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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염마(艶魔) ◈
◇ 11. 실족(失足) ◇
카탈로그   목차 (총 : 15권)     이전 11권 다음
1934.5.16~11
채만식
1
艶 魔[염마]
2
11. 失 足[실족]
 
 
3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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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호는 상준이가 어리기는 하나 영리한만큼, 가령 큰 수확은 없다더라도, 그렇다고 맨손으로 돌아오지는 아니할 줄 믿고 있었다.
 
5
그는 우선 오복이의 횡액을 위로하고 ── 여주서 신문 보고 퍽 놀랐다고 한다. ── 응접실로 올라와서 다녀온 요건을 영호에게 보고하였다.
 
6
서광옥의 친정은 아주 몰락이 되었다.
 
7
그의 부친은 연전에 죽고 노모만 달랑 혼자 동리 사람의 선심을 입어 살아가고 있다.
 
8
외아들 서광식은 서울서 ××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하고 연전에 동경으로 건너갔다.
 
9
어느 사립대학을 다닌다고 하나 그는 그의 부친상을 당하고도 돌아오지 아니하였다. 그것은 그가 동경으로 건너간 뒤로는 일체 음신이 그쳤기 때문이다.
 
10
그런데 최근에 서울서 돌아온 사람의 말을 듣건대 길에서 언뜻 서광식이 비슷한 사람을 만났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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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광옥이는 그가 강화로 시집을 갔다가 일 년이 못되어 도로 돌아왔다.
 
12
돌아와서는 그냥 그의 남편 이재석이보다 앞서 종적이 없이 사라졌다. 누구의 말에는 그가 남편의 뒤를 쫓아 상해로 갔다고도 하나 실상은 사실이전도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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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래 십오 년간 소식이 없다가 약 두어 달 전에 조선으로 돌아오겠다는 간단한 편지 한 장이 그의 노모에게로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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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뒤에는 다시 소식이 없으므로 돌아왔는지 아직 상해에 그대로 있는지 알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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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준이는 그 편지와 또 서광옥이나 서광식이의 사진을 그의 노모에게서 빼앗아내려고 각가지로 애를 썼으나 드디어 얻지 못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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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준이는 더 머물러 있자, 일이라는 것은 사진이나 필적 같은 것을 얻어내는 것이겠는데 그것은 가망이 없고 해서 일단 돌아왔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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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준이의 보고는 그것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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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호에게는 그다지 반짝하는 보고는 아니라도, 그러나 아니 간 것보다는 나은 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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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째 서광옥이가 그 학생이라는 것이 사건의 중심 인물인 것을 인제는 의심 할 여지가 없는 것이다.
 
20
둘째로 서광식이가 ××고등보통학교를 졸업했다니, 그것을 졸가리삼아 그의 사진이라도 얻어낼 수가 있는 것이다.
 
21
영호는 우선 친구 가운데 ××고보를 졸업한 사람을 찾아내어 그 교우 회보를 빌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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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 가을에 발행한 것인데, 서광식이는 재작년 즉 제이십삼회에 가 그 의 이름이 박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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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현재 동경의 ××대학 의과(醫科) 재학이라고 씌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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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으로 보아 그가 중도 퇴학을 하고 돌아온 것을 알 수가 있다.
 
25
영호는 경성에 주소가 있는 서광식이의 동기동창을 추려가지고 연줄 연줄 여러 곳에 청질을 하여 그 이튿날에는 그들의 졸업기념 앨범이 수중에 들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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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광식이의 인상은 향초가 말하던 것과 꼭 같았다. 그의 누이 서광 옥이의 사진과 비교해 보니 남매인만큼 모습이 비슷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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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호는 넉 장을 복제(複製)하여 그중 한 장은 두어두고 석 장은 주먹코 일행을 불러다가 나누어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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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명인지 흰소리인지 모르나 그들은 그야말로 발에 티눈이 박히도록 돌아다닌다고 공치사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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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중 키 작은 치는 정말인지 모르나 바로 어저께 진고개 ×× 백화점에서 서광옥이와 같은 여자를 발견하였는데 뒤를 따르다가 그만 혼잡한 군중 속에서 그림자를 놓쳤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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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중한 이틀 동안이 별로 소득이 없이 무료한 가운데 지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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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문에서는 그동안의 사실을 가지고 여전히 떠들기는 하나 경찰의 수사 가조 금도 진척된 보도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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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는 신문들이 제가끔 자기네의 추측대로 얼토당토 아니한 의견을 써놓기 시작한다. 그중에는 그 노인은 자살을 한 것이요, 두 사람의 남녀는 그의 사위와 딸인데 살인의 혐의를 피하여 종적을 감춘 것이라고 쓴 신문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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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튿날 …… 가짜 소포가 영호의 손에 들어온 지도 열흘이 되고 학희가 잡혀간 지도 일 주일이 가까이 되는 날이다.
 
34
영호는 몸에서 좀이 쑤시건만 어찌할 바를 몰라 응접실 소파에서 딩굴고 있는데, 허철이에게서 전화가 왔다. 마침 오정때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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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영호"라고 찾는 그의 전화 소리는 매우 당황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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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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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야 왜 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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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호는 전화를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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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호야? 응 저 …… 아이구 숨차 …… 글쎄 사십만 원 재산을 지니고 서 울 바닥에서 살면서 전화 하나도 안 거는 우리 아부지란 참! 에 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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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그건 무슨 소리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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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황히 찾아가지고는 요건은 젖혀놓고 자기 아버지가 전화 가설을 아니 한 푸념을 하는 품이 미상불 허철의 허철다운 면목이 나타난다.
 
42
"응 참 …… 지금 곧 좀 와 …… 내 자동전화까지 뛰어오느라고 숨이 차서 죽겠구만 …… 자동전화로 온 건 잘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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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호는 실소를 했다. 무슨 일이길래 이렇게 당황하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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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삼십 분 안에 가봄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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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꼭 …… 급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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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호는 전화를 끊고 상준이를 시켜 인력거 하나를 부르게 하였다. 될 수 있으면 차랄지 차부랄지 깨끗한 놈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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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동안에 영호는 침실로 들어가 변장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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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굴 모습을 조금 변하고 얼굴을 해맑게 하고 윗수염을 채플린 수염으로 해 붙이고 양복을 딴 놈으로 갈아 입고 그러고 손가방을 들고 ── 이만하면 첩경 의사로 보았지 영호가 변장한 것으로 보기는 어려웠다. 따라서 허 철의 집 앞에서 늘 망을 보는 악당에게도 주의를 주지 아니할 것이다.
 
49
변장이 그럴 듯한가 아니한가 시험하려고 아래층 식당 방문을 슬그머니 열고 고개를 들이미니 손수건 끝에 수를 놓느라고 잠착하고 있던 향초가 눈 이 둥 그래가지고 벌떡 일어선다.
 
50
"누구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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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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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고 영호는 목소리와 말씨까지 변하였다. 인력거가 아직 아니 왔으니 그동안 장난이라도 해보려는 것이다.
 
53
"여, 여기 음, 향초라는 여자가 있나요?"
 
54
"네 …… 저, 그런 사람 없어요."
 
55
향초는 당황해서 어쩔 줄을 모른다.
 
56
"없어요? 당신이 바로 향초라는 여자 아니요?"
 
57
영호는 좀 딱딱거렸다. 그러니까 향초도 지지 않고 기승을 낸다.
 
58
"당신은 누구여요? 웬 사람이에요?"
 
59
"나요? 그거야 종차 알고 이리 좀 나오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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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말에 향초는 갑자기 천장을 향하여
 
61
"선생님, 선생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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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고 날카로운 소리로 외친다.
 
63
영호는 그만 허허허허 웃고, 향초의 외치는 소리에 오복이와 식모가 뛰어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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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복이는 영호를 알아보고 빈들빈들 웃고 섰고, 식모와 향초는 오복이가 웃는 것으로 안심은 하였으나 웬 영문인지 몰라 두리번두리번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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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초는 한참만에야 겨우 영호를 알아보고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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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구머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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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고 방바닥에 주저앉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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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 무슨 짓이세요! 사람을 놀래게 해두 …… 나는 웬놈이, 아이 참, 웬 사람이 나를 붙잡으러 온 줄만 꼬빡 속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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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구들은 한동안 웃음으로 꽃이 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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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호가 인력거를 타고 허철의 집에 이르렀을 때에는 대문간에 아무도 없었다. 그는 이 기회에 한번 허준이나 보아 두리라고 인력거꾼에게 가방을 들려가지고 그대로 사랑 마당으로 해서 방으로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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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대한 얼굴이며 반만 벗어진 반백의 머리며, 안색이 초췌는 하였으나 그래도 혈기 좋아보이는 낯빛 …… 이런 것이 모두 전형적 부르조아임을 잘 나타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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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호는 이 영감이 이렇게 혈색이 좋으면서 어찌 후취나 첩을 얻지 아니하나 싶어 이상히 생각하였다.
 
73
의사가 들어오는 것을 보고 허준은 그 아들더러 청하지 말라고 한 의사를 기어이 청했느리라 생각했는지 상을 찌푸렸다.
 
74
청진기도 없고 검온기도 없는 가짜 의사 영호는 괜히 맥을 짚어보는 체 도하고 가슴을 타진도 해보고 눈두덩도 뒤집어보고 하다가 그대로 방을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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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호가 나오자 영감이 성난 소리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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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 누구 없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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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고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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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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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답 소리와 함께 안에서 나오는 허철과 영호는 사랑 댓돌에서 마주쳤다.
 
80
허철은 어리둥절하다가 겨우 영호를 알아보고는 그대로 사랑으로 들어가 한바탕 화풀이를 받고 나왔다.
 
81
허철은 영호를 자기의 거처하는 안사랑으로 데리고 들어가서 요건은 젖혀놓고 부우부우 영호를 원망한다.
 
 
82
3
 
 
83
허철의 말을 들으면 그 부친은 병중에 화가 나면 어린애처럼 약을 먹으려 하지 아니하는 괴망스러운 성벽이 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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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허 웃고 나서 영호는 말을 하였다.
 
85
"이 사람아, 이것도 필요가 있어 하는 노릇일세 …… 한데 대관절 급 한일이란 무엇인가? 또 애인이나 찾어달라고 떼나 쓰잖겠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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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걸 보게."
 
87
허철은 책상서랍 속에서 속달편지 한 장을 꺼내어 영호를 준다.
 
88
첩경 보아도 그것은 요전 것과 같은 협박장이다.
 
89
"번번이 안되었지만 알 수 없는 사정이니 오천 원만 요전과 같이 오늘 밤새로 한시에 한강 건너 한강신사 들어가는 길로 가지고 오시오. 만일 병석에서 일지 못하겠거든 아무 내용 이야기를 하지 말고 자제를 시켜도 좋소.
 
90
그곳에서는 역시 학생복에 사방모자를 쓰고 휘파람으로 수심가를 부르는 사람이 저편에서 올 테니 말없이 전하게 하시오."
 
91
사연은 이뿐이다. 봉투의 일부인을 보니 광화문우편국에서 열한시에 맡은 것이다.
 
92
"자네 어르신네가 이걸 보셨나?"
 
93
영호는 편지를 보고 나서 물었다.
 
94
"아니, 마침 내가 받어서 …… "
 
95
"잘 되었네 …… 만사는 다 내게 맡기게."
 
96
"그래도 돈은 가져다 주어야지?"
 
97
"돈이 그렇게 흔하거든 그야말로 전화나 한 개 가설하게."
 
98
"그래도 이 사람아, 그놈들이 나중에 …… "
 
99
"염려 말어 …… 염려 말고 자네 사진이나 멫 장 내놓게."
 
100
허철은 웬 뜻인지 모르겠다는 듯이 앨범을 내어놓는다.
 
101
영호는 그중에서 정면으로 박인 것, 왼편으로 박인 것, 바른편으로 박인것, 전신을 박인 것 해서 허철의 사진 넉 장을 떼어 포켓 속에 집어 넣었다. 그는 일어서면서 허철에게 당부를 하였다.
 
102
"오늘 밤 세시 안으로 내가 오든지 무슨 기별하든지 함세 …… 그런데 물론 그럴 리야 없겠지만, 만일 내가 세시까지 오지도 않고 소식도 없거든 자동차 한 대로 미리 준비해 놓았다가 자네 어르신네를 뫼시고 인천 월미도 호텔로 가서 있게 …… 병환 중에 좀 무리겠지만 꼭 그렇게 해야 하네."
 
103
"아버지가 가실려고 하실까."
 
104
"그대로 있다가는 큰일이 난다고 좀 속이게그려 …… 그래 거기 가서 내가 무슨 기별을 할 때까지 꼼짝 말고 있어야 하네 …… 만일 어르신네가 안 들으시거든 강제로 떠메고라도 가야 해?"
 
105
허철은 무슨 불길한 예감이 드는지 불안한 빛이 얼굴에 떠오른다.
 
106
"아모 염려 말아요. 염려 말고 시키는 대로만 해요 …… 지금 이판에 모험을 아니하고야 일을 성공할수 있나!…… 그러고 깜박 잊었군 …… 오늘밤 열두시 반쯤 되거든 자동차를 불러 타고 한 바퀴 휙 돌아서 한시 반쯤 집으로 돌아오게. 그 차를 그대로 집 뒤꼍에서 기다리게 하는 게 좋겠지 …… 잊지 말어 응? 세시 …… 그리고 아버지 모시고 나갈 때 뒷문으로 나가고…… "
 
107
허철은 고개를 끄덕거린다. 그리고 그는 영호의 눈치를 살피다가 주저 하던 끝에 묻는다.
 
108
"참 저 향초, 어떻게 그 뒤에 소식이나 있나?"
 
109
허철의 가뜩이나 야윈 볼이 더욱 홀쭉해지고 우울한 그의 표정은 원인이 향초를 놓치고 기다리는 데 있는 것이다.
 
110
영호는 이렇게만 되어가면 한가지 연극은 성공에 가깝다고 생각 하였으나 겉으로는 그저 흔연하게 방금 그 방면으로도 활동하는 중이라고 대답 하였다.
 
111
"자네만 믿네."
 
112
허철은 맥없이 말을 한다.
 
113
"음, 염려 말게 …… 지금쯤 어데서 인제 자네를 줄 양으로 손수건에 수를 놓고 있는지도 누가 아나!"
 
114
"그랬으면야 …… "
 
115
"자네는 급한 일을 당하면 너무 허둥대니 오늘 저녁은 좀 침착하게 일을하게."
 
116
영호는 신신 부탁을 한 뒤에 허철을 작별하고 돌아오는 길에 김서방을 맡긴 병원에 들러 그를 휘장 덮은 인력거에 태워가지고 집으로 돌아왔다.
 
117
영호가 지리하게 기다리는 해가 지고 집안 식구가 식당방인 향초의 방에 모여 저녁을 먹으려고 하는데 주먹코 일행 중의 키 큰 치가 헐헐하고 달려왔다.
 
 
118
4
 
 
119
현관으로 나오는 영호를 보고 키 큰 치는 밑도 끝도 없이
 
120
"만났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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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는 것이다.
 
122
"어데서?"
 
123
영호가 급히 물었다. ── 이 싱겁게 생긴 친구가 그래도 제법이로구나 생각 하면서.
 
124
"대학병원 앞에서요."
 
125
"대학병원 앞에서?…… 사내를? 계집을?"
 
126
"사내요."
 
127
영호는 이 대학병원이라는 말이 이상하게 머릿속에 들어오기는 하였으나 그때 당장은 그대로 스치고 지나가버렸을 뿐. 그것이 다음날 큰 도움이 될줄은 생각지도 못하였던 것이다.
 
128
"그래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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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호는 다음 말을 재촉했다. 키 큰 치는 좀 머뭇거리다가
 
130
"놓쳤어요."
 
131
하고 히죽이 웃는다.
 
132
"네끼! 밥버러지! 어떻게 하다가 놓쳤어?"
 
133
키 큰 치의 말을 들으면 그는 이렇다 할 무슨 근거도 없이 오늘은 성북동으로 나가 보았던 것이다. 그러나 역시 아무 소득도 없이 돌아오는데 동소문 파출소 앞에서 바로 오정목으로 빠져나가려다 아직 저녁 먹을 때도 못 되고 해서 박석고개를 넘어 창경원까지 와가지고는 그대로 전차길을 따라 걸었다.
 
134
대학병원 문앞에 왔을 때에 병원 안으로부터 웬 대학생 하나가 나왔다.
 
135
대학생이라면 덮어놓고 유심히 보는 판인데, 그 학생은 갈 곳 없이 지금 그 의 포켓 속에 든 사진의 얼굴과 꼭 같았다. 되었다. 대서라. 이렇게 속으로 기뻐하면서 그는 뒤를 밟았다.
 
136
학생은 힐끗 뒤를 한번 돌아보더니 그대로 앞을 선 채 천천히 걸어갔다.
 
137
네거리에 이르러서는 잠깐 망설이다가 여전히 전차길을 따라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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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교를 지나 조금 더 가다가 바른편 샛길로 해서 순라골로 들어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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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라골로 들어서 연초전매국 뒤에 왔을 때에 학생은 발을 멈추고 돌아섰다.
 
140
키 큰 치는 저편이 눈치를 채고 역습을 하나보다 싶어 머뭇머뭇하는데 그때 두 사람의 상거는 한 칸도 떨어지지 못하였다. 학생은 키 큰 치의 앞으로 걸어오더니 의외에 보드라운 목소리로
 
141
"미안합니다만 성냥 가지셨거든 하나 빌려 주십시요."
 
142
하고 포켓 속에서 담배를 꺼내었다.
 
143
키 큰 치는 겨우 안심을 하고 성냥을 꺼내어 주는데 그저 눈 깜박할 사이에 무쇠 같은 주먹이 벼락같이 아래턱을 올려쳤다. 뒤로 벌떡 나자빠지는 바람에 이번에는 궁장 담벼락에 뒤통수를 부딪고 그대로 정신없이 넘어졌다. 얼마만에 겨우 일어나서 이렇게 온 것이다.
 
144
"수고했네 …… 올라와서 저녁이나 많이 먹고 가게."
 
145
영호는 하도 어이가 없어 더 나무랄 멋도 없고 저녁을 대접하여 돌려 보냈다.
 
146
열한시가 되자 영호는 준비를 시작하였다.
 
147
우선 넉 장의 허철의 사진을 놓고 정밀하게 그 모습대로 변장을 하였다.
 
148
영호의 얼굴을 가지고 허철의 얼굴을 만들기에는 아무리 변장이 능한 영호라도 매우 힘이 들었다. 상당한 시간이 걸리었다.
 
149
변장을 마치고는 허철이 요새 입은 양복과 빛깔이 비슷한 놈을 갈아 입고 모자는 헌팅을 눌러 썼다.
 
150
포켓 속에는 클로로포름을 듬씬 축인 가제 뭉치를 고무주머니에 넣어 집어넣었다.
 
151
다음 김서방과 오복이와 상준이를 불러 자기가 이외로 더디 돌아오든지, 또 무슨 사고가 생기더라도 결코 놀라지 말고 집을 잘 지키되, 혹 무슨 일이 있거든 김서방은 아래층에서, 오복이와 상준이는 향초를 데리고 이 층에서 버티고 있지 경솔히 공격적으로 나서지는 말라고 지시를 하였다.
 
152
향초는 오늘 두번째 놀랐다. 먼저는 가짜의사에게 이번은 가짜 허철에게.
 
153
──
 
154
열두시가 지나고 다시 반을 가리킬 때에 영호는 집을 나섰다. 자동차를 빨 리도 아니요 더디지도 아니하게 몰아 용산으로 향하였다.
 
155
돌아오는 전차가 가끔 있을 뿐, 제일인도교에 당도했을 때에는 완전히 인적이 끊기었다.
 
156
자동차를 그대로 몰아 신사 들어가는 길 으슥한 곳에서 내리었다. 시계는 꼭 한시다.
 
157
영호는 천천히 걸었다. 얼마 아니 가서 저편에서 수심가를 넘기는 휘파람 소리가 들린다.
 
 
158
5
 
 
159
영호는 발길을 멈추고 기다렸다.
 
160
휘파람 소리가 가까와지며 검은 그림자가 시계(視界)에 들어온다.
 
161
협박장에 쓰인 대로 교복에 사방모자를 쓴 학생이 영호의 등 뒤에서 멀리 비치는 가등불을 받아 확실히 나타났다.
 
162
두 사람은 딱 마주쳤다.
 
163
××고등보통학교 제이십삼회 졸업생의 앨범에서 본 서광식이다.
 
164
머리를 중대가리로 박박 깎은 그 사진에 비하면 좀 노성해 보이나 역시 그 얼굴은 그 얼굴이다.
 
165
저편은 힐끔 치어다보더니 그대로 지나치는 체하면서 왼손을 쑥 내어민다.
 
166
바른편손은 포켓 속에 들어 있는 피스톨의 방아쇠에 손가락을 걸어 쥔 것이 분명하다.
 
167
영호는 그대로 서서 있다.
 
168
손을 내어밀면 이편에서 내어주는 것이 있으리라고 의심도 아니한 그 학생 ── 서광식은 의외에 아무 반응이 없는 것을 보고 홱 돌아섰다.
 
169
바른편 포켓 속이 움직거리면서 불룩한 끝이 영호의 얼굴을 겨누고 있다.
 
170
서광식은 영호를 노리어본다. 영호는 그냥 범범히 서서 있다. 그러나 그는 그저 범범히가 아니라 머리터럭만한 틈만 붙잡으면 비호같이 달려들어 저편 을 메어꼰질 준비가 되어 있다.
 
171
한편은 노려보고 한편은 바라다보고 한동안 살기띤 침묵이 계속되었다. 긴장 된 찰나다.
 
172
"왜 아니 내놓아?"
 
173
이미 피스톨을 꺼내어 그 새까만 구멍으로 영호의 얼굴을 겨누는 서광식은 얕으나 저력 있는 소리로 묻는다. 머리를 겨누었으니 영호의 방탄(防彈) 조끼는 소용이 없어진다.
 
174
"돈 못 가져왔소."
 
175
영호는 허철의 음성을 본떠서 대답하였다.
 
176
"왜?"
 
177
"돈이 없어서 …… "
 
178
"돈이 없어?"
 
179
서광식은 조롱하듯이 웃입술을 삐쭉한다.
 
180
"그건 저리 좀 걷어치우."
 
181
하고 영호는 턱으로 피스톨을 가리키며 말을 한다.
 
182
"나같이 약비한 사람한테야 그런 게 무슨 소용이요?"
 
183
그러나 저편은 조금도 방심을 아니하고 똑바로 겨눈 곳을 겨누고 있다.
 
184
"흥! 그중에 내숭은 들어서!…… 대관절 왜 돈을 아니 가져왔어?"
 
185
"없어서."
 
186
"없기는 왜 없어? 은행에 수만 원씩 예금을 해놓고도 없어?"
 
187
"아니 여보."
 
188
하고 영호는 한걸음 다가섰다. 그는 어떻게 해서든지 이야기를 늘어놓아 가지고 이러고저러고 하는 동안에 틈을 엿보아 때려뉘자는 것이다.
 
189
"대관절 당신이 누구길래 우리더러 돈을 달라우?"
 
190
"달랄 만하니까 달라지!"
 
191
"무엇이 어째서 달랄 만하오?"
 
192
"그것은 허준이하고 할 말이지, 허철이하고는 할 말이 아니야 …… 건방지게 지껄이지 말고 가지고 왔거든 순순히 내놓아."
 
193
"여보, 건방진 것은 댁이 아니요? 백제 남으 돈을 뺏으러 들면서 이유도 말을 아니하니 그게 무슨 경우란 말이요?"
 
194
"애, 요게 꽤 까스랍게 군다! 이렇게 말썽을 부릴 테야!"
 
195
"아니 말썽을 부리는 것은 댁이지 내요?"
 
196
저편은 점점 성이 나는 모양이다. 얼굴이 상기가 되어 온다. 그러나 화를 꾹 누르고 타이르듯 위협하듯 말을 한다.
 
197
"괜히 이러다가는 신상에 좋지 못해 …… 우리를 누구로 알고 이래?……
 
198
하룻강아지 범 무서운 줄을 모르더라고 …… 허준이가 그새 돈을 칠팔천 원이나 내어주면서도 꿀꺽 소리 못하는 것을 보면 알조지 무얼 여러 잔말이야?"
 
199
"머 어째?…… 아, 이 도적놈아."
 
200
하고 영호는 일부러 고개를 내밀었다. 도적놈아 소리가 떨어지기도 전에 서광식의 왼손이 영호의 따귀를 내리친다.
 
201
그것을 피하려 고개를 옴칫할 때에 피스톨의 겨냥도 벗어났다. 그 순간 영호는 나는 새와 같이 와락 덤벼들어 우선 저편의 바른편 손목을 주먹으로 내리 쳤다. 피스톨은 땅에 떨어졌다.
 
202
두 몸뚱이는 한데 어우러졌다. 영호는 생각던 것보다 상대자가 만만치 아니 함을 알았다.
 
 
203
6
 
 
204
영호가 서광식이를 가까스로 밑에 깔고 앉아 일변 포켓 속에 넣었던 고무 주머니를 꺼내어 클로로포름 가제를 사용하려고 할 때다.
 
205
영호는 싸움에 정신이 팔려 등 뒤 즉 영호 자기가 오던 것과 같은 방향으로부터 화물자동차 한 대가 달려와 이미 그 옆에서 머문 것을 알지 못 하였다.
 
206
화물자동차에서는 두 사람의 괴한이 뛰어내려 서광식을 덮어누르고 있는 영 호의 등 뒤로 달려들었다. 그들은 이미 그들의 동류가 껴눌린 것을 먼 빛으로 보아서도 알 수가 있었던 때문이다. 불의의 습격을 받은 영호는 방비 할 겨를을 가지지 못했다. 그는 등 뒤에서 목을 조르고 매달린 괴한을 업어 넘기려 벌떡 일어섰으나 그와 동시에 따라 일어선 서광식이의 주먹에 어퍼컷을 한 대 본 좋게 얻어맞았다.
 
207
그리하여 그는 몸의 균형을 잃고 뒤로 넘어지는 것을 서광식이가 그대로 깔고 앉고 두 명의 괴한이 머리와 팔을 눌렸다.
 
208
서광식이가 다시 옆에 흘려 있는 고무주머니에서 영호가 사용하려던 클로로포름 가제를 꺼내어 영호의 코와 입을 덮었다.
 
209
미이라를 캐러 갔다가 미이라가 된다는 셈으로 영호는 서광식을 잡으려고 준비 해 가지고 갔던 마취제에 되레 자기가 정신을 잃어버렸다.
 
210
영호가 완전히 늘어진 것을 보고 그들은 일어섰다.
 
211
"망할 자식! 생기기는 얄팍하게 생긴 자식이 웬 아귓심이야!"
 
212
서광식은 옷의 흙을 털면서 투덜거린다.
 
213
그가 아까 떨어뜨린 피스톨을 찾아 간수하는 동안에 나중에 온 두 명의 수하는 영호를 떠메어 화물자동차에 실었다.
 
214
"우리가 조곰만 늦게 왔어도 큰일날 뻔했지?"
 
215
"그럼…… 자네는 더 기다리자는 것을 내가 어서 가보자고 않드나?…… 다 일이 잘 될랴면 그런 법이야 …… 가지고 왔어요?"
 
216
그자는 서광식이더러 이렇게 묻는다.
 
217
"그 자식이 아니 가지고 왔지 아마 …… 글쎄 돈을 내노라니까 무어라고 긴 소리 잔소리를 늘어놓는단 말이야 …… 그래 따구를 한 대 갈기다가 그만…… 그것 참 망신을 하랴니까 …… 그것도 아마 백영호 놈이 모다 꾀를 가르쳐 준 거야!"
 
218
서광식은 여전히 두덜거리며 학생모자를 벗어버린 뒤에 운전대에 운전수 와같이 타고 두 명은 짐차에 올라탔다.
 
219
"죽은 게도 발버텀 떼어 먹으랬단다. 기왕 가지고 온 것이니 수족을 꼭꼭 묵고 부대를 덮어씌워라."
 
220
서광식은 이렇게 명령을 하였다.
 
221
화물차는 머리를 돌리어 시내로 향하여 달아났다.
 
222
이편 허철과 영호의 집.
 
223
허철은 세시가 되기를 눈이 빠지게 기다렸다.
 
224
문 밖에서 바스락 소리만 나도 영호가 오나, 그렇잖으면 영호가 실수를 하여 일이 글러져 가지고 악당들이 습격을 해 들어오나 가슴을 졸였다.
 
225
그러나 세시가 되도록 아무 소식도 일도 없었다.
 
226
그리하여 그는 놀라 고집 쓰고 야단야단하는 병석의 부친을 업고 나가다시피 자동차에 태웠다.
 
227
무슨 괴변이냐고 묻는데도 그저 큰일이 날 테니 당분간 어디로 피신을 해야 한다고만 대답하였다.
 
228
허철이에게는 대단한 용기와 과단성이 필요한 일이었지만, 어쨌거나 그날 밤으로 무사히 인천 월미도호텔에 피신을 하였다.
 
229
또 영호의 집에 남아 있던 사람들은 속을 졸이며 뜬눈으로 밤을 새웠다.
 
230
날이 휘엿이 밝도록 영호가 아니 돌아올 때에는 장수를 잃은 병정들같이 기운이 빠지고 근심을 하였다.
 
231
그중에도 향초는 여간만 걱정을 아니하였고, 김서방은 그의 법식대로 뛰어나가 보겠다는 것을 오복이와 상준이가 각각으로 붙잡아놓았다.
 
232
밝는 날 온종일 기다렸으나 역시 소식이 없다. 상준이가 꾀를 내어 석양 때 허철의 집을 가보았으나 집 안은 텅 비고 하인들만 남아 있었다. 물으니까 어젯밤에 영감님을 모시고 시골로 갔다는 것이 그들의 대답이다.
 
233
날이 저물고 밤이 깊었다. 영호가 나간 지 만 일 주야가 되었다.
 
234
불안과 긴장에 싸여 밤은 더욱 깊어갔다. 열두시가 지난 뒤다. 아래층을 지키느라고 현관에 지키고 있던 김서방은 딸그닥하는 소리에 정신이 바짝 들었다.
 
235
현관문의 핸들이 움직이는 것이다.
 
 
236
7
 
 
237
영호는 겨우 정신이 들었다. 팔은 등 뒤로 결박을 짓고 다리도 꽁꽁 묶였다.
 
238
휘휘 둘러보니 한 칸쯤 되는 조선방인데 천장에 십촉짜리 전등이 무료 히 켜 있다.
 
239
벽 사면 중 두 면은 그대로 벽이요, 한편은 쌍창이 달리었고 한편은 외짝밀창이 달린 것으로 보아 어느 집 건넌방인 것을 알 수가 있다.
 
240
방바닥의 장판이며 지전지며 벽에 붙은 주련 같은 것으로 보아 꽤 호사스럽게 사는 집인 듯하다.
 
241
영호는 아직도 머리가 띵하다. 한 몇 해 잠을 자고 난 것같이 의식을 잃었던 그동안이 아득하다.
 
242
그러자 밖에서 도란도란 이야기 소리가 들린다. 아마 안방에서 하는 이야기인 듯한데 그중 사내 소리는 확실히 서광식이다.
 
243
"저 녀석도 그년처럼 그리 보내지요?"
 
244
이것은 서광식이가 하는 소리요 그 말을 받아
 
245
"멍청한 소리 마라."
 
246
하고 나무라는 것은 분명히 그의 누이 서광옥이인 것이다.
 
247
"왜요?"
 
248
"글쎄 생각해 봐라…… 한 집안에서 그런 인간이 둘이나 생겼다면 거기 서도 의심을 내어 소문거리가 될 텐데, 하물며 허철이라면 그래도 부자 놈의 자식인데 다가 또 제노라고 해서 얼굴을 아는 사람이 적잖은데 그게 무사하겠니?"
 
249
서광옥이의 이 말에 영호는 후닥닥 뛰고 싶었다. 그는 고개를 여러 번 크게 끄덕거렸다. 그리고 혼자 속으로
 
250
"엥!…… 그런 것을 모르다니!"
 
251
하고 탄식하였다.
 
252
그는 학희의 있는 곳을 안 것이다. 그도 뒤로 묶인 결박에 힘을 주어 보았으나 꿈쩍도 아니한다. 이렇게 포로가 되어 앉아가지고 비로소 학희의 있는 곳을 알게 된 것이 안타까우나 역시 할 수 없는 노릇이다.
 
253
그들의 이야기는 계속이 된다.
 
254
"그럼 어떻게 해요?"
 
255
"어떻게 하기는 무얼?…… 붙잡아 두었다가 제 아비가 말을 들으면 놓아주지."
 
256
"소리를 치고 지랄하면?"
 
257
"제 아비의 사건을 들어서 위협을 해놓지?…… 좀 건너가 보아라. 깨있으면 내가 이야기를 좀 해보아야겠다."
 
258
문 여는 소리가 나며 쿵쿵 마루를 걸어오는 소리가 들리었다. 영호는 얼핏전대로 쓰러져 죽은 듯이 누웠다.
 
259
문을 열고 굽어다보는 듯하더니 도로 안방으로 건너간다.
 
260
"아직 안 깨어났어요."
 
261
"지금 멫신데?…… 세시니까 두 시간이나 되잖었니?"
 
262
"아까 약을 또 썼지요. 깨나서 지랄을 칠까 봐서."
 
263
이야기 소리는 잠깐 그쳤다가 서광옥이가 다시 묻는다.
 
264
"너 참 오늘 가보니까 그년 어떻드냐?"
 
265
"명칠이 말이 차차 풀이 죽어간다고 그래요…… 워너니 제가 들어가도 전 같으면 지랄을 하고 그럴 텐데 본체만체하든걸요…… 그러고 입을 꽉 다물고는…… 아이구 그런 독종!"
 
266
"거 안되었다…… 연해 지랄을 하고 날뛰고 해야 안심하고 거기다가 두어 둘 텐데, 그렇게 풀이 죽어서야 오래 두었다가는 놓치기 쉽겠다…… 메 칠 후에 도로 데려올 셈 치고…… 명칠이 녀석이 감시나 잘 하고 있드냐?"
 
267
"그럼요. 그저 문앞에 가 꼭 붙어앉어서 일시도 안 떠나는 모양이야요."
 
268
영호는 도로 일어나 앉아 그들의 하는 이야기를 들으면서 혼자 연해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리고 잡혀온 것도 그렇게 여러 날 된 것이 아니라 두 시간 밖에 아니 된 것을 알았다.
 
269
어서 어떻게 해서든지 이곳을 벗어만 나자. 무엇보다도 학희를 구 해내야지.
 
270
그는 다시 한번 묶인 팔목에 힘을 주고 기운을 써보았다.
 
271
그러나 살만 아팠지 역시 꿈쩍도 아니한다.
 
272
영호는 문제의 여자를 언제 만나도 만나야 할 것이니 어디 한번 대면해 보겠다고 생각하고 일부러 크게 '응’하는 신음소리를 쳤다.
 
273
그러자 문소리가 나며 다시 방문이 열리더니 광식이가 앞서고 광옥이가 뒤를 서서 들어온다. 방금 피워 문 해태가 그의 손가락 사이에서 연기를 가늘게 올리고 있다.
 
274
광옥이는 앞으로 나서서 영호를 유심히 치어다보고 있더니
 
275
"아니 이건 누구를 붙잡어왔니?"
 
276
하고 첨에는 놀랐다가 되레 웃으며 광식을 돌아본다.
 
 
277
8
 
 
278
광옥은 광식이가 대답할 겨를도 없이 한걸음 더 나선다.
 
279
"원 참! 꿩 대신 닭이라더니, 이건 닭 대신 꿩이로구나! 호호호호 …… 아니 백선생 이게 웬일이시우?"
 
280
영호는 그래도 광옥이인만큼 눈이 매섭구나 생각하였다. 이판이니 영 호도 뱃심이나 부릴밖에 없다고 생각하고
 
281
"허허허허"
 
282
하며 한바탕 웃었다.
 
283
광식이는 눈이 둥그랬다가 비로소 알아채고는
 
284
"저런 망할 자식!"
 
285
하고 눈을 흘긴다.
 
286
"대관절 점잔지하에 이게 무슨 꼬락서니요!"
 
287
광옥은 연해 조롱하는 미소를 띄어가지고 영호를 놀리는 것이다.
 
288
언뜻 보면 스물대여섯이라고 보겠지만 그래도 중년에 걸친만큼 그의 몸은 난숙 하였다.
 
289
그러나 그 난숙함이 육감적으로 난숙된 것이 아니요, 고우면서도 칼날같이 매서운 그의 표정과 아울러 찬바람이 도는 듯한 것이다.
 
290
영호는 문득 광옥이가 어떻게 해서 자기의 얼굴을 그렇게 자세히 아나 싶어 놀랍기도 하고 궁금도 하였다. 그러나 그는 천연덕스럽게 대꾸를 해주었다.
 
291
"점잖은 사람이 진 날 개 사귄 셈만 대지요 …… 대관절 담배나 한대 주 구려! 이 집이 이렇게 인색하오?"
 
292
"아이고 참 깜박 잊었어 …… 이애 안방에 가서 담배 가져오느라 …… 그러고 닭을 잡으려다가 꿩을 잡었으니 인제는 닭마저 잡아와야지 …… 애들 데리고 가서 허가 부자를 다 붙잡어오느라."
 
293
광식은 문을 열고 나가고 영호는 너털웃음을 쳤다.
 
294
"서광옥이가 그래도 제법인 줄 알었더니 아직도 아둔하군! 내가 이렇게 나서면서 그 사람들을 그대로 두고 왔을까 봐?"
 
295
"흥! 그런 연극은 그만두어요."
 
296
그동안 광식은 해태갑을 들여놓고 밖에서 머뭇머뭇한다.
 
297
"어서 가봐라 …… 백선생님이 지금 꾀를 내셔서 그런 소리를 하신 걸 너는 곧이듣고 있니?"
 
298
광식은 문을 닫고 내려서다가 방을 향하여
 
299
"누구 하나 들여보내요?"
 
300
하고 묻는다.
 
301
"그만두어라 …… 조심해서 다녀오느라. 함부루 굴지 말구."
 
302
"네 …… 그렇지만 자식놈은 없을걸요."
 
303
"왜?"
 
304
"아까 망을 보니까 열두시 반에 자동차를 타고 나가드래요. 아마 돈 가지고 오는 체하고 어데로 피신을 한 게지요. 그녀석 백가가 시켜서 …… "
 
305
"좌우간 가봐라. 없으면 애비만 잡어 오려무나."
 
306
조금 있다가 사랑방인 듯한 데서 우세두세 소리가 들리며 대문 소리가 들리더니 도로 조용해진다.
 
307
영호는 속이 졸였다. 허철이가 아까 시킨 대로 피신을 했으면이거니와 만일 그렇지 아니했다면 큰 봉변을 하고 말 것이다.
 
308
광옥은 담배 한 개를 뽑아 영호의 입에 물리고 불까지 그어댄다.
 
309
"이렇게 귀한 손님을 결박을 지어놓고 대접해서 죄송합니다."
 
310
그는 영호의 얼굴을 꺄웃이 굽어다본다. 그의 눈에는 순전히 조롱만이 아닌 딴 무엇이 있음을 영호는 비로소 발견하였다. 그러나 그는 시치미를 뚝 떼고 담배를 꿀맛같이 쭉 들이빨면서 배포 유하게 대꾸를 하였다.
 
311
"천만에! 이런 데 붙잡혀 와서 결박도 아니 지우고 있을 반편 녀석이면 차라리 자살을 하겠소."
 
312
"호호호호 …… 참 그래! 우리 호걸남아 백영호씨가 아니면 그런 호기(豪氣) 도 내기 어려운 일이야."
 
313
"그럼 그렇잖고?…… 내가 지금 여기서 빠져나갈 방법이 없어서 이렇게 잡혀 앉인 줄 아우? 허허!…… 당신허구 당신 오랍동생 그리고 당신 부하 해서 모조리 데리고 갈 양으로 이러고 있는 줄을 모르고!"
 
314
"아이구 용용 …… 괜히 횃대 밑에 장담은 그만 해두어요."
 
315
실상 영호는 그들을 붙잡아가지고 간다는 것은 헛장담이나 지금 곧 이 곳을 빠져나갈 방법이 없지는 아니한 것이다.
 
316
단지 계집 하나만 믿고 사내들은 다 나가고 없으니, 사람 살리라고 소리나 몇번 지르면 행순하는 순사든지 동리 사람이든지 필시 달려오고 말 것이다.
 
317
'그러나 그렇게 되면 이 계집은 클로로포름으로 또 마취를 시키고 저는 달아날 것 ── 혹 피스톨 같은 것으로 쏠지도 모르지만.’
 
318
그러나 그래 가지고 자기 혼자만 남았다가 구조를 받으면 사건이 해결 되 기전에 경찰의 간섭을 받게 되겠으니 그것은 지금까지 지켜오던 것을 깨 트리고 말게 되는 것이다. 하물며 학희 부녀가 무슨 이유론지 그와 같이 사건을 경찰에 알리기 싫어한 것인데 섣불리 굴어서 그것이 되레 학희에게 무슨 중대한 누가 끼친다면 위문이 폐문될 터이니까.
 
 
319
9
 
 
320
"여보 백영호씨, 우리 타협합시다."
 
321
광옥은 지금까지의 조롱질하던 태도는 버리고 말을 고쳐 점잖게 수작을 붙인다.
 
322
"타협?"
 
323
하고 영호는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다.
 
324
"나는 싸우든 악당하고 타협은 할 줄 모르오."
 
325
"아따 그렇게 부룩송아지처럼 고집을 쓰지 말고 …… 자, 첫째 당신을 놓아줄 테니 당신은 우리 일에 간섭을 하지 말 것 …… 글쎄 왜 이해 없이 우리 일에 뛰어들어서 남을 방해하고 당신 위태한 고비를 겪고 그러시요?"
 
326
"그거야 이해를 목표로 일하는 사람도 있고, 이해를 초월해서 일하는 사람도 있고 사람 나름이지."
 
327
"흥! 당신도 이해를 순전히 초월한 것은 아니든데요 …… 학희가 욕심 이나서 그러지?"
 
328
영호는 할 수 없이 허허허허 하고 웃었다. 그건 그렇다. 그것으로 보면 순전히 이해를 초월했다고 크게 장담하기도 어려운 것이다.
 
329
"거봐요 글쎄 …… 그러니까 당신이 필요한 학희도 내어줄 테니 그 조건으로는 유대설의 짐 속에서 찾아낸 그 암호문서를 우리를 주어요 …… 그것은 당신이 가졌지 않었으면 학희가 가졌을 테니까 …… "
 
330
"내가 가진 줄은?…… 익선동 노파의 집을 습격했구려?"
 
331
"좀 늦어서 당신한테 그 짐을 다 뺏겼소."
 
332
영호는 그 짐 속에 암호문서가 없더라고 하려다가 그러면 학희가 가진 것이 분명하다고 생각하고 학희를 더 괴롭게 할 것을 알았다. 그리하여 자기가 가졌다거나 아니 가졌다거나 분명한 눈치를 보이지 아니하였다.
 
333
그러나저러나 간에 영호는 타협도 하고는 싶었다. 그러나 지금의 타협은 붙잡혀와 가지고 묶여 앉아서 하는 타협이니 그것은 타협이 아니라 굴복이다.
 
334
굴복은 영호의 자존심이 허락치 아니한다.
 
335
또 임시방편으로 우선 이곳을 벗어나기 위하여 타협을 할 수가 있기는 하나 그런다면 이 조그마한 계집의 웃음거리가 될 터이니 그리하기도 싫었다.
 
336
더구나 암호문서와 학희와 교환하자는 것은 그렇게 하면 일후에 학희의 원망을 살 것이매 더구나 할 수 없는 일이다.
 
337
"그러니 자, 어쩔 테요? 두 가지 조건을 가지고 타협을 하겠소? 아니하겠소? 자 좀더 자세하게 이야기할 테니 들어봐요…… 지금 당신은 바로 가서 그 암호문서를 가지고 다시 와요. 그러면 우리는 그것을 가지고 한 삼사 일 동안에 일을 다 끝낸 뒤에 학희를 털끝 하나 건드리지 않고 당신 집으로 데려다 줄 테니 …… 그렇지만 당신이 여기서 놓여나가서 암호문서를 가져오지 아니한다든지, 또 암호문서를 가져왔다더래도 다시 우리 일을 간섭하 거나 학희를 구해내려고 서둘면 그저 당장에 학희의 왼편 젖가슴 밑으로 피스톨 탄환이 뚫고 들어가요."
 
338
더구나 아니 될 말이다. 악당과의 타협인지라 저편에서 조건 이행을 해줄는지 아니 해줄는지도 모르는데, 더구나 불리한 조건으로는 영영 안될 말이다. 영호는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다.
 
339
"좀더 싸워봅시다."
 
340
이 말에 광옥은 잠시 눈을 매섭게 뜨고 영호를 노려본다. 그러다가 다시 풀어져 가지고는 영호의 귀를 잡아 쌀쌀 내두르며 어린애를 놀리듯이
 
341
"아이고 요 깍정아! 아이고 요 고집불통아 …… 그렇거든 좀 견데봐."
 
342
하고는 몸을 돌려 밖으로 나가려 한다.
 
343
"여보 담배나 한대 더 붙여주고 가구려."
 
344
영호의 이 말에 광옥은 해뜩 돌아보더니 허리를 굽혀 얼굴을 가까이 대고 꺄웃이 굽어다본다.
 
345
영호는 굽어다보는 그의 가느다랗게 웃는 눈에는 요염한 추파가 가득 넘쳐 흐른다.
 
346
"고거 귀엽다 …… 생긴 거랑 하는 짓이 …… 그래 담배 붙여 주께 응."
 
347
그는 담배를 뽑아 우선 자기의 입에 물고 불을 붙이더니 두어 모금 쪽쪽 빨고 나서 그 끝을 영호의 입에다 대어준다.
 
348
영호는 속으로, 이게 어쩔 양으로 이러나? 상해에서 오른 매독균이나 없나하면서 입을 내어밀려니까 담배 대신 광옥이의 입술이 와서 쪽 소리를 내며 맞춰진다.
 
 
349
10
 
 
350
영호가 멍하니 치어다보고만 있는 것을 보고 광옥이는 자지러지게 한번 웃어 댄다.
 
351
"왜? 싫어?…… 흐흥? 좋거든 거저 좋다고 그래 …… 자 인제는 정말 담배."
 
352
그는 담배를 다시 두어 번 빨고는 영호의 입에 물리어 준다.
 
353
"인제는 미인계를 쓰나? 하다하다 못하니까 …… "
 
354
영호는 심술궂게 웃으면서 조롱을 해주었다.
 
355
"미인계? 그래 미인계로 알겠지 …… 그렇지만 실상은 조꼼 반했다."
 
356
"흥!"
 
357
"괜히 황공감사하잖고…… 이래 보여도 상해서 가진각색 나라 놈들을 수백 명 간을 녹여주든 서광옥이다. 그런 서광옥이한테 귀염받는 것을 영광으로 알어."
 
358
"그런 영광은 제발 싫으니 어서 건너가우."
 
359
"흥! 저게 아직도 숫총각이 돼서 저래!…… 이렇게 만나잖고 좀 일짝 기상해서나 만났으면 한동안 재미있게 놀았을걸…… 섭섭하네…… 그렇지만 정말이지 조꼼 반했어…… "
 
360
말뿐이 아니라 그의 눈에는 사실로 적막한 그림자가 스치는 것을 영호는 보았다. 그것을 보고 또 그의 요염한 자색을 보니, 영호는 아까부터 그에게서 발산하는 위압적 매력에 소리없이 끌리는 것 같은 느낌을 깨달았다.
 
361
"내 인제 당신이 내 손에 걸리면 자살할 기회나 주리다."
 
362
영호는 이러한 말을 하였다. 그러니까 광옥은 웃지도 아니하고 그렇다고 노한 것도 아니요, 영호를 꼭 바라보다가 문을 홱 여닫고 안방으로 콩콩 건너가 버렸다.
 
363
허철의 집을 습격간 일행이 떠난 지 한 시간은 다 못되고 삼사십 분은 넘었음 직한 때에 그들은 돌아왔다.
 
364
"저 망할 자식을! 그거 참! 죽여도 아니 죽고 저걸 어떻게 해!"
 
365
광식이가 성난 소리로 두덜거리며 안방으로 들어간다.
 
366
"왜?"
 
367
하고 광옥이가 묻는다.
 
368
"아비 자식이 다 달어나고 없어요."
 
369
"두어두어라 …… 저이가 가면 하날로 올라갔겠니 땅으로 파고 들어갔겠니 …… 위선 여기 일이나 끝내고 차차 착수하지?"
 
370
"저 자식 잠자코 있어요?"
 
371
"응 …… 나는 갈 테니 늬이도 어서 자고 건넌방에 이부자리나 하나 갖다주어라."
 
372
"이부자리요? 있어도 뺏어버릴 텐데 갖다 주어요?"
 
373
"시키는 대로 해라. 나는 다 요량이 있어서 그러니 …… 인력거 불러오라고 그래라."
 
374
조금 있더니 광옥이는 밖으로 나가는 기척이 들리고 광식이가 이부자리 한 벌을 홱 들이뜨려 준다. 그의 눈은 영호를 금시 잡아먹을 듯이 사나왔다.
 
375
그러나 영호는 허철 부자가 무사히 피신한 것만 속으로 기뻤다.
 
376
팔다리를 꼭꼭 묶인지라 큰 노력을 들여 겨우 요 위에 누워 이불을 끌어 덮었다. 팔이 뒤로 눌리어 여간 아프고 괴로운 게 아니다.
 
377
광옥이의 정말 거처하는 데는 어딘가? 집에서는 별일이나 없는가? 이런 생각을 하면서 그대로 배포 유하게 잠이 들었다.
 
378
이튿날 아침 느직이 잠이 깨었다.
 
379
집안이 조용한 것이 아직도 모두들 잠을 자는 모양이다.
 
380
도회지의 소음도 아득하고 한 것이 아마 중심지대에서 꽤 멀리 떨어져있는 곳인 듯하였다.
 
381
영호는 방향을 짐작하려고 연해 귀를 기울였다.
 
382
자동차 소리는 도무지 들리지 아니한다.
 
383
외딴집인지 이웃에서도 소리가 들려오지 아니한다.
 
384
일어서서 바깥을 내어다보고 싶으나 앞은 덧문을 닫아놓았기 때문에 어두컴컴할 뿐이다.
 
385
오정때나 되었음직해서 겨우 설렁탕 한 그릇을 얻어먹었다. 그대로 묶이어 앉아 떠넣어 주는 것을 어린애처럼 받아먹었다. 소변도 요강을 가져다가 보여준다.
 
386
밥을 먹여주고 몸시중 드는 친구를 보니 악당의 수하 치고는 그래도 나이진 득 한 데 다가 조금은 인정도 있어보인다.
 
387
그렁저렁 해를 지우고 또다시 설렁탕 한 그릇 신세를 졌다. 간에도 차지아니한다.
 
388
담배는 시중 드는 친구가 노상 붙어 있는 바 아니요, 앞에 두어두고 못 먹으니 더욱 먹고가 싶다. 어서 광옥이나 왔으면 먹을 것도 더 좀 청해 먹고 담배도 연해 피우겠는데 하며 기다리노라니까 날이 깜박 저문 뒤에 비로소 밖에서 그의 목소리가 들리었다.
【원문】11. 실족(失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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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염마 [제목]
 
  채만식(蔡萬植) [저자]
 
  조선 일보(朝鮮日報) [출처]
 
  1934년 [발표]
 
  소설(小說) [분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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