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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인전기(女人戰紀) ◈
◇ 바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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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4.10.5~
채만식
1
女 人 戰 紀[여인전기]
2
바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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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4
절골로부터 달려오고 있는 박씨부인은 부전부전 날이 밝아감을 따라 현장을 덜미잡기에는 십상 때가 늦었느니라고 저으기 초조하면서 걸음을 더욱 재촉하여, 마침내 동구 안으로 들어섰다. 동네 앞을 가로 건너간 신작로요, 집은 동네 맨앞으로 신작로와의 사이에 두어 이랑의 논을 격하고 있기 때문에 동구 안만 들어서면 우선 집이 보이게 마련이었다.
 
5
비밀을 감춘 듯 으슴푸레한 새벽빛에 싸이어 집이 희미한 윤곽을 드러내었다.
 
6
대문을 열게 하여서는 아니 되고 뒤꼍으로 해서 울타리를 뜯고라도 기척 없이 들어가야 하느니 하고 생각하면서, 어느덧 다시 신작로에서 집으로 꺾이는 샛길 머리까지 당도하였다. 집이 정면으로 보이는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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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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샛길로 꺾이어들려던 박씨부인은 그러다 움칫하고 놀란다. 대문이 반 이나 열리어가지고 있는 것이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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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딴 놈이었든가? 용길이놈이 아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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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워너니 그럴 리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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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뭏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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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행 중 더욱 다행이었다. 기운이 갑절 솟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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샛길로 내려서서 두어 걸음 걷다 말고 또다시 놀라야 하였다. 그 열린 대문으로부터 웬놈인지가 처억 나오고 있지를 않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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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면 그렇지! 누가 아니랬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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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릎을 탁 칠 뻔하였다. 그리고 이렇게 불시로 엄습해 오기가 절절히 잘 한성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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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석양 절골 용길네 집엘 당도하여서였다. 사립문 밖까지 마주 나온 사촌형 ── 용길어머니와 피차 이런 인사, 저런 인사 인사가 한 둘레 끝나고나서 앞서거니 뒤서거니 집으로 들어가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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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 오다 중로서 그애 만났지?" 하고 용길어머니가 물었다. 그애란 물론 용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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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씨부인은 무심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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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어딜 갔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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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앤 그럼 샛길루 해 갔구면! 동생은 신작로루 해 왔지?……글쎄 자식이, 사람 된 소릴 허겠지! 딴 남의 집두 아니구, 이모네 댁인데 명절 이 랍 시 구 선 집이 나와서 열흘 보름씩 펀펀 자빠져 놀다 한(限) 다 채우구서야 어실렁어실렁 겨들어가서야 어디 도리냐구. 쯧 명절은 쇘으니깐 가서 허다못 해 조석으루 마당 귀탱일 쓸구 허드래두 가 있어예지 않느냐구 그러믄서 아까 즘슴때 좀 못 돼서 떠났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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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씨부인은 듣고 더럭 의증이 났다. 용길은 평소에 별반 게으름을 부리거나 꼬박꼬박이 남의집살이의 행티를 낸다거나 하던 바는 아니었으나, 그렇다고 와락 근경속이 있다든지 지나치게 착실한 머슴인 것도 또한 아니었다. 그저 예사 머슴일 따름이었다. 지나간 정월만 하더라도 항용 남의 집 머슴들이 하듯이 섣달 그믐날 세찬과 설빔 주는 것 한 짐 해지고 저의 집으 로나가 설 쇠고 초이튿날 잠깐 들어와 세배하고 설음식 먹고 그러고는 도로 나갔다 기한 스무 날을 마저 다 채우고서야 아주 들어와 일을 거들었고 하였다. 그러던 아이가 그새 별안간 철이 나 그토록 알뜰한 머슴, 살뜰한 조카로 변하였을 리가 만무요, 정녕 딴 내력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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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씨부인은 가까스로 해를 지우고 가까스로 첫닭을 울리고 마지못해 약수터로 가 물맞이를 하는 시늉하고 그러고는 질색해 만류하는 용길 어머니를 뿌리치고 그 자리에서 떠나 밤중 오십리 길을 반달음질쳐 이렇게 달려들고있던 것이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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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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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놈이 누군지를 보아 두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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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씨 부인은 그러면서 걸음을 급히 하여 쫓아오다 연자방앗간 앞으로 해서 저편을 향하고 천천히 걸어가고 있는 그 인물이 동네 활량도 어떤 총 각 놈도 아니고서 뜻밖에도 허연 노인이었으며, 의원 오감찰임을 발견하고 세번째 놀라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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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원이 어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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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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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슴이 철썩하고 번쩍 새 정신이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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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을…… 사약( 毒藥)을 먹여놓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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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데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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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가 뿌드득 저절로 갈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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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가사리 낚시에 잉어가 물린 셈이어서 생각잖이 소득이 큰 것은 통쾌 한일 이었다. 그러나 거기에는 자식의 생명이 제웅되었다는 중대한 사실이 저질러졌 음을 생각할 때 통쾌하여 할 경황보다는 우선 치가 떨리지 아니할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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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장 구경을 갔던 준호는 간밤 자정이 넘어서 돌아왔다. 아무 탈없이 돌아 는 왔으나 들어단짝 그는 배가 고프다면서 떡을 ── 굽거나 찔 새를 기다리지 못해 차고 딱딱한 인절미를 그대로 ── 여남은 개나 앉은 자리에서 먹었다. 그러고도 다시 곰국에 밥을 말아 한 그릇을 달게 먹었다. 가지 고간 마른 음식은 윤석이 중로에서 군입삼아 다 먹어버렸고, 난장에는 국밥 가게를 비롯하여 갖은 음식이 많이 있기는 하였으나 그런 매식(買食)을 할 방납 된 소년이 아니어서 촐촐 굶고 다녔고, 집에는 허리가 꼬부라지도록 시장 해 가지고 돌아왔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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준호는 수저를 놓던 길로 나가 쓰러졌다. 쓰러져서는 새댁한테 난장에 갔던 이야기를 하려니 하려니는 생각하면서도 쏟아지는 졸음에 이내 그만 잠이 들어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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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만때나 되었는지 진주는 이상한 소리에 어렴풋이 잠이 깨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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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구 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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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서방의 신음소리였다. 벌떡 일어나 불을 켰다. 핼쓱한 얼굴에 이마엔 비지땀이 솟아가지고 부대끼고 있는 모양이 환하여지는 불빛에 드러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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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리는 펄펄 끓고 수족은 차디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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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몹시 아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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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 아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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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살 배를 쓸어주었다.
 
42
차차로 더 부대꼈다. 나가서 강즙을 내어 사향소합환을 개어서 먹이고는 잠시 기다려보았으나 갈앉는 동정이 없더니 구역질을 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구역질만 하고 부대끼지 닭의 깃을 목구멍에 넣어주고 하여도 시원히 토하지는 못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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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시간 가까이 되었음직하여선데, 안방에서 네시를 쳤고, 이때는 준호는 몸을 뒤틀면서 입을 딱딱 벌리면서 곧 죽는 행티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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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월이를 꼬집어 깨워 의원을 청하러 보냈다. 한 한 시간 반이나 오 감찰이 왔고 맥을 보더니 먹은 것이 꽉 체했다면서 사관을 놓았다. 그 가느라단 침몇 대가 거짓말같이 영검스레 마지막번의 침을 뽑기가 무섭게 우선 후련히 한바탕 토를 하였다. 마침 여섯시를 치고 날이 휘엿이 밝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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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만하면 급한 증세는 돌렸다. 약을 몇 첩 지어줄 테니 날 따라오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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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감찰은 삼월이더러 그렇게 이르고서 한걸음 앞서 차면 밖으로 나갔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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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월이가 얼마쯤 충그리다 마악 마당을 절반은 건너고 있는데 우당퉁탕 뛰어든 것이 박씨부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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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년 ! 새서방님 죽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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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월이를 가로막듯 우뚝 그 자리에 멈추고 서면서 단박 을러메는 말이 이 말 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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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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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으잉 이년? 새서방님 죽였지?"
 
52
박씨부인은 등잔덩이 같은 눈방울을 며느리에게서 도로 삼월이에게로 부릅뜨면서 쾅 발을 굴러 재차 호통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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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벌 떨고 섰던 삼월이는 그제서야 잔뜩 겁먹은 소리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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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직 안 돌아가셌시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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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지익? 안지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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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씨부인은 황소 영각하듯 으르렁거리다 더욱 무서워진 눈방울을 다시 이번엔 삼월이에게서 며느리에게로 굴리 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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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이려 구 했는데에……약은 앵겼는데에 안직 죽지만 아녰다아 ? 안직 죽지만 아녰다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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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지는 편에서는 죽였지? 죽였지? 하고 거듭 다졌던 것이지만, 듣는 사람이야 설마 죽였지(殺)로 바로 알아들었을 리가 없었고, 진주나 삼월이나 다같이 무심히 죽었지(死)로 알아들었을 따름이요, 삼월이의 대답도 따라서 그 죽었지(死)에 대한 대답임에 틀림없었다. 그러나 다진 편에서는 번 연히 죽였지( 殺) 로 다진 것이매, 아직 안 죽었다는 대답이고 보니, 그러면 ' 죽이려고 하였는데 ── 약을 먹였는데 ── 아직 죽지는 아니하였다’는 대답으로 당연히 인정을 할밖에 없었던 것이었었다. 이리하여 박씨부인은 진주가 준호를 독살하려고 한 사실을 삼월이에게서 자백을 들은 셈이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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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씨부인은 부르르 건넌방으로 올라가 앓아 누웠는 아들의 얼굴을 한참이나 내려다보고 섰다 천천히 베개 옆으로 앉으면서 지 천하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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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놈, 입 벌려보아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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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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준호는 병색에 겹치어 슬픈 빛 가득히 어린 얼굴로 눈 딱 감고 누워 눈썹 하나 까딱하는 반응도 보이려고 않는다. 모친의 말이나 영 앞에 이렇듯 제법 앙똥하기도 별반 드문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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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놈 죽었느냐?" 하는데 마침 준호는 신간하였던 복통이 또 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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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구 배야!" 하고 신음소리를 가늘게 지르면서 허리를 틀었다.
 
65
박씨부인도 역시 남의 어머니였다. 손이 저절로 아들의 아파하는 배를 쓸어주려 가지 않질 못하던 것이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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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에 뒤미처 눈도 자연 배로 옮아가고 있었고. 그러다 별안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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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으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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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효와 동시에 가던 손을 그대로 멈추면서 더럭 더 험하여지는 눈을 아랫 도리만 걸친 처네 위로 비어진 준호의 다듬은 모시 겹바지 골마리로부터 며느리의 얼굴로 대고 치부릅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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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천하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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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둥소리 같은 호통이 나오다 기가 차 뚝 막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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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주는 영문을 몰라 뻐언하고 섰고.
 
72
"그래두 부족해서? 사약을 앵기구두 그래두 미흡해 서 배꼽으다 바눌을 꽂아 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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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운찬 손가락질과 함께 이는 호통에 천장이 찌렁찌렁 울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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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주는 시어머니가 손가락질 하는 곳, 새서방의 바지 골마리에 가서 배꼽 어림께로 짤막한 실을 꽂은 채 꼿꼿이 절반 넘겨 꽂혀가지고 섰는 한 개의 바늘 발견하기 전에 벌써 시어머니의
 
75
'…… 배꼽에다 바늘을……’ 하는 소리 로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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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 ! 그 바늘이……’ 하고 놀라기에 넉넉한 것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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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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얌전스런 여인이라도 바느질을 하다 골몰 중에 더러 바늘을 잃는 수가 있다. 잃은 바늘이 바로 그 바느질 속에 가 묻히든지 꽂히든지 하는 수가 또한 왕왕 있다. 진주도 올 추석 바느질을 하면서 바늘 하나를 잃었었다. 다른 곳에 떨어졌던지 바느질밥에 쓸려나갔던지 하였다면이거니와 바느질 속에라도 묻혀 들어간 것이라면 큰일이라고 애를 쓰면서 무한 찾아보았으나 마침내 찾지 못하고 말았었다. 어제 준호를 난장 구경을 보내면서 밤에 추워 할세라고 갈아 입혀준, 그리고 준호는 돌아와 입은 채 그대로 쓰러져 자 시방 입고 누워 앓는 다듬은 모시 겹것, 그 옷이 곧 바느질 가운데 한가지것이었었다, 하필.
 
79
그렇더라도 또 하필 그 바늘이 배꼽 어림에 가서 묻혔을 것은 무엇이며, 저물 도록과 밤새도록을 가만히 있다 무엇에 스치어 새벽에야 꼿꼿이 일어섰 을 것은 무엇이며, 가사 일어선 지가 오랬기로서니 그동안 진주든지 삼월이라든지 하다못해 의원이든지가 그것을 못보았을 것은 무엇이며, 그러다 지금 와서야 사람의 눈에 뜨이되 박씨부인의 눈에 뜨이고 말 것은 무엇이며…… 참으로 공교롭기 다시 없는 노릇이었다. 물론 처음부터 끝까지 우연의 연속이었다. 그러나 우연으로 돌리고 말기엔 너무도 귀신의 장난에 가까웠다.
 
80
진주에게는 그것이 우연이 아니면 부득불 귀신의 장난이었으나 박씨 부인에게는 조금도 우연일 며리, 또 귀신의 장난일 필요도 없고, 어엿이 사람 의한 짓이었다. 음식에 독약을 타 먹인 솜씨와 마찬가지로 사람의 ── 며느리의 한 짓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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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배꼽의 바늘은 그것 스스로가 독립한 살의(殺意)를 머금고 있는 자일뿐만 아니라, 나아가서는 새서방을 없이 할 목적으로 음식에 독약을 타 먹였다는 것도 노상 애매한 말이 아닌 줄로 남을 인식시키기에 깔보지 못 할 부차적 가치를 가지는 것이었었다.
 
82
승리를 한 박씨부인은 차라리 침착히 서둘렀다. 삼월이를 문초하여 준호가 어제 석양 새댁이 보내주어서 읍내로 난장 구경을 간 것과 갔다 자정이 넘어서 돌아온 것과 돌아와 음식을 먹고 잔 것과 그때까지도 아무 일이 없었고 탈은 그 음식을 먹고 잔 뒤에 난 것과 이렇게를 갖추 알아내었다. 그리고 용길이는 어제 점심 새때에 당도하여 한 상 걸게 차려주는 것을 먹고는 그 길로 난장 구경을 간 채 이내 돌아오지 아니하였다는 것도 알았다.
 
83
그리하여 박씨부인은 며느리가 어제 석양에 준호를 꾀어 난장 구경을 보내놓고는 아무도 없는 새 만단 준비를 하여 두었다 밤 늦어 시장해 돌아오기를 기다려 비상 같은 것을 탄 음식을(입술이며 입안이 상하지 아니한 것을 보아 양잿물이 아니요, 정녕 비상을 탄 음식을) 가져다 안긴 것이요, 그러고도 안심이 아니 되어 골마리에다 바늘을 꽂아 뒤치락거리는 바람에 배꼽으로 꽂혀 들어가게 한 것이요 하다는 결론을 얻어 내었다. 아울러 용길이는 아무런 관계가 없음이 요행히 드러났고.
 
84
자못 삐뚤삐뚤하고 샐 구멍이 숭숭 뚫린 추리에서 얻어진 결론이었다. 그러나 박씨부인에게는 추리 같은 것은 암만 비척거리고 밑이 새고 하여도 상관이 아니요, 결론만 목적과 희망에 일치하면 그만이었다.
 
85
결론대로 며느리의 죄상은 명백하여졌다. 이에 죄를 다스리는 것이 남았을 따름 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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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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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씨부인은 동네의 교군패장 억쇠를 불러 두 채의 단패 교군을 꾸미라 명 하였다. 중매 노파 몽술어멈더러는 나들이 갈 채비를 차리고 오라 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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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군이 꾸며지고 할 동안 박씨부인은 사돈집의 안어른인 노 사부인( 진주의 조모)에게로 한 장의 간찰을 기록하였다. 사연은, 며느리의 평일에도 여러가지로 부덕이 미흡하던 사실과 그러자 필경 이번에 약시약시한 변을 저질렀다는 것과, 그리하여 부득이 오늘로써 두 집안은 절연을 하게 되었노라 는것을 적은 것이었었다.
 
89
검정 쇠털벙거지에 먹물 들인 삼베 등삼에 날아갈 듯 짚신 감발한 두 놈씩이 마침내 한 채씩의 교군을 척척 마룻전으로 들이대었다. 몽술어멈도 진작와 서 있었다.
 
90
박씨부인은 위엄 있이 아랫목으로 좌기하고 앉아 삼월이 시켜 건넌방의 며느리를 대령케 한다. 준호는 아까 박씨부인이 손수 안고 건너와 한 옆에 뉘었었고.
 
91
진주는 정신을 수습하여 눈을 닦고 매무시를 살피고 한 후 대청마루의 샛문으로부터 조용히 들어와 머리 숙이고 공수잡이하고 선다.
 
92
"네 죄상을 네가 알리라."
 
93
박씨부인은 이윽고 며느리를 거들떠보고 있다. 마침내 목을 가다듬어 입을 열었다. 심히 침중한 태도요 추상 같은 음성이었다.
 
94
"만약 예법대로 한다면 너는 이 당장으로 거적에 말아 작두에 목을 걸었을 테야! 허나 일왈 나는 내 손에 피를 묻히기 싫은 사람이요, 또오 시체는, 너 같은 아무리 극흉한 죄인이라도 사사로이 다스리지는 못하는 법 이 라드 구나." 하고는 박씨부인은 잠깐 말을 끊었다 다시
 
95
"너는 오늘부터 이 남씨집 사람이 아니야…… 교군은 다 차려놓았으니 가거라! 시방 이 자리서…… "
 
96
"……… "
 
97
"몽술어멈이 너의 조모님께 간찰을 가지고 가니, 같이 가고…… "
 
98
"……… "
 
99
"네 세간은 오늘내일간 짐꾼 해서 보낼 테니 잘 다 참겨 받고…… "
 
100
"어머님, 동찰허세요!"
 
101
진주는 목멘 음성으로 그렇게 부르고, 푹 엎드리면서 또 한번
 
102
"어머님, 동찰허세요!"
 
103
"어떡헐 테냐 ?"
 
104
"차라리 죽여주세요! 작두에 목을 썰어주세요! 나가 죽으라시면, 당장 나가 목이라두 매겠으니 제발…… "
 
105
"흥! 네 그 좁은 소견에두 생각을 해보렴? 명색이 가장이라는 걸 죽여 없애려구 든 너를, 내가 그래 이 집안에다 붙여두구 볼 듯싶으냐? 용서할 일이 따루 있으며, 참는 것두 분수가 있지."
 
106
"저를 차라리 죽여주시지, 제발 어머님 한번만…… "
 
107
"너, 그럴 줄 알었다!"
 
108
박씨부인은 삼월이를 불러 냉수와 숟가락을 들여오라 하고 반닫이 속 서랍에서 백지로 조그맣게 싸고 싸고 한 것을 꺼내 놓더니, 며느리를 가까이 오게 하여 누웠는 준호를 사이에 두고 마주 앉는다.
 
109
"너도 아마 이것이 비상인 줄은 알 만허리라 !"
 
110
박씨부인은 그 백지에 싼 것을 펴 반짝거리는 하얀 가루를 진주의 코앞에 바싹 들이대어 보이고는 조금을 숟가락 끝으로 떠 물에 푼다.
 
111
"너를 그대루 두었다간 이놈은 언제 죽어두 네 손에 죽구 마는 놈야! 그러니…… "
 
112
닥닥닥…… 숨막히는 긴장 가운데 사약 젓는 소리만 이윽고 계속을 한다.
 
 
113
6
 
114
당자 진주는 물론이요, 죽은 듯 눈을 감고 누웠는 준호나 마루에서 마주 잡고 벌벌 떠는 삼월이와 몽술어멈이나, 다들 사약이 바야흐로 새댁에게로 내리는 줄만 알았었다.
 
115
그러나…… 뜻밖이었다.
 
116
"그러니, 네 손에 이놈을 죽이느니 차라리 내 손으로 죽이구 말겠다! 내손으루!"
 
117
그러면서 박씨부인은 서슴지 않고 준호의 입 바로 약그릇을 가져다 기울이는 것이었었다.
 
118
"어머님!……"
 
119
황겁해 부르면서 진주는 덤쑥 준호의 입을 한손으로 가린다. 하면서 또 한 손은 내어밀어 사약 그릇을 움키 려면서
 
120
"지가 먹으께요! 지가…… "
 
121
"흥, 절부(節婦)로다! 열녀로다!"
 
122
유유히 박씨부인은 사약 그릇을 끌어들이면서 냉소를 한다.
 
123
"지가 먹으께요, 어머님!"
 
124
"내가 무슨 탓으루 너를 죽이느냐 ? 너 같은 걸 죽이구서 내가 살인죄를 써? 흥!"
 
125
"………"
 
126
"너 그새 한 반년 겪어보았으니, 내 승미 짐작은 허겠구나? 한번 이런다 허면 하늘이 무너져두 그여이 허구 마는 승민 줄 알지?"
 
127
"………"
 
128
"지켜 앉어서 못허게 훼방놀 테거든 놀아보려무나? 무어 이따라두 낼이라 두 요거 비상을 한 모금 멕일 새가 없을까바서?"
 
129
"………"
 
130
"더 여러 소리 헐 것두 없으니……자량해 해라! 선뜻 일어나 가든지, 웬 이 퉁이며 웬 홀착인지는 모르겠다만서두, 아니 가구 있다 이놈이 내 손에 죽구 마는 꼴을 보구야 말든지…… "
 
131
"……… "
 
132
한순간 방안이고 바깥이고 깜박 괴괴하였다. 숨결조차 덜 멎은 듯 괴괴하였다.
 
133
어떤 과단(果斷)을 내기에 진주는 그다지 많은 시간이 필요치 아니하였다. 다음 순간, 진주의 조용히 몸을 일으키는 비단결 스치는 소리로 침정은 흔들리었다.
 
134
몸을 일으킨 진주는 서너 걸음 웃목께로 물러나 박씨부인한테 사풋 절을 드린다. 그러고는 도로 일어서면서
 
135
"어머님, 갔다 오겠어요."
 
136
"온단 말은 가당치두 않은 소리다! 오늘루 너는 이 집 사람이 아니라 구 않 드냐? 남인 걸, 남이 무엇허러 이 집엘 오드란 말이냐?"
 
137
진주의 눈은 잠시 준호의 얼굴에 가 멎은 채 차마 떠나지 못한다. 눈을 감고 뜨지 아니하니, 눈으로나마 작별과 쉬이 다시 올 뜻을 전하지 못함이 못내 한스러웠다.
 
138
진주는 마침내 천천히 윗문치로 해 걸어나가 가마에 들고 만다. 저의 방 건넌방에 들러 버선 한짝 갈아 신을 생각도 아니하고 입고 있던 채 그대로…… 진주가 가마에 오르자, 마악 그때였다. 어떤 꼬마동이인지가 두어 놈 땔나무라도 하러 가던 길인지 문앞 행길로 지나가면서 노래를 한답시고 한 놈이 먼저
 
139
"하늘에는 별도 많다, 캐지나칭칭 나아네." 하는 것을 또 한 놈이
 
140
"남의 집 며누리 말도 많다, 캐지나칭칭 나아네." 하고 받아넘긴다.
 
 
141
7
 
142
어느 틈에 빠져나왔는지 삼월이가 대문 밖에 나와 섰다 교군 채장을 부여잡고 늘어져 울면서
 
143
"새 아씨 어떡허세유우!" 하고 발을 동동 구른다.
 
144
진주는 가뜩이나 창연한 심사를 돕게 하던 것이나 강잉하여 태연한 말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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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지 마아! 내가 어디 영영 가드냐?"
 
146
"또 오세유 그럼?"
 
147
"아니 오구 어떡허느냐? 갔다 곧 올 테니, 나 없는 동안이라두 마나님 뫼 시구 새서방님 시중 잘 들어 드리구 해! 병환두 나시구 허셋으니, 응?"
 
148
"내애!"
 
149
"그리구 이따 저녁이구 낼 아침이구 조용한 틈 봐서 이 말씀 여쭤 드리구. 갔다 수히 도루 오겠읍니다구, 아무 걱정 허실라 마시구 몸 조섭 훨씬 허시다 기운 차리시거든 학교랑 글방이랑 부지런히 댕기시라구, 응?"
 
150
그다지 큰부자는 아니었을망정, 팔 패 교군에 호피 덮어 타고 견마성 소리 높이 울리면서 시집 온 진주였었다. 그런지 겨우 여섯 달 만에 그는 이 낡아 빠진 두패 교군에 실린 바 되어 친정으로 쫓기어가고 있었다. 친정에로의 초졸한 이 길이, 곧 험난코 기구한 고생길인 줄을 알 바가 없이…… 만일 알았다면 그는 이처럼 조용 자약히 가지는 못하였을 것이었다.
 
151
'좌우간 가는 것이 옳겠다. 어떻든 한번 쫓고라야 말자는 요량이신 듯 하니 더 거역치 말고 우선 갔다 성정이 갈앉기를 기다려 도로 오기로 하고 좌우간 가 드리는 것이 옳겠다.’
 
152
아까 그 잠잠하던 순간, 진주는 이렇게 얼른얼른 결심을 하였었다. 나이 비록 어릴지라도 어려움에 임하여 끝까지는 당황치 아니하고 이만큼 침착한 사려 분별을 가질 수가 그는 있었다. 만약 그것이 없었다면, 그래서 그 고패를 잘못 넘겼다면, 그는 가마에 올라 친정집으로 가는 대신 미구하여 우물에 몸을 던지거나 광의 대들보에 목을 매고 늘어져 저승길을 가고 말았 기가 십상이었을 것이다.
 
153
며느리를 쫓고 난 박씨부인은 막상 통쾌하거나 속이 시원한 무엇은 조 금도 없고 도무지 덤덤하였다.
 
154
참 별일도 다 많다고 우두커니 넋을 놓고 앉았다. 교군과 엇갈리어 들어온 약방 하인이
 
155
"약 가지구 왔사와요." 하여서야 정신이 들었다. 약방에서는 약을 지어놓고 기다리다 못해 자기네 하인 시켜 전위해 보낸 모양이었다.
 
156
"세 첩을 연거퍼 대려 잡숫도록 헙시사구요."
 
157
"오냐."
 
158
"이 약 쓰시면 첸 아주 다 내리실 테온깐 쓰시구 나서 동정 보아 기별 허시면, 기운 돋구실 약 또 지어 드리겠읍니다구요."
 
159
"오냐. 애썼다!"
 
160
박씨부인은 준호의 병이 체하였다는 것에 대하여 마음 가운데나마 아무런 미심이 이는 줄을 모르겠었다.
 
161
등 뒤에서 바스락거리는 기척이 나서 박씨부인은 무심코 돌려다보았다. 준호가 비상을 탄 소위 그 사약 그릇을 집어다 마셔버리고는 마악 도로 엎드리던 참이었었다.
 
162
박씨부인은 놀라지도 않고 도리어 눈을 흘기면서
 
163
"지지리 못생긴 자식 같으니로고 !"
 
164
"어머니 !"
 
165
처량히 한번 부르고, 준호는 설움에 복받쳐 흑흑 느껴 운다.
【원문】바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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