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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성대(帝星臺) ◈
◇ 왕(王) ‧ 왕(王) ‧ 왕(王)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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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8.5-1939.4
김동인
1
제성대(帝星臺)
2
王 ․ 王 ․ 王[왕 ‧ 왕 ‧ 왕]
 
 
3
"송악에 왕기(王氣)가 있더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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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찌기 귀에 굳은살이 박히도록 스승인 도선사에게서 이런 말을 들은 견훤은 무엇보다도 급히 백제의 재건을 끌내고 그 뒤에 북진(北進)하여 송악까지 들어삼켜 왕기 빛나는 곳에서 삼한을 통일하고 일이 잘 되면 거기서 더욱 서진하여 천하의 중원까지라도 엿보려는 엉뚱한 꿈을 꾸고 있던 터에 궁예가 송악에 도읍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깜짝 놀랐다.
 
5
인제는 유예하고 주저하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궁예가 송악에 도읍 하였다. 하되 아직 호왕(號王)치 아니하고 장군으로서 도읍한 것이니 아직도 ' 빼앗겼다’고는 볼 수가 없지만 언제 어느날 호왕할지 모르는 일이라 일을 더디할 수 없었다. 그래서 즉시로 대군을 움직이어 차차 완산주(完山州)로 향하였다.
 
 
6
무명국 무명왕으로 무진주에 도읍한 지 구 년― 장차 완산주에 정식으로도 읍 하려는 마음을 가지고 있는 견훤은 미리 완산주에는 대궐이며 모든 관아를 지어 두었던 것이었다. 그런지라 무진주의 백성들은 얼마만치 그것을 반대 하였으나 구백제의 백성들은 모두 장차 완산주가 정식으로 서울이 될것을 의심치 않고 믿고 있었다. 견훤의 대군이 북진을 개시할 때 온 백 제 백성들은 가까운 장래에, 나라에 이름이 생기고 비로소 완전한 나라이 성립 되 리라고 힘껏 믿고 있어서 그 날이 이르기를 기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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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은 과연 헛된 기대가 아니었다. 전 완산주의 굉장한 만세성 아래 견훤이 완산주에 들어와서 이미 충분히 준비되어 있던 대궐로 들어가서 용상에 그 의 커다란 몸집을 올려 놓을 그 시각쯤 해서 옛날 백제의 온 영역에는 일제 히 꼭 같은 방(榜)이 나붙었다. 입경할 날짜를 미리 추상하여 한날 한시에 온 나라에 같은 방이 나붙도록 미리 준비하였던 것이었다. 그 방은 대략 이런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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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 자서여(子胥餘)가 부여(扶餘)를 중단(中斷)하고 부여의 중앙인 평양에 도읍한 뒤 자서여의 세력이 및지 못하는 남방에는 마한(馬韓)이 먼저 서고 진한(辰韓) 변한(卞韓)이 뒤에 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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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여의 후예 고주몽이 일어나서 옛날 자서여에게 잃었던 국토를 회복하고 국호를 고구려라 정할 새 고주몽의 아우 되는 우리의 조상 온조(溫祚)는 마한 땅에서 백제국을 세우고 혁거세(赫居世)는 진한(辰韓) 땅에 신라국을 세우고 김수로(金首露)는 변한(卞韓) 땅에 가락국(駕洛國)을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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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일 신라는 무명지사(無名之師)를 여러번 일으키었으나 그의 보잘것 없는 힘으로는 우리나라를 감히 움직이지 못하고 드디어 비겁하게도 당나라를 상국(上國)으로 섬기기를 맹세하고 당나라의 병력(兵力)을 빌어가지고 전세(傳世) 칠백 년의 우리나라 사직을 종내 꺾고야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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뉘 아니 울었으랴. 뉘 아니 비분히 생각하였으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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짐 비록 덕 없다 할지라도 위로는 신령의 도움과 아래로는 백만 백성의 힘과 정성을 얻어 의자왕(義慈王)의 숙분(宿憤)을 풀고 겸하여 하늘없이 해 매던 너희들의 괴로운 정경을 풀어 주고자 하노니 짐이 덕(德)없다고 책망만하고 있지 말고 나아와서 짐과 힘을 함께하여 거룩하고 굳센 아름다운 나라를 회복하자꾸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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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쁘지 아니하냐. 춤이 저절로 나지 아니하느냐. 나라 이름도 새로이 지을것 없이 후백제(後百濟)라 하기로 하자. 관직도 옛날의 제도에 약간(옛날 미비하였던 것만) 수정을 하고 새로이 당나라를 흉내내는 등 창피한 일을 피하자. 자. 백성들이 짐과 함께 춤을 추고 노래를 부르며 기꺼워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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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날 한시에 온 백제에 같은 방이 나붙으니 기다리고 기다리던 방이라 온나라는 물끓듯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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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사하던 사람은 가게를 걷어치고 농사하던 사람은 보습을 둘러메치고 남녀 노소를 무론하고 우리의 새 나라와 새 임금을 축하하는 잔치, 만세성 ― 서로 빙글거리는 얼굴, 가만 있으려야 가만 있을 수 없어 이 친구 저 동무를 찾아 달려 돌아다니는 젊은이 떼 감격에 참지 못하여 느끼고 혹은 통곡하는 노인네들 사당에 들어가서 이 기꺼운 소식을 눈물로 조상께 아뢰는 이이 날을 보지 못하고 일찍 떠난 조부모나 부모나 혹은 형제 자식들 때문에 가슴을 두드리는 사람들. 아아 이 거대한 감격 아래는 표현 방식도 가지가지로 철모르는 짐승이며 산천초목까지도 기꺼워하는 듯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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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가 망한 지도 적지 않은 날짜가 흘렀는지라 이 땅 안에는 신라 사람들도 꽤 들어와 있었다. 그들에게는 무론 이 사건은 그다지 유쾌한 일이 아니었다. 그러나 불만을 표시하였다가는 봉변을 당할 것이 무론이고 설혼 불만은커녕 아불관언의 태도를 취할지라도 욕이 들어오지 않을까하여 마음에 없는 춤을 추며 마음에 없는 기쁜 표정을 얼굴에 장식하는 등 이런 희극까지도 생기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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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의 밤은 차차 깊어 갔다. 밤이 깊어 가면 깊어 갈수록 밝기는 차차 더 밝아 가고 이 새 나라이요 겸하여 옛 나라인 백제의 장래를 축하하는 소리는 땅에 사모치고 하늘에 울리어서 불야성의 환희는 더 높아 가고 거기 폭죽이 터지는 소리까지 아울려서 귀로만 듣자면 전장(戰場)인 듯 싶기도 하고 눈으로만 보자면 대화(大火)인 듯싶기도 하였다. 대궐은 겹겹이 백성들이 둘러싸고 새 임금의 거룩한 양자며 웅대한 말을 보고 듣자고 야단 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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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궐에서도 그 날 등극연에 연하여 또 야연이 있었다. 미리부터 예정 되어있다가 오늘 등극 직후에 발령(發令)된 백관은 반서를 따라서 좌정하고 기녀(妓女) 악공들의 울리는 유명한 백제 아악(百濟雅樂)에 펄럭이는 깃 소매도 우아하게 야연은 차차 깊어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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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날의 주인인 신왕 견훤― 평생에 소리내어 크게 웃을 줄 모르고 평생에 무표정한 그의 얼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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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이야 설사 웃지 않으랴. 오늘이야 설사 만면에 환희의 표정이 나타나지 않으랴. 새로이 정식으로 벼슬을 딴 그의 문무관들은 오래 섬겼으나 아직 이 주인에게서 볼 수가 없는 웃음의 표정을 퍽이나 기다렸다.
 
 
21
새 임금 견훤도 웃고 즐기고 하여 오랫동안 당신과 함께 쓴 일 단 일을 겪어 오던 이 동무들에게 기꺼운 표정을 나타내어서 그들로 하여금 더욱 기쁘게 하여 주려는 마음으로 연석에 참례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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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웬일인지 기쁜 얼굴을 하여 보려면 그의 표정은 더욱 음침하여 지고 홍소(哄笑)를 하여 보려면 그의 목에서는 전혀 소리가 나오지도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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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꺼운 표정을 하여 보려고 몇 번 하여본 노릇이 모두 고소(苦笑)가 되어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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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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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잡미묘한 여러가지의 사정이 그의 가슴에 얽히고 서리어서 그의 마음은 더욱 음침한 편으로 흘러내려가는 것이었다. 오늘날의 이 일을 준비 하고자 아홉 살이라는 소년의 몸으로 집을 뛰쳐나온 이래 춘풍추우 이십오 성상, 서른 서넛이라는 한창 장년기에 드디어 성공의 보탑 위에 올라서기는 하였다. 이십오 년간을 애쓴 결과가 오늘날 성공의 보탑 위에 올라서고 그 위에 아직 춘추 풍부한 몸이요 더우기 오늘까지의 그의 밟은 길이 마치 하늘 이 내신 사람인 듯이 한 걸음을 실수하지를 않고 헛길 들지 않고 오늘날 이 자리까지 일직선으로 올라온― 이 너무도 행운인 점이 도리어 장차에 대한 의 구심을 일으키게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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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적 복수는 이미 하였다 하나 개인적― 즉 신라의 선조가 백제의 선조에게 대하여 한 야비하고 참담한 행동에 대한 복수를 반드시 하여야 할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지금의 이 자리만으로 만족할 수 없고 동벌(東伐) 또 동벌의 싸움이 그냥 계속되고 그런 일이 계속되느니만치 그 새 오래 신라의 학정 아래 시달린 백성들을 자기 또한 시달리지 않을 수 없다는 점 이 매우 괴로웠다. 오래 신라의 난정 아래 시달린 백성들은 목마른 자가 물을 기다리듯 이 새 임금 아래서 평화한 세월을 보내기를 얼마나 기다리랴. 내가 사랑하고 내가 긍휼히 여겨야 할 이 백성들을 그냥 병란의 고역 중에 서해 매게 하여야 할 일이 진실로 마음 아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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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의 송악 점령도 또한 그의 마음을 무겁게 하였다. 궁예 따위가 제 아무리 서두를지라도 철원 명주(鐵圓 溟州) 근방에서 휘돌다가 장차 내가 정식으로 국가를 세운 뒤에 일충하여 송악을 점령하고 패서도로 벋어 나아가면 그때는 궁예는 저절로 내 품안으로 들어와서 내 지휘를 빌게 될 것쯤(사실 견훤이 부모의 고향인 광주가 그리워서 그냥 광주에서 꿈질거렸지 손 빨리 완산주로 벋어나가서 도읍을 정하고 일로 북진하면 무주 공성(無主空城)인 서북 지방 전부는 꼬리를 이어 그의 품 아래 들어왔을 것이다)으로 믿고있었다. 그런데 자기가 광주에서 꿈질거리는 동안 궁예는 어느 틈에 서쪽으로 벋어 나아가서 송악까지 궁예의 손 아래 들어가 버렸다. 주인 없는 시대 같으면 게까지 가면 저절로 점령될 것이지만 궁예의 손 아래 먼저 들어간 이상은 상당한 곤란을 겪지 않고는 송악은 내 손 아래 들기 힘들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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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그런지 궁예를 밉게 보기는 싫지만 송악 탈취를 위해서는 궁예와 정면으로 싸우지 않을 수가 없었다. 밉게 안 보이는 사람과 싸우는 것도 가슴이 뻐근하는 일인 데다가 또한 그와 싸우기 위하여 상당히 백성들을 괴롭힐 생각을 하니 공연히 광주에서 오랜 세월을 보낸 것이 후회막급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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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는 자식복이 적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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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찌기 은사 도선(恩師 道詵)에게서 이런 말을 들은 신왕은 그 말을 자식을 못 낳으리라는 말로 해석할지, 자식을 낳는다 할지라도 불초자라는 뜻으로 해석할지 미상하여 많은 비빈을 두었다. 몸이 건장한 그는 이 적지 않은 비빈의 몸에서 적지 않은 자식을 보았다. 그랬는데도 불구하고 스승의 예언은 현재까지도 잊기지 않아 마음놓이는 일이 아니었다. 평생 정력 다 들이어 이룩한 이 후백제가 자기 일대로 다시 소멸된다 하면 지하의 조상을 대 할 면목이 어디 있으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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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축하의 경사스러운 연회장에서도 신왕의 가슴은 얽히고 얽히어서 술 만연하여 들이키고 들이키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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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복잡미묘한 감정 때문에 더욱 음침하여 가는 신왕의 마음을 알 까닭이 없는 백성들은 밤이 깊어 가는 줄도 모르고 차차 차차 수효가 더 늘어가면서, 이 새 임금의 면용과 음성을 단 한 번 단 한 마디라도 들어 보자고야단 법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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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침한 얼굴로 연방 술만 들이키고 있던 신왕은 그가 백성들을 사랑 하느니만치 당신 마음이 아무리 무겁다 할지라도 이 백성들의 첫 소원 하나는 들어 주기로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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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궐 삼문 누상(樓上)에는 어명에 의지하여 휘황히 촛불이 켜졌다. 당신을 보고 싶어하는 뭇 백성에게 충분히 보이기 위하여서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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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회는 그냥 계속시키고 신왕은 시종 문관 무관 단 두 사람씩만 데리고 누상으로 나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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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우편에서 부액을 하였는지라 백성들은 첫 눈에 벌써 어느 분이 새 임금 인지를 알았다. 동시에 가까이 나아오려는 물결 같은 움직임이며 남의 앞에 막아 섰다는 타매성이며 임금의 면용을 감히 우러르지 못하고 소리내어 쿨 석 거리는 무리들의 소란 때문에 잠시는 전체가 정제되지 못하고 어지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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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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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군을 호령하던 신왕의 웅장한 음성은 웅하니 소란한 백성들 위로 울리어 나아갔다. 동시에 그 요란스럽던 소란은 즉시로 끊어지고 겹겹이 싸인 수만 명 군중은 바싹 소리 하나 내지 안 하고 귀를 기울이었다. 그들의 위로 신 왕의 굵은 음성은 퍼져 나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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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 우리는 인제는 우리의 조선(祖先)께도 부끄럼 없이 지하에 뵈 올 수가 있게 되었읍니다. 그러나 과인(寡人)은 여러분께 대해서 미안한 말씀 두어 마디를 안할 수가 없어서 이 때문에 여러분께 대해서도 아주 거북하오이다. 첫째로는 과인 본시 무덕하고 우매 해서 ―"아니올습니다 아니올습니다의 부정사(否定辭)가 백성들 가운데서 만뢰(萬雷)와 같이 일어날 동안 신왕의 웅대한 음성은 더욱 크게 울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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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의 기대에 어그러지기가 쉬울 터이니 이 우매를 우매라 마시고 힘을 같이하여 도와주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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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인들의 감격의 울음소리, 젊은이들의 만세 소리 가운데서 신왕의 웅장 한 음성은 그냥 계속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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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한 가지는 우린 오늘날의 이 자리만으로 만족할 수는 없다고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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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으로 천년 사직의 신라가 그냥 있으매 이것은 우리들의 커다란 협위라 상당한 방책을 써야 할 것이고 서북으로 궁예가 나날이 세력과 힘을 돋구니이 또한 묵시하였다가는 우리나라의 사직이 위험한지라 이를 위해서는 당분간 부국강병책을 쓰지 않을 수 없고 부국강병책을 쓰는 동안은 백성들은 그냥 도탄의 괴로움을 맛보지 않을 수 없으니 이 두 가지의 일 때문에 오늘 비록 기쁜 날을 맞이하였다 하나 과인이 여러분께 대해서 부끄러이 여기는바 ―"내 나라를 위해서 약간 쓴맛을 본단들 그것을 어찌 도탄의 괴로움이라 하 오 리까 하는 뜻의 부르짖음이 사면 팔방에서 벌둥지 쑤신 것같이 울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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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인의 뜻과 마음이 이러하니 끝끝내 버리지 말고 과인을 도와서 전 백제시대의 찬란한 국가에 지지 않는 빛나는 나라를 세우자는 뜻으로 첫 훈시를 끝내고 부액을 받고 다락을 내려올 동안 백성들의 환호성과 느끼는 소리는 하늘을 찌를 듯이 울리어서 신왕이 다시 연석에 돌아오고 연석의 흥취가 다시 돌아설 때까지 한없이 끝없이 대궐 밖에 울리고 울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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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리하여 후백제 건국의 제일야는 환희와 감격 가운데서 넘어갔다.
 
46
때는 신라 효공왕(孝恭王) 삼년― 당나라로 보자면 소종(昭宗) 광화(光化) 삼 년, 이 신왕이 무명국을 세우고 무명왕이 된 지 제구 년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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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 효공왕(孝恭) 제사년 견훤이 칭왕한 지 십 년째 후백제 건국 제이 년, 당나라 소종(昭宗) 천부(天復) 원년― 개천으로 흐르는 샘물조차 우글우글 끓어 오르는 듯한 무더운 여름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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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골산(皆骨山)의 이 봉우리 저 봉우리를 근원삼아 흘러내리는 몇 줄기의 샘물이 합쳐서 자그마한 시내를 이루고 왼쪽으로는 꽤 경사가 가파로운 묏견을 낀 소로(小路)에 불타는 듯한 뜨거운 돌멩이들이 널려 있는 것을 골라 짚으면서 말을 천천히 앞으로 거니는 두 사람― 말머리가 약간 앞선 사람은 자칭 대장군 궁예(弓裔)요 궁예의 말보다 약간 말머리가 뒤서서 나란히 하여 배종하는 사람은 궁예의 막료 왕륭(王隆)이었다.
 
49
"개 같은 놈의 날씨로군. 이렇게 더운 법이 어디 있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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험상궂은 얼굴에서 한편 쪽만 번득이는 눈을 잔뜩 찌푸리고 이 무더운 날씨를 투정하는 것은 궁였다. 이 대장군에게 여러 해째 붙어서 자기 일신의 지위를 튼튼히 하여 가는 방식을 체득한 왕륭은 얼굴에 아첨하는 듯 한 미소를 나타내며 상관의 의견에 동의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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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습니다. 아니, 개만도 못합니다. 개는 이렇게 무식하게 날씨를 덥게 하지 않습니다."
 
52
"그렇지. 그럼 돼지 같을까 ?"
 
53
"글쎄올시다. 돼지보다 어리석은 것은 인간 세상엔 없으니 비유하자면 돼지게나 비기지만 사실로는 돼지보다도 더 무식합니다."
 
54
"암. 그렇지, 그렇지."
 
55
궁예는 여전히 눈떡을 찌푸렸지만 이 왕륭이 말이 매우 비위에 맞는 듯이한 번 코를 힘있게 울렸다. 그런 뒤에는 이 개보다고 돼지보다도 무식하게 무더운 날씨를 벌하는 의미인지, 채찍을 높이 들어 공중에 소리나게 한 번 두른 뒤에는, 지금껏 하던 이야기를 계속하라는 뜻인 듯이,
 
56
"그래서 ―."
 
57
하고는 한순간 왕륭을 돌아보았다.
 
58
"네이. 같은 말씀을 몇 번씩 번복합니다마는 천리(天理)라는 것은 쉬지 않고 순환해서 같은 곳에 멈추어 있지 않는 것이 아니오니까 ? 옛날 삼국 이정립 해 있다가 한때 신라가 삼국을 통일할 때의 형세로 보자면 억만 년까지라도 쇠하는 날이 없을 것 같았지만 겨우 이백 년 뒤에 신라는 도리어 이 전 신라보다도 작게가 되었읍니다. 이백 년 전에 없어졌던 백제도 다시 섰 읍니다. 그런데 삼국 당시에 가장 강하고 웅대하던 고구려가 지금 무주의 공지(無主空地)로 남아 있으니, 이것이 천의(天意)오리까. 장군으로 보 올 지라도 장군의 위에 임금이 없으시니, 임금이나 일반으로 뵈올 수가 있지만 임금으로 뵈자면 또한 영역(領域)이 없으시니 임금도 아니시요, 장군도 아니시요. 그저."
 
 
59
뒷말이 약간 하기 거북하였다. 적괴(賊魁)라 하고 싶었다. 임금도 아니요 장군도 아니면서도 군사를 거느리고 주인 없는 땅에 웅거해 있으니 말 하자면 적괴이었다. 왕륭은 이'적괴’라는 명예롭지 못한 칭호를 상관에게 불어 넣어 궁예의 마음을 격동케 하여 궁예로 하여금 이 간섭하는 이 없는 땅에 임금으로 서게 하고 싶었다. 임금의 아래서는 정보의 수뇌자까지 올라갈수가 있으나 장군의 아래서는 가장 높이 올라간대야 비장이었다. 더우기 궁예에게는 옛날 양길의 막하 때부터의 심복 무장이 많으므로 중도에 궁 에게 붙은 왕륭 같은 사람은 잘해야 한 곳 성주(城主)이상은 올라가기 힘들었다.
 
60
이미 장년 시기를 지난 왕륭, 자기만이면 한낱 성주로 종시한단들 무슨 여한이 있으랴만 자기의 아들 왕건(王建)의 장래를 위해서는 궁예를 왕위에까지 올리지 않으면 부족한 느낌이 있다.
 
61
무(武)에 익지 못한 대신 모사(謀士)로 혀끝으로 궁예에게 얼마만치의 신임을 얻은 왕륭은 궁예의 마음의 임금 되고 싶은 생각이 일도록 간간 건드려도 보고 충동 내지 격동도 하여 보았다. 오늘도 또한 궁예와 단 둘이 길을 간 기회를 얻어서 예의 공작을 하는 즈음이었다.
 
62
―당신은 지금 비록 자칭 대장군이라 하기는 하나 사실에 있어서는 임금 도아 니요 장군도 아니요 한낱 적괴에 지나지 못하오.
 
63
이 말 한 마디를 내놓고 탁 궁예에게 내던지기만 하면 울둑 밸이 센 궁예의 마음을 적지 않게 격동시킬 것이요 격동만 되면 대개는 일이 성사된 듯은 하지만― 그 한 마디가 힘들었다. 이 성미가 조급하고 조야한 상관의 일시적 흥분 때문에 대수롭지 않은 일로 그의 칼의 녹으로 화한 사람의 수효가 왕륭의 아는 바만으로도 꽤 많았다.
 
64
마지막 말 한 마디를 내지 못하여 주저하는 왕륭에게 궁예가,
 
65
"그럼 적괴란 말이지."
 
66
탁 내어던졌다.
 
67
왕륭은 가슴이 서늘하였다. 온 몸 사지 머리털까지 주뼛하였다. 칼 소리가 당장 나며 자기 머리가 떨어지는 줄로 알았다. 본능적으로 말고삐를 나꾸며 목을 움칠 때에 별안간 칼소리가 쟁그렁 하니 나며,
 
68
"에 익 !"
 
69
궁예의 노호하는 소리가 들렸다.
 
70
왕륭이 말께서 떨어지지 않은 것이 오히려 기적이었다. 몸이 쏠리며 거진 낙마 할 뻔, 하였다. 어떻게 낙마도 않고 도리어 말께 바로 앉았는지는 스스로도 기적이었다. 정녕코 목이 잘리거나 허리가 두 동강이 난 줄로 알았었는데 그렇지도 않고 몸을 말께 바로할 때에, 왕륭은 이 기적을 의아히 여기며 눈으로 상관을 힐끗 보았다. 동시에 이 눈치빠른 모사는 상관의 아까의 노호성과 말소리가 왕륭 자기에게 대한 노염 때문이 아니고 궁예 자신에게 대한 노염이었음을 알았다. 궁예는 노염을 참거나 감출 줄을 모르는 사람 이었다. 남에게 대하여 노염이 나면 그 사람의 목이나 허리에 칼을 보내고 자기 자신에게 대하여 노염이 나면 자기의 칼을 한번 쟁그렁 하고 스스로 자기를 욕하여 그 노염을 풀고야 마는 사람이었다. 그(궁예)의 유년 시기에 그 의 위를 넘어간 몹쓸 폭풍우 때문에 받은 뇌(腦)의 고장이 그의 소년 시기를 무사히 지나고 청년 시기도 무사히 지났으나 청년과 장년의 중간 시기인 지금에 때때로 발작적으로 일어나서 좀 심한 때는 미친 사람 같은 광태까지도 발휘하고 하였다.
 
71
자기 자신을 한번 힘있게 책망하고 난 궁예는 그의 성한 한 편 눈만 번뜩이며 잠시를 말없이 앞으로 가다가 이번은 발작적인 홍소(哄笑)를 하였다.
 
72
"하하하하. 신라의 왕자가― 왕자가― 하하하하 고구려의 임금이 되어 ?
 
73
좋지 좋아. 하지만 야 왕릉아. 아니 여보게 비장. 여보고 왕 장군.
 
74
후고구려보다 후신라(後新羅)는 어떨까. 후신라가 아니라 신(新) 신라 지(支) 신라는 어떨까. 하필 후고구려일까 ?"
 
75
인제는 다시 제정신을 수습하여 모사로서의 자신을 회복한 왕륭은 여기서 또 한마디 끼지 않을 수가 없었다.
 
76
"옛날 고구려의 왕자는 남(南)으로 내려서 백제의 시조가 되지 않았 읍니까. 신라 왕자는 후고구려 시조가 되신단들 무엇이 괴이하오리까 ?"
 
77
궁예는 대답치 않았다. 대답없는 궁예를 실은 채 말은 그냥 천천히 몇 걸음 나아갔다. 몇 걸음 가서야 궁예가 대답하였다.
 
78
"내가 후고구려의 임금이 되는 게 자네게 가장 큰 소원인가 ?"
 
79
"그렇습니다."
 
80
"그 이외 그 이상 더 없는가 ?"
 
81
"그 이외에는 장군께서 천만세나 수(壽)를 누리시고 복을 누리십사 할 뿐이올시다."
 
82
"또―"
 
83
왕륭은 의아하였다. 한순간 궁예를 바라보았다. 임금이 되고― 복과 수를 한없이 누리고― 축복과 아첨에 있어서 이 이상 무슨 말을 더하랴.
 
84
더 할 만한 적당한 말이 없었다. 술을 많이 잡십샤. 미녀를 많이 잡십샤.
 
85
이런 말은 모두'복 많이’에 포함되는 말이었다. 더 아첨할 말이 생각나지 않아서 의아히 쳐다볼 때에 궁예의 독촉이 나왔다.
 
86
"또 있을 테지 ?"
 
 
87
애꾸눈을 번뜩이며 이렇게 물을 때는 일종의 강문이었다.
 
88
"그 이상 그 이상 가장 중한 소망이 있을 테지 ?"
 
89
"글쎄올시다."
 
90
"자네가 나 훌륭히 되기를 바라는 것은 날 위해서가 아니라 자네 자식을 위해설 터인데―."
 
91
가슴에 바로 맞았다. 조롱하는지 험책하는지 구별키 힘든 험상궂은 눈 이 왕륭의 얼굴에 부어질 때 왕륭은 뜻하지 않고 몸서리쳤다.
 
92
"나더러 임금이 되라지 말고 자네 자식을 임금을 시키게나. 빈 땅은 많것다. 사람놈― 뛰어난 놈은 적것다. 지렁이〔甄萱〕돌도래 다 임금되는 판에 왕건(王建)이 임금되지 말라는 법도 없겠지."
 
93
여전히 조롱인지 진정인지 알아듣기 힘든 말에 왕륭은 할 말이 없어서 묵묵히 따라갔다.
 
94
그날 밤 왕륭은 왕륭으로서 아까 낮의 공작이 전혀 실패였었는가 혹은 전진(前進)의 도중이었었는가 연구하느라고 잠들지 못하고 이리저리 뒤채는 동안 왕륭의 상관 궁예는 또한 자기의 진로(進路)를 생각하느라고 잠들지못하고 이리저리 뒤채고 있었다.
 
95
"임금이 되어라 !"
 
96
이것은 비단 오늘 왕륭에게서 처음 들은 진언(進言)이 아니었다. 그 새에도 그의 막료 부장들이 기회만 있으면 꾸준히 진언하여 오던 바였다.
 
97
'사람’이란 것에서 '욕심’이란 것을 제하면 무게가 절반이 된다는 속담 말도 있거니와 사람 중에서도 특별히 욕심과 심술을 더 많이 타고난 궁예는 부하들의 권고가 아니라도 그런 야심쯤은 벌써부터 품고 있었다.
 
98
더우기 견훤이 임금이 된다 누구가 자칭 태수가 된다 법석할 때는 자기도 하루바삐 임금이 되지 않았다가는 영 기회를 놓칠 상싶어서 마음이 설레는 때도 없지 않았다.
 
99
그러면서도 궁예로 하여금 덜컥 임금이 되게 하지 않는 까닭은 단 한가지였다. 즉 궁예에게는 신라의 사직이 탐스러웠다. 새로이 나라를 세운다든 가후 고구려의 시조가 된다든가 하려면 벌써 그의 실력이 넉넉하였지만 궁예에게는 그래도 신라의 사직이 그리웠다. 새 나라를 세워 가지고 그 새 나라 로써 신라를 정복하여 정복자의 지위로서 신라에 군림(君臨)하는 것조차 싫었다. 내가 신라의 왕손이매 정정당당히 내 자리에 내가 오르는 형식으로 오르고 싶었다.
 
100
이런 조금 색다른 야심이 있기 때문에 궁예는 그의 실력이 넉넉히 한나라의 임금이 되기에 부족함이 없고 그의 차지한 땅이 한 나라의 강역으로서 부끄럼이 없으되 그냥 임금될 생각은 하지 않고 신라의 형세만 엿보고 있던것이었다.
 
101
그러나 일 년 이 년 하여 십 년에 가까운 날까지 흘렀으나 신라에서는 무론 궁예에게'와서 임금이 되어줍시사’청하지도 않고 궁예의 마음대로 저절로 신라 임금이 될 기회도 이르지 않고 궁예는 궁예대로 신라는 신라대로 그냥 대립해 있을 때에 궁예도 은근히 내심 등이 달았다.
 
102
게다가 소위 후백제라 하고 일어난 견훤의 나라가 그 마음보를 알 수가 없었다. 무론 신라에 반기(叛旗)를 들고 일어선 나라이니 신라와는 원 수지간 일 것이다. 더우기 신라 견훤 궁예 이렇게 삼각관계로 보자면 궁예와 견훤은 단 하룻밤 새의 동무지만 웬일인지 서로 마음으로 밉게 여기면서도 친애하게 여기는― 영구히 서로 잊지 못할 새요, 신라로 말하자면 궁예에게도 원 수요 견훤에게도 원수였다.
 
103
그러면 만약 궁예가 신라를 정벌하면 견훤은 당연히 궁예를 도와서 신라 를같이 쳐야 할 것이요 적어도 방관적(傍觀的) 태도에 그쳐야 할 것이다. 그런데 아직껏의 전례로 보자면 궁예가 신라와 싸우는 일이 있으면 견훤은 궁예의 앞길을 막아서 신라를 보호하여 주든가 혹은 자진하여 궁예와 정면으로 싸우는 일까지도 있었다. 하여간 궁예의 편을 들어 본 적은 한 번도 없었다.
 
104
그렇다고 또한 견훤은 철두철미 신라를 도와주고 보호하여 주는가 하면 그렇지도 않은 것이 견훤 자신은 연방 신라의 변경(邊境)을 빼앗으며 신라를 치며 신라를 괴롭게 하였다. 말하자면 신라를 자기 혼자서 성화시키기 위 하여 남은 건드리지 못하게 하는 셈이었다.
 
105
견훤과 궁예의 새는 의가 좋은지 나쁜지 자기네끼리도 알 수 없었다.
 
106
일이 신라에 관한 한 그들은 죽음을 두려이 안 여기고 싸웠다. 그러나 다른 일에는 서로 싸우다가도 양보하고 다투다가도 헤어지고 하였다.
 
107
지금의 궁예의 실력으로 보자면 군사를 이끌고 공중 신라 서울로 들어가서 대궐에 들어 용상(龍床) 위에 앉는다 한들 신라의 관민 중에는 이를 막거나 항거하지 않을 일을 뚱딴지 견훤이 간섭을 한다.
 
108
다른 것 다 싫고 단지 신라 임금 한 자리를 탐내는 궁예에게 대하여 신라 왕실과는 아무 관계도 없는(궁예는 그렇게 믿는다) 견훤이 간섭을 하는 것이다.
 
109
그렇다고 견훤을 상대로 싸우자 하니 궁예의 힘으로 견훤을 이길 자신이 없었다. 급기 싸워 보면 혹은 이길는지도 모르지만 꼭 이기겠다는 자신은 없었다. 이 자신 없는 노릇을 섣불리 시작하였다가 일이 실패에 돌아가는 날에는 궁예는 신라와 동시에 견훤까지도 적수로 상대치 않으면 안 된다.
 
110
이것은 즉 궁예 자신의 몰락을 뜻함으로서 신라 왕은커녕 새 나라를 세 울 가망조차 없이 아주 옛날 절간의 선종(善宗) 시대로 돌아가는 일이다.
 
111
견훤이 마음보를 어떻게 먹었는지 이것은 똑똑히 알 수 없으되 궁예 자기가 신라와 싸우기만 하여도(지금껏 친근히 지내던 견훤이가) 홱 돌아서서 신라 편을 돕고 하니까 자기가 만일 신라 왕이 되고자 하면 기를 써서 거기 반대 할 것은 정한 이치다.
 
112
그러면 견훤이 있는 동안은 자기는 신라 임금이 되기 매우 어렵다. 아니 견훤이 있는 동안이라기보다 견훤이'세력 있는 동안’은 매우 어렵다. 견훤의 힘이 꺾이든가 견훤이 죽든가 혹은 자기의 힘이 견훤의 힘보다 더하여지 든가 세 가지 중의 한 가지라도 되기 전에는 자기는 신라 임금은 되기 힘들다. 그러나 그 세 가지라는 것이 또한 다 힘든 것으로서 지금 한창 벋어 오르는 견훤의 힘이 벌써 꺾이기도 쉽지 않은 일이요 자기의 힘이 견훤보다 나아지 기도 매우 어려운 일이요 인명은 재천이라 하지만 시퍼렇게 살아 있는 사람을 죽기를 기다린다는 것은 어려움을 지나쳐 어리석은 노릇이다.
 
113
이렇게 따져 보면 궁예는 새 나라를 세우고 스스로 거기서 임금이 되면 여니와 신라 임금은 도저히 될 가망이 없었다.
 
114
아까 낮에 왕륭에게 임금 되기를 채근을 받을 때에 궁예는 표면으로는 왕륭의 의견을 비웃어 버렸지만 내심으로는 이즈음 늘 그 문제 때문에 켕 기어오던 터이라 몹시 가슴이 무거워졌다.
 
115
"아무 임금이나 임군이 될까 ?"
 
116
사실 사위의 정세로 보아서 임금이 되려면 지금 되어야지 이 기회를 놓치면 좀 임금 되기가 힘들었다.'신라 임금’이 될 기회만 기다리고 천 년 만년하고 있다가는 영 궁예 장군으로 끝나지'대왕’ 칭호는 못 들어볼 염려도 없지 않았다.
 
117
단군(檀君)이 대륙 동쪽 끝에 자리를 잡고 같은 언어를 쓰는 민족을 모 다모아서 한 국가를 이룩한 뒤 숱한 변천을 겪고 또 겪어서 삼국 정립(鼎立) 시대까지 이르렀다가 삼국 중에 가장 작은 나라인 신라가 당나라의 힘을 빌어 가지고 먼저 백제를 없이하고 뒤에 고구려를 없이한 뒤에는 단군의 당시와 비기자면 아주 형지가 없게 되었다.
 
118
신라는 삼국을 통일하였다 자칭하지만 통일한 것이 아니라 백제와 고구려의 두 나라를 없이한 뿐이었다. 백제의 구역(舊域)의 일부분은 혹은 신라의 왕권(王權)이 미쳤는지도 모르지만― 그리고 또 고구려의 구역(舊域)의 최남단(最南端)의 일부분은 역시 신라의 왕권이 미쳤는지도 모르지만 그 밖의 땅 ― 더우기 고구려의 구역의 전부는 신라의 아주 모르는 바였다.
 
119
고구려는 본시 서는 요하(遼河) 썩 너머까지 북으로는 흥안령(興安嶺) 까지 동으로는 바다까지 남으로는 한수(漢水) 너머까지가 그 강역이었다. 그런데 신라가 당나라의 힘을 빌어 고구려를 멸한 뒤에는 보통 상식으로 생각 하자면 고구려의 옛날 강토를 신라가 관리하고 다스리고 하였음직하다. 그러나 사실에 있어서는 그렇지 못하고 신라는 옛날부터의 자기네의 강토를 그것이나마 간신히 관리하였지 고구려의 옛 강토까지 힘이 및지를 못하였다.
 
120
임금을 잃은 고구려의 옛 강토의 남쪽(압록강 이남)은 그곳그곳의 토호들이 혹은 성주라 혹은 도독이라 자칭하여 백성들을 다스리고 관할하고 하였다.
 
121
옛날 고구려의 강역의 중요한 부분이며 겸하여 고구려 문화의 중심지인 압록강 이북은 발해국(渤海國)이라는 새 나라이 섰다. 임금도 고구려의 후인(後人) 이었다. 백성도 (신라에게 망한)고구려의 유민(遺民)이었다. 방역(邦域)도 (남쪽 약간을 제하고는)고구려의 옛 땅이었다.
 
122
말하자면 고구려는 그 강토의 남쪽을 약간 잃었을 뿐 국호(國號)만 고치고 그냥 존속하여 온 것이었다.
 
123
신라는 삼국을 통일하였노라고 외치고 싶으니만치 고구려의 정통을 이 은발 해를 후고구려라 보지 않고 압록강 이남의 주인 없이 남아 있는 약간 한 땅을 고구려의 옛터라 일컫고 그 땅에 임금이 없는 것을 다행히 여겨 그 지역을 고구려의 구역(舊域)이요 신라의 새 영토라 공칭하고 있었다.
 
124
그런지라 신라의 삼국 통일이라 하는 것은 사실에 있어서는 당나라의 힘을 빌어 백제를 없이하고 고구려를 없이하기는 하였으나 국토(國土)는 서쪽으로(그것도 일시적으로) 약간 늘었을 뿐이지 통일한 보람은 하나도 없었다.
 
125
이러하던 것을 서쪽은 도로 후백제 견훤에게 빼앗기고 나니 인제는 주인 없는 북쪽 하나를 내 강토라고 버티고 있던 것이었다.
 
126
그 주인 없는 땅을 신라는'내 강토’노라고 버티고 있으나 또한 그 곳을 현재 관할하고 다스리고 있는 지방지방의 토호들은 자기네의 땅으로 여기고있고 궁며 양길이며 이런 무리들은 또한 자기네의 강토거니 하고 있는 것 이었다.
 
127
사실 신라가 힘만 든든하면 그 땅은 당연히 신라에 귀속될 땅이요 지금 제 땅 이노라고 버티고 있는 토호들은 잘해야 지방관 못하면 모역(謀逆)으로 몰려서 죽을 무리며 양길 궁예 따위는 목숨이 천 개라도 붙어 나지 못할 것 이었다.
 
128
그러나 지금은 도로혀 궁예 같은 사람은 빈 땅의 주인 노릇보다도 신라의 종사를 엿보는 형편으로 신라 일천 년의 사직도 인제는 뿌리까지 흔들리어 걷 잡을 수가 없이 되었다.
 
129
궁예는 신라 사직을 엿보았다. 자기가 신라의 왕손이거니 자기는 당연히 엿볼 만한 권리가 있다고 믿었다. 그러나 뚱단지 견훤이 나서서 이를 방해 하여 귀찮게 구는 것이다.
 
130
하릴없이 궁예는'신라 임금’이라는 자기의 본시의 목적을 내버리고 그 저 임금이 되었다.
 
131
"예전 신라는 당나라에 청병하여 고구려를 멸하고 평양 서울을 풀밭을 만들었다. 내 이를 괘씸히 여겨 동지들을 모아 고구려의 원수를 오늘날 갚았노라."
 
132
마치 수년 전에 견훤이 완산주에서 즉위를 할 때에 한 선언과 비슷한 포고를 하고 드디어 임금이 되었다.
 
133
이리하여 이 반도에는 삼백 년 전과 같이 또 삼국이 정립을 하게 되었다.
 
134
삼백 년 전과 다른 점은 북으로는 흥안령까지 서으로는 요서(遼西)까지가 삼국의 강역이었었는데 지금은 북으로는 아직 미분명하지만 잘해야 압록강이요 대륙에 연접하였던 북쪽이 없어지니만치 서쪽으로는 어디 할 것 없이 황해 바다가 한계(限界)였다. 요 땅 안에 임금이 셋이 생기고 따라서 나라이 셋이 생기게 되었다. 원칙상으로 보자면 나라이 셋이 있어서 임금도 셋이 있어야 할 것이지만 이 땅에는 임금이 셋이 생기기 위하여 나라이 셋이 섰다.
 
135
신라의 서울은 후일 경주(慶州)라 일컬은 그 자리였다.
 
136
후백제의 서울은 완산주(完山州)였다.
 
137
궁예는 아직 나라 이름도 없었다. 서울이라고 정한 곳도 없었다. 명주(溟州) 땅에 임금이라 불리우고 있으나 대궐이라고도 따로이 없이 어느 나라 임금이란 호도 없이 막료며 백성들에게'나랏님’이란 칭호로 불리우고 있었다. 나라 이름도 없느니만치 강토의 경계(境界)도 미분명하였다. 남쪽이며 서쪽으로는 신라와 후백제가 있으니 국경선이 있음직하나 그것조차 미 분명하였다. 그곳 성주(城主)가 신라에 붙을지 후백제에 붙을지 궁예에게 붙을지 성주의 마음에 따라서 이동이 되는 국경선이라 국경선 근처의 땅은 임금도 똑똑히 어느 나라에 소속되는지 몰랐다.
 
 
138
궁예의 나라의 북쪽 국경선은 더욱 모호하였다. 고구려의 뒤를 이어서 일어난 발해국은 동 서 북은 옛날 고구려의 국경선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지만 남쪽으로 반도로 내려오면서는 신라와 이렇다 저렇다 하기가 귀찮기 때문에 어디까지가 내 나라이라고 밝힌 적이 없었다. 외국과의 관계로 부득이 밝혀야 되게 될 때는 압록강까지가 발해국이라 하였다. 그러나 압록강 이남 청천강(淸川江)도 넘어서 대동강 유역은 근처까지도 스스로 발해국에 속한 지방이라고 일컫은 곳이 많았으며 표면으로는 신라가 무서워서 신라 땅인 체 하지만 내심으로는 발해에 심복해 있던 지방이 반도(半島)에도 꽤 남쪽까지도 있었다. 무론 옛날 고구려 관계로 고구려가 비록 망하였다 하나 고구려의 뒤를 이은 발해국이라 고구려의 유민들은 발해를 사모하는 마음이 많았다. 그런 지역(地域) 안에 궁예가 비록 표면으로는'후고구려’를 자칭하며 건국하였다 하나 정통(正統) 후고구려로 발해국이 있으니 고구려의 유민들이 궁예에게(마치 백제의 유민들이 견훤에게 심복하듯이) 곧 심복할 까닭이 없었다. 궁예의 힘 궁예의 병력(兵力)이 및는 데까지는 궁예의 판도 안에 들어왔지만 궁예의 힘이 자라지 못하는 곳은 궁예의 나라이 아니요 일단 궁예의 병력에 궁예의 판도 안에 들었던 땅도 기회만 있으면 궁예의 판도에서 벗어나고 하였다. 그런지라 궁예의 나라의 북쪽 국경선은 어디까지인지 매우 모호하였다. 궁예 자신도 똑똑히 알지 못하였다.
 
139
그로부터 사 년 뒤 나라 이름을 마진(摩震)이라 정하고(신라 제도에 의지 하여) 벼슬을 베풀며 철원(鐵圓)을 서울로 정하고 대궐을 짓고 이듬해에 이 새 대궐에 옮아서 거기서 정사를 볼 때까지도 북쪽 국경선은 여전히 모호하여 압록강 유역 근처까지인지 대동강 유역 근처까지인지 혹은 더 남쪽인지 알 수가 없었다. 짐작도 안 갔다. 그 북쪽의 경계선은 어디까지건 좌우간 마진(摩震) 국도 또한 신라며 후백제와 아울러 이 반도에 선 한 개 국가 임에는 틀림이 없었다. 그리고 궁예는 마진국의 국왕임에도 틀림이 없었다.
 
140
신라의 왕자로 태어나서 일전하여서는 이름 없는 촌아이로 떨어졌다가 재전(再轉)하면서도 절간의 소년승으로― 삼전하면서는 무인(武人)으로― 사전 하면 서는 마진국의 시조(始祖)로― 아직 그의 나이 사십 미만에 과연 파란중 첩한 생애였다.
【원문】왕(王) ‧ 왕(王) ‧ 왕(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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