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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시순(朴始淳) 일기(日記) - 운불일기(雲紱日記) ◈
◇ 을미년(1895) 11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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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시순(朴始淳)
- 임실문화원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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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을미년(乙未年, 1895) 11월
 
 
 

11월 1일

 
3
정유일. 이른 아침부터 흐렸다. 이른 아침에 운수관(雲水館)에 가서 망하례(望賀禮)를 행하고, 이어서 교궁(校宮)에 가서 분향례(焚香禮)를 지냈다. 재실(齋室)에 들어가니 장의(掌議) 최봉우(崔鳳宇)와 유사(有司) 최증(崔增)이 입견(入見)했다. 마침내 관아(官衙)에 돌아와서 각방(各房)의 인원을 파악하고 군령(軍令)은 잠시 정지하였다(姑停). 일도면(一道面) 향원 노병석(魯炳錫)과 유학 심진하(沈鎭厦)가 내견(來見)했다. 점심때 잠깐 갰다가 저녁을 먹고 난 후 다시 흐려져 비가 주룩주룩 내렸고, 삼경(三更, 밤 11시~새벽 1시) 무렵에 그쳤다.
 
 
 

11월 2일

 
5
새벽부터 하루 종일 비와 눈이 섞여서 그쳤다 내렸다 했다. 충청(忠淸) 아산(牙山) 원동(院洞)에 사는 족대부(族大父)와 충청(忠淸) 전의(全義)에 사는 김아(金雅)가 고귀(告歸)했다. 완사(完使) 이도재(李道宰) 대감의 편지가 여러 사람을 거쳐 도착했는데 지난 9월 11일에 부안부안(扶安)을 지날 때 보낸 것이었고, 부안졸(扶安倅)의 편지는 10월 17일에 완부(完府)에 있을 때 보낸 것이었다. 이인면(里仁面) 향원 김성희(金聲熙)가 내견(來見)했다. 상사(上舍) 한흥교(韓興敎)가 편지를 보내왔고 민물고기(川魚)를 보내왔는데 이 계절에 볼 수 없는 귀한 물건이었다. 답례하였다. 밤에 가는 눈이 내렸다.
 
 
 

11월 3일.

 
7
흐렸다 갰다 했다. 부여(扶餘)에 사는 족숙(族叔)이 고귀(告歸)하였다. 그 편에 족숙(族叔) 원석(元錫)에게 답장을 보냈다. 하북면(下北面) 향원 이재욱(李載旭), 종인 홍근(泓根), 유학 한병리(韓炳履)·형리(炯履), 세무시찰관(稅務視察官) 척장(戚丈) 정창시(鄭昌時) 등이 서울에서 내려왔다. 저사(邸舍)에 앉아서 편지를 쓰다가 즉시 가마를 대령하여 나가서 맞이하여 같이 들어왔다. 함께 저녁을 먹고,(卽命肩輿出見邀與俱入 同喫夕飯). 밤이 깊을 때까지 담소를 나누었으니 참으로 기연이다.(至更深穩話 良覺奇緣也) 윤도정(尹都正)이 입견(入見)했다. 장의(掌議) 이영우(李璟宇)가 편지를 보내왔고 노루고기를 보내 왔는데, 이는 산중의 별미이다. 답례하였다. 서울에 올라가는 인편이 있다는 것을 듣고서 탁지대신(度支大臣)에게 안부편지를 보냈다.
 
 
 

11월 4일.

 
9
이른 아침에 흐렸다가 늦게 갰다. 아침에 일어나 시찰관장(視察官丈)에게 치갈(致喝)하였다. 마중하여 들어와서 함께 아침을 먹었다. 아침 식사 후에 남부(南府)를 향해 떠났다. 하신덕면(下新德面) 훈장(訓長)인 종인 정국(鼎國)이 내견(來見)하고 민물고기(川魚)를 선물로 주었으니, 매우 고마웠다. 강진면(江津面) 훈장(訓長) 이종호(李鍾浩)가 내견(來見)하였는데 남쪽 끝에(只隔) 산다고 하면서 미두(米豆)와 적두(赤豆)를 선물로 주었다. 이는 가난한 선비의 정을 보낸 것이어서 물리치기에는 공손하지 못하고 받자니 편안하지 못했다. 좌수(座首) 이종원(李鍾元)과 종인 종원(宗遠)이 내견(來見)했다. 밤에 가는 눈이 비와 섞여서 내렸다(和雨而下).
 
 
 

11월 5일.

 
11
이른 아침에 흐렸다가 사시(巳時, 오전 9시~11시) 초부터 가는 비가 내렸다. 남부(南府)의 훈령(訓令)이 와서 대행왕후(大行王后) 민씨(閔氏)께서 8월 20일 묘시(卯時, 오전 5시~7시)에 승하하였고 10월 15일에 서울에서 발상(發喪)했다고 한다. 부고를 들은 후에 8일의 성복(成服)을 마련하였다.
 
12
轉說然疑 慟寃結轖之際及奉諱音淚迸臆塞 曷有其極
 
13
즉시 비를 무릅쓰고 운수관(雲水館) 서청(西廳)에 가서 고을의 유생과 삼반관속(三班官屬)과 함께 곡진애(哭盡哀)를 거행하고 돌아왔다. 진안(鎭安) 관아에 머무르고 있는 심창녕(沈昌寧) 어른의 편지가 여러 사람을 거쳐서 도착했다. 아직 답례하지 못했다. 윤도정(尹都正)이 입견(入見)했다. 하동면(下東面) 훈장 강시형(姜時馨)·향원 이영우(李英宇), 대리(大里)에 사는 종인 종원(鍾遠)·창엽(昌燁), 강진면(江津面) 오두촌(島頭村)에 우거(寓居)하는 유학 정원걸(鄭源杰)(桐溪의 후손), 태인(泰仁) 사인(士人) 권종림(權鍾林) 등이 내견(來見)했다. 남부(南府) 저리(邸吏) 강진태(姜鎭泰)가 고목(告目)을 보내왔다. 포시(晡時, 오후3시~5시)에 가서 망곡례(望哭禮)를 행하고 돌아왔다. 면천(沔川) 초택(草澤)에 사는 친구 이정하(李正夏)의 편지가 왔는데 9월 11일에 보낸 것으로 태인(泰仁)의 관편(官便)이 가져왔다. 겨울비가 여름처럼 내렸고 한밤중에 그쳤으니 괴상한 날씨이다.
 
 
 

11월 6일.

 
15
비가 개고 바람이 찼다. 새벽에 망곡례(望哭禮)를 행하고 돌아왔다. 포곡(哺哭) 또한 예에 맞게 하였다. 윤도정(尹都正), 유학 권종림(權鍾林), 좌수(座首) 이종원(李鍾元) 등이 입견(入見)했다. 하신덕면(下新德面) 빙채동(氷債洞)에 사는 유학 나동환(羅東煥)이 편지를 보내왔고 무명(木段)을 선물로 보내왔다. 답례하였다. 신흥사(新興寺) 승려 행진(行眞)이 와서 문안하였다. 진사 한흥교(韓興敎)가 내견(來見)했다.
 
 
 

11월 7일.

 
17
맑았다. 아침에 포곡(哺哭)을 예에 맞게 행하였다. 윤도정(尹都正), 도정(都正) 오석용(吳錫瑢), 종인 종헌(宗憲), 장의(掌儀) 이영우(李璟宇), 노인(老人) 심필원(沈弼遠), 유학 이재옥(李載玉) 등이 내견(來見)했다. 함양(咸陽) 개평(介坪)에 사는 노교리(盧校理)가 혼사 때문에 전주(全州)에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방문여 회포를 풀었다. 밤이 깊어서 그대로 머물러 잤다.
 
 
 

11월 8일.

 
19
맑았다. 아침에 포곡(哺哭)을 예에 맞게 행하였다. 노교리(盧校理)가 고귀(告歸)하니 인하여 함양(咸陽)의 공형(公兄)에게 패문(牌文)를 보냈고, 또 안의(安義) 이전(泥田)에 사는 종인 재언(載彦, 字 春和)과 오현(梧峴)에 사는 종인 재화(載和, 字 應元)에게 편지를 보냈고, 또 안의(安義) 읍리(邑吏) 김기로(金基老)에게도 패문(牌文)을 보냈으니 모두 선산(先山)의 산송사건 때문이었다. 윤도정(尹都正), 이장의(李掌儀), 유학 한형리(韓炯履)가 입견(入見)했다.
 
 
 

11월 9일.

 
21
맑았다. 이른 아침에 포곡(哺哭)를 예에 맞게 하고 돌아왔다. 진사(進士) 백영수(白瑛洙)가 내견(來見)하여 종이(紙軸)를 선물로 주었다. 매우 고마웠다. 윤도정(尹都正), 장의(掌儀) 이영우(李璟宇), 장의(掌儀) 최봉우(崔鳳宇)가 입견(入見)했다.
 
 
 

11월 10일.

 
23
흐렸다. 이른 아침에 조곡례(朝哭禮)를 행하고 돌아왔다. 종인 홍근(泓根)이 내견(來見)했다. 사시(巳時, 오전 9시~11시)부터 비가 여름비처럼 내렸다. 비를 무릅쓰고 가서 포곡례(哺哭禮)를 행하고 돌아왔다. 한밤중까지 비가 주룩주룩 내리고 그치지 않았다.
 
 
 

11월 11일.

 
25
이른 아침에 안개가 끼었다가 늦게 갰다. 이른 아침에 조곡례(朝哭禮)를 행하고 포곡(哺哭) 또한 예에 맞게 하였다. 경내(境內)의 문음(蔭陰)·생원(生員)·진사(進士)·유림(儒林)들이 성복(成服)하고 와서 입견(入見)했다. 주서(注書) 이찬의(李瓚義), 정랑(正郞) 백낙순(白樂淳), 도정(都正) 윤태일(尹泰一)·오석용(吳錫瑢), 참봉(參奉) 김성철(金星徹), 감역(監役) 정기호(鄭祺浩), 진사(進士) 홍한섭(洪漢燮)·한규성(韓圭成)·이병의(李炳儀)·한흥교(韓興敎)·최홍석(崔弘錫)·양기형(梁基衡), 校任 이영우(李璟于)·최봉우(崔鳳宇)·박종헌(朴宗憲)·최증(崔增), 재임(齋任) 홍종성(洪鍾晟)·한형리(韓炯履)·오병곤(吳秉坤)·최평(崔坪), 도훈장(都訓長) 이동의(李東儀)·윤태근(尹泰根), 일도면(一道面) 훈장(訓長) 노병석(魯炳錫), 대곡면(大谷面) 훈장(訓長) 서준수(徐俊洙)·향원 이기현(李璣鉉), 남면(南面) 훈장(訓長) 김문수(金雯秀), 상동면(上東面) 훈장(訓長) 윤태윤(尹泰允)·향원 이종원(李鍾源), 하동면(下東面) 훈장(訓長)·향원 이영우(李英宇), 상북면(上北面) 훈장(訓長)·향원 이재옥(李載玉), 하북면(下北面) 훈장(訓長) 나한두(羅漢斗)·향원 이재욱(李載旭), 신평면(新平面) 훈장(訓長) 한봉리(韓鳳履), 하신덕면(下新德面) 훈장(訓長) 박정국(朴鼎國), 신안면(新安面) 훈장(訓長) 한병리(韓秉履)·향원 오중영(吳重英), 이인면(里仁面) 훈장(訓長)·향원 김성희(金聲熙), 옥전면(玉田面) 훈장(訓長) 오채규(吳彩圭), 강진면(江津面) 향원 유관환(柳琯煥), 덕치면(德峙面) 훈장(訓長) 이종휘(李鍾徽)·향원 이병원(李棅源), 상운면(上雲面) 훈장(訓長) 최봉기(崔鳳紀)·유림(儒林) 심필원(沈弼遠)·한규혁(韓圭爀)·송진구(宋鎭九)·유재근(柳濟根)·오병일(吳秉一)·김신택(金愼宅)·김석인(金錫仁)·한학교(韓學敎)·이종섭(李鍾燮)·곽찬영(郭瓚永)·정종면(鄭鍾冕)·정인구(鄭寅龜)·최전(崔㙉)·이한영(李漢榮)·곽상표(郭尙杓)·권동수(權東秀)·박형근(朴亨根)·심진하(沈鎭厦)·양석구(楊錫九)·김사윤(金思允)·이종호(李鍾浩)·이병익(李炳益)·이광선(李匡善)·이민교(李敏善)·양재우(楊在禹)·김사국(金思國)·오치행(吳致行)·최우익(崔禹翊)·한학두(韓學斗)·오병로(吳秉魯) 등 온 사람은 모두 기록하였다(? 並到記人也.) 강진면(江津面) 도약장(都約長) 이봉기(李鳳基)가 편지를 보내와서 답장을 보냈다. 밤 이경(二更, 저녁 9시~11시)부터 비가 내렸다.
 
 
 

11월 12일.

 
27
이른 아침에 일어나 눈을 떠보니 비가 그치고 눈이 내렸다. 눈을 무릅쓰고 운수관(雲水館)에 가서 경내(境內)의 문음(門蔭)·생원(生員)·진사(進士) 이하 제유(諸儒)들과 함께 각자의 자리에 나아가서 조곡례(朝哭禮)를 행하고 이어서 성복례(成服禮)를 행하였다. 끝없는 고통이 더욱 가슴에 사무쳐쳐서 다하지 못하였다.(罔涯之慟益腹靡逮). 마치고 관아(官衙)에 돌아왔다. 이날 바람이 매우 찼다. 함박눈이 내려서 산처럼 쌓였고 하루 종일 그치지 않았다.
 
 
 

11월 13일.

 
29
이른 아침에 흐렸다가 늦게 갰다. 경내(境內) 문음(門蔭)·생원(生員)·진사(進士)들과 제유(諸儒)들이 모두 고귀(告歸)했다. 유학 전경규(全景奎)가 내견(來見)하고 꿩 2마리를 선물로 주었다. 완산(完山) 서부의 참봉(參奉) 이용섭(李龍涉)이 편지를 보내왔고 약초를 선물로 보내왔다. 답례하였다. 그 인편으로 완부관찰사(完府觀察使)와 송촌(松村) 김령(金令)에게 안부편지를 보냈다. 또 부안수령에게 답장을 보냈다. 좌수(座首) 이종원(李鍾元)이 편지를 보내왔고 무(菁根)를 선물로 보내왔다. 답례하였다. 함양(咸陽) 백전(栢田)에 사는 종인 인순(麟淳)이 방문하였는데 서울에 있을 때 서로 알았었는데 宗人간의 和議가 있었다. 和議가 이미 일어났기 때문에 옛정을 생각하여 희비가 간절하여(是在京相識 在和宗人之胤 而在和已作故 念前誼而有此行愴欣交摯) 그대로 머물러 잤다.
 
 
 

11월 14일.

 
31
맑았다. 향장(鄕長) 유학 송진수(宋鎭秀)가 내견(來見)했다. 유학 변규호(邊奎浩)가 입견(入見)하고 종이와 생선을 선물로 주었다. 受言多愧也. 여산(礪山)수령과 사령(使令) 김동석(金東錫)의 편지가 邊雅를 통해서 왔다.
 
 
 

11월 15일.

 
33
맑았다. 이른 아침에 운수관(雲水館) 서청(西廳)에 가서 망곡례(望哭禮)를 행하였다. 흰 관복(冠服)이 객사(客舍)에 아직 준비되지 않았기 때문에 망곡례(望拜禮)와 향교(鄕校)의 분향례(焚香禮)는 참석하지 못하였으니 참으로 마음이 편안하지 못했다. 관아(官衙)에 돌아왔다. 우편을 통해서 남부관찰사(南府觀察使)·시찰관(視察官) 어른과 남원수령과 참서관(參書官)에게 편지를 보냈다. 하동면(下東面) 오류촌(五柳村) 유학 강신영(姜信永)·민형(敏馨)이 내견(來見)했는데, 『이아(二雅)』에 뛰어나 온 고을에 칭송받는 자이다. 월은동(月隱洞)에 사는 진사(進士) 빅낙현(白樂顯)이 편지를 보내왔고 반찬 2가지를 보내왔다. 답례하였다. 남원(南原) 오산(五山)에 사는 친구 권양수(權陽壽)가 호서(湖西)에서 돌아오는 길에 방문하여 회포를 풀고 그대로 묵었다. 유학 임남수(林南洙)가 입견(入見)했다. 남원(南原) 유학 이만기(李萬)器가 남원수령의 편지를 가지고 내견(來見)했다. 이인면(里仁面) 훈장(訓長) 김성희(金聲熙)가 내견(來見)하고 산고기(山肉)를 선물로 주었다. 매우 고마웠다.
 
 
 

11월 16일.

 
35
이른 아침에는 흐렸다가 늦게 갰다. 시종(傔人) 문흥운(文興雲)이 잠시 집으로 돌아간다고 아뢰니 허락하였다. 그가 집으로 떠나는 편에 고도원(古桃源)에 사는 심도유사(沈都有司)와 노인(老人) 이사문(李思文)에게 안부편지를 보냈고, 또 아전 유치헌(兪致憲)과 관노 등길(等吉)에게 패문(牌文)을 보냈고, 또 송촌(松村) 김령(金令)과 여산수령에게 편지를 써서 방문하여 전납(傳納)하게 했다. 감찰(監察) 조재홍(趙載洪)이 편지를 보내니 답장을 썼다. 진산(珍山)수령 친구 오영석(吳榮錫)이 원동(院東) 봉산동(鳳山洞) 있으면서 편지를 보내왔고, 목속(木屬) 2가지를 보내왔다. 답례하였다. 노인(老人) 심필원(沈弼遠)이 내견(來見)했다. 연산(連山) 덕평(德坪)에 사는 친구 장세만(張世萬)이 마침 완부(完府)에 왔다가 일부러 방문하니 평소의 끝없는 두터운 정을 느낄 수 있었다.(可感平日源源之厚契也.) 그대로 저사(邸舍)에 머물렀다. 저녁을 먹은 후에 연산(連山)에 사는 형 조범교(趙範敎)가 입견(入見)했는데 친구 장동한(張同閈)이 함께 동행하였다. 안의(安義) 오현(梧峴)에 사는 종인 재옥(載瑬)이 방문하고 그대로 묵었다. 완부(完府) 감찰(監察) 김동현(金東炫)이 편지를 보내고 약초(藥料)를 선물로 보내왔다. 受言多愧. 오후부터 가는 눈이 땅을 덮이더니(鋪地) 삼경(三更)무렵에는 온 하늘에서 내렸다.
 
 
 

11월 17일.

 
37
없음
 
 
 

11월 18일.

 
39
이른 아침에 일어나 눈을 떠보니 눈이 쌓여 깊이가 몇 촌(寸)이 되었다. 하늘은 갰다. 이 날은 돌아가신 아버지의 제삿날인데 내가 자식이 되어서 제사에 참여하지 못한지가 몇 년이나 되니 도리나 정례로서 불효하는 죄가 갈수록 심하고 갈수록 용서받기 어렵다. 슬픈 마음이 망극하고 더욱 전실하게 부끄럽다. 윤도정(尹都正)과 이장의(李掌儀)가 입견(入見)했다. 하동(下東)에 사는 유학 박봉래(朴鳳來)가 면회를 청하여 입견(入見)했다. 장세만(張世萬)과 함께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한밤중에 이르렀다.
 
 
 

11월 19일.

 
41
맑았다. 완부(完府) 참봉(參奉) 이용섭(李龍涉)이 편지를 보내왔고 겸하여 완사(完使)의 답장과 송촌(松村) 김령(金令)의 편지를 전해 받았다. 아전 문의현(文宜鉉)이 상경하는 인편이 있어서 탁지대신(度支大臣)·외부대신(外部大臣)·유하(游霞) 김대감427)에게 안부편지를 보냈고, 또 공제(公第) 박덕유(朴德裕)에게 패문(牌文)을 보냈다. 도정(都正) 홍병일(洪秉一)이 편지를 보내왔고, 반찬 3가지를 선물로 보내왔다. 답례하였다. 윤도정(尹都正)과 이장의(李掌儀)가 입견(入見)하였다. 친구 장세만과 이야기 하다가 밤중에 되어 그대로 잤다.
 
 
 

11월 20일.

 
43
이른 아침에 흐렸다가 늦게 갰다. 하북면(下北面) 월은동(月穩洞)에 사는 참봉(參奉) 이제성(李濟成), 도사(都事) 김양근(金瀼根), 진사(進士) 박낙현(白樂顯)이 함께 내견(來見)했다. 강진면(江津面)에 사는 유학 이종호(李鍾浩)가 내견(來見)했다. 이날 밤에 친구 장세만이 감기(微愼)이 있다고 하여 통인(通引)을 보내 위문하였다. 완부(完府)의 아전 김화형(金和炯, 감찰 동현(東炫)의 종질이다)이 와서 문안하였다.
 
 
 

11월 21일.

 
45
맑았다. 하운면(下雲面)에 사는 진사(進士) 이인혁(李寅爀)이 면담을 청하며 입견(入見)했다. 영촌(嶺村)에 사는 진사(進士) 이병의(李炳儀)가 편지를 보내왔고 술과 안주를 보내왔는데 양이 많고 맛이 좋았다. 매우 고마웠다. 답례하였다. 인하여 그 편에 참봉(參奉) 이용섭(李龍涉)에게 답장을 보냈다. 하운면(下雲面) 냉천(冷泉)에 사는 유학 황호원(黃浩源)이 내견(來見)했다. 감역(監役) 정기호(鄭祺浩)가 완부(完府)에서 돌아왔다. 경기 소식을 전하기를 지난 15일에 성상(聖上)께서 단발(斷髮)을 거행했다고 하니, 처음 이 소식을 듣고서 뼈가 떨리고 담이 쓰렸다. 북쪽을 바라보며 흐느꼈다. 어쩌겠는가 어쩌겠는가. 남원(南原)에 사는 주사(主事) 강규흠(姜奎欽)의 편지가 우체를 통해서 왔다. 이장의(李掌儀)가 고귀(告歸)했다. 밤에 친구 장세만과 함께 술잔을 나누며 만고(萬古)의 시름을 다하였다. 한밤중이 이르러 自後心神尤難 言食而忘味. 寢不貼席 此生良亦苦矣. 어쩌겠는가.
 
 
 

11월 22일.

 
47
이른 아침에 흐렸다가 늦게 갰다. 남부관찰사(南府觀察使), 시찰관(視察官), 남원졸(南原倅)의 답서가 모두 우체를 통하여 왔다. 유학 한형리(韓炯履)가 내견(來見)했다. 하신덕면(下新德面) 오월리(烏越里)에 사는 하감역(河監役)이 일 때문에 읍에 와서 뵙기를 청했다. 인하여 읍편(邑便)으로 송촌(松村)의 사령(使令) 집에 편지를 보냈다. 참으로 막연(漠然)한 아이이다. 또 기한을 지나지 않아서 아침저녁으로 同菀 乃裁家書 집안의 노복 창만(昌萬)을 심부름을 보내고 겸하여 선생 유응두(柳應斗)에게 편지를 보냈다. 밤에 안개가 끼었으니 매우 괴이하였다. 탄운(灘雲)의 후손 아전 이병학(李炳鶴)이 내견(來見)했다.
 
 
 

11월 23일.

 
49
이른 아침에 흐렸다가 늦게 갰다. 오두촌(烏頭村)에 사는 친구 정원걸(鄭源杰)이 감 2접을 가지고 내견(來見)했다. 여산(礪山) 관아의 노복이 심부름 와서 여산군수(礪山郡守)와 유학 홍종국(洪鍾國)의 편지를 전해주었다. 유학 홍종국(洪鍾國)은 강화(江華)에서 일전에 이곳 덕치면(德峙面)로 이사하였기 때문이다. 그 인편에 회답을 보냈고, 또 감찰(監察) 조재홍(趙載洪)과 유학 변규호(邊奎浩)에게 편지를 보냈다. 하동면(下東面) 훈장(訓長) 강시형(姜時馨)이 향원 이영우(李英宇)의 자손 윤의(潤儀)과 함께 내견(來見)했다. 유학 김사준(金思準)이 내견(來見)하고 문어 10마리를 선물로 주었다. 매우 고마웠다. 친구 장세만이 아전 조범교(趙範敎)와 함께 관아(官衙)에 왔다가 밤이 깊어서 돌아갔다. 밤에 또 안개가 끼었으니 매우 이치에 맞지 않는다. 매우 근심이 된다.
 
 
 

11월 24일.

 
51
이른 아침에는 흐렸다가 늦게 갰다. 친구 장세만이 이별을 고했다. 몹시 서운한 마음이 다른 날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읍의 인편으로 완사(完使)에게 편지를 보냈다. 또 주서(注書) 신성묵(辛成黙)에게 보내는 답통(答通)을 쓰고, 완사(完使)께 편지를 올렸다.(同呈于完使書中) 또 송촌(松村) 김령(金令)에게 보냈는데 경기의 소문이 있었기 때문이다. 유학 이재욱(李載旭)이 내견(來見)했다.
 
 
 

11월 25일.

 
53
맑았다. 함양(咸陽) 개평(介坪)에 사는 참봉(參奉) 정준민(鄭準民)이 서울에서 내려오는 길에 방문하여 유학(游霞) 김대감(金宗漢)의 편지를 전해주니 그간의 막혔던 가슴이 풀어져서 위로되고 위로되었다. 경기의 근심에 이르러 갈수록 더욱 통한하니 어쩌겠는가. 상이암(上耳菴) 승려 창만(昌滿)이 자곽(煮藿)을 가지고 와서 문안하였다. 완부(完府) 서부(西部)에 사는 참봉(參奉) 이용섭(李龍涉)이 내견(來見)했다. 집안의 노복 창만(昌萬)이 길을 떠나 삼례역(參禮驛)에 이르렀다가 길이 막혔다는 소문을 듣고 지름길로 되돌아 왔다. 민망하고 한탄스럽다.
 
 
 

11월 26일.

 
55
맑았다. 친구 장세만(張世萬)이 완부(完府)의 편지를 전해주었고, 완사(完使)가 머리를 깎았다고 하니 뜻밖에 매우 놀라서 통탄스럽다. 이내 운수관(雲水館)에 가서 망배례(望拜禮)를 행하고 한바탕 통곡하였다. 이어 교궁(校宮)에 가서 배례(拜禮)를 하고, 또 통곡하였다. 아전과 백성들이 이 모습을 보고는 눈물을 흘리지 않은 사람이 없었으니, 천지가 몹시 비참했다. 정녕 부진(不辰)한 때에 태어났으니(生丁不辰) 어찌하겠는가. 마침내 관아에 돌아왔다. 술을 마시는 것이 지나쳐서 평상시처럼 몸을 가눌 수 없어서 발을 헛디뎠다. 갑자기 죽을 것 같아서 고통이 더 심한 것이 없었다. 덕치(德峙)에 사는 유학 이종휘(李鍾徽)가 편지를 보내왔고 종이와 꿩 머리(雉首, 약재)를 선물로 보내왔다. 답례하였다. 장의(掌儀) 이영우(李璟宇)가 편지를 보내왔다. 답례하였다. 태평동(太平洞)에 사는 교리(校理) 이병옥(李炳鋈)과 승지(承旨) 홍필유(洪必裕)가 갈담(葛潭)에 사는 사과(司果) 채동권(蔡東權)이 와서 전해 받았는데, 9월 4일에 보낸 것이었다. 인하여 채사과(蔡司果)의 안부편지를 보냈다. 진사(進士) 한흥교(韓興敎)가 내견(來見)했다.
 
 
 

11월 27일.

 
57
맑았다. 대곡면(大谷面) 훈장(訓長) 서준수(徐俊洙)·향원 이기현(李璣鉉), 상북면(上北面) 훈장(講長) 이봉숙(李鳳淑)·향원준(鄕員俊) 이재옥(李載玉), 옥전면(玉田面) 유학 정아무개(鄭某)·오인구(吳寅龜)가 내견(來見)했다. 유학 한홍석(韓泓錫)이 편지를 보내왔고, 반찬 3가지를 선물로 보내왔다. 답례하였다.
 
 
 

11월 28일.

 
59
맑았다. 신안면(新安面) 향원 한형리(韓炯履), 종인 홍근(泓根), 유학 오석용(吳錫龍)이 내견(來見)했다. 세무시찰관(稅務視察官) 정창시(鄭昌時) 어른, 주사(主事) 유지수(柳枝秀, 양산(楊山) 사람이다) 등이 순군(巡郡)을 행하여 운수관(雲水館)에 왔다. 장청(將廳)에게 즉시 나가서 뵙게 하고 돌아왔다. 친구 장세만(張世萬)이 완부(完府)에서 완사(完使)의 편지를 가지고 다시 내견(來見)했으니 또한 기이한 인연이다. 운봉(雲峰) 갈계(葛溪)에 사는 종인 원익(源益)·윤근(允根)이 함께 내견(來見)했다. 종인 용근(容根)의 편지와 함양(咸陽) 아전(由吏) 동종(同宗) 계관(啓寬)의 고목(告目)을 전해주었다. 그대로 운수관(雲水館)에서 묵었다. 저녁을 먹은 뒤에 유주사(柳主事)가 입견(入見)했다. 도정(都正) 오석용(吳錫瑢), 감찰(監察) 조재홍(趙載洪), 유학 조병용(趙炳鏞)·이종휘(李鍾徽)·김양환(金陽煥), 사과(司果) 채동권(蔡東權) 등이 내견(來見)했다.
 
 
 

11월 29일.

 
61
맑았다. 시찰장(視察丈)께서 입견(入見)했다. 오두촌(烏頭村)에 사는 친구 정원걸(鄭源杰)·종인 종원(鍾遠), 진안(鎭安)에 사는 유학 김태식(金泰埴)·진사(進士) 홍종철(洪鍾喆)이 내견(來見)했다. 남부(南府) 저리(邸吏) 강진태(姜鎭泰)가 내견(來見)하여, 남원졸(南原倅)과 참서관(參書官)의 편지를 전해주었다. 운봉(雲峰)에 사는 종인 원익(源益)·윤근(允根)이 고귀(告歸)하니 그 편에 동종(同宗) 용근(容根)에게 답장을 보냈고, 또 진주관찰사(晉州觀察使) 조대감에게 안부 편지를 보냈는데 전에 보낸 편지가 아직까지 전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참봉(參奉) 이현의(李賢儀)가 편지를 보내왔고 물건 2가지를 선물로 보내왔다. 그의 자손 진사(進士) 기▣(起▣)를 일부러 보냈으니, 위로되고 위로되었다. 아직 답례하지 못했다. 저녁을 먹은 후에 시찰장(視察丈)을 뵈었는데, 마침 유학 이동의(李東儀)가 그의 종제(從弟) 진사(進士) 병의(炳儀)와 함께 술과 안주를 가지고 왔다. 이내 시찰장(視察丈), 유주사(柳主事)와 함께 동행하여 깊은 밤중까지 술잔을 나눴고 만취하고서 돌아왔다. 친구 장세만(張世萬)이 입견(入見)했다.
 
 
 

11월 30일.

 
63
맑았다. 시찰장(視察丈)과 유주사(柳主事)가 입견(入見)하여 함께 아침밥을 먹었다. 유학 홍종성(洪鍾晟), 장의(掌儀) 이영우(李璟宇), 유학 최헌익(崔憲翼)·봉우(鳳宇)·김문수(金雯秀)가 내견(來見)했다. 노교리(盧校理)의 편지가 옥전(玉田) 청계동(淸溪洞)을 거쳐서 왔다. 면천(沔川) 관노 등길(等吉)이 심부름을 와서 익아(翼兒)의 편지를 전해주었는데, 공제(公第)에서 10월 18일에 보낸 것이었다. 또 令 심재숙(沈在淑)과 척(戚) 상사(上舍) 심헌경(沈軒慶)이 보냈는데 대개 등길(等吉)이 지난번에 서울에 올라갔을 때 공제(公第)에서 보낸 것이다. 또 면동(沔東) 승지(承旨) 박제영(朴齊璟)와 도사(都事) 어윤호(魚允浩)의 편지를 받았고, 또 노인(老人) 이사문(李思文)과 아전 유규항(兪圭恒)·치헌(致憲)·박준상(朴準相)·영진(榮鎭), 통인(通引) 유인선(兪仁善)· 김종각(金鍾覺) 등의 고목(告目)을 받았다. 친구 장세만이 입견(入見)하여 잠시 있다가 여저(旅邸)에 돌아갔다. 저녁을 먹은 후에 나가서 시찰장(視察丈)을 뵈었는데, 몸이 좋지 않아서 곧 돌아왔다.
 
 

 
64
* 각주
 
65
427) 김종한 [金宗漢, 1844∼1932]. 문관·고위관료·정치가·친일반민족행위자. 1844년 6월 10일 경기도 수원에서 출생했다. 본관은 안동(安東)이고, 자는 조경(祖卿)이며, 호는 유하(游霞)이다. 판서 김계진(金啓鎭)의 아들로 태어나 김경진(金敬鎭)에게 입양되었다. 순종비 순정효황후의 숙부이며, 친일파였던 윤덕영(尹德榮)의 외사촌형이다. 조선 말기에 이조참판, 사헌부 대사헌 등에 임명되었고, 대한제국기에는 한성은행 은행장, 함경남도관찰사, 판돈녕사사(判敦寧司事), 정우회(政友會)와 대한수상(水商)조합소 총재 등을 역임했다. 일제강점기에는 조선유도사 총재, 산릉주감(山陵主監) 제조(提調), 대성원(大聖院) 원장 등을 맡았으며 남작의 작위를 받았다. 1932년 11월 13일 사망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원문】을미년(1895)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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