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S 여러분! 반갑습니다.    [로그인]
키워드 :
한글 
◈ 여인전기(女人戰紀) ◈
◇ 위기(危機) ◇
카탈로그   목차 (총 : 12권)     이전 7권 다음
1944.10.5~
채만식
1
女 人 戰 紀[여인전기]
2
8. 危 機[위기]
 
 
3
1
 
4
좁다란 뜰에 이것저것 골고루 가꾼 화초 가운데 한 그루 개나리( 辛夷花[ 신 이화]) 가 노란 꽃잎을 방긋방긋 뿜기 시작하였다. 완구히 봄이었다.
 
5
곳은 북부 가회동 긴 골목을 취운정(翠雲亭) 무너져가는 문앞 가까이까지 올라가 바른편 바로 길옆으로 언덕배기에 있는 진주의 거처…… 안방과 마루와 건넌방이 있고, 반간짜리나마 부엌이 있고, 안채와의 사이를 판장으로 막고 하여 딴채같이 된 이 사랑채를 진주가 매삭 팔 원씩에 세 얻어 든 것이 그가 서울로 올라오던 해 ── 무오년(戊午年) ── 늦은 가을 이었고, 그러고서 이에 신유(辛酉 : 大正[대정] 10년 :1921) 삼월이니 어느덧 이 집에서 네번째 맞이하는 봄이었었다. 동시에 학창(學窓)을 마지막 떠나는 봄 이었다.
 
6
식구라야 잔심부름도 시키고 학교에도 간 사이에 집도 보게 하고 하느라고 시골서 데리고 와서 있는 계집아이 옥단이와 단 둘이뿐…… 그 옥 단 이마 저 오늘은 안집에서 동물원(창경원) 구경을 간다는 바람에 모처럼 따라 보내고 없고 진주 혼자 집에 있어, 지대가 또한 한적한 지대라 집 안팎은 소년같이 긴 봄날에 산이 아니라도 태고처럼 고요하였다.
 
7
한낮이 훨씬 겨운 햇볕이 툇마룻전에 맑게 드리웠다. 따사하고 그 맑은 햇볕을 쬐면서 진주는 마룻전에 걸터앉아 뜰의 개나리꽃 핀 양을 우두커니 바라다보고 있다.
 
8
스물네 살…… 일찌기 열여덟 살 적 애련튼 소부의 모습은 옛말이요, 인제는 얼굴과 몸매가 한가지로 활짝 다 피어 한 사람의 완전히 성숙한 여자 였다.
 
9
약간 나이보다 두어 살 어리어는 보였다. 또 본시 청초한 체질이어서 꽃 이 라면 바위 틈의 한 떨기 진달래꽃일지언정 모란꽃같이 푸짐하고 번 화함은 없었다. 그러나 그 윤나는 살결이며 침착한 혈색이며, 허리로부터 담쏙 부풀어 내려간 곡선 하며, 역시 숨길 수 없는 것은 제물의 성숙이었다.
 
10
학업도 예정한 대로는 아무려나 마치었다. 이태 동안 보통학교 과정을 속성으로 익혀가지고 서울로 올라와 이내 ××여자관의 중등과에 들어 삼 년의 기한을 치른 후 한 장의 졸업증서를 받아들고 며칠 전에 교문을 나왔었다. 그리하여 비록 중등 정도에 불과한 것이기는 할값이라도 학문에서 오는 지각 또한 그의 열여덟 살 소부 적의 그것에 비길 바가 아닐 만큼 무던 하여진 것이 있었다.
 
11
이리하여 몸도 지각도 다같이 충분히 성숙이 된 진주였었다. 써 그는 일 찌기 정하였던 바에 좇아 인생의 새로운 출발을 비로소 착수할 아침을 당한것이었었다.
 
12
새로운 인생의 출발 그것은 매양 새로운 결혼이어야 할 것이었다. 물론 진주는 노상 새로운 결혼으로써 그의 새로운 출발의 전제를 삼은 것이 있었 음은 아니었었다. 그러나 여자가 한번 결혼에 실패를 하고 나서 새로이 인생을 출발함에 있어 수도원의 수녀가 된다는 둥 특별한 조건 즉 독신 생활 로써 방법을 삼는 사람이면 모르되, 일반으로는 새로운 ── 또 한번의 ── 결혼이라는 방향으로 나아가는 것이 가장 자연스런 길일 것이었다.
 
13
진주도 매양 스스로가 의식하고 아니하고를 떠나 이 자연한 길을 향 하고 서서 있었다.
 
14
뚜벅뚜벅 구둣발 소리가 들리더니 지친 일각문을 밑치면서 머리끝부터 발 부리까지 말쑥하게 새것으로 차린 청년신사 하나가 서슴지 않고 척 들어선다. 손에다는 깜장 손가방을 들고.
 
 
15
2
 
16
오영당(吳永逹[달])이라고 이 봄에 ××의학전문을 졸업한 햇물 의사였다.
 
17
안집 안주인의 친정 조카뻘이 되는 사람으로 자주 왕래가 있어 진주도 안면이 노상 생소치 아니하던 터인데, 그러자 한 월여 전에 진주가 가벼운 중이염( 中耳炎)을 알아 ××의전병원엘 갔더니 오영달이가 마침 마지막 실습을 그 이비인후과에서 하고 있었다.
 
18
중하나 경하나 간에 병자에게는 안면 있는 사람을 병원 안에서 만나기 같이 반갑고 안심스런 것은 없는 법이어서 진주도 깜빡 그가 반가왔었다.
 
19
오영달은 진주가 반가와하는 이상으로 반가와하였다. 평일에 마음 가운데한 점 진주를 단지 지나가는 사람으로 보고 말지 아니하던 것이 있었기 때문 이었다.
 
20
오영달에게 한번 더 반갑기는, 진주의 치료가 다행히도 저에게로 돌아온것이었었다.
 
21
담임교수의 진단과 처치의 지시에 좇아 오영달은 아주 열심히 진주의 귓속을 치료하여 주었다.
 
22
사흘째 병원엘 가던 날이었다. 오영달은 배웅하는 체 복도로 따라 나와서 그리 대단한 기계나 약품이 필요한 바도 아니요 하니 날마다 시간과 비용을 들여가면서 통원을 하기가 번폐스럽겠고 무의미도 한 노릇이겠은즉, 차라리 자기가 하루 한 차례씩 오후에 들러서 치료를 하여 주도록 하마는 제언을 하였다.
 
23
진주는 남의 그러는 화락한 호의와 친절이 거북스러웠다. 그러나 그렇다고 거절을 하자니 면을 보아 차마 박절하지 못하였다. 할 수 없이 일후 사례 나후 히 하려니 하고 응락을 하였다.
 
24
그 뒤로 오영달은 하루도 빠짐이 없이 오후면 꼬박꼬박이 와서는 치료를 하여 주곤 하였다. 덕에 진주는 날마다 몇 시간씩은 학과를 궐하여가며 통원을 한다는 손을 보지 아니할 수가 있었고, 병도 순조로이 나아 요새 몇 차례는 하루 걸러큼씩 치료를 받아오던 참이었었다. 일변 그러는 동안 둘 이의 사귐은 훨씬 가까와서 단순히 의사와 환자라는 교섭에만 머물지 않고 사이가 자못 임의로와진 것이 있었다.
 
25
"안녕하십니까?"
 
26
오영달은 건들건들 그렇게 인사를 하는 얼굴이 연방 싱글벙글하면서, 진주가 마주 일어서는 앞으로 와 선다.
 
27
오영달……그는 해맑고 얇은 얼굴이며 연한 표정이며가 경쾌 명랑한 재자( 才子) 는 될지언정 근량 있는 군자(君子)는 우선 아니어 보인다. 그런데 다나서 처음으로 쓴 연회색 중절모자에다 바늘 쏙 뽑은 회색 신사복과 같 은빛 같은 감의 봄외투에다 사슬도 닳지 아니한 깜장 칠피코 단화에다, 일 습을 이렇게 새것이요 새로운 몸치장을 하여가지고는 그 새롭고 화려함을 칭찬 받고 싶은 듯이 서서 제 위아래를 씻어보면서, 여자를 보면서 부절히 웃음이 흩어지는 양은 흡사히 암컷 앞에서 나래를 자장하는 공작을 연상케 하는 느낌이 없지가 못하였다. 그야 오랜 학생의 굴레를 벗고 나선 기쁨에 가사 뜻있는 여자의 앞이 아니라도 그만쯤 기분이 달떠하기야 예사요, 그다지 흉이 아닐 수도 있는 것이지만.
 
28
늘 그 시꺼멓고 낡아빠진 교복에다 뀌어진 사방모짜리의 오영달만 보아오던 진주는 그의 이 별안간 새롭고도 화려한 몸치장이 미상불 사람이 한결 돋보여 보이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29
3
 
30
'사람은 의복이 날개라더니 그 말이 옳은가 보다!’
 
31
진주는 속으로 문득 이런 생각을 하다가
 
32
"길에서 썸뻑 만났드라믄 몰라뵐 뻔했어요!"
 
33
"허허 허허 !……마악 나서는 참인데 양복집 사람이 가지구 들오겠죠. 그래 부랴부랴 갈아 입군 시방……어떻게 촌 쟁퉁이 같지나 않습니까?"
 
34
"저야 무얼 알아요?…… 그래두 퍽 좋아뵈는데요?"
 
35
"어떤지 엉성한 것 같구 자꾸만 어색해서…… "
 
36
처음으로 교복을 벗고 양복을 입은 때의 아무나 그러는 솔직한 느낌이었다.
 
37
명주털이 송알송알 그 다칠까 무섭게 연하고 보드라운 진주의 귓부리를 쥐었다 놓았다 아낌없이 주무르면서 몇 번이고 귓속을 후벼낸다.
 
38
진주는 이 남자의 향의가 심상치 아니한 것임을 진작부터 모르지 않는다. 그런 남자의 더운 입김을 바짝 볼에다 받으면서 진주는 남자와 같은 열도( 熱度) 의 것은 아니라 할지라도 약간 심장의 높이 뜀이 없을 수가 없었다.
 
39
치료는 간단히 얼른 끝났으나 언제나 마찬가지로 오영달은 이내 돌아가지는 않는다.
 
40
"한번쯤 더 보아 드리면 아주 다 나으시겠읍니다."
 
41
"그동안 참 하두 수고를 해주세서!……"
 
42
둘이는 나란히 마룻전에 걸터앉아서 이야기였다.
 
43
"그렇게 수고루 여기시는 것이 전 늘 맘에 섭섭해 못하겠어요. 범연해 그 러시는 것 같아서!"
 
44
"아이 참! 치하두 못허게 허셔!"
 
45
"수고라커니 치하니 하는 것은 친분(親分)의 농도(濃度)에 반비례하는 법 이 랍니 다."
 
46
"………"
 
47
진주는 반대로 긍정도 하기가 어려웠다.
 
48
"그러나저러나 인제 낼모리 한번 더 와 치료해 드리구 나면 그땐…… 전 제일에 그 일이 섭섭해서 생각만 해두…… "
 
49
"종종 놀러두 오시구 허시지, 치료 다 끝났다구 아주 발 끊으실 생각이신 감?"
 
50
"의사 오영달이 필요하신 것이지 여니…… 무어랄까…… 친구? 동무?…… 그런 걸룬 오영달이 그대지…… "
 
51
진주는 속으로 남자답지 아니하게 변사가 있고 속이 옅다고 생각하면서 흔 연 히
 
52
"무슨 그럴 리가 있에요?"
 
53
"………"
 
54
오영달은 우두커니 발끝을 내려다보고 앉았고.
 
55
"아뭏든 인전 졸업두 허셌구 저렇게 정말 선생님이 되구 허셌으니깐 병원을 내시겠죠?"
 
56
"………"
 
57
"더 연구를 허시는지…… "
 
58
"것 보담 두 먼점 해결을 해야 할 더 급한 문제가 하나가 있답니다. 집에서는 시골루 내려와 개업이나 하라구 조르구. 전 실상 졸업이라시구 했다지만 무얼 알아요? 생사람 잡기 꼬옥 알맞죠. 그래, 동경제대 같은데라두 가 한 삼사 년 더 공부를 할까 하는 생각인데…… "종시 발끝만 내려다보고 앉아 푸뜩푸뜩 이야기를 하던 오영달이, 그러다 천천히 고개를 돌리면서
 
59
"그런 것은 다 둘째 세째 문 제구요…… "하더니 어느덧 상기된 두 볼, 정채 나는 눈으로 진주의 얼굴을 똑바로 바라다본다. 바라다보다가 별안간
 
60
"진주씨!" 하면서 덥석 진주의 손길을 잡는다.
 
 
61
4
 
62
남자의 평소의 뜻을 짐작하는 것이 없지 않던 터라 크게 당황할 것은 없어도, 그러나 여자요, 겸하여 처음으로 당하는 노릇이어서 얼굴이 확 달고 붙잡힌 손이 떨리지 아니할 수가 없었다.
 
63
"아이! 노세요!"
 
64
"저와 결혼해 주십시요!"
 
65
"………"
 
66
"변변치는 못한 남자올시다. 그렇지만 목숨이라도 다해서 진주씨 사랑 합니다! 그러구 진주씨 한분 고생 아니 시켜 드릴 능력은 있읍니다."
 
67
"………"
 
68
"네? 진주씨?"
 
69
"전 몰라요!"
 
70
"그럼 싫으십니까? 반대십니까?"
 
71
"이 손 노세요. 남이 보드래 두…… ""대답 해 주세요! 결혼다겠다구 대답해 주세요!"
 
72
"졸지에 대답을 어떻게 해요?"
 
73
"생각을 해보서야 하시겠어요?"
 
74
"차차 두구…… ""진주씨?"
 
75
"네?"
 
76
"믿겠읍니다. 믿구 기대리겠읍니다. 언제까지구 전 기대리겠읍니다. 전 만일 진주씨가 아니라면, 전 영영…… ""……… ""믿겠 읍니다. 꼬옥 믿구 언제까지구 전 기대리겠읍니다. 네? 진주씨."
 
77
"너무 그러실라 마세요. 사람마다 마음 쓰이는 것이 고르지 않구 또 제마다 다른 사정이랑 곡절이 있기루 마련인데, 그렇게 믿구 기대리시다 부질없이…… ""아니, 아닙니다. 그럴 리가 절대루 없읍니다. 전 믿습니다. 전 믿습니다. 믿는 것이 있어요…… 기대립니다."
 
78
그러고 나서 조금 더 놀다 돌아가는 오영달을 문앞까지 배웅 하면서
 
79
"날새 저녁진지나 좀 잡수시게 허고 싶은데…… 날짠 다시 알려 드리겠지만 서두…… 그동안 서울 기시겠죠?"
 
80
"있구말구요!"
 
81
반가와서 선뜻 그렇게 대답을 하기는, 결혼을 승낙할 자리를 베푸는 것 이 거니 생각하였기 때문이었다.
 
82
"한 몇 끼 굶구 있다 오겠읍니다."
 
83
"어쩌나! 진지밖엔 없는데!"
 
84
"아, 밥이면 그만이죠?"
 
85
"참, 약주 잡수시든가요?"
 
86
"무언 못 먹겠읍니까? 진주가 주시는 거 라면…… ""그럼 날짠 다시 알려 드리께시니 부디 와주세요. 안채 기신 추선생두 나오시구 헐 테니깐…… ""추군요?"
 
87
물으면서 기색이 약간 시무룩하여진다. 저 하나만 청하여 저녁이라도 대접 하면서 단출히 결혼 이야기를 승낙하려는 뜻이거니 하였던 것인데, 막상 또 하나 다른 인간이 있다고 하니 실망이 될 수밖에. 항차 무엇으로 보나 와락 직성이 서로 맞지 아니하는 위인이리요. 더우기 진주를 두고 적지않이 질투까지 느껴오던 그 위인이리요.
 
88
오영달이 돌아간 지 얼마 있다 문제의 인물 추영산(秋映山)이 동저고리 풀 대님 바람에 뒷짐 지고 골통대 비뚜로 물고 어칠어칠 진주에게로 나왔다. 오영달의 친구요, 그의 반연으로 안채의 건넌방에 하숙을 하고 있으면서 대가 ××의 문하에 다니며 그림을 배우는 청년이었고, 이미 독자한 일가를 이룬 사람이었다.
 
 
89
5
 
90
추영산은 오영달과는 전혀 대척적인 인물이었다. 그 넓고 두투름한 얼굴은 스물 일곱 살이라면 곧이가 아니 들릴 만큼 노티가 난다. 턱으로 볼로 수염은 닷푼씩이나 비어졌다. 머리는 참새 둥우리다. 동저고리 바람에 풀 대님 한 옷에는 손이랑 온통 물감투성이였다. 이런 차림새와 생김새가 오영달의 말쑥함에는 비길 바가 아니요, 한 사람의 탁객이 완구하였다.
 
91
추영산은 미상불 어느 의미로는 탁객임엔 틀림이 없었다. 그러나 노상 그런 탁객스러우면서도 어쩐지 지저분스레 보이지 않는 것이 정녕 있었다. 다름 아닌 평상에 깊은 사색과 아름다운 감성에 잠기어 사는 천재적인 예술인 에게서만 볼 수 있는 청아한 운기(韻氣), 이것이 그의 얼굴에서 빛나고 있은 때문일 것이었다.
 
92
진주는 이 추영산이 마치 나이 지루룸한 친 손위 오라비처럼 무관하고 좋았다. 속은 있는 대로 다 주어도 별 허물이 없고, 근심이나 어려운 일이 있다면 가 타악 들얹고 싶게 미쁘고 임의로왔다. 모델삼아 초상을 한장 그리겠노라고 청을 하였을 때에 동양화라 옷을 입은 채 포즈를 빌리시라곤 하여도 진주 같은 조심성 있는 여자로는 졸연치 아니한 일이었으나 그것이 추 영산의 말인 고로 하여 선뜻 승낙을 하였었다. 미루어 진주의 추영산에의 신뢰를 짐작할 수가 있는 것이었었다.
 
93
아까 오영달이 때처럼 둘이는 봄볕 따사히 드는 툇마룻전에 가 나란히 걸터 앉았다.
 
94
추영산은 불 꺼진 골통대를 씩씩 빨다가 혼잣말로
 
95
"이 놈, 이 불 아니 그어대구두 담배 먹는 기계 좀 있으면 좋겠드라!"
 
96
"그렇게 성가신 노릇, 차라리 담밸 피우지 마시죠?"
 
97
"간혹 진주씨가 손수 성냥을 그어 대주는 기회가 없었다면 아닌게 아니라…… "
 
98
진주는 웃으면서 성냥을 가져다 그어 대어준다.
 
99
"참, 그림은 하마 다 되셨죠?"
 
100
"아직두 한 이삼 일 더 있어야…… 급하십니까?"
 
101
"그림이 다 되믄 그 치하두 할 겸, 또 오영달씨가 졸업을 허셌구, 그동안 다니시 믄 서 치룔 해주시느라구 수골 허셌으니깐 그래 두 분을 청해서 저녁 진지라 두 잡숫게 허구 싶어서요."
 
102
"좋지요. 날라컨 밥보담두 막걸리를 듬씬 먹게 해주십시요."
 
103
"해필 막걸리세요?"
 
104
"가루누룩에 찹쌀루 유자랑 국화랑 넣구 빚은 진짜 약주루 밥알 동동 뜨는 전국이 아닐 바엔 막걸리가 되려 낫습넨다."
 
105
"그 술 내력만 외우재두 큰 공부겠네!"
 
106
"………"
 
107
"무얼 혼자 또 생각허시나봐?"
 
108
"거 남의 졸업축하두 좋지만, 진주씨, 여보?"
 
109
"네?"
 
110
"졸업두 했구…… 또오 올해 스물넷? 그렇지요?"
 
111
"네."
 
112
"그러니 어서어서 인제는 좋은 신랑 골라 시집을 가야 아니합니까?"
 
113
"온! 그게 그리 걱정이세요?"
 
114
"혹시 이런 추영산이라두 상관없다시면 이내 택일해서 성례 지나구요."
 
115
처음부터 끝까지 뜰앞으로 한눈을 주고 앉아서 남의 말 하듯 그러는 것 이었었다.
 
 
116
6
 
117
진주는 약간 볼이 화틋거리지 않는 것은 아니었으나 웃음이 나와 손으로 입을 가리어야 하였다.
 
118
"나는 구변두 없구, 또 그런 이야기를 잔뜩 에둘러 은근히 하기두 싫은 승 미요 해서 자연 말이 승거웠으리다만, 뜻 그만하면 내 속은 짐작 하셨을테니깐 잘 생각이나 하십시요. 아니 참고나 하십시요."
 
119
그러고는 일어서서 뒷짐 지고 어칠어칠 일각문으로 나가버린다.
 
120
미상불 수작이 싱겁기는 하였다. 그러나 진주로는 추영산의 방법이 싱거울지언정 내용조차가 싱거운 바는 아니었다. 추영산이 평소에 자기에게 향의가 골똘한 것이 있음을 알기 때문이었다.
 
121
'글쎄?……’
 
122
진주는 혼자 기둥에 가 지여 서서 곰곰 생각이 깊는다.
 
123
오영달이나 추영산이나 사람과 색깔은 다를지언정 한가지로 진실하게 진주를 연모하는 마음인 것은 사실이었다. 착실한 청년들이기도 하였다. 써 건실한 연애라고 하여 부족할 구석이 없었다.
 
124
진주는 막상 연애토록은 아니었다. 그러나 가사 진주가 두 사람 중의 한 사람과 마주 연애를 열렬히 하며, 그러다 결혼을 하며 하기로소니 진주로 하여금 그것을 금한다거나 불순하다고 폄을 할 자는 이 천하에 없으리라.
 
125
한번 결혼이라는 걸 하기는 하였었다. 그러나 그 결혼은 이미 깨끗이 청산이 되었다. 민적도 도로 갈랐다. 저편에는 새사람까지 들어섰다. 아무 결련이 들 것이 없는 몸이다. 하물며 말이 결혼이었지 고스란히 처녀요, 이 에스 물네 살이라는 어리지 아니한 나이에 이르렀다. 마땅한 사람을 선택 하여 결혼을 하기에 하나도 걸릴 것도 부족할 일도 없었다.
 
126
진주는 당연히 오영달이나 추영산 두 사람 중의 하나와 결혼을 할 수가 있고, 하여야 마땅하였고, 사실로 그리할 생각이 일변 없는 것도 아니었다.
 
127
그러나.
 
128
오영달과 추영산 두 사람의 영상이 감고 생각하는 눈앞에 나란히 나타날 때에, 그럴 때마다 멀찍이 뒤로 또 하나 의미하게 나타나는 영상…… 그것 은 소년 준호의 얼굴이었다. 꿈속같이 아련하면서도 가슴이 저릿하게 아프고 애달픔이 솟는 추억이었다. 소위 객관적 조건으로는 아무것도 새로운 진주의 결혼에 구속이나 구애가 될 것이 없으면서, 오직 당자 스스로가 마음 가운데 준호라는 존재를 못 잊었고, 민망한 생각이 들고 하는 이것이 거리 끼는 일이라면 유일한 거리끼는 일이었었다.
 
129
매년 여름방학이면 할머니를 위하여 고향엘 내려가곤 하였는데, 그럴 적마다 풍편에 소식은 들었었다. 그러나 그 소식이라는 것이 구구하여 잘 있다고도 하고 늘 앓는다고도 하고, 새로이 장가든 색시와는 금슬이 퍽 좋다고도 하고 소박을 해싸서 나가버리고 없다고도 하고, 서울 가서 어느 중학교에 다닌다고도 하고, 시골 어떤 농업학교에 다닌다고도 하고. 도무지 대중을 할 수가 없었다.
 
130
오영달과 추영산 누구를 택함이 가하냐를 생각하려던 것이 생각이 그만 준호에게로 번지어 가지고 진주는 얼마를 서서 그러다 문득 손가락을 꼽아 본다.
 
131
'열여덟 살…… 많이 자랐을 테지! 어디 가서 무얼 하고 있는지. 서울 와서 있다면 길에서라도 혹시 만났으련만. 만나니, 차라리 아니 만나기만 못한 노릇이지만……’
 
132
여자의 소위 첫정이란 이다지 면면한 것이 있었다.
 
 
133
7
 
134
닷새가 지나서…… 황혼 무렵이었다.
 
135
오영달과 추영산을 대접하는 잔치도 거진 파물이 되어가는 참이었다.
 
136
실상 손들이 오기를 일찌감치 왔고 주인도 일찍 서둘러 진작 벌써 끝이 났을 판이었었다. 한 것을 원체 술을 즐기는 추영산에다 술에 들어서도 승벽을 내지 아니할 수 없는 오영달이 진주의 앞에서 맞다들린 자리였다. 식상에에 이미 취하였고 그 위에 저녁을 먹었고 그러고 나서 시방 남은 술을 마저 마시기를 겨루어하고 있던 것이었었다. 날씨가 이상히 훈훈하여 자리는 널찍한 마루에다 벌이었었고. 해서 일각대문을 들어서는 사람이 있다면, 아무고 낭자한 이 좌석이 얼른 눈에 뜨이도록 되었었다.
 
137
처음에는 점잖스럽게들 천하사를 논란하고 세계대세를 말하고 하였다. 과학을 이야기하고 예술을 비판하였다. 종교와 신앙에 대한 토론도 하였다.
 
138
팔을 부르걷고 마루청을 치면서 무엇을 비분강개하기도 하였다. 그러는 동안에 술은 취해오고 화제는 바닥이 났다. 농담과 험구가 나오는 것은 자연 한 순서였다.
 
139
"여봐라, 추가야?"
 
140
"이놈! 한 살이 위라도 연상은 연 상이어든…… "
 
141
"세상에 성이 그리두 없어서 그래 더러울추자 추가란 말이냐?"
 
142
"그 잔 먼점 비구…… ""오냐…… 또오, 이왕 성이 추가여들랑 몸채림이나 정갈히 해야지? 대체 저 무슨 탁객짓이란 말이냐…… 옜다 잔 받아라."
 
143
"네 듣거라. 옛시조에도 까마귀 검다 하고 백로야 웃지 마라. 겉이 검은들 속조차 검을소냐. 겉 희고 속 검은 김생은 네야 긴가 하노라. 응?"
 
144
"그래서?"
 
145
"내 비록 외양이 탁하기로니 속조차 탁할까?"
 
146
"속이 탁하기에 그것이 밖으루 나타나 저절루 겉이 탁해지는 것이지."
 
147
"겉이나 탁한 나를 탓하느니, 병자의 고름이나 긁으면서 구복을 도모 하는 너를 한번 돌으켜볼 일이야."
 
148
"의는 인술이라니, 그 고루한 환쟁이 같으리?"
 
149
"가난한 환자가 오면 왕진 갔소 하라고 시키는 인술? 치료비가 암만이니 가 가지고 와서 치료를 받으라고 쫓는 인술?"
 
150
"일 원 가지고 오면 꼭 일 원짜리로, 백 원 가지고 오면 백 원짜리로 그림을 물감 달아 팔아먹듯 하는 너이 화쟁이는? 신성하다시는 예술을 저울 질해 팔아먹는 너이 환쟁이 말이다?"
 
151
행주치마 거뜬히, 옥단을 데리고 손님 시중에 한동안 바빴던 진주는 이윽고 한가함을 얻어 넌지시 좌석 머리로 비껴 앉아 두 사람의 허물없은 수작을 미소하며 듣고 있다. 그러면서 한편 속으로는 생각이 두루 많다.
 
152
'……저 양반한테 이 추씨의 침착하고도 대범스럼이 있다면?……’
 
153
'그렇거나 이 양반한테 저 오씨의 시원시원하고 활발스런 기상이 있거나……’
 
154
종종 되풀이하던 이런 생각도 자연 다시 또 나기도 하였다.
 
155
하여간 이 좌석이 진주는 두 사람 가운데 누구든지를 마음에 아주 작정 하여야 하는 좋은 기회였었다.
【원문】위기(危機)
▣ 커뮤니티 (참여∙의견)
내메모
여러분의 댓글이 지식지도를 만듭니다. 글쓰기
〔소설〕
▪ 분류 : 근/현대 소설
▪ 최근 3개월 조회수 : 138
- 전체 순위 : 537 위 (2 등급)
- 분류 순위 : 80 위 / 882 작품
지식지도 보기
내서재 추천 : 0
▣ 함께 읽은 작품
(최근일주일간)
• (1) 서당
▣ 참조 지식지도
▣ 기본 정보
◈ 기본
  # 여인전기 [제목]
 
  채만식(蔡萬植) [저자]
 
  1944년 [발표]
 
  소설(小說) [분류]
 
◈ 참조
▣ 참조 정보 (쪽별)
백과 참조
목록 참조
외부 참조

  지식놀이터 :: 원문/전문 > 문학 > 한국문학 > 근/현대 소설 카탈로그   목차 (총 : 12권)     이전 7권 다음 한글 
◈ 여인전기(女人戰紀) ◈
©2021 General Libraries 최종 수정 : 2022년 04월 23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