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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인전기(女人戰紀) ◈
◇ 의(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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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4.10.5~
채만식
1
女 人 戰 紀[여인전기]
2
9. 義[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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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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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등이 있는 집보다 없는 집이 많은 때라 거리로 석유장수가 도부를 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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땅거미가 내리려고 할 무렵, 그 황혼처럼 심란한 음성으로
 
6
"세기 사려." 하고 길게 외우면서 문앞 거리를 지나가는 석유장수 영감, 그의 무단히 심란한 '세기 사려’소리는 황혼의 구슬픈 심회를 가뜩이나 돕게 하는 것이 있어 저물녘 계동, 재동, 가회동 일판의 한 괄시 못할 거리의 정조 였다,
 
7
"세기 사려."
 
8
스러질 듯 외우면서 내려오는 그 석유장수 영감과 엇갈리어 중학생 둘이 가회동 막바지를 향해 올라가고 있다. 준호와 윤석이었다.
 
9
윤석은 그새 제 길로 한 길이나 자라 아주 헌다헌 장부가 되었고, 준호도 약질은 여전한 약질이었으나 나이가 역시 나이라 키도 많이 자랐고 몸피도 조금은 불고 하여 제법 인제는 멀끔하였다. 그러나 예와 다름없기는 그 침울한 기상이었다. 때마침의 황혼처럼 어둔 얼굴은 고개 푹 숙이고 뚜벅뚜벅 걸어가는 모양은 여전한 전일의 준호 그였었다.
 
10
두 소년은 작년 봄에 같이 서울로 올라와서 준호는 ××학교에 들고, 윤석은 약도 팔고 만두도 팔고 하면서 고학으로 ××학교의 야학에 다녔다. 준호의 종종 보조도 적지 아니하였다.
 
11
준호는 며칠 전에 삼청동 하숙에 들른 윤석더러, 지금 하숙집이 너무 난하고 시끄러 다른 곳으로 옮기고자 하니 다니면서 본 중에 조용한 염집이 있거든 천거하여 달라고 부탁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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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석은 그새까지는 별로 주의하여 보지 아니하였으니 앞으로 잘 유념 하여 쉬이 한 군데 물색을 해주마는 대답을 하고 돌아갔다. 그랬다가 오늘 조금 아까 일부러 와서 가회동 아무 번지요, 바로 취운정 문앞 근처인데 퍽 조용한 집 하나가 마침 방이 났다는 이야기를 동무에게 들었노라 하면서 가보지아니 하려느냐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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준호는 선뜻 같이 나서 시방 그 가회동 아무 번지란 집을 찾아가고 있는길 이었었다.
 
14
"저게 석유장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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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맛살을 다뿍 찌푸리고 준호는 지나친 석유장수 영감을 도로 돌려다 보다가 묻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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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 넌 첨 보니? 난 가끔 만난다…… 괴짜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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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기 사려’하고 생각난 것처럼 또 외우며 내려가는 소리가 감감하여 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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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어먹을 놈의 장수, 청승맞기두 허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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준호는 곧 울상을 하면서 혼잣말로 두런거린다. 가슴 가운데 한(限)이 있는 소년 준호는 이렇게 감성(感性)이 연하였다.
 
20
집은 이내 찾았다. 처음 안채에 물었더니, 어제 벌써 작정이 되었노라면 서사랑 채에도 건넌방이 비었으니 혹시 물어보라고 하였다. 허실삼아 사랑 채의 열린 일각대문으로 들어섰다. 전등불 켜진 마루에서 주인인 듯한 동 저고리 바람에 풀대님한 사람이 양복 입은 손님과 술을 먹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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준호가 토방 앞으로 다가가 모자를 벗으면서 학생 칠 방이 있느냐고 물었다.
 
22
"학생 칠? 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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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인(인 듯한 사람)은 혼자 그러면서 고개를 꺄웃 하더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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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얘, 옥단아?" 하고 부엌으로 대고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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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부인 듯, 그런데 장히 귀에 익은 음성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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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단이 심부림 갔어요." 하면서 불빛을 안고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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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머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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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 진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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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굴이 마주치는 순간 진주와 준호는 소스라치게 놀라면서 서로 이렇게 외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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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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준호의 모친 박씨부인이 그 고집 그 완고에 준호로 하여금 머리를 깎게 하고 서울로 공부를 보내고 한 것은 종시 서울 공부며 신학문이 그다지 탐 탁하 여서가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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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면, 시골구석에서 한문이나 읽고 상투 탄탄 짜고 한 자제들은 머리 깎고 복장( 校服[ 교복]) 입고 서울 가서 신학문 하는 자제들에 비하여 무엇인지 모를 한풀 꺾이는 것이 벌써 드러나고 있음을 완구히 아니 느낄 수가 없었다. 그런데 듣건댄 쫓은 며느리 진주가 서울 가서 신학문 공부를 한다고. 같은 사나이끼리라도 척을 진 사이에 내 자식이 저편에게 풀이 꺾인다는 것은 분할 노릇이거든 항차 박대하여 쫓은 며느리인 여자 사람한테리요. 박대 받고 쫓겨간 며느리는 신학문 서울 공부를 하고, 개명을 해서 잘 되어가지고는 천하를 거칠 것 없이 내로라고 얼굴을 들고 돌아다니는데, 내 자식은 사나이 자식이 시골 구석에 그대로 파묻히어 고루하게 명색도 성명도 없이 살면서 그 앞에 나가 고개도 들지 못할 지경이란다면 참으로 가슴을 칠 일 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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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은 돈이 많이 드는 곳이요, 사람 방탕하기 쉬운 곳이었다. 더구나 ' 그 년이’ 가서 있으니 혹시 저희끼리 만나든지 한다면 장히 위험스런 노릇 이었다. 해서 두루 주저스럽고 마음이 놓이지 아니하였으나 그것보다는 저 것이 더 절박한 사정이라 마침내 손수 상투를 잘라주면서 서울 공부를 승낙 하였던 것이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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준호는 그 야속한 상투를 깎는 동시에 그 가혹한 모친의 감독으로부터 벗어나 소원이던 서울 공부가 무한 기뻤음은 말할 것도 없었다. 그러나 그보다도 더 다행키는 진주를 만나는 희망이었다. 아무리 넓다 하지만 같은 서울 장안 안이었다. 반드시 만나는 날이 있을 것이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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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댁! 진주! 그 이쁘고 상냥스런 새댁! 자나깨나 잊히지 않던 새댁 진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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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준호는 그리운 진주였었다. 마지막 갈린 뒤로 잠시 한때도 생각을 아니한 적이 없는 진주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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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만난다 하여도 안타까운 일이었었다. 옛날처럼 나의 새댁이며 다정스런 진주며 한 그일 리가 만무하였다. 매양 슬픈 재회(再會)요 속절 없을 것 이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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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나도 옛과 같지 아니한 사람! 영원히 다시 옛 그 사람일 수 없는 사람과의 재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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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미처 나는 생각은 늘 이렇고 사무치는 한(恨)이 그것이었다. 차라리 아니 만나고 말기만 못하게 애달픔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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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면서도 그리움은 만나기를 간절히 바라 마지 않게 하였다.
 
41
일 년을 찾으면서 기다렸다. 이번 봄방학에는 진주의 본가라도 내려가 염치 불고하고 서울 처소를 물어볼까도 하였다. 언젠가 한 번 갔다가 공교 로이 문앞에서 처남을 만나(처조모였더면 막상 그럴 리가 없었을 것인데) 성미 괄괄한 사람이라
 
42
"자네 무엇하러 내 집에 오나?"하고 면박을 주어 평생 잊히지 않는 무렴을 당하고 돌아선 일이 없었다면, 아 쉰 마음에 가 물어가지고 오기라도 하였을는지 몰랐다.
 
43
아뭏든 그러던 진주를 준호는 지금 만난 것이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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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나지려니 하는 것이 있으면서도 늘 한심턴 것이, 뜻밖에 꿈결 같은 만남이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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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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준호의 얼굴은 빛났다. 눈에는 눈물까지 어리었다.
 
47
진주는 주르르 준호의 앞으로 달려 내려간다. 가 와락 그대로 그러안을 듯 주르르 달려 내려갔다. 진주의 눈도 눈물이 글썽거렸다.
 
48
준호는 덤쑥 와 팔이고 손이고 부여잡을 듯이 몸이 움칫하였다. 그러나 다음 순간 마루 위의 양복 손님과 함께 엉어주춤 일어서서 졸지의 사태를 의아한 눈과 다분히 간섭조로 내려다보고 있는 그 동저고리 바람에 풀 대님 한 이 집 바깥주인 양반(인 것이 분명한 사람)을 힐끗 한번 올려다보고는, 그다지도 빛나던 얼굴이 찰나에 극단의 절망으로 변하면서 홱 몸을 돌이켜 반달 음질 쳐 일각대문을 나가버린다.
 
49
영리한 진주였다. 그 기수를 못 알아챌 진주가 아니었다.
 
50
"저이가 괜히!……"
 
51
어쩔 바를 몰라 그렇게 성화하다 도움을 청하는 듯 윤석을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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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석은 진주의 시선을 냉연 물리치면서 인하여 유유히 자리를 떠난다.
 
53
진주는 빨리듯 그 뒤를 쫓아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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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길에서 윤석을 붙잡았다. 준호는 벌써 까맣게 멀리 가고 있었다.
 
55
"제발 좀 불르세요! 데리구 오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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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오라면 오나요? 어떤 고집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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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두요! 저럭허구 가버리시믄 어떻게 해요? 어서 좀 불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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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얘, 준호여."
 
59
마지 못해 부르는 시늉만 하는 소리라 들리지도 아니하였거니와 들렸기로서니 대답을 하고 돌아서서 올 리도 없었다.
 
60
"절 어쩌믄 좋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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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주는 하마 발을 동동 구르다 느끼면서 행주치마자락으로 눈물을 닦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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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금 감동이 되었던지 윤석은 볼먹은 소리로
 
63
"그 애가 무엇하러 와요?" 하고 지청구를 한다. 제딴에는 언중유골이었다.
 
64
"속도 모르구 괜히 그러지들 마세요!…… 하숙이 어디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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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숙요?"
 
66
조금 더 풀어진, 그래서 엔간히 계면스런 말씨요 얼굴이요 하였다.
 
67
"좀 데려다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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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욕 아니헐까?"
 
69
"지가 다 당허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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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을 팔러 가얄 텐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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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학 허시는 감? 일 년치라두 다 사드리께."
 
72
"누가 삯 받쟀나요?"
 
73
"그럼 어느 동네 몇번진지 그거라 두…… ""갑시다. 따라오시우."
 
74
진주는 행주치마만은 그래도 벗어서 개켜 들 경황은 났었다.
 
75
준호는 하숙에 돌아와 있지 아니하였다.
 
76
윤석은 방만 가르쳐 주고 돌아갔다.
 
77
돌아가려면서 윤석은 어떻게 생각하였는지, 준호가 입밖에 내어 말은 아니하여도 그동안 얼마나 진주를 그리워하였으며, 다시 만나기를 바라고 기다렸으며 하였다는 것을 이야기하여 주었다. 또 새로 장가 간 아낙은 준호가 불교를 하여 일 년 만에 제풀로 나가버렸다는 이야기도 하였다.
 
78
진주는 혼자 빈 방에서 준호의 돌아오기를 기다렸다. 기다린 지 반 시간도 못 하여 준호는 돌아왔다.
 
79
진주는 나풋이 절을 하였다.
 
80
준호는 문치에 가 우뚝 선 채로 슬픈 것 같은 반가운 것 같은 노한 것 같은 퍽 복잡 이상한 표정으로 진주를 끄윽 바라다만 보기를 한참은 하였다. 그러는 동안 차차로 얼굴이 붉어오르고 가슴이 연해 들먹거렸다. 얼마를 그러다 별안간 좌우를 휘휘 눈에 뜨이는 대로 필통의 단도를 화닥닥 거머 쥐더니 이를 악물면서 우르르 진주에게로 달려든다.
 
 
81
4
 
82
준호는 꿈결같이 그렇게 진주를 만나니 생각하였던 것보다도 더 반가왔다. 어안이 벙벙하였었다.
 
83
그러나 진주는 이미 남의 사람이었었다. 동저고리 바람에 풀대님을 하고 처억 손님과 앉아서 술을 먹고 있던 그 사람, 학생 칠 방이 있느냐고 묻는말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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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생 칠? 방?" 하면서 고개를 꺄웃 하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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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얘, 옥단아?" 하고 부르던 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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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단이 심부림 갔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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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면서 행주치마에 주인아씨 태 선연히 부엌으로부터 나오고 있던 진주 의 맵시.
 
88
거 웬 학생 아이들이며 무슨 곡절이냐는 듯이 간섭조로 엉거주춤 일어서서 내려다보고 있던 모양.
 
89
어디로 보나 그는 그 집 바깥주인이었다. 진주의 남편 바깥주인이었다.
 
90
옛날처럼 나의 새댁이요 다정스런 진주요 할 수가 없고, 만난다고 하더라도 슬픈 재회려니 하지 아니하였던 바를 아니었었다.
 
91
만나도 옛과 같지 아니한 사람이요, 영원히 옛 그 사람일 수 없는 사람과의 재회라 하여 비극일 것으로 실망할 것이 없는 바는 아니었었다.
 
92
그러나 막연히 그렇게 진주 하나만 가지고 단순하게 옛과 같지 아니할 사람이 리라고 생각만 하고 있었다가, 그래서 거기에 대한 신경은 비교적 평온하였던 것이, 막상 구체적인 사실로써 '남편 있는 장면’을 실지로 직접 당하여 보는 마당에 당하매 충격, 그러고 절망은 상상치 못한 심각함이 있었다.
 
93
'예라 다아 고만이다!’
 
94
얼른 먼저 생각나는 것이 죽음이었다. 죽음…… 반가왔다.
 
95
한강으로, 전차를 타려고 종로로 향하여 걸음을 급히 하였다. 그러나 곧장 공원 뒤까지 다다라 문득 생각하니 그냥 죽어버리기가 도무지 미진스럽다. 자꾸만 마음이 꺼림하였다. 무얼 일을 한가지 저지르고서 죽어야 죽어도 후련하지 그냐 이대로는 섭섭하여 죽어질 수가 없을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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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슨 일을 어떻게 저지른다는 것까지는 미처 없었다. 그러나 무슨 일이 되었던 큰일 한가지를 칵 저지르고 죽어야만 잘 죽어질 것만 같았다.
 
97
일단 발길을 하숙으로 돌이켰다. 뜻밖에 진주가 와서 있었다.
 
98
보도록에 좋고 반가운 그 모습의 진주였다. 옛 그 양자의 나의 새댁 이었다. 웃지는 아니하여도 금새 방긋이 웃을 듯 다물린 입이랑. 얌전스럽게 절을 하는 것이랑.
 
99
그러나 겉뿐이지 보매뿐이지 그는 옛 나의 새댁이 이미 아니었다. 영원히 그는 남의 새댁, 남의 아낙이었다. 영원히 나에게로는 돌아오지 아니하는 남의 것이었다. 몸부림이 나게 안타까왔다. 그러나 그래도 무가내하였다.
 
100
'이 아까운 진주에다가 그 동저고리 바람에 풀대님한 텁수룩한 작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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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끈 분기가 치달으면서 눈이 벌컥 뒤집히었다.
 
102
'오오 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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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지를 일거리를 퍼뜩 깨우쳐내었다.
 
104
가장 속시원하고 앙칼진 일거리였다. 그래야만 마음 걸릴 것도 원통할 것도 없고 비로소 잘 죽어질 성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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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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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도라야 연필이나 깎는 두어치짜리 작고 무딘 것이었으나 아뭏든 젖가슴 정통으로 겨누기는 겨누었다.
 
107
진주는 조금도 당황치 아니하고 종용자약하였다. 손끝 하나 항거함이 없이 곱다시 당할 각오였었다.
 
108
조용히 입을 연다.
 
109
"죽여서 조끔이라도 원이 풀리신다면 죽여주세요."
 
110
"………"
 
111
"저런 당신을 잊어버리자구 마음을 돌려먹었었으니 그 죄만 해두 죽어 마땅 허겠어요."
 
112
"………"
 
113
"그렇지만 막상 아주 잊어버리지는 못했어요. 어디 잊어버려 지드라 구요."
 
114
"………"
 
115
"그리구…… 부디 오핼랑은 푸세요. 이날 이때까지 성헌 몸으루 있었어요."
 
116
"………"
 
117
"인지장사(人之將死)에 기언(其言)이 선(善)이드라구, 죽는 자리서 무엇 허러 빈말씀허겠어요?…… 아까 그이들 아무두 아니구 손님이에요. 하나는 제 초상화 그려준 안채에 하숙허구 있는 이, 하나는 제 귓병 댕기믄서 치료 해 준 이. 답례허느라구 청해다 저녁 대접허든 참이에요."
 
118
"………"
 
119
"허긴 좀더 있었으면 그중의 누구 하나한테 몸을 의탁허구 말 뻔은 했어요. 천행으루 오늘 당신을 만나 몸만은 깨끗헌 채루 당신 손에 죽는 것 이 여간 다행이 아니예요. 아슬아슬두 허지! 선영 음덕이신가바요!"
 
120
눈물이 줄기져 흐르고 목이 멘다.
 
121
준호는 차차로 전신의 맥이 풀리어오다 팔이 떨어지고 하더니 마침내 손에 쥐었던 단도마저 스르르 놓쳐버리고 만다.
 
122
진주는 여전히 그대로 말을 계속한다.
 
123
"아직 가지는 아녔다구 해두 그럴 맘을 먹었었으니 당신 앞에 무슨 얼굴을 들겠어요. 그 죄두 또 죽어 마땅할 죄!"
 
124
"………"
 
125
"제 죄루 죽으면서 누는 당신이 입어 쓰겠어요? 지가 제 손으루 죽은 양으루 글자 몇자 적어놓겠으니 지필 찾아주세요."
 
126
"………"
 
127
준호는 견디다 못해 헉 느끼면서 진주의 아랫도리에 몸을 던지고 쓰러진다. 마주 붙어안고 소리를 삼키어가면서 오래도록 둘이는 울었다. 실컷 울고 나니 마음들이 씻은 듯 거뜬하였다.
 
128
준호가 진주를 고쳐 치어다보다가 싱그레 웃는다. 진주가 따라 웃는다.
 
129
"지가 일러루 오까요? 짐을 참겨가지구 절러루 겉이 가시까요…… 이왕 벌여 논 살림이구 허니깐."
 
130
"글쎄……"
 
131
"정 무엇허시믄 달리 셋집을 구헐 동안 며칠만 예서 더 기시든지."
 
132
"당신 학굔? 살림할라 학교에 다닐라."
 
133
"명색이 졸업이라시구 헌걸요. 아니 했기루 또 학교 다니자구 살림 폐허 겠어요?"
 
134
준호는 몰라도 진주는 어떻게 생각하면 태도가 심히 발작적이요 부자연스런 혐의가 없지 못하였다.
 
 
135
6
 
136
진주로는 그러나 노상 일시의 발작적이거나 부자연스런 거조가 아니었다.
 
137
아까 처음 준호를 섬뻑 만나 그로부터 지금까지 죽 가져온 동작과 태도와 그리고 마침내 준호의 아낙으로 복귀하고 마는 사실…… 이 일련의 행동 이진주는 저절로 다 그래진 노릇이었다. 조그마한 억지와 마지못해 함이 있었거나 잠시의 주저와 상량이 있었던 바도 아니었다. 그것은 마치 물이 흐름과 같이 자연스런 행동이었었다.
 
138
이미 준호를 마음에서 지우기로 하였고, 영상은 희미하여졌고, 불원 하여 새로운 결혼을 할 조건이 익었고 그렇던 진주가 졸지에 무슨 연유로?
 
139
여자의 소위 첫정이란 곡진도 하려니와 또한 이론을 초월한 마술적인 힘을 가지는 자이었었다.
 
140
섬뻑 준호가 그렇게 눈앞에 나타났을 때, 그 순간 진주는 저도 모르게 여섯 해 전 그 당시로 돌아가지고 말았던 것이었었다. 완전히 여섯 해 전 의상냥 코 다정스럽던 준호의 새댁이요, 얌전한 며느리요, 애련한 시골 소부 요한 그 당시의 진주로 요술처럼 돌아가졌었다. 그 당장에서고 평일이고, 그러려니 하고 전혀 마음 먹은 것이 있던 바도 아니었다. 그러는 것이 옳다고 여기거나, 그리하여야 하느니라고 누가 시킨 일도 없었다. 그저 제 풀로 였었다. 곧 여자의 첫정의 잠세력적(潛勢力的)인 힘의 조화였었다. 그것이 있고 그리 할 수가 있음으로써 여자는 한결 그 아름다움이 빛나는 것일는지도 모른다.
 
141
그 사이 여섯 해 동안의 진주는 진주 아닌 진주, 일시 꿈속의 진주였었다. 여섯 해의 긴 꿈은 깨이고 진주는 정말 진주, 생시의 진주로 돌아간 것 이었었다.
 
142
정말 진주, 꿈을 깬 생시의 진주였으니, 그와 같이 전과 다름없은 진주 노릇을 한다는 것이야 지당한 일이며 자연스럽지, 따라서 아무런 이상함도 부자 연하거나 발작적일 며리도 없던 것이었었다.
 
143
이리하여 진주는 의(義)를 살리었다. 물론 큰 희생이었다. 장차로 헤아리기 어려운 고난이 있을 것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큰 의의 가벼운 대상에 불과할 것이었다.
 
 
144
한편 주인을 잃어버린 두 사람의 나그네는 그만 파흥이 되어 밍밍하게 자리를 일어섰다. 그러고서 며칠이 지나 종로 거리에서 두 사람이 불긴히 서로 만났다.
 
145
"그 학생이 정녕 애인이거나 그렇잖으면 새서방이지?"
 
146
오영달이 풀기 없이 묻는 말을 받아서 추영산이 아무렇지도 않게
 
147
"바로 새서상일세. 갈렸다 다시 만난…… "
 
148
"닭 쫓든 개는 지붕이나 쳐다본다구…… 새서방 있는 진주를 캐려든 추 영산은?"
 
149
"오늘 밤 시골루 떠나네. 촌색시 얻어 인제는 자식농사나 지면서 그림이나 그리려네마는…… 지붕만 쳐다보구 섰는 오영달은 언제까지구 그 럭 허구 섰을 래서야!……"
 
150
"오늘 밤차루 동경으루 건너가게 됐네!"
 
151
둘이는 그러고 나서는 어우러져 한바탕 웃더니 손목 마주잡고 뒷골목 막걸리 집으로 더듬어 들어갔다.
【원문】의(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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