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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염마(艶魔) ◈
◇ 3. 추적(追跡) ◇
카탈로그   목차 (총 : 15권)     이전 3권 다음
1934.5.16~11
채만식
1
艶 魔[염마]
2
3. 追 跡[추적]
 
 
3
1
 
 
4
"알 기는 알었는데…… 그래 어쨌어?"
 
5
"벌써 어데로 떠나고 없어요."
 
6
"떠나고 없어."
 
7
영호는 잠시 우두커니 생각을 하다가 다시 묻는다.
 
8
"언제 떠났다고?"
 
9
"어제 아침에요."
 
10
"어제 아침."
 
11
가령 그들이 익선동 그 집으로 왔더라도 그곳에서 들으면 이사온 지가 닷새 된다고 하지 아니하였는가 ?
 
12
그러면 그들이 익선동 그 집으로 오지 아니한 것은 더욱 분명하고, 혹시 몸을 이리저리 피하느라고 자리를 옮겨앉는 것인지도 모르는 것이다.
 
13
"어데로 떠났다든가?"
 
14
"그런 말 저런 말 없이 그냥 떠났다구 그래요."
 
15
"짐은."
 
16
"가진 짐은 담요하고 꽤 무거운 추렁크 두 갠데 자기네가 손수 들고 갔대요."
 
17
"대관절 일행이 멫 사람이라든가."
 
18
"셋이래요."
 
19
"셋 ? 넷이 아니고."
 
20
"셋이더래요. 그 여자하고 또 노인하고, 또 젊은 사나이하고…… "
 
21
"그 젊은 사나이라는 게 헙수룩하게 생겼더라지."
 
22
"네."
 
23
그렇다면 마나님네 행랑에 들었든 그 시골뜨기는 사건에 아무 관계가 없고 정말 시골서 철 아닌 구경을 하러 온 시골뜨긴가?
 
24
그러나 마나님네 집에서 그 거짓 화재소동을 일으키어 이상한 손님이 방으로부터 뛰어나온 기회에 그 방에 들어가려는 연극을 꾸민 것은 분명 그 시골뜨기의 짓인 듯한데.
 
25
"첨부터 끝까지 셋이라고 그리드나."
 
26
"네."
 
27
"어느 여관에서 찾아내었나?"
 
28
"낙원동 제일 여관이에요 "
 
29
"오기는 언제 왔고?"
 
30
"한 보름 된다지요."
 
31
"숙박부에서 이름 적어가지고 왔겠지?"
 
32
오복이는 포켓 속에서 종이조각을 내어놓는다.
 
33
"원적, 현주소, 연령, 전 숙박지, 행선지 모다 숙박부에 쓰인 대로 적어 왔읍니다."
 
34
영호는 종이조각을 받아들었다. 휘둘러 쓴 오복이의 글씨로 다음과 같이 적히어 있다.
 
35
원적 ——— 전남 김제군 김제면 읍 내리이것을 보고 영호는 실소를 하였다.
 
36
"확실히 전남(全南)이라고 썼는가."
 
37
"네."
 
38
"흥, 속이는 사람도 어리석게 속이려 들었거니와 여관 사람들도 어수룩하다! 김제가 어찌 전남이야? 설마 자기 원적지가 김제(金堤)면서 그것이 전남인 줄 아는 사람은 없을 텐데…… "
 
39
영호는 그 다음을 또 보았다.
 
40
현주소 ——— 원 적지 직업 ——— 농업, 장명희, 오십 삼 세 전 숙박지 ——— 원 적지 행선지 ——— 원적 지원적 ——— 전기인(前記人)과 동일 현주소 ——— 동상장 순희, 이십 일 세 원 적지 ——— 전기인과 동일 현주소 ——— 동 김병수, 삼십삼세, 상 영호는 다 보고 나서 종이쪽을 탁자 위에 놓으며 여전히 고소를 한다.
 
41
"원적이고 현주소고 성명이고 무엇이고 다 아무렇게나 지어서 쓴 걸세…… 그중에 나이만은 정말일지 몰라…… 그건 어쨌거나…… 숙박은 멫 등에 했다고?"
 
42
"특등이래요,"
 
43
"응, 그랬겠지…… 그러고 누구 찾어오거나 편지가 오거나 전보 같은 것이 왔는지 물어보았나?"
 
44
"물어보았는데, 아모도 찾어온 사람도 없었고, 또 편지도 전보도 다 아니 왔 대요. 실상 그 사람들이 떠난 뒤에 무엇 그런 것이 온 게 있다면 어떻게 해서든지 뺏어올 양으로 물어보았지요."
 
45
"그러고…… 그 여자가 그 노인더러는 아버지라고 불렀겠지?"
 
46
"네."
 
47
"그 젊은 사내는?"
 
48
"그건 여관에서도 모르는데요."
 
49
"그러면 방은? 셋이 따루?"
 
50
영호는 그 헙수룩하게 생기었다는 사나이에게 적지 아니하게 질투를 느꼈다.
 
51
그리하여 그들이 방을 어떻게 나누어가지고 있는지를 알고 싶었던 것이다.
 
 
52
2
 
 
53
오복이는 영호의 그 말 묻는 뜻을 짐작하는지라 속으로는 싱긋이 웃으면서 겉으로 천연스럽게 대답을 한다.
 
54
"노인과 사나이가 한 방에 거처하고 그 여자가 독방을 쓰고 그랬대요."
 
55
영호는 그만만 해도 약간 안심이 되었다.
 
56
그는 담배를 피워 물고 고요히 앉아 잠깐 생각을 하다가 상준이를 불러 올렸다.
 
57
나이는 아직 이십 안팎이지만 생김생김이 똑똑하게 생기고 또 영호의 손에 치어난 만큼 매우 재빨라 웬만한 일은 척척 해낸다.
 
58
"내 양복 새로 마추어 둔 것 있지, 세비로 말이다. 그놈 입고 추렁 크에다 자리옷이나 넣고 좀 그럴듯하게 차리고 오느라."
 
59
상준이는 웬 영문인지 몰라 대답은 하면서 두리번하고 오복이를 치어다 본다.
 
60
"자네는 좋겠네…… 차 타고 여행하고……"
 
61
오복이의 이 말을 등 뒤로 들으면서 상준이는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62
"군산 보내실려면 아직 차시간이 멀잖아요?"
 
63
"아니 군산은 우리가 아니 가도 인제 경찰서에서 더 자세하게 조사를 해서 신문에 날 테니까 가잖아도 좋아…… 그 대신 상준이를 제일여관 특등 손님으로 하룻밤 만들어야 하겠네…… "
 
64
상준이가 준비를 해가지고 올라올 동안에 영호는 오늘 마나님네 집에 가서 얻은 사실을 대강 이야기해 들려주었다.
 
65
오복이는 영호가 놀라고 긴장하는 만큼 지지 않게 놀라고 긴장이 되었다.
 
66
그리고 영호는 가짜 소포를 백화점 변소에 버린 데 대해서도 자기의 실책을 걱정삼아 이야기하였다.
 
67
오래잖아 상준이가 아주 귀공자같이 말쑥하게 차리고 수줍은 듯이 싱글싱글 웃으면서 올라왔다.
 
68
"아주 그만하면 어데 가든지 버젓한 귀공잔걸."
 
69
하고 오복이가 놀리어 준다.
 
70
영호는 지갑 속에서 십원짜리 두 장을 내어주면서 말을 이른다.
 
71
"이놈 가지고 경성역으로 나가거라. 나가서 택시를 잡어타고 낙원동 제일 여관을 찾어가 운전수한테 추렁크를 척 들리고 들어가란 말이야. 가서는 특등실에 들어…… 그게 멫호실?"
 
72
영호는 오복이를 돌아보며 묻는다.
 
73
"일호실하고 이호실입니다."
 
74
"응, 일호실이나 이호실에 들어야 한다…… 들어서 혹시 뽀이가 방을 소제 하려고 하거든 못하게 하고는 네 재주껏 그 두 방에서 무얼 좀 얻어 보아라."
 
75
상준이는 돈을 받아 물러선다.
 
76
"그러고 이따가 내가 들르마…… 모다 연극을 그럴 듯하게 해야 해, 응."
 
77
"네."
 
78
상준이는 깍듯이 허리를 굽혀 인사를 하고 물러나갔다.
 
79
상준이를 내보낸 뒤에 두 사람은 한동안을 잠잠히 앉아 있었다. 한참이나 각기 생각에 잠겨 있다가 오복이가 자기의 의견을 말하는 것이다.
 
80
"그 사람들이 시골로 가잖았다면 역시 이 서울바닥에 있을 텐데 또 한 번 나가서 찾어볼까요?"
 
81
영호는 고개를 끄덕 거리며
 
82
"나도 지금 그 생각인데…… 대관절 그 일행이 아침 멫시에 떠났다더냐?"
 
83
"열한시쯤이라지요."
 
84
"그러면 그때가 차시간도 아니니까 분명 어데로 자리를 옮아 앉은 것인데…… 가만 있자, 그렇게 무거운 추렁크를 들고 나갔으면 그 근처에서 멀리 가지 아니했으리…… 만일 멀리 갔다면 지게꾼에게 지우든지, 귀 골들이니까 전차는 아니 탔을 것이고 자동차로 갔을 테란 말이야…… "
 
85
"그럴 바이면 왜 애초에 여관에서 짐꾼을 부르든지 자동차를 부를 텐데요."
 
86
"아니야. 그건 그렇게 하면 여관에서라도 나중에 그 운전수나 지게꾼더러 물어가지고 자기의 종적을 찾아낼 수 있게 되겠으니까 되겠나?"
 
87
"거 참 그렇긴 합니다."
 
88
"그러니까 자네가 다시 한번 나가서 이번에는 낙원동 근처의 복덕방을 뒤져 보게. 엊그제 집이나 방을 세로 얻어 든 이러저러하게 생긴 사람이 없느냐고…… 물론 근처의 여관도 또 뒤져보고…… 그러고 나서 소득이 없거든 근처의 지게꾼과 자네 동업자들한테 전화를 걸어서 이러저러하게 생긴 일행의 짐을 실은 일이 없느냐고, 응? 알겠나?"
 
89
"네 알겠읍니다."
 
90
"그래서 밤 열시 안으로 돌아오게."
 
91
타합이 되어 오복이가 막 나가자마자 식모가 속달우편 하나를 가지고 올라왔다.
 
92
속달? 이것은 영호에게 전에 없는 일이다.
 
 
93
3
 
 
94
영호에게는 전화가 있다. 그러니까 그의 친구라도 무슨 급한 일이 있다면 더 빠르고 손쉽고 편리한 전화를 이용할 터인데, 일부러 속달편지로 한다는 것은 아무리 하여도 예사로운 사람의 예사로운 일이 아니다.
 
95
영호는 식모가 올려온 하얀 양봉투 편지를 받아들고 자세히 검사를 해보는것이다.
 
96
주소와 성명이 영호의 것인 데는 틀림이 없다.
 
97
글씨는 그다지 못쓴 글씨는 아니다. 만년필로 꽤 황하게 휘둘러 썼다.
 
98
스탬프는 안국동우편국 것이요, 그날 날짜로 오후 두시 반 것이 찍히었다.
 
99
그러나 발신인은 주소도 성명도 씌어 있지 아니하다.
 
100
그러면 누구 아는 동무가 장난삼아 한 짓인가 하고 글씨를 아무리 보아도 낯에 익지 아니하다.
 
101
영호는 한동안 생각을 하다가 속달편지를 가지고 실험실로 들어갔다.
 
102
그는 우선 마스크로 코와 입을 가리고 핀셋과 가위를 가지고 봉투 한 귀를 잘랐다.
 
103
봉투 속에서는 네 겹 접은 편전지가 나왔다.
 
104
영호는 더욱 조심하여 핀셋 끝으로 편지를 펼쳤다.
 
105
역시 같은 잉크빛이나 좀더 또박또박한 글씨로 다음과 같이 간단히 적히어있다.
 
106
"백영호군
 
107
부질없은 일에 참견을 하지 마라. 즉시 사건에서 손을 끊어라. 만일 고집 하면 이롭지 못하리라."
 
108
사연은 이뿐이다.
 
109
영호는 편지를 내려놓고 마스크도 벗어놓고 입맛을 쩍쩍 다시는 것이다.
 
110
그는 확실히 마음이 동요가 된 것이다.
 
111
그렇다고 편지의 위협 그것이 무서워서가 아니다.
 
112
미이라를 캐러 갔다가 미이라가 된다는 말이 있다.
 
113
영호는 남을 찾고 감시하려다가 되레 자기 자신이 감시를 받은 것이다.
 
114
이것은 영호의 자존심까지도 상하였다. 자기가 그와 같이 소홀하고 허둥대는 사람이든가 싶어서.———
 
115
영호는 생각하여 보았다.
 
116
대관절 어느 겨를에 영호가 이 사건에 참견한 것을 알았을까 ? 사건이 표면화하고 거기 대해서 직접적으로 나서기는 오늘 아침 열시부터니 불과 오륙 시간 밖에는 아니 되는 것이다.
 
117
오늘 아침에 그 여자가 오복이의 뒤를 감시하다가 영호 집까지 왔었고, 급기야 익선동에 갔던 행동이며, 또 오복이가 자기네의 행적을 조사한 것을 알아낸 것일까?
 
118
그럼직도 한 일이다.
 
119
그러나 누가 감시를 했건 자기네의 행동을 감시한 것만은 사실인데, 그들이 가장 확실한 눈치를 채기는 익선동에 가서 조사할 그때부터일 것이다.
 
120
어찌하면 영호가 다녀나온 뒤에 익선동의 그 이상한 손님이 돌아와서 시종 이야기를 마나님에게 다 듣고 그 지신이 영호에게 협박장을 보낸 것 일지도 모르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지금이라도 익선동을 가서 보면 알 것이다.
 
121
영호가 익선동에 가서 조사하는 데서 눈치를 채게 되었다고 생각한 것은 정확한 추측이다.
 
122
사실 그는 감시를 받고 있었다. 그러나 영호도 눈이 수백 개 있는 바 아니요, 길에서 거치는 사람이 그를 감시하는 줄은 알 길이 없는 것이다.
 
123
영호가 마나님과 같이 마나님네 집에서 이 방 저 방 조사를 할 때에, 또 의문의 셋집 앞에 가서 굽어다볼 때에, 그리고 집으로 돌아올 때에 두 개의 눈이 그를 따르고 있다는 것은 아무리 하여도 알아챌 수 없는 의외의 일 이었었다.
 
124
만일 영호가 직업적 탐정이었더라면 ——— 그래서 백영호의 이름과 얼굴이 큰 범죄 사건의 수사에 한몫을 끼였다는 것으로 세상이 다 안다면 영 호도 애초부터 주의를 게을리하지는 아니했을 것이다. 그러나 영호는 자기가 그처럼 세상에 알려지지 아니한 줄을 아는 만큼 애당초부터 감시를 받 으리라고는 생각지 아니했던 것이다.
 
125
좌우간 짜증을 내고만 있을 때가 아니다. 저편이 용이찮을수록 이편도 더욱 긴장과 면밀한 주의가 필요하다.
 
126
영호는 우선 그 협박편지에서 지문을 검사해 보았다.
 
 
127
4
 
 
128
봉투에는 큰 기대도 아니하였지만, 역시 이 사람 저 사람 다 다른 지문이 서너 개가 있었다.
 
129
그러나 진짬은 내용 편전지에 있을 것인데 편전지에는 지문이 남아 있지아니하였다. 그러면 봉투에 있는 네 개의 어느 것이든지가 모두 소용없는 딴 사람의 것일 것이다. ——— 내용 편전지에 지문을 아니 남기도록 면밀한 사람이 겉봉투엔들 남길 리가 없는 것이니까.
 
130
영호는 협박편지를 봉투에 집어넣어 포켓 속에 넣고 집을 나섰다.
 
131
그는 그 길로 안국동 우편소로 와서 보았다. 눈치를 보니 서류 맡아 보는 곳은 그다지 바쁘지 아니한지 좀 까다롭게 생긴 어린 계원이 옆엣 사람과 잡담을 하고 있다.
 
132
영호는 되도록 무뚝뚝하고 거친 말씨로
 
133
"이 속달을 예서 취급했지요?"
 
134
하고 편지를 내어밀었다.
 
135
계원은 언뜻 소갈찌 사나운 눈으로 영호를 치어다보다가 갑자기 공손하게 대답을 한다.
 
136
"녜."
 
137
"어떻게 생긴 사람이 가지고 왔읍디까?"
 
138
"학생이 가지고 왔어요."
 
139
영호의 기대와는 아주 어그러지는 말이다.
 
140
젊은 여자 ——— 검정 외투를 입고 양장한 그 여자가 아니면 수염이 탐 스럽고 부대한 노인이나 헙수룩하게 생긴 젊은 사나이가 가지고 왔다라는 대답이 나올 줄 안 것인데.———
 
141
"학생?…… 어떤 학생이요? 중학생이요?"
 
142
"아니요. 사방모사를 쓴 대학생이야요. 모표에 대학이라고 했어요."
 
143
"얼굴이 어떻게 생겼읍디까."
 
144
"그것은 자세 생각이 안 나지만 해맑고 곱사름하게 생겼어요."
 
145
그렇다면 그 여자의 일행 가운데에 헙수룩한 사나이가 변장을 한 것도 아니요 완전히 딴 사람이다. 물론 익선동 마나님네 행랑방에 들었던 시골뜨기도 아니요, 건넌방의 이상한 손님도 아니다.
 
146
"그 학생이 확실하오? 틀림없소?"
 
147
"네…… 오늘은 속달이 다 늦게 그것 한 장밖에 없어서 틀림없읍니다."
 
148
영호는 우편소를 나섰다. 등 뒤에서는 계원들끼리 형사 어쩌고 속살거리는 소리가 귓결에 들린다.
 
149
학생…… 대학생…… 그가 진짜 대학생은 아닐 것이다. 반드시 변장을 한 사건 가운데 인물의 한 사람일 것인데 지금까지 사건에 나타나지 아니하였다.
 
150
역시 그 여자의 일파이면서 이번에 툭 튀어나왔나?
 
151
그렇다면 제일여관에 그들이 묵어 있을 때에 같이 묵어 있지는 아니 했다하더라도 찾아라도 다니었을 것인데, 오복이의 말을 듣건대 아무도 찾아온 사람이 없었다고 하지 아니하는가?
 
152
그렇다면 한 새로운 사실을 발견했다고 볼 수가 있는 것이다.
 
153
즉 그 여자들의 일파와는 별개의 한 일파가 역시 이 사건의 배면에 움직이고 있다는 것이다.
 
154
물론 지금까지의 재료만 가지고는 그처럼 속단하기 어려운 일이나 그러한 가정을 세워놓고 그 가정으로부터 출발하는 것도 한 방법은 방법이니까.
 
155
익선동 마나님네 집에 있던 이상한 손님을 사이에 놓고 그 여자네 일파와 또 다른 한 일파의 삼각적 착잡한 싸움…… 그리고 거기에 영호가 뛰어드는 것을 보고 예방주사를 한 대 놓는 셈으로 협박장…… 그러나 그 협박장이라는 것은 도리어 불을 보고 덤비는 나비와 같은 것이다.
 
156
만일 그것이 아니었으면 사건의 배면에 다른 일파가 있는 줄을 영호는 생각 지도 못했을 것이요, 따라서 그의 활동은 매우 제한된 일면적이요 기형 적임을 면치 못했을 것이다.
 
157
영호는 머리로는 생각하고 눈으로는 전후 좌우에 자기를 감시하는 사람이 없는지 둘러보고 그리고 다리로는 걸어서 익선동 마나님네 집에 당 도하 였다.
 
158
그는 허실삼아 건넌방 손님이 그새라도 돌아왔는가 물어보았으나 저편에서 되 레 찾아내었느냐고 물을 지경이라 그대로 나와 제일여관으로 향하였다.
 
159
이 근처에서는 더욱 조심하여 감시하는 사람이 있는가 살펴보았으나 아무도 수상한 사람은 보이지 아니하였다.
 
160
지금쯤 상준이가 귀공자같이 버티고 제일여관의 특등실에 들어 모처럼 당한 기회에 공을 세워보려고 방을 세밀히 조사하려니…… 그러노라면 무어라도 얻어지는 게 있으려니 생각하면서 영호는 성급히 목적지로 향하여 갔다.
 
 
161
5
 
 
162
제일여관은 다른 곳에 항용 있듯이 역시 들어가는 문간에 사무실이 있었다.
 
163
영호는 조금 전에 와서 특등실에 든 손님이라고 물으니까 바로 서슴지 아니하고 이리저리 들어가라고 가르쳐 준다. 보이를 시켜 안내해 주는 것보다 되 레 그편이 고마왔다.
 
164
가르쳐 주는 대로 중문 안으로 들어서니까 조그마한 딴채가 하나 있고 마루를 사이에 두고 방이 좌우로 있는 것이 소위 특등실이다.
 
165
발자국 소리를 듣고 상준이가 빙글빙글 웃으며 나와 맞이한다.
 
166
그는 영호를 안내하여 방으로 들어갔다. 오복이의 조사대로 하면 그 여자가 들어 있었다는 이호실이다.
 
167
명색이 특등실이지 이류 삼류의 여관인만큼 별로 버젓하게 꾸민 것도 없다.
 
168
아랫목에 편 보료와 사방침도 실상은 모두 인조견 신세를 진 것이다.
 
169
웃목으로 둘러친 병풍도 값 헐한 것이다.
 
170
영호는 다시 한번 방을 둘러보았다. 그 여자가 며칠 동안 몸을 담아 있던 방이다. 무형(無形)의 그윽한 향내가 고요히 떠도는 것도 같다.
 
171
더구나 상준이가 방구석에서 얻었다고 내어놓는 조그마한 헤어핀은 한결 더 영호의 심정을 연연케 하는 것이다.
 
172
영호는 헤어핀을 요리조리 마치 귀한 선물이나 만지듯이 단순하게 만들어진 그것을 요모조모 살펴보다가 조끼 포켓 속에 집어넣었다.
 
173
그때 마침 보이가 기침을 하고 들어와 땟국이 꾀죄죄한 숙박부를 내어 놓는다.
 
174
옆에서 보노라니까 상준이는 원적, 주소, 성명, 직업 모두 그럴듯하게 꾸미며 써놓고 있다.
 
175
상준이가 다 쓰고 나서 보이에게 도로 내어주려는 것을 영호가 받아 펼쳐 보았다.
 
176
오복이가 적어가지고 온 그 대목이 바로 그 옆에 있다.
 
177
글씨는 가짜 소포에 쓰인 것과 꼭 같았다. 그러나 연필은 아닌 것으로 보아 그 노인이 아니면 헙수룩하게 생겼다는 젊은 사람의 필적인 듯하다.
 
178
영호는 포켓 속에서 협박 편지를 꺼내어 보이가 눈치 채지 아니하도록 얼핏 대조하여 보았으나 그 두 필적은 얼토당토 아니하였다.
 
179
보이가 숙박부를 가지고 마루로 나가자 영호는 상준이의 귀에 무어라고 두어 마디 소곤거렸다. 그 말을 듣고 상준이는 보이를 도로 불러들였다.
 
180
"여보 미안하지만, 나 양말 한 켤레 사다 주구려."
 
181
"네."
 
182
보이는 저편이 특등 손님인만큼 허리가 고분고분하다. 상준이는 지갑 속에서 십원짜리를 척 꺼내어 보이를 준다.
 
183
영호는 상준이가 아까 자동차 삯을 주기 위해서라도 십원짜리 한 장을 바꾸어 잔돈이 있을 텐데 일부러 십원짜리를 내어주는 것을 그럴 듯이여겨 혼자 싱그레 웃었다.
 
184
"좀 멀리 가더래도 백화점 같은 데 가서 존 걸로 사다 주구려…… 한 일원 넘겨 주는 놈으로."
 
185
"네 네."
 
186
보이는 속으로 삼십 전 하나는 붙여먹는구나 생각하였는지 연해 굽실 거리며 돈을 받아가지고 나갔다.
 
187
"빨러도 삼십 분은 걸리겠지."
 
188
보이의 발짝 소리가 멀어진 뒤에 영호는 상준이를 데리고 일어섰다.
 
189
"자, 위선 저편 방부터…… "
 
190
저편 방이라는 일호실도 방이 조금 클 따름이지 이편 이호실과 아무 다를것이 없다.
 
191
영호는 병풍 뒤로 보료 밑으로 방구석 먼지 차인 데로 그리고 바람벽까지 일일이 조사해 보았으나 아무것도 얻은 것이 없다.
 
192
그는 밖으로 나와 부엌 아궁이를 뒤져 보았다.
 
193
그저께 저녁에 불을 때고 만 채로 아궁이 속에는 무연탄이 타고 난 재가 고스 란 히 있는데 그 위에 똘똘 뭉친 조그만 종이뭉치 하나가 오꼼히 놓여있다.
 
194
영호는 손재게 그것을 집어내어 펴보고는 그대로 포겟 속에 집어넣었다.
 
195
다시 무엇이 더 없나 하고 찾아보았으나 아무것도 눈에 띄지 아니하였다.
 
196
이편 이호실 아궁이에는 벌써 불을 지피었기 때문에 무어 찾아볼 필요도 없이 도로 방으로 들어왔다.
 
197
방으로 들어와서 아까 아궁이에서 얻은 종이쪽을 펴보고 있는 영호의 얼굴에는 회심의 미소가 싱그레 떠오른다.
 
 
198
6
 
 
199
보통 쓰는 편전지에 다음과 같은 것이 적혀 있다.
 
200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ㄱ ㄴ ㄷ ㄹ ㅁ ㅂ ㅅ ㅇ ㅈ ㅊ ㅋ ㅌ ㅍ ㅎ 즉 언문의 자음(子音) 전부를 써놓고 그 옆에 아라비아 숫자로 번호를 매 겨놓은 것이다.
 
201
그리고 그 다음 줄에는 모음(母音)을 써놓고 역시 그 옆에 번호를 매 겼는데 그 번호는 앞의 자음 번호에 계속하여 시작되었다.
 
202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ㅏ ㅑ ㅓ ㅕ ㅗ ㅛ ㅜ ㅠ ㅡ ㅣ 이 것은 암호(暗號)에 관한 조그마한 상식이 있는 사람이면 누구나 그것이 무엇인지 를 대번 짐작할 만한 것이다.
 
203
그러나 이것이 극히 초보(初步)의 것인 것은 말할 것도 없는 것이다.
 
204
글씨는 보니 여자의 글씨다.
 
205
그들 일행이 버리고 간 것에 틀림이 없는 것이다.
 
206
만일 그들이 이와 같이 암호에 있어서 유치한 지식밖에 가지지 못 하였다면 그다지 곤란한 적수는 아닐 것이다.
 
207
그것은 그렇거니와 그들은 이 암호를 이용하여 무엇을 하려는 것일까?
 
208
이 암호를 써서 무엇을 기록해 두려는 것인가? 그렇잖고 이미 기록되어 있는 암호를 풀려는 것일까?
 
209
좌우간 선결 문제는 역시 그들 일행의 종적을 찾아내는 데 있다고 생각하고 영호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210
그는 문앞까지 나온 상준이에게 내일 아침에는 돌아오되 모두를 미행을 당할 염려가 있으니 주의하라고 당부를 하여 두었다.
 
211
그날 밤 열시에 오복이는 솜같이 지쳐가지고 돌아왔다.
 
212
그는 영호가 시킨 대로 우선 복덕방을 뒤지기 시작하였었다.
 
213
낙원동·교동 거리의 복덕방으로부터 시작하여 동관까지 다 뒤져보았다.
 
214
그리고 다시 돌아와 인사동·관훈동 일대도 다 뒤져보았고 종로 이남도 뒤져 보았다.
 
215
그러나 아무데서도 시원한 대답을 듣지는 못하였다.
 
216
몇 군데 양복 입은 젊은 사람 혹은 수염난 노인 혹은 젊은 여자에게 집이나 셋방 거간을 해주었다는 곳을 찾아가 보기도 하였으나 모두 딴 사람 들이었었다.
 
217
복덕방에서 실패한 오복이는 다시 낙원동으로 돌아와 지게꾼과 인력거 방을 모조리 뒤져가며 이러저러하게 생긴 사람 일행의 짐을 날라주지 아니하였느냐고 물어보았다.
 
218
필경 지게꾼 하나가 나섰다.
 
219
그는 공원 뒤에서 지게벌이를 하는 사람인데 어제 점심때가 좀 못되어 검정 외투를 입은 젊은 여자와 수염이 탐스런 노인과 헙수룩한 젊은이가 무거운 가방을 지고 가자고 하여서 대학병원 옆 네거리까지 갔었다.
 
220
그곳에서 그들은 길바닥에 짐을 내려놓게 하고 지게꾼은 삯을 후히 주어 돌려 보냈다.
 
221
그들이 길에다 짐을 내려놓고 무엇을 했으며 어디로 갔는지 지게꾼은 삯을 받아가지고 돌아왔으니까 알 길이 없다는 것이다.
 
222
오복이는 다시 그 방면으로 가보고 싶었으나 이미 돌아오라는 시간도 되었고, 또 갔댔자 어둔 밤에 별 도리가 없겠으므로 그냥 돌아왔다는 것이다.
 
223
영호는 오복이의 보고를 다 듣고 나서 고개를 끄덕거렸다.
 
224
사건의 이면에 그 여자 일행 외에 또다른 일파가 있다는 것이 드디어 확실하게 되었다.
 
225
그 여자의 일행은 그 다른 일파의 감시로부터 요리조리 피하기 위하여 그와 같이 처소를 자주 옮기고, 또 옮기되 여과 사람이나 지게꾼에게까지도 주의를 하게 된 것이다.
 
226
영호의 눈에는 어느 무서운 악당들에게 쫓기어 허덕허덕 피해 다니는 그 여자의 그림자가 애처로이 비치는 것이다. 그는 알지 못하는 사이에 두 주먹을 불끈 쥐었다. 그리고 속으로 외쳤다. ——— 적은 협박장을 보낸 그 일파다 ——— 고.
 
227
오복이는 아래층 상준이의 방에서 영호는 자기 침실에서 세 시간 가량 잠을 자고 새로 한시에 다시 일어났다.
 
228
영호는 골프 바지에 헌팅을 쓰고 윗수염을 조금 붙여 간단히 변장으로 오복이를 데리고 집을 나섰다. 그들의 포켓 속에는 영호가 자기 소용으로 만들어 둔 독와사 펌프와 간단한 방독마스크가 들어 있다.
 
229
그들은 정문으로 나오지 아니하고 비상출입문인 뒷문으로 조심조심 나와 근처를 잘 살펴본 뒤에 큰길로 나섰다.
 
 
230
7
 
 
231
영호와 오복이는 익선동의 그 집 문앞에 당도하였다.
 
232
물론 그 앞으로 몇번 왔다갔다 하며 근처에 감시하는 눈이 없음을 다진 뒤에.———
 
233
영호는 지나가는 사람이 혹시 있어서 본다면 자기가 주인인 것처럼 척 대문에 잠긴 자물쇠를 열었다. 곁쇠질로 연 것이나 곁쇠질인지 무엇인지 모를만큼 그는 숙련하였다.
 
234
그러나 될 수 있는 대로 소리를 내지 아니하였다. 대문도 조금씩 조금씩 해서 소리를 내지 아니하도록 열었다.
 
235
안대문은 환히 열리어 있다. 집 안은 불빛 하나 비치지 아니하는데다가 죽은 듯이 교교하다.
 
236
영호는 회중전등을 내어들고 앞을 섰고 오복이는 독와사 펌프를 내어 들고 뒤를 따랐다. 둘이 다 마스크로 코와 입은 가리었고.
 
237
영호의 전등불은 우선 건넌방 앞문에 비치었다.
 
238
거기에는 영호가 예상한 대로 마나님네 건넌방 문에 친 것과 똑같은 커튼이 치어 있다. 영호는 속으로 헛수고를 하느라고 애들 많이 썼구나 생각 하였다.
 
239
두 사람은 마루로 올라서서 건넌방 샛문을 열었다.
 
240
앞에 선 영호는 다뿍 긴장이 되어가지고 회중전등을 방안에 비췄다.
 
241
전등불이 가는 곳에는 아무것도 없다. 휙 내저었으나 역시 텅 빈 방이다.
 
242
방바닥에는 피 흔적과 흙발자국이 남아 있기는 하다.
 
243
그러나 그것도 그것이지만 영호의 기대는 더 큰 것에 있었던 것이다.
 
244
꼭꼭 결박을 지우고 게다가 재갈을 물렀기 아니면 클로로포름이나 에테르로 마취를 시켜 나자빠진 왼편 엄지손가락이 없어진 사람 ——— 마나님네 건넌방에 들었다가 종적이 없어진 그 이상한 손님 ——— 이 있을 것을 예측 하였던 것이다.
 
245
그는 어떠한 수단이었었던지 모르나 그저께 비 오는 날 밤에 이곳에 들어와서 손가락을 잘리었다.
 
246
그 일행은 물론 노인과 여자와 헙수룩한 젊은이의 세 사람이다.
 
247
그 증거로는 방바닥에 피 흔적과 한가지로 여러 개의 발자국 가운데 굽 높은 구두의 자국도 섞여 있지 아니하냐.
 
248
그들은 이상한 손님이 손가락을 자른 뒤에 그의 몸을 뒤져보았을 것이다.
 
249
그러나 목적물이 없으므로 소리를 지르지 못하도록 해놓고는 ——— 혹시 그 사람 자신이 되어 소리지르기를 피할지도 모르는 것이나 ——— 고문을 했을것이다.
 
250
그래도 종시 듣지 아니하니까 두고두고 고초를 주려고 그 일행은 일단 돌아갔고 붙잡힌 사람만 남아 있었을 것이다.
 
251
그 뒤에도 밤이면 그 일행이 와서 그를 심문했을 것이 분명하다.
 
252
그런데 응당 있어야 할 그가 없으니 웬일일까?
 
253
영호는 안방문을 열고 전등을 비추어 보았다.
 
254
그러나 흙발자국으로 이겨놓은 방바닥이며 모두 찢어진 문이며가 눈에 띌 뿐 아무것도 보이지 아니하였다.
 
255
겉문을 처닫은 뜰아래 두 방 역시 찬바람만 휙 돌 뿐이지 아무것도 없다.
 
256
다시 부엌으로 들어갔다.
 
257
솥을 뽑아낸 자리가 숭업게 시커멀 뿐 사람은커녕 장작개비도 보이지 아니 한다.
 
258
부엌 옆으로 달린 광과 변소에도 없다.
 
259
영호는 다시 안방으로 들어가 다락을 열어도 보고 또 마루 밑까지도 굽어다 보았으나 종시 찾으려는 것은 찾지 못하였다.
 
260
그러면 어떻게 된 일일까?
 
261
그 이상한 손님이 이 집에 잡혀 ——— 혹은 꼬임에 빠져서 ——— 와가지고 손가락을 잘린 뒤에 완전히 자유를 잃었으리라는 것까지는 주위의 정경이며 그동안의 경과가 영호의 추리와 일치하였다.
 
262
달아났나?
 
263
달아났으면 그는 경찰서로 갔던지, 만일 경찰서로 가지 못할 사 정이 라면 자기가 묵어 있던 곳에 좌우간 들르기는 했을 것이 아닌가?
 
264
그러나 그것보다도 그는 도저히 달아나지는 못했을 것이 결박을 든든히 지었을 것이요, 또 대문은 겉으로 자물쇠를 걸었으니 어떻게 그리 손쉽게 달아날 것이냐.
 
265
그러나 또 그것보다도 그는 만 이주야 동안 먹지도 못하고 이 추운 곳에서 모진 고초를 받으며 지났으니 어떠한 일이 있든지 자기 자신의 기운이나 의사로는 이곳을 벗어나지 못하였을 것이다.
 
266
그러면?
 
 
267
8
 
 
268
그러면 어디로 자리를 옮겨놓았나?
 
269
그럼직도 한 일이다. 그들이 꺼려하는 다른 일파가 끊이지 않고 그들의 뒤를 따르는 모양이니까 그렇기도 쉬운 일이다.
 
270
그러나 그렇다 하더라고 그것은 용이치 아니한 일이다.
 
271
어쨌거나 불법하게 붙들어온 한 개의 산 인간이다.
 
272
그러니 그것을 그렇게 결박을 지운 채 백주에 공공연하게 어디로 운반 해갈 수는 없는 일이다.
 
273
밤에 비밀히 한다 하더라도 그들의 전용하는 자동차나 무엇이 있기 전에는 매우 위험한 노릇이다.
 
274
그러니 차라리…… 영호는 그 다음 생각이 무서운 듯이 몸서리를 부지중에 쳤다.
 
275
그러나 그 여자 일행이 가지고 갔다는 '두 개의 꽤 무거운 트렁크’라는 그 말과 관련 하여 ' 죽여 버리지 아니하였냐?’
 
276
하는 생각이 자연 머릿속에 떠오르지 아니할 수가 없는 것이다.
 
277
항용 범죄에 있어서 그 희생자가 살해되었다는 것쯤으로 무서워할 영호는 아니다.
 
278
그러나 이 사건에는 '그 여자’가 중요 인물로 활동을 하지 아니하였느냐!
 
279
영호는 이마에서 식은땀이 흐르는 것도 모르고 어두운 마루에 서서 생각에 골몰하 다가 비로소 정신이 들었다.
 
280
영호는 다시 전등을 비추어가면서 이 방 저 방 고비샅샅이 검사해 보았다.
 
281
이번에는 묶여 있을 사람을 찾는 것이 아니라 아무거나 증거거리나 참고 거리가 되는 것이 없을까 하는 것이다.
 
282
그러나 역시 별 신통스러운 것도 없었다.
 
283
두 사람은 방문들을 전대로 해놓고 밖으로 나왔다.
 
284
영호는 조심조심 소리가 나지 아니하도록 대문을 닫고 다시 쇠를 잠갔다.
 
285
두 사람이 이와 같이 대문 닫기에 열중하여 있는 그 일 분도 못되는 동안에 이곳으로 들어오는 골목 어귀에는 세 사람의 검은 그림자가 나타났다.
 
286
그 세 개의 그림자는 영호와 오복이가 대문 앞에 서서 있는 것을 희미한 건너 집 외등불에 비치어보자 일제히 발을 멈추고 거동을 살피었다.
 
287
일순간 후에 그중의 한 사람이 다른 한 사람의 귀에 대고 무어라고 속삭이다 그는 잰걸음으로 어디론지 사라지고 말았다.
 
288
영호와 오복이가 대문 잠그기를 마치고 고개를 돌리며 할 때에 저편 입구의 나머지 두 사람은 갑자기 태도를 고치어 주정뱅이처럼 비틀걸음으로 골목 어귀를 지나쳐 버렸다.
 
289
그런 것은 모르고 심상한 영호와 오복이는 골목 어귀까지 나왔다. 늘 좌우를 살펴보았으나 감시하는 사람은 발견하지 못하였다.
 
290
골목 어귀에 당도하니 아까 그 가짜 주정꾼 두 사람이 무어라고 지절 거리며 영호와 오복이가 가려는 편과는 반대편으로 걸어가고 있다. 역시 그들에 대해 서는 영호나 오복이나 아무 의념도 가지지 아니하였다.
 
291
두 사람은 예전 측후소 앞을 지나 교동 큰거리로 나섰다.
 
292
그들이 막 북편으로 돌아서 갈 때에 그와 엇갈리어 아래편에서 손님 태운 휘장 친 인력거 한 채가 측후소 골목으로 들어갔다. 두 사람은 등뒤의 기척으로 인력거가 지나가느니라고 여겼을 뿐 아무 의혹도 품지 아니하였다.
 
293
오복이는 기왕 늦었으니 영호와 같이 올라가기로 하고 텅 빈 밤거리를 천천히 걸어올라갔다.
 
294
그들이 계동 어귀로 들어설 때에 이편 설렁탕집에서 웬 이상하게 생긴 젊은 사나이가 유심히 바라보고 있는 것은 두 사람이 알 바가 없는 일 이었었다.
 
295
두 사람을 감시하고 있던 그 사나이는 설렁탕집에서 나와 교동 거리로 내려가 다시 측후소 골목으로 구부러져 들어갔다. 영호는 웬일인지 무엇이 꺼림칙한 게 ——— 아예 마음이 놓이지 아니하여 집에 돌아와서도 안정이 되지아니하였다.
 
296
무엇이나 익선동 집에 잃어버리고 왔나 하고 둘러보았으나 가지고 간 마스크, 회중전등, 독와사 펌프 ——— 다 그대로 아직 포켓 속에 들어 있다.
 
297
오복이는 차를 끓이느라고 실험실에서 딸그닥거리고 있다.
 
298
영호는 눈을 간소롬히 뜨고 일심으로 무엇을 생각하다가 갑자기 감전이나 된 사람처럼 후닥닥 일어나 아래층으로 뛰어내려가며 뒤로 대고 오복이를 불렀다.
 
 
299
9
 
 
300
오복이는 놀라 실험실에서 뛰어나와 아래층으로 따라 내려갔다.
 
301
영호는 벌써 마당으로 나갔고 놀라 뛰어나온 식모가 오복이와 마주쳤다.
 
302
밖에는 자동차 엔진 소리가 들린다.
 
303
오복이는 식모더러 실험실의 가스불을 죽이고 또 안팎문을 잘 잠그라고 이르고 자동차 옆으로 달려가서 두말 아니하고 조수대에 올라탔다.
 
304
자동차는 좁은 골목에서 위험하다 할 만큼 속력을 낸다. 계동 어귀에서 서 편으로 구부러지는가 했더니 다시 남으로 구부러져 오십 마일의 속력으로 닫고 있다.
 
305
일 초 동안인가 싶게 측후소 골목에 이르러 자동차를 멈추려 하던 영호는 다시 속력을 내어 그대로 종로까지 나갔다.
 
306
교동 어귀에서 또다시 주저하던 차는 서편으로 향하여 역시 오십 마일의 속력으로 내닫고 있다.
 
307
교동 어귀에서 영호는 오복이더러
 
308
"두 패잡이 인력거."
 
309
라고만 일렀다. 앞에서 끌고 뒤에서 밀고하는 인력거를 찾으란 말인 줄 오복이는 잘 알고 있다.
 
310
영호의 얼굴은 한껏 긴장이 되고 번뜩이는 눈과 꽉 다문 입은 방금 적을 목전에 두고 노리는 듯이 무시무시하였다.
 
311
차가 서대문 개명 앞까지 갔으나 그동안에 두패잡이 인력거라고는 만나지못하였다.
 
312
영호는 개명 앞에서 차를 돌리어 오던 길로 돌아오다가 광화문 네거리에 서북으로 꺾이었다. 속력은 여전히 오십 마일.
 
313
차는 총독부 앞에서 동편으로 꺾이어 안국동 네거리에서 잠깐 망설이다가 전동 큰거리로 해서 다시 종로로 나갔다. 종로 네거리에서 그대로 남으로 달리던 차는 명치정 어귀에서 다시 돌이켜 종로 네거리로 와가지고는 동 편으로 꺾이었다가 인사동 골목으로 들어섰다.
 
314
역시 두패잡이 인력거는 고사하고 요리집에서 늦게 돌아가는 기생 태운 인력거도 얻어보기가 어렵다.
 
315
차는 안국동 네거리에서 다시 동으로 꺾이어 동관을 지나 종묘 뒤의 새 길로 해서 대학병원 옆 네거리에 이르렀다.
 
316
오복이는 파출소 앞을 지날 때마다 속이 죄었으나 영호는 그런 것은 생각 지도 아니하는 듯이 종시 긴장한 얼굴로 속력을 놓아 차를 몰고 있는 것이다.
 
317
대학병원 옆 네거리에서 잠시 망설이던 차는 왼편으로 꺾여 박석고개를 넘는 둥 마는 둥 동소문 파출소 앞으로 돌아 남쪽으로 세 길을 달리었다.
 
318
종로 오정목에서 차는 머리를 서로 돌리어 교동 어귀에서 다시 북으로 돌리었다. 역시 두패잡이 인력거는 발견하지 못하였다.
 
319
우리에게는 제육감(第六感)이라는 것이 있다. 이 제육감을 어느 사람은 비 과학적 의미에 가까운 것이라고 하나 그것은 결코 그렇지 아니하다. 그것은 어떠한 사실이 우리의 뇌에 반영이 되었으되 그때에 뇌가 잠깐 바빠 그것을 접수 처리 못한 채 남아 있다가 기회를 얻어 한 완전한 의식으로 등장 하는것이다.
 
320
오늘 밤 영호만 보더라도 그러하다. 그는 익선동 그 집에서 나오면서 주정꾼이 지나가는 것을 보았다.
 
321
또 측후소 골목에서는 등 뒤에서 인력거가 그 골목으로 들어가는 것을 알았다.
 
322
이것을 무심한 사람이 무심히 본다면이거니와 적어도 그때의 영호에게는 그저 오로지 무심한 일로 처리할 수는 없는 일이었었다.
 
323
실패하는 한이 있더라도 그 두 가지 ——— 주정꾼과 인력거 ——— 를 한번 더 살펴보고 감시도 해보았어야 한 것이다.
 
324
그런데 그때에 마침 영호에게는 그 이상한 손님이 응당 있으리라고 믿고 기습(奇襲)을 한 그곳에 의외에도 있지 아니하였기 때문에 그 생각의 정리로 머리가 바빴던 것, 또 '두 개의 꽤 무거운 트렁크’에 대하여 일종의 공포를 느낀 것…… 그런 일 때문에 영호의 머리는 그 두 가지 사건을 접수 처리 할 여지가 없었던 것이다.
 
325
그러나 일단 머리에 들어온 것이 접수 수리가 못 되고 있을 때 그의 기분은 꺼림칙했던 것이다.
 
326
그러다가 드디어 아연히 깨달은 영호는 그처럼 미친 듯이 자동차를 달리고다니며 두패잡이 인력거를 찾은 것이다.
 
327
그러면 두패잡이 인력거란 대체 무엇일까?
 
 
328
10
 
 
329
우연……
 
330
이 우연이란 것은 참 신비 망측한 물건(?)이다.
 
331
가령 사람을 만들어내기는 하느님이 했다고 하더라도 사람의 일생을 좌우하는 것은 이 우연이란 놈이다.
 
332
그러니까 우연은 사람에게는 하느님보다 더 힘이 큰 것이라고도 우겨 볼수가 있기는 하다.
 
333
물론 한편에서는 우연을 우연이 아니라고 한다.
 
334
미상불 그렇기도 하다. 세상에 정말 우연은 없다. 다 필연이다.
 
335
다만 사람이 멍청해서(사람이여 용서하라) 필연을 못 보고 있다가 결과만 가지고 그놈을 우연이라고 처리해 버리는 것이다.
 
336
그러나 그 논란은 그만두기로 하고 영호와 오복이가 우연히 오 분만 늦어서 그 집에서 나왔다면…… 또 그 여자 ——— 영호의 의중(意中)의 애인 말인데, 아직 그 여자라고 불러 둔다 ——— 가 우연히 오 분만 그 숨는 집에서 일찍 나왔더라면 이 사건은 앞으로 우리가 구경하는 것과는 딴판으로 전개가 되었을지도 모르는 것이다.
 
337
우연이라고 하는 오 분의 이르고 더딘 차이가 꽤 말썽을 부리니 생각 할수록 우연이란 맹랑한 물건이다.
 
338
먼젓번에 영호와 오복이가 익선동 그 집 골목의 어귀에서 예전 측후소 편으로 사라지자 지금까지 건주정을 하고 저편으로 가던 두 사람은 갑자기 발길을 돌이키었다.
 
339
그들은 다시 골목 어귀까지 와서 어두침침한 곳에 몸을 숨기고 매 눈같이 눈만 내두르고 무엇인지 기다리고 있다.
 
340
그러자 조금 있다가 손님 태운 인력거 한 채가 들이달으며 그 골목 어귀를 돌아 들어가는 것이다.
 
341
그들이 그 인력거의 거취를 눈독들여 보고 있는 동안에 먼저 일행 중에서 사라졌던 한 사람이 허덕거리며 달리어왔다.
 
342
재동 네거리의 설렁탕집에서 영호와 오복이를 감시하던 인물이다.
 
343
"옳드냐?"
 
344
아까 그에게 귓속말을 하던 사람이 이렇게 묻는다.
 
345
"네. 계동으로 올라갔었읍니다."
 
346
"두 놈 다?…… 확실히 틀림이 없어?"
 
347
"네."
 
348
"그놈 꽤 추근추근하다!"
 
349
그 ——— 아마 일행 중의 두목인 듯한 사람 ——— 는 혼자 이렇게 두 덜 거리는 것이다.
 
350
"왔읍니까?"
 
351
영호와 오복이를 따라갔다 온 자가 묻는다.
 
352
"응."
 
353
그들은 제가끔 검정 수건을 꺼내어 얼굴을 가리고는 그 집을 향하여 가고있다. 무엇을 신었는지 발짝 소리도 아니 들린다.
 
354
문앞에는 인력거가 놓여 있다.
 
355
'그 여자’는 어제 오려고 하였으나 새로 든 집을 이것저것 손대느라고 자기도 바빴지만, '헙수룩한 사나이’도 틈이 나지 아니하였다.
 
356
'그 여자’ 단독으로는 아버지가 보내려고도 아니한다.
 
357
그리하여 오늘이야 비로소 틈이 났지만 낮에는 나오지 못하고 밤이 들 기를 기다려 전례대로 인력거를 몰아 집을 나왔다.
 
358
인력거가 보통 것이 아니다.
 
359
근처 병문에 가서 낡은 놈은 빌어온 것이다. 끌기는 '헙수룩한 사나이’ 가 끈다.
 
360
오늘 밤에는 여차직하면 놈을 인력거에 떠실어가지고 오자는 데 세 사람의 의견이 일치되었다. 놈이라는 것은 이상한 손님 말이다.
 
361
'헙수룩한 사나이’는 인력거에 두 사람쯤 태우고 끌기에는 되레 힘이 남을 만큼 든든하다.
 
362
예대로 이리저리 돌림길을 해서 예전 측후소 골목에 당도했다. 양복장이두 사람이(영호와 오복이었다) 그곳에서 나오는 것이 좀 꺼림하였으나 들어가는 것이 아니요 나오는 것인지라 안심하였다.
 
363
골목 어귀에는 네 개의 눈이 그들을 쏘아보고 있었으나 알지를 못하였다.
 
364
무사(?)히 목적한 그 집 문앞에서 내려 대문에 채운 자물쇠를 열었다. 별 이상이 없다.
 
365
안중문에 들어서면서 회중전등을 비춰 우선 사방을 둘러보았다.
 
366
그러나 별 이상이 없다. 밤이 교교하게 깊었으니 조그마한 인기척도 알아챌 수가 있는데.———
 
367
'헙수룩한 사나이’는 등 뒤에서 호위를 하고 있다.
 
368
마루로 올라서서 건넌방문을 열고 회중전등을 들어 비추는 순간 그 여자는 몹시 놀라, 그러나 소리를 죽인 부르짖음이 그의 입으로부터 흘러서 나왔다.
 
 
369
11
 
 
370
든든한 동바로 옴나위 못하게 결박을 짓고 다리를 묶고 그리고 클로로포름가 제로 재갈을 잔뜩 물린 채 혼수상태에 빠져 있을 '놈’이 간 곳 없는 것 이다.
 
371
영호가 그의 없음을 보고 놀란 이상으로 그 여자는 놀랐다.
 
372
그 여자의 머리도 영호와 같이 빨리 돌았다. 그러나 어떠한 일이 있더라도 그가 자기 의사로 자유로이 이곳을 벗어났다고 생각할 수는 없는 것이다.
 
373
되레 그가 그동안에 절명이 되었으면 되었지.———
 
374
그 여자는 등 뒤에 서 있는 '헙수룩한 사나이’를 떠밀 듯하며 마당으로 내려 섰다.
 
375
위협이 박두해올 것을 직각한 때문이다.
 
376
그러나 때는 이미 늦었다.
 
377
어느 겨를에 들어왔는지 세 개의 시커먼 그림자가 앞을 막으며 보지 아니하여도 무엇인지 알 수 있는 살에 칵 울리는 것을 가슴에 들이대는 것이다.
 
378
생과 사의 거리는 가슴에 들이댄 피스톨의 길이 이상을 나가지 못한다.
 
379
돌아다보니 보이지는 아니하여도 황소 같은 '헙수룩한 사나이’의 이를 갈며 솟쳐오르는 기운을 억누르는 참담한 표정이 보이는 것 같다.
 
380
발악을 해도 소용이 없다. 발악을 해서는 원체 아니 되지만, 가령 발악을 한 대도 구조의 손이 이곳에 오기보다는 다섯 치 거리에서 피스톨의 탄환 이 심장을 꿰뚫는 것이 더 빠른 것이다.
 
381
동바로 두 사람이 다 결박을 당하였다.
 
382
수령 되는 자가 회중전등을 '그 여자’의 얼굴에 들이댄다. 그 여자는 눈이 부시어 뜨지는 못하고 감은 채, 그러나 앙연히 고개를 쳐들고 있다.
 
383
수령 되는 자는 한참이나 노려보고 있다가 혀를 찬다.
 
384
"요년! 조고만한 계집애년이!…… 앙큼스럽게…… 요년아, 네 애비는 어데 있니."
 
385
그 여자는 보아란 듯이 다문 입을 더욱 꽉 다물어버린다.
 
386
수령 되는 자는 '그 여자’의 머리를 모자 어울러 움켜쥐고 쌀쌀 내 두른다.
 
387
"요년아, 안 댈 테냐."
 
388
그래도 '그 여자’의 입은 다문 채 그대로 있다.
 
389
수령 되는 자는 움켜쥐었던 머리를 와락 꺼들어버리고는 물러서며 하는 말이다.
 
390
"안 대면 내가 못 알어낼 줄 아니? 너이 따우는 하루에 열 뭇도 잡어 낸다."
 
391
모자를 벗긴 그 여자의 단발머리가 흐트러져 얼굴을 반이나 덮는다.
 
392
"나가서 인력거 감찰을 조사해 봐라."
 
393
수령이 부하 하나에게 명령을 한다. 그리고 남은 하나는 수령과 협력 하여두 포로에게 클로로포름 가제의 재갈을 물린다.
 
394
밖에 나갔던 부하가 돌아와서 보고를 한다.
 
395
"감찰은 떼어바리고 등에는 자용(自用)이라고 쓰였읍니다."
 
396
수령 되는 자는 짜증이 나는 듯이 이미 혼수상태에 들어가 거꾸러진 ' 헙 수룩한 사나이’를 한번 걷어지른다.
 
397
"고따위 꾀는 어데서 생겼어!"
 
398
두 부하는 수령의 명령으로 '헙수룩한 사나이’의 결박을 풀고 그가 입은 인력거꾼 옷을 벗긴 뒤에 다시 결박을 짓는다.
 
399
이편은 영호와 오복이.———
 
400
영호는 자기의 조그마한 부주의로 천재일우 좋던 기회를 놓친 것이 너무도 안타까와 필사적으로 자동차를 몰아세웠으나 목적한 두패잡이 인력거는 발견 하지 못하였다.
 
401
자동차가 교동 어귀에 이르렀을 때에는 영호의 얼굴에는 절망의 빛이 완연 히 떠올랐다.
 
402
그러나 행여…… 하는 희망을 품고 다시 한번 익선동 그 집을 가볼 양으로 차를 측후소 골목에 대었다.
 
403
두 사람은 차에 내려서 우선 주위를 둘러보았다. 이제는 주정꾼도 없다.
 
404
영호는 자기의 예측이 틀리기를 도리어 바랐다. 만일 예측이 들어맞지 아니하였다면 들어맞지 아니한 예측을 한 자기 자신의 무능함이 좀 결리겠으나, 그러나 이 비상시에 뜻하지 못한 큰일은 저질러지지 아니하겠으므로.——
 
405
두 사람은 급히 ——— 그러나 될 수 있는 대로 발자국 소리를 요란히 내지 아니하고 차츰 그 집을 향하여 가까이 갔다.
 
406
영호의 가슴은 두근거렸다. 그는 사건에 임하여 가슴이 두근거려 보기는 처음이다.
 
 
407
12
 
 
408
대문은 아까 영호가 잠그고 간 것과 반대로 활짝 열리었다.
 
409
필경 일은 저질렀구나 생각하였다.
 
410
집안은 인기척이 없이 고요하다.
 
411
영호는 위험을 돌아볼 사이도 없이 쑥 들어섰다. 오복이는 등 뒤에 섰던것을 번쩍 나서서 영호와 나란히 서서 들어갔다.
 
412
그래도 집 안에서는 아무런 반응도 없다.
 
413
그도 그럴 것이 이때는 벌써 '그 여자’와 '헙수룩한 사나이’의 두 포로가 클로로포름에 마취된 채 한 인력거에 실리어 영호가 예측한 대로 ' 두 패잡이 인력거’에 실려가 버리고 난 지도 한 시간이 넘어 된 때이었던 것이다.
 
414
영호가 들어서면서 비치는 회중전등불에 맨먼저 눈에 띈 것이 마당에 떨어져 있는 그 여자의 새까만 조그마한 모자다.
 
415
영호는 채듯이 모자를 집어 들고 회중전등을 비추어 보았다.
 
416
갈데없는 그 여자의 모자다.
 
417
영호는 마치 어머니가 죽은 아기의 옷을 어루만지듯이 추렷이 그 조그마한 새까만 모자를 어루만지었다.
 
418
애처롭기도 하고 안타깝기도 하고 그리고 그 다른 일파들에게 우롱을 당하는 것이 분하기도 하고 하며, 영호는 정말로 머리가 혼란하여졌다.
 
419
영호가 우두커니 서서 있는 사이에 오복이는 한손에 회중전등, 또 한 손에 독와 서 펌프를 쥐고 집안을 샅샅이 둘러보았다. 그러나 아무런 이상도 발견 치 못하였다.
 
420
영호는 얻은 모자를 품에 넣고 하릴없이 발길을 돌이켰다.
 
421
그의 추측은 영락없이 들어맞았다.
 
422
주정하는 체하던 두 사람은 실상 이 집을 감시하던 꾼들이요, 인력거를 타고 들어온 것이 '그 여자’요, 인력거를 끈 것이 '헙수룩한 사나이’ 였다는 것…… 그런 때문에 영호는 감시하는 일파가 두 사람을 붙잡아 인력거에 싣고 옷까지 뺏어 입고는 하나가 끌고 하나가 뒤에서 밀고 '두패잡이’로 달아났 으리라고 짐작한 것이다.
 
423
영호는 발을 굴렀다. 이 집의 감시를 소홀히 한 것이 자기 일생의 일대 실책이요 잊을 수 없는 안타까움이다.
 
424
이제는 무엇보다도 '그 여자’를 그들의 손에서 구해내는 것이 급선무다.
 
425
무엇인지 중간에 놓고 서로 차지하려고 싸우는 것이 이 사건의 원인인 듯 한 데, 그렇다면 쉽사리 위해를 입히지는 아니한다더라도 그렇다고 그냥 방임 해 둘 수는 없는 일이다.
 
426
그러나 이미 오리무중으로 사라진 그들 다른 일파에 대해서는 지문조차 없는 협박장 한 장이 있을 뿐인데 무엇을 재료삼아 그들을 찾아내나?
 
427
이 넓은 서울 안에서 문제의 대학생으로 변장한 그자를 막연히 찾아내기도 또한 어려운 일이요, 말하자면 속수무책이다.
 
428
혹시 '그 여자’의 아버지 되는 그 노인이나 찾아낼 수가 있다면 혹 무슨 참고 거리를 얻을지도 모르나 그 노인을 찾아내기가 또한 힘과 시간이 많이 드는 일이다.
 
429
이렇게 골똘히 생각을 하며 걸어나오다가 영호는 문득 발을 멈추었다.
 
430
그는 오복이를 데리고 도로 집으로 들어갔다.
 
431
생각컨대 그 노인이 딸을 그와 같이 내어보내고 너무 늦도록 돌아오지 아니하면 결코 그대로 있지는 아니할 것이다. 위험을 무릅쓰고 찾으러 나설것이며, 찾으러 온다면 맨처음 이 집으로 올 것이다.
 
432
만일 부녀(父女)간에 무슨 약속이 있었다면 모르지만 그렇지 않다면 노인이 이 집을 찾아올 것이요, 찾아오는 마당이면 만사 OK…… 아직 세시가 채 못되었으니까 상필 날이 밝기 전에 올 것이다. 아니 온다면 영호가 생각지 못한 우연의 지장이 또 생긴 때문일 것이다.
 
433
다른 일파?
 
434
그들은 다시 이곳에 오지 아니할 것이다. 그 증거로는 대문을 잠그지도 아니한 것으로 보아 알 수가 있는 것이다.
 
435
만일 이곳에 복병을 하고 있다가 그들 일파의 하나라도 붙잡는다 하면 그야말로 꿈에 떡이지만 그 노인만 만나더라도 막상 허사는 아닐 것이다.
 
436
영호는 오복이를 데리고 건넌방으로 들어갔다.
 
437
몹시 추우나 할 수 없는 일이다. 그들은 전신의 신경을 귀에 모아가지고 발자국 소리만 기다렸다.
 
438
시간은 한 초 두 초 더딘 것도 같고 빠른 것도 같이 지나가고 있다.
 
 
439
13
 
 
440
영호와 오복이는 조금치라도 추위를 덜하게 하려고 두 사람이 착 들러붙어 앉아 만만한 담배만 연해 피웠다.
 
441
캄캄 어둔 방안에는 요화와 같이 두 개의 담뱃불이 번갈아가며 반짝인다.
 
442
연기가 가득차서 목안이 매우나 문은 열어놓지도 아니하였다.
 
443
오복이는 집에 올라가 담요와 화로 같은 것이라도 가지고 올까 하였으나 영호가 말리었다.
 
444
오고 가고 하는 길초에서 그 노인에게 눈치를 채이면 아니 되겠으니까.———
 
445
영호는 품 속에 간수한 '그 여자’의 모자를 가만히 만지어보았다. 품속에서 온기를 받아 따뜻해진 것이 마치 '그 여자’의 체온인 듯싶게 보드랍다.
 
446
십 분…… 이십 분…… 삼십 분…… 삼십 분쯤 지났음직한 때에 고요한 밤 적막을 깨뜨리고 멀리서부터 가까와오는 발자국 소리가 들린다.
 
447
두 사람은 더욱 귀를 기울여 기다렸다.
 
448
집 문앞에까지 다다랐다. 그저 집 문앞을 지나 그 발자국 소리는 그대로 다시 멀어지고 만다.
 
449
미상불 노인의 발자국 소리와는 달라 젊은 사람의 힘차게 걸어가는 소리 였었다.
 
450
두 사람은 긴장이 풀리며 부지중에 한숨이 푸 내쉬어졌다.
 
451
또다시 침묵…… 두 사람은 끈기 있게 한 시간을 더 기다렸다.
 
452
그때에 바로 대문 밖 근처에서 자박자박 조용히 걷는 발자국 소리가 갑자기 들리었다.
 
453
두 사람은 또다시 긴장이 되었다.
 
454
자박 자박 자박…… 이 것은 반드시 조건이 붙은 발자국 소리다. 항용 무심히 지나가는 사람 이면 이 깊은 밤에 그렇게 유유하게 걸어갈 이치가 없는 것이다.
 
455
그러나 웬걸!
 
456
발자국 소리는 그대로 대문 앞을 지나쳐 차츰차츰 멀어지고 말지 아니 하는가!
 
457
성미 급한 오복이는 벌떡 일어서려고 하였다.
 
458
"나가 볼까요."
 
459
그는 영호의 귀에 속삭인다. 영호는 그의 팔을 붙잡아 앉히었다.
 
460
"가만 있어."
 
461
"왜요."
 
462
보통 때는 시키는 일 외에는 절대로 입을 벌리지 아니하던 오복이건만 오늘밤은 이렇게까지 나대러 드는 것이 그도 여간만 흥분이 되지 아니한 것을 알 수가 있다.
 
463
"가만 있으라면 가만 있어…… "
 
464
영호는 좀 거칠게 윽사렸다.
 
465
영호는 생각에 꼭 그 노인이 오리라는 확신 밑에서 이와같이 기다리는 것은 아니다.
 
466
물론 딸을 위지에 보내고 돌아올 시간에 돌아오지 아니하면 평상시의 어버이의 정으로 결코 그대로 있지는 아니할 것이다.
 
467
이러한 것으로 생각하면 노인이 오지 아니하리라고 생각할 수는 없는 것이다.
 
468
그러나 다시 이렇게 생각할 수도 있는 것이다.
 
469
그들 부녀는 지금 생명을 대어놓고 무엇인지를 겨루고 있는 판이다.
 
470
그러니까 오늘 밤에 그 여자가 집을 나올 때에 그 아버지 되는 노인도 위험만은 각오하지 아니한 것이 아닐 것이다.
 
471
따라서 그들 사이에 이러한 약속이 있었으리라고도 볼 수 있는 것이다. 즉 ' 아무 시간까지 돌아오지 아니하면 이미 위험 속에 빠진 것으로 알 것’이라고.
 
472
만일 그렇다면 아직도 남은 일을 두고 무모하게 노인조차 ——— 거친 육박전에는 무능력한 노인이 ——— 일부러 위험을 자취하러 들지는 아니할 것이다.
 
473
그보다도 그는 꾀로써 다른 방법을 취하게 될 것이다.
 
474
더구나 오늘 밤에 노인이 만일 집에 없어서 그 여자의 돌아오기를 기다리지 아니하는 경우라면 두말할 것도 없는 것이다.
 
475
영호는 이렇게 애초부터 생각을 하고 그야말로 허실삼아 기다리고 있었던것이다.
 
476
자박자박 걸어가던 발자국 소리가 그친 뒤에 얼마 아니하여 그 사라진 방향으로부터 또다시 같은 발자국 소리가 들려왔다. 자박 자박 자박…… 영호는 그것이 자기의 심장을 밟는 소린 듯이 긴장이 되었다.
 
477
발자국 소리는 대문 밖에서 뚝 그쳤다.
 
478
두 사람은 들이쉰 숨을 꼭 씹고 기다렸다.
 
479
잠깐 멈췄던 발자국 소리가 대문 안으로 들려 들어온다.
 
 
480
14
 
 
481
발자국 소리는 다시 마당에서 그쳤다.
 
482
서서 망설이는 모양이다. 한동안 망설이다가 마루로 사풋 올라섰다.
 
483
때는 지금이다.
 
484
영호는 손에 회중전등을 쥐고 건넌방문을 여는 것과 동시에 마루로 뛰어나 섰다.
 
485
그러나 이건 또 웬일일까? 회중전등에 비치는 그 잠입자는 생각했던 바와는 딴판으로 시골 농군(農軍)처럼 생긴 사나이가 놀라 허둥지둥하고 있지아니하는가!
 
486
영호는 어이가 없어 우두커니 서서 있고 그 사나이는 허둥거리다가 대 문 편으로 돌아 달아나려는 것을 오복이가 뛰어나와 덜미를 짚었다.
 
487
영호는 회중전등을 바로 대고 그 사나이를 살펴보았다. 땟국이 괴죄죄하게 묻은 무명 바지저고리에 두루마기도 입지 아니하였다.
 
488
머리에는 값 헐한 목출모자(目出帽子)를 썼고 얼굴은 시골 농군 그대로 지 둔하게 생기었다.
 
489
손도 농군의 손 그대로다.
 
490
그는 오복이에게 덜미를 잡힌 채 와들와들 떨고 있는 것이다.
 
491
영호는 아주 낙망을 하였다. 태산명동에 서일필이라더니 그 말과 꼭 같다.
 
492
"웬 사람이야."
 
493
영호는 화풀이하듯이 그를 노려보며 물었다.
 
494
"네 그저 살려주십쇼, 그저."
 
495
그는 여전히 와들와들 떨며 손을 합장한다.
 
496
"글쎄 웬 사람이야?"
 
497
"명색 없이 돌아다니는 놈이올시다."
 
498
"어데 살어?"
 
499
"살기는 가평(加平) 살었읍니다."
 
500
"그런데……?"
 
501
"살 수가 없어서 서울로 왔읍지요. 사흘밖에 안되었읍니다."
 
502
"그래서?"
 
503
"그래서 오기는 왔지만 무슨 벌이가 있어야지요. 갈 데두 없구…… 그래서 돌아다니며 빈집이 있으면 들어가 자구 하는데 여기는…… "
 
504
"여기는…… 그래 어쨌어?"
 
505
"네 그저, 그저…… 저…… 오늘 저녁에도 밤새껏 돌아다니다가 아까 이 앞으로 지나는데 대문이 열렸세요. 그냥 무심히 지내가다가 우연히 못쓸 생각이 나서…… "
 
506
"못 쓸 생각?"
 
507
"네, 그저 배는 고프고 칩기는 하고…… 홍두깨로 치면 담 아니 넘을 놈이 없더라구…… 그저 잠시 못쓸 생각이 나서 다시 돌켜 와가 지구는… "
 
508
그의 말은 무어나 훔치러 들어왔다는 뜻이다.
 
509
팔모로 훑어보아야 그가 지금의 사건 가운데 들어 한몫을 보는 인물로 여길 수가 없다.
 
510
단지 한 개의 룸펜이다.
 
511
영호는 막상 몰라 그를 끌고 마나님네 집에 와 대문을 흔들어 깨워 마나님께 보였으나 그 집 행랑에 묵던 시골뜨기는 아니라고 한다.
 
512
할 수 없이 그를 놓아보내고 마침 마나님네가 잠이 깬 기회에 화로불을 피우게 하고 또 담요도 하나 빌렸다. 그리하여 오복이는 담요와 화로불을 가지고 그 집으로 다시 들어가고 영호는 자동차를 몰아가지고 집으로 올라왔다.
 
513
영호는 얼고 지친 몸을 전기 고다쓰를 묻어놓은 침대 속에 뉘었으나 잠은 오지 아니하였다.
 
514
오늘 하루 종일 활동한 것은 결국 실패한 것밖에는 없다. 그것도 조그마한실수에서 생긴 큰 실패다.
 
515
만일 오늘 밤의 실패가 없었더라면 사건은 당장에 해결이 되었을지도 모르는 것이다.
 
516
이렇게 생각하니 자꾸만 안타까와 견딜 수가 없다.
 
517
더구나 그 실책으로 인하여 '그 여자’가 다른 일파의 독수에 붙잡히고말았으니!……
 
518
뜬눈으로 몇 시간 아니 남은 밤을 새우고 여덟시쯤 일어났다.
 
519
그는 아침운동이나 목욕이나 산보도 다 잊어버렸다. 아침부터 활동을 하자는 것이다.
 
520
마침 전화가 때르르하고 운다. 이 새벽에 웬 전활까? 상준이나 오복 인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필경 무슨 새로운 소식이겠지.
 
521
영호는 수화기를 떼어 들었다.
 
522
"네."
 
523
"댁이 백영호요."
 
524
말씨는 대단 거만하거니와 음성도 귀에 익지 아니하다.
 
525
영호는 불쾌함을 참고 천연스럽게 그렇다고 대답을 하였다. 그랬더니 저편에서는 갑자기
 
526
"허허 허허."
 
527
하고 가장 유쾌한 듯이 웃음을 웃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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