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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인전기(女人戰紀) ◈
◇ 이령산(爾靈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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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4.10.5~
채만식
1
女 人 戰 紀[여인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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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爾 靈 山(이령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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爾靈山險豈攀難[이령산험기반난] 男子功名期克艱[남자공명기극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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鐵血山覆山形改[철혈산복산형개] 萬人齊仰爾靈山[만인제앙이령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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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치 삼십칠년 십이월 초엿샛날 이른아침, 여순공위군 사령관( 旅順攻圍軍司令官) 내목희전(乃木希典) 대장은 막료를 거느리고, 어제로서 완전히 점령한 바 된 이영삼고지(二○三高地)를 향하여 천천히 천천히 말을 나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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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장기 높다랗게 꽂힌 이영삼고지 마루턱을 때마침 동으로 솟아오르는 아침 해가 우렷이 비쳐내고 있다. 어제 낮까지도 천지를 뒤집던 그 요란 턴 대포 소리, 기관총·소총 소리, 일본군의 돌격 나팔 소리와 만세 소리, 적 군의 '우 ― 라 ―’ 지르는 고함 소리 모두가 꿈결 같고, 시방은 바스락 소리 하나 없이 죽은 듯 고요하다. 산산이 부서진 포대와 기관총 좌( 機銃座[ 기 총 좌]), 깨어진 탐조등, 성한 자리보다도 검게 피가 밴 자리가 더 많은지면에 여기저기 함부로 흩어진 포탄 조각과 빈 탄자, 적군의 소총과 꺾 여진 환도, 짓밟힌 군모, 해어진 장화짝, 그밖에 가지가지의 휴대품…… 눈 에드는 건 무서운 격전을 말하는 낭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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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의 돌격대의 일원으로 살아남아 눌러서 이 이영삼고지를 지키고 있는 장사의 한 사람이리라. 피 묻고 찢어진 군복인 채 총을 세워 잡고 파수를 선 한 명의 입초병(立哨兵)…… 해 떠오르는 동녘 하늘을 방심한 듯 우두커니 바라다보고 섰던 그는 얼굴이 문득 처연하여지면서 두 줄기 눈물이 주르르 흘러 언 볼을 적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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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하면 울지 않고는 배길 수 없었을 것이었었다. 울지 않는다면 차라리 목석( 木石) 이었을 것이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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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영삼고지! 이영삼고지! 참으로 한많은 이영삼고지였었다. 밉살스런 이 영 삼고지, 원수의 이영삼고지였었다. 높이라야 203미터밖에 아니 되고 하는 조그마한 산이었다. 물론 여순 요새는 이영삼고지가 명문이었다. 따라서 전략적으로는 대단히 중요한 지대임은 사실이었다. 그러나 산 그 자체는 역시 아무 보잘것없는 203미터 ― 667척 높이의 납작한 언덕일 따름이었다. 그런 푸 달진 언덕, 이영삼고지 하나를 쳐서 빼앗고 하기에 그 애를 쓰고 고생을 하였 기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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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목 대장이 거느린 여순공위군은 팔월부터 시작하여 십일월까지 넉달 동안에 제일회, 제이회 총공격에서 몇몇 요지를 빼앗아 얼마쯤 앞으로 나아가기는 하였으나 이영삼고지만은 요지부동이었다. 이영삼고지가 그대로 성히있는 이상 여순은 언제까지고 든든하였다. 그러나 여순을 언제까지고 그대로 두어서는 큰 낭패가 생기는 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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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서아는 그동안 만주의 육군 병력을 많이 늘리었다. 또 해군으로는 발틱 함대가 불원간 동아 수역에 당도를 하게 되었다. 이에 대하여 일본은 하루바삐 여순을 무찔러, 첫째 여순에 있는 적의 동양함대를 진멸시킴으로써 새로이 오는 발틱함대가 동양함대와 합치어 힘이 불기를 막는 일방 일본 해군으로 하여금 마음놓고 발틱함대를 맞아 싸우게 하여야만 하였다. 그리고 동시에 여순공위군은 적군에 비하여 병력이 부족한 대산(大山) 만주군 총사령관( 滿洲軍總司令官)을 가 도와야만 하였다. 만일 그러지 못하는 날이면 일본은 이 전쟁에서 도리어 패전을 하고 말는지도 모르는 형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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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로전쟁은 그렇듯 여순 하나를 쉬이 함락을 시키느냐 그대로 더 지탱을 하느냐 하는 데에 승패가 크게 달려 있었다. 그리고 여순을 함락을 시키느냐 지탱을 하느냐 하기는 이영삼고지를 빼앗아내느냐 빼앗기지 않느냐 하는데에 우선 달려 있었다. 그리하여 이영삼고지의 승패는 곧 일로전쟁의 승패를 좌우하게 되는 것으로, 이를 치는 일본군이나 지키는 노서아군이나 있는 힘을 다하여 장렬한 공방전이 전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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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해만 헛되이 크고 볼 만한 전과는 없어 실패나 다름없는 제일회, 제 이회, 제삼회의 공격에 뒤이어 일본군의 제사회째의 공격을 단행하기는 십일월도 다 가는 이십칠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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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가 지고 어둑어둑 어두워오는 오후 여섯시. 대기하고 있던 공격대는 세길로 나누어 이영삼고지의 적진을 향하고 일제히 진격을 개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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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의 대항은 여전히 치열하였다. 대포와 기관총이 유축없이 불을 토 하였다. 탄환이 빗발치듯 한다고 이르거니와 이는 약간 빗발 따위가 아니었다. 차라리 크고 작은 탄환으로 막을 치는 형국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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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신이 오로지 충과 용맹으로써 불에 달군 무쇠 같아진 일본군은 그와 같이 무서운 탄막을 헤치고 겁함없이 돌진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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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격 앞으로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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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와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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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렁찬 함성과 더불어 한 약진(一躍進[일약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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착 엎디었다는 장검을 휘두르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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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격 앞으로옷!" 하는 호령과 함께 날쌔게 뛰쳐나가는 대장(隊長)의 뒤를 쫓아 한꺼 번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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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와 아!" 함성을 지르면서 또 한 약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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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진하는 산병선에 큰 포탄이 와 떨어지면서 한 중동을 뭉떵 잘라놓는다.지뢰(地雷)가 터지면서 장졸의 몸뚱이를 셋씩 넷씩 공중으로 뿜어올린다. 탐조등의 푸른 광망이 지면을 커다랗게 비질하고 지나간다. 그 뒤로 기관총이 미친 듯 콩을 볶는다. 돌격군이 낙엽지듯 수없이 나가 떨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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싸움은 어느덧 고전(苦戰)에 들었다. 한 발 전진에 손해는 몇곱절씩 불었다. 그러나 굴치 않고 돌진 또 돌진. 우군의 시체에 걸려 엎드러지면서 우군의 시체를 밟고 넘으면서 돌진, 맹렬히 돌진. 마침내 적진 바로 밑 오 미터 지점에까지 육박하여 올라갔다. 여기서 처참한 사투가 한동안 전개 되었 다. 그러나 필경은 그 이상 더 나아가지를 못하고 그대로 밤을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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밝는 이십팔일 아침 공격군은 새로운 세를 얻어 다시금 돌격을 시작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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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격 앞으로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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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와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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쏟아지는 적탄에 턱턱 쓰러지는 앞엣대의 뒤를 이어 끊임없이 장렬한 돌격을 되풀이하였다. 하는 그 무서운 기운에 적진이 이윽고 동요하는 빛이 보였다. 때를 놓치지 않고 우익 부대가 "들이쳐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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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세!" 하고 고함치면서 산 위로 짓쳐 올라갔다. 그러나 다음 순간 적의 역습을 만나 도로 물러서지 아니치 못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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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러섰다가 다시 짓쳐 올라갔다. 적은 적대로 또 역습을 하여왔다. 또 물러섰단 또 짓쳐 올라갔다. 또 역습을 하여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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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격, 역습…… 돌격, 역습…… 이 짓을 무수히 되풀이하다 밤 아홉시에야 일단 이를 점령하고 방어공사도 베풀고 하였다. 그러나 밤중 한시에는 적의 말못하게 맹렬한 역습으로 인하여 점령대는 전멸이 되고 이영삼고지는 다시금 적의 수중으로 돌아가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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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를 지나서 십일월 삼십일, 일본군은 진세를 새로이 하여가지고 오 전 열시부터 다시 이영삼고지를 치기 시작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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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이야말로 기어이……라면서 공격군의 공격도 전일에 비하여 한결 맹렬한 것이 있었거니와 지키는 노서아군에서도 해군병이며 철도 엄호병을 다 풀어내어 병력을 넉넉히 하는 한편 대포, 기관총, 속사포, 소총, 지뢰, 수척 탄 따위로 화기의 있는 것을 다하여 공격군의 머리 위에 죽음의 불비를 내리 퍼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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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격군은 골패작 쓰러지듯 연달아 쓰러졌다. 쓰러진 우군의 시체를 밟고 넘으면서 후속부대는 느꾸지 않고 뒤로 뒤로 연방 육탄의 돌진을 계속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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땅이 쪼개지는 듯 요란한 대포 소리, 콩 튀듯 하는 기관총과 소총 소리, 자욱이 잠긴 초연, 번뜩이는 검광, 지르는 아우성 소리. 그 사이를 열, 스물, 백 늘비하게 덮이는 시체, 골짝을 냇물 이루고 흐르는 피, 피, 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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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격군은 처절한 돌격을 거듭하여 마침내 산꼭대기의 서남쪽 한귀를 빼앗아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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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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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잠깐이었다. 산꼭대기의 한귀를 점령한 부대는 전부가 부상 병 이었다. 수효도 적었다. 새로운 우군의 증원부대가 오기 전에 적의 우세한 역습이 먼저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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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검과 폭탄을 양손에 갈라 쥐고 일개 대대의 큰 부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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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 ― 라 ―"함성을 지르면서 조수같이 역습하여 오는 적군을 맞아 얼마 아니 되는 상병을 가지고 점령부대는 그래도 용감히 싸웠다. 그러나 너무도 세가 기우는 싸움이요, 처음부터 승패가 번연한 싸움이었다. 일몰과 함께 산꼭대기에는 드디어 한 명의 일본군도 남지를 못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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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 열시. 공격군은 어둔 밤을 도와 야습을 강행하여 격전 격전 끝에 또다시 산꼭대기의 한귀를 점령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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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매양 허사였다. 참호를 판다, 토랑을 쌓는다 하면서 역습에 대 한 방어 공사를 급급히 하고 있는 중 생밤중 한시만 하여서 적은 수비병 전부를 몰아 대역습을 하고 덤비었다. 점령부대는 악전 악전, 그러는 동안 태반이 죽고 꺾여진 총검, 부러진 군도에 피투성이가 되어 눈물을 뿌리면서 산을 내려오기는 전원의 겨우 십분지 일이 차지 못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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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이 휘엿이 밝았다. 이영삼고지로부터 고 옆 적판산(赤坂山)에 걸치어 함부로 널려 있느니 온통 시체였다. 시체로 하마 산 전체를 덮은 것이나 아닌가 싶을 만큼 양편군의 시체는 공격로에 골짝에 산 위에 늘비하였다. 그 중에는 살아서 신음하는 부상병도 많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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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대로 그 귀중한 죽음을 한 시체들을 짓밟으면서 공격전을 계속한다는 것은 호국의 영령을 위하여 도리도 아니요 예의도 아니었다. 또 명예의 전상을 한 전우를 날라다 치료도 어서 바삐 하여야 하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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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격군은 공격이 한시가 급한 사정이었건만 십이월 일일의 예정한 공격을 일단 중지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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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이월 일일부터 사일까지 나흘 동안 사상자를 수용하기 위한 이 영 삼 고지와 적판산 방면의 일부 휴전(一部休戰)이 성립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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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병정과 노서아 병정은 벙어리들이 만난 것처럼 서로 손짓 눈짓으로 이야기도 하고 실없은 농담도 하고 하면서(그것은 슬픈 중에도 미소로운 정경 이었다.) 제각기 우군의 시체와 부상병을 정중히 수용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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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흘의 휴전기한은 지나고 십이월 오일 첫새벽부터 공격군의 포병 진( 砲兵陣)에서는 대포 소리가 은은히 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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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격군은 점령을 하느냐 전멸을 하고 마느냐 오늘로 아주 최후 결전을 하자는 참이었다. 그런 만큼 돌진하는 기세도 그동안에 비하여 훨씬 장렬 한 것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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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전 아홉시. 포격이 뚝 그치면서 내리는 진격명령에 각 돌격대는 일제 히 산꼭대기를 향하고 돌진을 개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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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진으로부터는 기다렸던 듯 대소의 화기가 한꺼번에 불을 뿜는다. 기관총과 소총 탄환이 사람은커녕 개미 한 마리도 기어올라갈 빈틈을 주지 않고 좍좍 쏟아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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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군의 화기는 수효나 종류에 있어서도 그러하거니와 질에 있어서도 일본군의 것에 견주어 정녕 한걸음 앞선 점이 있었다. 이 화기의 우세에 대하여 일본군은 육탄돌격으로써 장기를 삼았다. 육탄돌격은 곧 대 화혼( 大和魂) 이었다. 이 싸움은 그리하여 대화혼과 화기와의 싸움이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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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격, 돌격. 부라퀴같이 돌격을 하여나갔다. 제일돌격대가 다 쓰러져 버리면 제이돌격대가 그 뒤를 이어 돌격. 제이돌격대가 쓰러지면 제 삼 돌격대가 그 뒤를 이어 돌격. 돌격, 돌격, 끝없는 돌격의 연속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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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전 중에 이영삼고지 서남쪽 한귀에서 만세 소리가 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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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어서 동북쪽에서도 우렁찬 만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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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북으로 협공을 만난 산꼭대기의 적군은 이리 닫고 저리 닫고 허둥거리면서 연해 돌격군의 백인에 퍽퍽 엎드러지다 갈팡질팡 서태양구(西太洋溝) 쪽으로 퇴각을 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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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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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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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 위에는 적병의 그림자조차 볼 수가 없고 진동하느니 오직 일본군의 만세 소리였다. 이것으로써 이영삼고지는 완전히 점령이 되었던 것이요, 때인즉 명치 삼십칠년 십이월 오일 오후 두시 삼십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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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하여 점령을 한 이영삼고지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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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단 빼앗았다는 도로 빼앗기고, 다시 빼앗았다는 또 도로 빼앗기고, 무수 히 그 짓을 되풀이한는 동안 우군의 시체는 산을 덮고 피 괴어 골짝을 흐르지 아니하였던고. 도로 빼앗길 적마다 절통하여 가슴을 치기 몇번이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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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에 완전히 점령을 하고 산 아래 엎드린 여순을 굽어볼 때에 감개 무량 치 아니 할 수 없을 것이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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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요행 살아남아 여기에 서서 이 만족, 이 감개를 맛본다거니와 공격에 같이 참가하였다 산 아래에서 목숨을 버린 수많은 전우들은…… 생각하 매 눈물이 아니 흐를 수 없을 것이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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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안간 요란한 말굽 소리에 입초병은 얼른 군복 소매로 눈물을 씻고 돌아선다. 여순공위군사령관 내목희전 대장이 막료를 거느리고 이윽고 이 산정에 올라온 것이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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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목 사령관은 말에서 내려 이미 굴복한 바나 다름없는 발 아래의 여순을 언제까지 고 묵묵히 내려다보고 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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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지지리 애를 먹이던 여순은 인제 함락을 시킨 것이나 일반이었다. 그런 지라 여순공위군 사령관으로서의 내목희전 대장은 이에 발분의 목적을 이룬것이라고 하여도 무방하였다. 따라서 그는 마음을 턱 놓고 웬만큼 미우를 펴도 좋았다. 어쩌면 기쁨과 만족에 취할 수도 없지 아니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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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바야흐로 내목 사령관의 심정은 하나도 그런 것이 아니었다. 그 의심 정은 저 이름없는 한 명의 입초병의 방금 그 무량하여 하던 감개와 다를것이 없었다. 물론 그보다는 훨씬 더 넓고 심각함이 있을 것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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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려서부터도 마음이 약하고 정이 연하여 잘 울었고, 그래서 아명을 나끼도( 泣人[ 읍인])라고까지 한 내목희전 대장이었다. 그는 이번의 이 영 삼 고지의 공격명령서를 쓰면서도 한 장 한 장 쓸 적마다 얼마나 울면서 썼는지 모른다. 명령서가 내리면 거기에 적힌 천 명이면 천 명의 장졸은 즉시 이 영 삼 고지의 공격에 참가하여 태반이 죽고 말 것을 번연히 알고 있는 그였기 때문 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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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목희전 대장을 일찌기 남산(南山)의 접전에서 맏아들을 잃었다. 그리고 직접 이번에는 십일월 삼십일의 이영삼고지 공격에 하나 남은 둘째 아들을 마저 잃었다. 출전에 임하여 부인더러 삼부자(三父子)의 관을 준비하되 세 개의 관이 다 차기를 기다려 일시에 출상을 하라고까지 단속을 한 그 였던만큼 나라에 바친 두 아들의 죽음을 결코 애석하여 하던 바는 아니었다. 그러나 그도 남의 아버지에 유난히 다정다한한 사람이었다. 억제하고 현 어색을 아니 할 따름이지 가슴 속으로야 그것 또한 한 줄기 비감거리가 아닐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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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많은 그 씩씩하고 아까운 장정들을 이 손으로 죽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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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슨 얼굴로 폐하께 복명을 아뢰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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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아가 무슨 면목으로 국민을 대하며, 무슨 말로 그 유족들에게 사죄를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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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이렇게까지 그는 사무치는 회심에 하마 눈물이 쏟아질 뻔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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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이 여순공략전의 성공이 일본제국이 국운을 내걸고 하는 단판 씨름, 일로전쟁을 승리로 인도하는 것임을 생각할 때에 이영삼고지는 제풀 충혼탑( 忠魂塔) 일 것이며, 그 점령은 기쁘고 경사스러웠지 부질없이 희생을 슬퍼만 하고 있을 며리는 없는 것이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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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기 때문에 내목 사령과도 여기서 연연히 눈물을 뿌리는 대신 얻은 것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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爾靈山險豈攀難[이령산험기반난] 男子功名期克艱[남자공명기극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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鐵血山覆山形改[철혈산복산형개] 萬人齊仰爾靈山[만인제앙이령산] 의 한 귀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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얻은 시를 수첩에 적어넣고 마악 그 자리를 돌아서려던 내목 사령관은 발끝에 차이는 것이 있어 무심코 지면을 내려다보았다. 이상스런 주머니 하나가 떨어져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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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목 사령관은 허리를 꾸부려 그것을 주워올리고 여러 막료들의 눈이 그리로 모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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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머니는 주머니라도 일본 병정들이 지니는 둥근 호부(護符:오마모리) 주머니가 아니요, 귀가 지고 목이 길고 한 눈에 선 주머니였다. 이것이 조선 사람이 흔히 허리에 차는 귀주머니인 줄은 내목 사령관도 막료들도 미처 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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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머니는 옥색 관사 바탕에 자주실로 앞에서 수(壽), 뒤에다 복(福)을 각각 수놓고 남끈을 꿰고 하였다. 생김새가 이미 눈에 설고 이상한데다 색채 또한 그렇게 유색하여 얼른 보기에도 자못 이국정취적인 것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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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물한 장사들의 유품이 하고 많이 여기저기 끼쳐져 있었고 그런 유품들에까지 나마 마음 범연치 못하는 다심 장군 내목 사령관이었다. 그러나 그렇더라도 하필 조그마한 주머니 하나가 유난히 눈에 띄었다는 것은, 그리고 한 사령관의 몸이 되어 손수 그것을 거두어 올리기까지 하였다는 것은 막상 주머니 그 자체가 가지는 이국적인 정취에 문득 주의가 끌렸던 때문이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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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가 한문 글잔 것만 보아도 우리 군 장병의 유품은 분명한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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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목 사령관은 혼자 이런 생각을 하면서 주머니를 몇 번이고 앞뒤로 되 작거려 보아쌓는다. 속에는 무엇이 들었는지 모르나 부피는 없어도 묵직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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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침내 끈을 늦추고 속엣것을 꺼내었다. 은으로 만든 직경 한치 닷푼 가량의 동그랗고 납작한 곽이었다. 시계 앞딱지처럼 된 뚜껑이 있어 열고 보니 사진 케스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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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을 보는 순간, 내목 사령관의 입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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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하야시(林中尉[림중위])가!" 하는 차탄이 가만히 흘러져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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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은 정복으로 차린 임경식(林敬植) 중위가 한 칠팔 세 가량 되어 보이는 소녀를 앞으로 안고 찍은 사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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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하야시도 필경 이번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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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목 사령관은 좌우를 돌아보고 그렇게 묻다 말끝을 흐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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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영삼고지의 최후 공격에 좌익 부대를 지휘한 길전 소장(吉田小將)이 앞으로 나서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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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이번에 뛰어난 공롤 세우고 장렬히 전사를 했읍니다." 하고 대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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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전 소장의 설명을 들으면, 임중위는 좌익 부대의 제삼돌격대를 지휘 하였다. 물론 결사대였고 누누이 지원을 한 노릇이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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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이월 오일 오전 아홉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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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남쪽으로 치는 우익 부대에 호응하여 동북쪽으로 좇아 공격을 개시한 좌익 부대의 제일, 제이의 돌격대는 적의 아귀 같은 사격으로 돌격을 하자 마자 연달아 흉벽(胸壁) 아래를 시체와 상병으로 덮고 거지반 전멸이 되었다. 뒤를 이어 임중위가 장검을 휘두르고 제삼돌격대를 힐타하면서 흉벽을 향 하여 맹렬한 돌진을 하였다. 돌격병은 하나 쓰러지고 둘 쓰러지고 솎아 내 듯 연방 쓰러졌다. 임중위도 왼편 팔에 일탄을 맞았다. 그러나 꿈쩍도 않고 앞으로 앞으로 부하는 격려하면서 돌진을 계속하였다. 드디어 비교적 성한 세 로써 흉벽 아래까지 이르렀다. 왁 한번만 더 뛰쳐오르면 되는 판이었다. 흉벽 위의 적병은 기관총, 소총, 수척탄은 물론이요 큰 돌멩이까지 굴려 떨어뜨리면서 완강히 버티었다.
 
102
마지막 한번만 더 뛰쳐올라가면 되는 판인데, 하도 사나운 적의 저항에 이상 더는 한 걸음도 움찟을 할 수가 없었다.
 
103
마침 이때 반대편인 서남쪽으로부터 우군의 만세 소리가 요란히 일었다. 서남쪽 한귀를 우익 부대의 돌격대가 점령을 한 것이었었다.
 
104
임중위는 때를 놓치지 않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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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이쳐랏!" 외치면서 몸을 날려 흉벽 위로 뛰어 올라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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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병이 집 쑤신 벌떼처럼 와 하고 임중위에게로 덤벼들었다. 임중위는 드는 일본도를 휘둘러 덤비는 적병을 무우쪽 베듯 베어넘겼다. 만세를 부르면서 대장(隊長)을 뒤따라 올라오는 돌격병이 큰 적병들을 총창으로 퍽퍽 찔러 젖힌다. 폭탄을 던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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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와 아우성 가운데 승패 모를 백병전이 잠시 동안 계속되었다. 그럴 즈음에 반대편인 서남쪽으로부터 우군의 함성이 한결 높이 일더니 그쪽의 적군이 이쪽을 향하고 어지러이 퇴각을 시작하였다. 그것이 서남쪽의 우군에게는 당장은 성공이었으나 우선 승패의 분간이 서지 못한 채 한참 백병 전을 하는 중에 있는 이편 ― 동북쪽 ― 임중위의 제삼돌격대에게는 실로 아슬아슬한 살판이었다. 그 서남쪽으로부터 퇴각하여 온 적군이 그대로 만일 이편 ― 동북쪽의 적군과 합세가 된다고 하면, 임중위의 제삼돌격대는 이 백병 전에서 승리는 고사요 전멸을 당하고 말기가 십상이었다. 그럴뿐더러 적은 이 동북쪽에다 발붙임을 하여가지고 일단 빼앗긴 서남쪽의 일본군에게 역습을 하려 들 것이니, 또한 불리하기 짝이 없는 일이었었다. 따라서 오늘의 이 영 삼고지 공격도 결국 실패를 할 위험성이 다분히 있다고 할 수가 없지 아니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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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정세를 민첩히 판단하여낸 임중위는 천하 없어도 이쪽 ― 동북쪽 의적을 저쪽에서 퇴각하여 오는 적과 합세되기 전에 무찔러버리려고 있는 껏 용맹을 떨치어 일변 부하를 독려하면서 그야말로 좌충우돌 부라퀴 같이 납 뛰었다.
 
110
임중위 이하 제삼돌격대의 전원이 그 전신이 피투성이가 되어가지고 악 악들 이치고 찌르고 하는 형상은 적 노서아 병정들에게는 도저히 인간이라기보다도 지옥으로부터 뛰쳐나온 악마였을 것이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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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연 적군은 몸서리를 치면서 한 놈 두 놈 물씸물씸 뒷걸음을 치는 놈이 생기기 시작하였다. 그러자 마침 함성이 일면서 제사돌격대가, 다시 제 오 돌격대가 뒤를 이어 돌격해 올라닥치었다. 한번 동요가 인 적진은 새로운 돌격을 만나자 그만 맥을 잃고 무너지기 시작하였다. 퇴각이었다.
 
112
공격부대는 늦추지 않고 그 뒤를 급히 쫓으면서 쳤다. 그동안 여러 번 쓰라린 경험을 치렀거니와 산 위의 적군을 완전히 소탕하여 역습하여 올 끄 터리를 남겨주지 말자는 것이었었다. 숨도 쉬지 못하게시리 다급히 뒤를 쫓으면서 쳤다.
 
113
그때였다. 여전히 맨 선두에 서서 달아나는 적을 쫓고 있던 임중위가 별안간 앗 소리를 지르면서 왼편 손으로 젖가슴을 누르고 앞으로 엎드러졌다. 전면으로부터 날아온 적의 맹탄이 심장을 정통으로 꿰뚫었다.
 
114
저쪽 ― 서남쪽에서 쫓겨오던 적군과, 이쪽 ― 동북쪽에서 쫓겨가던 적군은 서로 바라고 달리던 진지가 이미 점령된 것을 알자 중간에서 할 바를 모르고 허둥거리다 하릴없이 총퇴각을 하는 것이 서 태양 구( 西太洋溝) 방면 이었다.
 
115
이리하여 이영삼 고지의 산성에는 적군이란 시체뿐이요, 완전히 일본군의 수중에 들어왔고 우렁찬 만세 소리에 일장기가 펄펄 날리었던 것이었었다.
 
 
116
8
 
117
그 전날 밤, 길전 소장은 굳이 그렇게 결사대의 돌격대장을 자원하는 임 중위를 앞으로 불러다 세우고 타일렀다.
 
118
"너는 처지가 좀 다르다고 할 수 있는 사람야. 그 말 알아듣겠지?"
 
119
"네."
 
120
"그러니 결사대의 지휘만은 단념하는 것이 어떤고?"
 
121
"싫습니다!"
 
122
임중위의 말씨 하며 음성은 무엄스럽달 정도로 괄한 대답이었다.
 
123
길전 소장은 고개를 꺄웃하면서 혼잣말로
 
124
"모를 일이야!……"
 
125
그러다 다시 임 중위더러
 
126
"물론, 너의 그 싸움에 다다라 죽음을 두려워 않고 남보다 앞서 나아가고자 하는 한 무인(武人)으로서의 용맹을 그만했으면 모르는 바가 아니로다! 심히 가상해!…… 그러나…… "
 
127
"각하!"
 
128
"응?"
 
129
"그것은 필부의 용맹이올시다! 단지 죽음을 두려워 않는 남보다 앞서 나아가고자 하는 그런 용맹은 필부의 용맹이올시다!"
 
130
"음!"
 
131
"소관은 그런 용맹으로써가 아니올시다!"
 
132
"음, 음!……그럼?"
 
133
"용맹은 충의(忠義)로부터 우러나는 용맹이라야 참되고 바른 용맹 이 올 시다!"
 
134
"옳거니!……그런데?"
 
135
"그런데, 너는 일본인이 아닌 사람으로 일본제국에 대한 충의가 우러날바가 없을 터가 아니냐, 이런 의미시겠지요?"
 
136
"그래서?"
 
137
"아까 먼첨에 모를 일이라고 하신 말씀도 역시 그 말씀이신 줄 압니다!"
 
138
"정녕!"
 
139
"각하?"
 
140
"응?"
 
141
"소관은, 사람은 조선 사람이올시다. 그러나 소관의 마음의 나라는 일본이 올시다."
 
142
"!……"
 
143
길전 소장은 일어서서 임중위의 앞으로 나아가 어깨에 손을 얹고 이윽고 그 얼굴을 들여다본다.
 
144
임중위도 마주 소장의 눈을 본다.
 
145
서로 보고 눈과 눈에는 이슬이 어리었다.
 
146
"하야시."
 
147
"네."
 
148
"용서해 다고. 내 잠깐 어두웠노라. 깜박 몰라보았노라."
 
149
"노상, 무리 아니신 노릇입니다."
 
150
"가, 마음껏 싸워 잘 죽어다고?"
 
151
"고맙습니다……그럼 이걸로 하직이올시다."
 
152
임중위는 한 걸음 물러나 거수경례를 올리고 돌아서서 활발히 걸어나간다.
 
153
"하야시?"
 
154
소장의 부름에 임중위는 뒤돌아섰다.
 
155
"네?"
 
156
"부탁은 없는가?"
 
157
"없읍니다. 이 사실 그것이 후일 장차 우리 조선 동포에게 가르쳐 주는 무엇이 있을 것입니다."
 
158
"음……가족은?"
 
159
"편모(偏母)와 여섯 살박이의 어미 없는 딸년 하나가 있읍니다."
 
 
160
9
 
161
"기특한 일이로곤! 기특한 일이로곤!"
 
162
길전 소장의 설명을 다 듣고 난 내목 사령관은 절절히 그러면서 몇번이고 고개를 끄덕인다. 그러나 다시
 
163
"이상한 인연이고!……나와는 이상한 인연인 것이……그 사람이 우리 일본에 오기는 아주 어렸을 적인데…… "하고 자기의 알고 있는 임중위의 내력과 및 자기와의 인연에 대한 것을 곰곰 이야기를 낸다. 즉 임중위의 선친은 조선의 유신운동(維新運動) 단체의 일원으로 명치 십칠년, 저 세상을 들렌 우정국 사건(郵征局事件)의 갑신정변에 실패를 하고 김옥균 들과 함께 일본으로 망명을 온 사람이었다.
 
164
망명객 임씨는 일본 조야의 두터운 비호를 받으면서 한 삼 년 동안 망명 생활을 하는 동안 명치유신 이후 일본의 새롭고도 기운찬 여러 가지 발전 가운데, 그중에서도 특별히 신식군제(新式軍制)와 그 교육에 대하여 깊이 느끼는 바가 있어 자기의 어린 외아들 임경식을 일본으로 데려다 어학이며 그밖에 간단한 기초학문을 가르쳐 가지고 명치 이십년 때 마침 새로이 생기는 육군 유년 학교에 들여보냈다.
 
165
임경식은 타고난 자질이 자못 영민하고 의지와 신체도 매우 건실하여 그 부친의 기대에 어그러짐이 없이 순조로이 육군사관학교까지를 마치고, 스물두 살 적에 소위에 배명이 되었다. 그것이 바로 명치 이십칠년. 일청전쟁 이인 해였다.
 
166
임소위는 대산제이군(大山第二軍)의 휘하에 든 혼성 제 일 여단( 混成第一旅團)에 배속되어 주장 요동 각지(遼東各地)의 작전에 전전하였다. 이 혼성 제 일 여단장이 다른 사람이 아니라 곧 내목희전 소장이었다.
 
167
내목 여단장은 유명한 개평작전(蓋平作戰) 때까지에는 배하에 임 경식 소위라는 한 특수한 부하가 있는 줄은 전혀 몰랐었다. 또 임경식 소위 자신도 그동안까지는 이렇다 할 전공을 세울 기회를…… 따라서 그의 특수한 존재인 특수성이 상관의 주의를 끌 만한 기회를 가지지 못하였다.
 
168
내목 여단이 개평을 치기는 명치 이십팔년 정월 초열흘날 첫새벽부터 였는데, 이 개평의 청병(淸兵)은 뜻밖에 진지와 저항이 완강하여 얼어붙은 개평 하를 사이에 두고 맹렬한 사격을 퍼붓는 바람에 일본군은 용이히 돌진을 할수가 없었다. 그것을 본 내목 소장은 여단장 자신이 별안간 진두로 말을 몰고 나오더니 전군을 질타하면서 그대로 맨 앞장을 서서 얼음 위를 적진을 향하여 돌진을 하였다. 놀란 장졸들은 불끈 용맹이 솟아 일제히 함성을 지르면서 미끄러운 얼음빙판을 달리며 구르며 적진으로 몰쳐들어갔다. 이 때에 말 탄 여단장을 빼치고 제일착으로 적진에 뛰쳐든 한 사람의 장교가 바로 임 경식 소위였었다.
 
169
그런 임경식 소위에 내목 여단장이었고, 십 년이 지난 오늘 이 자리에 유품만 남고서 가고 없는 임중위에 내목 사령관이요 하였다.
 
170
내목 사령관은 임중위 부녀의 사진을 다시금 한참이나 들여다보다가 혼잣말로
 
171
"딸아인가 보다!……한번 가보았으면 좋겠다만서도! 홀로 있다는 노자당이랑…… "
 
172
그러고는 천천히 발걸음을 옮기면서 좌우더러
 
173
"유족한테 군에서 공식으로 다른 유품은 전달을 하겠지만 이 주머니와 사진은 내가 글발이라도 좀 적어서 직접 보내고자 하니……"
【원문】이령산(爾靈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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