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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시순(朴始淳) 일기(日記) - 운불일기(雲紱日記) ◈
◇ 정유년(1897) 1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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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시순(朴始淳)
- 임실문화원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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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정유년(丁酉年, 1897) 1월
 
 
2
丁酉(1897) 正月一日 爲始
 
 

1월 1일

 
4
辛卯 새벽에 일어나서 종이를 펴고 어제 밤에 읊은 제석운(除夕韻)을 쓰고 말하기를 읊고 나서 동쪽 하늘이 이미 밝아졌다. 삼반관속(三班官屬)367)들은 새해 인사를 행하였다. 아침에 검은 구름이 하늘에 반쯤 가리고 미설(微雪)368) 잠깐 내리고 서북풍이 있고 추위가 매우 강하였다. 아침에 운수관(雲水館)에 가서 망배례(望拜禮)를 행하였고 원래대로 가서 곡위(哭位)를 보고 모든 슬픔을 울었고 절을 행하였고 연결(戀結)369)의 정성과 망애(罔涯)370)의 애통을 더욱 줄이기가 어렵다. 그래서 옷을 바꿔 향교에 가서 봉심례(奉審禮)371)를 행하고 나서 두루 재실을 들어갔다. 장의(掌儀) 이경우(李璟宇)는 문묘를 지켜 과세(過歲)하였다. 그와 새해 인사를 하고 관아에 돌아갔다. 밤에 앉아 홀로 원조(元朝)운을 읊기를
 
 
 

1월 2일

 
6
亥時 입춘(立春) 아침에 맑았고 저녁에 흐렸고 오후에 미설 잠깐 펄펄 내렸다. 진사 한흥교(韓興敎)가 그의 두 아들로 하여금 새해 기거를 물었으니 입춘첩(立春帖)을 구하였다. 장난으로 한 연(聯)을 적기를
 
7
암포(巖浦) 선비 전씨가 찾아뵈러 왔다. 밤에 이경(二更)부터 눈이 내렸다. 홀로 앉아 심심해서 앞의 운을 거듭해 입춘시를 짓기를
 
 
 

1월 3일

 
9
三日 새벽에 일어나서 보니 눈이 몇 촌 넘었다. 아침에 맑았고 저녁에 흐렸고 눈이 때로 날려 올라갔다. 일찍 운수관에 가서 망배례를 행하였고 원래대로 곡위를 보고 절을 행하였고 다시 향교에 가서 봉심례를 행하여 두루 재실에 들어갔다. 장의 이경우는 고귀(告歸)372)하였다. 그리하여 관아에 돌아가고 식사한 후에 삼반관속을 점고(點考)373)하였다. 날이 저물 무렵부터 구름이 하늘에 가득 차고 눈이 내렸다.
 
 
 

1월 4일

 
11
새벽에 일어나서 보니 눈이 또 몇 촌 넘었다. 속담은 정월삼일이 하얗게 이었으면 밭 할아버지가 허허 웃을 것이라고 하였다. 연일 서설(瑞雪)이 내려 농사에 가히 기뻤다. 아침에 맑았으나 한위(寒威)가 아직 풀리지 않았다. 편지를 쓰고 진산(珍山) 오영석(吳榮錫)에게 보내 이로 세전(歲前)에 감사하지 못하는 뜻을 표시하려고 하였다. 또 신평(新平) 대리(大里) 종인 종원(鐘遠)에게 편지를 보냈다. 상북(上北) 관촌(館村) 유생 마기섭(馬冀燮) · 선비 전경규(全景奎)가 상동(上東)에서 돌아와서 만나고 상동 행정(杏亭)에 우거한 진사 이정한 · 이상원이 같이 와서 만났다. 덕치(德峙) 훈장 이종휘(李鍾徽)가 와서 만났다. 신시(申時) 이후 먹구름이 잔뜩 끼고 눈이 흩나렸다.
 
 
 

1월 5일

 
13
맑았다. 얼김에 완주 목사에게 편지로 보내 이로 새해 안절을 엿보려고 하였다. 진안(鎭安) 거사(居士) 황도삼(黃道三)이 와서 만났고 이에 묵었다.
 
 
 

1월 6일

 
15
맑았다. 한위가 잠시 풀렸다. 여산(礪山) 백원규(白元圭)의 편지가 왔으니 세전에 대답한 것이다. 상동(上東) 도인동(道仁洞) 선비 김석환(金錫桓)、하천리(下泉里) 선비 이영규(李永奎)、염생(廉生) 우진(祐鎭)、하동(下東) 오류동(五柳洞) 선비 강민형(姜敏馨)이 와서 만났다. 하북(下北) 월은(月隱) 진사 낙현(樂顯) 인편에 편지가 왔다. 신시(申時)부터 날씨가 흐려졌다.
 
 
 

1월 7일

 
17
맑았다. 오늘은 최영장(最靈長)이며 맑고 또 바람이 없었으니 기뻤다. 백 진사에게 감사하는 편지를 보냈다. 하동 성저(城底) 종인 영수(永洙) · 춘희(春熙)、 운봉(雲峯) 종인 인근(寅根)(容根의 막내)이 와서 만났다. 상동 효촌(孝村) 도정(都正) 윤태일의 편지가 있고 새해 기거를 물렀는데 아직 대장 안 했다. 이날 저녁에 작청(作廳)374)에서 사운(四韻)을 읊었으나 근정(斤正)375)을 위해서 시를 올렸다. 고하를 고평(考評)376)한 뒤, 그 운은
 
 
 

1월 8일

 
19
맑았다. 아침에 이렇게 날씨가 쾌청하고 점을 쳐서 농사 나왔으니 기뻤다. 운봉 종인 용근이 화공이라서 상이암(上耳菴)에 설을 쇠었다. 다시 이인(里仁) 사수(社首) 박상진(朴相震)을 만났다. 상신덕(上新德) 훈장 김재환(金在煥) · 신평(新平) 사수(社首) 김석희(金錫熙) · 선비 김도희(金道熙) · 신평 훈장 한봉리(韓鳳履) · 향원(鄕員)377) 신현대(申鉉大) · 도감 신현표(申鉉杓) · 도감 이종철(李鍾哲)이 와서 만났다. 여주(驪州)에 간 사람이 돌아왔다. 판서 민응식(閔應植)의 답장이 왔다. 이천(利川) 효양산하 종인 우현억(禹鉉億)과 만리(萬里) 묘직(墓直) 오영선(吳永善)의 답서가 역시 왔다. 원주 목사의 답서가 읍편에 따라 왔다. 심원사(深源寺) 스님 정섭(正燮)이 와서 물었는데 이날 작청에 경만회(警慢會)를 베풀었다. 이것은 내가 여기에 와서 돈을 많이 주고 스님으로 하여금 식리(殖利)378)하여 베푸는 것이다. 이어서 줄과 안주 한상을 올리고 시축(詩軸)379)을 근정하기 위해 역시 올렸다. 고평을 끝나고 그 운을 따라 한편을 읊기를
 
 
 

1월 9일

 
21
날씨가 자주 흐리고 미설(微雪)이 또는 날렸다. 운봉 종인 새벽에 박별하고 돌아갔다. 성저 종인 찬수(贊洙)가 와서 만나고 그의 사촌 형제인 사사(司事)380) 기수(奇洙)의 편지를 수전(袖傳)381)하였다. 대곡(大谷) 훈장 서준수(徐俊洙) · 향원 이기현(李璣鉉) · 선비 서용화(徐鎔花) · 성리(城里) 좌수 설전기(薛銓基) · 태인 생원 김진풍(金鎭豊) 등이 와서 만나다. 효촌 윤 도정에게 감사의 편지를 보냈다. 이 이후에 작청 시축을 날마다 근정해야 하는데 병을 걸려서 게을러서 운(韻)을 만들지 못하였다.
 
 
 

1월 10일

 
23
맑았다. 신안(新安) 종인 홍근(泓根), 선비 오석룡(吳錫龍) · 중영(重英), 상북 훈장 이재옥(李載玉), 일도(一道) 훈장 오재기(吳在琪), 사수 노학규(魯鶴奎), 선비 노병석(魯炳錫), 선비 한홍석(韓泓錫), 선비 전경규, 초립(草笠) 심건순(沈建淳) 등이 와서 만났다. 남원 선비 이만기(李萬器)가 서울에서 내려 역방(歷訪)382)하였다.
 
 
 

1월 11일

 
25
맑았다. 화성리(花城里) 선비 송진남(宋鎭南), 소년(少年) 이병근(李炳根) · 면우(冕宇), 초립 설진표(薛鎭杓), 하천리(下泉里) 도감 손씨 둥이 와서 만났다. 송촌(松村) 승지 김씨 등의 편지가 왔다. 선비 한영석(韓榮錫)이 순창(淳昌) 수령의 편지를 전하는 일로 와서 만났다. 그것은 지난 12월 27일에 답장한 것이다. 선비 변규호(邊奎浩)에게 편지를 보냈다. 남포(藍浦) 족질 동직(東稷)이 찾아왔는데 그 대인 족형 도순(度淳)과 그 원장(沅丈) 족형 응순(膺淳)의 편지를 수전하였고 유숙하였다. 선비 이재옥의 편지가 있으니 답장해서 보냈다.
 
 
 

1월 12일

 
27
맑았다. 완부(完府) 진위대(鎭衛隊) 참위(參尉) 김종섭(金宗燮)의 편지가 있으니 답장해서 보냈다. 또 송촌 김령(金令)에게 감사의 편지를 보냈다. 상북 사수 안형중(安熒中)이 와서 만났다. 안의(安義) 오현(梧峴) 종인 재화(載禾), 추천(楸川) 종인 재호(載浩) 등이 찾아오고 유숙하였다.
 
 
 

1월 13일

 
29
아침에 맑고 저녁에 흐렸다. 세마(洗馬) 김규동(金奎東)의 편지가 병암(屛巖) 김선달(金先達) 집에 부탁해서 왔다. 행정 진사 백씨, 하동 선비 이윤의(李潤儀), 대리 종인 종원, 유생 한규섭(韓圭燮), 상북 향원 이존경(李存慶) 등이 와서 만났다. 오류동 선비 강운영(姜雲永)의 편지가 있으니 답장해서 보냈다. 이청(吏廳)의 시축이 낮에 왔어 고평하였다. 소견(消遣)의 방법과 도필(刀筆)의 습관을 헛되이 위하는 것이 아니고 운사(韻士)의 풍치(風致)로 바꿔 범상하지만 기분이 기뻤다. 내아(內衙)에서 약간 술과 안주를 보내 이로 권면(勸勉)하고 그 운을 따라 한편을 읊기를
 
 
 

1월 14일

 
31
새벽에 일어나서 보니 눈이 또 몇 촌 넘었다. 아침에 맑고 저녁에 맑음과 흐림이 반반으로 하였다. 장의(掌儀) 최봉우(崔鳳宇), 색장(色掌)383) 최〇증(崔〇增)이 와서 만났다. 남원 오산(五山) 친척 권을규(權乙奎)의 전서(專書)가 있으니 3 가지를 (저에게) 보내어, 이 검소한 거처384)에 이와 같은 정든 선물이 있으니 깊이 부끄러워하였다. 화호(禾湖)에 머무르고 있는 유생 고희상(高熙相)이 일로 편지를 받아서 답장하고 보냈다. 완부 대대장 김정한(金鼎漢)의 편지가 왔으니 섣달 그믐날의 답장인 것이다.
 
 
 

1월 15일

 
33
호렸다. 아침에 운수관에 가서 망배례를 행하였고 원래대로 가서 곡위(哭位)를 보았다. 예를 끝나고 향교에 가서 봉심례를 행하고 나서 두루 재실을 들어갔다. 장의 최봉우, 색장 최〇증을 대점하고 만났다. 끝내 관아에 돌아가 각방을 전례대로 점고하고 권정(權停)385)을 행하였다. 안의(安義) 종인 둘이 작별하고 돌아갔으니 안의 수령 박기복(朴基福), 봉평(奉坪) 도사 전〇〇(全〇〇)에게 편지를 맡겼다. 또 하리(河吏) 재명(在明)에게 부절을 줬다. 상천리(上泉里) 생원 김성두(金星斗)가 와서 만났다. 하루 종일 어두워 미설(微雪)이 때로는 날렸다. 올해 상원(上元)은 달이 보이지 않고 농가의 징조가 어떻게 될지를 알지 못하였다. 밤에 앉아서 이청에 운을 읊기를
 
 
 

1월 16일

 
35
맑았다. 서울에 간 사람이 돌아왔다. 사동(社洞) 보국(輔國) 김영수(金永壽)、그 장자 참판 학수(學洙), 전동(磚洞) 어른 김종한(金宗漢)、그 아들 시직(侍直) 규동(奎東), 수교(水橋) 어른 조종필(趙鍾弼), 도동(桃洞) 어른 이근수(李根秀), 간동(諫洞) 장관 박세환(朴世煥), 공동(公洞) 장관 정인섭(鄭寅燮) 、서상숙(徐相肅), 축동(蓄洞) 장관 홍종억(洪鐘檍), 수교 어른 이용구(李容九), 남동(南洞) 어른 강경희(姜敬熙), 송현(松峴) 참서(參書) 한진창(韓鎭昌), 공동 참서 정준시(鄭駿時), 친척 진사 심헌경(沈軒慶), 장동(長洞) 친구 홍기원(洪基元), 수교 어른 강우형(姜友馨), 수동(壽洞) 어른 정세원(鄭世源) 등의 편지가 같이 왔다. 남면(南面) 상중 김제연(金濟連), 영촌(嶺村) 진사 이병의(李炳儀), 신안 금동(琴洞) 훈장 한학교(韓學敎), 향원 한형리(韓炯履), 대리 선비 한봉리, 종인 상중 기환(基煥) 등이 와서 만났다. 종인 종원이 인편에 편지가 왔다. 진안 수령의 편지가 전편에 인해 왔으니 이번 달 2일에 진천(鎭川) 집에 갔을 때 부탁한 것이었다. 하북 선비 이재욱(李載旭)이 와서 만났다.
 
 
 

1월 17일

 
37
맑았다. 종인 종원에게 감사의 편지를 보냈다. 남원 선비 이만기가 서울에 가기 때문에 역방하고 (그를)만류해서 여저(旅邸)에 머무르게 하였다.
 
 
 

1월 18일

 
39
흐렸다. 남포 족질이 작별해서 돌아갔으니 인편 두 족형에게 감사의 편지를 부탁하였다. 또 국자장(國子長) 친구 서상봉(徐相鳳)에게 편지를 보냈으니 그로 하여금 상경해서 전하게 하였다. 또 아들 익(翼)에게 몇 글자를 보내어 그로 하여금 임택을 역방하여 전하게 하였다. 남원 선비 이교민(李敎敏)이 와서 만났다. 완부 연신당(燕申堂) 남원 어른 윤병관(尹秉觀)은 인상동편 편지를 보냈다. 덕치 홍종국(洪鍾國)의 편지가 있어 오현을 주었으니 겸하여 여산 수령에게 전해고 (지난해 섣달 24일에 나온 것이다.) 그를 감사하였다. 상동 효촌 소년 윤병제(尹秉濟)가 와서 만났으니 그 아버지 도정의 편지를 수전하였다. 답장하고 보냈다. 선비 한홍석이 와서 만났다. 낙촌(樂村) 참봉(參奉) 한경리(韓璟履)의 편지가 있고 답장해서 보냈다. 하루 종일 어두워 이경부터 눈이 내렸다.
 
 
 

1월 19일

 
41
새벽에 일어나서 보니 눈이 몇 촌 넘었다. 하루 종일 흐렸다. 남원 선비 이씨가 상경하는 편으로 인해 전동 유하(游霞)[김종한]와 그 아들 시직(侍直), 간동 박씨, 재동(齋洞) 친구 이필주(李弼周), 포읍(抱邑) 진사 조영식(趙榮植), 만세교(萬歲橋) 진사 조제균(趙濟均), 양구(楊口) 교리 정응철(鄭應哲), 정동(貞洞) 남원 신좌희(申佐熙), 수교(水橋)에 머무른 김재희(金在熙)에게 편지를 보냈다. 또 읍편으로 인해 완주 목사에게 안부 편지를 보냈다. 구고(九皐) 두곡 이홍의(李鴻熙)가 와사 만났다. 선비 전경규가 와서 만났다. 박덕유(朴德裕)가 만경(萬頃) 부침포(浮沈浦)에서 돌아와서 만났다.
 
 
 

1월 20일

 
43
날씨가 자주 흐렸다. 감기와 위중 통증으로 시사(視事)할 수 없었다. 답답하고 불쌍하게 여겼다. 전동 김 어른과 그 아들 시직의 편지가 완부편으로 인해 왔으니 지난해 섣달 22일에 나온 것이다. 송촌 김 어른의 편지가 역시 왔다. 선비 한홍석 및 조시용(趙時鏞)이 와서 만났다. 부여(扶餘) 수원평(水源坪) 족질 동근(東根), 생원 송대화(宋大和)가 찾아와서 머물렀다. 신시에 햇무리가 있었다. 삼화호(三禾湖)에 머무른 고여홍(高汝弘)의 편지가 세 번 차례로 왔다.
 
 
 

1월 21일

 
45
맑았다. 병세가 어제와 같았다. 시사할 수 없었다. 신평 도곡(陶谷) 진사 김교성(金敎誠), 천동(泉洞) 감역(監役) 정기호(鄭祺浩), 하북 월은 참봉 이제성(李濟成), 강진(江津) 훈장 정학수(鄭學綏), 색장 최○증 등이 와서 만났다. 장자 동익(東翼)이 와서 만났다. 동제(東第)이 무경(無警)하는 것을 알아서 스스로 다행이라고 생각하였다. 우산(牛山) 친구 이항익(李行翼), 와동(瓦洞) 친구 조명하(趙鳴夏), 사촌(社村) 친구 이항규(李恒珪) 등의 편지가 왔다. 견운천(見雲川) 친구 장인급(張寅汲)의 편지가 작년 양월(陽月)386) 염간(念間)387)에 보낸 것이다.
 
 
 

1월 22일

 
47
맑았다. 병세가 좋아지는 느낌이 없었다. 가히 답답하였다. 옥전(玉田) 청계동(淸溪洞) 선비 유재수(劉載秀), 옥전 훈장 홍종연(洪鍾淵), 구고 종인 종헌(宗憲), 장의 이경우、고덕치(高德峙), 선비 한정교(韓廷敎), 사치(沙峙) 선비 이종학(李鍾學) · 종길(鍾吉) · 철우(喆雨) 등이 와서 만났다. 오산 친구 권양수(權陽壽)의 편지가 있고 아직 답장하지 못하였다.
 
 
 

1월 23일

 
49
맑았다. 병세가 계속 좋아지는 느낌이 없었다. 가히 답답하였다. 행정 진사 백영수(白瑛洙)는 편지가 있고 감장(甘醬) 한 병을 보냈다. 병으로 인해 답장하지 못하였다. 완부 참위 김종섭의 편지가 있으나 즉시 답장하지 못하였다.
 
 
 

1월 24일

 
51
병이 비록 조금 좋아졌는데 시사할 수 없었으니 가히 답답하였다. 부여 족질 및 생원 송씨가 작별하고 돌아갔다. 하사덕(下社德) 훈장 노정렬(魯楨烈)이 와서 만났으니 갈분(葛粉) 두 승을 보냈다. 선비 이귀현(李龜鉉) · 강운영(姜雲永)이 와서 만났다.
 
 
 

1월 25일

 
53
맑았다. 병이 아직 남아 있어 쓸쓸하고 시사할 수 없었다. 가히 답답하였다. 서도(西都) 훈장 이병의, 향원 최헌익이 와서 만났다. 오산 친구 권양수가 와서 만났으니 머물렀다. 금동(琴洞) 종인 홍근이 와서 만났다. 이경(二更)에 읍저 사령 정직 강(姜) 소사(召史)388)는 그 남편 조계금(曺啓金)이 옥전에 맞았는데 그대로 박영재(朴永才)에게 죽인 일로 들어와서 고하였다. 들으니 끔찍하게 놀랐다. 진천 이병학(李炳鶴) · 병귀(炳龜)(탄운(灘雲)의 아들)가 찾아왔으니 근행(勤行)389)하기 위하였다.
 
 
 

1월 26일

 
55
맑았다. 병이 낫지 못하였으니390) 가히 답답하였다. 구고 향원 이한영(李漢榮), 나면 주천(酒泉) 선비 곽찬영(郭瓚永) · 진규(震奎) · 상표(尙杓) 등이 와서 만났다. 신시에 병을 무릅쓰고 나가서 훈련청(訓鍊廳)에 검사를 행하고 돌아왔다. 감기가 덮쳤으니 참으로 불쌍하게 느꼈다.
 
 
 

1월 27일

 
57
맑았다. 병세가 계속하였다. 가히 답답하였다. 상북 병암 선달(先達) 김경헌(金璟憲), 관촌 유생 마기섭, 남원 친구 현계(玄溪) 강순형(姜舜馨), 진안 반송리(磐松里) 종인 사사 기수 등이 와서 만났다. 본면 선비 김사준(金思準) · 김사장(金思章)이 와서 만났다.
 
 
 

1월 28일

 
59
흐렸다. 병이 비록 조금 나았으나 세수할 수 없었다.391) 가히 답답하였다. 아들 익이 산을 보러 진안에 갔다. 효촌 도정 윤태일, 선비 윤태윤(尹泰允) · 윤태근(尹泰根), 선비 최성두(崔星斗), 색장 최○증 등이 와서 만났다. 완주부에 머무른 조사관 백원규(白元圭)의 편지가 있고 아직 답장하지 못하였다. 남원 선비 이면호(李冕鎬)[갈암(葛巖)의 방손(傍孫)]가 왔어 만났다.
 
 
 

1월 29일

 
61
맑았다. 병이 낫지 못하였으니 가히 답답하였다. 아들 익이 진안에서 돌아왔고 또 옥전면에 갔다. 완주 목사 및 송촌 수령 김씨의 편지가 왔으나 답장을 하지 못하였다. 하운기동(下雲基洞) 진사 홍종철(洪鍾喆), 이인 훈장 양상묵(楊相黙)이 와서 만났다. 순창 선비 전병대(全炳大)가 완주부에서 와서 만났다. 연신당 남원 윤 어른에게 편지를 전하였다. 하사 덕어포리(德漁浦里) 종인 동헌(棟憲) · 기헌(琦憲) · 용헌(瑢憲), 하동 선비 송유희 · 송진구 등이 와서 만났다. 운봉 갈계 종인 경근(慶根)이 찾아왔으니 종인 원익(源益) · 용근 숙질이 부탁한 편지와 곶감 2첩을 수전하였고 머물렀다.
 
 

 
62
* 각주
 
63
367) 지방 각 부군(府郡)에 속한 향리, 장교(將校), 관노(官奴), 사령(使令)을 통틀어 이르는 말.
64
368) 눈이 조금 내림, 또는 조금 내린 눈.
65
369) 사랑하고 그리어 잊을 수가 없게 정(情)이 맺어짐.
66
370) 무한하다.
67
371) 지방 수령이 새로 부임하면 향교에서 올바른 정치를 하겠다고 고하는 유교적 전통제례.
68
372) 벼슬아치가 휴가를 청하거나 늙어서 사직을 청함.
69
373) 명부에 일일이 점을 찍어 가며 사람의 수효를 조사함.
70
374) 군아에서 아전(衙前)이 일을 보던 곳.
71
375) 밝게 살펴 바로잡음.
72
376) 시문의 잘 짓고 못 지은 것을 평가해서 결정함.
73
377) 좌수(座首)·별감(別監) 따위의 향청의 직원.
74
378) 재물을 불리어 이익을 늘림.
75
379) 시를 적은 두루마리.
76
380) 여러 관청(官廳)의 서기관(書記官).
77
381) 편지(便紙)나 서류(書類) 따위를 몸소 가지고 가서 직접(直接) 전(傳)함.
78
382) 여러 곳을 차례로 방문함.
79
383) 조선 시기 성균관과 향교의 재임(齋任)의 하나.
80
384) 규유(圭窬): 『禮記』 「儒行」, “儒有一畝之宮 環堵之室 篳門圭窬 蓬戶甕牖”.
81
385) 권정례: 절차를 간략하게 줄여 하는 의식.
82
386) 양월: 음력 10월을 달리 이르는 말.
83
387) 염간: 스무날의 전후.
84
388) 소사: 성 아래에 붙이어 ‘과부’를 점잖게 일컫는 말.
85
389) 근행: 어버이를 뵈러 가거나 옴.
86
390) 미쾌(未快): 병이 채 낫지 아니함.
87
391) 건즐(巾櫛): 낯을 씻고 머리를 빗음.
【원문】정유년(1897)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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