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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염마(艶魔) ◈
◇ 1. 손가락 한 토막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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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4.5.16~11
채만식
1
艶 魔[염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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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손가락 한 토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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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이 방금 물러가고 난 어설픈 자리에 아직 봄빛이 살오르지 못한 삼월 초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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늦은 아침 산보객들의 그림자까지도 드물어진 계동 중앙학교 뒷산 송림의 베어 낸 소나무 등걸에 우두커니 걸터앉아 있는 영호는 무엇인지 안타까이 기다리는 눈으로 헤어져 가는 산보객을 두루 여살펴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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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차 분명해지는 햇발이 솔잎 사이로 비쳐 들어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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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치는 햇빛이 반갑다고 높다란 소나무 가지에서 솔새가 가느다랗게 재재거 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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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거운 침묵에 잠긴 대궐 뒤꼍에서는 아침거리를 찾는 솔개미가 한 마리 삐 뾰로로 울면서 공중을 두루 날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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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학교에서는 학생이 점점 모여드는지 웅성거리는 소리가 차차 요란해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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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침내 땡땡땡 종소리가 울린다. 종소리에 정신이 드는 듯이 영호는 앉았던 소나무 등걸에서 벌떡 일어섰다. 일어서면서 그는 혼잣말로 중얼거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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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엣, 무어 일거리가 좀 생겼으면…… 그저 시뻘건 피가 흐르는 사건…… 콱 부딪쳐 눈에서 불이 번쩍 나는 큰 사건이라도 하나 생겼으면…… 엣, 괜히 쓸데없는 생각에 사람이 침울해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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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상불 무얼로 보나 영호는 침울한 일이 없는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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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선 천석거리나 되는 유산을 물려받아 그것을 착실한 사음(舍音)에게 맡겨 두고 그 수입으로 생활을 하는 터요, 또 그의 인생관이나 관념이 낙천적이며 건실한지라 그 방면으로부터 갑자기 번뇌로운 변화와 타격이 생겼을 리는 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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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도 스물일곱이니까 이십 안팎의 청소년에게서 보는 막연한 번민도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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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 결혼도 아니 했고 양친도 다 돌아갔으니 아무런 가정적 계루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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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통학교로부터 중학교 대학까지 정규로 마치었고, 스포츠에는 무엇에나 능하지만 그중에도 유도와 철봉과 권투에는 전문적 기능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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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은 대개 과학서류를 보고 평소에 하는 일은 응용화학과 전기에 관하여 (그의 집에는 그 방면의 전문가도 부러워할 만한 실험실이 완비되어 있다) 연구를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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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이 생김새도 싱겁게 크다거나 잔망스럽게 작지 아니하여 좋은 체격이요, 타고난 천성이 쾌활하여 까스럽지 아니하여 누구에게나 호감을 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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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외딸을 둔 과부·마나님이 있다면 사윗감으로 침을 삼킬 만한 좋은 청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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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그이니 무엇으로 보나 오뇌와 수심이 생길 리가 없을 터인데, 요 새 며칠은 그가 혼자 있을 때면 아주 알아보게 우울하여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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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그새 해내려오던 일상생활은 변화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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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에 일어나면 바로 도장(道場)에 들어가 철봉과 권투의 연습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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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욕을 하고는 그 길로 중앙학교 뒷산으로 아침 산보를 올라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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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아와서는 조반을 마치고 나서 책을 보고 연구실에 들어가 실험을 하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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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그런 것이 전에는 기쁜 마음으로 당길성 있게 해오던 것인데 요새 며칠 동안은 마치 도는 기계가 동력이 그쳐도 타성적으로 그냥 돌듯이 무심중에 내키지 않게 반복이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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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고 혼자 있는 때(실상 하루의 대부분을 혼자 지내지만) 더우기 아침 산보를 왔을 때에는 유달리 더 침울해지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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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아침에 산에 올라와서는 약수먹기는 젖혀놓고 누구를 기다리는 것도 같고 찾는 것도 같이 이 골 저 골로 돌아다니다가는 이 소나무 등걸에 걸터 앉아서 평소에 정한 시간보다 삼십 분이나 더 보내고 겨우 중앙 학교 의상 학종 소리에 정신이 들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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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하여 혼잣말로 그렇게 중얼거리며 막 한 걸음 내어딛으려고 하는데 등뒤에서 발자국 소리와 함께 "선생님 "하고 부르는 소리가 들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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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 뒤에서 영호를 부르는 사람은 오복이라는 자동차 운전수다. 자동차 운전수라니, 영호 집의 자동차 운전수는 아니다. 영호가 사준 자동차를 가지고 경성자동차부라는 택시집에 붙여서 먹을 벌이를 하고 있는 사람이다. 오복이가 이렇게 일찌기, 더구나 산에까지 찾아온 것은 예사일이 아닌지라 영호는 직각적으로 '일거리’가 생긴 거라고 짐작하고 침울하던 기분이 갑자기 긴장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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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웬일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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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인사하듯 묻는 말이나 그 속에는 막연한 기대를 머금었건만 오복이는 영호의 명상을 깨트린 것만이 미안한 듯이 그저 빙그레 웃으며 대답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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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멋, 그저…… 좀 뵈러 왔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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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 그럼 집에서 기다리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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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가벼운 실망을 느끼면서 대답하는 영호는 그래도 오복이가 대수롭잖은 일로는 이렇게 찾아오지 아니했으리라고 믿는지라 무어나 그의 얼굴에서 찾아내려고 유심히 훑어보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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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이 지나도 아니 오시길래 저도 산보삼어 올라왔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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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영호의 산보하는 시간은 매우 정확하였었다. 여섯시에 일어나 아침 운동을 한 시간 동안 하고 목욕하는 데 삼십 분, 그리고 산보하는 데 한 시간 ——— 그러니까 여덟시 반이면 으례 산에서 돌아오건만 오늘(뿐 아니라 연해 여러 날)은 아홉시가 지나도록 돌아가지를 아니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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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 참 요새는 내가 산에 와서 시간을 너무 허비해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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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호는 자기의 잘못이나 수하 사람에게 들킨 듯이 얼버무린다. 그러고 나서 화제를 돌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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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요새 벌이는?…… 심심치나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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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뭘요. 그저 그 대중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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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제 봄이 되고 하면 차차 나어지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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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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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사람은 어깨를 나란히 하고 잠시 말이 없이 걸어내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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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호는 오복이가 이렇게 긴히 찾아와서도 찾아온 요건을 곧잘 이야기 아니하는 것이, 그러면 또 교통사고나 일으키어 과료나 벌금을 물게 되니까 그 변통을 해달라고 오기는 와가지고 어려워서 섬뻑 말을 꺼내지 못하지나 아니하나 생각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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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실상은 그런 것이 아니다. 오복이는 오늘 아침에 영호에게 보고 할 조그마한 일거리를 발견해 가지고 온 것이었었는데 그가 며칠 사이에 사람이 변한 듯이 우울해진 것을 보고 무슨 딴 근심이 생겼나 하여 그다지 신통 스러워 보이지도 아니하는 그 일거리를 말하기를 주저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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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님, 요새 무슨 근심되시는 일이 계셔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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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동안을 묵묵히 걸어오면서 몇번이나 주저하다가 오복이는 필경 이렇게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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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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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고 영호는 오복이를 돌려보며 반문을 하였다. 그러면서 속으로는 내가 그렇게 남이 알아보도록 침울해졌나 허허. 이거 그래서는 안되지…… 이렇게 생각하고 일부러 쾌활하게 웃어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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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네 보기에 내가 무얼 근심하는 것 같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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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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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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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까도 등 뒤에서 한참이나 서서 보았는데 꼭 정신 없는 이 같애요. 앉아 계신 것이…… 그러고 얼굴에도 수심이 가득하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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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복이의 말에 대답이 없이 또 한동안 걸어오던 영호는 갑자기 고개를 돌리면서 아주 지성으로 묻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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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네 연애 해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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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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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도 의외의 말인지라 오복이는 발을 멈추고 서서 대체 무슨 뜻으로 그런 말을 묻는가 싶어 영호의 얼굴을 아주 빠끔히 치어다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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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그렇게 놀래나 ?…… 자네 연애해본 적이 있는가 묻는 말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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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복이는 비로소 싱그레 웃으며 인제 속을 알았다는 듯이 다시 한번 더 웃는다. 그러나 시치미를 뚝 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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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애요 ? 더러 해보았지요. 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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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쎄 물어보는 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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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호는 다시 말을 끊고 묵묵히 걸었다. 그들은 벌써 중앙학교 운동장 가운데까지 이르렀다. 넓은 운동장이 심심한 듯이 텅 비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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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복이는 이거 우리 선생님이 기어코 연애병에 걸리고 말았구나…… 그러나 다른 병과 달라 되레 다행이다 생각하고 더 물으려고도 아니하고 걱정도 놓아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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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중앙학교 문 밖을 나섰을 때에 영호는 다시 발길을 멈추고 오복이를 돌아보며 묻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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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네 오스카 와일드의 The sphinx without a secret라는 소설 읽어 보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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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복이는 정규로 중학까지 마친 터이나 제게 묻는 영호의 그 영어를 알아 듣지 못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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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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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네는 안 보았으리라 마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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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고 영호는 설명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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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스핑크스 위드아웃 어 시크레트란 단편소설인데 주인공이 어느 착잡한 거리에서 누른 칠을 한 마차를 타고 있는 썩 눈에 드는 여자 하나를 발견 했단 말이야. 그래 그 여자를 다시 좀 만나볼 양으로 매일 그 거리에 나와서 마차란 마차는 모조리 끼웃거리고 다닌다는 이야긴데, 그러다가 필경 어느 연회에서 만나가지고 연애를 잠시 하기는 했지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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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면 선생님도 인제 만나시기는 만나시겠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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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복이는 영호가 채 말도 끝내기 전에 웃으면서 말허리를 자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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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 어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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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호는 나무라는 듯하나 눈으로는 웃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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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사람 소설 이야기를 하는데, 내가 만나기는 누구를 만난단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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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따, 그렇게 시치미를 떼실 것도 없고, 또 못 만나신다고 걱정하실 것도 없읍니다. 아마추어 탐정 백영호씨요 또 그 수하에 이 오복이가 있는데 어떻게 한들 못 찾아내겠읍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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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복이는 신이 나서 활개를 크게 치며 뽐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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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영호는 고요히 고개를 흔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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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건 안돼…… 내가 무슨 탐정을 직업적으로 하는 바도 아닌데 그 방법으로 그이를 찾아내려 드는 것은 어쩐지 불순하고 죄스러운 것 같어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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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말에 오복이는 하하 하고 크게 웃는다.
 
83
"제가 잘 알어맞혔지요 ? 어쨌거나 선생님이 연애병에 걸리신 것만은 사실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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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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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호는 힘없이 대답을 한다. 바로 한 십여 일 전 일이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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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호가 아침 산보를 하고 내려오노라니까 그때까지 보지 못하던 이상한 산보 객의 한 쌍이 아래로부터 올라오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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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는 남자 노인인데 허연 수염이 탐지게 났고 부대한 몸에 잘 얼리는 커 달란 외투를 입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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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옆에는 멀리서부터 보아도 가냘프고 청초하게 생긴 배젊은 여잔데 윤이 번질번질하는 털외투에 역시 새까만 전 없는 모자를 썼었다. 외투를 벗으면 하늑하늑 한 보드라운 양장을 했으리라고 영호는 생각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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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호와 그 한 쌍 남녀가 가까이 마주쳤을 때에 졸연히 무엇에 놀라지 아니하는 영호건만 눈이 번쩍 띄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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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호는 자기가 평소에 애인으로 공상에 그려보던 그 여자를 현실에 만나는듯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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갸름한 얼굴에 여녀같이 노블한 코, 조그마한 입, 역시 어린 듯이 조그맣게 올라붙은 아래턱, 그리고 영롱한 두 눈 ——— 이 여자와 만난 것은 영호에게 커다란 경이요, 또한 견딜 수 없는 기쁨이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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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사람을 지나쳐 놓고 영호는 체모도 없이 돌아서서 그들의 등 뒤를 바라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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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동화를 신었기 때문에 늘 하이힐만 신었던 듯한 걸음매가 좀 부자연스러워 보이나 호리호리한 뒤태도까지도 영호가 심중에 그리던 그 여자와 꼭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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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호는 그렇게 놀라기는 하면서 그래도 탐정식으로 여러가지 것을 관찰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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즉 그 노인과 여자가 얼굴 모습이 비슷하니 부녀(父女)간이라는 것, 그들의 입은 외투며 더우기 노인의 쓴 모자로 보아 중국 방면에서 돌아왔으리라는 것, 여자는 무엇인지 고초를 겪어왔기 때문에 볼에 가벼운 그림자가 끼고 또 안색이 약간 창백하다는 것…… 그 뒤 닷새 동안 그렇지 아니하여도 명랑한 영호의 마음은 더욱 명랑 하여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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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산보 시간을 변경하여 여덟시로부터 시작하였다. 그리해야 그는 그들과 같이 산보를 하고 또 물터에서도 만날 수가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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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운정 산보터의 참새들은 이 새로 나타난 큰 노인과 어여쁜 여자의 이야기로 꽃이 피었다. 영호도 그 틈에 끼여 그 부녀의 내력과 근지를 들을까 하였으나 아무도 그것을 아는 사람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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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 부녀의 그림자가 산보터에 나타난 지 닷새 만에는 그들이 의외에 나타났던 것처럼 역시 의외에 사라지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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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호는 그 나흘 동안 그들을 세세히 관찰하였다. 그리하여 그들 자체가 남의 눈에 몹시 띄게 된 존재임에 불구하고 그와 같이 남의 주의를 끌게 되는것을 꺼리어하는 눈치가 완연히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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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자기네의 행동을 감시하지나 아니하나 하고 줄곧 사방을 조심스럽게 둘러보곤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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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하던 끝에 필경은 발자국이 뚝 그쳐버리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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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호는 이래 침울하여졌다. 그는 『레미제라블』의 한 장면을 생각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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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발장이 코세테를 데리고 공원에 산보를 늘 나오는데 줄리앙이 그들을 추근추근 하게 따르니까 그만 갑자기 자취를 숨겨버린 ——— 그와 꼭같은 경우라고 영호는 생각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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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생각하매 영호는 연연한 생각 외에 그들에게 필시 깊은 속사정이 있으리라는 호기심까지도 버썩 생기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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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하여 몇번이나 하려면 할 수 있는 탐정적 수단으로 그들의 거처를 탐지 하며 그 근지와 내력을 알아내어 볼까 하였으나 그것이 어쩐지 죄스러운 성만 싶어 차만 손을 대지 못하고 혼자서 그와 같이 민민하고만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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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호와 오복이는 묵묵히 걸어서 집 문앞까지 이르렀다. 문앞에는 오복이의 자동차가 놓여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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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고두고 참고가 되겠으므로 여기서 잠깐 영호 집의 구조를 이야기해 두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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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 가을에 영호는 계동 위생계터의 주택지의 동편 언덕 위에 그 중에도 훨씬 남쪽으로 당겨 자기가 손수 설계한 양옥을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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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열두어 층 되는 석축을 올라오면 나직한 벽돌담에 역시 나직한 회색 철문이 달리어 있다. 문을 들어서면 그다지 넓지는 못하나 손으로 쓰다듬은 듯한 정원이 있다. 정원과 연하여 바로 서향의 석조(石造) 양옥이 서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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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관문을 열고 복도로 올라서면 바른편에는 이층으로 올라서는 층계가 있고 복도가 막다른 곳에 서생 겸 심부름꾼으로 부리는 상준의 방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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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곳에서 다시 복도가 바른편으로 굽어가지고 좌우로 방이 하나씩 있고 복도는 그대로 부엌에까지 뻗히었다. 이 좌우로 있는 방 가운데 상준이가 거처 하는 방과 접한 왼편 방에는 침모 겸 식모로 있는 노인이 거처하고 바른 편 방은 주부의 방으로 예정한 것이나 지금은 식당으로 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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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층은 층계로 올라가면 한가운데로 복도가 있고 그 좌우로 전부 영호가 쓰는 방이 있다. 왼편 큰방이 실험실이요, 바른편으로 첫번에 있는 것이 응접실 겸 항용 거처하는 방이요, 그 다음 것이 지금까지 아무에게도 보인 적이 없는 서재 겸 침실이다. 이 방만은 심지어 소제까지도 영호 자신이 하지아 무도 들인 적이 없다. 아무도 들인 적이 없다니 말이지 그러한 곳이 또 하나 있다. 그것은 지하실이다.
 
114
지하실의 원 문은 부엌으로 통하였으나 굳게 잠기어 있고 그 밖에는 어디로 통하는지 아는 사람도 없다. 또 누가 알아내려고도 아니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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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층 복도에서 다시 더 나아가면 층계가 있어가지고 그것이 뒤 울안에 지은 도장으로 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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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도장은 한편이 광이요, 그 다음이 도장이요, 그 옆으로 목욕탕이 붙어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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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층 식당에서 영호와 오복이는 맞상을 하여 조반을 먹었다. 조반 후에 영호는 이층으로 올라가고 오복이는 일단 자동차에까지 다시 나와 운전대 쿠션 밑에 넣어두었던 소포 같은 꾸러미를 꺼내가지고 디시 들어와 이 층으로 올라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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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호는 응접실에서 담배를 피우며 오복이를 기다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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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방은 복도로부터 들어오는 도어가 있고 동편과 남편으로는 두터운 비단 커튼을 가린 두 겹 유리창이 달리어 있다. 그리고 침실로 통하는 도어가 있다. 방안에는 한가운데 조그마한 둥근 탁자와 또 암체어와 소파가 두어 개있고 전화가 침실 편 벽에 달렸을 뿐 별로 눈에 띄는 것이 없다. 물론 사 방벽에는 그럼직한 그림의 액이 달려 있기는 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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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호와 오복이는 탁자를 사이에 주고 마주 대하여 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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탁자 위에는 지금 오복이가 가지고 들어온 소포 같은 꾸러미가 놓여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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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이 장차에 커다란 파동을 일으킬 장본인 줄은 두 사람이 아직 꿈에도 생각지 못하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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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호는 소포 꾸러미를 집어 들고 앞뒤로 살펴보며 묻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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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게 웬 거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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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선 좀 풀어보세요. 아무래도 무슨 조건이 붙은 것 같애요…… 제가 끈을 풀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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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고 오복이는 손을 내어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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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만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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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호는 오복이의 하던 말은 듣지도 아니한 듯이 소포 꾸러미에 이상한 주의가 점점 깊이 끌리어간다. 그는 혼잣말같이 중얼거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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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 이상한데…… 경성 가회동 이백십오번지라고 썼지만 가회동에 웬게 이백십오 번지가 있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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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지요…… 서울 안에 이백 번지가 넘어가는 데라고는 관철동하고 청진동하고 그 멫 군데밖에는 없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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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 그러면 이것부터 조건이 상당히 붙는 거야…… 가만 있자."
 
133
영호는 자리에서 일어나 건너편에 있는 실험실로 들어가더니 강도(强度) 의 확대경(擴大鏡)을 가지고 들어와서 소포에 붙은 우표와 스탬프를 비추어 본다.
 
134
"흥, 이건 완전히 트릭야…… 스탬프는 광화문우편국 것인데…… 그리고 날짜가 이것 7 6 12라고 박혔으니 벌써 재작년 것이지…… 그런데 보게."
 
135
하고 영호는 확대경을 옆에 놓으면서 뒤집어놓은 소포를 가리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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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신지(發信地)가 군산 산상정 십팔번지라고 썼지 ? 분명 이 발신인 유대 설이란 것도 아무렇게나 지은 이름일걸세…… 그것뿐인가…… 이 소포를 싼 하도롱지를 보든지 잉크빛을 보든지 재작년 유월에 띄운 거라면 이렇게 말쑥하고 새로울 리가 없는 거야…… 지문이나 남아 있나 볼까…… 자네도 이리 오게…… "
 
137
영호는 오복이를 데리고 건너편 실험실로 들어갔다.
 
138
조선 방으로 하면 무려 여섯 간은 됨직한 넓은 방에 가로는 약품과 기계들을 넣은 장이 군데군데 들려 놓여 있다.
 
139
실험대는 둘인데 하나는 화학실험대요 하나는 전기실험대다. 그리고 남편 구석으로는 사진 암실이 있다.
 
140
오복이는 가끔 이 방에 들오와 실험에 조력했기 때문에 서툴지가 아니하다.
 
141
영호는 물론 처음부터 조심해서 만지었고 오복이도 줄곧 장갑을 끼고 있었기 때문에 만일 지문이 나타난다면 두 사람 중의 누구의 것은 아닐 것이다.
 
142
영호는 조심스레 그리고 세밀하게 실험을 해보았으나 풀칠을 한 한 곳과 우표 붙은 한귀퉁이에 아주 희미하게 지문처럼 생긴 것이 있을 뿐 아무 것도 얻지를 못하였다.
 
143
원체 종이가 하도롱지인 까닭에 확실한 지문이 남아 있을 리가 없는 것이다.
 
144
할 수 없이 두 사람은 소포 ——— 가짜 소포 ——— 를 풀어보기로 하였다.
 
145
이 소포가 가짜요, 그것이 오복이의 손을 통하여 이렇게 들어왔다 하면 거기에 미상불 약간의 위험한 생각이 없는 것도 아닌 것은 아니다.
 
146
그것은 영호가 과거 ——— 과거라야 최근 삼사 년 사이지만 ——— 암암리에 남의 원망을 산 몇가지 일이 있었던 때문이다. 즉 그의 탐정적 활동으로 인하여 ——— 그러니 원혐을 먹는 사람이 위험한 폭약 같은 것을 이처럼 트릭을 써서 보냈을지도 모르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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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호나 오복이나 말은 아니하지만 두 사람이 다같이 이런 생각을 가지었고, 더우기 오복이는 자기가 그것을 얻어가지고 온만큼 속이 죄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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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풀어보지 말고 그대로 경찰서에 습득물로써 가져다 주자고도 하고 싶었으나 여호의 고집을 잘 아는지라 말을 내지 못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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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호는 그러는 사이에 벌써 손가위로 묶은 노끈을 자르고 와삭와삭 소리 가나는 하도롱 종이를 펴기 시작한다.
 
150
하도롱 종이 속에는 신문지가 한 겹 싸여 있고 또 신문지 밑에는 유지로 한 겹이 싸여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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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차 깊이 들어가면서 오복이의 얼굴에는 물론이요 영호의 얼굴에도 긴장한 빛이 완연히 나타나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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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지를 풀고 나니 허연 솜뭉치가 나온다. 무슨 냄새가 나나 하고 영호는 코를 벌름거리었으나 아무 냄새도 나지 아니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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옆에 놓인 두 개의 핀셋을 집어 영호는 더욱 조심하여 솜뭉치를 헤치었다.
 
154
보통 양약국에서 파는 탈지면이라 둘둘 만 것이 곧잘 풀어진다.
 
155
다 헤쳤을 때에 그 속에서 나온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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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호와 오복이는 다같이 너무도 의외로움에 그리고 이상스러움에 '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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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고 놀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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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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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가락 한 토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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솜뭉텅이 속에서 나온 것은 바로 사람의 손가락 한 토막이다.
 
161
소포 꾸러미가 상당한 조건이 붙는 것이라는 것은 미리미리 짐작치 못 한 바가 아니나 명민한 영호로도 그 속에서 사람의 손가락 한 토막이 굴러 나올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했던 것이다.
 
162
이 너무도 그로 백%의 사실을 의외에 접한 영호 그리고 오복이는 잠시 멍하니 그것을 바라보고 있을 뿐이다.
 
163
그러나 다음 순간 영호의 탐정의식이 활동하기 시작하였다.
 
164
그는 핀셋으로 손가락을 집어들고 세밀히 관찰하기 시작하였다.
 
165
손가락은 엄지손가락인데 바로 대 밑에서 잘랐기 때문에 형상으로 보아 왼 편인 것이 분명하다.
 
166
피가 몹시 엉겨붙은 것을 보면 산 사람의 것을 잘라낸 것이요, 살의 변색한 정도와 피의 엉긴 정도로 보아 사흘이나 이틀 전에 자른 것이다.
 
167
검푸르게 변색이 되어 분명히 알 수는 없으나 주름살이랄지 손톱으로 보아 젊은 사람의 것은 아닌 듯하고, 그러나 황한 일을 하거나 하는 노동자의 것이 아니요, 손끝이 고운 신세 편한 사람의 것이다.
 
168
손가락 등에 털이 없는 것으로 보아 전신에도 털이 적고 수염도 별로 없을것이며 비교적 건강한 사람의 것이었었다.
 
169
영호는 마치 골동품 수집관이 무슨 진기한 고물이나 발견한 듯이 이 끔찍한 손가락토막을 흥미 깊게 세세히 조사하고 나서 다시 지문을 뜨고 또 석고(石膏) 로 모형까지 떠놓았다.
 
170
그리하는 동안에 오복이는 묵묵히 영호의 눈치빠른 조수 노릇을 할 따름이다.
 
171
지문을 뜨고 석고로 모형을 뜨고 그러고 난 뒤에 영호는 손가락토막을 전처럼 전에 쌌던 재료로 감쪽같이 도로 싸놓았다. 그러고 나서 의자에 걸터 앉아 담배를 붙여 물고는 오복이더러 비로소 그것을 얻은 경로를 묻는다.
 
172
오복이의 말은 다음과 같다.
 
173
그날 아침 오복이가 붙어 있는 경성자동차부에 여자 손님 하나가 나타났다.
 
174
마침 오복이의 번이기 때문에 그 여자 손님을 태우고 경성역까지 나갔다.
 
175
경성역에 도착한 것이 여덟시 오분.
 
176
여자 손님은 자동차에서 내리면서 일원짜리 두 장을 핸드백에서 꺼내어 오복이를 주었다. 오복이는 식전 마수에 너무 반가와
 
177
"너무 많습니다."
 
178
고 하니까 그 여자는 생긋이 웃으며
 
179
"네…… 그냥 받아두세요."
 
180
하고는 대합실로 들어가 버렸다.
 
181
오복이는 속으로 오늘 마수거리를 잘했구나 싱글벙글 자동차를 몰아 들어왔는데, 자동차부에 돌아와 보니까 차실 안에 언뜻 눈에 띄는 것이 있었다.
 
182
그것이 지금 이 손가락토막을 싼 소포 꾸러미였었다.
 
183
항용 같으면 경찰서에 가져다 주든지 도로 찾으러 오기를 기다리겠지만 택시 값이 팔십 전인데 팁을 일 원 이십 전이나 주고, 또 고운 미소까지 보여준 마수거리의 어여쁜 색시였던지라 그의 미소를 또 한번 즐길 겸 오복이는 선 자리에서 자동차를 몰아 다시 경성역으로 나갔다.
 
184
대합실로부터 식당, 티룸, 이발소까지 고비샅샅이 찾아보고, 또 입장권을 사가지고 플랫폼까지 들어가서 여기저기 찾아보았으나 그 여자의 그림자라 고는 보이지 아니하였다.
 
185
그는 할 수 없이 소포에 쓰인 대로 가회동 이백십오번지로 찾아가려 하였으나 가회동에 이백십오번지란 있지도 아니한 곳이니, 그러면 이게 분명 조건이 붙은 것이라고 영호에게로 가지고 온 것이다.
 
186
영호는 이야기를 끝까지 듣고 있다가 고개를 끄덕끄덕한다.
 
187
"팁 일 원 이십 전이 그 소포를 경찰서에 가져다 주라는 수 수 룔세…… "
 
188
"네? 경찰에 가져다 주라고요?"
 
189
오복이는 의아해서 묻는다.
 
190
"그래…… 그러나 그건 차차 알고…… 그 여자가 대관절 어떻게 생겼 더나?"
 
191
"아주 상이야요……… 얼골이 갸롬하니 코가 오뚝하고 입이 어쩌면 그렇게 암상스럽게 예쁜지…… 턱은 더 예쁘지요."
 
192
오복이의 말에 점점 놀라운 빛을 띠던 영호는 갑자기
 
193
"옷은?"
 
194
하고 묻는다.
 
195
"양장이지요. 새까만 털외투에."
 
196
오복이가 말을 마치기 전에 영호는
 
197
"응 !"
 
198
하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선다.
 
 
199
7
 
 
200
영호는 반사적으로 다시 의자에 펄씬 주저앉는다.
 
201
그의 얼굴에는 일시에 피가 물려올라와 벌겋게 상기가 되고 눈은 참담하다 할 만큼 번쩍거린다.
 
202
"조고마한 감장 모자를 썼지. 키가 호리호리하니 날씬하고?"
 
203
영호의 놀라는 데 따라 놀란 오복이는 묻는 대로 고개를 끄덕거린다.
 
204
영호는 겉잡을 수 없이 머리가 혼란하여졌다.
 
205
손가락토막을 싼 가짜 소포를 오복이의 자동차 속에 버리고 간 것은 갈데 없이 산보터에 나타났던 그 여자다.
 
206
그 여자!
 
207
첫인상이 머리에 꽉 박혀가지고 연연한 그리움에 잊지 못하던 그 여자다.
 
208
그 여자가 이 확실히 범죄 ——— 범죄라도 아직 단언할 수는 없으나 상필 무서운 성질을 띤 이 범죄에 관계하다니?!
 
209
그는 오복이가 한 말에 자기의 귀를 의심하는 듯이 다시 한번 다지어 묻는다.
 
210
"얼골이 갸롬하고, 그런데 좀 창백하지?"
 
211
"네 네. 그렇게 말씀하시니 생각납니다마는 좀뿐 아니라 몹시 창백해요."
 
212
"눈이 영롱하고 코가 노블하고…… "
 
213
"네."
 
214
"입이 조고맣고…… 조고만 턱이 위로 올라 붙고…… "
 
215
"네 네."
 
216
"그러고 윤이 반짝반짝하는 털외투에 까만 모자…… "
 
217
"네."
 
218
"참!"
 
219
영호는 문득 생각난 듯이 묻는다.
 
220
"말소리는?…… 어때? 무슨 사투리가 없어?"
 
221
영호는 그의 말소리는 들어보지 못했던 것이다.
 
222
"글쎄요…… 약간 남도사투리가 섞였든 것도 같은데…… 그거 확실히는 모르겠읍니다."
 
223
"남도라도 전라도 사투리가 다르고 영남 사투리가 다르잖나?"
 
224
"글쎄 그것을 자세…… "
 
225
오복이는 주의하지 아니한 실수에 무렴한 듯이 말끝을 흐린다.
 
226
영호는 팔로 몸을 짚고 새끼손톱을 야긋야긋 씹으면서 골똘히 생각을 한다.
 
227
"선생님 아시는 이야요?"
 
228
오복이는 머뭇머뭇하다가 물어보는 것이다.
 
229
"응…… 그러나 자네만큼밖에는 나도 몰라."
 
230
"?"
 
231
오복이는 그 말의 뜻을 알아낼 수가 없었다. 영호는 설명을 한다.
 
232
"산모터에서 멫번 만난 것뿐이다."
 
233
오복이는 싱긋이 웃었다. 그러고 속으로.———
 
234
'하하 우리 선생님이 모처럼 애인 하나를 발견했는데 그가 갑자기 어데로 사라졌다…… 그런데 그가 이 소포에 관계된 인물이다…… 그래서 저렇게 흥분이 되셨구나.’
 
235
영호는 오복이가 그 속을 짐작하는 것을 보고 역시 고미소를 띠고 일어섰다. 그의 심중에는 벌써 계획이 들어섰다.
 
236
"자, 한바탕 해보세…… 이 소포는 어쨌거나 저편이 고의로 세상의 주목을 끌려고 자네를 시켜 경찰서에 보내자는 것이니까 좌우간 경찰서에 가져다 주게…… 그러면 그것이 신문에 날 것이고 거기 따러 사건도 한걸음 더진전이 되겠지…… 그렇지만 그냥 누가 자동차 안에 ——— 정거장에 나갔을 때 말이야 ——— 자네 모르는 사이에 버리고 간 것을 가지고 왔다고 그래 응! 그 여자 말은 일체 입밖에 내지 말란 말이야."
 
237
"네 네."
 
238
"그러고 지금 내려가는 길에 재동파출소에 들러서 시치미를 뚝 떼고 가회동에 서광옥이라는 사람이 어느 번지에 사나 물어보란 말이야, 서광 옥이…… 이 소포의 수신인 말야…… 헛걸음이겠지만 혹시 또 모르는 일이니까."
 
239
"네."
 
240
"그리고 역시 막상 모르니까 자네가 오늘 낮차 ——— 아니 밤차로 가도 관계 찮 겠지 ——— 밤차로 군산까지 가서 산성정 십팔번지를 좀 조사해 가지고오게."
 
241
"네…… 그러면 위선 재동파출소에 가서 알아보고 전화를 건 뒤에 경찰서도 가겠읍니다."
 
242
"응."
 
243
오복이는 소포를 들고 나갔다.
 
244
오복이를 보내고 나서 한 십오 분 가량 영호는 깊은 생각에 잠겨 있는데 등 뒤에서 전화벨이 따르르 하고 울린다.
 
 
245
8
 
 
246
영호는 일어나서 수화기를 떼어 들었다. 전화는 오복이에게서 온 것이다.
 
247
"지금 와서 호적대장을 뒤져봤는데 그런 사람은 없대요."
 
248
"응 알았어…… 지금 경찰서로 가겠지?…… 가만 있자, 그걸 가지고 도루 오게."
 
249
무슨 생각으로 영호는 오복이더러 도로 가지고 오라고 하였다.
 
250
오복이는 곧 돌아왔다.
 
251
"왜요? 더 조사해 보실 것이 있어요?"
 
252
"아니…… 그걸 자네가 직접 가지고 가면 괜히 자네한테 혐의가 돌아와서 성가시어."
 
253
그도 그럴 듯한 말이다. 불난 것을 보고 "불이야!"소리친 사람을 먼저 조사하 듯이.———
 
254
영호는 아래층으로 내려가 책보 하나를 가지고 다시 올라와서 가짜 소포를 거기다 쌌다.
 
255
"경찰을 괜히 우롱하자는 것은 아니지만, 불려다니면 쓸데없이 성가시 고우리 활동만 방해되니까…… 이놈을 가지고 백화점으로 가란 말이야. 가서 변소에 들어가서 아무도 보지 않게 슬그머니 속엣것만을 풀어놓고 책보는 포켓 속에 넣어가지고 나오면 백화점에서는 찾으러 오는 사람을 기다리다가 경찰서로 보내겠지…… 알겠나?"
 
256
"네."
 
257
오복이는 보에 싼 것을 맡아가지고 일어섰다.
 
258
"그리고 돌아오는 길에 여관조합에 들러서 ——— 어딘지 아나?"
 
259
"모르지만 아무 여관에나 전화로든지 물어보면 알겠지요."
 
260
"응 알어가지고 찾아가서 여관일람표 한 장을 얻어가지고 오게…… 인쇄 해 두고 쓰는 게 있으니까."
 
261
오복이는 책보에 싼 것을 받아들고 물러나갔다.
 
262
영호는 남편 유리창 앞에 놓인 암체어에 푹 걸터앉아 창 밖을 내어다 보고있다.
 
263
몇 줄기 살이 오른 듯한 따스한 볕이 유리창으로 쪼여든다.
 
264
바로 눈아래 휘문학교 운동장에서는 새까만 학생들이 그득 들어서서 아물거리고 있다.
 
265
휘문학교 정원에 서 있는 포플라의 나무끝이 제법 파릇파릇하다.
 
266
멀리 보이는 남산에는 엷은 아지랭이가 끼어 아른거린다.
 
267
다른 날이라면 영호는 완연히 보이는 봄빛에 반가이 "벌써 봄인가!"
 
268
하고 즐겨했겠지만 지금은 딴 생각에 골몰하여 그러한 것이 눈에 들어오지아니하였다. 차라리 그의 눈에는 산보터의 그 여자의 환영이 보일 뿐이다.
 
269
산보터에서 만나던 그 여자…… 그리고 큰 범죄를 저지른 그가 사람의 손가락을 잘라서 소포처럼 싼 것을 자동차에 내버리고 달아나는 역시 그 여자.
 
270
"내보살 외야차(內菩薩外夜叉), 겉은 그렇게 상냥하고 착하게 생겼으면서 속은 악독한 범죄를 하는 요부 독부?"
 
271
영호는 혼자 이렇게 중얼거렸다. 그러나 바로 고개를 흔든다.
 
272
"아니, 그럴 리가 없겠지…… 분명히 무슨 깊은 사정이 있는 일이 겠지…… 허, 이거 내가 이렇게 냉정하게 생각을 하지 못해 안 됐군…… "
 
273
영호는 일부러 냉정하게 생각을 하려고 애를 썼다. 그 여자에게 연연한 정이 끌리기 때문에 생각이 자꾸만 감정적으로 돌아감을 깨달은 것이다.
 
274
좌우간 일은 용이치 아니한 일이다. 사람의 손가락을 잘라서 그것을 일부러 경찰이 알고 세상이 알게 하느라고 가짜 소포를 만들어서 내버렸으니, 말 하자면 어느 큰 범죄의 준비 행동이라고 볼 수가 있다. 따라서 그 이면에 있는 인물들이 경찰의 수사쯤 두려워하지 아니하는, 그렇지 아니하면 결사적(決死的) 내용을 가진 것일 것이다.
 
275
그렇다면 큰 도적질이 아니면 복수의 행동일 것이다.
 
276
이렇게 차차 추리를 해가고 있는 판에 서생인 상준이가 올라와서 손님이 왔다는 말을 한다.
 
277
"손님? 누구야?"
 
278
"웬 안노인이야요…… 전에 선생님이 계시든 집 주인이라는가 봐요."
 
279
마침 쿵쿵거리며 층계 올라오는 소리가 나더니 도어를 밀어젖히고 안노인하나가 허둥지둥 방으로 들어선다.
 
280
영호가 작년까지 객지 생활을 하는 동안 한 이태나 하숙을 하고 있던 집노인이다. 노인이라야 오십밖에 아니 되었지만.———
 
281
"백서방, 나요 나야."
 
282
"네 네, 알었읍니다. 잘 오셨어요. 좀 앉으십시요."
 
283
영호는 노인이 무슨 일로 이다지 허둥지둥하나 싶어 궁금하였으나 우선 그렇게 인사를 하였다.
 
284
"아이구 앉는 게 무어유! 큰일 났는데…… "
 
285
평소에도 좀 허겁스러운 마나님인지라 혹시 누가 밥값이나 잘라먹고 달아난 것을 이러나 보다 짐작하고 영호는 웃으면서 그를 의자에 앉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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