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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시순(朴始淳) 일기(日記) - 운불일기(雲紱日記) ◈
◇ 을미년(1895) 9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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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시순(朴始淳)
- 임실문화원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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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을미년(乙未年, 1895) 9월
 
 
 

9월 1일 戊戌

 
3
새벽에 서리가 내렸다. 맑음. 아침 일찍 운수관(雲水館)에 가서 망하례를 행였다. 그리고나서 교궁(校宮)에 가서 분향례(焚香禮)를 행하고 관아로 돌아왔다.
 
4
아침밥을 먹고나서 삼반(三班) 관속을 점고하였다. 완부(完府)의 관찰사 편지 및 호막(戶幙) 김 고창의 편지 2통과 송촌 김 령의 편지, 감찰 김동현(김동현)의 편지가 읍체(邑遞)로 함께 도착하였다. 그래서 완부 및 호막에 답장을 부쳤다. 송촌 윤 도정, 이 장의가 들어와 만났다. 종인 종헌, 덕치 유학 이병원(李棅源), 상운 유학 최봉우(崔鳳宇), 동변 도훈장(都訓長) 윤태일(윤태일)이 찾아와 만났다. 장수의 종인 참봉 재수(재수)가 그 백형 재섭(재섭)과 함께 찾아와 만났다. 남원 둔덕리 진사 이속의(李涑儀)가 찾아와 만났는데 일찍이 서울에 있을 때 알고 지낸 사람이다. 저녁에 유학 홍종성이 찾아와 만났다.
 
 
 

9월 2일

 
6
맑음. 이른 아침에 남면에 가서 직접 재해처를 執災하였다. 坪塘店에 이르러 해당 면의 훈장 김사준(김사준), 유학 곽찬영(곽찬영), 곽만규(곽만규)가 와서 기다리고 있어서 점사(店舍)에 들어갔다. 본면 냉천동(냉천동)에 사는 유학 조병일(조병일), 유학 이성범(이성범), 유학 한동규(한동규)가 들어와 만났다. 그런데 술과 안주를 내어와서 다 마시고나서 같이 재해처를 살펴 보았다. 옮겨가서 주천동(주천동)에 이르렀는데 주천동은 곽씨의 세거지이다. 옛날에 삼계서원(삼계서원)이 있었다. 지금은 폐철되어 유허지만 남아 있다. 강당으로 들어갔는데 곽씨의 산당(山堂)으로 동네에서 수업하는 곳이기도 하다.
 
7
유학 곽응규(곽응규)과 영규(영규)가 들어와 만났다. 조금 있다가 술상을 내어왔는데 이어서 점심밥까지 내어왔는데 매우 정갈하게 준비하였다. 머물러 든든히 먹었는데 매우 미안하였다.
 
8
오후볕이 기울어지는 즈음 내가 돌아오는 가마를 탔다. 금산동(금산동)의 유학 김사국(김사국_, 상중에 있는 그 친척 봉기(俸基), 의원 이윤언(이윤언)이 찾아와서 만났다. 작별하고 돌아와 금산서당(금산서당)에 들어갔는데 내가 예전에 쉬며 머물었던 곳이다.{桑宿處} 노인 한학렴(韓學濂), 학규(학규), 유학 김사노(김사노), 문수(雯秀)가 들어와 만났다. 오촌(鰲村)에서 술상을 내어왔다. 이 의원이 이어서 산약죽(山藥粥)을 내어왔다. 도리어 매우 미안하였다. 작별하고 가마로 돌아와 큰길을 따라 하동면 오류촌(오류촌)에 이르렀다. 오류촌은 강씨가 살고 있는 곳이다. 該面의 훈장 이영우(이영우) 및 강씨 사람 몇 명이 길가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나에게 마을 강당에 들어오라고 하였으나 날이 저물려고 해서 내가 사양하였다. 성 아래 동종(同宗) 영수(영수)가 길에 나와서 맞아 주면서 자기 집으로 가자고 하였다. 그의 집은 지나는 길가에 있어서 그 요청대로 그의 집에 들어갔다. 영수가 술상을 내어 왔는데 매우 풍성하게 준비하였다. 이미 민간에 폐를 끼쳤는데 또 동종에게 폐를 끼쳤으니 부끄럽기 그지 없다. 천동(천동)의 정 감역이 내가 이곳을 지나간다는 것을 듣고 그 7살된 아들을 데리고 찾아와서 만났다. 본동(本洞)의 동종 7,8인도 들어와 만났다. 작별하고 문을 나섰는데 날이 이미 저물었다. 마을사람들이 횃불을 들고 앞에서 안내하였다. 신촌(신촌) 앞 고개를 넘어 관아로 돌아왔다. 두 번째 鼓聲이 울리는 밤이었다.
 
 
 

9월 3일

 
10
이른 아침에 안개가 끼었는데 저녁에는 개였다.
 
11
덕치의 유학 변규호(변규호)가 편지하였는데, 종이 묶음과 닭을 선물로 보냈다. 감사하다고 답장하였다. 구고의 유학 김경규(김경규), 상운의 유학 정종면(정종면)이 찾아와 만났다. 읍편으로 완부(完府)에 머무는 관찰사에게 안부를 여쭈었다. 송촌 김령 및 감찰 김동현에게 편지를 부쳤다. 유학 이병원(이병원) 편에 순창 사또 박 령에게 편지를 부쳤다. 하운대동(하운대동) 도정 홍병일(洪秉一)가 편지하였는데 백청(白淸)과 홍시를 선물로 보냈다. 감사하다고 편지하였다. 도정 윤태일(윤태일), 종인 종헌(종헌), 유학 홍종면, 유학 한형리(한형리)가 찾아와 만났다. 밤이 깊어서야 돌아왔다. 종인 종원(종원)이 찾아와 만났다.
 
 
 

9월 4일

 
13
아침에 안개가 끼었다. 잠깐 개이더니 바로 흐려졌다. 종인 종원, 종헌, 유학 홍종성, 유학 한형리, 유학 최봉우가 작별하고 돌아갔다. 종인 홍근, 중엽(重燁), 유학 한병리가 찾아와 만났다. 서울집[京第] 노비[隸] 김창만(김창만)이 내려 왔다. 그래서 친구 심재숙(심재숙)의 편지를 보았다. 읍편으로 完府에 교제된 관찰사의 편지 및 송촌 김 령의 편지 2통과 ?????? 동석(東錫)의 편지가 도착하였다.
 
 
 

9월 5일

 
15
흐리고 구름으로 사방이 꽉 막혔다. 새벽부터 비가 부슬부슬 내렸다. 종일 개이지 않았다. 장의 이경우가 작별하고 돌아갔다.
 
 
 

9월 6일

 
17
이른 아침에 흐리더니 저녁에 비가 내렸다. 구고 청룡촌의 유학 임남수(임남수)가 편지하였는데 홍시를 선물로 보냈다. 감사하다고 답장하였다. 암포(巖浦)의 유학 김경규가 편지하였는데 汁醬과 물감[水柿]을 선물로 보냈다. 감사하다고 답장하였다. 하북 월은동 상사 백낙현(백낙현), 진안의 반송리(盤松里) 종인 주사 기수(奇洙), 옥전 중산리 유학 한홍석이 찾아와 만났다. 이인의 향원 김성희가 물감을 가지고 찾아와 만났다. 읍편으로 남원 사또에게 편지를 부쳤다. 하동 천동 감역 정기호가 편지하였는데 물감을 선물로 보냈다. 감사하다고 답장하였다. 신안의 한 진사가 서울에서 돌아와 편지하였는데 送公第
 
18
보내 편지 중에 있는 저동(저동) 판서 이유승의 편지, 태평동(태평동) 교리 이병옥의 편지, 창동 친척 진사 심헌경의 편지이다. 회답으로 한 상사에게 답장하였다. 듣자니 진안 사또 심능경(심능경)이 完府에서 저물 무렵 읍저(邑邸)에 이르렀다. 통인을 보내 致喝하였다. 이날 아침에 전주 진사 이종구가 찾아와 만났다.
 
 
 

9월 7일

 
20
새벽에 비가 내렸는데 아침에 잠시 개었다.
 
21
아침 일찍 나가 旅邸에서 진안 사또를 만나고 돌아왔다. 진안 사또가 따라와 들어가 보고 그와 더불어 함께 아침밥을 먹었다. 고별하고 돌아왔다. 이날 이 읍의 동종(同宗)이 구고 평지촌에 종회(宗會)를 設하였다. 乃命肩輿而往 날씨는 잠깐 개었다가 잠깐 비내려서 사람들이 걱정하였다.
 
22
신안의 사현점(사현점)에 이르러 비가 내려 옷이 젖었다. 점사에 들어가 잠시 쉬고 바로 길을 나서 구고의 동네 입구에 이르렀다. 여러 종족이 악공(樂工)을 시켜 와서 기다리고 있다가 앞에서 인도하였고, 여러 종족도 길가에 나와 맞이하였다. 그리고 나서 함께 종인 종헌의 집에 들어갔다. 얼마 있다가 비가 내려 쉬지 못하였다. 원근의 여러 종족 및 이성(異姓) 여러 유학들이 이곳에 많이 모였다. 비가 와서 자리를 마련할 수 없었다. 오후에 여러 종족이 술상을 내어와서 서로 권하며 술을 마시며 盡歡하였다. 드디어 유숙하였다.
 
 
 

9월 8일

 
24
이른 아침에 안개가 끼었는데 저녁에는 개었다.
 
25
밥을 먹고 악공을 시켜 앞을 인도하고 견여(肩輿)를 타고 정문(旌門) 앞을 나왔다. 그리고 여러 종족과 함께 정문(旌門)에서 봉심례(奉審禮)를 행하였다. 정문은 종형제인 성균관 생원 이름은 번(蕃), 호는 인덕정(人德亭)과 성균관 진사 훈(薰)의 정려(旌閭)이다. 둘다 효행으로 정려가 내려졌다. 우리 도의 유학들의 상소로 학정서원(鶴亭書院)에 배향되었다.<건재(健齋) 김천일(金千鎰)이 수령으로 창의(倡義)하고 순절하여 서원을 건립하였다.> 지금은 이미 훼철되었다. 마침내 문 앞에 자리를 마련하고, 여러 종족과 함께 읍례(揖禮)를 행하였다. 그리고 이 모임에 좌정하였다.
 
26
부여의 족숙(族叔) 홍석(홍석)이 거주하고 있다. 同宗의 문장(門長)은 신평(신평) 마항촌(마항촌)에 사는 영근(영근), 구고의 원동에 사는 배근(배근) ․ 형근(형근) ․ 성근(성근) ․ 한근(한근) ․ 혁근(혁근) ․ 종엽(종엽) ․ 위근(위근), 봉근(봉근), 동엽(동엽), 희엽(熙燁), 연근(연근), 장엽(장엽), 구고 평지에 사는 도유사(도유사) 민헌(민헌), 정호(정호), 정일(鼎鎰), 정태(정태), 정만(정만), 종헌(종헌), 경헌(경헌), 성헌(성헌), 인헌(인헌), 홍섭(홍섭), 대헌(대헌), 시헌(시헌), 근상(근상), 예헌(예헌), 의헌(의헌), 홍설(홍설), 판섭(판섭), 경득(경득), 일동(일동), 신평의 마항촌에 사는 기인(기인), 종원(종원), 상운 신촌에 사는 동국(동국), 용헌(용헌), 기헌(기헌), 연헌(연헌), 이인(이인) 내정리에 사는 자화(자화)< 시화(시화), 봉근(봉근), 성근(성근), 순근), 성엽(성엽), 순엽(순엽), 경엽(경엽), 일도(일도) 성가리(성가리)에 사는 문욱(문욱), 문상(문상), 규식(규식), 경식(경식), 양식(양식), 응식(응식), 만식(만식), 순식(순식), 동직(東直), 춘직(춘직), 경옥(경옥), 동호(동호), 용구(용구), 용규(용규), 용원(용원), 용민(용민), 용발(용발), 용연(용연), 용인(용인), 재일(재일), 동근(동근), 용태(용태), 용만(용만), 종흠(종흠), 영욱(영욱), 영훈(영훈), 용숙(용숙), 동진(동진), 용휴(용휴), 용두(용두), 순흥(순흥), 동수(동수), 묵조(묵조), 덕조(덕조), 만수(만수), 현수(현수), 용섭(용섭), 영조(영조), 창조(창조), 영준(영준), 장수 죽동에 사는 철흠(철음), 주흠(주흠), 채흠(채흠), 시흠(시흠), 영흠(영흠); 참군 재섭(재섭), 도사 재호(재호), 형호(형호), 철학(철학), 동대곡의 가멍동에 사는 용섭(용섭), 영득(영득), 신평의 지장동(지장동) 용순(용순), 용조(용조), 용준(용준), 신안의 玄谷昌下東城低 영수(영수), 진안 석전의 찬수(찬수), 남원 능곡의 용록(용록) 등 120명이다.
 
27
이성(異姓) 사람은 진사 한규성(한규성), 사인 한규혁(한규혁), 이동의(이동의), 진사 이병의(이병의), 참봉 이현의(이현의), 사인 한규태(한규태), 규엽(규엽), 이 경우(이 경우), 황화영(황화영), 최봉기(최봉기), 최헌익(최헌익), 이헌영(이헌영), 김화택(김화택), 한영석(한영석), 김경규(김경규), 한홍석(한홍석) 모두 16명이다.
 
28
악공에게 연주하라고 하였고 재인(才人)에게 줄타기[步索] 놀이하라고 하였다. 얼마 있다가 종중에서 술상을 내어 와서 술잔을 돌렸다. 각각 주량대로 마셨다. 술이 한창 무르익자 여러 종인들이 일어나 덩실덩실 춤을 추었다. 어떤 사람들은 노래 부르고 어떤 사람들은 웃었다.
 
29
이날 사람들이 담처럼 늘어서 구경하였는데 모두 欽羨底意 이것이 우리 종족의 一勝事也
 
30
종중에서 글씨를 잘 쓰는 사람에게 앞으로 나와 종이를 펴고 글을 쓰게 하였는데, ‘公退之暇 設花樹會于九皐’
 
31
그리고나서 정려에 봉심하고 이에 종약(宗約) 몇 조를 玆述하여 여러 종족에게 보여 주었다. 그 첫 번째는 “우리는 동조(同祖)의 후손이니 부모에게 효도하고 형과 우애하고 어른을 공경하고 친구에게 신의를 지키고 족척에게 화목하게 지내 異姓人으로 하여금 우리의 선조의 후손이라는 것을 묻지 않아도 알게 된다면 매우 다행이다.”이다. 두 번째는 “종족이 비록 대수(代數)가 멀고 가깝든지 선조가 보시기에는 모두 자손이다. 빈부현미(貧富顯微)에 차이가 있다고 해도 우리 종족에 만일 빈궁하여 지탱하기 어려운 사람, 민몰(泯沒)하여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사람이 接愚之際 조금 넉넉하거나 조금 현달하여 배경으로 삼지 않는다면 매우 다행이다.”이다.
 
32
세 번째는, 오직 우리 동종은 士者지만 농부는 농사짓고 상인은 장사하며{農者農 商者商} 불의한 이득을 도모하지 말고 과분한 일을 경영하지 말라.
 
33
네 번째는 산송(山訟) 및 선사(先事)는 의리(義理) 외에 관계되지만 사람과 더불어 서로 싸우거나 송사하지 말라.
 
34
다섯 번째는 우리 종족이 事上畏官 크게 頭腦하고 公納則無或後人 奉令則必於先人 幸甚
 
35
여섯 번째 우리 종족이 만일 悖子와 愚孫이 先訓을 포기하여 亂類의 이름을 범하면 父兄이 반드시 정신 차리도록 책임하고 종중에서 반드시 엄히 징려해야 한다. 만일 혹시라도 登訴而入廉하니 施律은 반드시 異姓보다 배로 할 것이며 따로 操束해야 한다.
 
36
이에 五韻을 拈出하여 그 뜻을 지어서 여러 종족들이 계속하여 續和하였다.
 
37
詩曰
 
38
오릉(五陵) 씨족(氏族)은 함양에서 시작되어
39
/ 先訓으로 昭垂하여 세덕(世德)이 길이길이//
 
40
大派同源尋誼密/
41
一門雙孝播名香//
42
初筵共把黃華酒
43
古院欣瞻鎬鶴裳
44
平近楣存花樹在
45
却看雲水是吾鄕 문득 운수를 바라보니 우리 고향이네.
 
 
46
드디어 모임을 마쳤다. 석양은 이미 산에 걸쳐 있었다.
 
47
견여(肩輿)를 타고 유학 한규태의 집에 들렀는데 한 유는 모임자리에 있어서 아직 돌아오지 않았다. 즉시 도로 나와 상사 한규성의 집에 들렀는데 상사가 술상을 내어 와서 다 먹고 다시 종인 종헌의 집에 들어가서 여러 종족들과 작별하였다.
 
48
사곡리(사곡리) 장의 이경우가 살고 있곳에 이르렀는데 그가 살고 있는 곳은 백련산(백련산) 아래로 그윽하고 깊은 뛰어나 절경으로 동네에 용추(龍湫)가 있는 그 깊이를 헤아릴 수가 없었다. 천석(泉石)이 매우 아름다워 진실로 산중의 별천지였다.
 
49
그 집에 들어가 진사 이병의, 유학 한규태가 따라 왔다. 이 장의가 술상을 내어 와서 그의 아들 홍의(鴻儀)를 불렀다. 어떤 사람{或人}과 함께 들어왔다. 때가 이미 昏黑이어서 돌아갈 시기가 매우 닥쳤다. 상운령촌(上雲嶺村)에 가려고 하는데 이 장의가 苦挽하여서 쫓아갈 수가 없었다. 고개 하나 넘어 고갯길이 험하였다. 마을 사람들이 횃불을 들고 앞에서 인도하였다. 無益之行에 공연히 민간에 폐를 끼쳤으니 관리된 사람이 과연 마음이 편하겠는가! 도마치(도마치)의 크고 작은 고개를 넘어 영촌(嶺村) 앞 가게에 이르렀는데 종인 종헌이 먼저 와서 기다리고 있었다. 영촌에서 횃불을 든 사람 십 수명을 보내 좌우에 나열해 있었다. 밝은 불빛이 휘황하여 밤빛이 그림 같았다. 이곳이 바로 태수(太守)의 위의(威儀)로구나. 還覺愧歎 드디어 참봉 이현의(이현의)의 집에 이르렀다. 밤이 이미 三鼓가 되었다. 참봉이 계단을 내려와 맞이하였다. 자리에 앉으니 술상을 내어왔다. 매우 풍성하게 준비하였다. 이어서 저녁밥을 내어 왔는데 亦一如之 매우 미안하였다. 이날 술을 마셔 너무 피곤하였다. 주인 從昆季과 함께 조용히 이야기를 나누었다. 밤이 깊어서야 잠들었다.
 
 
 

9월 9일

 
51
맑음. 이른 아침에 일어났다. 이 진사가 문을 나눠{分門} 살고 있어 보기를 청하여 갔다. 처음에 술상을 내어 오더니 이어서 아침밥을 내어왔는데 풍성하게 준비하였다. 아침밥을 먹은 후에 유학 이동의(이동의)가 보기를 요청하여 갔다. 술상을 내어 왔는데 풍성하게 준비하였다. 從昆季가 각 거처하는데 밝은 창에 정갈한 책상{明牕淨几}의 즐거움이 있는 곳이었다. 참봉의 두 아들 기진(起震), 其彧進士 강수(강수), 진사 병의(병의)의 아들 기옥(기옥), 兩彧 강조(康祖), 강훈(康勛), 동의(동의)의 아들 기상(起相)이 모두 豐朗豐滿하고, 그 행동거지에 법도있는 가문의 規模가 있으니 진실로 이번 세상에 복받은 가문[福門]이고 이 고을의 翹楚로 艶歎이 그치지 않았다.
 
52
本村의 유학 최헌익(최헌익), 사과 최용준(최용준), 유학 최봉우(최봉우), 유학 최우인(최우인)이 모두 찾아와 만났다. 날이 저물어서 장차 출발하려고 하는데 유학 최문중(崔門中)이 말하기를 자기 선세(先世)의 산정(山亭)이 동네 어구에 있는데 비록 작지만 아름다워 감상할 만하다고 해서 견여꾼에게 명령하여 갔다. 푸른 벼랑에 좁은 길{綠崖小徑}이 험준하여 窄於練 가마에서 내려 걸어서 산정 뒤에 이르렀다. 석벽(石壁)이 危滑 길을 뚫어 발디딜 곳을 만들었다. 攀崖而下 드디어 산정에 올랐다. 산정의 이름은 양악(兩樂)이었다. 인자는 산을 좋아하고 지자는 물을 좋아한다는 뜻에서 취한 것이다. 종전에 안사(按使)와 지현(知縣)이 현판을 걸어 둔 것이 이따금 있었다. 산정 아래 푸른 물이 휘감아 돌고 있었다.{碧灣爲滙} 깊이는 거룻배가 다닐 만하였다. 奇石森羅 늙은 나무가 扶疎하여 계산(溪山)의 경승이 이곳에서 盡萃하였다. 憑欄彷徨 최 문중에서 한 상 풍성하게 차려 내어 왔다. 여러 유학과 함께 서로 酬酌하여 잔뜩 취하여 돌아왔다. 上石壁渡淸澗 여러 유학들과 작별하였다. 가마 위에 앉아 장의 이 경우, 노유(老儒) 이동의, 진사 이병의, 종인 종헌이 뒤따라왔다. 학산(鶴山)에 이르러 오 진산의 집에 방문하였다. 오우가 나와 맞이하였다. 첫째 아들 진사 재두(재두) 셋째 아들 진사 재호(재호)가 들어와 만났다. 둘째 아들 주서 재승(재승)은 마침 전주에 있어서 違逢하였다. 濶屋爽塏 이 또한 大福家이다. 얼마 있다가 술상을 내어 오더니 이어 점심밥을 내어 왔는데 풍성하게 준비하였다. 今行到輒飽喫 왔다. 亦食數也 돌아서 출발하며 크게 웃었다. 드디어 고별하고 동네 어귀를 나오니 해가 이미 산에 걸려 있었다. 걸음이 신안도평점(新安島坪店)에 이르렀는데 횃불을 들고 오십치(五十峙)를 넘어 관아로 돌아왔다. 밤이 이고(二鼓)가 되었다.
 
 
 

9월 10일

 
54
맑음. 오늘은 일읍의 장보(章甫)가 명륜당에서 향음례를 시행하려고 하는데 나를 요청하여 가서 보았다. 해가 저물 무렵 교궁으로 나갔다. 여러 유학들이 유복(儒服)과 유관(儒冠)을 갖추고 나란히{濟濟} 모여 있었다. 노인 심필원(심필원)이 주인이고, 노인 한규혁(한규혁)은 손님회원[賓會員]이었고, 모두 100여 인이 모였다. 향음례를 마쳤다. 술상을 내어 왔다. 이때 진안 이중익(이중익)이 마침 와서 자리하였다. 어수선한 나머지 이렇게 고례(古禮)를 행하였다. 告朔之餼羊424)에도 해롭지 않고 성대하였구나. 관아로 돌아왔다. 석양이 산에 걸려 있다.
 
 
 

9월 11일

 
56
맑음. 오늘은 양사재(양사재)에서 유향회(유향회)를 충분히 의논하였기에 나도 갔다. 어제 모인 유학이 더러는 돌아갔고 더러는 남아있었다. 얼마 있다가 향중(鄕中)에 술상을 내어 왔다. 간략하게 읍사(읍사)에 대해 의논한 후에 관아로 돌아왔다. 상동의 도사 정혁조(정혁조)가 찾아와 만났다. 순창 사또의 답서가 전체(轉遞)로 도착하였다.
 
 
 

9월 12일

 
58
맑음. 아침 일찍 상이암(상이암)에 가는 길을 출발하여 단풍을 감상하지 못하였다. 진사 아이가 寃朞隔宵 悲懷를 너그럽게 억제하기 어려우니 有此行也 상동의 화수정(花樹亭) 앞에 이르렀다. 화수정은 이 마을 심씨[본관 풍산(풍산)]의 강당(강당)이다. 瀟灑하고 매우 아름다웠다. 유학 심지원(심지원), 진하(진하), 진용(진용)이 길가에서 기다리고 있다가 맞이하여 화수정에 들어갔다. 노인 심필원(심필원), 상중에 있는 심진표(심진표) 형제, 본동의 좌수 이종원(이종원)이 들어와 만났다. 이어서 유학 이동의, 장의 이 경우, 종인 종헌이 뒤따라 도착하였다. 沈門中에서 술상을 마련하여 내어 왔다. 얼마 있다가 출발하여 가정동(가정동)에 이르러 상중에 있는 정혁조(정혁조)의 집을 방문하여 지난 번에 방문[昨枉]에 감사하다는 뜻으로 . 유학 정기▨[혁조의 친척], 감역 정기호(정기호)가 자리에 있었다. 상중에 있는 정씨가 그 아들 수재(수재)를 시켜 들어와 만났다. 이어 술상을 내어와서 권하였다. 식사를 마쳤다. 출발하여 효촌의 윤 도정의 집에 이르렀다. 윤 령이 나와 맞이하였다. 인사를 나누기를 마치고 윤 령의 아들 병제(병제)가 나와 보았다. 유학 윤태근(윤태근)이 앉아 있었다. 윤 령이 술상을 내어 왔다. 이어 점심밥을 내어 왔는데 정결하게 준비하여 頓飽하였다. 도로 미안하였다. 밥을 다 먹었다. 드디어 여러 유학과 함께 길을 나서 수철리(수철리) 점사에 이르렀는데 산길이 위험하여 여러 유학이 점사에 留六足於店舍 걸어서 따라왔다.{步隨之} 나는 아직 견여에 앉아서 먼저 갔다. 심원사(심원사)에 이르렀다. 사찰 스님 상정(尙正)이 나와 기다리고 있었다. 그리고나서 꿀물[蜜水]과 홍시를 갖추어 내어 왔다. 상이암의 두 스님이 와서 기다렸다. 함께 길을 나서 영석등(嶺石磴)에 이르렀다. 艱險하여 한 계단 올라가니 또 한 계단이 보였다. 견여가 앞장 설 수 없어서 걸어서 절에 올라갔다. 동구에 이르렀는데 서너명의 늙은 스님이 나와서 기다리고 있었다. 들어가 선탑(禪榻)에 앉았다. 옷이 땀에 젖어 매우 피곤하였다.{困憊} 얼마 지나 윤 도정, 유학 윤태근, 유학 이동의, 장의 이 경우, 종인 종헌, 유학 심진용, 유학 이영우(이영우), 좌수 이종원(이종원)도 도착하였다. 날이 칠흑같이 저물었다. 드디어 유숙하였다.
 
 
 

9월 13일

 
60
이른 아침에 맑았는데 저녁에는 흐려졌다. 悲懷가 더욱 너그러워지기 어려웠다. 몇 명 유학과 함께 지팡이를 짚고 사찰의 서쪽 영산각(靈山閣)에 이르렀다. 16나한상을 보고 칠성각(칠성각) 산령당(산령당)을 두루 살펴보고 돌아왔다. 사찰의 舊蹟을 상고하였다. 옛날 고려 태조가 도선사(도선사)와 함께
 
61
攷옛
 
 
 

9월 14일

 
63
이른 아침에 안개가 끼어다가 저녁에는 개였다. 아침을 먹은 후에 돌아오려고 하는데 여러 유학들과 지팡이를 짚고 산을 내려가 여러 스님에게 고별하였다.
 
64
걸음이 어제 가마를 내린 곳에 이르러 다시 가마를 타고 심원사에 이르렀다. 잠시 머물었다가 바로 출발하였다. 수철리 점사에 이르러 잠시 쉬었다. 여러 유학들이 모두 도착하고나서야 출발하여 하동천동(하동천동) 뒤 골짜기에 이르렀는데 감역 정기호가 그 아들 수재와 함께 와서 길가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가마에서 내려 인사를 다 나누고 그들과 함께 그 집을 들어갔다. 상중에 있는 정혁조(정혁조), 성저(城底) 종인 영수(永洙)가 앉아 있었다. 얼마 있다가 정 감역이 술상을 내어 왔다. 이어서 점심밥을 내어 왔다. 매우 풍성하게 준비하여 배불리 먹었다. 후동에 사는 종인 재섭(재섭), 영섭(영섭)이 술과 음식을 가지고 들어와서 만났다. 또한 종인 홍진(홍진), 홍신(홍신)이 酒物床을 가지고 들어와 보았다.
 
65
이번 걸음이 민간에 폐를 끼쳤다. 동성과 이성 모두 매우 편안하기 어려운 곳이었다.
 
66
이에 가마를 돌려 굴암(굴암) 앞 다리에 이르러 완부(完府) 앞에서 호리(戶吏), 참봉 이용섭(이용섭)을 마침 지나가다가 내가 돌아온다는 것을 듣고 말에서 내려 기다리고 있었다. 가마에서 내려 몇 마디 나누고 헤어지고 관아로 돌아왔다. 해가 이미 서산에 잠겼다.
 
67
이날 읍편으로 상경하는 사람이 있어서 외부대신 김윤식, 탁지대신 어윤중에게 문안편지를 올렸다. 또한 대감 김유하(김유하), 영감 노영경(노영경), 영감 심재숙(심재숙)에게 문안편지를 하였다. 또 遞完使 및 김 고창에게 편지를 부쳤다. 또한 공제덕유(公第德裕)에게 패지를 부쳤다. 이 편지들은 초7일에 지어둔 것이었다.
 
 
 

9월 15일

 
69
이른 아침에 안개가 끼었다가 저녁에는 개였다. 아침 일찍 운수관에 가서 망하례를 행하였다. 그리고나서 교궁(校宮)에 가서 분향례를 행하였다. 지나다가 재실에 들러 장의 이 경우, 장의 최봉우, 색장 종인 종헌이 들어왔기에 만났다. 돌아와서 각방의 점고를 받았다. 남부(南府) 참서관의 답서 및 운봉 사또의 답서가 轉遞로 도착하였다. 대곡의 훈장 서준수(서준수)가 편지하였는데 3가지 물종을 선물로 보내서 감사하다고 답장하였다. 유학 이동의가 작별하고 돌아갔다. 종인 종원이 찾아왔기에 만났다.
 
 
 

9월 16일

 
71
이른 아침에 흐렸는데 진시(辰時)부터 가는 비가 내리더니 조용히 눈이 내렸다. 삼반의 관속이 파임(派任)425)하고 新式한 이후에 이서 모두 額減녹봉이 적었다. 효상(爻象)이 매우 좋지 않았다. 이에 所差窠 사분오열되었다. 그 급료를 균일하게 하여 제비뽑기를 하였는데 한바탕 劇戱하였다. 차임(差任)이 受帖하고 마치고 나서 명함을 받고 현신(現身)하였는데 삼반이 과연 원망하는 뜻이 있는지 없는지 모르겠다. 남부 관찰사의 답서 및 참서관의 편지가 우체(郵遞)로 도착하였다. 완서(完西)의 김 영감의 편지가 轉遞로 도착하였다. 이날 밤 짓눈깨비가 펄펄 내렸다.
 
 
 

9월 17일

 
73
이른 아침에 일어나 보니 문 밖에 쌓인 눈이 몇 마디 쯤 되었으니 변덕스러운 날씨이다.{乖候} 종인 종원이 그 친척 기환(기환)과 함꼐 찾아와 만났다. 윤 도정, 장의 이 경우, 유학 김사준(김사준)이 들어와 만났다. 면천의 관노 등길(等吉)이 이른 아침{趂早}에 도착하였다. 오늘은 내아의 생신[生朝]인데 그가 잊지 않고 委來한 것이니 그 성의가 가상하고 미쁘다.
 
74
그가 오는 편에 면동(면동)의 영장(令丈) 박재경의 편지, 도유사 심국경(심국경)의 편지, 초택(초택) 친구 이정하(이정하)의 편지, 좌수 조종우(조중우)의 편지가 도착하였다. 아전 박준상(박준상), 종환(종환), 한형(한형), 한정(한정), 명흠(명흠), 아전 유규항(유규항), 치헌(치훤), 치희(치희), 치갑(치갑), 응환(응환), 진벽(鎭璧), 진만(진만), 진풍(진풍), 아전 김정만(김정만), 통인 유인선(유인선), 장교 박창묵(박창묵), 박의근(박의근), 김수천(김수천), 사령 안원교(안원교), 수노 부성(부성), 포군 유경추(유경추), 정정길(정정길) 등의 고목도 함께 도착하였다. 상이암의 승려 선민(선민), 창섭(창섭), 두현(두현) 등이 산채(山菜) 一苞를 가지고 찾아와 문안하였다. 진안 이중익(이중익)이 편지하였는데 돌아가는 인편에 답장을 보냈다.
 
 
 

9월 18일

 
76
이른 아침에 흐렸는데 낮부터 부슬 비가 내렸다. 인편으로 운봉 사또에게 편지를 부쳤다. 또한 남부의 관찰사 어른께 문안편지를 올렸다. 또한 참서관 및 남원 사또에게 문안 편지를 부쳤다. 또한 부저리(府邸吏) 강태진(강태진)에게 답패(答牌)를 부쳤다. 듣자니 전주부 관찰사 영감 조민희(조민희)가 莅已有日 轉遞로 문안편지를 부쳤다. 윤 도정과 장의 이경우가 들어와 만났다. 감찰 조홍종(조홍종)이 찾아와 만났다.
 
 
 

9월 19일

 
78
이른 아침에 맑았는데 저녁에는 흐리고 비가 내렸다. 저녁밥을 먹고 난 후에 개였다. 하북의 향원 이재욱(이재욱), 금산동 의원 김윤언(金允彦)이 찾아와 만났다. 조 감찰이 읍에 머무르다가 돌아가지 않고 들어왔기에 만났다.
 
 
 

9월 20일

 
80
맑음. 윤 도정이 들어와 만났다. 유학 전경규(전경규), 유학 이재옥(이재옥), 하동의 유학 최정(최정), 유학 이봉숙(이봉숙), 유학 나한두(나한두)가 찾아와 만났다.
 
 
 

9월 21일

 
82
맑음. 조 감찰이 작별하고 돌아갔다. 하북의 진사 백영수, 유학 변규호(변규호)가 찾아와 만났다. 상동의 유학 최증(최증)이 홍시 100개를 가지고 찾아와 만났다. 옥전 중산의 유학 한홍석(한홍석)이 편지하면서 물감[水柿] 200개를 선물로 보내 감사하다고 답장하였다. 면천의 등길이 작별하고 돌아갔는데 그 편에 교리 한흥교(한흥교), 도유사 심국경, 노인 이사문(이사문), 좌수 조종우에게 편지를 부쳤다. 또한 아전 박준상, 종환, 한형, 한정, 명흠, 아전 유규항, 치헌, 치갑, 진벽, 진풍, 진만, 흥환, 아전 김정만, 통인 유인선, 장교 박창묵, 박의근, 김수천, 사령 안원교, 수노 부성, 포군 유경추, 정정길 등에게 답패(答牌)를 부쳤다.
 
 
 

9월 22일

 
84
이른 아침에 안개가 끼었는데 저녁에는 개였다. 상동의 삼봉 진사 최홍석, 유학 노병석(노병석), 신평의 두류봉(두류봉)의 李生▨▨[용섭의 아들] 유학 임남수(임남수)가 찾아와 만났다. 윤 도정이 작별하고 돌아갔다.
 
 
 

9월 23일

 
86
이른 아침에 흐렸다가 저녁에 개였다. 유학 노병석이 또 찾아와 만났다. 남원 사또, 운봉 사또의 답함이 轉遞로 도착하였다.
 
 
 

9월 24일

 
88
맑음.
 
89
남부(南府) 관찰사의 답함이 郵遞로 도착하였다. 진사 최홍석, 진사 백영수, 진안 이중익이 찾아와 만났다. 읍내 강장(講長) 유학 서상용(서상용)이 들어와 만났다. 유학 이재옥이 편지하였는데 천어(川魚)를 선물하여 감사하다고 답장하였다. 영감 강경희(강경희)의 편지가 남원 둔덕리 인편으로 도착하였다.
 
 
 

9월 25일

 
91
이른 아침에 흐렸는데 저녁에는 개였다. 금동(琴洞)의 유학 한학교(한학교)가 편지하였는데 百柿를 선물하여 감사하다고 답장하였다. 유학 한형리(한형리), 장의 이 경우, 유학 유관환(유관환)이 찾아와 만났다. 남원 사또의 편지가 轉遞로 도착하였다. 이 진안이 작별하고 돌아갔다. 郵遞로 남부 관찰사에게 문안편지를 올렸다.
 
 
 

9월 26일

 
93
맑음. 읍편으로 완서 송촌 김 령, 유학 김사준, 상동의 유학 박창국, 남원 영천동의 종인 영근, 대리의 종인 종원이 찾아와 만났다. 장의 이경우가 작별하고 돌아갔다. 감역 정기호가 찾아와 만났다. 진안에 간다고 하기에 그 편에 진안 사또에게 편지를 부쳤다.
 
 
 

9월 27일

 
95
맑음. 읍예(邑隸)가 상경하는 편에 탁지대신에게 문안편지를 올렸다. 또한 전동(전동)의 유하(유하) 김 령, 저동 台丈 이유승(李裕承), 단구(丹邱) 대감 김춘희(김춘희), 회동 대감 조종필(조종필), 영감 강경희(강경희), 영감 정인섭(정인섭), 친척 상사 심헌경(심헌경), 영감 심재숙(심재숙), 세마 김규동(김규동), 초계 이민승(이민승)에게 문안편지를 부쳤다. 또한 익아(翼兒)에게 편지를 부쳤다. 公第德裕에게 패지를 부쳤다. 巳刻부터 음산해지더니 오후에 微雪이 땅을 덮었다. 신평면의 도곡 참봉 김성철(김성철)이 그 손자 진사 교성(敎誠)과 함께 찾아와 만났다. 이날 밤 바람이 차갑고 갑자기 매서워졌다.
 
 
 

9월 28일

 
97
이른 아침에 바람의 세기가 늦춰지지 않더니 저녁 후에 좀 나아졌다. 유학 한형리, 유학 홍종성이 찾아와 만났다.
 
 
 

9월 29일

 
99
맑음. 유학 이재옥, 유학 노병석이 찾아와 만났다. 轉遞로 송촌 김 령의 답함이 도착하였는데 겸하여 紫帶 1건을 보내 주셨다. 감사하고 감사하다. 홍태산(洪太山)이 면천에서 찾아와 문안하였다. 因傳 유학 오복선(오복선)의 편지, 친척 김동좌(김동좌)의 편지, 노인 이사문(이사문)의 편지, 친구 이종대(이종대)의 편지, 오인화(오인화)의 편지 및 아전 박준상(박준상), 영진, 아전 유치헌, 아전 박한형(박한형), 조치근(조치근)의 고목(告目)을 전하였다.
 
 
 

9월 30일

 
101
맑음. 금동 종인 홍근이 편지하였는데 一升淸을 선물하였기에 감사하다고 답장하였다. 윤 도정, 장의 이경우, 유학 홍종성, 종인 종헌, 유학 최증(崔增), 유학 신백균(申伯均)이 편지하였는데 二鐥酒, 생선 한 마리를 선물하였는데 아직 답장하지 못하였다.
 
 

 
102
* 각주
 
103
424) 告朔은 천자의 사자가 제후에게 정월 초하루를 알림이다. 告朔之餼羊의 유래는 이렇다. 매년 음력 12월 천자가 다음 해의 정월 초하루를 알려주고 冊曆(책력·달력)을 제후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제후들은 이를 선조의 종묘에 보관했다 매달 초하루(朔)에 양을 희생(犧牲)으로 바치고 종묘에 고한 후 그 달의 冊曆을 시행하던 일을 가리켰다. 노나라 文公(문공) 때는 형식적으로 양만 바치던 습관이 남게 되었다. 지금은 형식뿐인 예라도 없애는 것보다는 낫다는 의미와 형식만 남은 虛禮虛飾(허례허식)이라는 두 가지 의미로 쓰인다. 餼羊은 제사때 쓰는 犧牲이라는 설과 손님을 접대하는 음식이라는 두 가지설이 있다
104
425) 뜻[역사] 조선 시대, 지방 관아에서 해마다 한 번씩 육방(六房)의 구실아치들을 교체하던 일 더보기
【원문】을미년(1895)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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