호의 주먹에 퍽 소리가 나며 또 한번 쿵 하고 마룻장이 울린다. 그러고는 부스럭 거릴 뿐 다시 덤벼들지 못한다.
 
326
영호는 싸움통에 회중전등을 잃어버린지라 손 재게 성냥불을 그어대었다.
 
327
혹시 다른 일파의 한 사람인가 하였더니 '헙수룩한 사나이’다.
 
328
누가 되었든지 간에 붙든 것만 다행이다.
 
329
그는 눈에 살기를 띠고 영호를 흘겨보며 부스스 일어나려 하였다.
 
330
영호는 달아나는 것처럼 방으로 들어가서 우선 전등을 켰다.
 
331
'헙수룩한 사나이’는 식식거리며 육박을 한다.
 
332
영호는 위엄 있게 나무랐다.
 
333
"이렇게 싸울 때가 아니야. 잠자코 내 말을 들어."
 
334
'헙수룩한 사나이’는 잠깐 몸을 멈추고 영호를 노리어보다가 목이 갈린 소리로 묻는다.
 
335
"너는 누구냐?"
 
336
"나? 나는 백영호."
 
337
이 말에 그는 갑자기 놀란 눈을 흡뜨고 영호를 바라보는 것이다. 아까 그 악당들이 동소문 밖에서 처치했다는 ── 죽였다는 백영호라는 자가 저렇게 피 둥피둥 살아왔느냐 싶어 놀란 것이다.
 
338
"죽었다는 배 백영호가?"
 
339
"누가? 누가 그러는데 백영호가 죽었대?"
 
340
"그놈들이…… 동소문 밖에서 자동차를…… "
 
341
영호는 비로소 오복이가 그 악당들의 해를 입어 그렇게 된 줄을 알았다.
 
342
그리하여 다시 한번 속으로 이를 갈았다.
 
343
"백영호는 그렇게 만만히 죽지 아니해…… 자, 어쨌거나 내가 해하러 온 사람이 아닌 줄은 이만하면 알겠지?"
 
344
그는 말이 없이 고개를 끄덕거린다.
 
345
"그러면 어서 바삐 여기 있는 중요한 짐을 가지고 나를 따라나와요, 빨리."
 
346
그는 무엇을 생각하는지 잠깐 주저하였다.
 
347
아마 노인이 이곳으로 오리라고 생각하는 모양이다.
 
348
그 눈치를 영호가 모르는 바가 아니다.
 
349
"노인은 인제는 여기를 오시지 못해요. 그러니까 기다렸자 또 그 놈들이나 만나 봉욕을 할 테니 빨리 짐을 가지고 나와요."
 
350
이 말에 그는 와락 달려들어 영호의 팔을 잡고 울듯한 소리로, ──
 
351
"영감님 어떻게 되셨수?"
 
352
"글쎄 여기서는 자세 이야기할 수 없으니 빨리 나와요."
 
353
그는 할 수 없이 두 개의 트렁크를 집어 들으려고 하는데, 보니까 다리를 절름절름하고 옷에 피가 묻어 있다.
 
354
영호는 그와 협력하여 중요하게 보이는 짐만 챙겨가지고 차를 몰아 올라오다가 다시 예전 측후소 앞에서 멈췄다.
 
355
우선 마나님네를 두드려 깨워 이상한 손님의 짐을 모조리 내다가 자동차에 실었다. 마나님은 처음은 반대하였으나 영호의 재산과 인품을 믿고 하는 대로 내맡겼다.
 
356
다음은 '그 집’으로 가서 담요와 화로를 도로 가져왔다.
 
357
영호는 마나님더러 누가 와서 묻든지 그 손님이 짐을 가지고 떠났다고만 대답하라고 당부를 하였다.
 
358
집에 돌아와서 우선 경성자동차부의 주인에게 전화를 걸어 말 몇마디를 긴하게 당부하였다.
 
359
다음 대학병원에 전화를 걸고 상준이를 불러내어 오복이가 정신이 드는 대로 이러이러한 말을 하라고 일렀다.
 
360
자, 인제는 악당의 소굴에까지 붙잡혀갔던 포로가 여기 있고 하니 한시 바삐 그곳을 습격하여 '그 여자’를 구해내야 할 터이다.
 
361
만일 추근추근하면 저편에서 포로를 놓친 관계로 역습을 두려워 자리를 옮길지도 모르는 것이다.
 
362
'헙수룩한 사나이’에게 묻고 싶은 말은 태산 같다. 그러나 우선 어디로 잡혀갔던가 하고 물어보았다.
【원문】5. 참극(慘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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