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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인전기(女人戰紀) ◈
◇ 시련(試鍊)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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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4.10.5~
채만식
1
女 人 戰 紀[여인전기]
2
11. 試 鍊[시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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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4
우수( 雨水) 지난 지가 여러 날이요, 이월달도 거의 다 갈 무렵이건만 날씨는 한겨울인 듯 기승스럽다.
 
5
사나운 바람이 진눈발을 몰고 와 비뚤어진 서창에다 쉴 새 없이 끼얹는다. 그럴 적마다 찬바람이 어긋난 문 틈, 찢어진 문구멍으로 방 하나 가득씩 스며든다. 낡은 반자가 심호흡을 하고 문풍지가 포효한다.
 
6
밤은 얼마나 깊었는지.
 
7
육촉 침침한 전등을 불삼아 진주는 웅숭그리고 앉아서 바느질이 혼자 바빴다. 재동 한복판의 찌그러져 가는 초가집, 삭월세 이 원짜리 건넌방이었다.
 
8
방바닥은 정이 떨어지도록 차다. 삭월세 이 원짜리 그 알량한 방이 여 일히 때 기 로니 잘 더울 리도 없는 것이지만 어제 저물게 삼 전짜리 솔가지 한 단으로 조죽을 쑤느라고 이맛돌만 그슬리는 시늉만 한 채 이내 일주야가 훨씬 넘었으니 찬 것이야 지당한 말이었다.
 
9
그래도 아랫목으로 골라 앓는 철이를 뉘었다. 요라는 명색은 없고 솜 비죽 비죽 비어지는 얄따란 두폭 이불을 덮은 위에는 엄마의 치마를 벗어서 덧 덮어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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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나간 정월달로 세 돌이 잡하고 어느덧 네 살…… 병이 아니고 영양이나 웬만하여 순조로이 자랐다면 토실토실 살이 지고 한참 발랄히 뛰놀 무렵이 었다.
 
11
병의 시초는 이유(離乳)의 실패에 있었다. 일찌기는 준호의 병과 그리고 그 의 그러한 죽음과 그 뒤에 온 극도의 생활 곤란과 이런 연속하는 불행과 그 경황으로 인하여 적당한 이유기를 놓치고 있었다. 그러나 작년 삼월 아우를 보기 며칠 앞두고서야 겨우 억지로 젖을 떼었다.
 
12
이유 전에 미리미리 이유 이후의 새로운 환경에 견디어낼 만한 소화기관의 서서한 훈련이 없었다. 그러고는 졸지에 젖 대신 소화하기 어려운 성인의 음식을, 그것이나마 영양분이 빈약한 것을 겸하여 불규칙하게 들이 안겼으니, 근본이 약한 체질이 아니란다더라도 그 물같이 연한 위장이 능히 지탱 치를 못하였을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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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화기관의 고장과 아울러 영양의 부족은 그 밖에 감기를 비롯하여 온갖 병에 대한 저향력을 잃게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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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역, 백일해, 급성폐렴, 디푸테리아 따위의 어려운 병을 도맡은 듯이 차례로 앓았다. 시방은 디푸테리아를 앓고 난 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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꼬바기 일 년을 그렇게 병하고도 어려운 병만 치르고 난 지금은 아이가 흡사히 콩나물을 한 개 뽑아가지고 보는 형용이었다. 팔과 다리는 비루 먹은 무엇처럼 배배 꼬였다. 머리통과 눈만 커다랗고 목은 새끼같이 가늘었다. 혈색은 오이꽃처럼 노랗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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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일 울며 조르는 것이 먹을 것 타령이었다. 졸라야 이루 먹이지도 못 하지만, 먹으나 못먹으나 육장 설사가 아니면 사흘 나흘씩 변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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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비한 생명이건만 잘 끈질겼다. 미루어 인간 생명의 신비성이랄까 혹은 기적이 랄 까를 느끼게 하는 것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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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이와 고무래정자로 이불자락은 걷어내차고서 네활개 쩍 벌리고 누워 자는 것이 오는 삼월로 첫돌이 잡히는 문주(紋珠) ── 준호가 끼치고 간 유복 녀 였다. 어머니 진주가 애기어머니의 몸으로 늘 굶주리는 탓에 젖이 사뭇 모자라 아이가 발육이 늦고 혈색은 파리하나, 한갓 다행은 아직 이렇다 할 병만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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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남매를 데리고 진주는 소일거리도 못 되는 바느질품을 팔면서 바야흐로 굶어 죽기 마침맞은 지경에 다다라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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삯 삼십오 전을 받는 옥양목 박이적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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똑, 똑 바늘 뽑는 소리가 야무지게 대답을 한다. 바람은 여전히 극성으로 진눈을 몰아다 창을 때린다. 방안의 추위는 갈수록 더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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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주는 자주자주 바늘을 놓고 언 손끝을 호호 입김으로 불어 녹인다. 바느질은 절반도 못다 되었다. 춥고 시장한 깐으로 하면 엔간히 밀어 던지기라도 하겠으나 이 밤을 새워서라도 다 마치어 밝는 아침 일찌감치 가져다 주어야만 삯 삼십오 전을 받는다. 그리고 그것을 받아야만 당장 이십전어치 좁쌀한 됫박과 오 전에 두 단 하는 솔가지를 사 두 차례의 죽거리를 마련 하고 나머지를 가지고는 철이를 위하여 약도 한 첩이고 두 첩이고 지어다 먹이고 한다. 진주는 그동안의 경험으로 보아 약을 먹이고 아니 먹이는 차이가 완구 히 달랐다. 해서 약만 여일히 대어 먹이면 아이는 죽이지 않고 구할 수가 있을 성불렀다. 그리하여 여일히는 생의조차 못한다지만, 이틀치 죽 거리가 생기면 하루만 먹고 하루는 굶어가면서까지 간간이 단 한두 첩씩이나마 약을 먹이기를 애써 하였다. 그러나 정성일 따름이었지 그 며칠 만에 한두 첩씩 쓰다 말다 하는 약으로 제법 현저한 효험이 보아지던 바는 물론 아니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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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방 노파가 쿨룩쿨룩 기침을 하더니 이어서 재털이에다 담뱃대를 뚜 드린다. 초저녁잠을 들러나 두어시가 되면 으례 그랬고, 어지빨리 시계보다도 정확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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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파의 그러는 기척에 진주는 밤이 얼마 아니 남은 것을 알고 언 손끝을 불어가면서 부지런히 바늘을 놀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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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이가 잠이 깨어 눈만 뜨고 그대로 누운 채 기운 하나도 없는 소리로 힝 하면서 칭얼거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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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아? 시야 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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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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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 아프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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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밥 줘, 히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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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냐, 어서 더 자거라. 자믄 엄마가 밥 해주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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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이는 이불 속으로부터 기어나와 무릎에 가 안기면서 "빵이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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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냐, 돈 남거든 빵두 한 개 사주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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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깡이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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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달진 것 받아가지구 쓸데구 많기두 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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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잉, 미깡이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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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냐, 봐서 미깡두 사주마. 춥다, 어서 이불 덮구 더 자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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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주 주지 말구 나만 먹을 테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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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구, 문주두 죄끔만 줘야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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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끔만 주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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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문준 죄끔만 주구 철인 많이 먹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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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달래어 도로 이불 덮어 뉘고 다독거리는 대로 잠이 든다.
 
43
잠든 얼굴을 이윽고 들여다보고 있던 진주는 눈에 눈물이 어린다. 그러면서 혼잣말로 중얼거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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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고난 팔자란 말이냐. 에미를 잘못 만난 탓이란 말이냐. 이 어린것이네 가 무슨 죄로…… 쯧쯧 가엾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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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려야 할 텐데…… 죽이지 말고 살려야 할 텐데. 무슨 짓을 해서라도 죽이지 말고 살려야 할 텐데…… "
 
46
긴 한숨을 짓고 눈물을 닦으면서 물러나 앉는다.
 
47
물러나 앉아서 마악 바느질을 다시 잡는데, 그러자 머릿속이 별안간 팽 돌고 방바닥이 휘휘 흔들리면서 정신이 가물가물하더니, 그러다 연하여 깜빡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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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림과 추위로 인한 혼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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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만인지야 제풀로 정신이 들었다.
 
51
굶고 추우면 사람이 잿불 사그라지듯 죽어버린다더니 그 말이 옳은가보다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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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새까지는 몰랐던 죽음의 시꺼먼 위협이 비로소 눈앞으로 얼찐거렸다.
 
53
더럭 겁이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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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다 아주 죽어버리면? 이따라도 내일이나 모레라도 기도 맥도 없이 깜박 그대로 죽어버리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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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면서 진주는 눈이 저절로 잠든 어린것들에게로 옮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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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주 자기 자신이야 죽는다는 것이 별반 두려울 것이 없었다. 어린것 들이 걱정이요 그래 겁이 나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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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이…… 단 하루를 부지하지 못할 것이었다. 울고 보채다 그 자리에 쓰러진 채 기진하여 그대로 절명이 되고 말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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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주…… 울고 엄마를 찾으면서, 그러다 어느 지경에 이를 것인지를 모르겠었다. 설혹 죽지는 않는다더라도 그 죽지 않고 살아 어미닭을 잃은 한 마리 병아리처럼 삐약삐약 울면서 비척거리고 헤매는 정상이 어머니 된 마음에는 죽고 마느니보다 차라리 더 애처롭고 마음에 걸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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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의 죽어 발 뻗고 누웠는 시체.ฺ 한편에서 시체를 붙안고 부르며 우는 철이. 시체를 젖을 빨면서 우는 문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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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동묘지를 향하여 실려나가는 크고 작은 두 개의 주검의 행렬. 그와 반 대 방향인, 그러하되 무인지경인 사바의 길을 엄마 엄마 부르면서 비척 거리고 걸어가는 문주의 뒷모양. 이런 환상이 차례차례로 눈앞에 서언히 나타나면서 진주는 어느덧 느껴 울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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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마 죽어서는 안되었다. 어떻게 하여서든 살아 있어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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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 있어야 하였고, 살아 있을 뿐만 아니라 무슨 도리든 도리가 있어 야하였다. 없으면 억지로라도 마련을 하여야 하였다. 그것도 서서히가 아니라 시급하였다. 만일 그러지 못한다면 참담한 비극은 목전에서 면치 못하고 마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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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리는 그러나 막상 졸연한 것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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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며느리니 에미니 할 것이 없이 종이나 유모인 양으로라도 상관없으니 어린것들을 데리고 가서 있게 하여 주시요. 우선 철이를 병조리를 시켜 소성이 되고 그리고 두 것들이 슬픈 배 곯지 않고 자라면 나는 그 이상 바라지 않겠소. 그렇게 해서 어린것들이 탈없이 자라 제 발로 걸어다닐 때가 되거들랑 나는 도로 쫓아내어도 한이 없겠소. 죄가 있으면 에미 애비에게 있지 자식들에게야 없는 것이니, 잘나나 못나나 남씨 집안의 둘도 없을 혈육인 것을 보아 깊이 생각하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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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씨부인에게다 이러한 교섭이랄가 청이랄까를 양오라비 창수를 시켜서 들여 보낸 일이 있었다. 창수는 하릴없이 하바꾼으로 전락하여 인천 미두장으로 와서 방퉁이꾼 노릇이나 하면서 고향과 진주에게는 종종 왕래가 있었다.
 
66
교섭을 하기는 지나간 해 가을이었는데, 백 번도 더 생각한 나머지 마지못해 한 것이었지만, 과연 발등을 찍고 싶도록 후회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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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 어느놈의 뼉다귄 줄 알아서 내가 그것들을 이 집으로 불러들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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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이 박씨부인의 대답이었다. 진주는 이를 갈면서 두 번도 다시는 생각지 않기로 마음에 맹세를 하였다.
 
69
그러니 달리는 의탁을 할 만한 친지라야 없고 죽으나 사나 스스로 도리를 차려도 차려야만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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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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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늙은인 새벽잠이 없어 그래 청승맞다는 게야…… 이 방 아씬 아마 바누질루 밤을 새나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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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방 노파가 그런 소리를 하면서 담뱃대를 입에 물로 건너온다.
 
73
"온 조곳 보겠지. 이불자락을 죄에 차던지구. 춥지두 아년가베?"
 
74
노파는 그러면서 들어와 앉다가 질겁을 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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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바닥이 이리두 찬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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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앤 덮어줘두 그때뿐인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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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긴 애들은 다 그런가 보아. 나두 새낄 몇 개 길러보았지만서두…… 그래 저앤 좀 으떠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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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늘 그 모양이죠 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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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 그래 으떡헌단 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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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느니 걱정이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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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이 방에 간밤에 불기운을 통히 아니했나 보군? 앓는 아이꺼정 데리구 으떡헌단 말요? 하루 이틀두 아니구 육장…… 그럼 엊저녁두 못해 자신 게로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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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3
"난 장살 나갔다 다 저물게야 와 몰랐지. 애기 어머니가 그래 으떡허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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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쯧쯧 가엾어라. 친정이구 시집이구 간으 온 그렇게두 의탁이 없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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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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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단 괘니 큰일나겠구랴, 큰일나겠어. 굶다 얼어죽은 사람이 달리 있수? 천하 장사라두 오래두룩 굶주리다 강추윌 만난다치면 그만 꼿꼿이 죽어 버리구 마는 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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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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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보? 애기어머니? 내가 무엇하자구 남 못헐 일 권면허겠수? 거저 별수 없으니 나 허란 대루 그렇게 허구랴. 눈 질끈 감구서, 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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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것 둘을 한꺼번에 거천하기가 얼마나 힘이 드는데 그러우? 애 차란 맘에 질래 둘다 데리구 있다 성헌 놈마저 못멕이구 해서 병들어 저 꼴이 되구 나면 어떡헐려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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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91
"앓으나따나 큰아인 저만침이나 자랐은깐 집이다 둬두구 나댕기면서 벌일 헐 수 있잖우? 삯빨래두 빨구, 큰일 집 가서 서두리두 허구, 그러구 삯 바느질일랑 밤저녁으루 들앉어서 해치우구. 그런다 치면야 살기가 이렇기야 허우? 넉넉힌 못 지난다지만 하루 세끼 아니 굶을 것이구, 불 뜨듯이 땔 것 이구, 저애 약은 대놓구 쓸 것이구. 저애두 따지고 보자면 못먹여 저 모양 아뇨?"
 
9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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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 다 거느를려다 방정맞은 말루 둘 다 성치 못허기 쉬우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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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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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집이선 딸두 상관 없대는 거야. 남녀간으 거저 똑똑히 생기기나 헌 갯 구멍 받이가 하나 둘오기만 허면 머 금이야 옥이야 헐 판이라우. 그날 루 당장 유모 정해두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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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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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가 잘 길리우구 호강으루 자라믄서 여학생 공부허구 부자집 좋은 신랑 헌테 루 시집가구…… 조옴 좋수? 데리구 배 곯려가믄서 공부두 못 시키구, 지리리 고생시키다 시집이나 아니나 변변찮언 자리루 주구, 그러기 같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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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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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그 댁이 집안은 또 으떤 집안인데! 바루 장동 김씨네 한파루 영감은 종로서 큰 포목점을 헙넨다. 그러구 양평땅으서 추술 천 석씩이나 받아들이구. 참 쩡쩡 울리구 사는 집안이지……그런데 글쎄 손이 없대는 구랴. 그래 손을 볼 양으루 첩을 몇씩 얻어들여두 눈먼 딸 하나 없대는군. 그런 걸 본다치면 세상은 고르지 못허기루 마련야! 남전북답으 비단대단 싸놓구 바라는 집인 가 아니 생기구서, 아니 바라구 자식 많어 성가셔 허는 집이만 들이 생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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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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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주는 여전히 이렇다 저렇다 말이 없이 듣기만 하고 노파 혼자서 이야기가 입에 침이 마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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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그 본마나님이 나이 올에 마흔여덟인데 인전 나이루두 아일 보긴다 글렀으니 남의 자식이래두 몰래 들여미는 게 있으면 내 자식삼아 하나 길러서 재미두 보구 늙발에 몸을 의탁허구 싶대는 거래…… 아따 저 안동 별 궁 뒷담 골목으루 해 한참 올라오다 수통백이 골목으루 들어가 왼손짝 둘째 골목 막다른 집이 바루 그 댁인데 나두 두어 번이나 물감 팔러 댕 기느라 구가 보았지만 집허며 세간허며 참 으리으리헙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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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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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쥔마나님이란 이가 척 보매두 사람 인자스럽구 얌전헌 게 얼굴에 환히 드러나구. 글쎄 하인들을 여럿을 부리믄서두 일년 삼백예순날 큰소리 한번 아니 헌 대는구 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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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7
제 이야기를 하고 있는 줄 알았을 리야 없는 것이지만, 문주가 잠이 깨어 발딱 일어나 앉더니 엄마를 치어다보고 방긋 웃는다. 볼은 그래도 발그레붉고 하얀 아랫니가 두 대 얄밉도록 이쁘게 해끗 드러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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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통해라. 깨서 울지두 않구…… 문주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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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파가 그러는 것을 아이는 올려다보다 말고 엄마한테로 비척거리고 걸어가면서
 
110
"맘 맘마, 맘맘마." 한다.
 
111
"밥 달란 소리구면? 온, 절 으쩌나!"
 
112
아이는 엄마한테 안기어 연해 맘맘마를 조르다 하릴없이 젖을 문다. 그러나 젖이 나는 것이 있을 턱이 없는 것. 아이는 빈젖을 빨면서 아니 난다고 옹알거려 쌌다. 필경 울고 만다.
 
113
노파가 보다 못해 혀를 차면서 안방으로 건너가더니 반 섞이 조밥이 주발에 서너 숟갈이나 남은 것을 가지고 온다.
 
114
진주는 몇번 사양하다 치하를 한 후 간장과 숟갈을 가져다 조금씩 입으로 씹어서 먹인다.
 
115
어른 술로 치면 한술이나 먹었을까 하여서 아이는 양이 다 차는 모양, 그 알량한 걸음으로 온 방안을 돌면서 갖은 재롱 피운다.
 
116
진주는 남은 밥을 철이를 위하여 잘 아껴 둔다.
 
117
"그만허믄 족헌걸! 그 푸달진 양을 못 채워 맘마 타령이구. 쯧쯧, 가엾은 일두…… "
 
118
물끄러미 아이의 좋아하며 노는 양을 보고 앉았던 노파는 혼잣말같이 그러면서 일어서다가 진주더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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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데리구 모진 고생시킬 밴 차라리 남 주어 호강시키는 것두 남의 부 모루 험직한 노릇입넨다." 하고 건너가 버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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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달이 지나 서울의 꽃소식이 가까왔고 내일이면 딸 문주의 첫돌이 당하는 날, 진주는 동경서 윤석이 돈 오 원에 철이의 속옷 한 벌과 더불어 부쳐 온 문주의 첫돌 선사 양복 한 벌을 받아 앞에 놓고 느끼며 울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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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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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석은 작년 봄 중학을 마치고 이내 동경으로 건너가 여전히 고학을 하면서 어느 사립대학엘 다니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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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석은 일찌기 준호에게 진 바 조그마한 은의를 크게 무겁게 여기고 길래 저 버리지 아니하였다. 그는 어린아이를 데리고 혼잣몸으로 고생살이를 하는진주를 늘 찾아와 아주머니, 아주머니 하면서 위로와 격려를 하여 주고 철이를 귀애하여 주고, 그리고 무리히 저의 용을 줄여가며 약소한 것이나마 가다오다 진주의 하루 이틀의 옹색을 펴게 하여 주곤 하였다. 그것이 진주에게는 얼마나 큰 생색이며 아울러 정신적으로 위안이었던지 모른다.
 
124
그 뒤 동경으로 건너가서도 한 달에 두 번쯤은 반드시 편지를 하고 세 번이나 네 번 만에는 으례 돈이 이삼 원씩이 같이 넣어져서 오고 하였다. 그러고 이번에는 문주의 첫돌을 잊어버리지 않고 철이의 속옷까지해서 돈을 오 원이나와 문주의 첫돌 선사거리를 정성스레 그처럼 사보낸 것이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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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막한 사바에서 그렇듯 곡진한 의리가 감격하여 진주는 울지 아니치 못 하였다. 윤석이며, 자연 준호가 생각이 나 울지 아니치 못할 것이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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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그러한 눈물보다도 보내어 온 첫돌 선사의 옷을 정작 입어 줄 딸 문 주가 이미 나의 품에 없는 슬픔으로 하여 애끊이는 눈물이 더 컸다. 거기에다 아기가 보고 싶고 그리운 어머니의 눈물이요, 자식을 생으로 없이 한 뉘우침의 눈물이었다.
 
127
"아니 난 통히 의지라군 없는 줄 알았드니, 이런 걸 다 사보내는 데가 있구랴?"
 
128
행상 나갔던 안방 노파가 돌아오다 고개를 들이밀면서 소포에서 풀어 헤쳐 논 것을 보고 하는 소리였다.
 
129
진주는 이윽고 눈물을 거두고 나서
 
130
"이 거라 두 낼 입히라구 보냈으면…… "하고 노파의 기색을 살핀다.
 
131
"오온 그 댁에 그애 입힐 옷이 없어서?"
 
132
"거야 그렇지만서두 제 첫돌씨루 이왕 생긴 거니깐."
 
133
"거 긴치가 못해. 개구멍받이루 주구 나서 뒤루 제 부모가 자꾸만 그래 싸면 그 댁에서 좋아허우?"
 
134
"………"
 
135
"이왕 그럭헌 노릇이니, 인전 거저 잊어버리는 게 상수야, 상수."
 
136
"………"
 
137
"아니 낳든 심만 잡구서 잊어버리우."
 
138
"곧 사람이 발광이 될 것 같아요."
 
139
"잊어버릴려군 들질 아녀구서 자나깨나 그 생각만 허구쓴깐 그렇지."
 
140
"안 생각허구 견델 수 있다면야 차라리 다행이죠…… 내가 죽일 년이지. 몹쓸 에미년이지. 어떡허다 한때 고만 환장이 돼가지구…… 이렇게 앨 태우구 허믄서 죄 받아 싸지. 열 번 죽어 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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듣기가 싫어서 노파는 안방으로 들어가 버리고.
 
142
그러나 양오라비 창수가 퍼뜩 당도하였다. 낡아빠진 찌부러진 모자에 빛바래 고 꿰진 겹두루막에 뒤축은 다 닳고 볼은 꿰진 구두에, 그리고 궁기 흐르는 얼굴에…… 일찌기 그 의복 호사스럽고 신수 훤하던 임창수가 과연 속절없었다.
 
143
남으로는 윤석과, 양오라빌망정 육친으로는 이 창수가 진주에게는 유일한 마음의 의지거리였고, 해서 그가 찾아옴은 슬픈 중에도 역시 반가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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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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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넌 그동안 좀 나으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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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수는 진주가 업고 있는 철이를 들여다보면서 묻는다.
 
147
진주가 그 말을 받아
 
148
"죄 끔 낫다는 게 거저…… "
 
149
"조금씩 이라두 나어가니 다행 아닌가…… "
 
150
창수는 그러고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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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하면서 방안을 고쳐 둘러보다가 소포 풀어헤친 것으로부터 눈을 이윽고 진주에게로 옮긴다. 진주는 눈물 흔적을 가리지 못하였다. 써 창수는 일을 짐작 하기에 힘이 들지 아니하였다. 그는 이십여 일 전에 다니러 왔다 진주에게서 그런 상의의 말을 듣고 찬성도 반대도 잘라서 하지 못한것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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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주는 푹 고개를 숙이고 앉아서 말이 없고.
 
153
창수는 담배를 붙여 물로 푸우 길게 내뿜으면서
 
154
"게 다 죄는 내 죌세. 내가 집안을 아니 망쳐놓았으면 누이가 설마 이 지경이야 됐겠나?"
 
155
"오라버니두 그런 말씀 허시지 마세요. 다, 참 제 죄요 제 팔자 소간이지 무슨…… ""면목 없네!"
 
156
창수는 눈물을 씻는다.
 
157
진주도 눈물이 새롭다.
 
158
오래도록 마주 소리없는 눈물을 흘렸고.
 
159
창수가 들고 온 보자기를 풀더니 어린아이들 무색 옷감과 과자봉지를 내어놓는다. 그러고 품에서는 십원짜리 다섯 장을 꺼내어 놓는다.
 
160
"저놈 약이나 좀 지어멕이두룩 허게…… 이건 그년 첫돌을 생각허구 끊어가지구 왔 드니…… "
 
161
"……… "
 
162
창수가 없었다면 진주는 이 옷감과 윤석이 보내준 양복까지 한데 얼싸안고 몸부림을 치면서 통곡이라도 하겠었다.
 
163
"거지두 손 볼 날이 있드라구, 미두장 하바꾼두 혹시 가다 한목 일이 백원씩 생기는 수가 있느니…… 알구 보면 미두에 망한 끈터리요, 노적에 불 지르구 싸래기 주워먹기라는 걸세, 허!"
 
164
사양하는 창수를 만류해 앉히고 쌀과 나무와 반찬거리를 사다 저녁을 대접 하여 보냈다. 창수는 떠나면서, 이왕 그러한 노릇을 상심을 하니 무슨 소용이냐 고 마음을 갈앉히도록 하라고 위로가 곡진하였다.
 
165
해질 무력 ── 황혼. 가장 견디기 어려운 고패였다. 눈이 아무것도 보이지 않으려고 하였다. 머릿속은 열에 떠 멍하고서 사려 분별이 서지를 아니하였다. 발광할 것 같다고 하였거니와 진정이요 조금도 엄살이 아니었다. 먼빛으로나마 잠깐 보기라도 해야망정이지 그대로 견뎌 배길 수는 도저히 없었다. 철이를 들쳐 업고 나서 정신없이 달렸다.
 
166
그 집 골목에선 무수히 오락가락하면서 들어갈까 말까 망설였다. 그러 다그만 들켰다.
 
167
천천히 다시 골목을 들어가서 막 대문 앞까지 당도하는데, 그러자 불의에 지친 대문이 삐그덕 열리면서 문주가 나왔다. 색동저고리에 비단처네 두르고 점잖은 여인네에게 안기어 잠투정을 하는 모양, 졸린 목소리로 칭얼거리면서 문주가 나왔다.
 
168
진주는 고쳐 한번 더 보기보다도 얼굴이 화끈하고 가슴이 두근거려 반 사적으로 얼른 발길을 돌이켰다.
 
169
돌이키면서 한걸음 내어딛는데, 그때였다.
 
170
"엄마 엄마, 우리 문주, 우리 문주, 내 동생 우리 문주 저깄어, 저기!"
 
171
등에 업힌 철이가 몸을 비틀고 손가락질을 하면서 기를 쓰고 외치던 것 이었었다.
 
172
진주는 다리에 맥이 풀리어 털씬 그대로 주저앉으면서 두 손으로 얼굴을 싸고 흐느껴 울었다.
 
 
173
8
 
174
여인은 처음엔 문득 당황하는 빛이었으나 이내 도로 기색을 다스리고, 이윽고 진주의 주저앉아 울고 있는 양을 내려다본다. 그러는 동안 철이는 연방 엄마의 어깨를 잡아 흔들면서 뒤를 돌려다보면서 우리 문주, 내 동생 우리 문주를 소리질러쌓고.
 
175
"모양이 됐소? 날 따라 들어오우그려."
 
176
여인의 입으로부터 밑도 끝도 없이 조용히 흘러져 나오는 말이었었다.
 
177
진주는 따라 들어가는 것이 떳떳치 못하냐 하는 판단이 없이 빨리듯 그대로 따라섰다.
 
178
세간도 없고 거처하는 사람도 없어 보이는 뜰아래 한 방으로 들어가 주인은 아랫목으로, 손은 문치로 각기 앉았다.
 
179
주인 여인은 곰곰이 진주를 건너다보고 앉아서 미처 말이 없고, 진주는 고개를 깊이 떨어뜨리고 앉아 간간이 느끼기만 한다.
 
180
철이가 엄마의 어깨 너머로 내어다 보면서
 
181
"문주야, 이리 와. 엄마 여깄다, 엄마." 하고 손을 까분다.
 
182
문주는 잠시는 말끄러미 바라다보다가 비로소 알겠는지 안긴 처네를 비비고 몸을 빼친다. 주인 여인은 저 하는 대로 놓아둔다.
 
183
문주는 고 두 대의 하얀 이빨로 해끗해끗 웃으면서 비척거리고 걸어와 꺄웃이 들여다보더니
 
184
"엄마." 하고 부르면서 품을 파고든다.
 
185
진주는 헉 하고 높이 흐느끼면서 아이를 끌어다 아스라지도록 껴안고 젖은 볼을 비벼댄다.
 
186
엔간히 진정이 되기를 기다려 주인 여인이 종시 조용스런 음성으로 입을 연 다.
 
187
"나야 바라든 걸 얻어 길르니 좋기야 했소만, 어떡허면 자식을 남의 문전에다 내버릴 생각이 나우? 저만치나 길른 걸. 또 저렇게 이쁜 걸."
 
188
조금치도 책망이거나 불쾌한 내색으로 하는 말이 아니었다.
 
189
"쯧, 살기가 어려웠든 모양이지. 혼자요?"
 
190
"내애, 유복녀예요."
 
191
"안됐구려 젊은이가…… 시집은?"
 
192
"시굴인데…… 있으나마 나래서…… "
 
193
"친척 집두 어렵구?"
 
194
"내애."
 
195
"………"
 
196
"이틀에 한 끼가 간데없구, 큰애 이놈이 병이 들어 죽게 되구. 그래 잘 못 허다 둘 다 죽이는가 싶어서 미련헌 생각에 고만 그랬어요. 적선 허시느라 구 절 도루 내주시면…… ""억 지루 뺏겠소마는 지끔은 무슨 도리가 있소?"
 
197
"살을 깎아 멕이드래두…… "
 
198
"……… "주인 여인은 고개를 끄 덱 끄 덱 하더니
 
199
"바느질 헐 줄 아우?"
 
200
"잘은 못해두 숭낸 다아."
 
201
"아이들 데리구, 우리 집에 있어 보려우? 마침 침모 뒷감을 구해들 이자든 참이구 허니…… 첫째 젊은이가 정상이 딱허기두 허구, 또 나는 그 새 한보름 동안에 어린것허구 정이 들어 떼치기가 섭섭해 그러우. 그렇다구 남의 자식을 영영 뺏자구 헐 며리야 없으니, 그런 염렬랑 헐라 말구서…… 있어 보겠거든 있어 보우그려. 아이들은 남 그대지 부럽진 않게 길르두룩 허께시니…… "
 
202
진주는 이런 후하고 인자스런 구원의 손길이 과연 강박한 이 사바에 있었 으리라고는 꿈밖이었었다.
 
 
203
9
 
204
동지날 그믐까지 여덟 달 남짓이 진주는 두 아이를 데리고 이 김씨집의 고씨라는 그 안주인의 도타운 두호 아래서 고생 없이 잘 지냈다.
 
205
고씨는 어린 문주를 물고 뜯을 듯이 이뻐하였다. 자기 친소생인들 그다지 이뻐하랴 싶을 지경이었다. 문주도 그러는 고씨를 잘 따라 잠도 더러는 고씨에게서 자곤 하였다.
 
206
고씨는 진주의 바느질 솜씨에 흠탁하였다. 바느질 외에 종종 음식을 시켜 보고는 음식솜씨 역시 얌전하고 깨끗한 데에 또한 탄복하였다. 그러고 차차로 날이 깊는 동안 구학문은 물론이요 신교육에도 무식치가 아니한 것과 언어 행동이 조백이 있는 것을 알고는 여간만 기특히 여기지를 아니하였다. 정녕 근지 있는 집에서 보고 배운 데 있이 자란 사람이거니 하고 예사 침 모 나기들한테 처럼 함부로 대접하는 법이 없었다.
 
207
주인이 그래 주는 만큼 더욱 감복하여 진주는 있는 정성과 힘과 재주를 다 하여 알뜰히 일을 하였다. 들어간 지 두 달 안에는 바느질뿐만 아니라 음식 마련까지 해서 침선 범절과 심지어 집안 소쇄에 관한 것까지 죄다 진주의 손과 그의 간여로 되게 되었었다. 가정부(家政婦) 노릇을 하는 셈이었다.
 
208
제일 누구보다도 철이가 좋았다. 의원과 의사를 대어 약을 먹이고 치료 를하고 한편으로는 영양과 소화에 좋은 음식을 충분히 먹이고 한 결과 미 구에 병줄을 놓고 무럭무럭 소성이 되었다. 봄 여름을 지나 가을철로 접어 들면서 는 아이가 딴 아이처럼 살이 오르고 원기가 발랄하여졌다. 어떻게도 반갑고 신기한지, 진주는 그렇게 충실하여진 철이를 바라다보고 있노라면 눈물이나 도록 기뻤다.
 
209
문주는 물론 잘 먹고 잘 놀면서 잘 자랐다. 재롱은 나날이 늘고, 그럴수록 고씨의 귀염은 더하여갔다.
 
210
한번 철이에게서 실패한 전감이 있는지라 진주는 충분한 주의를 하면서 서서히 이유 준비를 하다가 시월달에는 아주 젖을 떼었다. 준비 시기가 여름철 이었고 하여서 몇 차례 배탈이 나고 하였으나 이내 낫고 하였다. 문 주의 이유에는 십분이나 성공을 하였달 편이었다.
 
211
한편 그러고 진주도 혈색이 좋아지고 원기가 회복되었다. 일이 미상불 여러 가지요 고되기는 하였으나, 그렇다고 과로 지경은 아니어서 건강에 해를 끼칠 것은 없었다.
 
212
이렇게 진주 세 모자는 만족이요 행복이었다.
 
213
주인 고씨도 이네에 대하여 불만일 것이 없고 차라리 만족이었다. 해서 주인과 나그네가 다같이 좋았다. 소위 관무사 촌무사(官無事村無事)격이었다.
 
214
모든 것이 주인인 남(他人[타인]) 중심이요 남 표준이었다. 나( 自我[ 자아])라는 것이나 나 표준 내 맘대로라는 것이 없었다. 자연 독립성이 없고자 주적인 것이 못되는 한 소극적이요 추수적인 생활이기는 하였다. 전혀 신축성이나 비약이라는 것이 있을 수 있는 생활은 아니었다. 이것이 미흡하다면 미흡이요 결함이라면 결함일 것이었으나 그렇더라도 아사의 지경에서 방황하 거나 자식을 남의 집 개구멍받이로 들여보내던 생활에는 비길 바가 아니었다. 달리 두르러진 묘책이 없는 이상 써 오랫동안 그대로 지탱함만 같이 못하였다.
 
215
그러나 이 아늑한 지대(地帶)도 매양 젊고 어여쁜 여자 진주를 위해 길이 안신( 安身) 할 자리는 되지를 못하였다. 생각컨댄 인간세상에서 여자의 정조처럼 말썽스런 것도 드물 것이었다.
 
 
216
10
 
217
바깥주인 김씨는 나이 오십이라는데 그저 사십이 좀 넘어보이는 의젓하게 생긴 양반이었다. 장동 김씨네 일파라더냐 무어라더냐 하나, 참 그런 양반보다는 역시 상고판의 돈 있는 양반 냄새가 풍기는 양반이었다. 치깎은 상고머리, 금테살 주경, 동아줄 같은 금시계줄과 사발만한 금시계, 백 금반지와 가락지만큼이나 큰 금반지…… 이런 것들이 첩경 사람 그러하여 보였다.
 
218
듣기엔 첩을 넷인가 다섯인가 얻어두고는 기생첩의 집에 가서 한 사날, 과부 첩의 집에 가서 한 나달. 시골 마름의 딸한테 첩장가 든 첩은 데리고 아기 빌러 가느라고 한 예니레. 또 무슨 생첩은 깜장 통치마에 구두 신겨 동 부인이라는 것을 하고 온천 가느라고 한 댓새…… 이렇게 윤번을 돌면서 본집에는 한 달에 한 번이나 들를까말까 한다던 김씨가 하루 아침 본집에서 진주를 발견하면서부터는 본집에의 발걸음이 서서히 잦기 시작하였다.
 
219
진주는 처음엔 내외를 하였다. 그랬더니 김씨는 마누라 고씨랑 같이서, 나이로 하더라도 부모 자식 같은 사이에 내외가 무슨 내외냐고 하여 하릴없 이통 내외를 하였다.
 
220
안주인 고씨가 문주를 귀애하듯이 김씨는 철이를 대단히 귀애하였다. 오면으 례껏 철이를 불러 안고 앉아서 이야기도 시키고 약 걱정도 하고 하다가 데리고 나가 먹을 것이며 장난감을 사 들려보내곤 하였다. 한번은 금 투성이를 한 대례복을 처억 사입혀 들여보내서 진주로 하여금 기절을 할 뻔하게하였다.
 
221
마누라 고씨의 옷감을 가지고 들어오면서 반드시 진주의 것도 가지고 들어와 직접 혹은 마누라를 시켜 전하였다. 당혜도 사주고 구두도 마춰다 주었다.
 
222
진주는 오직 친절이거니 하고 늘 미안스러워하였을 뿐이었었다.
 
223
유월 보름께. 이때는 김씨는 사흘만큼씩 나흘만큼씩 본집엘 와서 자고 조석을 먹고 하였는데, 그 이유가 매우 적절하였으니, 가로되, 우리 그 침 모 아씨의 찬수 솜씨가 썩 입맛에 맞아서라는 것이었었다.
 
224
그러자 하루는 드디어 진주의 손목을 쥐었다. 안주인 고씨는 마침 출입을 가 늦었고 진주가 저녁상을 들여갔더니, 술을 부어달라고 하였다. 술을 부어주는 것인지 부어주지 않는 것인지는 몰라도, 와락 내키지는 아니하나, 그렇다고 못한단 말이 나오지 아니하여 술을 부어주었다. 석 잔을 받아 마시더니 턱 손목을 잡는 것이었었다.
 
225
진주는 놀랐으나 이내 당황치 아니하고 좋은 낯색으로 뿌리치고 나왔다.그 등 뒤에다 대고, 나는 자식이 없는 사람이라 영리한 그대가 자식 같이 귀여워 그랬으니 어찌 생각 말구료 하였다.
 
226
진주가 포달을 부리지 않고 좋은 낯색으로 뿌리친 것을 김씨는 잘목 해석을 하였던 모양, 그 뒤에도 큰마누라 고씨가 없는 기회면 그 수작을 내고내고 하기 사오 차나 거듭하였다.
 
227
그러다가 마지막 이번에는 마침내 진주의 침방을 엄습하였다.
 
228
준절히 한마디 꾸짖고 방을 뛰쳐나오는 진주의 옷자락을 검쳐 쥐면서
 
229
"자식 하나만 나면 이 재산이 죄다 네것인 줄 몰라?" 하였다.
【원문】시련(試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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