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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시순(朴始淳) 일기(日記) - 운불일기(雲紱日記) ◈
◇ 을미년(1895) 10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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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시순(朴始淳)
- 임실문화원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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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을미년(乙未年, 1895) 10월
 
 
 

10월 1일 무진

 
3
아침에는 맑고 저녁에는 구름이 꼈다. 일찍 운수관(雲水館)에 가서 망하례(望賀禮)를 행하였고, 인하여 교궁(校宮)에 가서 장차 분향례(焚香禮)를 행하였다. 일도강장(一道講長) 노학규(魯鶴奎), 신안강장(新安講長) 오병일(吳秉一), 구고강장(九臯講長) 한규엽(韓圭燁), 옥전강장(玉田講長) 홍종성(洪鍾晟), 상운강장(上雲講長) 최헌익(崔憲翼), 덕치강장(德峙講長) 이종권(李鍾權), 하신덕강장(下新德講長) 신학균(申鶴均), 읍내강장(邑內講長) 서상용(徐相庸) 등이 각각 강생들을 거느리고 와서 명륜당 앞 마당에서 기다리고 있다가 인하여 나와 더불어 대성전에 들어가 사배례(四拜禮)를 행하고 나서 재실(齋室)에 들어갔다가 장차 돌아왔다. 각 면의 강장들로 하여금 유학들을 거느리고 이를 쫒았다. 드디어 관아에 돌아와서 강좌를 열고 도강장(都講長) 윤도정(尹都正), 장의(掌儀) 이동의(李東儀)가 차례대로 자리를 잡았다. 강생들이 각자 단자를 드리고 그 나이에 따라 차례대로 책을 집어 앞에 두었다. 또 이인강장(二仁講長) 양석구(楊錫九), 신평강장(新平講長) 박형근(朴亨根), 상북강장(上北講長) 이봉숙(李鳳淑), 하북강장(下北講長) 이재욱(李載旭), 상동강장(上東講長) 심진헌(沈鎭憲), 하동강장(下東講長) 송진수(宋鎭秀), 남면강장(南面講長) 김사국(金思國) 등이 각각 유학들을 거느리고 이어 이르렀다. 하운강장(下雲講長) 홍재기(洪在祺), 강진강장(江津講長) 이병익(李炳益) 등은 사정이 있어서 참여하지 않았다. 향약장(鄕約長) 이봉기(李鳳基), 참봉 이현의(李賢儀), 참봉 한경리(韓璟履), 종인(宗人) 민헌(民憲), 정국(鼎國), 유학 심필원(沈弼遠), 진룡(鎭龍), 진하(鎭廈), 유학 윤태근(尹泰根), 태윤(泰允), 유학 한학교(韓學敎), 유학 오석룡(吳錫龍), 상동 유학 박근(朴根), 상동 유학 최락(崔洛), 유학 한규태(韓圭泰), 유학 임남수(林南洙), 유학 이종호(李鍾浩), 좌수 이종원(李鍾元)이 모두 와서 모였다. 중산 유학 한홍석(韓泓錫)이 상서가 있어 饋以三尾魚 대필하여 이에 답하였다.{倩書答之} 도사(都事) 정혁조(鄭赫朝), 상중에 있는 심진표(沈鎭杓)가 모두 글이 있어 擾未及答之 날이 저물어 강학을 마치고 인하여 방(榜)을 걸어 알게하고, 14명과 통(通), 략(略), 조(粗)를 비교하였다. 모두 합이 132명이었다. 오각부터 작은 눈이 비와 섞여 내렸는데, 저녁이 되어 맑아졌다.
 
 
 

10월 2일

 
5
맑게 개어 따뜻하였다. 아침 일찍 비교되는 14명으로써 강하도록 하였고, 어린순서로 4번 출방하였다. 점심후 강생들을 불러 마당에 세우고 차례대로 호명하여 들어와서 배례하도록 하고 列坐頒賞 마치고나서 악공에게 명하여 악 1장을 연주하도록 하였다. 또 고금(鼓琴) 취생(吹笙)에게 명하여 以爲宣其湮鬱 역시 聖世 一樂事也 이미 여러 강장은 각각 유학들을 거느리고 돌아갈 것을 고하였다. 석양이 산에 걸렸다. 학산 진사 오재호(吳在浩) 專書 이금어(二錦魚)를 보냈는데 이에 감사하다고 답하였다.{答謝之} 함양(咸陽) 이방[吏] 동종(同宗) 두익(斗翊)이 마침 학산에 머물렀다. 고목(告目)이 있어서 또한 답하여 이를 보냈다.
 
 

10월 3일

 
7
맑음. 일찍부터 도사 정혁조, 상중에 있는 심진표 및 도감 신현표에게 답서를 써서 해당 명주인에 붙여 보냈다. 남부관찰사의 丈書가 우편으로 도착하였다. 성내에 사는 종인 영수가 와서 만났다. 이르기를 함양 사금동 상서공 선조묘소에 갔다고 하였다. 인하여 묘직에게 패지를 주어서 오는 16일 시향(시향)에 내가 장차 참가한다는 뜻을 알렸다. 하북 신흥사 승려 행진(行眞)이 2종의 감[二種柿]을 가지고 와서 문안하였다.
 
 
 

10월 4일

 
9
맑음. 남원수령의 편지가 우편으로 도착하였다. 完書 신흥리 감찰 김동현(金東炫) 有書 饋以百蟹醢 答謝之 읍예(邑隸)가 서울로부터 돌아왔다. 령 노영경(盧泳敬) 답서, 령 심재숙(沈在淑) 답서, 도사 김호승(金鎬承) 書 仁川의 多所 도사(都事) 및 족숙 영진(英鎭) 서 2개, 사(査) 李敦衡 書, 平山李雅晉培의 편지가 도착하였다. 또 고수진(高守鎭), 박덕유(朴德裕), 면천 이방 유창기(兪昌琦) 고목(告目)이 도착하였다. 姜台丈 文馨씨 實音 도착하였다. 경악하지 않을 수 없었다.{不勝驚愕耳}
 
 

10월 5일

 
11
아침 일찍 흐림. 홍태산(洪太山)이 돌아간다고 고하였다. 도유사 심국경(沈國慶), 친우 이종대(李鍾大), 노인 이사문(李思文)에게 서한을 주었다. 또 색리 이준상(李準相), 이영진(李榮鎭), 색리 유치헌(兪致憲), 조치근(趙致根)에게 답패를 주었다. 또 여산 수령 및 부여 겸호 족숙 윤석, 원석, 문익아에게 서한을 주었다. 장차 면천의 천원사 동묘사를 지낼 때 下來轉到한다고 한다. 그러므로 또 역시 몇 글자를 보냈다. 성아래 종인 찬수가 와서 만났고, 윤도정 이장의 경우가 入見하였다. 自已刻陰霏 오후에 다시 맑아졌다. 청양 이목동의 족숙 영진이 방문하였고 이내 머물렀다.
 
 

10월 6일

 
13
소설이다. 아침부터 흐렸다. 사각(巳刻)에 빗방물이 흩뿌렸다. 우체(郵遞)로 남부(南府) 관찰사에 안부편지를 올렸다. 또한 남원 사또에게 편지를 부쳤다. 또한 순창 사또에게 편지를 부쳤다. 또한 순창 교리 권태식(권태식)에게 위문장[唁狀]을 부쳤다. 부여의 염호의 족숙 창석(창석)이 來訪하였고 이내 유숙하였다. 친구 정노진(鄭魯鎭)의 편지를 직접 전해주었다. 읍편으로 송촌(松村) 김 령(金令)에게 편지를 부쳤다. 도정 윤재재(尹在齋)가 물고기[川魚]를 선물로 보내와서 편찰로 감사하다고 답장하였다. 장의(掌儀) 이경우(李璟宇)가 저녁을 틈타 들어와 만났다.
 
 
 

10월 7일

 
15
날씨가 개어 따뜻하였다. 영촌(嶺村)의 진사 이병의(李炳儀)가 편지하였는데 찬물(饌物)로 세 가지를 선물로 보내와서 감사하다고 답장하였다. 윤 도정(尹都正)이 들어와 만났다. 이장의(李掌儀)가 작별하고 돌아갔다.
 
 
 

10월 8일

 
17
유학 한학교(韓學敎), 종인 홍근(泓根), 유학 한홍석(韓泓錫), 유학 홍종성(洪鍾晟), 유학 한형리(韓炯履)가 찾아와 만났다. 홍산(鴻山)의 족형 응순(應淳)이 찾아와 묵었다.
 
 
 

10월 9일

 
19
이른 아침에는 흐렸다가 저녁에 맑아졌다. 남부 참서관(參書官)의 편지가 轉遞로 도착하였다. 도정 홍병일(洪秉一), 유학 송희옥(宋曦玉), 유학 이재욱(李載旭)이 찾아와 만났다. 장의 이경우(李璟宇)가 편지하였는데 고기반찬[饌肉]을 선물로 보내서 감사하다고 답장하였다. 참봉 이현의(李賢儀)가 편지하였는데 찬물로 3종을 선물로 보내 감사하다고 답장하였다. 종인 종헌(宗憲)이 3종의 물품을 가지고 들어와 만났다. 유학 변규호(邊奎浩), 좌수 이종원(李鍾元), 유학 노병석(魯炳錫)이 찾아와 만났다.
 
 
 

10월 10일

 
21
맑았다. 남부 관찰사의 답서가 郵遞로 도착하였다. 부여의 족숙 홍석(弘錫), 종인 종헌(宗憲), 신안에 사는 종인 정두(鼎斗), 읍내 응직(應直), 동근(東根)이 나보다 먼저 함양에 성묘하러[楸行] 출발하였기에 함양읍의 전 이방 두진(斗鎭)에게 편지를 부쳤다. 읍편으로 남부 참서관에게 펴지를 부쳤다. 윤 도정(尹都正)의 정성으로 인해 진안 사또에게 편지를 부쳤다. 평산에 살고 있는 친구 서상세(徐相世)가 남원에 가려던 차에 지나가다 방문하였는데 소식이 막혀 있던 나머지 매우 위로가 되었다.{阻餘甚慰} 그와 함께 저녁밥을 먹었다. 송촌의 김 영감의 편지가 轉便으로 도착하였다. 면천의 관노 등길(等吉)과 동생(同生)이 委來하여 이방 유규항(兪圭恒), 치헌(致憲), 최영준(崔永俊), 이방 유치갑(兪致甲), 관노 등길(等吉), 계수(桂秀)의 고목(告目)을 얻어 보았다. 또 초택(草澤)의 친구 이은갑(李殷甲), 노인 이사문(李思文)의 편지가 도착하였다. 상중에 있는 정혁조(鄭赫朝)와 심진표(沈鎭杓), 유학 이재옥(李載玉)이 찾아와 만났다.
 
 
 

10월 11일

 
23
이른 아침에 흐렸는데 이각(巳刻)에 비가 약간 뿌렸다가 다시 맑아졌다. 진안 마령촌의 진사 오도한(吳道漢), 전주 생원 최덕길(崔德吉)이 찾아와 만났다. 친구 서상세가 고별하고 남원으로 갔다. 말과 하인[六足]426)을 빌려 주어 타고 가게 하였더니{代步} 보내 왔다. 유학 노병석이 찾아와 만났다. 부여의 족숙 창숙이 작별하고 돌아갔다. 친구 정노진(鄭魯鎭)에게 감사편지를 부쳤다. 읍편으로 완서(完西) 송촌(松村)의 김 영감에게{金令}에게 편지를 부쳤다.
 
 
 

10월 12일

 
25
맑았다. 청양(靑陽)의 족숙, 홍산의 족형이 작별하고 돌아갔다. 이른 아침에 함양 안의 등지로 출발하였다. 성묘하러 가는 길에 고마(雇馬)를 얻어 타고 갔다. 통인(通引) 1명, 관노 1명, 사령 1명이 뒤를 따랐다. 오후에 오수역에서 말에게 꼴을 먹였다. 완산 사람 참봉 이용섭(李龍涉)을 만났는데 아버지 산소에 석물(石物)을 하는 일로 와서 묵었다고 한다. 관예(官隸)에게 往通하게 했더니 隨回隸卽來見 그와 함께 잠시 얘기 나누었다. 드디어 출발하여 남원 ▨▨▨에 이르렀다. 길을 가는 중에 친구 서상세의 편지를 보았다. 그리하여 북문 밖에 도착하였을 때 본읍의 이방 진신엽(晉臣燁)이 혼례일로 여기에 와서 길가에 나와 기다리고 있었다. 일행이 부저(府邸)의 이방의 집에 이르렀는데 이방 강태진(姜泰鎭)이 入現하더니 술상을 내어 왔다. 진 이방(晉吏房)의 처남 아전 서동수(徐東壽)가 또 주안상을 내어 왔다. 친구 서상세(徐相世)가 하인을 보내 문안하여 답장을 보냈다. 저녁을 먹은 후에 관찰사를 찾아 뵈었고, 지나는 길에 참서관과 남원 사또를 만나고 돌아왔다. 밤은 이미 五鼓에 이르렀다. 이날 70리를 갔다.
 
 
 

10월 13일

 
27
맑았다. 친구 서상세(徐相世)가 찾아와 만났다. 돌아가게 된 연유에 대해 알리니 사람으로 하여금 悵歎스럽게 하였다. 남원 현계의 친구 강한흠(姜漢欽)이 찾아와 만났다. 인신(印信)을 가지러 출발하려고 남원 사또에게 보냈는데 성(城)을 끼고 가면서 동쪽으로 동문(同門) 밖에 이르렀다. 진리(晉吏)가 먼저 와서 기다리고 있다가 작별하고 돌아갔다. 십궁지(十弓地)에 도착하였는데 들녘에 사찰이 있었다. 선원사(仙源寺)라는 이름의 절이다.
 
28
사찰은 관아가 있는 큰 길가에 있었는데 수석(水石)도 숲도 없는 승경지로 이른바 스님들도 홍진(紅塵)을 면할 수 없는 모양이었다. 길을 나서 여원령(女院嶺) 아래 이르렀다. 돌길이 매우 구불구불하고 험난해서 말에서 내려 걸어갔다. 여원령의 동쪽은 바로 운봉(雲峰)의 경계이다.
 
29
세상에 전하는 말에, 옛날에 우리 태조 강헌대왕이 아지발도(阿只拔都)를 정벌한 곳이다. 군사 일행이 여원령에 도착하였는데 아름다운 여인이 나오더니 태조의 손을 잡았다. 태조가 검을 뽑아 그 손을 베었다. 이 行師가 대첩으 공을 세웠다. 후인들이 그여인의 형상을 바위에 새겨 두었는데 지금까지 남아있다. 그래서 그 고개를 “여원령”이라고 한다. 고개길의 좌우에 이따금 영루(營壘)가 있는데 작년 가울에 동학군이 소요하였을 때[東擾] 운봉에서 調兵防守하였다고 한다.
 
30
여원령에서 10리 쯤되는 곳에 이르렀는데, 산중의 야색(野色)이 드넓게 열리더니 여염집이 즐비하니 운봉의 읍내이었다. 관문(官門) 밖에 이르니 사또 이 영감이 문을 열고 맞이하였다. 좌정하고 인사를 나누니 정담을 끊어지지 않고 이어졌다.{娓娓} 먼저 주안상을 내어 오더니 이어서 점심밥을 내어 왔다. 든든히 먹었으니 매우 감사하다. 얼마 있다가 출발하여 비전가리(碑殿街里)에 이르렀다. 이곳이 우리 태조가 아지발도를 사로잡은 곳이다. 후에 비석을 세우고 전각을 건립하였으니 숭봉(崇奉)하는 가르침으로 삼았다. 갈 길이 너무 忙迫하여 봉심하지 못하고 지나갔다. 인월장정(引月場店)에 이르렀는데 날이 이미 저물었다. 민간에 전해오기를 태조가 아지발도를 사로잡았을 때 해가 저물고 밤이 깊어 인마를 구별할 수 없었는데 잠깐 동방(東方)에서 어둠을 깨고 빛이 비추더니 달이 나온 것 같았으니 하늘이 도우신 것이었다. 후인이 그 곳을 “인월(引月)”이라고 하였다. 드디어 머물러 잤다. 이날 60리를 갔다.
 
 
 

10월 14일

 
32
맑음. 이른 아침에 출발하여 팔령치(팔령치)를 넘었다. 고개 동쪽이 바로 함양의 경계이다. 말에게 채찍질하여 위천(渭川)을 건넜다. 함양읍에 이르렀는데 부여의 족숙 및 종인 종헌, 정두, 영수와 응직, 동근이 점사(店舍)에 있으며 기다리고 있었다. 드디어 점사에 들어갔다. 관예를 보내 함양읍의 이방 박계훈(박계훈), 호장(호장) 박문찬(박문찬)을 불렀다. 모두 동종이다. 전 이방 두진(혹은 문광(문광)은 상경하였는데 돌아오지 않았다고 한다. 공형 및 퇴직한 아전[退吏] 문선(문선), 退校한 동술(동술)이 찾아왔다. 이어서 해당 읍의 동종 석극(석그), 사과 진하(진하), 석사 응우(응우)가 찾아와 만났는데 묘사(墓祀)에서 차정한 삼유사(三有司)이다. 상서공(상서공)의 산소 단안산(單案山)은 다른 성씨가 점유한 지 이미 100여 년이 되었다고 한다. 점유한 사람은 해읍의 이속(吏屬) 김세완(김세완)이다. 관예를 보내 불러서 문적(文蹟)이 있는지를 따져 물었더니 없다고 대답하였다. 이에 의치에 의거하여 責諭하였더니 김세완이 還納할 뜻으로 다짐을 바쳤다. 조금 억울함이 풀렸다. 이렇게 읍내에 살고 있는 시조의 후손이 이교(吏校)되어 수호(守護)를 잘 하지 못하고 이렇게 협잡하여 간사함이 허용되었으니{挾雜容奸} 責之何益 歎之何補 얼마 있다가 공형의 집에서 술과 안주를 준비하여 내어 왔다. 저녁밥은 이방의 집에서 이바지 하였다. 해읍의 장항리(獐項里)의 족인 규석(규석), 종석(종석), 진석(진석)이 찾아와 만났다. 드디어 유숙하였다. 이날 30리를 갔다.
 
 
 

10월 15일

 
34
맑았다. 아침반은 호장의 집에서 이바지하였다. 밥을 먹은 후에 출발하여 사금동(賜琴洞)에 갔다. 군의 동남방으로 5리쯤 떨어져 있다. 신도비각(神道碑閣) 앞에 이르러 묘지기 박○○가 먼저 와서 나를 기다렸다가 인하여 비각을 봉심하고 이를 읽었다. 지제(趾齋) 민진후(閔鎭厚)가 이를 지었다. 족대부 고승지 명화(鳴和)가 글을 썼다. 참판 김정균의 기(記)가 음각되어 있었고 자손록이 갖추어져 실려 있었다. 재실에 들어가니 영명재(永明齋)라는 세글자가 편액으로 걸려있었다. 원근의 여러 종인들이 와서 모인 사람이 50여 명이었다. 그중에는 운봉 갈계(葛溪) 종인 원익(源益), 익(益), 용근(容根) 숙질은 일찍이 친척으로서 안면이 있는 사람이었다. 배읍례(拜揖禮)를 행하기를 마치고 도유사가 술과 안주를 내왔다. 곧이어 성묘록(省墓錄)과 재실에 전하는 문적에 대략 적었다. 위의 묘소에 이르니 묘좌(卯坐)가 되는 곳에 단갈(短碣)이 있고, 새기기를,‘고려조 예부상서 함양박씨의 묘’라 하였다. 산이 모아들고 물이 돌아들며{山拱水環} 기가 모아져 맑고 맑으니{萃氣淸淑} 감여가(堪輿家)가 말하기를 괘등형(掛燈形, 등을 거는 형국)이라 하였다. 함양의 8대 명당 중에 하나이다. 내가 초헌관(初獻官)으로서 제사와 음복을 마치고 다시 재실에 돌아오니 안산과 백호의 가까운 땅에 다른 사람의 묘가 3~4곳이 있어서 불가불 금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내 각처의 여러 종중에 내년 3월 그믐날 대종회(大宗會)를 한다는 뜻으로 통문하였다. 그래서 여러 종중과 손을 잡고 헤어졌다. 드디어 부여 족숙과 함께 해당 읍 개평(介坪) 교리 노태현(盧台鉉) 집에 들어갔다. 그 동네에 갔는데 천석(泉石)이 으슥{幽邃}하고 마을에 집이 즐비하였다. 성시(城市)의 모습에는 남쪽에는 큰천이 흘러 마을을 안고 얽혀 돌아 흐른다. 수전(水田)은 수백 경의 膏沃이 있어 흉년이 없는 살만 한 땅이라고 하는 곳이 반드시 이 동네가 최고일 것이다. 사람으로 하여금 欣然하게 膏秣從盤한 생각이 들게 한다. 盧友가 바로 나와 함께 同竣 일기청(日記廳)의 찬집(纂輯)의 역이다. 교분이 매우 친밀한 사람이다. 그 집에 들어갔는데 노우는 마침 묘사(墓祀)에 가서 돌아오지 않았다. 그 아들 상사 근수(근수), 그 동생 석사 경현(競鉉) 및 친족 지수(趾洙)가 들어와 만났다. 잠깐 있다가 노우가 돌아와서 손을 잡고 인사를 나누었다. 술상을 내어 왔는데 이어서 저녁밥을 내어 왔다. 매우 풍성하게 준비하여 든든하게 먹었다. 도로 마음이 편하지 않았다. 해읍의 아전 박시회(朴始會)가 마침 묵고 있어서 들어와 만났다. 이 사람도 동종이다. 학산(鶴山)에 사는 두익(斗翊)의 아버지이다. 드디어 유숙하였다. 이날은 20리 갔다.
 
 
 

10월 16일

 
36
이른 아침에 흐렸다. 노우(盧友)의 친촉 도사 길수(길수)가 찾아와 만났다. 장항리의 족인 규석(규석), 종석(종석) 형제가 어제 약속했는데 찾아왔다. 밥을 먹고나서 부여의 족숙 족인 규석과 함께 안의(安義) 땅에 성묘하기 위해 출발하였다. 종석은 자기 집으로 먼저 돌아갔다.{徑歸} 안의읍 동네어귀에 도착하였다. 소나무숲에 크고 오래된 소나무가 울창하였다. 대천이 휘감하 싸고 돌아 泉石이 매우 아름다웠다. 이따금 정사(亭榭)의 경승이 있었는데 사이에 물길이 시원하게 흘렀다. 크고 우렁찬 소리가 났다. 水田은 비옥하였고 인가가 조밀하였다. 진실로 웅장한 협읍(峽邑)으로 운봉과 함양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37
관아의 터가 바로 우리 선조 병판공의 유허이다. 지난 임진왜란을 겪을 때 10대조 부사공(부사공)께서 마침 안의현에 부임하였는데 부모님의 상을 당하여 머무셨다. 전쟁의 피해를 피한 후에 서울로 돌아오셨다. 그 상세한 내용이 가승(家乘)에 실려 있다. 관아 뒤에 감나무 몇 그루가 있는데 전해지기를, ‘병판공꼐서 직접 어린 나무를 심은 것이다.’라고 한다. 근래에 이르러 우리 선조의 후손으로 이곳에 사는 사람이 열매를 따야 하는데 연전에 땅주인이 억지로 팔았다고 한다. 후손들이 영락{零替}하여 거론할 수도 없다. 지금 이 읍을 지나가며 나도 모르게 텅빈 마음에 분하고 한탄스럽다.
 
38
처음 가는 길이 생소하여 사람을 만나면 물었더니 황곡면 신리는 읍앞의 천을 건너 동쪽으로 十弓之地이다. 길에서 한 사람을 만나 길을 물었더니 그 사람이 말하기를, “누가 가는 길인가?”하여 종예(從隸)가 임실에서 왔다고 대답하였더니 그 사람이 말하기를, “함양 사금동에서 왔는가?”라고 하여 종예가 그렇다고 하였다. 내가 바로 말에서 내려 이름을 물었더니 바로 신리의 종인 주일(周鎰)이었다. 그와 함께 점사에 들어가 묘소가 있는 곳에 대해 자세히 물었다. 그 종인이 본동의 송아(宋雅)와 더불거 찾아왔는데 본읍 니전(泥田)의 종인 외척으로 묘소를 수호하는 사람이었다. 점사에 인마를 묵게 하고 송아를 따라 어느 산의 계곡 입구에 이르렀는데 관음동(觀音洞)으로 묘소가 있는 곳이었다. 우리 17대 선조의 부인 상원(祥原) 최씨의 묘이었다. 무너져서 무덤 모양만 간신히 보존하고 있었는데 무덤의 오른쪽에 비석이 있었다. 下臼故老相傳 박씨의 신도비가 세워졌던 곳이라고 한다. 바로 선조비가 홀로 묻힌 곳이어서 신도비가 있을 수 없으니 자세히 말할 수 없겠다. 다만 무덤 뒤쪽에 한 자된 곳에 무너진 두 무덤이 있는데 박씨의 산소라고 전해지고 있다고 하니 틀림없이 우리 선조의 실전(失傳)한 산소일 것이다. 그러나 세보(世譜)나 가승에 명확하게 증명할 수 없으니 지금은 고찰할 수 없다.
 
39
무덤 오른쪽에 망주석(望柱石) 하나 없이 묘 앞에 단갈(短碣)이 있었는데 우리 11대조 무환당공(無患堂公)이 영남 관찰사로 부임하였을 때 쓰신 것이다. 어떤 사람이 훼착(毁鑿)하였는데 앞면에 새겨진 것은 ‘부사(府使) 박[諱某]妻’ 6자는 분명한데 그 아래 4자는 없어졌다. 후면에 새겨진 것은 7대손 관찰사(무환당 휘자)의 쓰신 글자획은 여전히 남아있었다. 어루만지며 삼가 읽노라니 나도 모르게 감격스럽고 서글픈 마음이 엇갈렸다. 가장자리 딱 붙은 곳에 읍에 사는 후손이 장사지냈고 무덤 뒤쪽 10여 걸음에는 유씨의 무덤이 있었는데 그 후손이 지금 10여 대가 되었다고 하니 지금 송사로 다툴 수는 없다.
 
40
용호(龍虎)의 좌우에는 이씨의 무덤이 5,6곳인데 연대가 그리 오래되지는 않았으니 송사로 다툴 수 있겠다.
 
41
소나무와 가래나무가 한 그루도 남아 있지 않고 이씨의 소유라고 하니 자손된 마음에 똑바로 볼 수조차 없다. 분하고 한탄스럽다. 배례를 행하고나서 국내(局內)를 살펴 보고 그만두었다. 돌아와 산의 중록에 이르니 신리에 사는 종인 5,6인이 내가 왔다는 얘기를 듣고 올라와서 인사를 나누었다. 다시 점사에 들어가니 점심밥을 내어왔다. 하늘이 흐리고 비가 내렸다. 해가 이미 누엇누엇 졌다. 여러 종인들이 만류하여 신리의 종인 ▨▨의 집에 갔다. 종인들이 마을을 이루고 있으니 일곱, 여덟 집인데 모두 가난하고 지탱하기 어려운 형편인데 종중에서 힘껏 끼니를 이바지하니 적지않게 폐를 끼쳤다. 도리어 너무 미안하였다. 종인 문영(文昶), 주홍(周弘), 주영(周榮), 주기(周岐), 주병(周秉), 주봉(周鳳), 주원(周元), 주필(周弼), 주영(周英), 대웅(大雄), 응천(應天), 학성(學聖) 모두가 와서 모였다. 정담을 밤이 깊을 데까지 나누었다. 새삼 심밀(深密)한 종의(宗誼)를 느꼈다. 이날 밤에 가는비가 뚝뚝 떨어졌다. 이날 25리 갔다.
 
 
 

10월 17일

 
43
이른 아침에도 비가 여전히 부슬부슬 내렸는데 사각(巳刻)에 이르러 조금씩 갰다.
 
44
듣자니 거창의 전항촌(箭項村)의 친구 윤충하(尹忠夏)가 사는 곳은 30리 떨어진 곳이라고 하기에 편지를 써서 들리지 못하고 서둘러 돌아가는 이유에 대해 써서 종인에게 맡겨 전해 달라고 하였다. 여러 종인과 작별하였다. 길을 나서 어제 말을 내린 점사에 이르렀다. 송아가 니전의 종인 집에서 돌아와 출타하여 만나지 못하는 이유에 대해 전하였다. 드디어 작별하고 말에 올라 읍에서 동쪽으로 5리 쯤 지났는데 석반정점(石盤亭店)에 이르러 말에서 내려 주막에 들어갔다. 주인을 불러 함양박씨 선산 묘소가 있는 곳을 물었다. 주인 상인(喪人)은 본관이 연산인데 올 여름에 와서 우거하여 술을 팔아 살아가고 있어서 알지 못한다고 답하였다. 그래서 애써 본동에 세거한 사람을 만나게 해달라고 하였더니 김 상인이 마지못해 본동의 어떤 사람을 오라고 하였는데 유기승(柳基升)[자는 경로(景老)]이었다. 인사를 마치고 선산(先山)을 방문하였다. 유아(柳雅)가 잘 알고 있어서 애써 함께 가자고 요청하였다. 100여 무에 이르렀는데 비가 와서 옷이 적었다. 매우 미안하였다. 5리 쯤에 비도현(飛刀峴)이라고 하는데 한 묘소를 가리치며 박씨의 선산이라고 하였다. 가서 보았더니 과연 우리 17대조 부사공의 묘소이었다. 무덤 앞에 단갈(短碣)이 있었는데 바로 무환당공이 쓰신 것이었다. 무슨 까닭인지 그 옆에 잘려 엎어져 있었다. 자손된 마음에 차마 똑바로 볼 수가 없었고 서글픈 마음이 오래갔다. 어루만지며 삼가 읽으니 자획은 온전하였다. 가장자리에 몇 개의 무덤이 있는데 동성(同姓)으로 이 산에 후손들이 입장하였다. 용호의 국내에 왕왕 점총(占塚)하는데 사이에 여러 유아(柳雅)라고 하는데 자세하지는 않다. 갑자기 조사하기는 어렵다.
 
45
국내에 소나무와 가래나무가 한 그루도 없고 타성(他姓) 소유하고 있지는 않으니 다행이다.
 
46
배례를 마치고 살펴 보고 다시 점사에 이르렀다. 유아(柳雅)와 김애(金哀)가 分數盃酒하고 묘하에서 오래된 친구의 정의를 풀었다. 군의 서상동(西上洞)[蘆川]은 18대 선조 상서공(尙書公)의 묘소이다. 30리 떨어져 있다. 휴가의 기한이 이미 지나서 업무를 비우기 어렵다. 생각할 수가 없다.{思不獲已} 부여의 족숙과 장항의 족인으로 먼저 가서 성묘하도록 하였다. 나는 내년 봄 성묘하기로 하고 서둘로 돌아왔다. 안의읍에 이르지 않았는데 비가 다시 왔다. 말을 재촉하여 무릎쓰고 갔다. 개평의 노 우집에 이르렀는데 날이 이미 황혼이었다. 노인 노혁수(노혁수)가 앉아 있었다. 그와 더불어 얘기나누고 드디어 유숙하였다. 이날 30리 갔다.
 
 
 

10월 18일

 
48
어제처럼 비가 부슬부슬 내렸다. 주인이 만류하여서 출발하지 못하였다. 신초(申初)에 조금 개여서 주인과 함께 우리 동네 교관 정태현(정태현)의 집에 들렀다. 그 집은 盧友와 담장 사이에 두고 있고 서울에 있을 때 서로 낯을 익은 서로 잘 알고 있는 것 같다. 鄭友가 맞이하여 앉아 인사를 나누었다. 술상을 내어 왔다. 마침 회덕에서 내려와 살고 있는 친구 송인노(宋麟老)와 송구노(宋龜老)[동춘당 송준길의 후손, 鄭友와 더불어 瓜葛한 사이] 형제가 앉아 있었다. 그와 더불어 술을 마시며 서로 얘기를 나누었다. 날이 밝으며 일찍 출발하겠다고 알리고 握別할 뜻이 없었다. 이에 본동 참봉 정준민(鄭準民)의 집을 방문하였다. 鄭友가 서울에 있을 때에 深契한 사람인데 서울에 올라갔는데 아직 돌아오지 않았다. 그 막내동생 우민(友民)[자(字)는 성필(聖必)]이 맞이하여 앉아 인사를 나누었다. 술상을 내어 와서 갑작스레 極盛備也 盡醉窮日 노우(盧友)의 집에 돌아왔다. 저녁 후에 정우(鄭友)가 다시 찾아와서 조용히 얘기를 나누었는데 깊은 밤에 이르러 돌아갔다.
 
49
마침 양주(楊州)의 박우(朴友[교리 魯參의 후손으로 정문(鄭門)의 사위이다.])가 찾아와서 이렇게 더불어 얘기를 나누었다.{接晤} 세호(世好) 또한 기연(奇緣)이다. 드디어 信宿하였다.
 
 
 

10월 19일

 
51
이른 아침에 흐렸다가 저녁에는 맑아졌다. 친구 정성필(鄭聖必)이 일찍부터 또 찾아와서 술을 가지고 매우 환대하며{極歡} 작별하고 돌아갔다. 나도 길을 나서서 돌아왔다. 주인이 슬픔을 머금고 함양읍을 지났다. 行忙으로 미처 공형을 불러 보지 못하였다.{以行忙未及招見公兄} 점주로 하여금 그 뜻을 전하도록 하였고, 이내 거리실점(巨里室店)에 도착하여 말을 먹이고 바로 출발하였다. 인월장에 이르러 해가 장차 서쪽으로 기울고 있었다. 이내 갈계(갈계)의 종인 용근(容根)이 거주하는 곳으로 향하였다. 정도(程塗)가 애매하여 신인(信人)이 가리키는 바 저절로 구불구불하게 되었다.{自致逶迤} 그 집에 이르렀다. 恰爲初鼓矣 용근은 마침 다른 곳에 가서 其院府源益出邀 정성스러웠다. 드디어 유숙하였다. 이 날 60리를 갔다.
 
 
 

10월 20일

 
53
맑음. 아침 일찍 일어나 금동(琴洞)의 산소(山所)에 기송(起訟)하는 일을 내렸다. 진주부(진주부)의 관찰사 어른, 대감 조병필(조병필)에게 편지를 보냈다. 屬諸源益宗 전납(傳納)하도록 하였다. 이미 아침밥을 먹었다. 종인 상중에 있는 중근(中根)의 집에서 이바지 하였다. 정성껏 준비하였다.
 
54
우리 동네에 살고 있는 종인 원영(源英), 원협(원협), 인근(인근), 대근(대근), 경근(경근), 문상(문상), 윤근(윤근)이 찾아와 만났다. 술을 가지고 와서 接晤하였다. 드디어 그와 더불어 문에서 나와 보았다. 갈계(葛溪)는 洞인데 낭떠러지에 땅을 개척하고{拓趾} 바위를 뚫고 築圃하였다. 그러나 대천(大川)이 마을을 안고 얽혀 돌아가고{縈廻} 수전(水田)은 鋪野이 膏沃하였다. 사람이 조밀하여 100여 호가 되었다. 운봉은 세칭 살만 한 곳이다. 이 동네는 사람이 살아가기에는 해롭지 않았다. 여러 종족과 작별하고 돌아갔다. 길을 나서 비전가리(碑殿街里)에서 나와 다시 큰 길을 따라 운봉읍에 이르렀다. 사또가 나와 맞이하였다. 돌아갈 기일이 차츰 늦춰져서 대략 정회(情懷)를 풀고 술상을 내어 왔는데 성대히 준비한 것이 갈 때보다 더 훌륭하여 든든하게 먹고 감사하였다. 점심을 먹고 길을 나서 돌아왔다. 사또가 서글퍼하면서 전송하였다. 지금 가면서 운봉의 형세를 상세히 살펴 보았는데 험준한 산봉우리{峻嶺}가 사방을 에워싸고 평야(平野)가 가운데 열려 있으니 비옥한 토지가 경작하여 먹고 살 만하다. 풍속이 순박하여 가르칠 만하다. 지형(地形)은 매우 높아 호남에서 절로 獨鎭할 만한 곳이다. 여원령 위 점사에 이르렀는데 군의 문안사(問安使)가 도착하여 군 안에 아무 일도 없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冊室灘雲이 편지하였고 탁지대신의 답함을 열어 보았다. 말에서 내려 걸어서 고개를 넘어 고개 아래 이르렀다. 다시 말을 타고 부저리(府邸吏)의 집에 이르렀다. 해가 서쪽으로 지고 있었다. 강리(姜吏)가 입현하였다. 술상을 내어 왔다. 이어서 저녁밥을 내어 왔다. 군의 예리(禮吏)가 와서 기다리고 있었다. 남원 사또에게 照會하여 인신(印信)을 다시 찼다. 임실의 남면 유학 공일문(孔日旼)이 마침 여기에 와서 입현하였다. 다시 조금 늦었지만 부성에 들어가서 관찰사를 알현하였다. 퇴등(退燈)하라는 명을 내리고 보기에 방해가 되었지만{見阻} 남원 사또를 방문하였는데 참서관 및 신파(新派)의 사변위원(査辨委員) 대감 강현(康鉉)으 모두 앉아 있었다. 한참 얘기를 나누었다. 사또가 관주(官酒)를 가지고 오라고 하여 마시며 조용히 마음을 나누었다. 저사(邸舍)로 돌아왔다. 밤은 이미 오고(五鼓)가 되었다. 드디어 유숙하였다. 이날 60리를 갔다.
 
 
 

10월 21일

 
56
맑음. 남원 사인 노규수(노규수)가 마침 읍에 들어와 찾아와서 만났다. 아침 일찍 출발하여 사관(舍館)에서 주사 강규흠(강규흠)을 방문하였다. 회포를 대략 풀고 바로 헤어졌다. 그리고나서 들어가 관찰사 어른을 入謁하고 작별하고 돌아갔다. 참서관 남원 수령과 헤어졌다. 걸음이 남면 약평점)(약평점)에 이르러 말에서 내려 午秣하였다. 금산동(금산동)의 상중에 있는 김봉기(김봉기)가 술과 안주를 준비해서 나왔기에 만났다. 번번히 폐를 끼치니 과연 매우 미안하다. 바로 출발하여 관아로 돌아왔다. 해가 이미 어슴프레 지고 있었다. 이번 걸음은 성묘를 하여 자손들의 정리를 푸는 것이었다. 화수(花樹)룰 방문하고 종족의 정화(情話)를 기뻐하였다. 이에 여생(從玆餘生) 동안 사람들을 향해 말을 할 수 있겠다. 다만 먼저 일이 마음에 관계된 것은{先事關心} 多端하지만 또한 열흘 말을 탔더니 백골이 모두 아프다. 정말로 힘들었다. 저녁 후에 윤도정(尹都正), 장의 이경우(李璟宇), 장의 홍종성(洪鍾晟), 장의 최봉우(崔鳳宇), 좌수 이종원(李鍾元)이 와서 보았다. 종인 종헌(宗憲)이 함양으로부터 먼저 돌아와 나를 기다리고 있었는데 미처 집에 돌아가지 않고 들어와 만났다.
 
 
 

10월 22일

 
58
이른 아침에 맑았는데 저녁에 흐렸다, 오후에 이르러 흐리고 눈발이 내렸다. 종인 종헌(宗憲)이 작별하고 돌아가는데 종인 민헌(民憲)에게 감사 편지를 부쳤다. 도정 홍병일(洪秉一), 감찰 조재홍(趙載洪), 유학 전경규(全景奎)가 찾아와서 만났다. 신안 훈장 한병리(韓秉履)가 편지하였는데 선물로 닭과 계란을 보내서 감사하다고 답장하였다. 저녁후 장의 이경우(李璟宇)가 들어와 만났다. 종인 영수(永洙)가 함양에서 먼저 돌아왔는데 찾아와서 만났다. 밤에 비가 내리다가 눈이 내렸고, 바람이 상당히 세고 엄했다.
 
 
 

10월 23일

 
60
비가 왔다가 싸라기가 내렸는데 종일 개지 않았다. 남원 수월리(水月里) 참봉 황영(黃瑛), 오산 친구 권도수(權道壽)가 찾아와서 보았다. 진안현감의 답통[答圅]이 전체(轉遞)로 찾아와서 만났다. 유학 한교(韓敎), 유학 이재옥(李載玉), 유학 김사준(金思準), 유학 공일민(孔日旼)이 찾아와서 만났다. 유학 전영규(全景奎)가 편지하였는데 선물로 잉어 한 마리를 보내 감사하다고 답장하였다. 영암 구림(鳩林)의 종인 용상(鎔相)이 일부러 와서 종인 한흠(漢欽), 한의(漢宜), 한홍(漢弘)의 편지 및 종인 노상(魯相)의 편지를 직접 전해 주었다. 감사하게도 참빗[眞梳]이 이었다. 감사하고 감사하다. 윤 도정이 들어와 만났다.
 
 
 

10월 24일

 
62
흐렸다. 눈꽃이 종일 표표히 휘날렸다. 상사(上舍) 한흥교(韓興敎)가 편지하였는데 감사하다고 답장하였다. 남부 참서관의 편지가 전체(轉遞)로 도착하였다. 이인(里仁) 향원 김성희(金聲熙), 덕치 향원 이종휘(李鍾徽), 유학 한홍석(韓泓錫), 유학 임남수(林南洙)가 찾아와 만났다. 아산 원동(院洞)의 족대부 재의(在儀)씨가 산넘고 물건너 여러곳을 거쳐 찾아왔다. 황 참봉과 오산 권씨 친구가 돌아간다고 고하였다. 윤 도정(尹都正), 이 장의(李掌議)가 들어와 만났다. 초경(初更)부터 하늘이 새까맣더니 눈이 내렸다.{自初更天黑雪下}
 
 
 

10월 25일

 
64
아침 일찍 일어나 문 밖을 보니 눈이 수촌(數寸)이나 내렸다. 오후에 맑았다.
 
65
태인에 살고 있는 주사 장기선(張基璇)이 지나가다가 들어와 만났는데 바로 작별하고 돌아갔다. 떠나려 할 때 사율시(四律詩)로 전별하였는데, 바빠서 화운(和韻)하지 못하였다. 면천(沔川)의 유학 박기훈이 멀리서 와서 보았다. 이날 밤에 미설(微雪)이 또 내렸다.
 
 
 

10월 26일

 
67
아침부터 눈이 내렸는데 수촌 쌓였다. 구림 종인이 작별하고 돌아갔다. 그래서 한흠, 한의, 한홍, 노상에게 감사편지를 부쳤다. 또 광주의 종중 및 창평 절산(節山) 종인 휴덕(休德)에게 내년 봄에 사금동(賜琴洞)에서 종회(宗會)를 열려는 뜻으로 편지를 부쳤다. 하운(下雲) 훈장 이우(李宇), 향원 홍재기(洪在祺)가 찾아와 만났다. 감찰 조재홍(趙載洪)이 편지하였는데 감사하다고 답장하였다. 이날 밤 눈이 많이 내렸다. 몇 척쯤 되었다.
 
 
 

10월 27일

 
69
눈이 내리려고 하더니 점차 개였다. 일본의 웅본현(熊本縣) 의원 무내영권(武內英倦)과 통사(通辭) 유만갑(柳萬甲)이 여기를 지나다가 들어와 만났다. 윤 도정, 이 장의가 들어와 만났다. 남면의 상중에 있는 김봉기(金俸基), 대곡의 유학 서준수(徐俊洙)가 찾아와서 만났다.
 
 
 

10월 28일

 
71
맑았다. 유학 박기훈(朴耆勳)이라는 사람이 남원으로 가면서 작별하고 돌아갔다. 함양의 도사 김홍식(金弘植)이 서울에서 내려왔는데 지나다가 방문하여 잠시 회포를 풀고 돌아갔다. 하북의 향원(鄕員) 이재욱(李載旭)이 찾아와서 만났다. 장의 이경우(李璟宇)가 작별하고 돌아갔다.
 
 
 

10월 29일

 
73
맑았다. 창녕수령 심순긍(沈純肯)이 와서 묵었다. 진안 관아에 우편으로 글을 보내 修謝送之하였다. 진안 마량동 雅 김응선(金應善)이 마침 일로 여기에 와서 내견하였다. 부여 염호(濂湖), 족숙 후석(厚錫)이 방문하여 족대부 재승(載承)의 글과 그 후손 족숙 원석(元錫)의 글을 전해 받았다.
 
 

 
74
* 각주
 
75
426) 육족(六足)은 말과 하인을 뜻한다.
【원문】을미년(1895)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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