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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인전기(女人戰紀) ◈
◇ 불여의(不如意)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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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4.10.5~
채만식
1
女 人 戰 紀[여인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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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不 如 意[불여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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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은 아뭏든 흘러 그로부터 다시 십 년이 지났다. 앞으로 일 년이면 진주의 나이 그럭저럭 사십이 차는 병자(丙子), 소화 십일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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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여름 오월, 신록 환히 피어오르고 신선한 계절 오월 그믐의 어느 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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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광이 차창으로 맑게 드리우는 남행열차의 한 복스를 차지하고 앉아 철과 문주 남매는 어머니에게 거느린 바 되어 시골 본가엘 내려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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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이 어느덧 열네 살이요, 문주가 열두 살이었다. 철은 중학교의 정복 정모에 깃에단 3자를 붙이고, 문주는 소학교 오학년이었다. 자라는 아이들이라고 하지만 다들 몰라보게 자랐다.
 
8
아이들이 그처럼 자란 반대로, 아이들을 그만큼이나 기르고 학교에도 보내고 하기에, 십 년의 고생을 또다시 치르었고 사십이 차고 하는 어머니 진주는 역시 몰라보게 바싹 늙었다.
 
9
자식 하나만 나면 이 재산이 죄다 네것이라는 소담스런 미끼를 물리치고 아이들 남매를 데리고 가두로 나섰을 때에는 지나간 고난을 생각하여 앞길이 깜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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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행 수중에 돈이 조금 있었다. 언젠가 창수가 놓고 간 오십 원과 다달이 월급으로 받아 모은 것과, 그리고 작별하면서 고씨가 몇십 원 쥐어 준 것과도 합 일백오십 원은 되었다. 이것이 말하자면 백사지에 선 세 모자의 생명의 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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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리 두르고 갈 곳이 없는 몸이라 전에 살던 재동 그 노파를 찾았다. 마침 건넌방이 또 비어 있어 다시 세로 얻어듦으로써 우선 거리잠을 면 하였고 일변 노파의 훈수에 좇아 물감장사를 시작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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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감장사로 일 년. 한 아이 등에 업고 한 아이 손목 잡아 걸리고 문전 문전 드나들면서 물감을 팔았다. 다리가 뻣뻣하고 기진이 되도록 종일 돌아다니고 나면 이튿날 밥거리가 생기는 날도 있고 죽거리가 생기는 날도 있 고통 히 생기는 것이 없는 날도 있고 하였다. 일 년 하는 동안에 할 수 없이 밑천에서 오십 원을 갉아먹었다. 믿고 길이 할 것이 못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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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하는 이도 있고, 또 보아하니 자리만 잘 잡아 앉으면 그럴 성불러 다방 골에다 골라 방 하나를 구하여 가지고 '내재봉소’를 써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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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한 일 년이나는 별 신통한 줄을 모르겠더니, 차차로 바느질 솜씨 곱고 얌전하다는 소문이 퍼지면서 이태째부터는 쑬쑬히 일거리가 들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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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객은 물론 태반이 기생과 여급들이요, 그런 사람들이기 때문에 삯도 비교적 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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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 년 되면서는 들어오는 일거리를 손으로는 도저히 감당할 수가 없었 고월 수로 재봉틀을 한 채 사놓았다. 이로부터야 겨우 모진 기한(饑寒)에 쫓기 기를 면하고 생활이랄 거의 자리(軌道)가 하여커나 섰다. 경오(庚午), 소화 오 년에는 철이, 그리고 그 다음다음해에는 문주가 각기 학교에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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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우 굶주리지나 않던 생활에다 아이들이 소학교나마 다니게 되니 수입이 지출을 따르지 못하였다. 진주는 먹는 것을 줄이는 한편 밤을 새워 가면 서일을 더 하여야 하였다. 그러면서도 학교에 내는 월사금을 제때 제때 주어 보내지 못하고 아이들로 하여금 울고 갔다 울고 돌아오게 하는 적이 많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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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고 인물 얌전한 여자가 홀몸으로 어렵게 사는 약점을 엿보고 유혹이 연방 끊이지 아니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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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종류의 유혹이란 거개가 판에 박은 듯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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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삭 이백 원씩 대어주고 집 사주고 할 터이니, 세짼가 네째 첩으로 들어오라는 것이었었다. 안국동 김씨처럼 재산은 많은데 자식이 없으니 남녀간 하나만 낳으면 오백 석거리를 떼어준다커니, 단박 본실로 모셔 앉힌다 커니하는 것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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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당국장이 일흔두 살 먹은 영감으로 작년에 마누라가 죽고 자식들은 다 장남하여 따로 살고 하니 들어가 말벗이나 하면서 의복이며 음식 시중 같은것이나 착실히 보살펴 주고 하면 죽는 때 오천 원 주마는 것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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족히 귀에 담아 들을 것도 못되는 소리들이었으나, 오직 중년 상처를 한 어떤 변호사의 후취 자리 하나만은 약간 마음이 움직인 것이 있었다. 희망이란 다 면 떳떳이 결혼 예식을 치러도 좋고, 저편에도 열살박이 전실 소생 이하나가 있으니, 이편도 딸린 것을 데리고 들어오는 것을 반대치 아니할 터이요, 꼭같이 최고학부까지 공부를 시켜 줄 것이요 한다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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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혼일망정 정당한 결혼인데다 아이들을 마음대로 교육시킬 수 있다는 것이 여간만 솔깃한 것이 아니었다. 그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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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침 밤이 깊도록 바느질을 하고 있었는데, 나란히 누워 자고 있던 두 아이를 곰곰 바라다보다가 문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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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것들을 데리고 남의 애비한테로 후가살이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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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붓자식! 의붓아비!’ 하면서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점잖고 가사 눈치를 않는다 잡더라도 의붓 자식에게의 매양 의붓아비임엔 일반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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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부 한가지 잘 좀 시키자고 저것들을 의붓자식 신세를 만들어주어? 천하 치사하고 남 보매부터 추레한 의붓자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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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금 고개를 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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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냐, 고생스러워도 참고들 견디어다오. 더는 모르되 중학 하나씩은 이를 악물어가면서라도 기어이 마치도록 하여주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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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붓자식이라는 명예스럽지 못한 이름 아래 잘 지내면서 창피한 대학 공부까지 하느니보다는 가난하나마 어미의 정성, 어미의 손에서 고생으로 중학만 마치는 것이 너희들도 행복이요 자랑이리라. 이 어미도 그것이 자랑이요 행복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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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듯 유혹을 물리치고 쓰라린 고난을 단물이 나도록 야긋야긋 씹어가면서 뜻을 꿋꿋이 지켜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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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 일찍부터 밤이 깊도록 쉬지 않고 다르르 구르는 한 채의 재봉틀 소리…… 이 가만한 소리가 엮어내는 어머니의 정갈한 수고로 철이 우선 재작년 봄 버젓이 ××중학에 들었고, 올해 벌써 삼년급이 되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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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는 앞으로도 아무것도 더 바라지도 않고 욕심도 부리지 않고 오직 아침 일찍부터 밤 깊도록까지 다르르 구르는 재봉틀 소리 하나만으로써 두 아이가 중학을 마치는 날까지를 대어가기에 여념이 없을 참이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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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자 생각밖에 박씨부인이 병이 중하다는 것과 그리고 아이들이랑 며느리를 임종에 만나고자 한다는 기별을 가지고 죽은 준호의 외사촌이 시골 로부터 진주를 찾아 올라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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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나고자 한다는 말이 없더라도 임종이라고 하니 도리에 선뜻 일어서지 아 니 할 진주가 아니었다. 좀처럼 쉬는 법이 없는 학교를 다 쉬게 하고서 아이들을 데리고 바로 이튿날인 시방, 그래서 이렇게 부랴부랴 시집 본가엘 내려가고 있는 길이었었다. 쫓기어나서 어언 이십일 년 만인 시집 본가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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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회 자못 무량한 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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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이십일 년이라는 동안에 진주는 퍽도 많이 인생을 손을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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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혼을 뜻한 바가 있었다. 사실 그것 자체야 노상 불순하였다고 할 무엇이 없다 하겠지만, 그렇더라도 상대적으로는 정신적인 순결이 한귀퉁이가 이지러졌 음을 스스로 거부키 어려웠으며, 따라서 마음 가운데의 한 가시지 않는 흠집이 아닐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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곡절은 어떠하였던지, 또 악의로써 한 것은 아니었다지만, 하여커나 자식을 눈 번히 뜨고 남의 집 문전에다 개구멍받이로 버린 것이 있었다. 뉘우치고 곧 도로 찾고 하였다고는 하여도 이미 씻을 수 없는 오점(汚點)이요, 평생토록 잊지 못할 가책거리였다. 항차 도로 찾은 것이야 우연의 요행이 아니었던가. 우연의 요행으로 그렇게 도로 찾았기망정이지, 만일 찾지도 못 하였더라면 어쩔 뻔하였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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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실은 아니요 불가항력을 불가항력이었으나, 남편 준호를 여의고 삼십 안에 과부가 되었다. 절대로 채워지지 못하는 손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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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부의 낙이나 가정의 단란 같은 것은 미처 맛도 들이지 못한 극히 짧은 동안 이었고, 그런 것이 마악 시작되려 하자마자 이내 새파란 청상과부의 몸이 되었다. 그러고는 기한과 남의 업신여김과 동요 가운데 좋은 청춘을 다 보내었다. 하고서 이에 시드는 사십의 고개를 부질없이 넘고 있었다. 억울했다. 그런 억울한 도리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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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듯 모두가 무를 수도 없고 메꾸어지지도 않고 하는 인생 손실의 연속 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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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히 서러운 노릇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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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그러한 손실이 있는 반면엔 철과 문주 남매가 눈앞에서 나란히 자라고 있는 것이 있었다. 고난을 치르어 나오는 동안에 이루어진 결실이었다. 큰 자랑거리며 큰 즐거움이요, 자랑스러워하고 즐거워하여서 무방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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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만큼 다시 없이 소중한 그들 남매이기도 하였다. 남의 열 남매 스무 남매 지지 않게 소중한 남매요, 누가 눈 한번 크게 부릅뜰까 무서운 소중한 남매 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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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사람 따라 생각하기 나름이었다. 저마다 자녀를 낳아 기르고 함에 있어 반드시 진주와 같이 인생을 손실하면서 하라는 법은 없었다. 아무 고난이 없이 순조로운 조건 아래서도 남들은 저마다 자녀들을 낳아 훌륭히 양육과 교육을 시켜놓지를 않던가. 순경에서 평안히 호강으로 자녀를 기르고 교육 시키고 하여 훌륭히 된 자녀라고서, 진주만큼 자기네 자녀를 소중히 여기지 않는 부모가 있으며, 자랑스러워하지 않는 부모가 있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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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그러므로 자녀라는 것은 부모의 고난에 대한 직접적이요 인과적인 대상인 것은 일률적으로는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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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생한 보람으로 자식들이 저만큼이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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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히 들 이렇게 말도 하고 생각을 한다. 진주도 매양 그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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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자녀는 인생을 손실한 것과는 역시 딴 것이었다. 그리고 진주도 인간의 약함을 갖추지 아니치 못한 사람이었다. 때로는 손실한 인생이 미련 겨울 적이 없을 수가 없었다. 더우기 이십 년 전 그로 하여금 인생의 손실을 출발 케 한 시초에를, 지금에 공간적으로 돌아가고 있는 날을 당하여 그런 감회, 저런 감회 두루 깊이 솟는 것이 없다면 오히려 빈 말일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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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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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중에도 골똘하달까 안타깝달까 하기는, 잊어버리고 지나친 청춘 이었다. 꿈결만 같은데 어느 겨를에 온 것은 사십이라는 늙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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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망도 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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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망하고 마음 한구석이 텅 빈 공허의 느낌을 도무지 어떻게 할 수가 없었다. 앞자리와 옆에 번연히 철과 문주가 앉아 있건만 홀로 무인지경을 가기처럼 외로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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준호 그리운 생각이 불현듯 새로왔다. 등신이라도 옆에 있다면 가슴에 얼굴을 묻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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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적 해요! 슬퍼요!" 하고 하소연하면서 울고 싶었다.
 
59
아이들은 어머니의 그런 가만한 혼자의 세계도 오래도록은 허락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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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 어머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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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석받이 문주가 눈 지그시 감고 차창에 기대어 있는 어머니를 별안간 팔을 잡아 흔들면서 호들갑스럽게 부른다. 차가 굴로 들어가고 있었다.
 
62
어머니보다 맞은편 자리에서 무슨 책인지 교과서는 아닌 술 두꺼운 책을 잠 착하여 읽고 있던 철이 이맛살을 찡그리면서 핀잔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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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집애아 개떡두스러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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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이. 기집앤 활발스러믄 못쓰나 머."
 
65
"쓸 건 어딨어?"
 
66
"왜 못써?"
 
67
"보선짝이니 쓰니?"
 
68
"하하하. 보선짝을 쓰는 사람이 어디가 있어?"
 
69
"너 겉은 기집애란다."
 
70
"오빠나 써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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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2
철은 더 대거리를 않고 책으로 다시 정신이 쏠리고.
 
73
문주는 어머니를 올려다보면서
 
74
"아따 엄마?"
 
75
"오냐."
 
76
"기집애두 활발스러예지 허지, 응?"
 
77
"그래두 너무 활발스러면 왜장녀란다."
 
78
"왜장녀? 왜장년 또 무어유?"
 
79
"게덕만 피우구 얌전치 못헌 기집아일 왜장녀라구 헌단다."
 
80
"왜장년 못쓰우?"
 
81
"못쓰구말구!"
 
82
"오라. 그럼 나두 죄끔만 활발스러예지…… 죄끔 활발스런 건 갠찮지, 엄마?"
 
83
"오냐."
 
84
어머니는 철의 벌써부터 명상적인 소곳한 이마를 곰곰이 건너다보면서 무심 중에 얼굴이 흐린다.
 
85
철은 생긴 모습부터, 성격 하며, 말이 적은 것이며, 그 밖에 모든 행동 거지 며가 고대로 준호를 본떠다 놓았었다. 집안 사람이거나 남이거나 같이 섭 쓸리 기를 즐겨 아니하고 혼자 있기를 좋아하는 것도 생전의 부친 준호 였었다.
 
86
반대로 문주는 계집아이면서도 왈패스럽고 앙칼지고 한 것이 철과는 전혀 딴 판이요, 어쩌면 저의 할머니 ——— 박씨부인을 많이 탁한 것도 같았다.
 
87
'차라리 둘이 바꾸어 되었더라면!’
 
88
아무리 남자라 하더라도 박씨부인 같은 성질은 와락 추앙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또 아무리 여자라 하더라도 준호 같은 성격은 역시 박씨같이 되 지를 못하였다. 그러나 이왕이면 ——— 이왕 두 아이의 성격들이 그랬을 바이면 ——— 철이 박씨부인을 탁하고 문주가 준호를 탁하고 하였던 편이 차라리 그래도 나을 뻔하였다는 것이었었다.
 
89
'사람이 한세상 살기에 무엇 한가지 뜻과 같이 되는 것이 있을꼬마는 그 중에도 가장 불여의(不如意)하기는 자식일까 보다!’
 
90
진주는 절절히 이런 생각이 새삼스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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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92
차는 호남선으로 갈리는 대전을 거의 바라보면서 첫여름이 선명한 언덕 기슭을 줄기차게 달리고 있고.
 
93
"철인 참, 이 세상에서 젤 존 것이 무어지?"
 
94
곰곰이 아들의 책에만 잠심하여 있는 양을 건너다보다가 밑도 끝도 없이 어머니가 그렇게 묻는다.
 
95
철은 한참이나 대답이 없더니, 그래서 영영 대답을 않거니 한 것이 얼마만에야
 
96
"책요."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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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인다. 그러고는 이윽고
 
98
"그건 무슨 책이냐?"
 
99
"별의 전설이라구, 저 거시키."
 
100
"별의 전설? 철이겐 안직 좀 어려운 책 같은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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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2
"재미있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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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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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이 다 보구 나서 어머니두 좀 볼까?"
 
105
"어머닌 봐야 재미 하나두 없어요. 살림만 아는…… "
 
106
어머니는 속으로, 내가 너를 지도하자면 그동안보다 더 큰 고생을 ——— 마음의 고생을 하여야 되겠구나. 그러니 에미 노릇도 이 앞으로가 더 어렵고 책임이 정말로 중하구나 싶었다. 그러나 일찌기 명심한 바도 있거니와 자녀를 지도 훈육함에 있어 결코 박씨부인과 같은 그런 방침이나 태도로는 아니 할, 시방도 생각이었다. 무릇 자식은, 불여의하다는 것은 부모의 소 주관이요, 부모에게는 불여의한 자식이라도 인간은 불여의치 않은 것이 사람 이었다. 사람만 여의하다면 부모의 소주관은 문제가 아니었다. 자식을 잘 지도 한다는 것도, 그러므로 여의한 자식을 목적이 아니라, 여의한 사람이 목적 이어야 할 것이었다.
 
107
정거장으로 내어보낸 두 채의 교군에 별러 타고 밤이 들어서야 진주는 이십일 년 만에 오는, 그리고 두 아이는 생후 처음으로 와보는 향교골 본가엘 당 도하 였다.
 
108
환히 밝힌 촛불 아래 자는 듯 눈을 감고 누웠는 박씨부인은 첫눈에 벌써 임종의 빛이 완구하였다. 그러나 그 임종의 자리는 너무도 쓸쓸하였다. 서울로 진주 모자를 데리러 왔던 준호의 외사촌 즉 박씨부인의 친정 조카, 그의 아낙이 하인 하나를 데리고 약시중을 하면서 자리에 있었다․ 준호의 외삼촌 내외는 연전에 내외가 전후하여 다 죽고 없었다.
 
109
진주는 병인이 혹시 잠이 들었나 하여 기척을 하기가 조심스러워 잠깐 그대로 서서 동정을 기다렸다.
 
110
진주 모자들을 말없이 일어서서 맞이한 준호의 외사촌댁이 그 눈치를 알아채었던지 병인의 머리맡으로 도로 앉으면서
 
111
"고모님, 서울서 동생이랑 조타들이랑 왔어요." 하였다.
 
112
박씨부인은 정녕 알아들은 듯하였으나 눈두겁만 두어 번 떨릴 뿐 아무 반응도 보이지 아니하였다. 실상 그는 교군이 들어올 때에 벌써 알고 있었다.
 
113
진주는 두 아이를 이끌어 함께 병인의 옆으로 가까이 꿇어앉혔다. 그러면서 조용히
 
114
"어머님, 저 왔어요. 어린것들 데리구 왔어요." 하고 음성을 내었다.
 
115
박씨부인은 그래도 이내 반응을 보이지 않더니, 한참만에야 천천히 눈을 뜬다. 그러나 눈은 곧장 천장을 보고 움직이지 않는다.
 
116
"할머니, 정신 차리셌다. 절들 허구 뵈여라."
 
117
세 모자는 절을 하였다.
 
118
박씨부인의 눈은 여전히 천장을 보고 움직이지 않는다. 그러나 이윽고 도로 눈을 감는다. 감고는 또 한참만에 입으로부터 흘러져 나오는 말이
 
119
"무엇 허러 왔느냐, 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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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121
박씨부인은, 말뜻인즉은 타박이요 나무람인 것이 분명하였다. 그러나 음성에는 전혀 힘이 없었다. 기승스럽지도 못하고 모질지도 못하였다. 괄괄하지 는 더구나 못하였다. 하되 결코 그것은 병인의 병인답게 원기가 없는 데서 오는 무기력이 아니었다. 진심(眞心) 아닌 말이요, 자신 없는 말이기 때문에, 가사 원기가 있더라도 강경하고 서슬 있고 하지가 못하여 무기력한, 그 무기력 이었다.
 
122
박씨부인은 진주 모자들을 얼마나 만나고 싶어하고 기다리고 하였는지 모른다.
 
123
내가 아마 소성을 못할까 보니, 자네가 가서 그것들 세 모자를 좀 내려오도록 하게. 그것들 외가편으로 수소문을 하면 서울 어디서 사는지는 곧 알게 되리. 알아가지고 가서 그것들 먼저 내려보내고 조칼랑은 이왕 서울까지 간 길이니 하루 이틀 묵어 나 죽어서 쓸 송종 물화까지 아주 하여가지고 뒤 쫓아 내려오게.
 
124
이렇게 친정 조카를 시켜 서울로 올려보내 놓고는 그날부터 기다렸다.
 
125
"아직 기별이 없느냐?"
 
126
"네. 아직 없어요."
 
127
"온, 어째 이리 더딘고."
 
128
그러고는 조금 있다가
 
129
"그 애가 내가 부른다구 선뜻 내려올꺼나? 어린것들 데리구."
 
130
"아니 올 이치가 있어요."
 
131
"모르지!…… 원망이 사모쳤을 테니, 졸연 해…… "
 
132
또 조금 있다 또 그러고. 하루 종일 그랬다. 곧 숨이 질 듯 질 듯 하면서도 정신은 초랑초랑하여 가지고, 그러면서 기다렸다. 이튿날은 더하였다. 그러다 석양때 전보가 와서야 우선 오기는 온다는 안심에 초조하던 것이 조금 진정되었다.
 
133
교군을 차리라고 재촉이 불 같았다. 차리되, 팔패 교군으로 두 채를 차리라 하였다.
 
134
일변 고기를 사들이고 떡쌀을 불리고 과실을 장만하고.
 
135
교군이 나가서 극진스런 이 일행을 태워가지고 돌아오기까지 네 시간 남짓한 동안에 머리맡에서 시중하던 하인은 동구 안으로 등불이 들어오나를 보기 위하여 대문 밖을 드나들기를 무려 몇십 번인지 모른다.
 
136
이렇게 기다리던 박씨부인이었다. 진심으로 무엇하러 왔느냐는 호통이 나와질 리가 없던 것이었었다.
 
137
진주는 아직 그런 속내까지는 몰랐어도, 서울서 준호의 외사촌에게 들은 이야기가 있었고, 또 와서 언뜻 보매도 무척 온건한 표정이며, 그 슬프도록 무기력한, 무엇하러 왔느냔 말이며로 미루어, 이 시어머니가 이미 다 뉘우 치고 마음은 풀어졌으며, 지금엔 도리어 용서를 바라는 처량한 근경임을 짐작 하기에 어려울 것이 없었다. 그러나 진주는 도리를 차리었다. 먼저 빌었다.
 
138
"어머님, 동촉허세요. 전사가 다 제 잘못 제 허물인 줄을 깨달었으니, 어린것 들을 보세서 그만 동촉허세요."
 
139
"………"
 
140
아마도 오 분은 넘겨 침묵이 흘렀으리라. 박씨부인은 여지껏 그대로 감았던 눈을 어렵사리도 다시 뜨고는 진주와 철과 문주를 차례로 본다. 그러더니 눈은 처음에처럼 천장에 가 멎으면서 혼잣말로
 
141
"놈은 아범만 닮었구나. 승밀랑은 닮지 말드냐?"
 
142
잠깐 숨을 돌리고 나서, 손이 베개 밑을 더듬으려고 하는 것을 친정 조카 며느리가 뜻을 알아채고 얼른 열쇠 꾸러미를 꺼내어 손에 쥐어준다. 그것을 받아 가까스로 진주에게다 전하면서 조용히
 
143
"옜다, 다아 맡아라…… 나는 가겠다!"
 
144
그러고는 조금 있다
 
145
"하나두 뜻과 같은 것이 없었고나!"
 
146
인하여 가벼운 경련과 더불어 운명이었다.
 
147
여기에도 불여의가 있었다. 불여의하고도 큰 불여의가.
【원문】불여의(不如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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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채만식(蔡萬植) [저자]
 
  1944년 [발표]
 
  소설(小說) [분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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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인전기(女人戰紀) ◈
©2021 General Libraries 최종 수정 : 2022년 04월 23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