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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인전기(女人戰紀) ◈
◇ 인생(人生) 제이관(第二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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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4.10.5~
채만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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女 人 戰 紀[여인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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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人生 第二關[인생 제이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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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이 여자로 태어나 부모 앞에서 자라다 출가를 하기까지가 인생으로 제 일 관문( 人生第一關門)이라고 한다면 결혼은 ── 남편을 맞이하고 가정을 이룩하고 시집살이라는 것을 하고 한다는 것은 그 제이의 관문( 第二關門)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리고 만일 우리의 일생을 싸움이라고 부른다면 결혼은 정녕 여자의 제이진(第二陣)이라고 일러야 옳을 것이다. 하되 여자는 그의 제이진이야말로 앞으로 전생애를 좌우하는 중대한 출진(出陣)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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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일 모레가 추석(秋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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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사흘달이 천심(天心) 높다랗게 솟아 있다. 일 년 열두 달, 그중 달이 좋다는 추석달이다. 거의 다 둥그렀고 거울같이 맑다. 밤은 이윽고 깊어 울던 벌레도 잠자고 괴괴하고…… 촉촉한 이슬기를 머금고 달빛만 빈뜰에 가득 괴어 꿈속이고 싶은 황홀한 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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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댁 진주(眞珠)는 우물에 두레박을 드리운 채 문득 자아올릴 생각을 잊고 서서 하도 좋은 달밤에 잠깐 정신이 팔린다. 무엇인지 저절로 마음이 흥 그로와 지 려고 하고, 이런 좋은 달밤을 두어두고 이내 도로 들어가기가 아까운것 같았다. 언제까지고 내처 이대로 있으면 싶었다. 그러나 또 혼자서 이렇게는 더 아까운 것 같았다. 그렇지만 그 아까운 것이 도리어 또 가만히 재미가 있기도 하였다. 한 어리고 처녀스러운 감성일 것이다. ── 시집을 오고 머리를 쪽을 찌고 하여 이름이 각시니 새댁이니지, 그러고 깍듯이 시어머니의 며느리 노릇이나 할 뿐이지, 아직껏 그는 열두살박이 애기 새 서 방준호( 俊浩) 의 도련님 시중이나 들고 이야기 동무나 하여 주고 하는 곱다시 처녀요, 갓열여덟의 어린 나이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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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록 철은 나지 않고 글방 도령에 애기 새서방이더라도 진주에게 가장 가까운 동무요, 그러고 유일한 이성은 당연히 준호라야 하였다. 자연 일상에 즐거운 일이 있을 때나 언짢은 일이 있을 때나 매양 생각나는 것이 우선 준호 였다. 친정집의 할머니도 물론 생각이 나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우선 몸 바투 느끼겠기는 막상 새서방 준호였다. 일부러 그러자고 하여 서하는 노릇이 아니라 제풀에 마음이 그래지는 것이었었다. 곧 정(情)의 시초 일 것이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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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방도 진주는 좋은 달밤이 혼자서는 미흡하던 끝에 저절로 생각나는 것 이 역시 준호였다. 마침 이런 때 그가 돌아와서 좀 같이 놀기도 하고 하였으면 하였다. 그야 논다고 하여도 어려운 시어머니가 계시고, 하인들이랑 머슴들이랑 있고 할 터에 나 어린 새서방을 데리고 뛰어다니고 웃고 지껄이고, 달아 달아 밝은 달아 창가 부르고 아이들처럼 그런다는 것은 아니었다. 또 한 만 히 오래도록 놀고 있을 수도 없었다. 잠깐 동안 나란히 뜰이라도 거닐면서 달 이야기, 글방에 갔던 이야기, 추석이야기 같은 것이나 소곤소곤 서로 이야기하다 웬만큼 방으로 들어가는 것이었었다. 그리고 그것으로써 족 하였 다. 혹시 단둘이서 방에 있을 때면 일쑤 그렇듯이'나 좀 업어 주우’ 하면?…… 쯧, 아무도 없는 달 아래 얼른 조금만 업어 주는 것도 한결 재 밀것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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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주는 천천히 두레박을 자아올려 우물 빈지에 놓았던 하얀 분원 사기( 分院白磁[ 분원 백자]) 대접에다 넘치지 않도록 팔 홉은 되게 부은 후 남은 물도 함부로 버리는 것이 아니고 세수확으로 가지고 가 따른다. 그러고는 두레박 줄을 고쳐 사려서 두레박 실겅에 잘 얹어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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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름 한 조각 지나가는 자취 없고 달은 한결같이 밝다. 바깥편으로 한편을 우물 울타리한 동청(冬靑)나무 잎사귀가 저마다 달빛을 받아 수없는 잎사귀들이 저마다 매끄럽게 번뜩인다. 우물 두던의 돌틈에서이리라. 귀뚜리가 꼭한 마리가 생각난 것처럼 까르르 스러질 듯 울음을 낸다. 그 스러질 듯 가늘게 우는 소리가 조금도 이 밤의 고요함을 헤뜨리지 않고 도리어 운치를 더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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준호는 항용 열한시가 지나서, 어떤 때에는 자정에, 또 더러는 자정이 훨씬 넘어서야 돌아오고 한다. 글방에는 시계가 없고, 두꺼비처럼 생겼 대서 두꺼비 선생이라고 부르는 훈장이 짐작으로 대중을 하기 때문에 시간이 일정하지가 못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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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주는 방금 안방에서 열한시가 거의 다 된 것을 보고 나온 생각을 하고, 혹시 오늘은 내일이 파접이고 하니 좀 일찍 돌아올는지도 모를까 보다면서 꺄웃이 귀를 기울인다. 그러자 마침 쉬었다 다시 시작인 듯 건넌 마을 선비 골의 글방으로부터 여럿이 얼려 읽는 글소리가 감감하나 손에 잡힐 듯 분명히 좌악 들려온다. 지금부터 참을 다시 시작이라면 여느날보다 이르기는 고사요, 더 늦어둔 것이었다. 종시 섭섭하였으나 내일도 날이요 모레도 날이었다. 더구나 내일부터 한동안은 글방에는 가지 않고 하니 얼마든지 계제가 있을 터이었다. 그런 내일날을 기다려 둠도 차라리 한 즐거움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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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이 하 고요하여 그런지 당혜(唐鞋) 바닥에서 징 맞치는 소리가 유난히 다그 락거 린다. 진주는 되도록 돌을 피해 디디면서 물대접을 집어들고 마당으로 내려선다. 밤에 혼자라도 남의 집 새며느리란 건 걸음걸이 하나 함부로 하기를 본시 삼가야 하는 법이지만, 남달리 엄한데다 겸해서 까다롭기까지 한 홀시어머니 밑에서 벌써부터 말 많은 시집이고 보매 일동일정 무엇 한가지 각별히 조심되지 아니함이 없었다. 그러나 이 밤의 조심은 조심이 도리어 재앙을 도왔다 할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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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어머니 박씨부인은 퇴침을 돋우 베고 누워『삼국지』를 읽다 깜박 잠이 들었었다. 그러다 어찌해서 깨어 보니 한옆으로 앉아 바느질을 하고 있던 며느리가 보이지 아니하였다. 바느질하던 것은 다 그래도 놓아둔 채…… 아마 소피엘 갔거나 하였나 보다고 거기까지는 심상하였다. 그러자 우물에서 다그락거리는 당혜 소리에 섞여 두레박 다루는 기척이 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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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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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레박을 다룰진댄 소피 갔던 손을 씻으려 함은 아니었다. 소피에 갔던 손으로는 두레박을 다룰 리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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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물엔 어째?…… 이 야밤중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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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이하다는 것이었다. 야밤중에 우물엘 갔기론 괴이할 것이 없을 수도 있는 것이지만, 시어머니 따라, 그때의 기분 따라 넉넉히 괴이할 수가 있 기도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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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느리가 미우면 발뒤꿈치가 달걀같이 고와도 흉이란 속담이 있거니와, 참으로 남의 며느리 되어 한번 시어머니의 눈에 벗기로 들면 한정이 없는 것 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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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이 박씨부인을 일러 여장부라고 한다. 혹은 여걸이라고도 한다. 언변 좋고 감대 괄괄하고 진서공부(漢文[한문])가 웬만한 선비 뺨쳐먹을 만큼 도 저하고, 체집 크고 기운 세고…… 진시 여장부였다. 삼백여 호나 되는 향교 골온 마을을 쥐락펴락하였다. 마을은커녕 한번인가는 세미(稅米 : 納稅[ 납세]) 로 등갈이 나가지고 동헌(東軒 : 郡[군])엘 쫓아들어가서 원님을 다 혼을 내준 여인이었다. 서른한 살 때 갓 제돌 잡힌 외아들 준호 하나를 데리고 과부가 되어가지고 이래 십년 남짓한 동안에 적수로 이백여 석거리의 성세를 장만하였으니 그 또한 장한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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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여장부는 여장부요, 병든 홀시어머니는 따로이 또 병든 홀 시어머니 였다. 생리학자의 말을 들으면 흔히 중년 과부란 그 생활조건과 심리작용으로 인하여 성질이 다소간 편협· 괴벽하기가 쉽고, 그러다 이윽고 단 산기( 斷産期) 를 당하여 소위 히스테리 증세가 생기게 되고 보면, 그 경향이 일단 더 농후하여진다고 한다. 물론 병이다. 그러나 가벼운 경우면 사람이 까다로와 지고 신경이 예민해지는 정도에 그치고 말지만, 만일 병이 심한 경우면 극도로 쇠약한 신경이 일변으로는 극도로 날카로 와져 가지고 인하여 성 격과 생활 행동에 어지러운 변화를 일으켜놓는다. 변덕이 죽끓듯하고 억지가 찰엿가래 같은 것쯤 차라리 온건한 증상이다. 환상적인 엉뚱스런 독단을 하여놓고는 남은 웃을 일을 울고, 남은 울 일을 웃는다. 한번 무엇이 여사 여사하다고 생각을 하면 꼭 그 골로만 그 골로만 무섭게 예리하고 심각스런 천 착을 하여 들어간다. 그러는 끝에 필경 얼토당토 아니한 결론에 빠져가지고는 과대망상증이니, 피해망상증이니 하는 데까지 이르는 수가 왕왕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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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아야 겉으로는 멀쩡하다. 그러나 그는 이미 구할 수 없는 병인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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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박씨부인도 불행, 병이 그렇듯 골수에 깊은 병인이었다. 그리고 그 병짓의 파독(破毒)이 와서 떨어지는 곳이 어느 곳이냐 하면 아들 준호는 진작부터 요, 새로이 며느리 진주에게였었다. 잘하는 일이거나 잘못하는 일이 거나( 별로 잘못하는 일이 있는 바도 아니었지만) 며느리가 하는 일이면 덮어놓고 마음에 들지가 않고 새김질을 하여 보아가지고 하였다. 발뒤꿈치가 계란같이 맵시가 있어도 밉고 흉인 것처럼 말이었다. 그러기 때문에 밤중에 우물엘 간 것도 예사롭지가 않고 괴이하던 것이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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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리끼숭늉이 있는데, 하필 냉수며…… 정히 냉수를 먹을 양이면 부엌 물독에도 있을 터이요, 하인이 그 옆에서 저렇게 자고 있으니 깨워서 시킬 것이지…… 바느질은 몰렸으면서 그래 제가 굳이 우물엘 가야 할 일이 대체 무 어란 말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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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으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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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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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과 얼굴이 더럭 험해지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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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락 없어…… 나이는 찼겠다, 서방이란 건 어리겠다. 흥, 달밤에 잔뜩 시방 맘이 달떠가지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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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서운 사측(邪測)이었다. 박씨부인 당자는 그러나 조금도 사측이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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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면 그렇지. 누가 아니랬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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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씨부인은 커다랗게 고개를 여러 번 끄덕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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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씨부인은 얼마 전부터 며느리에게 대하여 저것이 외양으로는 제법 얌전을 부리고 끔찍하게 하는 체하지만, 서방 명색이 나이 어리어 아무 흥도 없고 한데 속도 저렇듯 태연 심상할까? 태연 심상해? 이런 의혹을 품어 왔었다. 분명 속은 달라야 할 것이었다. 미흡해서 만사에 뜻이 없고 저 혼자 있 을 때면 홀홀 한숨이나 쉬고 팔자 자탄이나 하고 할 것이다. 정녕 그렇거니 하였었다. 했던 것이 아니나다를까, 오늘 밤에 보니 짐작은 영락없이 들어맞았던 것이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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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무슨 턱에 남의 어린 자식 데려다 놓고 애먼 혐의를 두어? 다아 번 연한 노릇이지. 마른하늘에 벼락을 맞으려고? 내 눈이 어떤 눈이 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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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 길 물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속은 모른다더니…… 저마다 얌전하다는 칭찬이요, 보매도 무던한 것 같길래 혼인을 했더니 아뿔싸 그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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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렴. 나도 홀에미로 자식을 길렀지만 에미애비 없이 자란 자식은 어디가 표가 나도 표가 나거든! 할 수 없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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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저, 흉물스런 것이 시방 누가 알세라 들을세라 사풋 살짝 신발소리 안내고 걷느라고 앨 쓰는 거동을 좀 보래두! 에잉 천하 요사스런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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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떡 박씨부인은 일어나 앉는다. 그러면서 동시에 그 우렁찬 목청을 질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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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월아!" 하고 불러 외친다. 하인년 삼월이가 무슨 죄 있을꼬마는 여느때대로 직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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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 악아." 하고 부를 계제도 아니요, 겸하여 목적이 고함을 우선 지르잔 목적이라 만만한 삼월이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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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이 들어놓으면 묶어가도 모르는 삼월이가 한번에 냉큼 대답이 있을리 없었고, 또 부르는 편에서도 고함 지르며 들레기가 주장인지라 대답은 상관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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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죽을 집어 놋재떨이가 깨어지라고 땅땅 두드리면서 연거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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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년 삼월아!" 불러 외치는 소리를 받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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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에." 하는 며느리의 연삽한 대답이 대뜰 바로서 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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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얌사한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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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을 그쪽으로 잔뜩 흘기다 문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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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 진작 좀 내다보는 것이 아니라!……’ 하면서 얼른 영창 앞으로 다가앉는다. 영창에는 유리가 한칸 붙여 있어 그리고 달이 휘영청 밝은 바깥이 환히 내어다보이게 마련이었다. 그 유리 쪽에다 바싹 얼굴을 대고 앉은 박씨부인은 그러다가 다음 순간 거의 소리를 내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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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 하면서 놀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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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길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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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슴 겸해 와서 의탁하고 있는 용길이었다. 며느리는 물대접을 들고 마 악대 뜰로 올라서는 참이고, 용길이는 뚝배기를 들고 성큼성큼 우물 두던으로 올라가고 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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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길이는 마침 우물로 물을 뜨러 들어오는 길인 모양이었다. 그러나 박씨 부인은 그런 것이 아니어야만 할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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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이 여태껏 같이 우물에서 있었지?’ 하여서야 속이 후련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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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지만 용길이놈은 지금 마악 들어오고 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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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번연한 사실이 어떤 심술꾸러기처럼 비위가 거슬리고 밉살스러웠다. 이런 때에는 그저 억지가 제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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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그건 달리 무슨 까닭이 있었고…… 분명 둘이 같이 있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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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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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정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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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 이런 변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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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장 벼락치듯 영창을 열어 젖히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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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죽일 놈년들!’ 하고 고함을 치겠는데, 그리고 들입다, 거적에 말아라, 작두를 들여라, 놈년을 한꺼번에 그저 하고 추상 같은 호령을 하겠는데, 그만 용길이를 꺼려 꾹 참는다. 머슴은 며느리처럼은 만만한 것이 아니었다. 뿐더러 친정 사촌형의 아들로 어려서부터 데려다 이내 자식 다음 가게 길러 오던 터라 어디로 치나 싸고 돌아야 할 의리였었다. 그것도 증거가 꼼짝 못하게시리 역력한 것이라면 혹시 모르거니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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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그렇다고 이 자리를 이대로 참고 넘길 수는 없었다. 하여커나 한번난 화요, 화가 난 이상 한바탕 화풀이는 하여야만 하는 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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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주는 마당 한가운데쯤 서서 어머니의 고함소리를 들었다. 놀라, 하마터면 물대접을 놓칠 뻔하였다. 정신이 황망하였고, 그런데다 연달은 고함 소리와 재떨이 두드리는 소리에 먹혀 등 뒤에서 차면 안으로부터 나는 밭은기침 소리도, 성큼거리고 우물로 걸어가는 발자죽 소리도 통히 들리지 아니하였다. 따라서 용길이가 들어온 줄도 까맣게 끝까지 그는 몰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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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무시다 별안간 웬일이실까? 잠드실 때까지도 아무 다른 내색 없이 책보 시다, 이야기하시다 하시던 어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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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닷없이 역정나실 일이 없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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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 수가 없었다. 그러나 어찌해서 났던 간에 큰소리가 난 것만은 사실 이요, 큰소리가 난 바엔 책망은 당해 둔 것이었다. 그 사정없는 책망…… 아뜩 겁이 질리려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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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루로 올라섰다. 맞방망이치듯 가슴이 두근거리고 문고리를 쥐는 손이 바르르 떨렸다. 앞이 아찔아찔하면서 곧 쓰러질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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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히 그때였다. 순간, 어둠 속에서 번쩍 비치는 불빛처럼 번쩍하고 정신 이드는 것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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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래서는 안되지! 정신을 차려야지! 이왕 당하는 일이니 더 잘못이나 저지르지 않도록 정신을 차려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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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용기(勇氣)라 할 것이었다. 어려움을 임하여 마음 가다듬고 기운을 낼줄 아는 것, 이는 곧 아버지의 혈관에 흐르던 용맹(勇猛)의 내림이었다. 열 여덟 살, 물론 어린 나이였다. 아직 소녀요, 한 안해로서는 어리었다. 그러나 그는 한 며느리로서는 철이 들 대로 들고, 어른스럽게 침착할 수가 있었다. 조용히 윗문을 여닫고 들어서 그대로 머리 소곳하고 문치에 가 선다. 문치에 가 소곳하고 서서…… 우선 대죄(待罪)하였다. 죄야 있으나 없으나 어른의 성정난 앞에 말없이 대죄하는 것, 이는 며느리의 어여쁜 부덕( 婦德) 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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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랫목에서는 깜박 아무 동정이 없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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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 동정이 없다고서 이내 언제까지든지 그러고만 또 서 있어서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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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서 할 대로 하시오!’하고 이짐을 쓰는 것 같아서 도리어 어른의 성정을 돕는 것이었다. 적당히 잠시 후 가만한 걸음으로 뒤 곁으로 건너가 물대접을 넌지시 한옆에다 치우듯 비껴놓고, 그러고는 앉아서 바느질을 집어든다. 바느질은 추석날 새 서 방준호가 칠 모시행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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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어냐? 명색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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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악 바느질을 한 코 뜨려고 할 즈음 비로소 박씨부인은 한소리 모질게 지른다. 밑도끝도 없이 첫마디가 그렇게 나오는 말투도 말투려니와, 더욱 그 음성은 방금 삼월이를 불러대던 이와는 자못 달라 곧 살기가 뎅겅뎅겅 듣는듯 하였다. 그것은 며느리의 뺨에다 못질한 듯 박혀 있는 독한 눈매와 더불 어 어른으로 아랫사람을 질책하는 음성이요 눈매라고 하기에는 너무도 노골 히 어떤 독특한 반감와 증오를 머금은 음성이요 눈매요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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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씨부인은 실상 며느리가 방으로 들어서기를 마침 벼르고 있었다. 무릎을 도 사리고 장죽은 재떨이를 두드리던 채 그대로 느직이 올려 들고 윗 문께 를 마침 부릅떠보고 앉아서 기다리고 있었다. 들어서는 즉시 한꾸중 크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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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너는 어디를 갔다오느냐?’ 하고든 무어라고든 하여간 추상같이 하되 준절히 꾸짖음으로써 잡도리를 시작 할 참이었었다. 그러나 막상 며느리가 윗문으로 해 들어서 잠깐 호흡을 다스리느나 그를 노려보아, 하는 동안 문득 한 맹렬한 적의(敵意)가 나무람이니 꾸짖음이니 따위는 한옆으로 젖혀놓고 따로이 돌연한 적의가 무럭무럭 가슴속 저 밑으로부터 치달아올랐다. 며느리의 고운 살쩍 아래로 도독이 살진 연한 뺨! 박박 가서 손톱으로 할퀴어놓고 싶게 그 앳되고 화사함의, 시기 스럽 기도 하더라니…… 치렁치렁 뽀얀 버선등 위를 치렁거리는 남갑사 치맛 자락! 발기발기 가서 뜯어발기고 싶게 그 칠보 족도리 갓 벗은 듯 새 각 시 태 면면함의 시기 스럽기 더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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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렸던 제 새끼 병아리를 이윽고 쪼아샀고 독살을 부리고 하는 암탉 이 라면 모르되, 이른바 만물의 영장(靈長) 된 체면이 무색한 노릇이었다. 그러나 인류가 나이는 비록 몇백만 살 닭(動物[동물])보다 더 먹어 어른 뻘일 값에 좀처럼 프로이트라나의 해괴한 저술(著述)을 용감히 서재로부터 끌어내어 불 사르지 못하는 약점이 무릇 거기에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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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금 아까도 보던 그 며느리 그 차림차리가 번연하건만, 박씨 부인에게는 며느리가 별안간 그리고 무단히 그렇게 아리따와지고 새각시태 면면하여지고 한 것처럼 금시로 비위가 더럭 거슬리면서 밉새웁고 울화가 나고 하는것이니, 도저히 성한 사람에게서는 상상도 하기 어려운 위험스런 환자가 아닐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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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으응? 무어냐? 명색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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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도 깜작 않고 지질 듯 며느리의 뺨을 노리고 앉았다가 이번에는 손의 장 죽이 상앗대질까지 쑥 나가면서 고함청을 재차 지른다. 그러고는 연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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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 허는 명색이냐? 명색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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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기는 차차로 더하여 거의 머리끝이 곤두설 지경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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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도 쉬는 듯 마는 듯 진주는 소곳하고 앉아 한코 한코 바느질만 하고 있 다. 똑 똑 바늘코 소리조차 그는 조심되고 민망스러웠다. 항차 말대답 이 리요, 그러나 며느리란 것은 시원시원 대답을 하면 말대답을 한다고 트집이요, 아니 하면 아니 한다고 탓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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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별안간 꿀먹은 벙어리가 됐단 말이냐 으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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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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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말이 동네 개 짖는 소리만두 못한가 보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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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는 데야 종시 죽여 줍소사 하고 입을 봉하고만 있을 수는 없었다. 진주는 얼굴을 조금 드는 듯하면서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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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님, 잘못했어요, 다신…… ""듣기 싫구나! 누가 그런 소리 듣겠다드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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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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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디 무엇허러 갔드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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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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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에미 잠든 새 살끔 나갔다 오는 디가 어디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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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상치 아니한 말이었다. 진주는 가슴이 섬뜩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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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두 갈증이 나서…… 시원헌 우물 물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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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핑계는 좋구나?…… 냉수가 먹구 싶으면 하인이 없드냐? 부엌 물독에 물이 없드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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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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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망스런 것 같으니!…… 흥, 누가 제 속 모르는 줄 알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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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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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맘두 달뜰 만두 허지! 오두발광두 날 만두 허지! 서방은 어려, 나이는 찼어, 달은 휘영청 밝어…… 흥, 맘두 달뜰 만두 허구말구…… 오두발광두 날 만두 허구말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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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주는 기가 막혔다. 지난해 늦은 가을에 혼인을 하고, 금년 삼월에 신행( 新行)을 하여 시집을 살기 반 년 ― 여섯 달…… 그 여섯 달 동안 한 달이 멀다 하고 큰소리가 나고 책망을 듣고 하였지만 이런 무정지책은 처음 이었다. 김치가 너무 싱거우니, 너무 짜느니, 새서방 두루마기가 동정이 너무 좁았느니, 깃이 너무 처졌느니 따위의 트집과는 판이하게 다른 것이었었다. 억색하여 눈물이 핑 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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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엌 물독에는 물이 마침 없었다. 삼월이는 깨우기가 힘이 들고 시끄러울 뿐더러 어린것이 곤히 자는 것을 깨워 일으키기보다 내가 잠깐 몸을 기동 하기만 못하였다. 그러나마 밤중에 우물엘 내려가기가 새삼스러운 일일 세 말이지…… 달도 무심코 나갔다 본 것이 그렇게 밝고 하였지, 달이 밝거니 하고 나간것은 아니었다. 더구나 새서방이 어리네, 마음이 달떴네 하는 것은 마른하늘의 벼락이었다. 일찌기 새서방이 어린것을 미흡히 여긴 적도 없거니와, 오 두 발광이란 그 말뜻부터 똑똑히 알 수 없는 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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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아무리 그렇더라도 시어머니가 저다지 성정이 났을 바엔 무슨 잘못이 되었던 정녕 잘못이 있어야한 할 것이다.
 
109
'무엇일까, 어디가 잘못되었을까?…… 하시던 말씀대로 잠드신 새 나간 것이? 냉큼 들어오지 않고서 한참이나 충그린 것이?’
 
110
억색한 것은 순간이요, 잘못을 찾기에 애가 쓰이고 마음이 급하였다. 어리고 아직 정갈한 신경(神經)이었다. 중년 과부에 오십 바라보는 히스테리 여인의 썩은 분비물(病的[병적] 호르몬)이 들어서 작희를 하는 그 망측 스럽고도 추한 비밀을 어리고 아직 정갈한 진주가 용히 알 턱이 없는 것이었었다.
 
111
당자 박씨부인 자신에게도 자각증(自覺症)이 따르지 아니하는 맹랑스런 병이 거든 항차……
 
 
112
8
 
113
박씨 부인은 한 호흡 깊이 들이쉬더니 호통은 왜장으로 돌변하여
 
114
"으응? 오두발광두 날 만두 허구말구우." 하고 끝목을 길게 빼어 고함을 지른다.
 
115
"으응? 보구 밴 것이 그것인가암? 으응? 서방 어리다구우 달밤에 오 두 발광이 나서어 으응? 으응?"
 
116
지르는 소리는 그 높고 거칠고, 그리고 사나운 품이 흡사 황소의 영각 이었다.
 
117
"예라! 예라! 나는 못본다! 그런 꼴 나는 못본다아! 나는 못본다!"
 
118
어깨를 휘저으면서 구들장이 꺼지라고 쾅쾅 밑을 구른다.
 
119
상인의 집안과 달라, 시어머니가 며느리한테 제아무리 손찌검만은 않는 법이라는 소위 선비 집안의 가도(家道)가 아니었다면, 그 당장 진주의 얼굴에는 흉한 손톱자국이 여러 개 나고, 몸은 함부로 피멍이 지고, 많은 머리카락이 뽑히고, 남갑사치마는 발기발기 찢어지고 하고라야 말았을 것이었다. 그렇게 한바탕'직접행동’을 하였으면 약간 직성이 좀 풀릴 수도 있는 것인데, 막상 그러지를 못하니 솟는 기운을 부지를 못해 사뭇 나느니 몸부림 이었다.
 
120
"예라! 썩 내 눈앞에 뵈지 마라!"
 
121
마침내 불끈 몸을 일으키면서 윗문을 가리키면서
 
122
"당장 네 집으루 가거라! 썩 네 집으루 가거라! 나는 그런 꼴 죽여두 못 본다!"
 
123
"어머님!"
 
124
진주는 푹 엎으러질 듯 몸을 앞으로 숙이면서 거의 울음소리로 빈다.
 
125
"다신, 다신 그러거든 죽여 주시구, 이번 한 번만 참아 주세요, 어머님!"
 
126
"당장 가거라! 당장…… "
 
127
"어머님! 어머님!"
 
128
"썩 못 가느냐? 썩 못 가? 으응? 으응?"
 
129
한 고함에 한 발짝, 한 고함에 한 발짝, 세 발짝만에는 바싹 며느리의 앞에 그들먹하게 막아선다. 그대로 원비(!)를 늘여 머리끄덩이를 덥석 움킨다면 정히 솔개미가 병아리를 챈 형국이 되는 판이었다. 과연 박씨부인은 팔이 움짓움짓 얼마나 거기 눈 아래로 며느리의 소곳하고 있는 맵시 나는 머리 쪽을 와락 움켜 한번에 태질치고 싶었던고.
 
130
숨을 헐헐 기운 부려댈 무엇 만만한 것이 없나 하고 둘러보면서 일변
 
131
"으응? 으응?" 하고 을러메다 마침 바느질꾸리가 눈에 뜨이자 그대로 번쩍 집어 윗 문에다 대고 메어다친다. 쾅 와시르르 문이 힘없이 삐그덕 열린다.
 
132
"당장 네 집으루 가거라, 하느님이 말려두 나는 네 꼴 다시 못본다! 으응?"
 
133
소란에 이웃집에서 젊은 양주가 잠이 깨었다. 소곤소곤 주고받는 이야기.
 
134
"끙, 또야?…… 저 아씨가 올해 몇 살?"
 
135
"마흔둘이라든가? 셋이라든가…… "
 
136
"안직두 멀었구먼…… 영감이나 하나 얻겠지? 저 병엔 신효한 약인데."
 
137
"그럴래믄야 여태 수절했겠어요?"
 
138
"저럴래서야 차라리 개가살이한 이보다 더 망신이지 무어람!"
 
139
"딸자식 길러 과부 시어머니 있는 집으로 시집 보낼까 무서!"
 
140
"난 애야 사십 전에 죽는다면 이녁더러 삼년상만 치르구 나서 팔자 고치라 구 수결(手決 : 證書[증서]) 한 장 써놓구 죽을 테야!"
 
141
"숭헌!"
【원문】인생(人生) 제이관(第二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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