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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인전기(女人戰紀) ◈
◇ 새 출발(出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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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4.10.5~
채만식
1
女 人 戰 紀[여인전기]
2
7. 새 出發[출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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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4
그 임경식 중위의, 오늘이 열한번째 돌아오는 제사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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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박 같은 눈이 아침부터 시작하여 밤이 들도록 개지 아니하고 차분히 내리고 있는 것도 다른 해의 이날과 다름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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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서로 한 방씩이 있고 한가운데에 대청마루가 있고 한 후원 별당의 그 대청 마루가 임중위 위패를 모신 영실(靈室)이었다. 그리고 동편방이 진주의 조모 송심당노인(松心堂老人)이 안팎 가정(家政) 전체를 양손(養孫) 부처에게 전장시키던 날, 안채의 큰방으로부터 물러와 조용히 거처하고 있는 방이요, 서편방이 진주의 방이었다. 진주는 출가하던 날까지 처녀적을 이 방에서 지냈고, 혼인 때의 신방(神房)이 또한 이 방이었으며, 지나간 추석 시집으로부터 쫓겨와서도 도로 이 방에서 거처를 하고 있는 참이요 하였다.
 
7
영실은 제수의 진설이 마악 끝나고 팔서리 같은 한쌍 육촛불만 휘황한 아래 아무도 없고 일단 비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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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로 병풍을 둘러친 정면 중앙에 영교와 및 일본제국 육군 중위로 정장한 임 중위의 전지판 반신초상이 나란히 놓여 있다. 그 좌우로는 긴 탁자 위에 훈장이며 중요한 유품을 넣은 대소 여러 개의 상자와 특히 이 영 삼( 二○三) 고지의 돌격전에 쓴 군도를 비롯하여 그때의 군복, 군모, 장화 등의 유품 이 다른 유품들과 함께 가지런히 놓여 있다. 또 좌우의 벽에는 액에 넣은 가지가지 훈공(勳功)의 수장이며, 소위 적과 중위 적과 이영삼고지의 전공으로 사후 승차한 대위 적과의 각각 임명장이 걸리어 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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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이 영실의 평일의 모양이요, 오늘 밤은 제사라 영교와 초상 앞으로 큰 제상에 정갈히 차린 풍부한 제수가 법도에 좇아 진설이 되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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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지러운 상념에 잠겨 때 가는 줄을 잊고 앉았던 진주는 저편 방에서 할머니의 기침하는 소리에 비로소 생각이 나 조용히 영실로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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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을 환히 밝히고 제수를 차려놓고 한 제향날 밤의 영실은 정녕 아버지의 혼령이 그 다정스런 미소를 하시면서 선연히 와 앉아 계시다 시방도 귀에쟁한 음성으로
 
12
"진주야?" 하고 상냥히 부르시는 것만 같고, 진주는 마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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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이?" 하고 어렸을 적처럼 어린양스럽게 불러지는 것만 같고 하여 진주에게는 변함 없이 반가움이 솟는 제향날 밤의 영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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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주는 한참은 서서 제상 너머로 아버지의 사진을 바라다보면서 문득 황홀한 얼굴이다가 이윽고 천천히 나아가 여러 유품이 놓인 중에서 조그마한 상자 하나를 받들 듯 집어들고 돌아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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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상자야말로 그날에 여순공위군 사령관 내목 대장이 바쁘고 소란한 진중의 몸이면서도 친필로써 한 장 간찰을 정성껏 꾸미어 그 사진 든 주머니와 함께 싸고 싸고 하여 임중위의 모친 송심당노인에게로 부쳐 보낸 것 이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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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주는 열두어 살 무렵부터 시작하여 해마다 아버지의 제향날 밤이면 이상자를 할머니한테로 가지고 가 조손이 서로가람 내목 장군의 편지도 읽고 중위의 생존시의 이야기도 하고 하면서 한밤을 단출히 깊이곤 하던 것이 연년이 빠치지 아니하는 행사로 되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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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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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임경식 중위의 자당 전에 삼가 한 장 글월을 올리나이다. 소생은 임 중위를 거느리던 내목희전이라는 일본군의 장수이온바, 귀댁의 소중한 자제 를 데리고 만리 전장에 나왔다 소생의 불민으로 말미암아 애석히 전사를 하게 하였음에 대하여 죄를 무엇으로써 사할 길이 없어하는 바이 로소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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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한문투의 문사가 아주 평이하고 또박또박이 쓴 글씨로 내목 장군의 편지는 이렇게 허두를 내었었다. 그 공손하고 겸사스럽기라니, 사령관 내 목 희전 장군이 전몰한 한낱 중위쯤의 유족 노모에게 하는 편지라기보다는 연하 사람이 향로(鄕老)에게 올리는 편지였었다. 그래서 송심당노인이며, 처음에는 들 내목희전이라는 이가 임중위보다 그저 조금 웃길 가는 사람이거니 하였을 따름이었었다. 그러나 나중에야 그가 천하에 이름이 높은 내목 장군인 것을 알고는 그만 송구하고 감격하여 어쩔 줄을 몰랐었다. 인하여 편지를 가보( 家寶) 로 위하였고 임씨 문중은 달리 영광 한 가지를 더하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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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목 장군의 편지는 그런 허두로 시작하여 임중위의 이영삼고지의 작전에서 용맹히 싸운 경과와 그 최후의 모양과 그의 남긴 바 전공이 그가 결사 대의 대장이 됨에 있어서 "나는 사람은 조선 사람이라도 마음의 나라는 일본이요, 그러므로 일본을 위하여 충의를 다하되 목숨을 아끼지 아니하노라 "고 하였다는 말과 더불어 소상히 소상히 기록되었었다. 또 내목 장군 자기와는 일찌기 십 년 전 일청전쟁 때부터 맺어진 인연으로 개평 작전( 蓋平作戰) 때에도 여사여사히 용전을 하였고, 그때부터 자기는 끔찍 그를 사랑 하였 노라는 말도 적혀 있었다. 그리고 노인이 외로이 얼마나 슬퍼하고 계시느냐고, 전쟁이 끝나면 한번 가 노인이랑 아기랑 부디 만나도 뵈고 위로도 하여 드리고 하고 싶으나 나라에 매인 몸이 되어서 먼 길이 기약키가 어렵노라고 하였고, 마지막으로는 임중위의 지대한 전공에 대하여서는 일본 조정으로부터 장차 후한 치하가 있으려니와 만일 가세가 넉넉치 못하다든지 하여, 그중에도 아기의 교육에 군색됨이 있게 되면 그것은 자기가 사사로이 기쁘게 담당을 하고자 하니, 혹시 그런 경우거들랑 조금도 어려워하지 말고기 별을 하여 주기를 바라노라고 신신부탁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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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내목 장군의 편지를 소중히 간직하여 두고 일 년 한 차례의 제 향 날이면꺼내어 읽노라면 송심당노인이나 어린 진주나 새로운 위로와 감격을 저절로 느끼곤 하는 것이 있었다. 오 대째 내려온다는 열두폭 낡은 수병풍을 뒤로 둘러 친 아랫목 보료 위에 앉아 송심당노인은 흰보 덮은 빈 자개소반을 앞에다 내어놓고 기다리듯 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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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주는 유품상자를 들고 들어와 조모 앞에 있는 소반에다 조용히 가져다놓고는 그 옆에 가 앉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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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이 춥지나 않드냐?"
 
24
"아뇨, 할머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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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 운동으로 불고가사하다 망명을 갔다 마침내 객사를 한 남편을 섬기었고, 외아들은 군적에 몸을 두고 두 번이나 출전을 하였다 필경 전사를 하였고, 금지옥엽하던 손녀 진주가 시집살이를 쫓겨오고…… 갖추갖추 풍상 많은 송심당노인이었다. 예순세 살의 시방 그 눈같이 흰 머리는 이미 십이 년 전의 오늘 하루에 그렇게 희어버린 것이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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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십 평생을 겪어온 갖은 풍상은 정히 심각하였었다. 그러나 그러고도 내내 한 모양으로 가시지 않는 것은 음성과 얼굴에 드러나는 대범스럼과 더불어 지극한 인자스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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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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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는 이걸 그리 질겨 아니하드라만서두 감기 기운이 있을 때 이게 퍽 좋으니라. 후울훌 좀 마시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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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주가 마악 들어와 앉았자 뒤미처 올케가 식혜를 맞상해서 들여왔었다. 생강을 많이 넣고 통고추를 띄워 맵고 뜨거운 식혜를 마주 앉아 먹으면서 할머니가 진주더러 그런 권이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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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범이 잘 먹었잖아요, 할머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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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먹구말구! 끔찍이 질겨두 하드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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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인은 문득 수저를 멈추고 망연히 잠시 앉았다 이윽고 푸뜩푸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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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두 밤에 이걸 먹으면서……그날이 바루 정월 스무하룻날이었드니라.갑진(甲辰) ․ 을사(乙巳), 갑진년 정월 스무하룻날…… 그 전해 가을에 일본서 서울루 가 있다 일아접전(日露戰爭[일로전쟁])이 나게 됐다구 일본 으루 도루 가는 길이라면서 와서!…… 쯧쯧 마주막일 줄야 알았나!……꼬옥 믿구 기대 렸든 것이 고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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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주는 그때의 일을 잘 기억하고 있었다. 일곱 살 적이었으니, 전부가 순전한 기억인지, 혹은 기억은 일부분인데다 할머니한테서 이야기를 여러 번 듣고 듣고 한 것이 합치어 제풀에 전부가 기억인 것처럼 되어진 것인지 그는 모르나, 아뭏든 판에 박아둔 듯이 그때의 일을 소상히 다 알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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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아침 새때가 조금 지나 임중위는 집에 당도하였었다. 문앞 행길로 말 요령 소리가 들려서 그저 대문간으로 나가보았더니 군복 입고 군도 차고 한 아버지가 검정 양복 입고 가죽으로 만든 궤짝 같은 것을 어깨에 멘 또 한 사람과 말에서 내리고 있었다. 이 사람이 나중에 그 궤짝에서 세 다리 진것을 꺼내 세우고 깜장 보자기를 뒤쓰고 사진을 찍어 주었었다. 사진은 할 머니와 아버지와 진주와 셋이 한꺼번에 한 장을 찍고 할머니와 진주가 함께 찍고 아버지가 진주를 안고 앉아서 찍고 그러고 나서 각각 독사진을 찍고하였다. 진주는 할아버지 사진이랑 아버지 사진이랑 집에 있는 것을 늘 보기는 하였어도 제가 사진을 찍기는 처음이라 이상히 무섭기도 하고 재미있기도 하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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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주는 말에서 내리는 아버지 한 테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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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이?" 하고 부르면서 달려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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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주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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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는 마주 부르고 두 팔을 벌려 불끈 안아올리면서 또 한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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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주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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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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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냐! …… 할머니 집에 기시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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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안방에 기세요……아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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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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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 오셌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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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냐 왔다. 할머니랑 진주랑 보구퍼서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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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방 이러면서 안마당으로 들어서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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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알뜰한 손님이 오시나보다!" 하시면서 할머니가 마루로 나서고 하였다. 할머니는 아들이 손님 처럼밖에는 집에를 오지 않는대서 언제고 그런 말로 아들을 맞이하던 것이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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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진주는 졸린 것을 억지로 억지로 참으면서 할머니와 앉아서 아버지를 기다렸다. 아버지는 집에 당도하던 길로 낮에는 할아버지의 산소에 성묘를 가느라고, 또 석양때부터는 동헌(東軒)에서 원이 베풀고 청하는 잔치에 나아가느라고 밤이 이윽해서야 돌아와 그제서야 비로소 모자(母子)부터 부녀( 父女) 세 가권이 단출한 한때를 가질 수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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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혜는 역시 생강을 많이 넣고 통고추를 띄우고 하여 할머니가 손수 정성들여 담근 것이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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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식혜를 진주를 무릎에 안고 앉아 후울훌 맛있게 몇 번 마시고 나더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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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 진주야?" 하고 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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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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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 주머니 하나 만든 것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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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머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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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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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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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주는 얼른 일어나 반닫이 앞으로 가서 주머니 하나를 찾아가지고 왔다. 옥색 관사 바탕에 자주실로 앞과 뒤에다 각각 수(壽)와 복(福)을 수놓고 남끈을 꿰고 한 귀주머니였다. 이 주머니에다가 임중위는 딸과의 사진을 넣어 품에 품고 출정을 하였던 것이요, 그것이 이영삼고지에서 우연히 내목 장군의 손에 거두어진 바 되어 친필의 서한과 함께 유족인 송심당노인 조 손에게로 보내어온 것이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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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어! 네가 벌써 이렇게 얌전하게 주머니를 만들구 수를 잘 놓구 할 줄알아? 제법이로구나, 허허허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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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는 주머니를 받아 들고 기뻐 칭찬이면서 진주의 볼에다 볼비빔을 하여 쌌다. 그 술기운에 홧홧하고 수염 거슬거슬하던 아버지의 볼비빔의 감촉을 진주는 시방도 어제런 듯 잊어버리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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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지만 이 자식아? 기집아이루 솜씨가 벌써 이렇게 얌전한 건 기특하다만, 거 이왕 생겨날려거든 응? 고추를 죄끔만 달구서 생겨나겠지? 허허 허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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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말에 할머니는 같이 웃으면서, 그러나 "사내자 식으 루 생겨났다 너처럼 무인(武人)아니 돼, 평생을 진중 으 루만 왕래하다 말라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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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허, 조옴 좋습니까 어머니?……늘 말씀이지만 첫째 왈 돌아가신 아버님의 유교가 그러섰구, 또 장부 어즈러운 세상에 났다 나라를 위해, 의를 위해 삼척 장검 비껴 들고 한번 용맹을 떨치는 것두 남아 일생의 쾌사가 아니겠 읍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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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쯧, 아모리 어미라기로소니 장부의 하는 노릇을 뒷바지는 할지언정 구태어 막자 할 리야 있을꼬만서두 네 나이 어언 삼십이 넘지를 아니했나? 위 천하자( 爲天下者) 는 불고가서(不顧家事[불고가사])라니, 가사야 불고 한 다지만 후사는 돌아보아야 할 것이 아닌가? 어서어서 사람을 맞어들여 임씨 댁 가문 이어나갈 손(孫)을 볼 염량도 해야지! 옛날 헌다헌 장수들도 평생을 전진 속에서 마쳤건만 제마다 후손은 끼치지 아니했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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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머니는 여느때와 다름없이 고요하고 태연스런 음성이요 언사였으나 일변어 딘지 기색이 범키 어려운 엄엄한 것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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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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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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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았던 진주를 내려놓고 아버지는 식혜상 옆으로 물러앉아 무릎 꿇고 두 팔 짚고 머리를 조으면서 절절히 비는 것이었었다.
 
70
"이제야 깨우친 배는 아니올시다마는 불효한 죄가 열번 죽어 마땅합니다! 남달리 극심한 파란을 겪으시다 칠십 당년하신 어머니를 잠시 한때 편안히 뫼 시지 못하고 끝끝내 이렇게…… "
 
71
"부질없은…… 내게야 불효란 당치 아니한 말이지. 내 언제고 네가 밖에나 가서 하는 노릇을 불가하다 한 적이 있으며, 에미한테 매어 대사와 큰 뜻을 저바리라 한 적이 있든가? 오직 때가 늦어가니 후사도 유렴하도록 하란 그 말이지."
 
72
"전지에 나가는 몸이니 목숨이 온전하기를 기약하겠읍니까마는, 만일 공을 세우고 무사히 돌아오는 날이면 그때는 어김없이 어머님 말씀대로 거행 하겠 읍니다!"
 
73
그러고는 한번 더 머리를 숙이고 나서 도로 편안한 앉음을 하고 먼저처럼 웃는 얼굴로 이야기하였다.
 
74
"조금치두 염려하실라 마세요, 어머니. 전쟁에 나간다구 다 죽습니까 어디?"
 
75
"무사해 돌아온다면 조옴 좋 으리만 서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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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어머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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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혜가 식었나본데 뜨뜻한 걸루 들여오게 할까?"
 
78
"괜찮습니다……네 어머니? 거 색다른 며누리 좀 보시겠어요?"
 
79
"색다른 며누리라니?"
 
80
"허허허. 일본 며누리 말씀입니다."
 
81
"일본? 하필 그런?"
 
82
"어머니께서 불가히 여기신다면 파의를 하겠읍니다만서두 혹시…… "
 
83
"불가한 여부보다두 제일에 내가 말을 알며, 또 풍속을 알아야 그런 색다른 며누리를 맞이할 텐데 걱정이로군."
 
84
"그냥 제가 내 집 사람이 되어 들어오는 이상, 말이며 예절 풍도를 다 우리를 따라야 하겠지요. 그것보다두 어머니께서 의향이 어떠실까 해서."
 
85
"네가 가타 여겨서 하는 노릇이라면야 나는 따를 뿐이 아닌가?…… 들으니 말이 다르고 풍도가 약간 다르지 대체는 우리와 범백이 방불하다면서? 생김새가 방불하듯이."
 
86
"그러믄요! 머언 조상은 우리와 한 조상이드랍니다!"
 
87
"또오 인정은 매양 일반일 터…… 그러구 그 사람네가 여인이 남편 공경이 끔찍 아주 흠선하다구?"
 
88
"네. 확실히 조선 여인들보담 낫습니다. 본받을 구석이 많습니다."
 
89
"그렇다면 그만 아닌가? 들어와서 남편 잘 받들고, 그러구 저것 잘 거 천해 길르구 했으면 그만이지, 내가 무슨…… "저 것이란 물론 진주를 가리켜 하는 말이었다.
 
90
"항차 내가 살아 새며누리 섬김을 받기로소니 얼마나 받을 나이라 구…… ""하옇든 이번 나갔다 돌아와 그때 다시 자상히 이쭙고 수이 구정을 짓도록 하겠읍니다. 그렇게 되면 어머니께서 우선 손주놈 재롱도 보시게 되실는지 모르고…… ""규수는 나이 몇인고?"
 
91
"허허허, 어머니두 온! …… 이왕 조금만 더 참으세요, 허허허."
 
92
아버지는 이렇게 웃음으로 끝을 흐려버리고 다른 이야기로 말머리를 돌렸다.
 
 
93
6
 
94
진주는 나이 들면서부터는 매양 그 생각이 나면 일이 못내 궁금하였고, 자연 혼자서 추측과 상상을 두루 하여보기를 마지 아니하였다.
 
95
막연히 그저 내지 여자로 아무나를 장차 택하여 가지고 그때 비로소 새로이 취실(娶室)을 할 생각이라는 의미인 것이 아니라, 이미 어떤 내지 여자를 한 사람 택하여 둔 바가 있어 그를 맞아들이겠다는, 이 뜻인 것이 분명하였었다. 그날 밤 그 자리의 말 운과 내색으로 미루어 정녕 그러하였다. 한 여자가 ── 어떤 내지 여자 하나가 진작부터 정해져 있었던 것은 그리하여 적실한 사실이었다.
 
96
그러면 어떻게 생긴? 인품은? 나이는? 근지는?
 
97
물론 쌍스런 집안은 아니었다. 버젓한 가문의 태생이었다. 한 이십 세 된…… 더도 덜도 아니요 마침 그 나이였다.
 
98
얼굴 갸름하고 눈이랑 입이랑 코랑 다 이쁘장스러웠다.
 
99
마음씨 좋고 얌전하였다. 늘 생글생글 웃으면서 허리 고붓하고 참배쪽 같이 상냥스러웠다.
 
100
'……그렇게 되면 어머니께서 우선 손주놈 재롱도 보시게 되실는지 모르고……’
 
101
이 말이 있었다. 어린애가 있다는 말이기 근사하였다.
 
102
어린아이! 어린아이! 그럼 내 동생이렷다. 동생, 동생, 오라비동생, 꼬옥 아버지를 닮아 이쁘고도 씩씩하게 생긴 사나이. 내 동생, 오라비동생. 열한 살이나 열두 살박이, 한창 장난꾼이 선머슴동생, 귀여운 내 동생, 내 동생.
 
103
'좀 보았으면! 왜 찾아오지 않을꼬? 그 새엄마랑 함께…… 몰라서 못 오지나 않는지?’
 
104
이렇게 진주는 마지막엔 가공(架空)의 동생과 새엄마라는 이를 그리워까지 하도록 상상은 매우 골똘한 것이 있었다.
 
105
생각하면 허황한 일이기도 하였다. 그러나 진주는 구태여 그것을 허황 한 공상으로 돌려버림으로써 한 조각 해(害)없는 즐거움을 스스로 없이 하고싶지는 아니하였다.
 
106
그보다도 할머니는 생각을 어떻게 하고 계신지. 진주는 늘 별러오다 오늘은 마침 또 제향날이요 해서 계제도 좋고 하여 부디 이야기를 좀 하여 보려니 하고 초저녁부터 유념을 하였었다.
 
107
"아따 저어 할머니? 그날 저녁에 아범이 이런 말 했잖었어요?……"
 
108
마악 그래서, 식혜상을 물리고 나서 이렇게 시초를 내는 참인데, 그러자 돌쇠어 멈이 자리에 당도하여 이야기는 그만 나오지 못하고 말았다.
 
109
돌쇠어멈은 이 집의 오랜 계집하인으로 겸하여 고 임중위를 젖먹여 기른 유모 였었다. 시방은 속량을 받아 나가 살고 있으나 옛 은정을 저버리지 아니하였고, 그런 중에도 두 때 명절, 송심당노인의 생일날, 그리고 임 중위의 제사날만은 어떠한 일이 있더라도 오기를 궐하는 적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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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쇠어멈은 평일과 달라 무슨 일인지 기색이 심히 평온치 못하여가지고 오더니, 올라와서 노마나님과 아가씨한테 문안을 드린 후 자식놈의 급병으로 낮부터 오기가 늦어진 사죄를 한두 마디 하고는 인하여 놀랍달까 해괴하 달까, 하옇든 돌연한 소식을 한 가지 전하는 것이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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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112
"이런 분허구 참 기맥힐 데가 있사와요 글쎄!…… 들으시면 되려 심화만 더 되실 상불러 와 사뢰지 말려니 했어두 어디 또 그러와요? 몰랐으면 이어니와 쇤네 도리에…… "
 
113
돌쇠어멈은 약간 수다스런 허두에 이어 더럭 씨근거리면서 하는 말이었었 다.
 
114
"아니 글쎄, 그 댁으서 새서방님을 장갈 다시 들이시드랍니다!"
 
115
진주는 가슴이 철썩하고 와락 상기가 되었다.
 
116
송심당노인도 진주 못지 아니하게 충격을 받았을 것이나 표면은 태연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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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 시상에 그럴 법이 어딨어와요? 쇤넨 그 말을 듣구 하두 분허구 절통 해서…… "
 
118
"어디서 들은 소문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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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자코 앉았다 노인이 조용히 묻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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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루 쇤네 이웃에 사는 천석할아범이 그래와요. 오늘 아까 향교골 볼 일이 있어 갔다 남진사댁에 신행길이 들기에 물었으니, 그댁 새서방님이 새장 갈 드신다구 허드라구요."
 
121
"적실하겠다?"
 
122
"제 눈으루 보구 와 그랬는데와요!"
 
123
"………"
 
124
노인은 고개만 끄덱끄덱, 한참이나 또 묵묵히 앉았다 혼잣말로
 
125
"쯧! 어려두 장부여든, 장부 두 번은 말구 열 번 장간들 못 들리!"
 
126
진주는 그동안 두 차례나 시가엘 갔다 번번이 되쫓겨오고 되쫓겨오고 하였다. 가마가 대문 안에도 못 들어서게 하고, 물을 끼얹는다 불을 싸 던진다, 교군 꾼들을 작대기로 후려갈긴다 하면서 한사코 막는 바람에 하릴없이 가마 머리를 돌리고 하였었다. 그러나 진주는 단념을 아니하였고, 내일이 또 가기로 작정이 되어 있는 날이었었다. 새서방 준호와 언약이 있었기 때문 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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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준호는 사약인 줄만 알고 집어다 마신 것이 실상 멀쩡한 가짜였었다. 비상도 사약도 아니요, 쓰디쓴 금계랍이었다. 그러나마 초학도 아니 떨어질 적은 분량의……그래서, 에이 내가 좀 죽어버릴걸 하고 일껏 사약을 마셨다는 것이 하나도 죽어지지는 않고, 모친 박씨부인은 옆에서 갖은 핀잔과 구박을 주어쌌고 하여 결국 망신만 톡톡히 하고 만, 그야말로 초학 방예를 한 꼴 이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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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주가 두 번이나 그렇게 도로 쫓겨온 뒤로는 준호는 인제는 새댁이 영영 오지 아니하는 사람이거니 하고 낙망을 하였다. 그러나 그래도 혹시…… 하는 여망에 새댁의 눈치도 볼 겸, 또 무한 그립고 한 정에 준호쯤으로는 정히 결사적이랄 모험을 감히 하여 학교에 가는 책보와 점심을 들멘 채 처가엘 달려왔었다. 그것이 바로 보름 전이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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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은 아니하여도 준호의 그 속을 못 알아차릴 진주가 아니었다. 선뜻 교군을 차려 타고 앞서거니 뒤서거니 같이 떠났을 것이로되, 동행이 되면 준호의 처가 행보를 박씨부인이 기수 챌 위험도 있고 겸해서 아버지의 제 향 이 앞으로 임박한 터라, 이왕 그러면 제향이나 보고 이튿날 어김없이 가마고 단단 언약을 한 후에 준호만 그날로 먼저 돌려보냈었다. 다만 하루라도 묵고 가게 하고 싶은 생각이야 간절하나 당일로 회정을 시켜야만 일이 탄로가 아니 나겠어서 늦은 점심 대접하여 즉시 네패 교군에 태워 해전으로 향교 골육십 리를 동구 밖까지만 대도록 신칙하여 떠나보냈었다. 그러고서 지금 내 일 이면 세번째 ── 보나마나 또 쫓겨오 기십 상인 ── 길을 떠나려던 참인데 그 소식이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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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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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튿날 아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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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소 사연을 안 양오라비 창수(昌洙)는 세 길이나 뛰면서, 인제는 더 참지 못하노라고 동네 두레꾼을 몰고 가 남가네 집을 도륙을 놓든지 당장 재판을 걸어 법을 맛보이든지 하리라고 들이 야단을 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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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심당노인은 일을 그렇게 혈기대로만 행하는 법이 아니니라고 양 손자를 진무 시킨 후 우선 사람을 놓아 사실의 진가를 확실히 알아오도록 하였다. 석양에 돌아온 회보는 지난 밤 돌쇠어멈이 전한 바와 완전히 내용이 일치 하였다.
 
134
이로부터 진주는 인생의 첫출발을 낭패당한 고민과 그리고 장차 몸을 어떻게 처하는가 하는 향방이며 결심이며 계획 같은 것을 생각하기에 답답한 세월을 보냈다. 그러는 동안 미구하여 해가 바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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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디어 진주는 인생을 새로이 출발하기로 결심을 정하였다. 당연한 결심 이었었다.
 
136
결심은 비교적 쉬웠다. 하나 그를 행하자 함에는 우선 마음부터가 이미 한번 출발하였던 인생 ── 결혼 ── 으로써 생겨진 모든 결연의 정리( 情理) 를 깨끗이 끊고 씻고 하고서라야 될 일이었다. 큰 용기와 강단이 필요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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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어떠한 방법으로써 새로이 출발하여 나아가는 방법을 삼느냐 하는 그 방법이 또한 졸연치 아니한 문제였다. 우황 향방에 이르러는 대단히 막연한것이 있었다. 만약 향방과 방법을 그르친다면, 일껏 새로운 출발도 결국 새로운 실패를 장만하는 데 지나지 못하는 것이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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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름지기 향방과 방법을 잘 정할 수 있는 수단 즉 능력이 무엇보다도 먼저 있어야 할 것을 깨달았다. 동시에 그 능력인즉은 학문으로부터 우러나는 식견( 識見) 이 곧 그것임도 깨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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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초의 어느 날 밤, 진주는 마침내 양오라비 창수도 있고 한 자리에서 할머니한테 신학문 공부나 좀 하여볼까 한다는 뜻을 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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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머니와 창수는 다같이 한마디에 찬성을 하였다. 그러고 나서 할머니는, 네가 공부를 가겠다면 학비 같은 것은 아무 염려 없도록 하리라고 하였다.
 
141
창수는 시방 즉시 서울로 공부를 떠나기보다는 얼마 동안 기초공부의 준비가 필요할 의견을 말하였다. 네 나이 열아홉. 한문 문필이야 넉넉하다 하겠지만 아이우에오도 모르지 않느냐. 그리고 서울 가서 중학 정도의 학교에는 들 기가 어려울 것. 기껏 조무래기 틈에 끼여 가나부터 배우게 될 터. 치사히 그러느니 집에서 보통학의 여선생을 데려다 기식(下宿[하숙])이라고 시키면서 한 일 년이고 이태 동안에 사 년 하는 보통학교 과정을 속성으로 익히게 하여라. 그래가지고 비로소 서울로 간다면 이태나 삼년이라는 것은 우선 얻는 것이 아니겠느냐?
 
142
매우 지당한 의견이었다. 진주는 이 울적한 공기 속으로부터 당장 벗어나지 못한다는 것만은 미흡하였으나 할머니도 창수의 의견을 옳게 여겨 권이고 하여서 그대로 좇기로 하였다.
 
 
143
다섯 해의 세월이 흐르고 경신(庚申) 대정 구년(1920)이었다.
【원문】새 출발(出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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