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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시순(朴始淳) 일기(日記) - 운불일기(雲紱日記) ◈
◇ 정유년(1897) 4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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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시순(朴始淳)
- 임실문화원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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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정유년(丁酉年, 1897) 4월
 
 
 

4월 1일

 
3
경신(庚申). 아침에 흐렸다. 점심때에 이르러 가랑비가 보슬보슬 내렸다. 먼지를 추길정도로 적게 온 비는 아니고 곧 그쳤다. 식사 후에 제각에 올랐다. 종론이 나왔는데, 묘역[局內]에 범장(犯葬)한 자를 불러서 묘를 파게 하는 일을 하게하고 감독하였다. 이날 판 무덤이 7총(塚)이었다. 산록(山麓)에서 도매(盜賣)한자 또한 추심하여 반납하게 하였다. 추심한자가 사록(四麓)이다. 종인 만직(萬直)이 진주(晉州)에 갔다가 기간 내[趁期]에 돌아왔다. 진부(晉府)에서 산청(山淸)수령 서상빈을 보냈다 울관도형(㭗官圖形) 때문에 명나라 장군이 도달했다고 하였다. 여러 종인후손(宗仍)이 아직 떠나지 않고 머물렀다. 제각에서 유숙(留宿)하고 갔다.
 
 
 

4월 2일

 
5
맑았다. 오전에 산청수령이 도착하였다. 점심 술상을 올렸다. 마침내 그와 함께 묘소에 올라 도형양척(圖形量尺)을 마쳤다. 또한 함께 비각(碑閣)에 가서, 한규찬(韓圭贊)이 묻은 묘를 조사고서 즉시 제각으로 돌아왔다. 산청수령어른과 만나 다소(多少)간 간략하게하고 약서(略敍)하고 헤어졌다. 산청수령은 함읍(咸邑)에서 유숙하고, 나는 제각에서 유숙하였다.
 
 
 

4월 3일

 
7
맑았다. 새벽에 산청수령께 문안하였다. 밤새 안녕하셨는지 여쭈었더니 그 답이 바로 돌아와 안심하였다. 본군 죽곡(竹谷) 진사 노태현(盧泰鉉), 석사 여○섭(呂○燮)이 찾아왔다. 보성 반암(磐巖)에 살고 있는 종인 태한(泰漢), 정현(正炫), 응현(膺炫)과 강진 나천(羅川)에 사는 종인 찬구(燦龜), 용환(龍煥)이 잇따라 도착하였다. 장차 종인 만직을 산청군에 가도록 하여 진주부에 들러서 산청수령과 촉사(矗使)에게 편지를 써서 전하도록 하였다. 비록 평소에 교분은 없었으나 선사(先事) 때문이다. 이와 같이 되었다. 오후에 돌아오는 길에 각 군에 사는 종인들에게 고별하고 마침내 지름길로 갔다. 길을 가는 도중에 창평(昌平)종인 재현(材鉉)과 태희(台熙)를 만나 그들을 묘하(墓下)에 가게 하였다. 마침내 헤어지고 인월점(引月店)에 다다르니 날이 이미 저물어 유숙하였다. 이날 제각에 있었고 그 때 창평 절산(昌平 節山) 종인 휴덕(休德), 각 읍내(邑內) 동종(同宗) 재구(在구), 영암(靈巖) 종인 노상(魯相)·용상(鎔相)에게 4개의 편지를 부쳤다.
 
 
 

4월 4일

 
9
맑았다. 아침에 출발하여 운봉읍에 다다랐다. 곧장 동헌(東軒)에 들어갔다. 주수(主倅)404)가 이곳에 마중 나왔다. 내 행역(行役)의 노고를 위로하였다. 바로 극히 정하게 갖춘 아침상을 내어오니 진실로 감사하다. 박주서(注書)405)가 산내동(山內洞) 있을 때 편지를 써서 그 아들을 보내니 사례하여 답하였다. 식사 후에 헤어지고 점심에 갈계(葛溪)에 이르렀다. 각 촌의 여러 종인이 모두 모였다. 함양에서 이곳에 갔다가 다시 돌아왔다. 다른 지역에 (살고 있는) 두서넛의 종인들도 역시 도착했다. 또 화수회(花樹會)를 이루니 위로가 되지 않을 수 없구나. 먼저 주안상을 올리고 이어서 오반(午飯)을 내왔다. 비록 종친들 간의 친목이 남에게 폐를 끼쳤지만, 도리어 불안이 그쳤다. 이웃마을 형노인 재명[(在明)(字 極瑞)]이 와서 보았다. 오랫동안 소식을 듣지 못한 相識 (그냥 안면이 있는 자)와 서울(洛下)에 모이니 기쁨이 넘쳐 비할 바가 없다. 장차 발패(發牌)하여 함양 이방 문진(文鎭)에게 사례할 것이다. 마침내 여러 종인과 더불어 고별하였다. 십리가량을 가다가 한 고개(一嶺)를 넘었는데, 이름이 지치(紙峙)라고 하였다. 동쪽은 높고 험한 것이 심하지 않고, 서쪽으로 가면 가파르고 험한 것이 삭벽(削壁)과 같아 발을 붙일 수가 없었다. 비록 사람들이 걸어가지만 몹시 두려워 가슴을 어루만진다. 하물며 편안하게 앉아있는 가마 안에서 짐꾼[擔軍]의 땀이 차오르고 매우 숨이 가뿐 것을 참고 볼 때에는 과연 마음이 편안하겠는가. 힘들게 고개를 내려왔다. 노단(魯壇) 장아안택(張雅安澤(아(雅)는 미칭임)집에서 하인을 보내와 안부를 물었다. 바로 그 집에 이르렀다. 노단은 장아(張雅)의 옛 집터였으나 동학[東擾] 이후 두동(斗洞)으로 이거하였다. 우리집과 옛 집터 사이는 몇 개의 마장(馬場)이 있다. 장아(張雅)와 그 아우 석봉(錫鳳) 그 동생 희택(禧澤)이 도좌(道左)에 마중 나왔다. 인사를 나누고 자리에 앉았다. 새집을 조용히 관찰하니 맑고 깨끗하고, 좌우에는 책이 있다. 산골짜기에서 사는데 서울의 번화한 모습이 있었다. 이 지역은 나의 선조 장수(長水) 부붕(賦鵬)때에 늘 지나는 곳으로 장선비의 조부와 더불어 매우 은밀한 계(契)를 맺었는데 나는 일찍이 들어 알고 있었다. 오늘 이곳을 지나면서 찾으니 더욱 슬픈 마음을 참을 수 없다. 선비 정교석(鄭敎錫)이 입견하였다. 정교석은 장선비와 마음을 두고 같이 머무른 문한지사이다. 마침내 유숙하였다.
 
 
 

4월 5일

 
11
아침에 흐리고 찌는 듯이 더웠다. 식사 후에 나가려는데, 이웃마을 박진수(朴鎭燧)가 와서 보았다. 이 사람은 박진도(朴珍島)의 아들로 낙화(烙畫)406)로 세상에 알려진 자라고 하였다. 마침내 헤어지고 마치령(馬峙嶺)에 이르렀다. 비록 지세가 높고 가파르며 험하여 막히고 끊어져있지만, 지치(紙峙)에 비하면 약간 평탄하였다. 겨우 재를 넘으니, 가랑비가 한 방울씩 내렸다. 재촉하여 오산 친구 권양수(權陽壽)의 집에 이르렀다. 본군(本郡) 문안사(問安使)가 와서 고을 안에 일이 없음을 알았으니, 정말 다행이다. 진안수령과 함께 이곳에 서로 만남을 약속하고 와 있었고, 그 수령이 먼저 와서 이틀 밤을 머무르다가 마침내 급히 돌아갔다. 다만 대신 편지를 남겨놓고 갔다. 어찌 이와 같이 할 수 있겠는가. 친구 권씨가 술상을 내오더니, 이어서 저녁도 내왔다. 권씨 집안 여러 친구가 다 와서 보았다. 그리고 유숙하였다. 이날 밤에 비가 내렸는데, 밭을 가는데 적당하게 되어 흡족하다. 봄 상갑(上甲)407)에 비가 왔었고, 오늘 여름 상갑에 또 비가 왔다. 어떤 조짐인지 알 수 없으니 참으로 답답하다.
 
 
 

4월 6일

 
13
식사 후에 친구 권씨의 재종(再從) 윤수(潤壽)의 애통함을 위문하러 갔다. 술상(酒盞床)을 내왔다. 遂轉訪尹古阜季氏○秀家 또 술과 국수상을 내왔다. 마침내 여러 친구들과 더불어 칠봉동(七峰洞(下草庄))을 찾았다. 이에 친구 권씨의 고조묘에 갔는데, 제각을 새로 세워 밝게 통하고, 송추(松楸)가 울창하여 노대(老大)가 굉원(宏遠)한 권씨 문중의 규모를 볼 수 있으니 사람들로 하여금 찬탄하게 하였다. 친구 권태수(權泰壽)의 아버지와 아들이 나와서 보았는데, 이들은 무덤아래에 띠집을 짓고서 세상을 피해 글 읽는 선비[讀書之士]이다. 친구 권씨가 이웃 할머니를 불러서 술을 몇 번 돌아 마시더니 끝내 취하여 헤어졌다. 친척 권석규(權錫圭)집을 찾아가서 점심을 먹었다. 마침내 구곡촌(九谷村)앞까지 갔다. 송인희(宋仁熙)는 손자에게 나가 문후하게 하고 그 집에 맞아들였다. 술상을 먹고 이내 출발하였다. 가는 길에 성저(城底)에서 종인 영수(永洙)를 만났다. 마침내 마을로 돌아왔다. 해가 이미 서쪽으로 빠졌다. 홍종성(洪鍾晟)과 이종호(李鍾湖)를 입현(入見)하였다. 큰아들 동익(東翼)이 당도하였다. 임제(林第)에 아무 일이 없음을 알았으니 다행이다. 친구 이행익(李行翼)의 편지가 또한 이르렀다. 동복에 우거한 무주 조성희(趙性憙)에게 편지를 써서 구고(九皐)에 인편으로 보낸 지가 여러 날이 되었다.
 
 
 

4월 7일

 
15
맑고 흐렸다. 저녁에 흐리고 비가 왔다. 아들 익이 아침에 오산에 갔다. 친구 권씨에게 몇 자를 지어 주었다. 안부편지를 써서 완사(完使)에게 부쳐 드렸다. 또한 윤광오(尹光五)선생께 편지를 부쳤다. 감찰 정군일(鄭君一)의 편지가 있어 단오절 부채408)를 보내고 답사하였다. 참봉 이현의(李賢儀), 진사 이병의(李炳儀), 도훈(都訓) 이동의(李東儀), 진사 최홍석(崔弘錫), 진산(珍山)에 사는 오영석(吳榮錫) 선비 이영우(李璟宇), 색장(色掌) 한홍석(韓泓錫), 진사 백영수(白瑛洙) 모두 편지를 써서 정을 보냈기에 편지를 써서 감사하였다. 선비 최○증(崔○增), 선비 서준수(徐俊洙), 선비 이기현(李璣鉉), 상인 오석수(吳錫濤) 가 와서 보았다. 진안 수령이 편지를 썼다. 낙안 고읍 종인 영희(永熙)가 경기에서 찾아 왔다.
 
 
 

4월 8일

 
17
날이 자주 흐렸다가 개었다가 하였다. 진사 이건호(李建鎬) 도훈 심필원(沈弼遠) 윤도정(尹都正), 훈장 윤태윤(尹泰允), 선비 나동환(羅東煥), 향원 조병용(趙柄鏞), 훈장 이재옥(李載玉), 선비 이병원(李棅源), 색장 이종학(李鍾學) 모두 편지를 써서 정을 보냈기에 편지를 써서 사례하였다. 오산 친구 권양수(權陽壽) 노단(魯壇) 장아안택(張雅安澤) 선비 이만기(李萬器)가 와서 보았다. 진사 홍종철(洪鍾喆)이 편지를 써서 정을 보내니 편지를 써서 답하였다. 평산 주동에서 세 명의 사촌동생이 찾아 왔다. 큰집과 작은집에 경계가 없으니 다행이다.
 
 
 

4월 9일

 
19
맑았다. 이제 곧 나의 오늘 생일이다. 도훈 이동의(李東), 진사 이병의(李炳儀), 진사 최홍석(崔弘錫), 감역(監役) 정기호(鄭祺浩), 선비 심진하(沈鎭夏), 종인 종헌(宗憲)·형근(亨根)·필근(弼根)·정두(鼎斗)·영수(永洙)·찬수(贊洙) 창평(昌平) 종인 규덕(圭德) 보성(寶城) 종인 정현(正炫) 진산(珍山) 오영석(吳榮錫), 선비 홍종성(洪鍾晟)·종연(鍾淵), 선비 오채규(吳彩圭)선비 한학교(韓學敎) 종인 홍근(泓根), 선비 이재욱(李載旭), 선비 이기현(李璣鉉), 선비 서준수(徐俊洙), 진사 이건호(李建鎬), 선비 이병원(李棅源), 선비 전경규(全景奎), 친구 권양수(權陽壽), 장아안택(長雅安澤), 진사 한흥교(韓興敎), 선비 김문수(金雯秀)·사선(思先), 좌수(座首) 이병록(李炳錄), 선비 한봉리(韓鳳履), 종인 종원(鍾遠), 훈장 신학균(申鶴均), 향원 신현대(申鉉大), 도감 이종철(李鍾哲) 모두 같이 모였다. 아침밥을 먹고, 완사장(完使丈)의 답장과 선비 윤광오의 답장이 당도하였다. 선비 변규호(邊奎浩), 홍아종국(洪雅鍾國)이 와서 보았다. 미각(未刻: 오후 2시 정도)부터 하늘이 흐려서 비가 오려는 징조가 있었다. 삼경(三更: 밤11시~새벽1시) 쯤에 비내리는 소리가 들렸다. 김제 홍산 종인 병고(炳鎬)의 답서가 왔다.
 
 
 

4월 10일

 
21
비가 올 기미가 가시지 않았다. 신시(오후 3시에서 5시)가 지난 후 개었다. 선비 이재옥(李載玉), 선비 이봉숙(李鳳淑), 선비 한병리(韓秉履)가 와서 보았다. 진안 수령에게 답서를 써서 부송(付送)하였다. 면읍(沔邑) 유리(兪吏) 진좌(鎭佑)·치헌(致憲)이 고목(告目)을 인편에 보내어 왔다.
 
 
 

4월 11일

 
23
맑았다. 면편(沔便)에 답패를 두 유리(兪吏)에게 회부하였다. 삼종제(三從弟)가 돌아갔다. 종질 동기(東騏)에게 편지를 부쳤다. 상경하는 일로 말미를 받아(휴가를 받아)서 완부(完府)로 출발하여 가다가 점심에 노암점(蘆巖店)에 다다랐다. 직지(直指) 어른과 우연히 만나서 다소간 간략하게하고 갔다. 또 서울에 사는 윤강령(尹康翎) ○병(○炳)을 점사(店舍)에서 만났다. 운봉에서 돌아갈 때에 마침내 고별하고 십리가량을 갔다. 도로에서 족제(族弟) 사과(司果)409) 용순(容淳)을 만났다. 나무 그늘에 앉아서 술잔을 기울이고서 헤어졌다. 몇 리쯤 가다가 또 점사에서 참봉(參奉) 구중식(具重植)을 만나서 막혀있던 흉금을[阻懷] 간략히 이야기하고 이내 헤어졌다. 김령(金令)이 서울에서 돌아왔다고 한 지가 이미 여러 날이다. 술잔을 주고 받으며 말하니 날이 이미 저물었다. 역참[郵]에 들어가서 주인 정감찰(鄭監察) 집에서 유숙하였다. 참봉 이제성(李濟成)이 찾아와 번갈아가면서 깊게 온화(穩話)하고 돌아갔다. 영암 주암 종인 항순(恒淳)이 찾아왔다.
 
 
 

4월 12일

 
25
맑음. 아침에 선화당410)에 들어가 읍의 일을 간략히 진술하고, 매우 간절히 휴가를 줄 것을 청하였지만 허락받지 못했다. [以請由苦懇 竟未獲準] 마침내 고별하고 관사로 돌아왔다. 송촌(松村) 김령(金令)이 밤사이 기거(起居)를 묻는 편지를 보내니 답하여 보냈다. 참봉 이제성(李濟成)이 또 찾아 왔다. 生 윤광오(尹光五)가 찾아왔다. 수령 윤강령(尹康翎)이 중간(中路)에서 유숙하고 찾아와 그 편에 전동(典洞) 종인 광양(光陽) 사규(思圭)에게 편지를 부쳤다. 그리고 고별하였다. 봉산동(鳳山洞) 진사 오좌두(吳在斗)의 집에 들어가니 마침 출타하였고[適値出他] 그 막내 진사 재호(在浩)가 주인을 대신하였다.[替爲主人] 미리 술상이 나오고 계속해서 점심밥이 나왔다. 또한 남에게 폐를 끼치니 거처가 편치 못하다. 마침내 출발하여 오원점(烏院店)에서 횃불을 들고 마을로 돌아왔다. 밤이 이미 이고(二鼓)411)가 지났다. 장아안택(張雅安澤) 숙질(叔姪) 및 창평 종인 尙留·萬直宗이 진부(晉府)에서 돌아왔다. 촉사(矗使) 답서와 산청수령 답서가 왔다. 함양 이방 답고목(答告目)과 산청 형리 이은석(李殷奭) 고목도 또한 당도하였다. 남원 병교(兵校) 이홍우(李洪宇) 고목도 있었다. 대빗(竹梳)과 낙죽(烙竹)412) 등의 물건을 보냈다.
 
 
 

4월 13일

 
27
맑음. 아들 익이 돌아간다고 알렸다. 오산 이(李)씨 친구에게 사례하였다. 경내 사람들이 이르길 내가 휴가를 받아 상경하여, 남쪽으로 돌아오는 기간이 없다고 한다[無南還之期]. 윤통(輪通)을 보내어 만류할 계획을 위하여 모두 모였다. 장보(章甫: 선비)도 많이 왔다. 농민 또한 가담하였다. 이 어찌 망거한 짓인가. 괴탄하여 깨닫고 돌아갔다. 내가 휴가를 얻지 않았다는 소식을 듣고 모두 파귀하였다고 하였다. 여러 선비가 와서 모인 것이 구일(九日)과 같다. 다시 기억하고 싶지 않았다. 신시부터 하늘에 비가 내리려는 징조가 있었다.
 
 
 

4월 14일

 
29
비가 그쳤다. 오후에 그쳤다. 사과 이규채(李圭采)가 입견하였다. 저동(苧洞) 대장(台丈) 이유승(李裕承), 회동(會洞) 승지 이만교(李萬敎)에게 재서(載書)하기 위해 장차 상경할 것이라고 말하였다. 요컨대 전전(轉傳)하게 하였다. 윤도정(道正), 진사 이병의(李炳儀), 색장 이종학(李鍾學), 선비 이영우(李瑛宇), 도훈 이동의(李東儀), 참봉 이현의(李賢儀), 훈장 최봉기(崔鳳紀)가 와서 보았다. 감찰 조재홍(趙載洪), 감역 하임용(河任容)이 와서 보았다. 운봉 종인 경근(慶根)이 내방하였다. 태인 남촌(南村) 수만동(水滿洞) 종인 정환(鼎桓), 필화(必華), 영식(榮湜), 장헌(章憲), 규헌(奎憲)이 찾아왔다.
 
 
 

4월 15일

 
31
맑음. 이른 아침에 운수관(雲水館)에 가서 망배례하고, 이어 원래대로 곡위를 보고 절을 하고 나서 교궁에 가서 봉심례를 거행한 다음에 제실에 들어 세 교임과 함께 만나 이야기를 나누고, 마침내 거처로 돌아왔다. 각방을 점고(點考)하고413) 권정을 행한 것이 선비 유제근(柳濟根)이라고 한다. 어사에게 문안드리기 위하여 남원읍에 갔다. 또 족제 사과에게 편지를 부치고, 또한 교리 이홍우(李洪宇)에게 답패를 보냈다. 강진 선비 이병화(李炳和)가 와서 보고, 그날 밤 또 읍사로 어사에게 안부를 물었다.
 
 
 

4월 16일

 
33
맑음. 선비 유재수(劉載秀), 홍아종국(洪雅鍾國)이 와서 보았다. 운봉 종인 용근(容根)과 형근(馨根)이 찾아왔다. 진잠(鎭岑) 남계(藍溪)에서 교관 신택수(申澤秀)가 남원에서 돌아가는 길에 역방하니 감개무량하다. 같이 저녁식사를 하였다. 종인 종원(鍾遠)이 와서 만났다. 윤도정이 보낸 편지에 답해 보내었다. 면천 원사동 이노사문(李老思文)의 아들이 와서 보았다. 산소가 안녕하니 다행한일이다.
 
 
 

4월 17일

 
35
맑음. 신교관이 작별하고 돌아갔다. 그가 돌아가니 몹시 서운하고 섭섭하다. 운봉 종인 삼원(三員)이 장차 진안에 가서 전달할 것이다. 그 편에 각각 해당 군수에게 편지를 보냈다. 중계원(中桂院) 종인 홍구(洪耈), 사과(司果) 김영헌(金映憲)이 와서 보았다. 구고 종인 종헌(宗憲)이 보낸 편지에 답해 보냈다. 강진(江津) 훈장 이병렬(李炳烈)이 와서 보았다.
 
 
 

4월 18일

 
37
이른 아침에 맑았고 저녁에 반쯤 흐렸다. 진사 최홍석(崔泓錫), 선비 최○평(崔○坪)이 와서 보았다. 면천 이생(李生)이 작별하고 돌아갔는데, 그 편에 유리(兪吏) 치헌(致憲)에게. 유리 치패문을 전하였다. 순창수령의 편지가 전편(轉便)으로 도착하였다. 창평 종인 규덕(圭德)이 작별하여 돌아가고 그 편에 절산 종인 휴덕(休德)에게 몇 자 적어 보냈다. 강진 훈장의 편지가 있어 답해 보냈다. 선비 한학교(韓學敎)가 찾아와 보았다. 목천(木川) 신촌(新村) 유선비가 謫過 入見하였다. 오후 날씨에 흙비가 있었다. 상동에 우거하는 최심제가 찾아왔다.
 
 
 

4월 19일

 
39
맑음. 제동(齊洞) 조민희(趙民熙) 편지가 완편으로 왔다. 완사의 편지가 도달하고, 연이어 참봉 이제성(李濟成) 편지도 또한 왔다. 함께 답하여 보냈다. 계사(稽謝)할 뜻으로 답하니 하북(下北) 도사 김양근(金瀁根)에게 편지를 부쳤다. 동복 종인 경환(敬煥)이 서울에서 돌아왔다. 전동 유하태(遊霞台)의 편지, 조민희 편지, 주서 신성묵(辛成默)의 편지가 또한 왔다. 종인 종헌이 와서 보았다. 동곡에 가서 살피고 돌아왔다. 아들 익의 편지를 보고 집에 아무 일이 없이 돌아온 것을 알았으니 정말 다행이구나. 선비 류제근(柳濟根)이 남원에서 돌아와서 보았다. 오후에는 흙비 같은 것이 내렸다.
 
 
 

4월 20일

 
41
이른 아침에 안개가 끼고 저녁에 맑았다. 동복 종인이 돌아갈 때, 순창수령에게 안부편지를 보냈다. 또한 동복 종중에도 몇 자 적어 보냈다. 종헌, 종운(宗云)이 남원에 가서 그 편에 사과 족제(族弟)에게 편지를 보냈다. 또한 구례종중에 편지를 보내고, 송촌 김령이 단오절부채[節箑]와 화전(花箋)414)을 해서 주니 매우 감사하다. 완사의 안부를 살펴 전했다. 또한 김령에게 답장을 보내고, 윤광오가 영촌(嶺村) 이참봉이 회견하여 답한 것에 대해 편지를 써서 부친 것을 보냈다. 어사의 서찰과 족제 사과의 서찰이 전편에 당도하였다. 완덕천(完德川) 수령 김동석(金東錫)의 편지에 아직 답하지 않았다. 양주 고령 족숙(族叔) 형진(瀅鎭)이 찾아와 머물었다. 종인 용근(容根)과 경근(慶根)이 진안에서 돌아와 보았다.
 
 
 

4월 21일

 
43
맑음. 읍의 일로 인하여 이른 아침에 남원으로 갔다. 오수점에 이르러 아침 식사를 하고, 말에게 먹이를 먹였다. 오후에 남원읍에 다다랐다. 족제 사과가 서면으로 어사가 수령이 입견하면 평복을 입고 있다고 하였다. 이내 간략히 읍사에 대해 조사하고 고퇴(告退)하여 족제 사과 처소에 들어 참봉 중식(重植)과 함께 같이 머물었다. 안부를 묻는 편지까지 썼다. 사과가 술잔을 내와 서로 술잔을 주고 받았다. 이들과 헤어지고 여관으로 돌아왔다. 종인 종헌이 아직 입견하고 돌아오지 않아 머물렀다. 교리 이홍우(李洪宇)가 와서 나타났다. 그래서 주면상을 올렸다. 번번이 폐를 끼쳐 심히 불편하다. 마침내 출발하여 전석치점(磚石峙店)에 이르러 돌아보니, 날이 이미 저물어 유숙하였다.
 
 
 

4월 22일

 
45
오전에 맑고 오후에 흐렸다. 아침에 출발하여 오수점에 이르러 아침을 먹었다. 순창수령에게 편지를 썼다. 변규호(邊奎浩)가 약속한 보낸 편지를 동봉하였는데, 하인 편에 확실하게 전하였다. 출발하여 평당점(坪塘店)에 이르렀다. 좌수 이병록(李炳錄), 한○○ 도좌(道左)에게 안부를 묻고 관아로 돌아가니 오경(午景)이 아직 기울지 않았다. 하인이 돌아왔다. 완사장과 송촌 김령, 윤광오가 왔다. 하북면 월은(月隱)에 사는 진사 백락두(白樂頭)의 편지가 있어, 단오절 부채를 주어 답사하였다. 도사 김양근(金瀁根) 답함(答函)이 당도하였다. 하북면 월은(月隱)에 장의 이영우(李璟宇), 선비 홍종성(洪鍾晟)이 와서 만났다. 진안 수령이 장차 남원을 역방할 것이니 기쁘고 위안이 되는 것이 비할 데 없다. 그로 인하여 유숙하였다. 운봉 갈계(葛溪) 도유사(都有司) 종인 원익(源益)과 그 족질 윤근(允根)의 편지가 있어 보냈다. 함양 김씨 무덤이었기 때문에 파고 갔음을 알려오니, 나는 박씨이니 기쁘고 다행함이 이보다 더 큰 것이 어디 있겠는가. 아주 통쾌하다. 신각(申刻)부터 천둥이 치고 비가 내렸다. 여산 수령 재완(在完)의 편지가 있어 답해 보냈다.
 
 
 

4월 23일

 
47
맑음. 진안수령이 남원으로 떠나고 간략하게 족제 사과에게 몇 자 적어 보냈다. 오산 친구 권양수(權陽壽)의 편지가 있어 답송하였다. 영촌(嶺村) 이참봉, 종인 홍근(泓根)이 와서 만났다. 진안 장령(掌令) 유병수(劉秉洙)가 남원에 가서 역방하니 매우 위안이 되었는데 바로 이별하였다. 이는 상이암(上耳菴) 중개인 문엽(文燁).덕성(德成)이라고 할 수 있다. 삶은 미역 향채를 가지고 와서 안부를 물었다. [是能上耳菴儈文燁德成 持煮藿香菜而來問]
 
 
 

4월 24일

 
49
맑음. 고을의 일을 해결하고 남원으로 갔다. 어사에게 안부를 물었다. 족제 사과에게 편지를 부치고, 오진산(吳珍山)의 편지가 있어 단오절 부채를 주어 답해 보냈다. 남원 사동(社洞) 김아응술(金雅應述), 선비 윤태윤(尹泰允)이 와서 만났다.
 
 
 

4월 25일

 
51
맑음. 갈계(葛溪) 종인 윤근(允根)과 작별하고 그 편에 도유사 종인 원익(源益)에게 편지를 부쳤다. 또한 김정완(金正完)의 무덤을 수령으로 하여금 파게 한다는 뜻에 사례하기 위해 함양수령 오성묵(吳成默)에게 편지를 부쳤다. 또 함양 수서기(首書記) 문진(文鎭), 송촌 김령에게 패를 보내고 그 편에 동문외(東門外) 오위장(五衛將) 김○○(金○○)의 편으로 온 편지가 있어 보냈다. 친구 홍종국(洪鐘國)이 와서 보았다.
 
 
 

4월 26일

 
53
아침에 흐렸다. 김오위장과 작별하고 그 편에 송촌 김령에게 편지를 부쳤다. 읍내 인편으로[邑便]으로 완사에게 문안을 올렸다. 또한 감찰 정군일(鄭君一)에게 편지를 보냈는데 미처 보내기 전에 송촌 김령과 정감찰의 편지가 인편으로 당도하여 함께 답해 보냈다. 오늘 교열루(敎閱樓)에 갔더니 차례로 잡아 들여서 풍속에 상처를 입힌 정신병(病風)을 가진 죄인 칠놈이 갇혀있었다. 상인(市人)을 모아 놓고서 징일여백(徵一礪百)을 보일 수 있도록 그들의 태형을 집행하고 잠시 관아에 돌아왔다. 바람은 빗발이 주륵주륵 따라 불더니 잠시 처마 밑 풍경이 그쳤다. 태인 생원 김진풍(金鎭豊)이 와서 보았다. 일을 마치고 돌아갔다. 어사와 참봉 구중식(具重植), 족제 사과의 답장이 왔다. 인편으로 진안수령에게 편지를 보냈다.
 
 
 

4월 27일

 
55
맑음. 아침에 어사와 족제 사과에게 편지를 썼다. 갈계 종인 용근과 경근이 완산에서 돌아와 보았다. 종인 종원(鍾遠), 영주(永洙) 선비 한규섭(韓圭燮) 선비 이영규(李永奎) 상인 홍재규(洪在圭)(진사 한섭(漢燮)의 아들이다)가 와서 보았다. 사각(巳刻:10시경)부터 고산(孤疝:, 디스크)가 갑자기 생겨서 의사 진찰을 계속 받으니 답답하고 애달프다. 동복 종인 경환(敬煥)이 사종(四從) 일환(日煥)과 종질(從姪) 재형(在灐)이 와서 만났다. 아직 함양김씨의 무덤을 파는 소식을 아직 듣지 못하여 장차 서울에 가고자 한다.
 
 
 

4월 28일

 
57
아침에 맑고 오후에 흐렸다. 증상이 약간 나아져 세수하고 머리 빗고 일을 시작하였다. 오진산(吳珍山)에 편지를 썼는데 편지가 아직 도착하지 않았다. 친구 오진산에게 편지가 왔는데 내일 생일에 와서 보아달라고 청하여, 답해 보냈다. 하인이 갔다가 왔다고 알려 보았다. 읍편으로 완사에게 안부를 물었다. 남원 선비 이면고(李冕鎬)가 와서 보았다. 조태종필(趙台鍾弼)의 편지를 직접 전하였다.
 
 
 

4월 29일

 
59
맑음. 동복 종인 세 명이 돌아가고 식사를 한 후에 교자를 불러 학산(鶴山)에 갔다. 오진산의 부자조손(父子祖孫)이 그곳에 나가서 안부를 묻고 좌정하였다. 멀고 가까운 이웃 동네의 여러 선비가 많이 모였다. 잠시 술상을 올리고 계속해서 큰 한상이 잇달아 올라오고 다음에 매우 잘 준비한 오반이 나왔다. 관주의 음식과 비교할 수 없다. 그러는 동안 취하고 또 배부르니 가문(門闌)이 융화하고 영성하였다. 사람들로 하여금 부러움과 찬탄을 자아내게 하였다. 이미 날이 어두워지니 헤어지고 도평점(島坪店)에 이르러 횃불을 잡고 관아로 돌아오니 그때가 이고(二鼓:오후 9시에서 11시 사이) 가량이었다. 완사와 촉사 족제 사과의 담합(答函)이 왔다.
 
 

 
60
* 각주
 
61
404) 主倅 : 예전에, 자기가 사는 고을의 수령을 이르던 말.
62
405) 注書 : 조선시대 승정원의 정7품 관직
63
406) 烙畫 : 달궈진 인두로 나무나 종이 등에 글씨나 그림을 그려내는 전통 공예
64
407) 上甲 : 매달 음력 초하룻날.
65
408) 절삽(節箑)/절익(節扇): 단오절에 진상, 또는 선사하는 부채. 부채를 만드는 지방에서는 단오절에 왕실에 진상하고, 그 지방 관찰사와 절도사는 서울에 있는 대신과 친지들에게 선물로 주었음.
66
409) 司果 : 조선 시대 중앙의 5위(五衛)에 소속된 정6품 서반직.
67
410) 宣化堂 : 조선시대에 각도의 관찰사가 집무(執務)하던 정당(正堂).
68
411) 二鼓 : 대략 오후 10시를 전후한 시간을 말함. 오경(五更)의 이경(二更), 오야(五夜)의 을야(乙夜)와 같음.
69
412) 烙竹 : 달군 인두로 지져서 무늬를 놓거나 그림을 그린 대(竹)
70
413) 點考 : 명부에 일일이 점을 찍어 가면서 사람의 수효를 조사하는 일
71
414) 화전(花箋) : 무늬가 있는 편지지
【원문】정유년(1897)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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