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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염마(艶魔) ◈
◇ 15. 결말(結末) ◇
카탈로그   목차 (총 : 15권)     이전 15권 ▶마지막
1934.5.16~11
채만식
1
艶 魔[염마]
2
15. 結 末[결말]
 
 
3
1
 
 
4
이튿날 아침 일찍부터 영호는 붙잡아 둔 광식을 여러 가지로 족쳤으나 그는 종시 입을 봉하고 어떠한 말을 묻든지 대답을 하지 아니하였다.
 
5
붙잡았던 영호를 놓쳐버리고 학희를 빼앗기고 게다가 가장 힘입을 수 있는 광식이를 이편에 붙잡히었으니 인제 광옥이는 최후의 발악으로 무슨 짓을 할는지 모르는 것이다.
 
6
저편에서 그와 같이 적극적으로 행동을 취하기 전에 이편에서 발등을 밟고 나서서 견제를 해야 할 것이매, 그리하자면 무엇보다도 그들의 본거(本據) 를 알아내어 가지고 습격을 하는 것이 상지상책이다.
 
7
그리하여 어떻게 해서든지 그것을 알아내려고 몇 차례나 지하실에 내려가 꾀어도 보고 위협도 해보고 하였으나 아무 소득도 없이 날이 저물었다.
 
8
이날 석간신문에는 의외 사실이 보도되었다.
 
9
즉 애초에 사건의 발단인 손가락 소포에 쓰인 서광옥은 이번 동소문 밖에서 살해된 이재석이의 안해요, 유대설은 서광옥과 공모하여 이재석이의 재산을 횡령해 가지고 상해로 같이 달아났던 궐녀의 정부(情夫) 였었다는것…… 그리하여 그 사실로 미루어 이번 동소문 살인사건은 복수를 하려는 이재석이 대(對) 서광옥이 사이에 생긴 갈등의 결과인 듯하다는 것…… 동시에 최근 상해로부터 돌아온 형적이 있는 서광옥의 뒤를 염탐중이라는 것들이다.
 
10
이렇게 되었으면 경찰의 수사도 웬만큼 사실의 중심에 접근한 것이니, 인제 영호 자기는 사건에서 손을 끊어버릴까? 그러나 저 지하실에 붙잡아 둔 광식 이의 처치가 적지 아니한 문제다.
 
11
경찰서로 보낼 수도 없는 일, 그렇다고 한평생 붙잡아 둘 수도 없는 일, 또 그렇다고 해서 그대로 놓아주면 후환이 있을 것…… 그리하여 처단을 못하고 있는 중에 마침 뜻하지 아니한 손님이 찾아왔다.
 
12
광옥이에게 붙잡혔다가 그곳을 벗어져 나오던 날 밤 영호를 수직하던 파수병이다.
 
13
이층 응접실에서 영호와 조용히 단둘이 앉아서도 그는 서먹서먹하며 늘 앞뒤를 살피던 끝에
 
14
"나리 사람 살려줍시요."
 
15
하고 그는 맨처음 이렇게 말을 꺼내었다.
 
16
영호는 그 말의 뜻을 알아채었다. 그날 밤 광옥이가 가면서 만일 포로를 놓치면 죽인다고 하였다. 그런데 필경 놓치었다.
 
17
그러니까 이자가 아마 모진 형벌을 받다가 달아나온 것인 듯하였다.
 
18
"왜? 어떻게 하는 말이야?"
 
19
"죽을 뻔하다가 겨우 벗어져 나왔읍니다…… 이것 보십시요. 또 이 거랑…… "
 
20
그는 팔목에 아직도 남아 있는 묶였던 자죽과 발목을 걷어 보이는 것이다.
 
21
"그래 이렇게 피해 나왔으면 그만이지 날더러 어쩌란 말이야?"
 
22
"천만에요! 지금 위선 피해 오기만 했지, 인제 또 붙잽힙니다. 붙 잽히는 날이면 그때는 영영 쥐도 새도 모르게 죽여바립니다."
 
23
"그렇거든 경찰서에 가서 자수를 하지?"
 
24
"그럴 생각도 있었지만 죄가 좀 경해지기는 하더래도 그래도 벌을 받기는하지 않습니까?"
 
25
"그렇게 벌이 무서우면서 왜 참례는 했나?"
 
26
"그거야 일이 이렇게 될 줄이야 알었읍니까?…… 그러고 첨에는 그런 괴악한 짓을 하는 줄은 몰랐지요!"
 
27
"대관절 지금 소굴은 어데로 옮겼나?"
 
28
"옥인동 ×별장으로 도루 갔읍니다…… 지금 모다 모여서 오늘 저녁에 할 일을 상의하고 있읍니다…… 지금쯤 가시면 모조리 잡으실걸요."
 
29
이 끝엣 말이 영호의 귀에는 몹시 이상하게 들리었다.
 
30
그는 일어서서 왔다갔다 하며 잠시 궁리를 하였다.
 
31
조금 뒤에 오복이와 상준이를 불러올려 피해온 파수병을 잔뜩 결박을 지었다. 파수병은 웬 영문인지 모르겠다는 듯이 눈이 휘둥그래 가지고 어쩔 줄을 모른다. 영호는 다시 지하실로 내려가서 피스톨을 가져다가 오복이의 손에 들려주고 시계를 가리키며 엄하게 명령을 하였다.
 
32
"자, 내가 간지 사십 분 안에 무슨 기별이 없거든 그 사람을 두말 말고 쏘아 죽여…… 지금 × 별장에 저의 일파가 있으니까 가서 잡으라는 것인데, 이 사람이 지금 와서 한 말이 사실이라면 내가 무사할 것이고 그렇잖으면 무슨 흉계가 있어서 내가 되려 붙잡힐 것이니까…… 응 사십분이 되거든 두 말 말고 쏘아 죽여."
 
33
이렇게 이르고 영호는 무서운 눈으로 파수병을 흘겨본 뒤에 밖으로 나가려하였다.
 
 
34
2
 
 
35
영호의 하는 말을 듣고 안공(眼孔)이 점점 더 크게 벌어지던 파수병은 묶인 채 벌떡 일어나 영호가 나가려는 앞을 막고 펄씬 주저앉는다.
 
36
"나리님, 그저 살려줍시오. 죽을 때라 환장이 되야서 그렇습니다…… 제발 가지 마십시요…… "
 
37
그는 허리를 몇번이고 굽히며 개개 빌고 있다.
 
38
영호는 속으로 옳다 되었다고 생각하였으나 겉으로는 여전히 냉혹하게
 
39
"그러면 사실대로 말을 다해 봐…… 내가 번연히 아는 일이니까. 일분이라도 속이면 당장 용서를 아니할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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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그저 이번이야 속일 리가 있겠읍니까."
 
41
하고 그는 정말로 사실 이야기를 다 아뢰어 바쳤다.
 
42
그들은 고육계(苦肉計)를 썼다.
 
43
그날 밤 영호를 놓쳐보낸 데 대해서 광옥이는 사실로 자기의 잘못을 뉘우치고 파수병은 그다지 크게 벌하지 아니하였다.
 
44
다만 특별히 용서하는 눈치를 보여가지고 그로 하여금 감복하게만 만들어 두었다.
 
45
그런 뒤에 일이 모두 이렇게 궁하게 되매 이번 계책을 낸 것이다.
 
46
즉 파수병의 손목과 발목을 묶어 묶인 흔적을 남기었다.
 
47
그래가지고 다시 탈주해나간 것처럼 영호에게까지 와서 살려달라고 매어 달리게 하였다.
 
48
그러면 영호는 그의 입으로부터 근거지가 어디 있는지 알아가지고 습격을 올 것이다.
 
49
×별장이 좋다. 속을 텅 비워두고 뒤 솔숲에 복병을 시켰다가 영호의 일파가 지하실로 들어가면 등 뒤로부터 엄습하여 독 안에 든 쥐 잡듯이 잡을 수가 있는 것이다.
 
50
이렇게 우선 영호를 붙잡아놓고 다시 밤 들기를 기다려 영호의 집을 습격 하면 광식이와 학희를 도로 빼앗아 올 것은 물론이요, 암호문서도 뒤져 올 수가 있을 것이다.
 
51
"틀림없는가?"
 
52
영호는 파수병의 진짜 자백이라는 것을 듣고 다시 다지어 물었다.
 
53
"네, 그저 이실직고했읍니다."
 
54
"서광옥이 있는 집은?"
 
55
"그건 저도 모르고 오늘 저녁에 지금 ×별장에 와서 있읍니다."
 
56
"서광옥이도 밖에서 기다리기로 했나?"
 
57
"지하실 속에 있읍니다."
 
58
"복병은 도통 멫명?"
 
59
"명칠이까지 이제 와서 네 명입니다."
 
60
영호는 즉시 준비를 시작하였다.
 
61
우선 지하실에서 광식을 결박을 지워 올려다가 파수병과 한가지로 클로로포름으로 마취를 시키었다.
 
62
영호는 광식의 학생복을 벗겨 입고 사방모자까지 푹 눌러 썼다.
 
63
목소리도 그럴 듯하게 흉내를 내었다. 얼굴은 어두운 밤이니까 변장을 아니 해도 좋다.
 
64
다시 파수병의 옷을 벗기어 김서방에게 입히었다.
 
65
영호는 지하실에 둔 유대설의 짐 속에 들어 있던 예금통장과 도장과 그리고 현금 오백 원까지 꺼내어 포켓 속에 집어넣었다.
 
66
그리하는 동안에 김서방과 오복이는 마취되어 떨어진 광식이와 파 수병을 자동차에 떠메어다 쿠션에 앉히었다. 결박한 것을 가리느라고 외투를 가져다가 앞을 덮었다.
 
67
밖에서는 자세히 보이지도 않지만 취한 손님이 자동차 안에서 조는 것으로밖에는 더 보이지 아니하게 되었다.
 
68
상준이에게 집을 지키도록 주의시켜 맡기고 영호는 오복이와 김서방을 데리고 자동차에 올랐다.
 
69
옥인동 ×별장에 이르러 들어가는 언덕배기에 차를 멈추고 우선 영호와 김 서방만이 별장으로 향하여 올라갔다.
 
70
오복이는 자동차와 마취된 두 명의 포로를 지키었다.
 
71
영호와 김서방은 별장을 왼편으로 돌아 지하실 내려가는 층계에 이르렀다.
 
72
잠깐 어릿어릿하다가 영호가 광식의 목소리를 흉내내어
 
73
"이리들 나오게."
 
74
하고 불렀다. 그 소리가 끝나기도 전에 솔숲에 검은 그림자가 쑥쑥 비어져 이편으로 왔다.
 
75
"웬일이야?!"
 
76
그들은 모두 이렇게 묻는 것을 손을 저어 조용히 따라오라고 하고 지하실로 내려갔다.
 
77
"오래잖어 백가가 여기를 올 테니 이 방에 들어가 꼼짝 말고 기다리게."
 
78
영호는 바깥에 쇠빗장이 있는 방 하나를 회중전등으로 비춰 보였다. 그들은 두말 아니하고 그 속으로 들어갔다.
 
79
그러자 전에 영호가 촛도막과 머리털을 발견하던 방문이 열리며 광옥이의 희미한 얼굴이 촛불에 비치어 나온다.
 
 
80
3
 
 
81
영호는 복병들을 꾀어 들여보낸 방을 겉으로 빗장을 걸면서 시치미를 뚝 떼고
 
82
"누나요?"
 
83
물었다.
 
84
"아이고 이애야. 이게 웬일이냐!"
 
85
하고 광옥은 반기어 뛰어나온다. 영호는
 
86
"쉬, 가만 있어요."
 
87
이렇게 제지를 하여 놓고 김서방더러 소곤소곤 일렀다.
 
88
"자네는 나가서 오복이하고 그 두사람을 하나씩 업어다가 이 다음 방에 집어넣고 결박을 푼 뒤에 빗장을 든든히 걸어놓게…… 그리고 오복이는 자동차에서 기다리고 자네는 지하실 문 밖에서 기다리게…… "
 
89
김 서방은 회중전등을 받아들고 밖으로 나갔다.
 
90
영호는 광옥을 따라 방으로 들어갔다. 두 사람은 들어가며 문을 닫기를 잊었다.
 
91
방에 들어가서 비로소 광옥이는 영호를 알아보고 사뭇 놀랐다.
 
92
그는 무의식중에 아이구머니 소리를 치고 뒤로 물러섰다. 일이 또 실패 된것을 깨달은 것이다.
 
93
영호는 허허허허 하고 한바탕 유쾌하게 웃었다.
 
94
그는 방안을 휙 둘러보았다. 전처럼 가마니쪽이 깔리고 그 위에 보료가 깔리었다.
 
95
불은 촛불이다.
 
96
보료 한편 머리에는 새까만 피스톨이 한 개 놓여 있고 그 옆에는 위스키 병과 잔이 놓여 있다.
 
97
광옥은 연해 피스톨에 주의가 갔으나 영호도 그 눈치를 채고 여유를 주지 아니하였다.
 
98
광옥이는 놀란 것을 곧 수습하여 가지고 한번 싸늘하게 웃으며 보료에 앉았다.
 
99
"내가 또 한번 졌다!"
 
100
그는 혼잣말같이 하고 영호를 바라본다. 자기의 운명을 좌우할 적의 앞에 있는 것이라는 눈치는 조금도 보이지 아니하고 태연자약하다.
 
101
영호도 그의 앞 가마니쪽 위에 발을 개고 앉았다.
 
102
"이번은 져도 크게 졌소…… 아마 다시 힘을 못쓸걸?…… 지금 당신 부하들은 모다 저 방에 가두었지…… 또 어젯밤에 자객으로 왔든 광식이하고 오늘 밤에 고육계를 가지고 왔든 황개(黃蓋)는 마취가 되어서 지금 업어다가 역시 감금을 시켰지…… 인제는 남은 사람이라고는 패전지장 당신 하나뿐인데 그나마 오늘 저녁 석간 보았지요? 당신한테 인제는 완전히 혐의가 돌아간 것을 알지요?"
 
103
"흥! 경찰서의 혐의나 수사쯤이야…… "
 
104
광옥은 여전히 태연하게 담배를 피워 문다.
 
105
"그렇게 내내 흰소리를 하지 말고…… 자…… "
 
106
하고 영호는 가지고 온 유대설의 예금통장과 도장까지 돈 아울러 그 앞에 내놓았다.
 
107
"이걸 가지고 오늘 밤차로 상해로 떠날려오? 그렇잖고 감옥으로 갈려우?"
 
108
광옥이는 웃으면서 고개를 쌀쌀 내어두르다가 갑자기 덥석 달려들어 영호의 목을 그러안고 볼을 비빈다. 영호는 조용히 그를 떼어 앉혔다. 광옥이의 눈에는 아렴풋이 눈물이 솟았다. 그러나 그는 역시 웃고 있었다.
 
109
"서광옥이가 그까짓 만 원도 못되는 돈을 가지고 패군해 달어날 년이 아닌 줄 알지…… 적어도 멫십만 원 집어삼키려고 왔다가 그걸 가지고 상해로 돌아간다면 위선 당신부터 웃을 거요…… "
 
110
"천만에! 그거야 내가 자진해서 이렇게 피신을 시킬려고 드는 건데 웃기는 왜 웃겠소?"
 
111
이때에 복도에서 쿵쿵거리는 발짝 소리가 들리었다.
 
112
오복이와 김서방이 마취된 두 포로를 업고 온 모양이다.
 
113
광옥이는 인제는 그런 것은 다 모른다는 듯이 무관심하게 듣고 있다.
 
114
그는 조금 피우던 담배를 영호에게 내어준다. 영호는 받아 물었다.
 
115
"하여간 반갑소…… 이렇게 다시 만날 줄은 실상 몰랐어."
 
116
이렇게 말하는 광옥이의 얼굴에는 독기도 없고 살기도 없고 그저 평온하였다. 굳이 있는 것을 찾는다면 가볍게 떠도는 한 줄기의 적적한 그림 자라고나 할는지.
 
117
"우리 처음 겸 마지막 겸 술이나 한잔 먹읍시다."
 
118
하고 광옥은 위스키와 잔을 집어다가 한잔 그득 부어 영호를 준다. 영호는 겁하지 않고 그대로 죽 들이켰다.
 
 
119
4
 
 
120
주는 위스키를 서슴잖고 받아 들이켜는 영호를 말끄러미 치어다보고 있던 광옥이는 다가와서 그의 등을 톡톡 치며
 
121
"제법이야? 사내가 담보가 그만이나 해야지…… 내가 잘 알어 보았어…… 자 나 한잔 부어주."
 
122
하고 잔과 병을 바꾼다.
 
123
영호는 청하는 대로 부어주었다. 광옥은 죽 들이켜고 나서 이번에는 한잔을 부어 옆에 내려놓는다.
 
124
"어째서 이런 쌈판에서 만났어! 응? 여보 그렇잖소? 이것도 인연은 인연인가 본데 인연 치고는 섭섭한 인연이야…… 그렇지?"
 
125
"인제 그런 소리 해야 소용이 무어요? 잔말 말고 어서 이 통장하고 돈을 간수해 가지고 일어서요…… 열시 반 차면 아직 멫 시간 남었으니까. 그동안은 내가 감시를 해야겠으니 우리 집에 가서 있다가 상해로 바로 떠나시요."
 
126
영호는 사실 마음이 괴로웠다. 이 괴로와하는 자기의 마음이 불쾌하고 미웠으나 이성(理性)의 힘으로 어찌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127
광옥은 여전히 고개를 좌우로 흔든다.
 
128
"그만두어요…… 나도 다 생각이 있소."
 
129
"생각이 있을 게 어데 있단 말이요. 이거나마 가지고 상해로 가든지 그렇잖으면 저 고운 얼골을 철창에서 늙히든지 그것밖에 더 있소?"
 
130
"호호호호! 내가 곱다고 당신 입으로 했겠다?…… 그래 내가 아직 고와 요…… 아직도 십 년은 자신이 있어…… 그 십 년을 재미있게 지내자면 돈이 있어야 하겠는데 요것 멫천 원! 일 년 용돈도 안돼요."
 
131
"욕심은 꿀돼지다!…… 그럼 내가 십만 원 주리까?"
 
132
영호는 자기의 전재산이라도 털어서 주고 싶은 충동이 무럭무럭 일어났다.
 
133
"호호! 당신 재산이 통 얼마나 되오?"
 
134
"한 십만 원 되지."
 
135
"그걸 톡톡 털어서 나를 주면 당신은?"
 
136
"나야 젊은 사내가 또 모으면 그만 이지…… "
 
137
광옥은 영호의 얼굴을 말끄러미 치어다본다.
 
138
"고맙소…… 그렇지만 나는 남이 주는 돈은 쓸 맛이 없어. 항차 당신을 한 푼 없는 거지를 만들어놓고 내가 그 돈을 가지고 가서야 되겠소? 혹시 ── 혹시 말이야 ── 당신이 나하고 같이 상해로 간다면 그건 모르지만…… "
 
139
영호는 대답이 없이 광옥이를 쳐다보았다.
 
140
"거봐요…… 아직 당신은 그런 모험은 못해요…… 자, 그야말로 쓸데없는 이야기니 그만두고…… 술이나 한잔씩 더 먹고 이야기 끝을 막읍시다."
 
141
광옥은 부어놓은 잔을 마시고 영호를 부어준다.
 
142
"자, 내가 이야기 끝을 막으께 들어보시요…… 첫째 내 오랍동생이나 또 수하에 부리던 사람은 모조리 붙들려 보내고 나 혼자 달아난다는 것이 안될말…… 달어난대도 돈이 없으니 소용없는 일…… 그렇다고 나도 같이 감옥으로 가자니 가서 지낼 일이 답답하고…… 그러고 그런 것은 되려 괜찮다지만 내가 당신을 만난 뒤로 맘이 와락 변해바렸소…… 웃지 말어요 정말이야…… 그냥 맘이 둥둥 뜨고 세상이 희퍼요…… 살어갈 흥이 떨어져 바렸어…… 그러니 당신 시킨 대로 내 자살을 하리다."
 
143
영호는 대답할 말이 없다. 그것이 가장 현명한 수단이요 권하고 싶었던 것이나 광옥이의 입으로부터 그 결심을 들으니 그냥 울고 싶었다.
 
144
"내가 죽거든 무덤에 가끔 꽃이나 놓아주…… 그러고 당신 생전은 잊지말어요."
 
145
이렇게 부탁하면서 광옥은 영호의 목을 걸싸안고 입술을 찾는다. 영호는 그대로 하는 대로 내맡겼다. 한동안 더운 숨을 쉬다가 광옥은 영호에게서 떨어져 앉더니 위스키잔에다 괴춤에서 꺼낸 하얀 가루약을 털어넣고 거기다 술을 부었다.
 
146
그는 잠깐 다시 영호를 바라보다가 쭉 들이켰다. 영호는 술잔을 탁 차 내던지고 싶은 충동을 겨우 억제하였다. 그의 눈에는 눈물이 어리었다.
 
147
독약을 마시고 난 광옥은 영호를 한 일 분 동안이나 끄윽 바라보다가 갑자기 미친 듯이 몸을 날리어 피스톨을 집어 들고 날카롭게 외친다.
 
148
"싫여! 싫여! 혼자는 안 죽어…… 같이 죽어 같이."
 
149
영호는 피스톨의 겨냥을 피하려고도 아니하고 그대로 박힌 듯이 앉아 있다.
 
150
탕 탕 탕. 세 방 총소리가 지하실에 울리어 웬만한 대포 소리만큼이나 크게 울리었다.
 
 
151
5
 
 
152
요란한 총소리에 놀라 뛰어들어온 김서방을 보고 영호는 겨우 정신이 들었다.
 
153
그는 차라리 광옥이가 쏘는 피스톨에 맞아 같이 그 자리에 엎드러져 죽고싶었던 것이다.
 
154
죄…… 사람을 죽였다든가 도적질을 하였다거나 그 밖에 도덕적으로 죄를 졌다거나 하는 그러한 무엇보다도 더 무겁고 큰 해물을 쓰는 듯이 그의 가슴은 괴로왔던 것이다. 그리고 슬펐다.
 
155
피스톨의 맨 처음 것은 영호의 편왼 팔을 안쪽으로 스치고 지나갔다. 벌써 검정 양복 위로 피가 스며올라 가마니 편 바닥으로 뚝뚝 떨어진다.
 
156
그 다음 두 방은 훨씬 겨냥이 왼편으로 빗나갔다.
 
157
광옥이는 첫방을 쏠 때에 벌써 약기운이 몸에 배어 힘이 빠졌던 것이다.
 
158
피스톨을 쥔 채 넘어진 그는 한편 몸을 뒤틀어 경련을 하고는 그대로 절명이 되었다.
 
159
"큰일났읍니다…… 총소리가 저 밖에까지 대포 소리같이 들렸어요."
 
160
김서방이 이렇게 주의할 때에 영호는 비로소 고개를 돌리었다. 그는 두번째 실신한 사람처럼 숨이 진 광옥의 얼굴을 바라보고 있었던 것이다.
 
161
김서방을 먼저 내어보낸 뒤에 영호는 다 못 감은 광옥의 두 눈을 고요히 쓰다듬어 주고는 그 방을 나왔다.
 
162
가슴이 답답한 것이 무어라고 소리라도 한번 외쳐보았으면 시원할 것 같았다.
 
163
셋이서 자동차를 몰아오노라니까 ×별장을 향하여 순사 둘이 달려오는 것이 보였다. 순사들에게는 아무 의심도 받지 아니하였다. 피스톨 소리에 순사가 가게 된 것을 영호는 도리어 다행으로 여겼다.
 
164
한 달이 지나갔다.
 
165
그동안 서광옥 사건의 증인으로 영호와 오복이와 학희와 김서방은 줄곧 경찰서로 검사국으로 불리어다녔다.
 
166
그러나 그들은 유대설의 손가락 일건에 대하여는 영호의 코치로 전부 죽은 재석 노인에게 밀어버렸기 때문에 아무런 계루도 입지 아니하였다.
 
167
그와 같이 무사하게 된 뒤의 어느 날 가매장(假埋葬)을 한 재석 노인을 홍제원에서 장례지내고 돌아왔을 때다.
 
168
영호는 광옥이가 죽던 날 밤 가슴에 받은 상처도 저으기 가라앉았다. 그 의 마음은 애초에 쏠렸던 대로 학희에게 가속도적으로 쏠려갔다. 광옥이가 박아놓고 간 못은 그대로 가슴에 박혀버렸지만.──
 
169
그러나 학희는 웬일인지 몹시 냉담하였다.
 
170
사건을 무사히 해결하고 그만큼 자기네에게 고맙게 구는 데 대해서는 끔 찍이 감사히 여기면서도, 그러나 손톱만큼도 색다른 눈치는 보이지 아니하였다.
 
171
이날도 학희는 새로운 설움을 겨우 진정한 끝에 그는 갑자기
 
172
"어데 셋집 하나 없을까요?"
 
173
하고 물었다. 옆에는 영호 외에 김서방밖에 없었다.
 
174
"셋집요…… 무엇하시게?"
 
175
영호는 이렇게 물을밖에.
 
176
"하나 얻어서 나가야지요…… 언제까지나 이렇게 신세를 져 서야…… "
 
177
학희는 그렇잖냐는 듯이 김서방을 돌아본다.
 
178
그때 마침 층계를 쿵쿵거리며 허철이가 향초의 손목을 잡고 뛰어올라왔다.
 
179
오늘 아침에 영호가 인천 월미도호텔로 전화를 걸어 해방을 시켜준 것이다.
 
180
그는 아직도 완쾌하지 못한 그의 아버지를 데리고 인천서 돌아왔다. 인천서 돌아와 집에 들르고 하는 사이 시간이 그에게는 무척도 지리했던 것이다.
 
181
"이 녀석아! 우리 향초를 그래 입때 네 집에다 숨겨두고 사람 애를 태워주면서 못 만나게 했어?"
 
182
그는 영호에게 대한 대번 인사가 이것이다.
 
183
"그건 필요가 있으니까 그런 것이고, 또 테스트도 좀 해보느라고 그랬네…… "
 
184
영호는 몹시 수척한 허철을 바라보며 웃었다.
 
185
"그래 파스됐나?"
 
186
"응."
 
187
향초와 허철이가 둘이서는 꼴이 보기 싫을 만큼 좋아한다.
 
188
그중에도 놀라는 것은 학희다. 그는 그때까지도 향초를 이 집의 주부로만 여기던 것이다.
 
189
그러고 끝으로 암호문서의 한쪽은 광옥이와 같이 영원히 땅속에 묻히고 말았다는 것을 말하여 둔다.
 
190
학희와 영호가 어떻게 되었느냐?……고.
 
191
그거야 굳이 알려고 할 것도 없다. 그래도 궁금하거든 경성부에 가서 호적 열람이나 할 것이다.
 
 
192
〈朝鮮日報[조선일보] 1934.5.16~11.5〉
【원문】15. 결말(結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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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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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채만식(蔡萬植) [저자]
 
  조선 일보(朝鮮日報) [출처]
 
  1934년 [발표]
 
  소설(小說) [분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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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 General Libraries 최종 수정 : 2022년 08월 27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