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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배비장(裵裨將) ◈
◇ 배비장 (1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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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3
채만식
1
裵裨將[배비장]
2
15
 
 
3
석양 무렵에 배비장은 조천(朝天)에 당도하였다.
 
4
비로 얼마 전, 목사를 따라 호기 있이 배에서 내려 제주땅에 첫걸음을 내어딛던 조천이었다. 방자 차돌이놈과 망월루를 구경 갔다가 구관의 정비장이 어느 기집과 낙루 작별, 차마 못 나뉘어 연연하는 거동을 보고 비웃던 조천이었다.
 
5
그러던 조천이요, 그러던 내가 지금 와서는 그 정비장보다 몇 갑절 더한 망신과 치소를 남기고서, 이 행색으로 불시에 이곳을 떠나고 있구나 생각하매, 그 또한 감개를 억제할 길이 바이 없었다.
 
6
배편을 알아본다는 것이 선창을 얼른 찾지 못하고, 해변을 이리저리 헤매었다. 그러나 한 곳을 지나노란즉, 바로 길 옆 바닷물로부터 별안간, 사람도 아니오 짐승도 아닌 시커먼 물건이 불쑥 솟아오르더니, 성큼 철벅 언덕으로 걸어 올라오고 있었다.
 
7
배비장은 혼비백산하게 놀랐다. 장뱅이 같은 것으로 허리 아래만 가리고 시꺼먼 알몸뚱이가 물과 육지를 종횡자재, 두 발로 걷는 것이, 무슨 사나운 짐승이 아니면 천생 물귀신이었다.
 
8
놀란 끝에 다시 정신을 차려보니, 겨우 사람이요, 말로만 들었지, 제주 온 지 수삭이로되 일찌기 구경은 한 적이 없는 해녀(海女)였다.
 
9
두근거리던 가슴을 진정한 후
 
10
“여보게, 말 좀 물어보세?”
 
11
하고 말을 건넸다.
 
12
저편은 그러나 물끄러미 이편을 돌아보다 외면을 하면서 아무 대꾸가 없다. 그 물끄러미 보는 얼굴이, 검기는 하여도 심히 아니꼬와하는 내색이었다.
 
13
“아, 이 사람, 양반이 말을 묻는데, 어찌 대답이 없단 말인가?”
 
14
배비장이 나무라듯 재우쳐 물어서야, 저편은 상을 험악스레 해가지고 버럭 볼 먹은 소리로
 
15
“말이 무슨 말이며, 양반이 다아 무엇하다 말라 죽은 것입나?”
 
16
하면서 대든다.
 
17
배비장은 하도 어처구니가 없어 뻐언하고 섰을밖에……
 
18
해녀는 상앗대질를 하면서
 
19
“응? 양반이면 행실이 발러야 양반이지? 점잖은 강아지가 부뚜막에 올라가도 분수가 있지, 양반이면 어째 체통머리 없이 남의 젊은 여자 발가벗고 일하는데 와서 말이 무슨 말입나?”
 
20
“여개 이 사람, 내가 외방지인이라 깜빡 모르고 실수했네!”
 
21
잘못하다 계집에게 멱살을 들릴 형세여서 배비장은 얼른 사과를 하였으나, 해녀는 더욱 어성을 높여
 
22
“실수했네? 아니, 이벽은 그래, 싸래기밥 먹고 병풍 뒤에서 낮잠 자다 왔습나? 어째 초면에 반말지꺼린고? 반말지꺼리가……”
 
23
“………”
 
24
“양반이 내게 무슨 상관입나? 발가벗고 바닷속에 들어가 전복 따서 먹고 사는 우리네끼, 이녁네들 그 양반이 무슨 상관 있읍나? 우리네는 이녁들 그 아니꺼은 양반, 개 팔아 두냥반이랍네!”
 
25
배비장은 혼잣말로
 
26
‘어뿔싸, 내가 아직도 꿈을 더얼 깼어! 발가벗고 바다에 들어가 전복 따서 생화 삼는 사람들께 워너니, 양반이 유세할 턱도, 두려울 까닭도, 고마울 내력도 없을 테지!……’
 
27
라고 자탄을 하다가, 다시 말을 공순히 하여
 
28
“여보시우, 듣고 보니 또한 내가 실수를 하였소 용서하시오!”
 
29
“그렇다면, 언제 서로 원수진 일 없으니 질래 시비하자고 들겠소?…… 묻자던 말을 무슨 말씀이오? 양반 행세 냉큼 걷어들이는 맘쌍 이뻐, 아는 대로 가르켜 주리다!”
 
30
“고맙소이다! 해남으로 떠나는 배를 어디를 가면 탈 수가 있겠소?”
 
31
“선창을 몰르시오?”
 
32
“모르오!”
 
33
“그럼, 길이 소삽하여 찾기 힘이 들 테니, 날 따라오시오!”
 
34
해녀는 상긋 웃기까지 하면서, 성큼성큼 앞을 서서 걷는다.
 
35
배비장은 사람이란 과연 사람 나름이요, 대접할 나름이라고 절절히 생각하면서, 해년의 뒤를 다라 걷다가
 
36
“마침 해남으로 떠나는 배가 있는지 모르겠소?”
 
37
“요새, 해남 가는 배가 통이 없읍니다!”
 
38
“허어, 그렇다면 낭패로군!”
 
39
“급한 볼일이시오?”
 
40
“대단히 급하외다!”
 
41
“아까 듣자니, 제주성내 사는 어떤 부자집 내행이 해남 친정을 가느라고 중가를 내고 독선을 사서 오늘 저녁물에 떠난다 했으니, 잘하면 그 배를 얻어탈 듯하오마는……”
 
42
이윽고 선창에 다다라 해녀는 오색 포장이 바람결에 나부끼는 조그마한 배를 손 들어 가리키면서 저 배가 그 배라고 한다.
 
43
배비장은 해녀에게 치하를 하고 총총히 배 있는 곳으로 지나, 한 자가 뱃머리에 뒷짐을 지고 어칠어칠하고 있다.
 
44
“어, 이 배 사공이 누구여?”
 
45
배비장은 뱃머리로 가까이 다가서면서 그렇게 묻는다. 뱃사공더러 공대는 차마 하기가 양반 체면에 안되었고, 그렇다고 해라를 했다 또 무슨 봉변을 당할까 저어서, 기껏 반말이던 것이다.
 
46
그자는 그러나 반말이 비위에 거슬린대서, 잔뜩 그대로 뒷짐 진채, 저도 반말로
 
47
“어, 사공은 왜 찾어?”
 
48
한다.
 
49
배비장은 당장, 저놈 잡아 엎으란 호통이 목구멍까지 치달았으나 꿀꺽 삼키고, 다시
 
50
“말 좀 물어보면?……”
 
51
“무슨 말이여?”
 
52
“이 배가 어디로 가는 배여?”
 
53
“물로 가는 배여!”
 
54
사공이 이렇게 엇나가는 데는 , 양반 다 고만두고 머리를 숙이는 수 밖에 없었다.
 
55
“여보시오, 노형이 이 배 임자시오?”
 
56
“네에, 내가 이 배 임자올시다!”
 
57
사공도 단박 이렇게 말이 달라진다.
 
58
“듣자니, 이 배가 오늘 저녁물에 떠나 해남으로 간다지요?”
 
59
“네에 그렇습니다!”
 
60
“미안한 청이오마는, 나를 해남까지 좀 태워다 주시겠소?”
 
61
“좋은 말씀이올시다마는, 이 배는 어떤 내행께서 해남까지 독선하여 가는 배가 되어와서, 사공 임의로 다른 행객은 태울 수가 없읍니다.”
 
62
배비장은 낙망이 되어 곰곰 생각다가
 
63
“내일이나 모레찜 배편이 없겠소?”
 
64
“아마 석 달 안으로는 제주서 해남으로 가는 배는 없으리다요!”
 
65
“허어! 그럼 독선은 용이히 할 수가 있나요?”
 
66
“그야 있지요? 그렇지만 선가가 좀 과합니다!”
 
67
“얼마나 내면 되나요?”
 
68
“천 냥 하나는 내셔야지요!”
 
69
“천 냥이라?”
 
70
“해남까지 수로로 천리라 하는데, 천 냥 안받고 수로로 천리 태워다 드릴 배는 있으며, 사공은 있겠읍니까?”
 
71
서울까지 갈 노수로 은 열 냥을 견대에 넣어 허리에다 찬 배비장이었다. 기가 딱 막혔다. 천 냥의 선가가 터무니없이 비싸기도 하거니와 제일 왈 몸에 지닌 것이 겨우 천 닢이니 생심도 못할 노릇이었다. 이럴 줄 알았더면, 목사가 말릴 제, 애랑이 붙잡을 제 슬며시 주저앉고 말았더니만 못했구나 싶어 후회막심이었다.
 
72
잘못하다 오도가도 못하고 조천 포구에서 거지 노릇을 하게 되는 판이라 배비장은 사공더러 애걸하듯
 
73
“여보시오! 다름이 아니라 나는 본시 서울 사람으로 이 고장을 왔다가 친환이 중하시다는 기별을 받고 급히 돌아가는 길인데, 이런 사정을 보아주는 게 다아 활인적덕이 아니오? 그 내행께 이런 말씀을 하고 나를 한편 이물 구석에 넌지시 끼여 가도록 좀 서둘러 주시오.”
 
74
“듣고 보니 당신 정상이 매우 딱하오!…… 쯧, 해진 후에 다시 오시오. 내행 모르시게라도 조용히 타고 가시도록 해 드리리다!”
 
75
“고맙소이다! 후일에 계제가 있으면 이 은혜 잊지 않고 갚으리다!”
 
76
사공이 황망히 대답하면서 달려간다.
 
77
“아니 배 이물에서 듣지 못하던 남자의 기침소리가 연해 들리니, 웬 사람이오?”
 
78
“네헤, 저 다름이 아니오라……”
 
79
“날 몰래, 행객을 태웠구려?”
 
80
“네에, 다름이 아니오라, 그 사람이 한양 사람으로 제주까지 왔다가 친환이 위중하다는 기별을 받고 급히 돌아가는 길인데, 마침 배편이 없어 망지소조하면서 애걸을 하옵기로 정상이 가긍하여 배 한 구석에 태워 준 것이오니, 남의 위친하는 효심을 생각하셔서 만분 용서하십시오.”
 
81
“사정이야 그렇다지만, 경오가 대단히 틀리오! 그러니 배 선가는 절반은 그 사람한테 받을 생각하오!”
 
82
“그렇지만……”
 
83
“듣기 싫소! 나는 여자라두 두 말은 할 줄 모르오!”
 
84
사공이 하릴없이 배비장에게로 쫓아오더니, 으르대기를
 
85
“이 정칠 양반아, 죽은 듯키 있으랬는데두, 웬 오라질 기침야? 기침이……”
 
86
“기침 아니했소이다?”
 
87
“아니했으면, 저 내행께서 그리셔!”
 
88
“쯧 미안하오이다!”
 
89
“미안?……흥! 어서 선가 절반 내요! 오백 냥이니……”
 
90
“내가 시방 몸에 지닌 거라고는 서울까지 갈 노비 열 냥뿐이오! 그거나마 받으시오?”
 
91
“어림없는 소리!…… 조처할 도리가 있으니 잠자코 가만히 자빠졌어!”
 
92
어둑어둑하여 배는 해남인 듯한 물에 닿았다. 그러나 사공은 배비장을 배로부터 끌어내려, 당시랗게 멱살을 검쳐 쥐고 한 집으로 가더니, 으슥한 한 방을 가리키면서, 서울 본가에 기별하여 선가 절반 오백 냥을 물어낼 때까지 저 방에 갇혀 있으라고 한다.
 
93
배비장은 기가 막혀 용서하라 빌 뿐이었다.
 
94
마악 그렇게 왁자지껄하고 있을 즈음에 안으로부터 한 젊은 여인이 나오는 기척이더니, 고개 떨어뜨리고 앉았는 배비장을 보고
 
95
“에구, 나리!”
 
96
하면서 달려들어 팔을 부여잡는다.
 
97
배비장이 비로소 보니 애랑이었다.
 
98
도무지 꿈인지 생시인지 분간을 할 수가 없어, 뻐언히 애랑을 건너다 볼 뿐, 무어라 말을 못한다.
 
99
애랑은 눈웃음을 치면서
 
100
“지가 말릴 때 애여 들어섰으면 이런 고생 또 아니하섰지요?”
 
101
“네가 정녕 구미혼(九尾狐)가 보구나?”
 
102
“구미호는 아니라두 속으시긴 또 속으섰읍니다!”
 
103
“예가 대체 어디냐?”
 
104
“제주 성 밖, 제 별당이랍니다!”
 
105
“해남은 어디로 가고서?”
 
106
“해남으로 놓아보내 드리면, 저는 어떡하구요?”
 
107
“대관절 이번은 발가벗고 피나무 꿰짝에나 안 들어가느냐?”
 
108
“이번은 호강이지, 망신하실 까닭은 없읍니다!”
 
109
“그래, 나를 굳이 이렇게 붙잡으니, 어떡허잔 말이냐?”
 
110
“전들 압니까? 사또께서 관문은 죄다 막았으나, 배비장을 얼마 동안 내 재주껏 붙잡어 두되, 만일 놓아 보냈다간 남그로 깍아라도 놓아야 하니, 그리 알란 영이시니, 그대로 시행할 뿐이지요!”
 
111
“허어!”
 
 
112
애랑의 무르익은 사랑과 후한 대접을 받으면서 건듯 한 달이 지났다.
 
113
그런 호강이 싫은 것은 아니나, 언제까지고 그러고만 있을 수는 없는 노릇, 하룻날 배비장은 애랑에게 떠날 뜻을 말하였다.
 
114
간다커니 못 간다커니 둘이 서로 우기고 있는데, 별안간 문전이 떠들썩하더니
 
115
“여쭈, 여쭈! 한님 여쭈! 배비장 나리께서 만냥 태수 하셨다 여쭈!”
 
116
하면서 영문 하인이 들이달아, 칙지와 목사의 서간을 올린다.
 
117
배비장은 황공하여 북향사배하고 치교를 배수하니, 과연일시 정의(旌儀) 현감이다.
 
118
애랑이 옆에 있다가
 
119
“한번 망신도 그만 하시면 괴히 비싸지는 않겠지요?”
 
120
하고 기쁨에 넘쳐 눈물을 흘린다.
 
 
121
<博文書館[박문서관], 1943. 11.30>
【원문】배비장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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