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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시순(朴始淳) 일기(日記) - 운불일기(雲紱日記) ◈
◇ 을미년(1895) 8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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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시순(朴始淳)
- 임실문화원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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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을미년(乙未年, 1895) 8월
 
 
 

8월 1일 기사

 
3
맑음. 일찍 운수관(雲水館)에 가서 망하례(망하례)를 설행하였다. 그리고나서 교궁(校宮)에 가서 분향례를 설행하고 재실에 들어갔다. 장의 이경우(李 경우), 색장 최증이 입현하였다. 드디어 관아로 돌아왔다. 삼반의 관속을 잠고하였다.
 
4
상동 훈장 심진하(沈鎭廈), 신평 훈장 한봉리, 신평 향원 한규섭, 남면 향원 김사준이 찾아와 만났다. 하북 월은에 편지를 보냈다. 진사 백낙두, 상운 학산의 주서 오재승, 종인 박종원이 찾아와 만났다.
 
 
 

8월 2일

 
6
맑음. 진안현감의 답통이 도착하였다. 향저리의 답고(答告)도 도착하였다. 남원 오산의 유학 권도수(권도수)가 찾아와 보았는데, 湖南知舊家之最著者也. 일도의 훈장 노병석(노병석), 유학 황의표(黃義杓)가 찾아 왔다. 장의 이경우가 입현하였다.
 
 
 

8월 3일

 
8
새벽에 짙은 안개가 끼었는데 저물녘에 개였다. 진사 백낙두의 답통이 도착하였다. 상이암의 승려 선민(선민), 창만(창만)이 찾아와 안무하였다. 완영(完營)의 송촌(松村) 승지 김창석의 편지가 인편을 거쳐[轉遞] 도착하였다.
 
 
 

8월 4일

 
10
새벽에 개였는데 저물녘에 흐려졌다. 여산사또의 편지가 인편을 거쳐 도착하였다. 도향원 이 도정, 이 장의가 입현하였다. 주서 오재승(吳在昇)이 찾아와 보았는데 一面如舊 良何良何 어제 읍저의 同宗 문욱(문욱), 영규(영규), 경직(경직), 양직(양직) 4명이 입현하였다. 分級은 비록 다르지만 종족의 정의는 한가지이다. 舊友冊房 겸 완영의 책응관 석현주(石炫周)가 마침 일 때문에 찾아와서 만났다.{入見} 전동(磚洞)의 유하대(유하대)의 편지가 전체(轉遞)로 도착하였다. 지난 29일에 보낸 것이다. 송촌(松村)의 김령(金令)의 편지도 왔다.
 
 
 

8월 5일

 
12
흐렸다가 개였다.
 
13
순사(巡使) 어른과 김 고창(金 高敞)의 답장[答函]이 읍편(邑便)으로 도착했다. 영저리(營邸吏)의 고목(告目)도 도착하였다. 돌아가는 길에 순사에게 상후(上候)하였다. 아울러 김 고창에게 편지를 부치고 영저리에게 답장하였다. 또한 송촌 김령에게 감사편지를 부쳤다. 참의 엄석관(嚴錫瓘)이 찾아아서 만났는데 전에 서울에 있을 때 얼굴을 알고 지낸 사람이었다.
 
 
 

8월 6일

 
15
이른 아침에는 흐렸는데 저녁에 개였다.
 
16
신안리촌(新安履村)의 진사 박흥교(박흥교), 색장 한형리(한형리), 훈장 한창리(한창리), 금동(금동)의 종인 홍근(홍근)이 찾아와 만났다. 인편을 거쳐 전동의 유하대에게 안부편지를 부쳤다. 또한 부안 사또 친구 윤시영(윤시영)과 상북 훈장 이재옥(이재옥), 하북 향원 이재욱(이재욱), 사인 한학두(한학두), 덕치(덕치) 조 감찰(조감찰), 조재홍(조재홍), 사인 조병용(조병용)이 찾아와 만났다. 도동(桃洞) 대감 이근수(李根秀)의 편지, 태평동(태평동) 친구 조성회(조성회)의 편지, 전동에 있는 참봉 황영(황영)의 편지가 인편[轉遞]으로 도착하였다.
 
 
 

8월 7일

 
18
이른 아침에는 안개 끼었는데 저녁에는 걷혔다. 조 감찰이 고별(告別)하고 돌아왔다. 도향원(도향원) 윤 도정, 이 장의, 최봉우(최봉우), 종인 종헌(종헌), 최증(최증)이 찾아와 만났다. 상북의 사인 이봉숙(이봉숙), 남면의 사인 유제근(유제근), 곽찬영(곽찬영), 덕치의 사인 이병원(이병원), 변규호(변규호)가 찾아와 만났다. 종인 종원(鍾遠)이 편지하였는데 음식을 선물[情饋]로 보내 감사편지로 답장하였다.
 
 
 

8월 8일

 
20
이른 아침에 맑았는데 정오부터 흐려지더니 비가 조금 오더니 곧 그쳤다.
 
21
하동(하동)의 사인 이영우(이영우), 상동(상동)의 유학 심진하(沈鎭厦), 옥전(옥전)의 사인 전경택(全慶宅), 대곡(대곡)의 사인 이기현(이기현), 하운(하운)의 진사 홍종철(홍종철), 상동의 사인 이낙선(이낙선), 박성근(박성근), 송인호(송인호), 구고(九皐)의 진사 한규성(한규성), 사인 한규혁(한규혁), 상운(상운)의 진사 이병의(이병의), 상동의 사인 심진헌(심진헌), 옥전 사인 홍종성(홍종성), 신안(신안)의 사인 한학교(韓學敎)가 찾아와 만났다.
 
22
오늘은 상정(上丁) 석전제(釋奠祭)를 지내는 날이다. 신각(申刻)에 명륜당(明倫堂)에 갔다. 식당에 가서 식사를 마쳤는데 아전[吏]이 시간이 되었다고 아뢰자 관복을 갖춰 입고 자리로 나가 서서 초헌례(초헌례)를 행하고 마치고 나서 옷을 갈아입고 관아로 돌아왔다. 밤이 이미 사고(四鼓; 새벽 2시)나 되었다. 설사로 밤새도록 고생하였다. 불쌍하구나. 불쌍하구나.{良憐良憐}
 
 
 

8월 9일

 
24
이른 아침에 안개가 끼었는데 저녁에 맑아졌다.
 
25
설사가 조금 나아져서 억지로 일어나 일을 보았다. 예리(禮吏)를 보내 향교의 여러 집사(집사)에게 致喝하였다. 상운(상운)의 참봉 이현의(이현의), 사인 이동의(이동의), 최봉기(최봉기), 이인(이인)의 사인 양석구(양석구), 김성희(김성희), 상동의 사인 심필원(심필원), 하북의 유학 나한두(나한두)가 찾아와 만났다. 진사 한규성(한규성), 유학 한규혁(한규혁), 진사 이병의(이병의), 유학 심진헌(심진헌), 유학 홍종성(洪鍾晟), 유학 한학교(한학교), 유학 조병용(조병용), 진사 홍종철(홍종철), 유학 김경택, 유학 이낙선, 유학 박성근, 종인 종헌, 하신덕(下新德) 종인 정국(정국), 유학 최증이 찾아와 만났다. 읍편(읍편)으로 총리대신 훈동(勳洞), 외무대신 김윤식(金允植), 전동의 金 台, 홍현(홍현)의 김 台, 훈서(훈서)의 민 태, 전동에 사는 참봉 황영(黃瑛), 축동(蓄洞)의 令 김재숙(김재숙), 대평동(대평동) 교리 이병옥(李炳鋈)에게 편지를 올렸다. 또한 익아(翼兒)에게 편지를 부쳐서 박덕유(朴德裕)의 패지(牌旨) 가운데 동봉(同封)하여 傳納하라고 하였다. 첨정 석현주가 작별하고 돌아가는데{告歸} 완영(完營) 관찰사 어르신께 안부편지를 올렸다. 하동의 사인 송진수(송진수), 송진구(송진구), 구고(九皐)의 사인 이한영(이한영)이 찾아와 만났다. 진안 사또 및 운봉 사또의 편지가 인편을 거쳐[轉遞] 도착하였다.【66:5】
 
 
 

8월 10일

 
27
이른 아침에 흐렸는데 저녁에 맑았다.
 
28
하동의 천동(泉洞) 정 감역이 찾아와 만났다. 낙촌(洛村)의 진사 한흥교가 편지했는데, 민물고기[川漁]를 선물로 보냈다. 감사하다고 답장을 보냈는데 한 진사가 京行하면서 사과(司果) 이규채(이규채)와 함께 찾아와서 만났다. 이 사과는 본디 화편술(華扁術)422)에 정밀한 사람이다. 종인 종원이 찾아와 만났다. 장의 이경우가 찾아와 만났다.
 
 
 

8월 11일

 
30
김 고창 및 송촌 김 령의 편지가 인편을 통해 도착하였다. 한 진사, 이 사과가 작별인사를 하고 상경하였다. 그 편에 창동(倉洞)의 친척 진사 심헌경(심헌경)에게 편지를 부치고, 박유덕에게 가는 패지(牌旨)를 동봉하였다. 도정 윤태일(윤태일), 종인 정국(정국), 장의 최봉우, 색장 최증, 유학 오채규(오채규), 유학 이한영이 찾아와 만났다. 감역 정기호(鄭祺浩)가 편지하며 凌烈松耳를 보내서 감사하다고 답장하였다. 참의 엄석관의 편지가 와서 답장을 보냈다. 김 고창이 信遞 편에 편지를 보내서 답장을 보냈다. 종인 종원이 작별하고 돌아갔다. 밤 삼경(三更)부터 비가 내렸다.
 
 
 
 

8월 12일

 
32
밤비가 그치지 않았더니 신각(申刻)에 바람이 동북쪽에서 불어와서 약간 비가 개였다. 옥전의 훈장 오채규가 찾아와 만났고, 작별하고 돌아갔다.{告歸}
 
 
 

8월 13일

 
34
이른 아침에 구름이 다소 드문드문 흐트러지더니 진각(辰刻)에 쾌청해졌다. 내아(內衙)의 이엉 수리를 마쳤다고 해서 내권(內眷)의 거처를 옮기도록 하였다.
 
35
낙촌의 참봉 한경리가 찾아와 만났다. 장의 이경우, 윤 도정, 장의 홍종성이 찾아와 만났다. 읍편으로 남원 사또 신좌희(신좌희)의 편지가 도착하였다. 덕치의 유학 이종휘(李鍾耳徽)의 편지가 왔는데 종이 다발과 꿩을 선물로 보내 감사하다고 답장하였다. 이 장의가 밤에 남면의 김산동(金山洞), 상중 김봉기[金哀俸基]가 찾아와 만났다.
 
 
 

8월 14일

 
37
이른 아침에 안개가 끼었는데 저녁에 맑았다.
 
38
읍편으로 남원 사또 및 운봉 사또에게 감사편지를 부쳤다. 신안 낙촌의 유학 한형리가 편지하였는데 홍시 및 민무늬 돗자리[盲席]를 선물로 보내 감사하다고 답장하였다.
 
39
완영에 사는 석 첨정의 편가 인편[轉遞]으로 도착하였다. 이날 밤에 하늘이 걷히고 구름 한 점 없이 달빛이 그림 같았다. 나도 심신(心神)을 안정하기 어려워 冊室灘雲意欲寬慰之 통인(通引)을 불러 거문고를 잘 타는 사람 및 악공(樂工) 몇 사람을 불러 삼현[三絃]을 능숙하게 다루며 연주하였다. 이때 이 장의와 좌수(座首) 이병록(李炳錄)이 마침 와서 술잔을 권하며 주고 받았다. 밤이 깊어서야 끝마쳤다.{罷}
 
 
 

8월 15일

 
41
이른 아침에 안개가 끼었는데 저녁에는 맑아졌다.
 
42
일찌감치 운수관(雲水館)에 가서 망하례(望賀禮)를 행하고나서 향교[校宮]에 가서 분향례(焚香禮)를 행하고 다시 재실(齋室)에 들어갔다. 이 장의가 찾아와 만나고서야 관아로 돌아왔다. 삼반(三班) 관속(官屬)의 점고를 마쳤다. 적절하게 제한하여 종일 휴가를 주도록 하였다.[給由] 完府의 관찰사 어른의 편지 및 부안 사또의 편지가 읍편으로 도착하였다. 이 장의가 작별하고 돌아갔다.
 
 
 

8월 16일

 
44
이른 아침에 흐렸다. 진각(辰刻)부터 가는비와 눈이 내렸다. 삼반관(三班官) 만장(萬將)이 파임(派任) 신식(新式) 이후에 아전이 모두 액수를 줄여{額減} 희박(餼薄)하고 효상(爻象)이 매우 아름다웠다. 이에 差窠가 사분오열되어 똑같이 급료하고 제비 뽑았으니 한바탕 희극(戱劇)이다. 차임(差任)은 手帖하였다. 그래서 투자(投刺)를 받고 현신(現身)하였다. 미처 삼반(三班)이 과연 원망하는 뜻이 있는지 여부를 모르겠다. 남부(南府) 관찰사의 답서 및 참서관의 편지가 우체(우체)로 도착하였다. 완서(完西)의 김 영감의 편지가 전체(轉遞)로 도착하였다. 이날 밤 비와 눈이 부슬부슬 내렸다.
 
 
 

8월 17일

 
46
이른 아침에 일어나 보니 문 밖에 눈이 몇 촌 쯤 내렸으니 괴이한 증후이다. 종인 종원(종원)이 그 기환(기환)과 찾아와 만났다. 윤 도정, 장의 이경우(이경우), 유학 김사준(김사준)이 들어와 만났다. 면천의 관노 등길(등길)이 아침 일찍 도착하였다. 오늘 내아(내아)의 생신이어서 그가 잊지 않고 일부러 왔다. 그 마음이 가상하고 가상하다. 그 편에 면천 동쪽 영감 박제경(朴齊경)의 편지, 도유사 심국경(沈國慶)의 편지, 초택 친구 이정하(李正夏)의 편지, 좌수 조종우(趙鍾祐)의 편지가 도착하였다. 아전 박준상(박준상), 종환(종환), 한형(한형), 한정(한정), 명흠(명흠), 아전 유규항(유규항), 치헌(치헌), 치희(치희), 치갑(치갑), 응환(응환), 진벽(鎭璧), 진만(鎭萬), 진풍(진풍), 아전 김정만(김정만), 통인 유인선(유인선), 장교 박창묵(박창묵), 박의근(박의근), 김수천(김수천), 사령(사령) 안원교(안원교), 수노 부성(부성), 포군 유경추(유경추), 정정길(정정길) 등의 고목이 함께 도착하였다. 상이암(상이암)의 승려 선민(선민), 창섭(창섭), 두현(두현) 등이 산채(山菜) 1포를 가지고 와서 문안하였다. 진안 이중익(이중익)이 편지하였는데 돌아가는 편에 답장을 보냈다.
 
 
 

8월 18일

 
48
이른 아침에 흐렸다. 오후부터 비가 부슬부슬 내렸다. 인편으로 운봉 사또에게 편지를 부쳤다. 남부(南府) 관찰사 어른께 문안편지를 올렸다. 참서관 및 남원 사또에게 안부편지를 부쳤다. 부저리 강태진(강태진)에게 답장을 부쳤다. 전주부 관찰사 영감 조민희(조민희)가 莅已有日 전체로 안부편지를 부쳤다. 윤 도정, 장의 이경우(이경우)가 들어와 만났다. 감찰 조홍종(趙洪從)이 찾아와 만났다.
 
 
 

8월 19일

 
50
이른 아침에 맑았는데 저녁에 흐렸다. 부슬부슬 비내리다가 저녁 후에 맑아졌다.
 
 
 

8월 20일

 
52
맑음. 오늘은 한로(寒露)이다. 아침 일찍 일어나 세수하고 머리빗고 앉아 있는데 우리 고을 사또{主倅} 신 령이 致喝하여 답장을 보냈다. 부(府)에 들어가면서 운봉 사또의 사관(私館)을 들렸는데 장수 사또 유일환(兪一煥)이 마침 있었는데, 서로 아는 사이이어서 인사를 마쳤다.
 
53
그리고 나서 우리 고을 사또{主倅} 신 령을 방문하여 使吏通刺紙於觀察使丈 동쪽 협문(夾門)으로 들어가 답배례(答拜禮)를 행하고 마쳤다. 읍의 형편과 민의 사정에 대해 대략 진술하고 고별(告別)하였다.
 
54
신 령에게 들러 辭하고 드디어 민간의 집[私次]으로 돌아와 아침밥을 먹었다. 날이 이미 사각(巳刻)이 되었다.
 
55
남원의 인사 강한흠(강한흠), 노규수(노규수)가 찾아와 만났다. 황 참봉이 다시 와서 告別하였다. 그리고나서 돌아갈 행장을 꾸리라고 하였다.
 
56
통인(通引)과 함께 광한루(광한루)에 걸어 올라갔다. 광한루는 남문 밖에 있었다. 顯敞宏麗하였다. 편액에는 ‘호남제일루(호남제일루)’라고 써있으니 헛되이 과장한 말이 아니다.
 
57
종전에 名碩之按藩知府者 鉅什刻揭 마치 별이 바둑알처럼 늘어서 있는 것 같다. 仰觀擎讀中 우리 방계 선조 판윤(判尹) 박내정(朴乃貞)께서 남원부에 부임하였을 때{知府時} 墨迹이 아직도 남아 있으니 감회가 남다르다. 사방을 빙 돌아보니 광한루의 앞에는 鑿이고, 方爲세 개의 섬인데{三嶼} 하나는 영주각(瀛洲閣)이고, 한 곳은 대나무를 심어 숲이 되었다. 한 곳은 홰나무와 버드나무가 뒤섞여 심어져 우거져 교목(喬木)이 되었다. 연못의 서쪽에는 돌을 깍아 다리를 만들었는데 바로 오작교(烏鵲橋)이다.
 
58
다리 아래에 휑하게 4개의 구멍이 있는데 수로(水路)로 통하였다. 연못 가운데 가득히 연꽃[芙蕖花]이 심어져 있었다. 이미 시들기는 하였지만 줄기와 뿌리가 아직도 꼿꼿하고{亭亭} 서 있는 것도 획 돌아보니 방황{回望彷徨}하다. 아름답고 고운 모습이 應接할 겨를이 없이 옛날에 듣던 ????/ 기이한 인연이다. 이미 가마꾼[轎軍]도 도착하여 마침내 길을 나서 돌아오면서 참서관(參書官) 주사(主事) 김철선(金喆善)에게 들러 만났다. 약간 회포를 풀고 바로 출발하였다.
 
59
국평점에 이르렀는데 석양이 산에 걸려 있었다. 상중에 있는 김이 또 와서 안부하였다. 그와 함께 금산동(금산동)에 들어가서 金哀館 정사(精)인데, 동네의 서당(書堂)이고, 면의 향약소(鄕約所)이다. 자리를 잡고 앉았는데 본동(本洞)에 사는 유학 김사국(金思國), 김사준(김사준), ■수(■수), 문수(문수), 유학 한학렴(韓學濂), 학규(학규), 유학 곽찬영(곽찬영), 만규(만규), 유학 유제근(유제근)이 찾아와서 모두 만났다. 잠깐 있다가 상중에 있는 김이 주안상을 내어 왔는데 이어서 저녁상을 내어 왔다. 내가 설사증으로 억지로 먹기가 어려웠다. 상중에 있는 김이 요동(邀洞) 안에 의술을 아는 사람 김윤언(金允彦)이 들어와 진맥하였다. 약화제(藥和劑)를 내어 달여서 내어 왔다. 폐끼 치고 괴로움 끼쳤으니 도리어 너무 편하지 않았다. 남원에서 이곳까지 50리이다.
 
 
 

8월 21일

 
61
맑음. 아침 일찍 일어났다. 유학 김사준이 술과 안주를 한상 내어 왔다. 설사증이 끝내 차도가 없어서 매우 힘들었다. 아침밥을 먹고 출발하면서 여러 유학들과 고별하고 관아로 돌아왔다. 한낮 해가 기울려고 하였다.{午景將昃}
 
 
 

8월 22일

 
63
맑음. 옥전(玉田)의 유학 홍종성(洪鍾晟)이 홍시와 밤 두가지 물건을 가지고 찾아와 만났다. 장의 이경우(李璟宇)가 편지하면서 침담근 감[沈柿] 및 산사육(山査肉)423)을 선물로 보내 답장을 보냈다. 한양에 사는 이태안(李泰安)이 완부(完府)에서 심학관(沈學官)의 편지를 가지고 찾아와 문안하였다. 심원사(深源寺)의 승려 상정(尙正)이 찾아와 문안하였다. 명동(明洞)의 시독(侍讀) 홍현철(洪顯哲)의 편지가 轉遞로 도착하였다.
 
 
 

8월 23일

 
65
맑음. 설사증이 조금 개였다. 다행이다. 상신덕(상신덕)의 유학 김재환(김재환), 구고(구고)의 유학 임남수(임남수), 상북의 유학 이봉숙(이봉숙), 신안(신안)의 유학 오석룡(오석룡), 종인 홍근(홍근)이 찾아와 만났다. 주서(注書) 오재승(吳在昇)이 반찬[饌屬]을 선물로 보냈다. 감사하다고 답장하였다.
 
66
함양(咸陽) 개평(介坪)의 교리(校理) 노태현(盧台鉉)의 편지가 전편(傳便)으로 도착하여 다소 위로가 되었다. 여러 해가 지나 회포가 막혔다.{積年阻懷} 이태안(李太安)이 작별하고 돌아가는데 심학관(沈學官)에게 감사편지를 부쳤다. 유학 조병용(趙柄鏞)이 편지하면서 홍시를 선물로 보냈다. 감사하다고 답장하였다.
 
 
 

8월 24일

 
68
이른 아침에 안개가 끼었는데 저녁에 맑아졌다.
 
69
운봉 사또가 완영(完營)에서 돌아와 만났는데 함께 아침밥을 먹고 바로 작별하였는데 매우 서글펐다. 하운(下雲)의 도정(都正) 홍병(洪秉), 상북의 유학 이광선(李匡善)이 찾아와 만났다. 완영의 호리(戶吏) 이용섭(李龍涉)가 고서(告書)하였는데 강정과(薑正果)를 선물로 보내 감사하다고 답장하였다. 전주에 있는 석 첨정이 편지하였다. 【68】
 
 
 

8월 25일

 
71
이른 아침에 잠깐 맑았다가 바로 흐려졌다.
 
72
돌아가는 편에 석 첨정에게 답장을 부쳤다. 송촌의 김 령의 편지가 도착하였다.[20일에 보낸 편지이다.] 진안의 유학 김태식(金泰埴)이 찾아와 만났다.
 
 
 

8월 26일

 
74
이른 아침에 흐렸다가 저녁에는 맑아졌다.
 
75
직접 재결을 잡으러 굴암점(窟巖店)에 갔다. 一道 향원(鄕員) 노병석(魯炳錫) 및 훈장 황의표(黃義杓)가 점사에 찾아와 문안하였다. 그리고나서 그와 함께 재해처에 가서 적간(摘奸)한 다음에 노 향원의 집에 들러 향원이 술상을 내어 와서 폐 끼쳐 도리어 미안하였다. 본면 강장(講長) 노학규(魯鶴奎)가 찾아와 만났다. 잠시 평교점에 가서 대곡(大谷)의 훈장 서준수(徐俊洙)가 가서 찾아와 문후하였다. 그와 함께 재해처에 가서 적간한 다음에 마침내 관아로 돌아왔다.
 
76
도정 윤태일(윤태일), 장의 이경우가 찾아와 만났다. 읍예(邑隸)가 돌아오는 편에 외부대신 김윤식의 답서, 전동의 유하대(유하대)의 답서, 회동(會洞)의 대감 조종필(조종필)의 편지, 장동(長洞)의 영감 강경희의 편지, 치동(治洞)의 상사 한국원(한국원)의 편지,창동(창동)의 친척 진사 심헌경(沈軒慶)의 편지, 축동의 영감 심재숙(심재숙)의 편지, 공동(공동) 영감 심구택(심구택)의 편지, 교리 서상숙(서상숙)의 편지, 승지 정인섭(정인섭)의 편지, 친구 윤인구(윤인구)의 편지, 상중에 있는 원정상(원정상) 답소(答疎), 유학 신태정(신태정)의 편지가 도착했다. 용산의 사용(司勇) 윤영식(尹泳植)의 고목(告目)도 도착하였다. 듣자니 서울 지방[都下]은 소란스러워서[騷擾] 변란을 예측할 수 없다고 한다. 떳떳한 양심과 우애하는 마음을 스스로 풀 수가 없다. 어떻게 할까나. 어떻게 할까나. 完松村 김 령의 편지가 도착하였다. 유학 심진하가 찾아와 만났다. 하동(下東)의 종인 ■植, 춘희(春熙)가 종인 영수(永洙)의 편지와 물감[水柿]을 가지고 찾아와 만났다.
 
 
 

8월 27일

 
78
이른 아침에 흐렸다가 저녁에 개였다.
 
79
읍편으로 교체되는 완부(完府)의 관찰사에게 안부편지를 부쳤다. 또 송촌의 김 령, 김 고창에게 편지를 부쳤다. 언장(唁狀)을 써서 상동 도사 정혁조(정혁조), 유학 심진표(심진표)에게 보냈다. 윤 도정과 이 장의가 들어와 만났다. 참봉 한경리(한경리)가 찾아와 만났다. 서울에 있는 그 아들 진사가 부친 편지를 손수 전해 주었다.{袖傳} 진산 사또 오영석(오영석)이 마침 그 집에 와서 찾아가 보았다. 신안(신안)의 유학 오중영(오중영), 상동 상중에 있는 심진표(심진표), 상동의 이 좌수, 이종원(이종원)이 찾아와 만났다. 完府의 관찰사 편지가 전체(轉遞)로 도착하였다.
 
 

8월 28일

 
81
맑음. 하신덕(下新德) 유학 나동환(나동환)이 찾아와 만났다. 밥을 먹고 재결을 조사하러{執災}하러 상북동(상북동)으로 가는데 대광암(帶廣巖)에 이르렀다. 그 면의 훈장 이재옥(이재옥), 강장(강장) 이봉숙(이봉숙)이 와서 기다리고 있었다. 그들과 함께 가다가 오원점(오원점)에 이르러 재해처를 대략 살펴보고 점사(店舍)에 들어가 잠깐 쉬었다가 바로 주천(舟川)의 훈장 집으로 들어갔다. 하북의 훈장 나한두(羅한두)가 찾아와 만났다. 얼마 있다가 훈장이 점심밥을 내어왔는데 정갈하게 준비하였다. 민간(民間)에 폐를 끼쳤다. 괴탄스럽구나.{愧歎} 밥을 다 먹고 도로 대광암에 도착하였는데 재민(災民) 10여 인이 화성리(花城里) 앞 사제(沙堤)에서 기다리고 앉았기에 가서 만났다. 그 면의 유학 설병화(薛柄和), 유학 이존경(李尊卿) 등 4,5인이 술안주를 가지고 찾아와서 만났다. 약간 재결을 조사하였다.{執災} 날이 이미 저물었다. 등불을 들고 관아로 돌아왔다. 덕치의 감찰 조재홍(조재홍)이 편지하였는데 두 가지 선물과 책상에 놓여 있다.{饋以二種留案} 아직 답장하지 못하였다.
 
 
 

8월 29일

 
83
이른 아침에 흐리더니 비가 조금 내렸다. 용담(용담)에 사는 감역 김석문(김석문)이 여산 사또의 편지를 가지고 찾아와 만났다. 날은 저물고 구름은 뒤섞였다.{雲駁} 비가 올 듯 조금 개였다. 그리나서 執災하러 갔다. 이인면(里仁面) 정월리(程月里)에 앞뜰에 나가서 該面面 훈장 양석구(楊錫九), 향원(鄕員) 김성희(金聲熙)가 와서 안부하였다. 該洞에서 술안주를 차려 나왔다. 각 該洞 연장(連長), 통수(統首)도 찾아와 만났다. 약간 執災하였다. 이내 두만리(斗萬里) 앞길을 경유하여 일현(一峴)을 넘었더니 바로 신안면(新安面)이다. 該面 훈장 한창리(한창리), 유학 한형리(한형리), 종인 홍근(홍근)이 길가{道左}까지 와서 맞이하였다. 그들과 함께 출발하여 금적동(금적동) 동네어귀에 이르렀다. 참봉 한경리(한경리), 유학 오중영(오중영)이 길가까지 나와서 맞지하였다. 함께 동네 강당에 들어갔다. 강당은 바로 재양서원(載陽書院)[주자의 영정이 봉안한 곳이다.]의 전당(前堂)이다. 서원이 훼철되었지만 강당은 남아 있어서 한 동네의 숙사(塾舍)로 삼았다. 종인 홍근이 재장(齋長)이다.
 
84
자리를 잡고 앉았는데 유학 한학교(한학교) 및 종인 흥엽(흥엽), 종협(종협)[홍근의 아들과 당질]이 들어와 수업하였다. 관동(冠童)도 차례로 들어왔다.
 
85
조금 있다가 본동(本洞)에서 술과 안주를 내어와서 다 먹었다. 홍근이 여러 사람들과 한 수씩 읊었는데 교정{斤正}을 부탁하였으나 떨어내기 어려웠지만 망령되이 평가해 주었다. 여러 유학들과 함께 길을 나서 낙촌(洛村) 한 참봉가에 이르렀다. 참봉이 점심밥을 내어왔는데 매우 정성스럽게 준비한 것이었다. 든든하게 다 먹었다. 유학 홍종성이 도착하였다. 여러 첨원(僉員)과 더불어 정촌(정촌) 오씨 강당(오씨강당)에 들러 자리를 잡고 앉았다. 중영(중영)의 대인(大人) ▤▤ 및 유학 오병일(오병일), 병곤(병곤)이 들어와 보았다. 오유(오유)가 술상을 내어 왔다. 가는 곳마다 폐를 끼치니 관장(官長)이 되어 과연 마음이 편안하겠는가? 다 먹고 여러 유학과 작별하고 관아로 돌아왔다. 날이 이미 저물었다.
 
 

 
86
* 각주
 
87
422) 화타와 편작 혹은 화려한 편액???
88
423) 산사육: 씨를 발라낸 산사나무의 열매를 가리킨다.
【원문】을미년(1895)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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