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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성대(帝星臺) ◈
◇ 궁예(弓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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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8.5-1939.4
김동인
1
제성대(帝星臺)
2
弓裔[궁예]
 
 
3
견훤이 이러한 길을 더듬어서 견훤 자기의 큰 목적이요 겸하여 백제 수백만 백성의 목적을 착착 이룩할 동안 그의 단 이틀 미만의 친구이나 또한 서로 영구히 잊지 못할 친구인 궁예(弓裔)는 어떠한 길을 밟았나 ?
 
4
소년 시절에 견훤과 한날 한시에 좋은 스승인 도선(道詵)을 만났었으나 기지 있는 견훤에게 스승을 독점당한 뒤 그는 하릴없이 홀로 떠나서 승문(僧門)에 일찌기 적을 두었으니만치 이 승방 저 명찰로 찾아 돌아다니며 인생의 갖은 험로를 여지없이 밟으면서도 한 가지의 독한 마음뿐은 그래도 없이 할 수가 없었다.
 
5
눈이 하나 병신이요 그 뒤에 또한 그의 유년시기의 생장이 불구적(한나라의 왕자로 태어나서 아버지를 아버지라 볼 수 없고 도리어 원수로 여기어 야하였고 얼굴도 알기 전에 어머니를 불행한 환경 아래서 잃었으며 갓 나서부터 철들기까지 애꾸눈이라는 별명이 그의 곁에서 떠나 본 일이 없었으며) 이었 더니만치 그의 마음도 또한 세상을 그렇게 보았으며 세상을 저주할 것으로 보았고 사람이라 하는 것은 모두 자기를 미워하고 자기에게 적대하는 것으로 보았다.
 
6
몸은 승도(僧徒)라 하나― 그리고 또한 승문에서 배운 바 온갖 학문 ' 선지식(善知識)’ 이 모두 다 좋고 옳은 말이고 그대로 좇을 수만 있기만 하다면 극락세계라는 것은 불지식을 좇기만 하면 딴 곳까지 안 가고 이 곳에서 이루어질 것이라 믿기우기는 하였다.
 
7
그러나 그의 성격이 이미 삐뚤어진 이상 아무리 그 도의 진실성을 믿는다 할지라도 행동까지 그 도의 명하는 대로 행할 수가 없었다.
 
8
몸은 승도로되 몰래 승방을 벗어나서는 속계에 내려와 술을 먹고 계집을 희롱하고 싸움을 하기가 일쑤였다. 법사에게까지 반항하는 일이 자주 있었다.
 
9
이러한 때에 신라의 정세는 나날이 어지러워 가고 각처에는 도적이 창궐하여 제각기 장군호를 칭하며 영지(領地)를 넓히며 야단법석이었다.
 
10
일이 차차 이렇게 전개되매 울근거리는 궁예는 인제는 그냥 승방에 숨어서 목탁을 두드리며 염불이나 외고 있을 수가 없게 되었다.
 
11
어떤날 밤 드디어 궁는 법문을 벗어 버렸다.
 
12
당시 창궐한 도적 중에 가장 유명한 자기 기훤(箕萱)과 양길(梁吉) 두 사람 이었다.
 
13
궁예는 먼저 기훤을 찾아갔다. 그러나 기훤은 스스로 자기의 힘을 믿을 뿐 결코 남을 용납할 만한 인물이 못 되었다. 세상에게 대한 무서운 반 항심과 무서운 손아귀 힘을 가진 줄 모르는 기훤은 궁예를 소홀히 대접하였다.
 
14
이 사람을 알아볼 줄 모르는 기훤의 아래서 몇 달을 울분한 생활을 한 나머지 궁예는 기훤을 박차고 양길에게로 돌라붙었다.
 
15
양길은 기훤과 달라 궁예를 후히 대접하고 모든 일을 그와 의논하고 그 의 의견을 듣고야 일을 결정하고 하였다. 다시 말하자면 궁예는 양길에게 돌라붙은 뒤 불출 수일에 양길의 가장 신임하는 사람이 되었다.
 
16
그러나 이때 견훤에게서(참으로 오랫동안 잊어버렸던 친구다) 머리를 버이라 즉 왜 수령 아래 아장(亞將)으로 지내려느냐 하는 조롱을 받는 동시에 견훤은 북원으로 또 사람을 보내서 양길에게 비장(裨將)의 직을 내려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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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되매 인제는 궁예는 옛날의 친구인 견훤의 비장의 부하가 되게 가 되었다.
 
18
성미가 울그락불그락 하는 궁예는 이 조롱이 매우 마음에 거슬리었다.
 
19
"건방지게 !"
 
20
왈칵 결이 난 궁예는 양길의 군사 중에서 눈치보아 자기에게 붙을 만한 자들을 눈여겨 점쳐 두었다. 그리고 양길의 진중에서 차차 궁예파라 하는 것을 비밀리에 조직하여 나아갔다.
 
21
이렇게 지내기를 이 년간― 남의 진중에서 도적질하듯 하는 놀음이라 마음대로 빨리 되지를 않아서 그로부터 이 년을 지나서야 겨우 삼천오백이라는 수효를 얻게가 되었다.
 
22
이미 양길의 신임은 사고 있는 터라 이 세력 유지가 된 뒤에 비로소 양길에게 청하여 명주(溟州)를 공격하자 하였다. 그리고 그 승낙을 얻어 가지고는 자기가 눈여겨 두었던 군졸 삼천오백 명을 인솔하고 즉시로 명주 공격 하려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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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인지경과 같이 명주를 함락시킨 뒤에는 군졸을 나누어 열두 대로 하고 몸소 사졸들과 동고동락하고 약탈을 금하고 인심 수습에 크게 노력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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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미가 괄괄스런 궁예로서는 참기 힘든 일이 많았다. 그러나 일찌기 불문에 적을 두었더니만치 인제 조금이라도 실수를 하면 대사가 틀려나갈 것임을 알고 결을 참고 성을 삭이며 군심과 민심을 꽤 크게 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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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리를 베었다. 견훤의 말마따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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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우기 자기의 이전의 주인은(마음으로 받았던 안 받았건) 한낱 견훤의 비장에 지나지 못하는데 궁예 자기는 그 새 애사애민한 덕택으로 자기 사 졸이며 백성들에게 자연히 장군호(號)를 받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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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길은 궁예가 차차 자기를 반하려는 듯한 형세를 보고 연하여 궁예에게 돌아오기를 명하고 이 명에 복종치 않으매 노염을 내어 책망하고 벌령(罰令)까지 내렸다.
 
 
28
그러나 인제는 훨씬 세력이 더한 궁예는 양길 따위는 손톱눈같이도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군사를 움직이어 철원 금성(鐵圓金城) 등 십여 성을 격파 하였다.
 
29
신라의 영역 중 구백제에 속하는 자는 나날이 견훤에게 잠식되어 들어가는 일면 옛날 고구려의 남방 일대는 차차 궁예에게 잠식되어 궁예의 세력은 차차 패서도(浿西道)로도 벋어 나아가서 지금의 신라 영역은 옛날 삼국 정립 시 대의 신라보다도 약간 부족하게 되었다.
 
30
이 궁예의 막하 가운데 송악(松岳) 사람으로 왕륭(王隆)이라는 사람이 있었다. 적절히 말하자면 신라가 이미 고구려를 없이하였으나 송악 이북은 신라의 왕위(王威)가 및지 못하여 제 멋 제 재간대로 그 지방의 세력가가 스스로 서서 성주(城主) 혹은 도독(都督)을 자칭하던 중 왕륭도 또한 그런 사람의 하나이었다. 이 왕륭은 궁예의 세력이 차차 벋어오자 자기의 힘으로는 궁예를 도저히 대적 못할 것을 알아채고 손빨리 송악을 들어서 궁예에게 바친 것이었다. 궁는 이것을 고맙게 본다는 뜻으로 왕륭의 맏아들 왕건(王建)을 송악의 성주(城主)로 삼고 성을 쌓게 하고 백성을 다스리게 하였다.
 
31
왕건의 나이는 그때 갓 스무 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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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건의 아버지 왕륭은 또한 금성태수(金城太守)를 봉하였다.
 
33
신라의 여왕은 이 어지러워 가고 바야흐로 쓰러져 가는 사직(社稷)에 자포자기가 되어 더욱 술을 부르고 더욱 황음한 행동을 거듭하였다. 이 여왕에게 있어서 잊히지 않는 사내가 둘이 있었다. 하나는 이 여왕이 왕매(王妹) 시대에 아낌없이 자기의 처녀를 내어맡긴 당년의 재상 위홍(魏弘)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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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홍은 이미 죽은 사람이니 아무리 잊히지 않는다 할지라도 무가내하한 일 이었다.
 
35
또 한 개의 사내는 지금 한창 무명국의 무명왕으로서 나날이 세력이 높아가는 견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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견훤은 말하자면 지금 이 여왕이 통어하는 국가에 대하여는 커다란 원수이요 무서운 협위였다. 그러나 여왕은 조금도 견훤이 원수같지 않고 한 개 여인으로서 지극히 사모하는 한 사내일 뿐이였다. 이것은 차마 여왕으로서 입밖에 낼 수가 없어서 내지 못하고 있는 일이지만 무명국 무명왕을 호 하는 견훤으로서 염치 걷어치우고 신라에게 두 나라의 합병을 요구한다치면 여왕은 도리어 그를 승낙하고 두 나라이 합친 이 새 나라에 ' 왕’ 과 ' 왕비’ 의 자격으로서 견훤과 함께 지내고 싶었다.
 
37
밉지 않은 사람을 원수로 보아야 하고 또 원수로 대하기 때문에 나날이 병력적(兵力的) 협위까지 느끼지 않으면 안 되는 지금의 입장이 괴롭고 썼다.
 
38
한 개 여인으로서 고통과 한 나라의 임금으로서의 고통― 이것은 그에게 있어서는 과도한 것이었다. 재위 십 년간 술과 사내 희롱으로 일삼는 이 임금의 행동은 남이 얼른 보기에는 호화롭고 인간으로서의 열락은 한 없었 으리라고 치기 쉬우나 사실에 있어서는 나날이 늘어 가는 고통을 나날이 끄기 위하여 하는 것이지 결코 열락을 위하여서가 아니었다.
 
39
이런 괴로운 가운데서 위에 있기 십 년간― 날이 가면 갈수록 더욱더 커가는 고통에 드디어 견딜 수 없어 그는 자기의 조카 되는 요(嶢― 헌강왕의 서자)에게 위를 전하고 자기는 은퇴하여 임금으로서의 번민만은 벗어 버렸다. 견훤이 무명국 왕을 호(號)한 지 육 년째 되는 해였다.
 
40
유월에 여왕이 은퇴하고 새 임금이 등극한 그 벽두― 칠월에 궁예는 패서도(浿西道)와 한산주(漢山州) 관내의 삼십여 성을 또 집어삼켰다.
 
41
이 주인 없는 모든 성은 궁예의 군사가 이르면 싸우지 않고 성문을 넓게 열어 맞고 하였다.
 
42
궁예의 옛날 상관(上官)인 양길(梁吉)은 아직도 궁예를 자기의 막하 쯤으로 여기고 있었는데 궁예는 제 뜻만으로 사면으로 영지를 개척하여 나아가는것이 괘씸하여 글로 책망하고 말로 책망하다 못해서 마지막에는 군사를 들어 궁예를 토벌하여 보았으나 이것은 도리어 자기의 무력함만 드러내고 자기의 멸망만 재촉하는 데 지나지 못하였다.
 
43
이러한 일이 있은 뒤에 궁예는 송악군으로 도읍을 옮겼다.
【원문】궁예(弓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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