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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시순(朴始淳) 일기(日記) - 운불일기(雲紱日記) ◈
◇ 정유년(1897) 3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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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시순(朴始淳)
- 임실문화원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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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정유년(丁酉年, 1897) 3월
 
 
 

3월 1일

 
3
庚寅 비가 하루 종일 개지 않았다. 답장을 쓰고 진안 수령 및 참봉 이씨에게 보냈다. 선비 전경규가 행정에서 비를 맞아 돌아와서 만났다.
 
 
 

3월 2일

 
5
맑아졌다. 생원 윤광오에게 편지를 보냈다. 식사하고 나서 하동 계월리(桂月里)러 간산을 갔다. 성저 종인 영수의 집에 이르러 영수 부자 형제 들이 나와서 마중하였다. 술을 오리고 마신 다음에 계월리 송씨산에 이르러 국세를 보고 산에 내려왔다. 본동 선비 이〇〇가 나와서 그의 집에 가게 하여 술을 마시고 성저 종인 집에 돌아가서 점심에 들밥을 먹었다. 가난한 종인에게 폐를 끼쳐서 도한 답답하였다. 친구 권양수의 전서가 있고 답장해서 보냈다. 상동 행정 진사 이건호의 집에 역방하였다. 이잔사는 완부에서 여기에 거주한 사람이며 그의 범절을 잘 알고 있으니까 가서 그를 만났다. 그의 집에 들어가서 이진사 부자가 나와서 마중하였다. 안부를 얘기하였다. 친구 심진하가 때마침 있으니 그와 얘기하였고 얼마 안돼서 주인이 술과 안주를 올리고 극히 풍성해서 심히 불안하였다. 그 때에 날이 이미 저물었다. 이어서 관아에 돌아가서 시간은 일경(一更)이 되었다. 전동 김씨의 편지가 와서 2월 24일에 나간 것이었다. 남원 오산 친척 권을규가 같은 군의 김택주(金宅周)와 함께 와서 머물렀다.
 
 
 

3월 3일

 
7
아침에 맑았다. 식사 직전에 상북으로 봉강(捧講)하러 갔다. 도마교(道馬橋)에 이르러 내촌에 산당(山堂)이 있으니 화성리(花城里) 이씨의 묘각이었다. 새로 지었으니 맑고 깨끗하며 좁지만 또한 좋다. 이날에 상북, 하북, 신평 3개 면이 회강하였다. 상북 강장(講長) 이봉리、훈장 이재옥, 하북 강장 이재욱、훈장 나한두, 신평 강장 종인 형근、훈장 한봉리, 참봉 김성돈(金星潡), 사수 김석희, 늙은 선비 이현진(李顯眞), 선비 이존경, 선비 이규선(李圭善) 및 3개 면의 여러 유생들이 많이 왔다. 어른과 아이 거의 300명이 세 끼에 음식을 올리고 온힘을 다한다고 말할 수 있으나 태수가 앉아서 이를 받은 마음이 과연 편안할까? 도정 홍병일이 찾아와서 바로 작별하여 갔다. 신시에 회강이 끝나고 하늘에 그름이 흐리고 비가 떨어졌다. 이어서 관아에 돌아갔다. 족제 용순이 순창에서 찾아와서 직지장의 편지를 수전하였고 여기서 머물렀다. 윤광오의 답장이 왔다. 종인 종헌, 선비 한병리, 선비 홍종성(洪鍾晟)이 찾아왔다. 강진 사과 이규채의 답장이 왔다.
 
 
 

3월 4일

 
9
맑았다. 직지장에게 답장을 보냈다. 함양 사금동 선산의 일로 호남 각 군 동족 문종에게 편지를 보냈다. 또 창평 절산(節山) 종인 장오(章五)⦗휴덕(休德)⦘에게 편지를 보냈다. 영광 조호(棗湖) 족숙 민석(敏錫), 능주(綾州) 한천(寒泉) 종인 동현(東鉉), 영암 구림(鳩林) 종인 노상(魯相), 장재동(長才洞) 종인 정두, 소년 최오(崔墺), 선비 송진구 등이 찾아왔다. 성저 종인 영수를 각 군 종중에게 보냈다.
 
 
 

3월 5일

 
11
아침에 흐리고 저녁에 맑아졌다. 도사 정혁조(鄭赫朝), 선비 이존경 · 규선, 남원 선비 최광기(崔光蘷), 남면 선비 김문수(金雯秀), 강진 선비 이종호(李鍾湖), 의원 장성범(張聖範) 등이 찾아왔다. 완부 김세종(金世鍾)이 감찰 정씨의 편지를 가지고 들어와 만났다. 답장해서 보냈다. 임천(林川) 선비 권〇〇 찾아왔다. 문사일이 서울에서 돌아왔다. 수교대신 조병세(趙秉世), 판서 이재완(李載完), 김종한의 아들 세마 김규동(金奎東), 참판 김정규(金鼎圭), 승지 김병수(金炳秀)、이재곤(李載崑)、정인섭, 진사 심헌경, 주사 이용필, 비서 홍정희, 국자장 서상봉의 답장 등이 왔다. 충주 족숙 홍석이 때마침 서울에 올라가서 편지를 부탁하였다. 오산 친척 권을규가 전편으로 인하여 편지가 왔다.
 
 
 

3월 6일

 
13
아침에 안개가 일어나고 저녁에 개었다. 아침에 옥전 봉강(捧講)에 가게 하였다. 신안 장재동에 이르러 종인 정두의 집을 방문하여 (그는) 경년의 뜻이 있었다. 그의 집에 글어가 종인 정두가 나와 기다리고 만났다. 술과 안주를 올렸다. 때마침 신평 종인 형근, 구례 종인 형원이 재석해서 이 종인들이 들어와서 만났으니 그들과 수작하고 나서 옥전 석두동에 이르러 전씨 산각에 들어갔다. 마루의 기둥이 좀 넓고 또한 맑고 깨끗하였다. 서면 도강장 진산 이병의, 옥전 훈장 홍종연, 향원 홍종성, 강장 겸대(兼帶) 구고 훈장 한규혁, 강장 한규엽(韓圭燁), 강진 훈장 정학수, 향원 정진수, 강장 이병익, 덕치 강장 이종학, 신안 훈장 한학교, 향원 한형리 및 진사 홍한섭, 도훈장 이동의, 참봉 이현의, 선비 홍종국、변규호、정인구、유재수, 노인 전국현, 선비 전경댁 · 전신댁, 종인 종헌 등이 모두 와서 만났으니 나머지를 다 기재하지 못하였다. 전씨 문종, 색장 한홍석, 옥전면 사람, 발산동(鉢山洞) 사람이 술과 안주 각 한 상을 올렸으니 관에서부터 혜택을 입어서 따로 설치하는 것이었다. 이날에 다섯 면이 합해서 강학하여 강생들이 4백여 명이었다. 강학이 아직 안 끝나는데 나는 부체(扶滯)를 고통스럽게 여겨 날이 저물지 많아 수습해서 눕고 힘들게 소리 냈다. 불쌍하고 답답했다.
 
 
 

3월 7일

 
15
흐렸다. 강제로 병을 무릅쓰고 일어나서 세수하였다. 끝나지 못한 강학을 봉하여 비교생 97명을 취하여 상지(賞紙)를 나눈 뒤 회빈들과 술이 몇 순배 돌고 이때 정오였고 구고 종인 종헌 집에 이르러 종인이 주효(酒肴)를 올렸다. 마시고 나서 길을 떠났다. 그때에 구름이 흐리고 비가 떨어졌다. 비를 무릅쓰고 선거리에 이르러 종인 동근 · 배근, 상인 오석도가 나와 기다렸다. 동근 종가에 들어가 먼저 술과 안주를 올리고 다음에 점심을 올렸다. 먹어나서 비가 주룩주룩 내렸으나 묵었다. 이날 밤에 또한 몸이 좋지 않고 잠을 제대로 못 잤다. 정말로 답답하였다.
 
 
 

3월 8일

 
17
맑아졌다. 식사 후에 영촌으로 길을 떠나 참봉 이씨 집에 들어갔다. 참봉 조손과 여러 숙질 등이 나와서 기다렸다. 인사를 마치고 술과 안주를 올린 뒤 밥상도 올려 먹어나서 이낙정(而樂亭)에 나왔다. 상운 훈장 최봉기, 향원 최헌익, 강장 경대 상신덕 훈장 김재환, 하신덕 강장 신학균, 선비 신영균, 종인 정국 · 정득, 선비 나동환、최봉길 등이 모두 와서 만났으니 나머지를 다 기재하지 못하였다. 최씨 문종이 술과 안주를 올렸다. 이날에 세 면 봉강하였다. 어른과 아이 및 강학 받는 사람이 130여명이었다. 강학이 끝나지 않고 날이 거의 저물었으니 정자에서 내려 왔다. 구석동 앞길에서 걸어서 숙소에 돌아와 묵었다. 이날 밤에 또 체수(滯祟)를 고통스럽게 여기고 진원(眞元)이 많이 빠졌으니 정말로 답답해였다.
 
 
 

3월 9일

 
19
맑았다. 일찍 일어나고 아직 졸렸다. 이진사한테 요청을 받고 그의 집에 갔다. 먼저 술과 안주를 먹고 다음에 아침을 먹었다. 식사 끝나고 다시 이참봉의 집에 돌아가 끝나지 못한 강학을 계속해 비교생을 51명을 뽑고 상지를 나눴다. 지인이 또 술과 안주 한상을 올기고 번번이 주인에게 폐를 끼쳐서 어지 마음이 편안할 것인가? 이어서 이도훈의 집에 들어가 또 술과 안주 한 상이 올려 여러 빈객들과 술을 마시고 나서 학산으로 길을 떠나 오진산의 집에 들어갔다. 진산이 나를 하당영지하였으니 주서 오재승(吳在升), 진사 재호가 찾아왔다. 먼저 술과 안주를 올려 이어 점심을 올렸다. 신출 석어를 먹었으니 완시(完市)에서 나온 것이었다. 오진산이랑 다소 얘기하고 고별하여 신안 도평에 이르러 참봉 한경리, 선비 한학교 · 형리 · 병리 · 동석(東碩) 등이 나와 기다리고 점사(店舍)에 들어가게 하였다. 술과 안주를 올려 먹어나서 작별하였다. 오십치(五十峙)에 이르러 횃불을 가지고 관아에 돌아갔다. 부여 족숙 홍석이 돌아왔다. 구례 종인 또한 와서 묵었다. 전동 김대의 편지, 금부(錦府) 관찰사의 답서, 간동 박령의 답서, 포천 진사 조제균의 답서, 종인 경환의 답서, 친척 진사 심헌경의 답서 온지 며칠이 되었다. 이것이 남원 선비 이만기가 서울에서 돌아와 전달한 것이었다. 만나지 못하고 돌아갔다. 아들 익과 여산 수령의 편지를 봤으니 부여 족숙이 가져온 것이었다. 아들 익의 편지가 한번 선거리 김종택의 편으로 왔으니 그것은 2월 23일 나간 것이었다. 읍교에서 돌아와 직지 어른신의 편지도 왔다. 읍편으로 인해 관찰사의 답장, 송촌 김령의 답당, 윤광오의 편지도 왔다. 윤도정, 홍종성, 이종학이 와서 만났다.
 
 
 

3월 10일

 
21
맑았다. 참봉 이현의, 진사 이병의, 도훈장 이동의, 최봉기 · 봉우, 오중영(吳重英), 나동환, 이재옥, 이영우. 이 경우. 한학교 · 형리, 한흥교, 윤태근 · 태일, 김문수, 송진구 · 진수, 정진수, 조병용 등이 와서 만났다.
 
 
 

3월 11일

 
23
맑았다. 이날에 사마재 계회가 있었으니 사마재에세 술과 안주룰 올렸다. 종인 명헌, 선비 심진하가 와서 만났다. 읍의 편으로 인해 완주 목사에게 안부 편지를 보냈다. 또 송촌 김수령에게 편지를 보냈다. 윤광오는 읍의 일로 장차 해사리를 암행어사가 있는 곳에 보냈으니 편지를 쓰고 그에게 부탁하였다. 주서 오재승이 와서 만났으니 그 아버지의 편지를 수전하였고 오선료(五仙醪) 한 병을 줘서 이를 답사(答謝)하였다.
 
 
 

3월 12일

 
25
맑았다. 아침에 상동 봉강에 가게 되었다. 가정재(可貞齋)에 가니 이 재실은 윤씨와 심씨 두 성씨 수계하기 위해 만든 것이고 또 면회 향약소였다. 이날에 동쪽 6개면이 회강하였다. 면 훈장 겸대 훈장 윤태윤, 하동 강장 송진수, 남면 강장 김사국, 일도 강장 노학규, 대곡 훈장 서준수, 이인 강장의 아들 곽○○, 재장 윤태근, 진사 백영수、양재연、최홍석, 선비 최성두、최정(崔綎), 감역 정기호, 선비 이영우、강민형、심지원 · 진하(鎭廈) · 진하(鎭夏) · 진룡 · 진표(鎭杓) 등이 모두 와서 만났다. 나머지를 다 기재하지 못하였다. 면내에서 술과 안주 한 상을 올리고 정감역이 술과 안주를 한 상을 올리고 백진사가 술과 안주를 한 상을 올렸다. 이날에 온 강생들은 어른과 아이가 모두 400 여명이 있었다. 강학이 아직 안 끝났는데 날이 저물었다. 그래서 강학을 끝냈다. 저녁부터 구름이 흘렸고 비가 왔다.
 
 
 

3월 13일

 
27
비가 하루 종일 개지 않았다. 하천과 도랑이 다 넘쳤다. 삼과 보리를 생각하면 가히 답답하였다. 비 때문에 강생들이 만나지 못하였고 여러 빈객들이 역시 비에 막혀서 체류하고 돌아가지 못하였다. 비가 죽죽 와서 답답함을 참을 수 없었으니 마을 주파를 불러 여러 빈객들과 술을 마셨다. 주량에 따라 이야기꽃을 피웠고 유회를 마음껏 이야기하기에 족하였다. 저녁 식사는 선비 심진표의 집에서 나왔다. 나는 속이 막혀서 괴로웠다. 정말 답답하였다. 병암 선달 김경헌의 편지가 있으니 지축(紙軸)을 보냈다. 답장을 쓰고 이를 감사하였다.
 
 
 

3월 14일

 
29
아침에 비가 있으나 사시(巳時)에 조금 갰다. 강생들도 역시 모아서 강학을 행하였고 비교생 150명을 취하였다. 읍의 문안사가 왔다. 탄운의 편지를 보고 수직이 무사하다고 한 것을 알고 가히 다행이었다. 순창 수령의 답장이 왔다. 신시(申時) 이후에 여러 빈객들과 작별하였고 관아에 돌아갔는데 날이 저물었다. 선비 김태식이 와서 만났다. 색장 이종학이 들어와서 만났다.
 
 
 

3월 15일

 
31
맑았다. 아침에 운수관에 가서 망배례를 행하였고 원래대로 가서 곡위를 보고 절을 하였다. 이어 향교에 가서 봉심례를 행하였고 두루 재실을 들어간 후에 돌아갔다. 각방을 전례대로 점고하고 권정을 행하였다. 완주목사와 송촌 김수령의 답장이 왔다. 구례 종인 형원이 작별하여 갔다. 족제 사과 용순이 작별하고 인접한 지역에 갔다. 참봉 종형제 이현의와 선비 최봉기가 상동에서 와서 만나고 인편으로 오진산에게의 편지를 부탁하였다,
 
 
 

3월 16일

 
33
아침에 맑고 저녁에 흐렸다. 참봉 한경리, 선비 한학교, 선비 홍종성, 도정 오석우, 선비 서준수 등이 찾아왔다. 주서 오재승의 편지가 왔다. 남원 선비 이면호가 찾아왔다.
 
 
 

3월 17일

 
35
맑았다. 송촌 김수령의 편지가 전편으로 인해 왔으니 12일에 나온 것이었다. 진안 수령의 편지가 편으로 인해 왔다. 화호에 머무르고 있는 고희상은 방문하러 오고 유숙하였다.
 
 
 

3월 18일

 
37
맑았다. 친구 홍종국, 선비 이재욱 찾아왔다. 고희상은 작별하여 떠났다. 보성(寶城) 미륵면(彌勒面) 초당(草塘)에 거주한 종인 기영(基映)이 찾아와서 유숙하였다. 편에 따라 완주부에게 편지를 보냈다. 신흥 감찰 김동현, 상이암(上耳庵)에 있는 사과 족제 등의 편지가 있으니 답장하고 보냈다.
 
 
 

3월 19일

 
39
맑았다. 윤 도정, 진사 이병의, 참봉 이현의, 도훈 이동의 등이 찾아왔다. 창평 절산 종인 휴덕, 월전 종인 민호(玟鎬)가 찾아오고 죽물(竹物)401)과 죽력(竹瀝)402)을 줘서 감동하였다. 유숙하였다. 선비 홍종성, 사과 이규채가 찾아왔다. 읍리의 답장과 직지장의 답장도 왔다.
 
 
 

3월 20일

 
41
새벽부터 비가 떨어졌는데 평명 후에 주룩주룩 내려졌다. 점심때에 조금 갰다. 이날은 비교생 고예(考藝)하는 날이었다. 문소루(聞韶樓)에서 자리를 마련하여 도강장 윤 도정, 이 진사, 상동 훈장 윤태윤, 하동 강장 송진수, 남면 강장 김사국, 상북 강장 이봉숙, 신평 강장 종인 형근, 하신덕 강장 신학균, 상운 훈장 최봉기, 하운 강장 홍종기, 강진 강장 이병익, 덕치 강장 이종학, 구고 강장 한규엽, 옥전 강장 홍종성, 일도 강장 노학규, 신안 강장 오병일 및 향유림 등이 차례로 벌이어 앉았다. 강생들이 차례 들어와서 강학하였다. 점심 요기는 향중에서 공급되었다. 날이 저물었을 때에 이르러 강학을 끝냈다.
 
 
 

3월 21일

 
43
맑았다. 아침부터 문소루에서 강학을 시작하였다. 강생들의 점심 요기가 내아에서 공급되었다. 저녁에 이르러 강학이 끝났다. 1등은 125명, 2등은 129명, 3등은 77명이 있다. 함창 수령 족대부 연덕(淵德)씨가 전편으로 인해 책을 보내고 함께 중간 동몽선습(童蒙先習) 2권도 보냈으니 은혜를 입게 느꼈다. 광주 수춘촌 종인 주언(柱彦) · 기준(基俊)이 찾아오고 니촌(泥村) 종인 한풍(漢豊)의 편지를 수전하였으니 유숙하였다. 진안 수령에게 답장을 보냈다. 남원 노단(魯壇) 장안택(張安澤)의 편지가 있고 답장해서 보냈다.
 
 
 

3월 22일

 
45
맑았다. 아침 식사한 뒤 강생과 동생을 이끌어 향교에 갔다. 각 면 강장은 각 면의 강생을 이끌어 차례로 동헌에서 향교에 갔다. 행렬은 기러기의 이발하고 물고기의 비늘처럼 정말로 훌륭한 광경이었다. 명륜당에서 자리를 마련하고 여러 선비와 강생들과 배읍례(拜揖禮)를 행하였고 자리 잡아 앉아서 차례로 이름을 부르고 상지(賞紙)를 나눴다. 이를 마친 뒤 향교에서 주물상을 올리고 여러 빈객들이 한창 흥겹게 술을 마시고 나서 자리에 떠나 관아에 돌아갔다. 완주 동덕천(東德川) 김동석(金東錫)의 편지가 편으로 인해 왔고 답장해서 보냈다. 완주부 류 주사(主事)의 편지가 와서 답장해서 보냈다. 창평 두 종인이 작별하고 떠났다. 오산 친구 권양수와 사동 선비 김응술이 함께 찾아왔다.
 
 
 

3월 23일

 
47
새벽부터 비가 주룩주룩 내렸는데 하루 종일 개지 않았다. 봄비가 빈번하였다. 보리농사를 생각하면 가히 답답하였다. 창만(昌萬)이 임제(林第)에서 돌아왔다. 아들 익의 편지를 보고 집안에 별다른 일이 없어서 가히 다행스러웠다. 우산 이 친구의 편지가 있었다. 면천 서리 유치헌(兪致憲), 안원교(安元交) · 이등길(李等吉) · 유인선(兪仁善) · 김종각(金鐘覺) · 박경춘(朴慶春) 등의 고목이 있었다. 어르신 이사문의 답장도 왔다.
 
 
 

3월 24일

 
49
아침에 흐렸다가 비가 주룩주룩 내렸다. 저녁에 갤 듯하다. 광주 종인 두 명이 작별하고 돌아갔다. 이로 인해 광주 수령에게의 편지를 부탁하였다. 또 니촌의 종인에게 감사의 편지도 부탁하였고 절산의 종인 장오와 광주에 머무르고 있는 선비 홍배유에게 몇 글자를 부탁하였다. 오산 권 친구가 돌아가기 때문에 나주 미천(眉川) 간소유사(刊所有司)에게의 편지를 부탁하였고 예부전(禮扶錢)도 보냈다. 청양 족숙 ○진(○鎭)이 찾아와서 유숙하였다.
 
 
 

3월 25일

 
51
아침에 안개가 끼고 저녁에 개어졌다. 참봉 이제성의 편지가 있고 답장해서 보냈다. 선비 홍배유가 광주부에서 돌아오고 찾아왔다. 심진하, 최○정(崔○綎)이 찾아왔다. 종인 영수가 구례 하동에서 돌아오고 찾아왔다.
 
 
 

3월 26일

 
53
날씨가 자주 흐렸다. 족제 사과가 작별하고 돌아갔으니 직지장에게의 안부편지와 참봉 구중식에게의 감사편지를 부탁하였다. 부여 염호(濂湖) 족숙 응석(應錫)이 찾아와서 아들 익의 편지를 보왔다. 염호 족숙 윤석(允錫)의 편지와 우산 친구 이행익(李行翼)의 편지도 왔다. 종인 용근 · 종원이 서울에서 돌아왔으니 박 찬정, 정양판부사(定陽判府事) 정범조, 참판 김학수, 승지 박세환, 승지 정인섭, 세마 김규동, 참서 정준시, 참서 김중환, 참서 윤경규, 참서 한진창, 진산 심헌경, 종인 오위장 윤현, 종인 경환의 답장을 가져왔다. 선비 전경규의 편지가 있고 사속(紗屬)403)을 보냈다. 감사의 답장을 해서 보냈다. 편으로 인해 완주부사에게 안부편지를 보냈다. 또 생원 윤광오에게 편지를 보냈다. 오진산의 편지가 있고 답장해서 보냈다. 선비 한봉리가 찾아왔다.
 
 
 

3월 27일

 
55
맑았다. 법부에게 올린 함양 시조산(始祖山) 산송의 지령이 진주부로 부낸 일로 병방 만직(萬直)을 보냈다. 또 한양 수령 두진(斗鎭)〔문광(文廣)으로 바꿈〕에게 부절을 보냈다. 부여 족숙 홍석(弘錫) · 응석(應錫), 청양 족숙 ○진, 운봉 종인 용근 등이 작별하고 돌아갔다. 아들 익에게 편지를 보냈다. 염호 족숙 윤석 · 우산 이 친구에게 감사의 편지를 보냈다. 족제 사과, 김제 종인 병호에게 편지를 보냈다. 여산 수령과 화호에 머무르고 있는 고희상에게 편지를 보냈다. 이를 완주 주인 정 감찰의 편지에서 같이 봉하였고 그로 하여금 보내라고 하였다. 선비 홍배유가 박별하고 돌아갔으니 홍원 종인 도정 인화와 도정 임광수에게의 편지를 부탁하였다. 읍리가 완부에서 돌아온 편으로 인해 완주부사의 답서와 여산수령의 편지가 왔다. 생원 윤광오의 답장도 왔다. 선비 전경규의 편지가 있으니 목두채(木頭菜) 하나를 보냈다. 이를 감사하였다. 윤광오가 또 찾아오고 유숙하였다.
 
 
 

3월 28일

 
57
맑았다. 아침에 함양 성묘하러 떠났다. 점심에 오수역점에 이르러 식사하고 말에 먹이를 먹였다. 남원 사인 이교만(李敎萬)이 마침 여기 지나다가 찾아오고 같이 술을 마셨다. 이어 남원읍 남문 밖의 여관에 이르러 이 군의 병교 이홍우(李洪宇)가 찾아오고 술과 안주를 올리고 마신 뒤 구고 종인 종헌이 따라와서 유숙하였다.
 
 
 

3월 29일

 
59
맑았다. 아침은 이호우 집에서 나오고 극히 성대새서 불안하게 여겼다. 식사한 후 길을 떠났다. 운봉 여원점에 이르러 박 주서가 아들을 보내 길의 좌측에 기다리게 하였다. 읍저에 들어가 박행조(朴行朝)가 기다리고 있었다. 박 주서의 집에 들어가 주서가 나와 맞이하였다. 앉아서 이야기를 한 뒤 감찰 박홍조(朴洪朝)가 찾아왔다. 잠시 이 읍의 수령 문창석(文昌錫)이 나왔다. 평소 만난 본 적이 없어 여시가감(如是可感) 주인 주서가 술과 안주를 올려 이어 점심을 먹었다. 성대해서 폐를 끼칠 거 같아서 부끄러웠다. 이 수령에게 인신을 주었다. 함양 설리실점에 이르러 날이 이미 저물었다. 유숙하였다.
 
 
 

3월 30일

 
61
맑았다. 아침에 함양읍 여관에 이르러 해당 읍 이방 문진(文鎭)〔즉 두진이다.〕 호장 계관(啓寬)이 찾아왔다. 술과 안주 그리고 아침은 이방의 집에서 공급되었다. 식사한 뒤 사금동(賜琴洞)에 올라 신도 비각을 봉심하였고 제각에 들어가 멀고 가까운 여러 종인들이 와서 모였다. 도유사 운봉 갈계(葛溪)의 원익, 별유사 장수 죽동의 재섭(在燮), 갈계 용근, 함양 대군정(大軍亭)의 인표(仁杓), 공유사 함양 삼휴대(三休臺)의 찬순(瓚淳), 전유사 함양 석복(席卜)의 문식(文植) · 대식(大植) · 찬옥(瓚玉) · 응필(應弼), 북천(北川) 학진, 마천(馬川) 의탄(義灘) 응우(應佑) · 재환, 뇌전(磊田) 영길(永吉), 장항리(獐項里) 재기(載箕) · 재영(載永) · 원석(源錫) · 용석, 읍내 학배(學配) · 응권(應權) · 시연(始淵) · 응수(應秀) · 양심(良心) · 봉기(奉箕) · 문진 · 계관 · 문찬(文燦) · 판봉(判鳳) · 두현(斗鉉) · 수문(守文) · 계봉(啓鳳) · 용진(容鎭), 평촌 문규(文圭), 거문리 종술(宗述) · 두익(斗翼) · 두홍(斗洪), 뇌산 봉석(奉錫), 관동 창권(昌權), 삼휴대 재문(梓文) · 동현(東鉉), 거면 동술(東述), 백전 효수(孝洙) · 진현(震鉉) · 주현(周鉉) · 만순(萬淳) · 양환(陽煥), 거면 두욱(斗郁) · 두영(斗榮) · 기영(基榮), 안의 오현 재곤(載坤) · 재류(載瑬), 신촌 주홍(周弘) · 주영(周榮) · 주봉(周鳳), 추천(楸川) 재화(在和) · 원석(元錫) · 주호(周鎬), 마조촌 영식(泳植) · 정순(正淳), 삼가신곡 재동(在東) · 재수(在壽), 거창 읍내 기모(基模), 진주 동산 재익(在翼) · 주복(周馥), 하동 악양 경우(慶佑) · 민호(敏瑚) · 민찬(敏燦), 운봉 갈계 문협(文協) · 원영(源英) · 경근(慶根) · 형근(馨根) · 문상(汶相) · 양근(良根) · 일근(一根) · 주환(周煥) · 천상(千相), 서무촌 문화(文華) · 기원(基源), 류평 응석(應錫), 지락리 재화(在和), 임실 종헌, 양직 용섭(容燮), 남원 산거리 인하(仁夏), 영암 구림(鳩林) 한빈(漢彬) · 학상(鶴相), 창평 절산 규덕(圭德) · 인현(麟鉉), 안의 거기촌 재욱(在郁) · 종환(鐘煥) 등이 합하여 90명이 있었다. 화수회에 서로 술을 마셔 취하였다. 묘소에 올라 술, 과일과 육포 등을 마련하고 절을 해하였다. 끝나고 제각에 돌아가 문종 일을 논의하고 날이 저물었다. 이방 문진에게 그의 집에 이끌어 유숙하였다. 저녁 식사한 뒤 이방이 읍기(邑妓) 월선(月仙) · 화선(花仙) · 취옥(翠玉) · 매선(梅仙)을 불어 나에게 술을 권하고 소일해줬다. 별이 나와 비로소 돌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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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각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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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1) 대오리나 대로 만든 온갖 제구(諸具). 대그릇.
64
402) 푸른 대쪽을 불에 구워서 받은 진액(津液). 성질은 차고 독이 없어, 열담이나 번갈을 고치는 데 씀.
65
403) 사붙이. 갑사(甲紗)나 은조사(銀造紗ㆍ銀條紗) 따위와 같이 발이 얇고 성긴 깁의 종류.
【원문】정유년(1897)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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