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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염마(艶魔) ◈
◇ 12. 염마(艶魔) ◇
카탈로그   목차 (총 : 15권)     이전 12권 다음
1934.5.16~11
채만식
1
艶 魔[염마]
2
12. 艶 魔[염마
 
 
3
1
 
 
4
"밤새 안녕하십니까?"
 
5
광옥은 들어오면서 웃는 낯으로 인사를 깍듯이 한다.
 
6
"못 안녕했수."
 
7
영호는 일부러 불평스럽게 대답을 하였다.
 
8
"왜? 저걸 어째!"
 
9
"팔을 뒤로 묶었으니 어데 안녕하겠소?"
 
10
"원 저런!…… 그러니까 어제 저녁에 내 말을 들었으면 그런 고생 아니하고 집에 가서 편안히 잤지!"
 
11
"여보, 그러지 말고 이것 좀 앞으로 묶어주고 또 무엇 먹을 것도 좀 사다주구려! 왼종일 설렁탕 두 그릇만 얻어먹으니 눈에 거적 쓴 놈이 보이는구려!…… 그리고 위선 담배 좀 한 개 붙여주고…… "
 
12
광옥은 까막까막 생각하다가 영호의 청을 다 들어주었다. 광식이더러 수하 두 엇을 데리고 들어오게 하여 영호의 뒷결박을 풀어 앞으로 묶었다. 그동안에 자기는 영호의 머리에 피스톨을 겨누고 있었다.
 
13
앞으로 묶인 영호는 팔이 좀 덜 아프기는 하나 부자유롭기는 매일반인 것이 팔목을 묶어가지고는 남은 포승 끝으로 허리를 동였기 때문에 두손이 배에 가 착 달라붙어서 꼼짝도 하지 못한다. 묶인 것을 입으로 물어떼지 못 하게 하자는 것이다.
 
14
광옥은 밖으로 나가는 수하더러 런치를 시켜오라고 이르고 담배를 붙여 영호에게 물려준다.
 
15
"좀 편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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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고맙소."
 
17
"그런데 오늘 저녁에도 미안하지만 당신네 집 가택수사를 좀 해야겠소."
 
18
"아무려나…… 그렇지만 우리 집 가택수사를 하자면 군대로도 일 중대쯤은 있어야 할걸…… "
 
19
"또 희떠운 소리!"
 
20
"정말이야…… 내가 언제 거짓말합디까?"
 
21
이렇게 뱃심 좋게 말은 하나 영호는 속이 불안도 하였다. 나올 때에 당부는 잘했지만 곰 같은 미련퉁이 김서방과 아직 몸이 성치 못한 오복이와 약한 상준이가 잘못해서 실수를 하면 어떡하나 싶었다.
 
22
"당신 집에 편지 한 장 쓰시요."
 
23
"무슨 편지?"
 
24
"편지 가지고 가는 사람에게 집안을 다 보여주라고…… "
 
25
"승겁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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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쓸 테야?"
 
27
"다시 물을 것 무어야?"
 
28
"아니 너는 목숨 아까운 줄도 모르느냐?"
 
29
광옥의 얼굴은 칼날 같았다. 꽉 다문 입이며 독기 있는 눈, 서리가 어린듯 한 날씬한 콧날…… 방금 무슨 거조를 낼 것 같다.
 
30
"그러나 죽인대도 아직은 못 죽일걸?"
 
31
영호는 눈도 까딱 아니하고 싱긋이 웃으면서 말을 한다.
 
32
"왜? 왜 못 죽여?"
 
33
"암호서류 한쪽이 내게 있는지도 모르니까."
 
34
광옥이는 조금 얼굴이 풀려가지고
 
35
"죽이지는 않지만 죽잖을 정도에서 모진 고통을 주어도?"
 
36
하고 묻는다.
 
37
"그런 것쯤이야…… "
 
38
영호의 입술에서 거진 다 탄 담배를 광옥은 무심결에 가져다가 담배곽 위에 비벼 끈다.
 
39
광옥은 무엇을 생각하느라고 잠잠히 있다가 안방으로 건너가더니 무어라고 한참이나 소곤소곤 이야기를 한다.
 
40
영호는 어떻게 해서든지 오늘 저녁은 이 구혈을 벗어나야겠다고 생각 하였다. 만일 가택수사를 그대로 당하였다가는 지하실에 손이 미칠지도 모르고 또 학희를 딴 데로 옮겨버릴지도 모르니까.
 
41
영호는 고개를 숙이고 팔에 힘을 주어 끌어올려 보았다. 잘하면 입이 닿아질 수도 있을 듯하다. 그러나 그보다도 감시의 눈이다. 문을 겉으로 잠그지아니하는 것은 다행이나 수십 개 되는 눈은 피할 수가 없는 것이다.
 
42
"지금 멫시요?"
 
43
영호는 외쳤다.
 
44
"저 망할 위인이!"
 
45
광옥이는 낮은 소리로 나무라며 건너왔다.
 
46
"시간은 왜 물어?"
 
47
"궁금해서."
 
48
"여덟시 오십분."
 
49
광옥은 팔시계를 굽어다보며 순순히 가르쳐 준다.
 
50
그러면 네 시간이나 다섯 시간 안에는 이곳을 빠져나가야 한다. 이 무리들이 집을 습격하기 전이라야지 그렇잖으면 소 잃고 외양간 고치기다.
 
51
"여기 있는 당신 수하가 통 몇이나 되우?"
 
52
"그건 왜?"
 
53
"내가 빠져나갈 때 한주먹으로 때려잡겠나 못 잡겠나 알어두어야지."
 
54
영호는 웃지도 않고 이렇게 말을 하였다. 광옥은 영호의 등을 똑똑 두드린다.
 
 
55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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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옥은 연해 연호의 등을 두드리며
 
57
"도령님 우리 도령님, 인제는 제발 희떠운 소리 좀 그만 해두어요, 응…… 그리고 이른 말 좀 들어요."
 
58
하고 꺄웃이 얼굴을 굽어다본다.
 
59
"배고파 죽겠으니 어서 무어나 좀 먹여주구려!"
 
60
"딴청만 보네!"
 
61
"내게는 그것이 제일 큰 문젠걸…… "
 
62
"조곰만 더 참우, 곧 오겠지."
 
63
만일 말소리만 듣는다면 정다운 부부라고 하겠다.
 
64
"그런데 여보."
 
65
하고 영호는 문득 생각이 나서 물었다.
 
66
"유대설이하고 허준이하고 셋이 공모하고서 이재석이 재산 뺏는 이야기나 좀 해보구려?…… 그러고 그 뒤에 상해 가서 지나든 이야기랑…… "
 
67
"그거? 심심한데 옛이야기나 하까…… "
 
68
광옥이도 아주 쾌히 대답을 한다. 기실 영호는 어렴풋이 추측은 하였으나 확실히 그랬으리라고 단정은 못하고, 말하자면 넘겨짚어 물은 것인데 그것이 들어맞은 것이다.
 
69
광옥은 영호의 옆에 필요 이상으로 가까이 앉아 담배를 붙여 물고 영 호도 붙여주고 긴 이야기를 시작하였다.
 
70
지금으로부터 십육 년 전.──
 
71
음력으로 바로 정초다.
 
72
장소는 그때 어느 전문학교를 다니다가 작파하고 연애에 세마리가 팔려 번들번들 놀고 있는 유대설의 하숙방.
 
73
사람은 그 유대설이 외에 당시 서울 여학생 가운데 제일색이라는 영광을 가지고 그 전해 봄에 ××여학교를 졸업한 서광옥이.
 
74
두 사람 사이에 연애는 익을 대로 익었으나 한번 재미있게 지낼 동력(動力) 즉 돈이 없어 늘 걱정을 하던 터이다.
 
75
유대설은 며칠 전에 강화로 내려가 그의 이종 되는 이재석이에게서 돈을 조금 얻어가지고 와서는 밀린 하숙밥 값도 치르고 둘이서 용돈도 쓰고 하던 나머지다. 그러나 그것이 그렇게 오래 가란 법은 없다. 미구에 포켓 속이 싸늘해질 날이 닥쳐오게 된 것이다.
 
76
여러 날 두고 혼자 누웠을 때면 이 궁리 저 궁리 하던 대설은 오늘밤에 드디어 입을 열었다.
 
77
"여보!"
 
78
하고 은근성 있게 광옥을 불렀다.
 
79
"응?"
 
80
광옥이도 무슨 궁리를 하는지 개켜놓은 이부자리에 비스듬히 누워 한 눈을 팔고 있다.
 
81
"당신 시집 아니 가려우?"
 
82
"머요?"
 
83
광옥은 비로소 고개를 돌리면서 대설이가 무슨 표정으로 있는지 그것부터 여 살펴본다.
 
84
"시집 아니 갈 테냔 말이야?"
 
85
"무슨 잠꼬대를 하는지 모르겠네!"
 
86
"잠꼬대는 왜?"
 
87
"그럼 어떻게 하는 소리야? 싫어졌거든 거저 싫어졌다고 하지 무슨 승거운 수작이야!"
 
88
광옥이는 벌떡 일어나 앉으며 이렇게 다긏는다. 그때나 지금이나 변함 없는 그 의 매서운 눈으로 대설을 쏘아보며.
 
89
"허허허허."
 
90
하고 대설이는 넉살좋게 웃는다.
 
91
"아직 채 이야기도 듣잖고 저렇게 성낼 건 무어야?"
 
92
"듣고말고 간에 날더러 시집을 가라면 벌써 알조지 무얼 그래?"
 
93
"원 그렇게 호둑호둑 튀지 말고 이야기를 들어보아요…… 글쎄 여보 우리가 같이 재미있게 지내자면 돈이 있어야 아니하오?"
 
94
"그건 언제부터 하는 소린데 지금 다시 뇌어서는 무얼 해요? 그보담 당신이 어데 가서 돈을 듬뿍 좀 가져와야 할 것이지."
 
95
"내야 가져올 재주만 있다면야 왜 주저를 하겠소만, 보구려 강화 있는 내 이 종이 내가 가서 조르면 마지 못해서 준다는 게 겨우 돈 백 원씩 이 구려…… 그것 가지고야 시장해서 견디겠소?"
 
96
"그래서?"
 
97
"그런데 말이야…… 강화 그 양반이 상처했다고 그러잖아? 그런데 이번에 내려가서 눈치를 보니까 슬그머니 장가를 또 들고 싶은 모양이야."
 
98
"나이 멫인데?"
 
99
"지금 서른넷인지 그렇지 아마."
 
100
"재취장가 들려고 할 만도 하구만…… "
 
101
"그런데 말이야, 그 꼴에 예수쟁이가 돼서 듣고 본 건 있겠다 여학생한테 맘이 있는 모양이거든…… 응 알었어?"
 
102
"전처소생은 없나?"
 
103
"세살 먹은 계집애 하나가 노상 빽빽 울고 있지."
 
104
나물 날 곳은 첫이월부터 안다고 대설이가 두어 마디 한 말을 가지고 그는 벌써 계획을 세우느라고 그렇게 척척 내용을 묻는 것이다.
 
 
105
3
 
 
106
"그러니 말이야."
 
107
하고 대설은 인제 정말 본제로 들어간다.
 
108
"당신이 가서 일 년만 눈을 질끈 감고 이재석이 안해 노릇을 하구려, 응?"
 
109
웬만한 여자 같으면 가령 거절을 아니한다 하더라도 조금의 주저는 있었을것이다. 그러나 그때부터 ── 아니 그 전부터 ── 서광옥이에게는 그런 것은 길바닥에 굴러져 있는 바둑돌 하나만큼도 거리낌이 아니 된다.
 
110
"그래 볼까?"
 
111
그는 대번 이렇게 대답을 하되 눈 하나 깜박하지 아니한다.
 
112
"그래 그렇게 가기는 간다고 하고…… 돈은 어떻게 긁어내야 할꼬?"
 
113
인제는 벌써 돈 긁어낼 제이단의 문제로 들어갔다. 그러나 광옥은 그 의견을 대설에게 묻는 것이 아니다. 말만 해놓고 눈을 까막까막하며 천장을 올려다보고 누워 있는 그의 머릿속에는 장차에 해나갈 일의 윤곽이 들어서는것이다.
 
114
"그러면 당신은 그동안 어떻게 할려우?"
 
115
"나? 나야 지금도 내려가는마다 그 샌님이 자기 집에 와서 있으라고 조르는 터이니 핑계삼어 잘되였지."
 
116
"흥! 애인을 데리고 시집을 간다! 재미있어…… "
 
117
"그렇지만 거기 정말 미쳐서 되려 나를 오쟁이를 지어서는 안되네."
 
118
"그거야 그때 가서 보아야 알지."
 
119
이튿날로 대설은 강화로 내려갔다.
 
120
이재석은 벌써 이 사람이 돈을 또 청하러 왔나보다고 못마땅하게 생각 하였으나 한편 가까운 친척도 없는 터에 이렇게나마 찾아오는 그가 반갑지 아니한 것도 아니었다.
 
121
저녁상을 마주 받고 앉아서
 
122
"형님, 참 아직 저렇게 젊기도 하시고 또 학희도 거두시고 하자면 어데 마땅한 데 규수를 좀 간택해 보시지요."
 
123
대설은 우선 이렇게 수작을 붙였다.
 
124
"글쎄…… 나이 머 사십이 다 되었는데 혼자 지낸들 어쩌리만 저년 때문에 거 걱정일세."
 
125
기실 전전에도 이러한 의미의 말로 이종에게 장가가고 싶다는 눈치를 보였던 것이다. 그러고 여학생들의 거동과 몸맵시를 칭찬하였고, 또 우리 조선가 정도 개량을 하자면 학식 있는 주부가 들어와야 한다는 것을 역설 하였던것이다.
 
126
"실상은…… "
 
127
하고 대설은 파고들어갔다.
 
128
"제가 있는 집주인이 말을 하는데 아주 마땅한 규수가 하나 있으니 어데중매를 서라고 그래요."
 
129
"응."
 
130
"양사골 사는 서씨집 맏딸인데 집안이 그다지 넉넉치는 못하지만 양반의 후예라 가도가 있고…… 또 규수가 서울서 손꼽는 미색이래요."
 
131
"응 응."
 
132
이번에는 응 소리가 두 번이 거푸 나온다. 대단 맘이 당긴다는 뜻이다.
 
133
"그런데 또 금상첨화로 작년 봄에 ××여학교를 아주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 했지요."
 
134
"흐흥! 나이는?"
 
135
"열아홉이라는가 봐요."
 
136
"이 사람아, 그렇게 아직 어리고 또 도저한 규수가 우리 같은 노 신랑한테로 올랴고 하겠나?"
 
137
너무 입에 맞는 떡이니 한번 겸사말로 다지어보는 것도 사람의 상정이다.
 
138
이렇게 되고 나면 그야말로 만사 OK이다. 하기야 그때는 OK란 말은 없었지만.
 
139
강화서 우선 서울로 매파가 갔다.
 
140
서울서 다시 선을 보러 강화로 내려갔다.
 
141
한편은 서울서 손꼽는 여학교 졸업생의 미인이요(그때쯤만도 여학교 졸업생이면 당당했으니까) 한편이 강화의 오십만 원짜리 젊은 부자니 어디 탈잡을 곳이 없는 것이다.
 
142
하물며 신부 될 규수가 일언지하에 OK니까.──
 
143
신식 결혼을 돈은 많이 들여서 아주 단출하게 거행하였다. (들러리의 한 사람은 유대설이가 섰고!) 노신랑의 입은 다물어질 사이가 없이 벙실벙실 하였다.
 
144
어여쁜 신부는 새신랑과 한가지로 애인을 데리고 강화로 내려갔다.
 
145
이재석의 귀염이 광옥의 몸을 칭칭 감고도 땅에까지 흘러내렸다.
 
146
광옥은 정은 아직 옛애인에게 있다 하더라도 새 남편에게 또한 은근히 하기를 잊지 아니하였다.
 
147
좋은 팔자다. 한 집에서 두 남편을 거느리고 그러고도 귀염과 사랑 속에서 파묻혀 지내니 부러운 팔자다.
 
 
148
4
 
 
149
광옥이에게 완전히 사로잡힌 이재석은 그를 사랑하는 것과 정비례하여 그의 대한 신임도 도타와갔다.
 
150
재석이가 광옥이를 신임하게 되는 것은 거기에 광옥이의 수단이 물론 가미 되었다.
 
151
그리하여 집안 살림은 물론이거니와 재산에 대한 비밀이며 토 지문권이나 인감 낸 실인(實印)이며 예금통장 같은 것을 전부 광옥이가 맡아가지고 있게 되었다.
 
152
은행에서 돈을 찾아올 일이 있다거나 또 예금을 할 때에는 광옥이가 서울까지 올라가곤 하였다.
 
153
처음에는 재석이도 나이 어린 안해에게 그런 일을 맡기는 것이 안심이 되지 아니하였으나 한번 두번 시켜보매 도리어 자기보다도 민첩하고 영민 하게 해내므로 그 뒤로는 그저 덮어놓고 일체를 맡기게 되었다.
 
154
그리하는 동안에 유대설은 죽은 듯이 사랑방 구석에서 식객 노릇을 하였다.
 
155
물론 한 일 주일 만이고 보름 만이고 한번씩 돌아오는 안방 문례의 기회가 있기는 하였으나 인간이 본시 내숭한데다가 광옥이의 민첩한 재주로 해서 누구 하나에게도 눈치 채임이 없이 애초에 두 사람이 약속한 일 년을 지냈다.
 
156
그러나 그와 같이 뱃심 유하게 그리고 죽은 듯이 기회를 기다리는 유대 설에게도 은근히 근심이 없는 것은 아니었었다.
 
157
광옥이가 아직도 정이 있어하기는 하지만 과연 그가 애초의 계획을 실행 할는지?
 
158
나이로 보면 자기가 재석이보다는 젊고 또 그새까지 정두어 지내던 터이다.
 
159
그러나 지금 와서 재석이가 그다지도 깊이 광옥이를 사랑하지 아니하는가?
 
160
거기에 마음이 쏠려서 그대로 주저앉아 버린다면 오쟁이는 대설이 혼자서 지게 될 것이다.
 
161
더구나 재석이의 전처 몸에서는 학희란 계집애 하나가 있을 뿐이니 광옥이가 옥동자 하나 낳아놓으면 싫어도 붙잡히기가 쉽고, 또 붙잡히더라도 장차에 재석이의 크나큰 재산이 광옥이와 그 아들의 것이 될 것이니 광옥이가 굳이 악착한 짓을 하려 들지 아니할지도 모르는 것이다.
 
162
광옥이가 강화로 시집온 지 일 년이 되고 두어 달이 더 지나간 오월 달…… 어느 날 밤.
 
163
재석이는 대수롭잖은 병으로 이삼일째 사랑에 누워 있고 안방에서는 광옥이와 대설이가 만났다.
 
164
불을 줄인 어두운 방.
 
165
"여보 어떻게 할 테요?!"
 
166
대설은 광옥이의 귀에 이렇게 속삭였다.
 
167
"무얼 어떻게 해?"
 
168
역시 속삭이는 소리로 광옥이가 되묻는 것이다.
 
169
"무어라니?…… 인제는 일 년이 넘잖았수?"
 
170
"그런데?"
 
171
"참! 답답해 죽겠네…… 우리가 약속한 것을 어떻게 할 테냔 말이야?"
 
172
"응 그거…… 그거야 그때 그러잖었어? 두고 보아야 한다고…… "
 
173
만일 그때에 광옥이의 얼굴을 볼 수가 있다면 그의 얼굴에는 심술궂은 미소가 떠올라 있음을 발견하였을 것이다.
 
174
"머 어째?"
 
175
이렇게 묻는 대설의 목소리는 조금 높고 거칠었다. 그들이 처음 이 계획을 세울 때에 시집가는 새 남편에게 정말 미쳐서 자기를 오쟁이지우지 말라고하니까 광옥이 말이, 그거야 그때 가서 보아야지 하고 농담삼아 대답 하던것을 생각하였다.
 
176
그리고 그는 다시 요즈음 자기가 혼자서 근심하던 일이 정말 사실로 나타남을 깨달았다. 그리하여 그는 앞에 아득하여지며 악이 받치려 한 것이다.
 
177
"쉬, 어쩌자고 그렇게 큰소리를 내요?"
 
178
광옥이는 대설의 알너벅다리를 꼬집는 것이다.
 
179
"큰소리고 말고 간에 실컨 약속을 해놓고 지금 와서 나를 오쟁이를 지 울 양으로 그래?"
 
180
"오쟁이는 누가 오쟁이를 지워?…… 이렇게 가끔 만나고 또 의식에 그립잖고…… 그 밖에 무엇이 부족하단 말이요? 한평생 이렇게 지나가면 좋잖소?"
 
181
대설이에게는 들을수록 골이 오르는 말이다.
 
182
이미 이 계집이 그와 같이 마음을 먹었다면 그것은 그야말로 계집 뺏기고 먹으려던 돈도 못 먹고 하는 것이다.
 
183
그것을 그대로 두고 말아?!
 
 
184
5
 
 
185
못먹는 감 찔러나 보더라고 기왕에 돈 좀 먹으려다가 계집 뺏기고 돈도 못 먹고 했으니 방해나 놀겠다는 것이 그 뒤에 일어나는 대설의 심사다.
 
186
"정 그럴 테야?"
 
187
대설은 한번 다지어 물었다.
 
188
"그래? 그러면 어쩔 테야?"
 
189
"흥! 나는 기왕 돈 좀 먹으려다가 계집까지 뺏긴 놈이니까 이 위에는 밑 져야 본전이라 너하고 나하고 주고받던 편지나 몇 장 봉투에 넣고 그러고이 계획 꾸미든 사연이나 적어서 우체통에 집어넣고 나는 상해나 만주로 뛰면 그만이다…… 그렇게 되면 누구 신세가 가관일걸…… "
 
190
이 말이 끝나자 잠깐 잠잠하더니 해해해해 하고 숨을 죽여 웃는 소리가 들린다. 그러고는 다시 한번 대설의 너벅다리를 꼬집는다.
 
191
그 웃음과 이 동작으로, 그러면 광옥이가 지금까지 한 말은 자기를 놀라게하느라고 한 장난임을 깨달았다.
 
192
"사내가 어쩌면 그렇게 자발적게 굴어?"
 
193
"자발적고 말고 간에 그렇게 말하는데 그럼 누구는 골이 아니 날까?"
 
194
"나를 그렇게 못 믿었소?"
 
195
"못 믿지야 아니했지만…… "
 
196
"그럼 왜 그랬어?"
 
197
"날더러 왜 그랬느냐지만 글쎄 방금 한 말을 생각해보아…… "
 
198
"아이구! 글쎄 어쩌나 보느라고 장난으로 그런 것을 이 위인이 그저 겁 이나서…… "
 
199
그러나 실상 광옥이는 장난으로 그런 것도 진심으로 그런 것도 아니었었다.
 
200
그는 이미 큼직한 계획이 뱃속에 서리고 있었고 실행할 날을 바로 앞에 두고 있었다.
 
201
그런데 그는 대설이를 떼어버리고 싶었다.
 
202
대설이쯤은 인제는 그의 눈에 좋은 상대자가 되지 못하였다.
 
203
더구나 큰돈을 짊어지고 외국으로 가자면 좀더 변변하고 좀더 그럴 듯 한 남자가 필요하였던 것이다.
 
204
돈을 듬씬 가지고 나서면 광옥이의 인물이 또한 인물인지라 그러한 사내를 구해 내기는 결코 어렵지 아니하리라는 자신을 가지고 있었다.
 
205
그러나 그렇게 하자면 우선 대설의 속을 떠보아야 할 것이다.
 
206
속을 떠보아서 만만하면 손끝의 밥풀처럼 톡 튕겨버리고, 그렇잖고 제법 버티면 우선 그대로 데리고 나서고 할 요량으로.──
 
207
그랬더니 아니나다를까! 황소같이 식식거리고 덤비지 아니하는가!
 
208
그리하여 그는 대설을 뗄 것을 우선 단념한 것이다.
 
209
"여보, 이렇게 추근추근하고 있을 게 아니라 위선 어떻게 돈이나 멫 만 원 몽똥거려 가지고 상해 같은 데로 뜁시다. 인제는 빠를수록 좋잖소?"
 
210
한동안 말이 없이 제가끔 제 생각에 잠겼다가 대설이가 이렇게 속삭거렸다.
 
211
그러나 광옥이의 입에서는 의외에는 끔찍한 대답이 흘러나왔다.
 
212
"요런! 사내가 배짱이 그따우로 좀스러워서 무엇에다 쓴단 말이요?…… 그래 고것 돈 멫만 원을 먹자고 이 짓을 했소?"
 
213
"그럼?"
 
214
"먹을 테면 그래도 멫십만 원 들어먹고 말 테면 말지…… 글쎄 그까짓 것돈 멫만 원을 가지고 외국으로 가서 메칠이나 산단 말이요?"
 
215
"하긴 그렇지만 그렇다고 그렇게 많이 먹어지나?"
 
216
"당신은 못먹어도 나는 먹어요."
 
217
"글쎄 먹을 수만 있다면 좋지만 그러다가 체하면…… "
 
218
"잔말 말고 당신은…… "
 
219
하고 광옥은 더욱 낮은 소리로 이리이리하라는 지시를 시켰다.
 
220
이튿날 광옥이는 친정에 급한 볼일이 있다고 어리광으로 병석의 남편 재석을 어루만져 놓고는 서울로 올라갔다.
 
221
어루만져 놓거나 묘한 핑계가 없더라도 의심할 재석이가 아닌지라 그는 아무 여념이 없이 그저 그가 속히 돌아오기만 당부하였다.
 
222
광옥이가 서울 친가에 간 지 사흘 만에 편지가 왔다.
 
223
무엇 무거운 짐을 가지고 내려가야 하겠는데 불편하니 누구 사람을 하나 보내주되 대설이가 좋을 듯하다는 것이었었다.
 
224
대설은 그날로 서울로 올라갔다.
 
225
무얼 이상한 것을 사가지고 오나? 하고 재석은 눈을 까막거리며 기다렸다.
 
 
226
6
 
 
227
광옥이의 이야기는 잠깐 중단이 되었다. 영호를 먹이려고 주문한 런치 가온 것이다.
 
228
포크와 칼로 반찬을 썰고 쏘스를 친 뒤에 광옥은 포크로 밥을 떠 들었다.
 
229
"아, 입 벌려."
 
230
영호는 입을 딱 벌리고 밥을 받아먹는다.
 
231
광옥은 반찬을 먹이기도 잊어버리고 갠소롬한 눈으로 영호의 받아 먹는 양을 자못 귀여운 듯이 바라본다.
 
232
"아이고! 고것 제비새끼 같다."
 
233
"그렇게 버릇없이 굴지 말고 어서 저 고기나 떠넣어 주구려."
 
234
"아이 참, 잊었어…… 자…… 팔자가 늘어졌구나!"
 
235
"누가 해달라는 것을 해주고 이런 공치하를 하오?…… 좌우간 멕여주면 서어서 그 담 이야기나 하오."
 
236
"재미있소?"
 
237
"응."
 
238
"그래도 명색이 탐정이래서 그런 이야기는 귀가 솔곳한가 봐. 가만 있어…… 이것 다 먹고 천천히 합시다. 두시까지는 여기 있을 테니까."
 
239
"그러고는 어데로 가오?"
 
240
"나 잠자는 데로…… 그런데 요새는 좀 조심해야지, 경찰서에서 활동이 심해서…… 글쎄 요 망나니만 아니었으면 벌써 일을 다 해가지고 지금쯤 상해로 가서 두 다리 쭉 뻗고 누웠을 텐데…… 그렇게 생각하면 죽여도 아깝잖다!"
 
241
"지금 멫시요?"
 
242
"왜 시간은 그렇게 자꼬만 물어?…… 아홉시 반."
 
243
영호는 시간이 갈수록 자꾸만 속이 졸였다. 그러나 이 위인이 두시까지 여기 있을 테라니 그때까지는 어떻게 변통할 도리가 없는 것이다.
 
244
런치를 얻어먹고 둘이서 담배를 하나씩 붙여 물고 그러고 나서 다시 광옥 이의 이야기는 계속되었다.
 
245
대설이가 서울로 올라왔을 때에는 광옥이는 일의 팔구분까지 진행을 시켜놓고 있었다.
 
246
광옥이는 미리부터 그때의 ××은행 지배인 허준이와 비밀히 일을 꾸몄던것이다.
 
247
즉 이재석이가 ××은행에 예금한 칠팔만 원의 현금은 물론이요, 그의 부동산 문권을 전부 은행에 잡혀가지고 도합 사십만 원 돈을 만들었다.
 
248
애초의 구약(口約)으로는 사십만 원 가운데 십만 원을 허준이가 먹기로 했는데, 급기야 일이 다 되고 나서는 이십만 원씩 반타작을 하자고 버티었다.
 
249
그리하여 부득이 사십만 원을 이십만 원씩 나누어 가지고 그 길로 광옥이와 대설은 상해를 향하여 떠나버렸다.
 
250
은행에서야 이재석이의 실인이 있고 또 위임장이 있는지라, 더구나 그 일을 지배인 허준이가 적극적으로 나서서 마련했으니 본인인 이재석이가 모르도록 비밀히 하기에 그다지 힘이 들지 아니한 것은 물론이요, 또 조금도 법에 어그러짐이 없었던 것이다.
 
251
한편 강화에서 무엇 무거운 물건을 가지고 오기를 눈이 빠지도록 기다리던 이재석은 일 주일 후에 서울로 올라왔다.
 
252
와서 처가에 가보니 벌써 강화로 내려갔다는 것이다.
 
253
대설이의 종적도 간 곳이 없다. 할 수 없이 집으로 내려가 조사해 보니 그때에 그는 돈 한푼 없이 거지가 되었음을 발견하였다.
 
254
더구나 비밀히 간수하여 두었던 암호서류까지도 없어진 것이다.
 
255
빼앗긴 원한은 크다. 하물며 재산도 재산이려니와 그다지도 극진히 사랑 하던 안해에게 그리고 먹여살린 이종 유대설이에게 그런 일을 당하고 보매 눈이 벌컥 뒤집힌다는 말쯤으로는 도저히 형용이 되지 아니한다.
 
256
일이 그리 되었으니 빼앗긴 것을 찾는다느니보다 복수할 생각이 앞을 섰다.
 
257
그는 나머지 집칸이나 있는 것을 팔고 이리저리 변통하여 몇천 원이 수중에 들어오자 바로 조선땅을 떠났다.
 
258
목표는 상해다.
 
259
학희는 어떻게 할까 하고 여러가지로 생각하였으나 첫째 조선 안에는 누구 마땅히 맡아서 길러줄 사람도 없고 또 떼어놓고 가기도 애처로와 유랑 생활에 불편할 줄 알았지만 그대로 데리고 나선 것이다.
 
260
상해에 이르러 얼마 아니 되어 재석은 그들 남녀가 확실히 상해에 있 음을 알았다.
 
261
그리하여 줄기차게 찾아다니던 결과 필경 원수의 남녀를 만나게 되었다.
 
262
생각한 바와 같이 그들은 둘이서 붙어살고 있었다.
 
 
263
7
 
 
264
광옥이가 강화서 그 남편의 토지문권을 금고 속으로부터 꺼낼 때에 그 토 지문권보다도 더 긴절하게 보관한 듯한 비밀문서를 그는 무엇인지는 모르나 상당한 조건이 붙은 것이라고 생각하고 같이 가지고 나왔던 것이다.
 
265
그리하여 상해로 온 뒤에 대설과 밤이면 가끔 그놈을 꺼내놓고 암호를 풀어 보려 애썼으나 아직 풀지 못한 터이었었다.
 
266
이날 밤도 두 남녀는 침실로 들어가기 전에 그 암호문서를 내어놓고 탁자 양편에 마주 앉아 고개를 꺄웃거리며 이야기를 하던 터인데, 그때에 도어가 소리 없이 열리며 들어선 것이 이재석이었었다.
 
267
재석은 그들의 처소를 염탐하여 가지고 밤 고요한 틈을 타서 그들이 침실에 들어 있으리라고 생각하고 들어온 것인데 아직 자지 아니하고 있는 것을 보자 그는 낭패하였다.
 
268
생각지 아니한 인기척에 고개를 들다가 재석이와 우선 시선이 마주친 것 이 대설이다.
 
269
그의 놀람은 여간 아니었었다.
 
270
얼굴이 대번에 백지장같이 하얗게 되고 암호문서를 쥔 손은 와들와들 떨리었다.
 
271
광옥이도 웬일인가 하고 돌아보다가 재석을 발견하였다.
 
272
제아무리 광옥이라도 처음은 놀라지 아니할 수가 없었다.
 
273
그러는 사이에 재석은 먼저 대설이에게로 달려들며 암호문서를 와락 채뜨렸다.
 
274
원수는 인제 찾아놓았고 더구나 앞으로 크게 소용이 될 암호문서가 눈에 띄었으니 그것부터 빼앗아 놓자는 것이다.
 
275
대설은 빼앗기지 아니하려고 손을 옴츠렸으나 그때에 암호문서의 뒤끝은 재석이의 손에 잡힌 때인지라 중간이 박 찢어지고 말았다.
 
276
그러나 이 마당에서는 암호문서가 큰 문제가 아니다. 혹시 재석은 그 가치를 아는 때문에 중대시할지 모르나 대설이쯤은 원수를 갚으러 나선 재석을 어떻게 해서든지 피하는 것이 무엇보다도 긴한 일이었었다.
 
277
그는 암호문서 한쪽을 찢긴 채 몸을 피하였다.
 
278
그때의 재석의 손에는 서리가 시퍼런 비수가 쥐어져 있었다.
 
279
피하여 가던 대설은 방구석에서 붙잡혔다.
 
280
재석의 내리지르는 비수를 피하고는 두 사람은 그대로 어우러져 방바닥에서 엎치락뒤치락 굴렀다.
 
281
한편 광옥은 처음 몇 초 동안 놀라 어찌할 줄 몰랐으나 그는 바로 정신을 수습 하였다.
 
282
싸움을 보니 대설에게 불리한 듯하였다. 아직 버티고 서로 한사코 싸우 나누구에게서 흘렀는지 피가 옷이며 방바닥에 시뻘겋게 번지었다.
 
283
싸움에 대설이가 진다는 것은 광옥이의 생명이 경각에 달린 것을 의미 하는것이다.
 
284
그는 나는 듯이 침실로 달려들어가 피스톨을 쥐고 나왔다.
 
285
"싸움 그만두고 일어서라."
 
286
날카로운 소리로 광옥은 외쳤다. 그의 손에 쥐어진 총부리는 재석의 머리를 겨누었다.
 
287
두 사람은 일어섰다. 광옥이의 총 겨냥은 여전히 재석의 머리를 겨누고 있다.
 
288
"이년!"
 
289
하고 눈에 살기를 가득 담은 재석은 꾸짖었다. 수만 마디로 하고 싶은 말이 가슴에 꽉 찼으나 그 밖에는 더 나오지 아니한 것이다.
 
290
"흥! 이년!"
 
291
광옥은 한번 싸늘하게 코웃음을 쳤다.
 
292
"댁 생명은 아뭏든 지금 내 수중에 있소. 웬만하면 쏘아 죽일 것이로되 그건 인정상 그만두는 것이니 돌아가오. 그렇지만 다시 추근추근하게 내 뒤를 쫓다가는 용서 아니하오."
 
293
광옥은 얼음장같이 차게 마치 검사가 논고를 하듯이 야멸치게 뒤를 눌렀다.
 
294
재석은 이를 보드득 갈았다. 그의 눈에서는 금시에 불이 튀어나올 듯 하였다.
 
295
재석은 천천히 도어를 향하여 걸어갔다.
 
296
그는 도어 앞에서 돌아섰다. 그때에 그는 비로소 자기의 왼편 손가락 하나가 없음을 발견하였다. 다시 한번 부서지라 하고 이를 부드득 갈았다.
 
297
"내가 오늘 밤에 피스톨을 준비 아니하고 온 것은 천추의 유한이다…… 그러나 날은 오늘뿐이 아니다. 두고 보자."
 
298
그는 이렇게 말을 남기고 밖으로 나갔다.
 
 
299
8
 
 
300
칼에 찔린 팔을 우디고 대설은 겨우 의자를 찾아 앉고 광옥은 피스톨을 손에 든 채 한동안이나 말이 없이 방 가운데 서서 있었다.
 
301
십 분이나 지난 뒤에 대설이가 생각이 나서 허둥지둥하였으나 암호 문서의 뒤끝은 보이지 아니하고 첫 꼭대기만 방바닥에 굴러져 있었다.
 
302
그러나 그때는 아직도 이십만 원에서 얼마 쓰지 아니한 큰 돈이 남아 있을 때 인지라 그다지 안타까이 여기지 아니하였다.
 
303
그날 밤으로 그들은 집을 옮기었다.
 
304
늘 뒤를 살피며 자주 집을 옮기고 그러는 동안에 일년 이태 삼년 사년 세월은 무사히 흘러갔다.
 
305
차차 맘을 놓고 살 수가 있게 되었다.
 
306
광옥이의 돈 쓰는 품은 일 년에 만 원을 가지고 부족하였다.
 
307
돈을 그렇게 쓸 뿐 아니라 그는 곧잘 외도를 하였다.
 
308
중국 사람 서양 사람 할 것 없이 캬바레나 그 밖에 환락경에서 만나던 맘에 든 사나이들을 불문곡직하고 데려다가 침대의 동무를 삼곤 하였다.
 
309
그럴 때면 대설은 딴 방에서 꼬불트리고 밤을 새우는 것이었었다.
 
310
처음에는 항의도 하고 강짜도 하였으나 나중에는 그것이 당연한 일인것처럼 대설은 본체만체하였다.
 
311
십 년이 지나갔다.
 
312
대설은 차차 늙어갔다. 광옥은 점점 젊어갔다. 그의 남자를 농락하는 수단은 날로 익어갔다.
 
313
그는 남자를 농락하되 결코 돈을 바라고 하는 것이 아니었었다. 되레 돈을 들여가면서 남자를 가지고 놀았다.
 
314
돈 많은 부자가 오입을 하고 다니는 것과 조금도 다름이 없었던 것이다.
 
315
아무 생각도 없이 있는 돈을 곶감 빼먹듯이 빼먹노라니 점점 줄기만 할밖에.
 
316
광옥이가 조선으로 돌아오기 얼마 전 즉 상해의 십오 년 생활의 결과는 이십만 원의 대금을 다 써버리고 겨우 돈 만 원쯤 예금통장에 남아 있을 때다.
 
317
돈이 이렇게 없어지매 대설에게 대한 광옥의 푸대접은 한층 더하였다.
 
318
그런데다가 또 우연히 상해로 굴러온 광옥의 오랍동생 광식이가 그들을 만나가지고는 그 역시 돈을 함부로 대고 쓰며, 또 이유없이 대설을 미워하는것이었었다.
 
319
어느 날.
 
320
광옥이가 침대에 누워 있노라니까 대설이가 탁자 옆에서 전에 없이 싱글벙글 웃고 있는 것이 눈에 띄었다.
 
321
"거 멀 그렇게 좋아하오?"
 
322
"응?…… 응…… 풀었어."
 
323
대설은 요즈음 몇 달 동안 한쪽 남은 암호문서에 매달려 골몰하는 줄을 광옥은 알았던 것이다.
 
324
그들은 돈이 차츰 말라가매 자연 구미가 암호문서로 당기어지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다.
 
325
"풀었어?"
 
326
광옥은 반가와 뛰어내려갔다.
 
327
"그러나 이 한쪽이 있어야지!"
 
328
"그때 뺏어 두었드라면!"
 
329
"글쎄 말이야!"
 
330
"작자는 그 뒤 어데로 갔을까?"
 
331
"글쎄…… 조선으로 돌아갔겠지. 제가 무슨 뾰족한 수가 있을라구…… "
 
332
"아뭏든 그놈 한쪽을 마저 뺏어야 할 텐데…… "
 
333
"저도 이놈 한쪽이 없으니까 아직 손은 대지 못했을 거야."
 
334
대관절 이게 재석이가 만들어둔 암호가 아니오? 글씨를 보아도…… "
 
335
"그렇지."
 
336
"그러면 제가 아는 것인데 손을 아니 댔을 리가 있을라구?"
 
337
"이것 없이 손을 댈 수 있는 것이면 이런 것을 만들어둘 필요가 어데 있어?"
 
338
그리하여 두 남녀는 제가끔 딴 생각을 하면서 그 이야기는 그것으로 그치었다.
 
339
그리한 지 삼사 일이 그대로 지나갔다.
 
340
그러다가 지금으로부터 약 한 달 전 어느 날.
 
341
광옥은 아침부터 밖에 나가 놀다가 늦게 돌아왔고 광식이도 늦게 돌아온 때 였었다.
 
342
별로 나가는 일이 없는 대설이가 어디를 갔는지 보이지 아니하였다. 심상 히 생각하였으나 밤이 새고 그 이튿날 오정때가 되어도 아니 돌아왔다.
 
343
비로소 의심이 나서 우선 예금통장을 찾으니 보이지 아니하였다.
 
344
'아차!' 하고 후회하였으나 때는 이미 늦었다.
 
 
345
9
 
 
346
그렇지 아니하여도 조선을 한번 돌아와서 재석이에게 암호문서의 한쪽을 마저 빼앗고 또 허준이를 위협해서 돈 십만 원이나 긁어내고 하려던 차이다.
 
347
그런데 대설이가 발등을 밟고 나선 것이다.
 
348
즉시 이것저것 팔고 어쩌고 해서 천 원 가량 되는 것을 밑천삼아 조선 땅을 다시 밟은 것이 삼 주일 전의 일이다.
 
349
아주 계획적으로 광식이를 시켜 그럼직한 부하를 긁어모았다. 활동을 개시 하였다.
 
350
제일착으로 익선동 그 노파의 집에 대설이가 숨어 있음을 손쉽게 알아내었다.
 
351
몇 차례 암호문서를 빼앗아내려고 협박도 하고 또 수하 한 놈을 그 행 랑방에 두어 계교도 썼으나 실패하였다.
 
352
그러자 학희 부녀가 서울에 있고 역시 대설의 주위에서 감도는 것을 발견 하였다.
 
353
그 뒤 재석이가 손가락 소포 사건을 일으킨 것을 보고 비로소 그들이 대설을 잡아간 줄 알았다.
 
354
손가락 소포 사건은 광옥이에게 대하여 너에게도 복수의 손이 간다는 위협의 연극이었었다. 그러나 재석은 광옥이가 방금 서울에 있어가지고 보다 더 무서운 활동을 하느니라고는 생각지 못하였던 것이다.
 
355
"말하자면 재석이는 괜히 손가락 소포로 나를 위협하려다가 되려 내게 되 잡힌 셈이 되었지."
 
356
이 말로써 광옥은 이야기를 마쳤다.
 
357
"그러면 재석씨는 죽을 때까지도 허준이가 그 공모에 든 줄은 몰랐나?"
 
358
하고 영호가 물어보았다.
 
359
"몰랐기 쉽지…… 아마 상해서 그때 바로 조선으로 온 게 아니라 딴 데로 돌아다녔지? 그랬으니까 그 뒤도 알어볼 틈이 없었을 테고, 또 알어 보려 했자 알 수도 없을 테니까."
 
360
"대관절 그 불쌍한 사람을 왜 죽였소?…… 아모리 당신이기로니 맘에 걸리잖소?"
 
361
영호는 광옥이가 재석 노인을 죽인 일이 문득 생각나서 증오에 타는 눈으로 그를 흘겨보았다.
 
362
"호호호호…… 아이고 무서워! 옳지, 장래 장인영감을 죽였다고 그래서 이렇게 분개하는구려?…… 아이고 그렇게 성을 내니까 암상스런게 더 귀엽다!"
 
363
"네라끼 수언!"
 
364
"찢어죽여도 아깝잖을 요독한 계집년이란 말이지? 호호. ── 그렇지만 이 거 봐요…… 내가 죽인 것도 아니고 또 그애들도 죽이려고 그런 것이 아니래요. 그 김가 그 녀석이 지랄을 하니까 다리를 쏜다고 쏜 것이 먼 데 있는 그 영감이 맞은 것이래요…… 캄캄 어둔데 누가 누군지 알었겠소?"
 
365
"그래도 어쨌든 죽기는 당신 때문에 죽잖았소?"
 
366
"허기야 그렇지…… 그러나 할 수 없는 일이지. 지금 그것을 가지고 이러니 저러니 하면 죽은 사람이 살어오우?"
 
367
"맘에 조곰도 꺼리끼잖애?"
 
368
"그런 말은 나더러 묻지 말어요. 내가 사람의 맘을 내바린 지가 발써 이십 년이 가까워 오는데 지금 물어서 무얼 하겠소? 염마(艶魔)야 염마…… "
 
369
"그럼 대설이도 죽였구려?"
 
370
"아니 제절로 죽었어…… 그게 죽기 때문에 되려 일이 더디어진걸…… "
 
371
영호는 더 말하고 싶지가 아니하였다.
 
372
족히 인간이라고 여길 대상이 못되는 인간이다. 곱고 고운 인간의 탈을 쓴 그야말로 염마다.
 
373
그 염마에게 그런 줄 번연히 알면서도 형용할 수 없는 이상한 힘으로 인하여 야릇한 매력을 느끼는 영호 자기 자신이 몸서리가 나게 무서웠다.
 
374
"왜? 무서워? 호호, 그러나 내가 당신은 잡어먹잖을 테니 염려 말어요…… 그리고 일 끝나거든 나하고 같이 상해 갑시다 응."
 
375
광옥은 영호의 볼때기를 사뭇 한점 베어먹고 싶은 듯이 꼭 꼬집는다.
 
376
영호는 그것을 피하려고 고개를 쌀쌀 내두르며 버럭 소리를 질렀다.
 
377
"가요 가!"
 
378
"아이고 정말 노염이 났어! 그렇지만 인제 봐요 응…… 우리 도령이 이렇게 노염이 나서 어떻게 해?"
 
379
영호는 대꾸를 하지 아니하려고 입을 꼭 다물고 눈을 감았다.
 
380
"그렇지만 인제 봐요. 내가 하눌이 무너져도 당신을 붙들어가지고 상해로 갈 테니…… 나는 내가 좋은 사람을 그대로 놓쳐본 적이 없어…… "
 
381
이렇게 말을 하고 그는 안방으로 건너갔다.
 
 
382
10
 
 
383
오늘 저녁에는 어떠한 일이 있더라도 이곳을 빠져나가야 한다고 영호는 잠이 오건만 참아가며 시간을 기다렸다.
 
384
밤이 훨씬 깊은 뒤에 안방에서 광옥이 남매가 소곤거리는 소리가 들리더니 사랑에서 웅성웅성하다가 다시 조용해졌다.
 
385
광옥이가 건너오는 소리를 듣고 영호는 조는 것처럼 눈을 감고 고개를 떨어뜨렸다.
 
386
"저런! 우리 도령이 앉어서 졸아요…… 아이 누워서 자잖고!"
 
387
광옥이는 들어와서 요를 펴준다. 영호는 일부러 잠에 취한 소리로
 
388
"지금 멫시요?"
 
389
하고 물어보았다.
 
390
"새로 한시 반…… 자, 묶여서 자기가 멋하겠지만 그대로 참고 자우…… 그러고 오늘 저녁에는 미안하지만 방문 밖에 파수병을 세워두어야겠어."
 
391
"왜?"
 
392
"집이 텅 비었으니까…… "
 
393
"파수병은 말고 대포라도 걸어놓구려…… 그렇지만 그 파수병더러 담배나 좀 자주 멕여주라고 일르구려…… "
 
394
"잠은 아니 자고 담배만 피울테요?"
 
395
"낮잠을 잔데다가 방금 또 졸았더니 인제는 정신이 새맑어오는 게 오늘밤 잠은 다 잔 모양이요."
 
396
"그건 그러시요만…… 저 여보게."
 
397
하고 광옥은 밖에 대고 부른다.
 
398
언제 와서 있었는지 벌써 소위 파수병이라는 것이 앞문 밖 툇마루에서
 
399
"네 "
 
400
하고 대답을 한다. 그 목소리가 낮에 영호의 시중을 들어주던 친구인 듯하다.
 
401
"이따가 이 양반이 담배 멕여 달라거든 멕여 드리게…… 그러고 또 일르지만 놓치는 날이면 자네는 죽네…… 달어나랴고 하거든 덮어놓고 쏘아."
 
402
이렇게 매섭게 다져 이르고는 해뜩 웃으며 영호를 돌아본다.
 
403
"아예 달어날 생각 말고 있어요. 괜히 그러다가 다치지 말고 응…… 자내가 위선 한대 붙여주지."
 
404
그는 담배를 붙여주다가 어젯밤처럼 키스를 강탈하기를 잊지 아니하였다.
 
405
광옥이는 돌아가고 집안은 완전히 조용하여졌다.
 
406
가량에 한 삼십 분쯤 되었을 때에 영호는 일을 시작하였다.
 
407
묶인 다리라 오므릴 수가 없으므로 우선 무릎을 꿇었다.
 
408
그러고 나서 고개를 바싹 숙여가지고 묶인 채 허리에 동여맨 두 팔목을 끌어 올렸다.
 
409
그래도 입이 잘 닿지 아니한다. 다시 팔목을 요리조리 틀어 허리 묶인 것을 위로 올리었다. 그래가지고 해보니 이번에는 겨우 입이 닿는다.
 
410
그러나 든든한 동바를 이빨로 물어 끊는다는 것은 용이치 아니한 일이다.
 
411
더구나 똑똑 소리가 나서는 파수병이 뛰어들을 것이요, 야긋야긋 물어 떼자니 밤새도록 해도 끝이 아니 날 것이다.
 
412
한 시간 가량이나 애를애를 써가지고 겨우 한 줄을 물어 끊었다.
 
413
이놈을 인제는 푸는 것이 한참 일이다. 턱으로 비비고 내어두르고 그리하여 드디어 양손의 자유를 얻고 이어 묶인 다리도 풀었다.
 
414
그는 묶었던 줄을 요 밑에 숨기고 이불을 그러덮고 누웠다.
 
415
"여보?"
 
416
영호는 보드라운 소리로 파수병을 불렀다.
 
417
"왜 그래?"
 
418
"이리 좀 들어오시우."
 
419
"왜 그래 글쎄?"
 
420
대답하는 조가 겁이 나는 모양이다.
 
421
"들어와서 담배 좀 붙여주."
 
422
"담배는 경치게도 먹는다! 염소 새낀가! 좀 참구려."
 
423
"아니 당신네 수령이 시킨 대로만 해주면 그만 아니요? 듣잖으면 내일 다 꼬아 바칠 테요."
 
424
"흥! 꼬아바친다면 누가 무서워하나?"
 
425
이렇게 큰소리는 하였어도 그는 방문을 열고 들어섰다.
 
426
들어서는 그는 잔뜩 언 놈처럼 피스톨의 겨냥을 영호의 머리에 대고 조금도 틈을 보이지 아니한다.
 
427
영호는 고개로 담배 있는 곳을 가리켰다.
 
428
그는 왼손으로 담배곽을 집어 한 개 뽑아서 영호의 입에 물려준다.
 
429
그리고는 다시 성냥곽을 집어 한편 발로 디디고 왼손으로 불을 그어다 대어 준다.
 
430
영호는 뻑뻑 두 번쯤 빨다가 갑자기 "에체"하고 재채기를 하였다. 그 통에 놀란 파수병의 팔은 움찔하여 머리에 겨누었던 겨냥도 홱 틀어졌다.
 
431
그 순간 영호는 뛰어 일어섰다.
【원문】12. 염마(艶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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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본
  # 염마 [제목]
 
  채만식(蔡萬植) [저자]
 
  조선 일보(朝鮮日報) [출처]
 
  1934년 [발표]
 
  소설(小說) [분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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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 General Libraries 최종 수정 : 2022년 08월 27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