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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염마(艶魔) ◈
◇ 13. 서 팔호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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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4.5.16~11
채만식
1
艶 魔[염마]
2
13. 서 팔호실
 
 
3
1
 
 
4
영호는 뛰어 일어나면서 파수꾼의 피스톨을 쥔 바른편 팔목을 잡아 틀었다.
 
5
푸시시 하고 한 방 발사된 소음 피스톨은 힘없이 좍 벌리는 파수병의 손에서 미끄러져 내려졌다.
 
6
무기를 빼앗았으니 이따위 파수병 하나쯤이야 떡 주무르듯 할 수가 있다.
 
7
손 재게 요 밑에 두었던 동바로 결박을 지워놓고 영호는 뛰어나섰다.
 
8
그대로 나오려다가 안방을 굽어다보니 역시 텅 빈 품이 건넌방과 다름이 없다.
 
9
다시 휘휘 둘러보니 마침 철필과 잉크가 있다.
 
10
그는 벽에다 굵직굵직한 글자로 다음과 같은 글을 썼다.
 
11
"마담! 신세 많이 끼치고 가오. 그러나 파수병에게는 허물이 없고 당신이 이불을 준 것과 앞으로 묶어준 것과 또 파수병더러 담배를 먹이라고 한 데 잘못이 있읍니다. 이 글을 발견하는 대로 곧 상해를 향하여 떠나든지, 그렇지 아니하거든 자살할 약을 늘 준비하여 두시오."
 
12
이렇게 써 내던지고 영호는 그곳을 뛰어나왔다.
 
13
어쩐지 섭섭하여 뒤가 돌아다보이는 자기를 영호는 나무랐다.
 
14
자, 인제는 무엇보다도 집으로 빨리 가보아야 할 것, 그리고 날이 밝으면 한시바삐 학희를 구해내야 할 것. 이런 생각을 하며 영호는 좁은 길을 이리저리 한참이나 헤매다가 겨우 큰길을 찾았다.
 
15
둘러보니 바로 청운동이다. 그는 다시 한번 오던 길로 해서 잡혀 있던 집을 알아둘까 하다가 그랬자 필요가 없음을 깨닫고 그대로 집을 향하여 두 달 음질을 쳤다.
 
16
잡혔던 집을 알아두자는 것은 그곳을 역습하여 그들 일파를 붙잡자는 것이나 영호가 벗어난 것을 발견한 그들은 직각으로 장소를 옮길 터이니 소 용이 없는 일이다.
 
17
효자동 전차 종점까지 나온 영호는 경무대 앞으로 해서 삼청동으로 돌아섰다.
 
18
이편 영호의 집에서는 아래층을 지키던 김서방이 현관문의 핸들이 움직이는 것을 보고
 
19
"누구야?"
 
20
소리를 쳤다.
 
21
"문 열어주어요. 백선생 편지 가지고 왔소."
 
22
이것은 저편의 대답이다.
 
23
"편지?"
 
24
"네."
 
25
김서방은 가서 쇠빗장을 벗기려 하다가 다시 생각하고 이층의 상준이를 불러 내렸다.
 
26
"선생님 편지를 가지고 왔다는데…… "
 
27
"누가?"
 
28
"저 밖에 있어."
 
29
"그 편지 문 밑으로 들여보내우."
 
30
상준이가 앞으로 나서서 이렇게 말하였다.
 
31
사실 이 편지 가져왔다는 것은 광옥이의 수하들이 이곳에 와서 자정부터 두 시간 동안이나 침입하려고 가지각색으로 벼르다가 실패한 나머지의 최후 계책 이었었다.
 
32
유리창에는 모두 겉으로 든든한 쇠창살이 있고 이층 역시 그러하다. 현관문이며 뒷문은 다 닫기었다. 들부수고 들어가자면 못할 것을 없으나 그것은 자기네가 여기 도적 왔소 하고 외치는 것과 일반이다.
 
33
그리하여 최후의 계책을 써본 것인데 편지를 문 밑으로 들여보내라니 또한 실패다.
 
34
가짜 편지라도 써가지고 왔더라면 필적을 속나 아니 속나 한번 들여 밀겠지만 그나마 준비를 해가지고 오지 아니한 것이다. 그리하여 그들은 두 시간의 노력을 그대로 내던지고 뚜벅뚜벅 회군을 하였다.
 
35
영호가 돌아온 것은 그들이 물러간 지 한 이십오 분쯤 지나서였다.
 
36
집안 사람들은 영호의 돌아온 것을 보고 모두 안심하는 한숨을 내어 쉬었다.
 
37
영호가 잡혀갔던 경로 이야기를 하매 향초는 놀람 반 기쁨 반에 어쩔 줄을 모르고 김서방과 오복이는 즉시로 그 집을 습격하자고 서둘렀다.
 
38
그러나 영호는 그것이 헛수고라는 것을 알려준 뒤에 옷을 갈아 입었다.
 
39
경성자동차부에 전화를 걸고 그들이 한강 건너서 찾아왔다는 차를 다시 빌려 왔다. 경찰서에서 기별해 준 대신 차를 함부로 버리고 다닌다고 설유까지를 받았다고 한다.
 
40
영호는 네시가 가까운 줄 알면서 바로 집을 뛰어나섰다.
 
 
41
2
 
 
42
동소문 밖에 살인사건이 생기던 날 그날 낮에 대학병원 정신과에는 새로운 환자 하나가 진찰을 받게 되었다.
 
43
환자는 묘령의 여자다. 단발은 하였으나 긴치마에 버선을 신었다. 그 환자는 너무 야단을 부리기 때문에 할 수 없이 마취를 시켜 침대 인력거에 태워가지고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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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하여 환자는 아직도 깨어나지 아니한 채 진찰대 위에서 혼곤히 정신을 잃고 누워 있다.
 
45
그를 데리고 온 사람은 의사에게 대강 다음과 같이 이야기를 하였다.
 
46
즉 환자는 자기 누이동생인데 본래부터 몹시 신경이 예민하였었다.
 
47
그런데 한 일 년 전에 우연히 연애를 하게 되어 그야말로 죽을 동 살 동 모 르고 열중이 되어 있었다.
 
48
그러다가 약 한 달 전에 그만 그 남자에게 버림을 당하였다. 그 남자는 새로운 애인이 생겨가지고 그와 같이 자기 누이를 버린 것이다.
 
49
실연을 당하자 극도로 정신이 흥분된 차에 엎친 데 덮친다고 하루는 길에서 옛 애인과 그의 새 연인인 여자가 나란히 걸어가며 정답게 속삭이는 것을 발견하였다.
 
50
그것을 본 이 여자는 그대로 달려들어 그의 옛 애인의 새로운 연인을 물어 뜯고 쥐어뜯고 옷을 갈가리 찢고 욕을 해주고 하였다.
 
51
그때부터 그는 완전히 미쳤다. 사람을 보면 누구 할 것 없이 덤벼들어 쥐어 뜯고 욕을 하며, 그리고 무엇보다도 아니 된 것은 자꾸만 거리로 뛰어 달아나가려는 것이다.
 
52
별 종작없는 소리를 지껄이며 울고불고 한다.
 
53
머리도 썩 좋던 것인데 이번에 제가 제 손으로 저렇게 잘라버린 것이다.
 
54
그러니 정신병실에 입원을 시켜 치료를 해야 하겠다는 것이다.
 
55
데리고 온 사람의 이야기가 대강 끝이 나자 환자는 깨어났다.
 
56
그는 머리가 아픈 듯이 이마를 찌푸리다가 사방을 둘러보았다.
 
57
의사와 간호부가 둘러선 것을 보고 진찰대에서 벌떡 일어났다. 의사가 제지 할 사이도 없이 뛰어나 달아나려고 하는 것을 데리고 온 사람이 붙들었다.
 
58
"놓아 이 녀석아 놓아!"
 
59
하고 몸부림을 하며 악을 쓴다.
 
60
"이애 이거 왜 이러니! 이러지 좀 말고 저기 가 누워 있거라 어서…… "
 
61
"이런 멀쩡한…… 어따 이 사람이 도둑놈이여요. 도둑놈이여요…… 지금 나를 붙잡어가지고 암호문서를 뺏을 양으로 이런답니다."
 
62
이 말에 방에 모여선 사람들은 모두 웃었다. 과연 미친 사람이 함직한 소리다.
 
63
"왜 웃어요? 왜 웃어요? 나는 아모데도 아프지 아니해요. 놓아주어요."
 
64
필경 환자는 울기 시작하였다. 이 여자가 학희인 것은 그만해도 독자가 짐작 할 것이다.
 
65
광옥이는 학희를 데리고 있느니보다 거짓 미친 사람을 만들어 정신 병실에 감금 시켜 두는 것이 도리어 안전하리라고 생각하고 이 방법을 택한 것이다.
 
66
그는 성공을 하였다.
 
67
의사는 대강 진찰을 한 뒤에 즉시 학희를 서팔호실로 옮겨 이층의 가장 난폭한 환자를 두는 방에 넣고 밖으로는 쇠빗장을 잠갔다.
 
68
그런데다가 광옥은 명칠이라는 수하 하나를 보내어 겉으로는 병 간호를 하는 체하면서 내용으로는 학희를 감시하게 하였던 것이다.
 
69
광옥이는 언니라고 하고 광식이는 오빠라고 하며 가끔 들러서는 그 방에 들어가 유대설에게서 암호문서 빼앗은 것을 내라고 소곤소곤 족쳤다.
 
70
학희는 소리를 질러 외치나 그것은 아무도 미친 여자의 발작으로 여기지하나도 참으로 들어주지 아니하였다.
 
71
그리하여 너무도 안타깝고 분하매 그는 정말로 미칠 지경에 이르렀다.
 
72
밥을 들여주어도 그릇째 내박치고 먹지 아니하였다. 의사가 진찰을 하려도 손등과 옷을 쥐어뜯을 뿐이지 옆에 붙이지 아니하였다.
 
73
그리하여 그에게는 밥도 먹이려 아니하고 의사가 회진을 와도 굽어 보지도 아니하였다.
 
 
74
3
 
 
75
창이 휘엿이 밝았다. 간호부는 졸리는 눈을 쥐어뜯으며 이야기를 하고 있고 영호와 그의 친구인 대학병원의 의사는 담배를 피우며 듣고 있었다.
 
76
아랫목에는 간호부의 어머니가 때아닌 손님의 방문에 놀라 깨었다가 꾸벅꾸벅 졸고 있다.
 
77
영호는 집을 나서던 길로 대학병원에 있는 의사로 친한 친구의 집을 찾아가 두드려 깨웠던 것이다.
 
78
눈을 쥐어뜯고 나오는 의사를 급한 일이 있다고 옷을 갈아 입혀 그 길로 대학병원으로 갔다.
 
79
그곳에서 서팔호실의 비번(非番) 간호부가 누구인지 알아가지고는 찾아온것이 이곳이다.
 
80
간호부의 이야기가 끝나자 영호는 서서히 입을 열었다.
 
81
"그 여자가 실상은 미친 것이 아닙니다. 생사람을 갖다가 잡어넣고 미쳤다고 한 것입니다…… 이 사람아,"
 
82
영호는 이번은 의사를 돌아보았다.
 
83
"그게 내 약혼한 여잘세!"
 
84
의사와 간호부는 다 같이 놀랐다.
 
85
"응!!"
 
86
"네!!"
 
87
"거 웬 소린가?"
 
88
"웬 소리고 머고가 없어…… 나하고 약혼한 여잔데 자기네 집에서 내게로 시집을 아니 보낼 양으로 그렇게 생미친 사람을 만들어서 갖다가 때려 가둔 걸세…… "
 
89
영호는 일부러 창연한 낯빛으로 대답을 하였다.
 
90
"실연했다는 것은 정말이야…… 그렇지만 그 실연이 애인인 내가 그를 버려서 실연이 아니라 자기네 집안 사람한테 방해를 당해서 한 실연이야. 그러나 결코 미치지는 아니 했네…… "
 
91
"글 써 어쩐지 달르드구먼."
 
92
하고 간호부가 비로소 자기의 의심하던 것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93
"줄곧 정신병실에 있으니까 남녀 할 것 없이 미친 사람은 많이 보는데 어쩐지 그이는 좀 달러요…… 어떻게 보면 미친 것도 같지만 어떻게 보면 성한 사람이 생으로 미치러 드는 것도 같애요…… 그래 이상하다고 생각은 하면서 태연했었는데."
 
94
"정신과 의사가 진찰을 했다는 게 그게야?"
 
95
이번은 의사가 분개한 듯이 정신과 의사를 비난하는 말씨로 간호부에게 묻는다.
 
96
"그렇게 야단을 치니까 초곤초곤 진찰도 못했나봐요."
 
97
"그래도 원…… "
 
98
"그거야 그렇기가 쉽지."
 
99
하고 영호는 말을 돌리었다.
 
100
"요짐은 좀 안정되었다지요?"
 
101
"네…… 풀이 죽어서 야단도 치잖고 그래요."
 
102
"그러면 여보게…… "
 
103
하고 영호는 의사를 돌아보았다.
 
104
"나는 여기서 이야기를 좀더 자세하게 듣고 갈 테니 자네는 먼점 돌아가게…… 오늘 낮에 일 볼 사람이 되겠나?"
 
105
"아니 괜찮아."
 
106
하면서도 그는 하품을 커다랗게 뱉는다.
 
107
말로는 그래도 인제 자기 할 일은 다 했으니까 돌아가고 싶어하는 눈치다.
 
108
"아니야…… 그렇게 겸사할 게 아니라 먼점 가게…… 우리 사이에 뭣 그런 체면 차릴 것 있나?"
 
109
영호는 의사를 먼저 돌려보냈다. 돌려보내는 것이 간호부와 비밀한 상의를 하기 위한 것은 물론이지만 그는 돌아가는 의사에게도 당분간 아무에게도 발설을 하지 말아달라고 신신당부를 하였다.
 
110
의사를 문 밖에서 작별하고 영호는 간호부와 같이 다시 들어와 앉았다.
 
111
"그런데 그 여자를 거기다 그대로 두었다가는 정말 미치든지 죽든지 할테니 어쩌면 좋겠읍니까?"
 
112
영호는 우선 이렇게 물어 간호부의 속을 떠보았다.
 
113
"그러문요…… 정말 미치든지 애가 밭어서 죽든지 하지요. 글쎄 성한 사람을 미쳤다고 때려 가두었으니 견디겠어요?"
 
114
"거 어떻게 구해낼 수 없을까요?…… 실상 한가지 방법이 있기는 하지만…… "
 
115
"방법이 있다면 해보시지요."
 
116
"그런데, 그건 댁에서 꼭 들어주어야 성공을 하지 그렇잖으면 실패합니다."
 
117
"제가 들어야 해요?"
 
118
간호부는 자기더러 들어달라는 말에는 난색을 보인다.
 
 
119
4
 
 
120
모든 계획을 꾸며 두었던 터라 영호는 집을 나올 때에 준비한 지폐 뭉치를 꺼내어 간호부 앞으로 밀어놓았다.
 
121
"초면에 이거 퍽 실례올시다만 받어주십시요…… 그러고…… "
 
122
"아이 그게 무업니까!"
 
123
이렇게 반색을 하며 간호부는 돈을 도로 밀어놓는다. 그는 실상 돈이(백원인데 얼마 되는지는 모르나) 겁도 나지만 구미도 나기는 하는 눈치다.
 
124
"아니 그럴 게 아니라 내 이야기를 들어보십시요."
 
125
영호는 다시 설명을 하였다.
 
126
"지금 댁에서 내 일을 거들어주기가 어렵다는 것은 혹시 일이 탄로가 날까 봐서 그러는 거지요?"
 
127
"글쎄……"
 
128
"머 별거 없어요…… 탄로가 날 이치도 없겠지만 그런댔자 환자를 잘 못 지켰다고 면직밖에 더 당하겠읍니까? 그렇게 되면 내가 나서서 딴 병원에 주선을 해드리고 그리고 새로 취직이 될 때까지 생활은 보장해 드리지요…… 자 그러니 이건 위선 약소하나마 그대로 받어두시고 우리 일 상의를 합시다."
 
129
영호는 돈을 집어 경대 서랍 속에 넣어주었다. 간호부는 그것을 말리려고도 아니하고 아무 말도 아니한다.
 
130
"어느 사람이 감시를 하고 있다지요?"
 
131
"네…… 그 방문 옆에 가 꼭 붙어앉어서 일시를 떠나지 않아요…… 그러고 누구 견학 온 사람이라도 혹시 그 방을 굽어다보면 상을 무섭게 하고는 그 환자는 특별하니 들여다보지 말라고. 그리고…… "
 
132
"밤에는?"
 
133
"밤에는 그 방 건너편에 빈 방이 하나 있는데, 거기 들어가서 자요…… 열두시 지나서 자러 들어가는데 생기기는 그렇게 아무렇게나 생겼으면서 웬게 잠귀가 그렇게 밝은지 발자국 소리가 나면 으례 내어다보는걸요."
 
134
"잠귀가 밝다…… "
 
135
하고 영호는 혼잣말로 중얼거리다가 다시 물었다.
 
136
"그 사람이 간호부들하고 더러 농도 하고 장난도 하고 해요?"
 
137
"그럼요…… 퍽 숭굴숭굴해요."
 
138
"과자나 과실 같은 것 더러 사서 간호부들하고 나누어 먹고 차도 달여 먹고 그럽니까?"
 
139
"네, 가끔 그래요."
 
140
영호는 되었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141
"그러면 되었읍니다…… 그런데 댁에서 입는 옷──간호부 제복──한 벌더 없어요?"
 
142
"마침 한 벌 빨어논 것이 있기는 하지만 좀 해졌어요."
 
143
"머 괜찮습니다…… 그놈을 오늘 좀 가지고 가십시요. 나는 이따가 아홉시에 정신병실에 다시 들려서 자세 말씀을 해드리지요…… 그렇지만 그 간호 부복은 동무들이라도 보잖게 어데 잘 간수해 두십시요."
 
144
이렇게 우선 예비 준비를 해두고 영호는 일단 집으로 돌아왔다. 아침 날이다 밝고 전기불이 나갔다.
 
145
영호는 침실로 들어가 한 시간 가량이나 고심해 가지고 편지 두 장을 썼다.
 
146
얇은 종이에다 잔글씨로…… 그래서 착착 접으면 손가락 사이에도 숨길 수 있게 만든 것이다.
 
147
편지를 써가지고 응접실로 나와 눈을 쥐어뜯는 김서방을 불러다가 보였다.
 
148
"글씨가 영감님 글씨 비슷한지 좀 보게?"
 
149
영호는 견본이 없으므로 손가락 소포에 씌었던 글씨와 제일여관의 숙박 부에서 보던 글씨를 생각하여 가면서 그 필적을 본떠서 쓰느라고 쓴 것이다.
 
150
그러나 김서방은 편지보다도 편지의 문맥을 보고는 눈을 번쩍 거리며
 
151
"아가씨 어데 있어요?"
 
152
하고 묻는다.
 
153
"그럼 있잖고 어데 하눌로 올라갔을까?…… 잔말 말고 그 글씨가 영감님 글씨하고 같은가만 보아."
 
154
"글쎄…… 같은 것 같은데요."
 
155
김서방은 편지를 다시 한번 유의해 보며 대답을 하나, 김서방 자신이 남의 필적을 알아볼 만한 정도가 못되는 만큼 장담은 할 수 없는 눈치다.
 
156
영호는 편지를 도로 받아넣고 아홉시가 되기 전에 집을 나와 종로 나가서 흰 구두 한 켤레를 사가지고 대학병원으로 자동차를 몰았다.
 
157
오늘 아침 만나던 간호부는 기다리는 듯이 정신병실의 현관에 나와 있었다.
 
 
158
5
 
 
159
학희는 인제는 떠들고 몸부림할 기운조차 잃었다.
 
160
아무리 떠들고 몸부림을 하며 야단을 쳐야, 그러면 그럴수록 더욱 미친 사람으로만 여길 뿐이다.
 
161
그야 그렇건 말건 너무도 억울하고 분한 마음에 가슴이 터질 것 같은 것을 실컷 야단이나 쳤으면 좋겠으나 정신의 격동과 아울러 변변히 먹지도 아니하고 이래 지내왔으므로 그의 심신은 극도로 피로하였다. 그리하여 그는 정악이 받치면 소리 마디나 지르고 들어오는 의사를 쥐어뜯기나 하고 하지 대부분을 말없이 우두커니 앉아 침울하게 보내었다.
 
162
그것이 심하여 어제 오늘은 간호부에게 맥도 보이고 의사가 진찰하는 것도 다소곳하고 하는 대로 내맡기었다.
 
163
그저 일념에 아버지가 빨리 와서 구해주시기만 심중으로 하나님께 기도를 드리었다.
 
164
열한시쯤.
 
165
간호부가 치료전과 검온기를 가지고 들어왔다.
 
166
하는 대로 검온기를 입에 물고 맥보는 팔을 내맡기고 있노라니까 간호 부가 무슨 종이쪽을 손바닥에 쥐어준다.
 
167
간호부와 시선이 마주쳤다. 간호부는 눈을 끔적한다.
 
168
간호부가 대강 일을 보고 나간 뒤에도 학희는 그대로 잠깐 앉아 있었다.
 
169
그것은 의사나 간호부가 다녀 나가는 족족 밖에서 지키는 자가 한번씩 들여다보는 줄을 아는 때문이다.
 
170
한참 후에 문을 등지고 돌아앉아 간호부가 쥐어주던 종이쪽을 폈다.
 
171
"학희야."
 
172
하고 첫대가리에 쓴 것이 의심할 여지도 없이 아버지가 써보내신 것이다.
 
173
이때에 학희는 얼마나 기뻤었던가!
 
174
그의 가슴은 두근거렸다. 등 뒤를 한번 돌아본 뒤에 편지를 읽었다.
 
175
"자세한 말 아니한다. 이따가 밤에 또 기별이 있을 테니 그대로 시행 하여라.
 
176
그러고 그렇게 천연스럽게 있지 말고 정말 미친 양으로 야단을 쳐라. 더구나 그 계집과 학생놈이 오거든 마구 야단을 쳐라.
 
177
밤에 기별 가는 것 부디 명심하여 시행하여라. 아비."
 
178
학희는 "아이구 좋아라!"하고 외치고 싶은 것을 꼭 참았다.
 
179
그는 편지를 꼭꼭 씹어 북편으로 난 쇠창살로 해서 내던지고는 한바탕 야단을 쳤다.
 
180
지키는 사람이 의외라는 듯이 한번 굽어다볼 뿐 간호부들은 으례 그런 것이라 여김인지 와서 보지도 아니한다.
 
181
오후에 그 학생 ── 광식이가 왔다.
 
182
수직하는 자와 밖에서 소곤소곤하는 이야기다.
 
183
"어때?"
 
184
"한 이삼 일 풀이 죽었더니 오늘부터는 또 야단을 쳐요."
 
185
"응…… 되려 잘되었다. 별로 수상한 눈치는 없지?"
 
186
"없어요."
 
187
광식이가 문을 열고 들어오려는 것을 학희는 뛰어가서 밖으로 나오려고 덤벼 들었다.
 
188
"이 녀석아! 이 녀석아! 놓아라. 왜 날더러 미쳤다구 이렇게 가두어 두니? 응 이 지옥으로 갈 녀석아!"
 
189
학희가 이렇게 발악을 하며 몸을 빼쳐 문으로 덤비는 것을 광식은 우악스럽게 와락 떼밀었다. 그러고 독살스러운 눈으로 노려보면서, 그러나 말만은 남이 들어도 다정할 만큼 순순히 타이른다.
 
190
"이애야, 글쎄 너 왜 이러니? 이러니까 이런 데다 데려다 두지! 너를 이런 데다 이렇게 두어두는 내 맘은 어떻겠니?"
 
191
이렇게 남이 알아듣게 큰말로 일러놓고는 다시 조그만 소리로
 
192
"그러니까 그걸 내놓아…… 내노면 놓아줄 테니…… "
 
193
하고 눈방울을 사납게 굴린다.
 
194
"머 어째? 무얼 내놓아? 무얼 내놓아? 나를 죽여보아라 내놓나?"
 
195
"허허 이애가 이 왜 이럴까! 참 큰일났군!"
 
196
광식은 이렇게 탄식을 하며 도로 나왔다.
 
197
그가 돌아간 뒤에도 학희는 가끔 야단치기를 잊지 아니하였다.
 
198
"밤에 기별…… 밤에 기별."
 
199
이렇게 속으로 외우면서 지리한 해가 저물었다.
 
200
인제는 어서어서 밤이 깊고 그러한 뒤에 아버지의 기별이 와야 할 터인데…… 혹시 무슨 고장이나 생기잖으려나…… 근심 반 기쁨 반으로 초조히 기다렸다.
 
 
201
6
 
 
202
밤 열시가 거진 되어서…… 학 희의 갇히어 있는 방문 앞으로 간호부가 와서 멈춰 서며
 
203
"아이고 졸려."
 
204
하고 하품을 한번 한다.
 
205
하품이란 놈은 균도 없이 곧잘 전염을 하는 것인지 학희 방을 감시하던 친구가 간호부를 따라 하품을 한번 커다랗게 내뱉는다.
 
206
"오늘 저녁에는 왜 이렇게 졸릴까!"
 
207
간호부는 혼잣말같이 한다.
 
208
"글쎄 나도 좀 졸리는걸…… "
 
209
"홍차나 한잔 달여먹을까 부다."
 
210
하고 간호부는 돌아서서 간다.
 
211
"여보, 나도 한잔 얻어먹읍시다그려."
 
212
수직꾼이 간호부의 등 뒤에다 대고 부탁을 한다.
 
213
"글쎄…… 생각나면 한잔 갖다 주고…… "
 
214
"그러지 말고, 한잔 가져와요."
 
215
한 십 분 후에는 간호부가 마노색같이 고운 노르붉은 홍차 한잔을 김이 오르는 채 가지고 올라와서 수직꾼을 준다.
 
216
"아이구 이거 참, 이거 참 감사해서…… "
 
217
그는 홍차를 덥석 받아서 꿀맛같이 훌훌 들이마신다.
 
218
"그렇지만 그것 자시고 잠 못 잤다고 날 원망은 마시우."
 
219
간호부는 웃으면서 농삼아 뒤를 다진다.
 
220
"아따! 염려 말어요…… 나는 잠 아니 자는 것이 내 직분이니까 되려 좋지요."
 
221
이러한 지 삼십 분 후에는 수직꾼 명칠이는 교의 위에 앉아 꾸벅꾸벅 졸았다. 졸다가 못하여 방으로 들어간 그는 열한시가 되었을 때에는 세상 모르고 코를 들들 골았다.
 
222
그가 간호부에게 얻어먹은 홍차 한잔 속에 보통 용량의 갑절이나 되는 아다린(수면제) 이 들어 있었다는 것은 제아무리 귀신이라도 그 당장에 알아내지는 못했던 것이다.
 
223
수직꾼의 때아닌 코고는 소리가 높았을 때 아까 그 간호부 즉 오늘 아침에 영호와 약속을 한 그 간호부는 살금살금 걸어 올라왔다.
 
224
그의 손에는 옷보퉁이가 들려 있다. 그는 수직꾼의 방문 앞에 와서
 
225
"여보"
 
226
하고 한번 불러보았으나 대답이 없다. 이만하면 안심이다.
 
227
그는 학희의 방 앞으로 와서 빗장을 살그머니 열고 옷보퉁이를 들이밀었다.
 
228
학희는 옷보퉁이를 받아 한편 구석으로 가서 펴보았다.
 
229
맨 위에 새까만 손가방이 있고 그 위에 아까 같은 편지가 놓여 있다.
 
230
"학희야, 이 옷을 갈아 입고 이 가방을 들고 앞에 가는 간호부를 따라 나와서 기다리는 자동차를 타라. 네가 신었던 신발이며 그 밖에 남는 것은 이보에 싸가지고 나오느라. 주저하지 말고 재빨리 서둘러라.
231
아비."
 
232
학희는 일초도 유예치 아니하고 간호부옷을 입었다.
 
233
머리에 쓰는 것도 단발머리를 어떻게 오므려서 쓰는 시늉을 하였다. 신발도 흰구두로 바꾸어 신었다.
 
234
이렇게 하고 일어서서 보니 속에는 조선 구식옷일망정 겉으로는 버젓한 간호 부다.
 
235
그는 버선이며 고무신이며를 거두어 보에 싸고 또 편지를 아까 낮에 하 듯이 들창 밖으로 내던지고 그러고 나서 살그머니 문을 열었다.
 
236
자유의 첫걸음을 내어디디었다.
 
237
휭하고 멀미가 나며 몸이 쓰러지려는 것을 바로잡아 일으켰다.
 
238
복도로 나섰다.
 
239
환자란 모두 정신병자들뿐이니 학희를 보고 웬 간호분가 하여 의심낼 사람도 없거니와 누구 하나 내어다보는 사람도 없다.
 
240
층계에서 간호부가 돌아선 채 기다리고 있다.
 
241
학희는 천연덕스럽게 척척 걸어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242
아래층에서도 아무에게도 눈에 띄지 아니하였다. 이렇게 눈에 아니 띄고 나올 수 있을 줄 알았다면 구태여 간호부로 변장할 필요도 없었던 것이라고도 생각했다.
 
243
앞선 간호부가 필경 현관문을 열고 밖으로 나간다.
 
244
학희도 따라나섰다.
 
245
앞선 간호부는 여전히 뒤는 돌아보지 아니하고 손을 들어 바른편을 가리키고는 자기는 왼편으로 가버린다.
 
246
학희는 다시 한번 머리가 휘어질 뻔하고 몸이 비틀비틀하는 것을 이 래서는 아니 되겠다고 정신을 가다듬어 사방을 살펴보았다.
 
 
247
7
 
 
248
앞에는 언덕을 내려가 큰 건물이 시커멓게 가리어 있다.
 
249
머리 위에서 솔잎이 휘파람을 분다. 고개를 들어 보니 좌우로 낙락장송이 드문드문 서서 있다. 하늘에는 달은 아니 보이나 별빛이 희미하다.
 
250
어딘가? 하고 바른편을 유심히 살피니 서편 멀리서 두 줄기 헤드라이트가 갑자기 좍 뻗어나간다. 자동차다!
 
251
학희는 그편을 향하여 빨리 걸어갔다.
 
252
자동차 옆에 당도하니 머리에 붕대를 동인 운전수가 내려서서 문을 열어 준다. 몹시 낯이 익었으나 기억은 나지 아니하였다.
 
253
차 안에서는 의사처럼 깨끔하고 점잖게 생긴 사람이 천연스럽게 돌아보고는 말없이 자리를 비켜준다. 이 사람 역시 어디서 본 듯한데 기억은 나지아니 한다.
 
254
자동차는 폭음을 내며 움직였다. 학희는 자기가 나오던 곳을 돌아보았다.
 
255
우중충한 솔숲 사이로 솟아 있는 시커먼 그 집이 희미하게 보일 뿐이다.
 
256
"뒤를 자꼬만 돌아보지 마십시요."
 
257
같이 탄 의사 같은 사람이 이렇게 주의를 시키는 말을 듣고야 학희는 비로소 자기가 달아나는 사람의 본능적 행동이 무의식중에 나타났음을 깨 달았다. 그 다음부터는 천연스럽게 가장의사를 따라 급한 환자를 왕진가는 것처럼 앞만 바라보았다.
 
258
자동차는 속력을 놓아 달리었다. 학희는 어디로 가는지 분간치 못 하였으나 대학병원 앞에서 곧장 애오개로 달리었다.
 
259
학희더런 뒤를 돌아보지 말라고 주의를 시키던 그 사람은 이번에는 자기가 연신 뒤를 돌아본다.
 
260
차는 애오개에서 서편으로 달리어 종로 네거리까지 와가지고는 다시 전 동 큰길을 북으로 달리었다.
 
261
여기까지 오고 나매 학희는 인제 살아났나 보다 싶어 한숨이 후유 내쉬어졌다.
 
262
학희가 한숨 쉬는 것을 힐끔 돌아보던 그 사나이는 싱긋이 혼자서 웃는다.
 
263
한데 어쩐지 그는 얼굴이 몹시 상기가 되어가지고 귀때기며 볼이 불 그 레 하였다.
 
264
별사람도 다 있다! 학희가 이렇게 생각한 것은 일순간이요, 그의 머릿속에는 지금 아버지가 어디선지 까맣게 기다리다가 자기가 돌아온 것을 보고 두 팔을 벌려 덥석 안아줄 것만 즐겁게 생각하고 있었다.
 
265
차는 안동 네거리에서 또다시 동으로 달리다가 재동 어귀로 들어가 재동 학교 뒷길 옆에 머물렀다.
 
266
학희는 그 사람을 따라 차에서 내렸다.
 
267
어둠침침한 골목길을 한참 빠져나가니 좀 큰거리가 나서는데 이곳은 학 희도 아는 곳이다. 아버지를 따라 산으로 아침산보를 다니던 길이다. 즉 계동 큰길로 나선 것이다.
 
268
다시 남쪽으로 조금 내려가다가 왼편 주택지로 들어가는 골목 어귀에서 앞선 그 사람은 웬 배젊은 사람과 마주쳤다.
 
269
"없드냐?"
 
270
"네."
 
271
'자세 둘러보았어!"
 
272
"네."
 
273
학희 생각에도 감시하는 사람의 있고 없는 것에 대한 이야기인 듯하였다.
 
274
학희가 아침산보를 다니면서 눈에 띄던 그 집…… 나도 저렇게 얌전스럽게 집을 한 채 짓겠다고 유념하던 그 집으로 학희는 안내를 받으면서 별 일도다 있다고 생각하였다.
 
275
현관을 척 들어서니 문소리를 듣고 나오는 게 이 집 주부인 듯한 젊은 여자요, 또 바라보이는 방문이 열리며 김서방이 뛰어나왔다.
 
276
"김서방!"
 
277
하고 학희가 부르니까 김서방은 비로소 알아보고는 그냥 쫓아나왔다.
 
278
"아가씨!"
 
279
하며 학희의 팔을 움켜잡는 김서방은 벌써 울고 있는 것이다. 학희는 김 서방의 우는 참뜻을 알지 못한다. 그래 반가와 우느니라 여길 뿐이다.
 
280
"아버지는?"
 
281
학희는 둘러보다가 김서방더러 묻는 것이다.
 
282
김서방보다도 누구보다도 아버지 ── 그 크고도 상냥한 아버지가 먼저 눈에 띌 것인데 웬일일까? 하는 것이다.
【원문】13. 서 팔호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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