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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생(呂生)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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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야휘집(東野彙輯)》권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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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생(呂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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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생(呂生) 모(某)는 남산 밑의 궁한 선비다. 집은 가난하였으나 글읽기를 좋아하였고, 경국제세(經國濟世)할 재질이 있었지만 쓰임을 얻지 못한 것이다. 집을 팔아서 호구하고 사랑채 단간방에서 부부가 거처하는데, 기한(飢寒)을 이기지 못하여 여생이 아내에게 말하였다.
 
4
"여보, 내 외출할 일이 있는데 걸칠 만한 옷이 없오?"
 
5
"참 딱도 하구랴. 의복을 잡혀먹은 지 옛날 아니우? 남은 것이라고는 지금 몸에 걸친 누더기뿐입니다요."
 
6
"가만히 앉아서 죽음을 기다릴 수야 없잖소. 그럼 어떡한다지."
 
7
"다 헤어진 도포 한 벌이 사당(祠堂) 참배할 때 있었던 것인데, 입고 나갈 수 있겠어요?"
 
8
"그거 됐오."
 
9
여생이 그것을 주어입고 나서니, 길거리 아이들이 그의 더럽고 누덕누덕 기운 옷을 보고 손가락질하며 웃어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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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루(鐘樓) 거리에 나가자 시전 상인들이 길을 막고 무슨 물건을 팔려느냐고 묻는다. 여생은 팔 물건이 있는 것처럼 점방으로 따라들어가서 시전상인에게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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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내 꼬락서니가 물건을 매매하러 나온 사람 같아 보이우? 지금 서울에서 당대 제일가는 부자가 누군지나 가르쳐주오."
 
12
시전 상인은 다방골 김동지(金同知)라고 대답했다.
 
13
여생은 곧 김동지 집을 찾아갔다. 주인은 얼굴이 윤택하고 의복이 화려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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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인이 근래 시정간에서 부자로 이름난 김동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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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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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소청이 있오. 들어주시려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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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동지는 양식이나 구걸하려는 것이겠거니 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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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슨 어려운 일이 있오? 우선 말해보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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했다.
 
20
"내 곤궁한 형편에 경륜(經綸)을 좀 펴볼가 싶은데, 주인이 만 꿰미의 돈을 빌려주시겠오. 만 꿰미가 못되면 곤란하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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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동지는 여생을 뚫어지게 바라보더니, 한참을 생각하다가 쾌락하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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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생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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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천 꿰미는 우리 집으로 실려보내주오. 내 집에 가서 이것을 구처(區處)하고 곧 돌아와서 오늘 중으로 떠나겠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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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고 집에 가서 천 꿰미를 아내에게 맡기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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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으로 10년 동안의 생계를 삼으시오. 내 오늘 집을 나가면 10년 뒤에나 돌아올 것이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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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인에게 당부하고 나서 김동지 집으로 되돌아오자, 김동지는 오찬을 준비하여 기다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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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디로 가시려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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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남이요."
 
29
"내가 일을 맡겨온 하인이 하나 있어, 근면하고 민첩한데 데리고 가보겠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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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야 물론 좋겠지요."
 
31
"영남의 연해 지방에 내 판화전(販貨錢)을 실은 배 수척이 있오. 내 어음을 보면 즉시 환전(換錢)해줄 것이오. 이렇게 하면 운송하는 비용이 절감되지요."
 
32
"더욱 좋다뿐이오."
 
33
김동지가 의복 일습을 내다가 여생에게 갈아입도록 하니, 여생도 사양하지 않았다. 다 떨어진 옷가지는 싸서 행장 속에 간직하는 것이었다.
 
34
여생은 하동(河東)·곤양(昆陽) 등지, 영남·호남의 물산이 모이는 곳으로 내려갔다. 거기서 그는 장날을 따라 다니며 매양 물가를 올려 사들이니 장터에 나온 물건이 죄다 그의 수중으로 들어왔다. 내일도 모레도 연일 이같이 하여 9천 꿰미의 돈이 거의 다 나갔을 때는, 드디어 영남·호남의 쌓인 물화가 바닥날 지경에 이른 것이다. 물건이 달려서 나오지 못하자, 사들인 물화를 팔아서 수배의 이득을 보았다.
 
35
여생의 장사는 별다른 묘수가 아니고 그저 헐할 때 사들였다가 귀할 때 내는 것뿐이다. 돈이 자꾸 불어날수록 그 용도도 더욱 무궁하여 몇 년 사이에 번 돈이 이루 헤아릴 수 없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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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로변에 있는 부잣집을 보고 여생이 객주(客主)를 삼자고 청했더니, 부자가 난색을 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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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집이 촌중에서 가장 크기 때문에 종전까진 부상대고(富商大賈)들이 연락 부절이었습죠만, 수년 이래 무뢰한 자들이 작당을 해가지고 멀지 않은 곳에서 출몰하니, 부상 대고들이 모두 발길을 끊고 아예 이 마음을 왕래하지도 못한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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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적들이 얼마나 되며, 놈들 소굴이 어디랍디까?"
 
39
"도적들이 수백 명이나 된다든데... 여기서 서쪽으로 10리를 가면 지세가 험준하고 숲이 울창한 산이 나서지요. 그 산을 따라 북쪽으로 들어가면 골짜기가 툭 트인 데에 큰 굴이 보인답니다. 그곳이 바로 도적들이 웅거한 곳입지요."
 
40
여생은 하인에게 명하여 돈을 가지고 연해의 배가 닿아 있는 곳으로 가서 있으라 하고 약속하기를,
 
41
"내 어음을 보거든 돈을 보내라. 기간이 오래거나 금방이거나 오직 이렇게 나를 기다리고 함부로 그곳을 떠나지 말아라."
 
42
하인이 명을 받아 떠나고, 여생은 단신으로 입산하여 골짜기 상하 10리를 들어가 도적의 처소를 찾았다. 산 허리에 토굴이 있어 굴 밖으로 돌문이 달렸고, 수십 보 들어가니 굴이 점점 넓어지고 있었다. 이우명(二牛鳴)의 거리에 당도한즉 초가 4,50간이 나오는데, 쑥대머리 밤송이 수염들이 그곳에 우굴거리고 있다가, 여생을 보고 놀라 몽둥이를 들고 나서는 것이었다.
 
43
"놀랠 것 없네. 나는 포도 군관이 아닐세. 내가 너희들을 잡으러 왔다면 왜 단신으로 이 소굴에 들어오겠나. 못믿겠으면 돌문밖에 나가서 나를 따라온 자가 있나 보라구."
 
44
도적들이 나가보니 과연 아무도 없는지라, 비로소 마음을 놓고 물었다.
 
45
"우리를 잡으러 온 것이 아니라면 무슨 일로 이 굴 속까지 찾아왔오?"
 
46
"내 자네들을 위해 할 일이 있네. 나를 용납하겠나?"
 
47
뭇 도적들이 대희하여 줄지여 절하며,
 
48
"우리들이 대장을 잃고 통솔할만한 사람이 없어 분산될 판이었는데, 오늘 대장님이 오셨으니 천만 다행이올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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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며, 상좌에 앉히고 수령으로 추대하는 것이었다.
 
50
3일이 지나서 여러 도적이 아뢰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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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중에 군량이 떨어진 지 오랩니다. 무슨 대책이 없겠습니까?"
 
52
여생이 20꿰미 어음을 배가 있는 곳으로 보냈더니, 돈이 즉시 와서 여러 도적은 크게 기뻐했다. 돈이 떨어졌음을 보고하매, 다시 30꿰미 어음을 보냈고, 이러하기를 여러 번이었다.
 
53
어느날 여생이 여러 도적에게 묻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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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희들 중에 부모 처자를 둔 사람이 몇이냐?"
 
55
"있는 사람이 과반수입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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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어떻게 살아가느냐?"
 
57
모두들 눈물을 흘리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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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희들이 춥고 배고픔을 이기지 못하고 집을 버리고 이곳에 들어온 지 여러해 지났습지요. 그 사이 식구들의 생사를 막연히 모르고 있습니다. 문득 생각할 때마다 가슴이 미어집니다."
 
59
했다.
 
60
여생은 돈 만 꿰미를 가져오게 하여 1인당 100꿰미씩을 나누어주고는
 
61
"이것을 가지고 너희들 집에 가서 부모 처자를 구원하고, 각기 곡식종자·농기구를 구해지는 대로 사가지고 오너라."
 
62
여러 도적들은 감동하여 눈물을 흘리고 흩어졌다.
 
63
기한이 되어 여러 도적들이 모이는데, 각종 곡식과 농기구 등속이 두루 구비된 것이다. 이에 여러 도적들과 배가 닿아 있는 곳에서 만나, 그곳에 있는 돈을 선적하고 농우 4.50두를 사서 싣고 배를 띄워 서남 대해로 나가서 폭이 10리에 초목이 무성한 섬을 발견하고 배를 그 섬에 대었다.
 
64
초가를 세워 거처를 만들고 불을 놓아 태워서 뭇 도적들과 힘을 합쳐 생땅을 개간하여 농사를 지엇떠니, 곡식의 소출이 10배나 되어 동산만한 노적이 쌓였다.
 
65
몇 년을 이같이 농사를 지었다. 관북 지방에 흉년이 들자 벌목을 하여 배를 만들어 곡식을 싣고 가서 팔았다. 또 수년 후 서도(西道)가 대기근이라 다시 곡식을 싣고 가서 교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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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을 배로 계산해야 될 지경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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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를 들에 놓아먹였더니, 새끼를 쳐 무리를 이루어 수백 두를 헤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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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에 돈과 곡식과 소를 선적하고 경기 해안에 정박했다. 여생이 뭇 도적들에게 말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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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희들도 역시 모두 양민인데, 하필 괴롭게 도적질을 일삼겠느냐? 오늘부터 각기 너희들 집으로 돌아가 다시 양민이 되어라."
 
70
하고 1인당 500꿰미에 곡식과 소를 분배해주었다.
 
71
여러 도적들은 감격하여 절을 하고 눈물을 닦으며 흩어졌다.
 
72
여생은 하인과 함께 나머지 돈을 셈해보니 아직도 100여 만이 되는 것이었다. 다시 배를 띄워 경강(京江) 위에 닻을 내렸다. 그 하인에게 배를 지키라 하고 여생은 행장 속에서 다 헤어진 옷을 꺼내입고 곧장 김동지 집으로 갔다.
 
73
여생이 서울을 떠난 뒤 만 10년이었다.
 
74
김동지가 깜짝 놀라 묻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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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찌하여 이 꼴이 되었소?"
 
76
"내 행장이 다소 여유가 있어 옷 한 벌이야 충분히 마련할 수 있겠지만, 옛날을 잊지 않는다는 뜻으로 갈 때 싸둔 옷을 다시 꺼내입은 것이오."
 
77
주인이 성찬으로 대접하자, 여생은 10년 동안의 소경력을 이야기했다.
 
78
김동지는 다시 크게 놀라,
 
79
"당신은 실로 일세를 경륜할 선비시구려. 기껏 농사와 장사에 조금 시험해보고 말았으니, 참으로 애석합니다."
 
80
하고 돈을 반으로 가르자고 하였다.
 
81
여생은 사양하기를,
 
82
"그럴 것 없소. 나도 이제 늙었오. 매일 한 꿰미의 돈을 대어 여생을 마치도록 의식을 걱정하지 않으면 족하겠오."
 
83
"그야 물론 명대로 거행하다뿐입니까."
 
84
여생은 자기 집을 찾아가보니, 단간 행낭은 온데간데 없고 웬 솟을대문이 거기에 서 있다. 문밖에서 안을 기웃거려보니, 안팎 저택이 굉장한 것이었다. 하인이 나와서 어디서 온 손님인가 물었다.
 
85
"이게 누구 댁인가?"
 
86
"양반댁입죠."
 
87
"주인이 계시는가?"
 
88
"바깥어른은 집을 나가신지 10년이 지났으나 아직 돌아오시지 않고 안방마님뿐입죠."
 
89
"그래, 내가 이 집 주인이다."
 
90
하고 안으로 들어갔다.
 
91
여생 부처는 서로 손을 쥐고 눈물을 흘렸다.
 
92
"여보, 어떻게 이런 굉장한 집을 지었오?"
 
93
"제가 천 꿰미 중에서 다섯 꿰미로 노복을 사고, 400꿰미로 집을 지어 이만한 가업(家業)으로 그 나머지 돈을 먹고 살면서 지금은 수십만냥이 되었습니다."
 
94
여생은 웃으면서 말하였다.
 
95
"부인이 가진 바가 적은데, 여기 앉아서 치부를 나보다 많이 한 셈이구려."
【원문】여생(呂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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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 General Libraries 최종 수정 : 2024년 05월 03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